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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

명량 대첩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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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 소속 <colbgcolor=#fff,#1c1d1f>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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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시전부락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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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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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1592년 <colcolor=#f0ad73,white>
음력
4월
부산진 전투[日] · 다대포진성 전투[日] · 동래성 전투[日] · 김해성 전투[日] · 경상도 방어선 · 상주 전투[日] · 충주 탄금대 전투[日]
5월
한강 전투[日] · 기강 전투[朝] · 제1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 · 옥포 해전[朝]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朝] · 해유령 전투[朝] · 