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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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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아미르국
إمارة غرﻧﺎﻃﺔ

Imārat Ġarnāṭah
파일:Royal_Standard_of_Nasrid_Dynasty_Kingdom_of_Grenade.svg 파일:Coat_of_Arms_of_Nasrid_Granada_(modern_emblazonment).svg
국기 국장
파일:Reino_de_Granada.svg
영토
1232년 ~ 1492년
아랍어 إمارة غرﻧﺎﻃﺔ (Imarat Gharnāṭah)
스페인어 Reino Nazarí de Granada
위치 스페인 안달루시아
수도 그라나다
국가원수 아미르 / 술탄
주요 군주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1232~1273)
언어 아랍어, 모사라베어, 라디노어
인종 아랍인, 모사라베, 세파르딤
종교 이슬람( 수니파)
성립 이전 무와히드 왕조
멸망 이후 그라나다 왕국
1. 개요2. 역사
2.1. 건국2.2. 세우타 공방전2.3. 카스티야와의 전쟁2.4. 지중해와 사하라 무역로2.5. 화약 무기의 유럽 도입2.6. 그라나다의 함락2.7. 멸망 후 무어인들의 운명
3. 역대 술탄4. 각종 매체에서의 나스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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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남부에 있던 옛 국가.(1232년~1492년)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왕조. 흔히 그라나다 토후국 또는 그라나다 술탄국 등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수도는 그라나다였고 그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을 왕궁으로 삼고 있었다.[1] 나스르 왕조가 존재하는 동안 그라나다는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2. 역사

왕실인 바누 나스르는 바누 알-아흐마르로도 불린다. 그라나다 출신 역사가 이븐 알 카팁에 의하면 그들은 카즈라즈 부족 출신의 사하바 사드 이븐 우바다의 후손으로, 안달루스 이주 후 아르주나의 농부로 정착했다 한다. 나스르 왕조는 창건자 무함마드 1세의 조부 나스르에서 유래되었다.

2.1. 건국

1230년대 기독교 세력들의 레콩키스타가 한창인 가운데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 ( 무함마드 1세)가 카스티야에 신속(臣屬)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라나다에 나스르 왕조를 창건하고 그라나다 아미르국을 건국했다. 무함마드 1세는 카스티야에 맞서 싸우기도 했으나 몇차례 승패를 주고받은 후 결국 카스티야에 복속하여 안정을 유지하는 방책을 택하였다.

이후 나스르 왕조는 약 250년간 근근이 명맥을 이었다. 나스르 왕조는 생존을 위해 사하라 교역로에서 운반되는 금을 카스티야의 왕에게 바쳐야 했다. 또한 나스르 왕조는 1248년 카스티야의 세비야 공격, 1262년 니에블라 공격 때 카스티야 편으로 참전해야 했다.

2.2. 세우타 공방전

그라나다는 1306년 세우타를 점령하였으나 아라곤 연합왕국의 지원을 받은 마린 왕조에 의해 1309년 세우타를 잃었다. 다음해인 1310년에 그라나다는 세우타를 다시 점령하였으나, 1314년에 또다시 잃었다. 그라나다는 1315~1327년에 다시 세우타를 점거했고 1384년 또 다시 세우타를 점령했으나, 1386년 마린 왕조와의 전투에서 완패하여 세우타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1411년에는 마린 조가 역으로 지브롤터를 점령했으나 이듬해 수복하였고, 이후 내전에 돌입한 마린 조는 1415년 포르투갈에 세우타를 잃었다. 그후 그라나다는 마린 조의 세우타 수복을 도왔으나 실패하였다.

2.3. 카스티야와의 전쟁

나스르 왕조와 카스티야가 늘 평화상태였던건 아니다. 카스티야는 완전한 레콩키스타를 위해 나스르 왕조의 영토를 조금씩 탈취해갔다. 1330년 카스티야와의 테바 전투에서 패배해 영토를 빼앗긴 나스르 왕조는 마린 왕조의 알 안달루스 침공을 지지하였으나, 마린 왕조의 침공은 실패하였다. 14세기 후반 무함마드 5세부터 나스르 술탄들은 카스티야와의 전쟁을 삼가고 평화를 유지하며 문화적 번성을 누렸다. 다만 15세기 초엽 무함마드 7세 때부터 양측의 대립은 재개되었고, 서부의 요충지 자하라 델라 시에라와 안테쿠에라를 상실하였다.

15세기 중엽에는 카스티야와 나스르 왕조 모두가 내전에 돌입하며 전쟁은 점차 줄었다가, 1462년 카스티야 군이 지브롤터와 아르히도니아를 점령하며 공세를 재개하였다. 전술에 있어 나스르 왕조는 안달루스 남부의 시에라네바다 산악 지역의 험지에 여러 성채를 쌓고 버티며 게릴라전을 펴는 수성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는 수차례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중무장한 기사들을 앞세운 카스티야 군과 정면 충돌할 시에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깨달았기에 회전을 기피한 것이다. 카스티야는 산간 지방에 도로를 놓고, 보조병을 통해 안달루스의 농경지를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맞섰다.

외교적으로 나스르 왕조는 아라곤이 카스티야와 대립할 때에는 아라곤을 지원하였다. 이는 카스티야와 달리 아라곤과는 13세기 중반 이래로 국경을 맞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라곤 역시 대부분의 경우 카스티야와 친선을 유지했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15세기 초엽 그라나다는 같은 소국 신세였던 이베리아 반도 북쪽의 나바라 왕국과 실질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다만 이 역시 이베리아 반도를 빙 돌아야 하는 거리의 문제 때문에 제대로 협력하기 어려웠다. 15세기 말엽 기준 그라나다 군은 4천에 불과한 병력으로 1-2만의 카스티야 군에 맞서야 했다.[2]

2.4. 지중해와 사하라 무역로

파일:alhambra-967024_960_720.jpg
안달루스에서 '도시의 여왕'이라 불린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그라나다는 지중해 무역로와 사하라 무역로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덕분에 나스르 왕조의 통치기간동안 그라나다는 번성하여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중 하나가 되었다. 그라나다의 외항인 말라가의 경우에도 실크로드의 서쪽 종착점으로써 비단과 도자기 등이 거래되었고, 제노바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15세기 사하라 이남까지 직항로를 개척하자 그라나다는 교역 중계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 이러한 경제 위기와 함께 1479년에는 카스티야 아라곤이 결혼 동맹으로 동군연합을 형성하자 기독교 세력의 이베리아 통일 열망이 증폭되면서 이들의 창끝이 그라나다로 향하기 시작했고, 교황 역시 십자군 세를 걷어 지원하였다.

2.5. 화약 무기의 유럽 도입

그라나다는 서유럽에 있어 이슬람 문명권과 교차로 역할을 하였다. 이븐 시나의 철학은 물론 과학 분야에서도 많은 교류가 있었고, 그중에 특기할 만한 점은 화학 무기의 전래였다. 화약무기 자체는 13세기 말엽 그라나다에 전래되었고, 카스티야나 아라곤 등지에도 유립된 것으로 보인다. 1324-25년 이스마일 1세는 대포를 앞세워 카스티야의 변경 요새들을 여럿 함락하였는데, 이는 유럽 대륙에서 화약 무기가 쓰인 최초의 사례로 평가된다. 1367년 이베리아 반도 북단의 나바라 왕국은 무슬림 전문가를 고용하여 포병을 양성하였고, 카스티야나 아라곤도 마찬가지였다 한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서유럽 기독교권은 빠르게 화약 무기의 효용성을 자각하여 기술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고, 이는 백년전쟁 도중 특히 두드러져 14세기 말에 의하면 카스티야나 프랑스의 화포는 그라나다의 기술력을 뛰어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1480년대 그라나다 멸망전 당시 스페인 군은 대포를 통한 폭격으로 론다를 손쉽게 함락하였다. 1494년 기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에는 179문의 대포가 있었다 한다. 결국 그라나다가 도입한 대포는 역으로 왕국의 멸망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다만 그라나다 시를 온전히 점령하고 싶었던 가톨릭 국왕 부부는 그라나다 포위 당시 화포 사용을 금하였다.

2.6. 그라나다의 함락

1470년대 카스티야-포르투갈 전쟁을 틈타 술탄 아불 하산 알리 빈 사드는 1477년 카스티야에 대한 복속을 철회하였다. 이에 1478년 카스티야 사절단이 그라나다에 당도하여 조공을 요구했으나 알리는 이를 거부하였고, 영토 수복을 위해 1481년 12월에 변경도시 자하라 델라 시에라를 점령해 주민들을 살해 혹은 사로잡았다. 이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에게 있어 개전의 명분이 되었다.

1482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은 그라나다 토후국의 동서를 잇는 요충지 알하마 데 그라나다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이것이 그라나다 전쟁의 시작이였다. 나스르 왕조는 꽤 오래 버텼으나, 왕위 문제로 무려 3차례의 내전을 벌이며 자멸하였다. 특히 1482년 무함마드 12세가 부친 알리의 출정을 틈타 찬탈하며 시작된 내전은 후일 아랍 역사가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이어진 내전을 틈타 연합군은 1485년 론다, 1487년 말라가, 1489년 알메리아를 점령한 후 1491년 그라나다를 포위하였다. 7개월 간의 항전 끝에 무함마드 12세는 그해 11월 25일, 무슬림들의 자치를 약속하는 조건의 항복을 골자로 하는 그라나다 조약에 서명하였다. 조약에서 주어진 2달의 유예 기간이 지난 후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는 항복하였고 무함마드 12세는 퇴위하여 영지로 주어진 알푸하라로 향하였다. 이로써 10여년간 지속된 전쟁 끝에 그라나다 국은 카스티야에 병합되었고, 동시에 8세기 초엽부터 15세기 말까지 지속되던 이슬람의 이베리아 지배가 종식되었다. 이슬람 세력은 마침내 북아프리카로 물러났으며, 다시는 안달루스를 되찾지 못했다.

2.7. 멸망 후 무어인들의 운명

무함마드 12세는 항복 후 1493년 와타스 왕조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냈다. 안달루스의 40만 무슬림들 중 절반은 남았고, 절반은 마그레브로 향하였다. 남은 20만은 무데하르라 불리며 1491년 그라나다 조약에 따라 스페인 국왕에 복속하는 대신 종교, 사법에 있어 자치를 허가받았다. 그라나다 서부의 알바이신과 알푸하라스, 알메리아, 바자 등지는 무슬림 다수 지역으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500년부터 가톨릭 국왕 부부는 이들 지역에서의 선교를 통해 사실상 강제 개종에 나섰고, 1501년 그에 반발하는 알푸하라스 반란이 벌어지자 3개월 간의 초토화 작전 끝에 강경 진압하였다. 그해 10월 그라나다의 플라자 데 밥 람블라에서는 이슬람 서적들의 화형식이 열렸다.

이후 무데하르들은 세례 (개종) 혹은 추방의 선택지에 놓였고, 자치권이 있던 아라곤이나 발렌시아에서도 1520년대에 이르면 무슬림들에 대한 강제 개종과 추방이 이루어졌다. 신 기독교도 무어인 혹은 모리스코라 불린 개종자들은 명실상부한 기독교도였음에도 펠리페 2세 시기에 들어 의심을 받아 재차 거센 탄압에 시달렸고, 이는 1568-71년 아벤 후마야 (이븐 우마이야)가 이끈 2차 알푸하라스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후 모리스코 인구의 절반은 스페인 각지로 강제 이주되었다가, 1609-14년에는 그마저도 안심할 수 없었는지 30만에 달하는 모리스코 (당시 스페인 인구의 4%)가 추방되었다. ( 모리스코 추방) 비록 그중 5만 가량은 이후 귀환하였지만, 1729년의 박해 이후로 스페인 내에서 안달루스 정체성은 완전 소멸하게 되었다.

3. 역대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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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톨레도 출신 기독교인 화가가 초빙되어 그린 나스르 왕조 술탄 10명
술탄 명 재위 비고
무함마드 1세 1232~1273 초대
무함마드 2세 1273~1302 2대
무함마드 3세 1302~1309 3대
나스르 1309~1314 4대
이스마일 1세 1314~1325 5대
무함마드 4세 1325~1333 6대
유수프 1세 1333~1354 7대
무함마드 5세 1354~1359 8대
이스마일 2세 1359~1360 9대
무함마드 6세 1360~1362 10대
무함마드 5세 1362~1391 복위
유수프 2세 1391~1392 11대
무함마드 7세 1392~1408 12대
유수프 3세 1408~1417 13대
무함마드 8세 1417~1419 14대
무함마드 9세 1419~1427 15대
무함마드 8세 1427~1429 복위
무함마드 9세 1429~1431 1차 복위
유수프 4세 1431~1432 16대
무함마드 9세 1432~1445 2차 복위
무함마드 10세 1445 17대
유수프 5세 1445~1446 18대
무함마드 10세 1446~1448 복위
무함마드 9세 1448~1453 3차 복위
무함마드 11세 1453~1454 19대
아부 나스르 사드 1454~1462 20대
유수프 5세 1462~1463 복위
아부 나스르 사드 1463~1464 복위
아불 하산 알리 빈 사드 1464~1482 21대
무함마드 12세 1482~1483 22대
아불 하산 알리 빈 사드 1483~1485 복위
무함마드 13세 1485~1486 23대
무함마드 12세 1486~1492 복위

4. 각종 매체에서의 나스르 왕조


[1] 본디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왕조들은 코르도바를 중심지로 했다. [2] 그러한 상태에서 작은 병력마저 내전으로 인해 양분된 상태에서 10여년간 3배가 넘는 스페인 군에 맞설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자연 지물을 이용하여 수세기간 준비되어 온 그라나다 방어선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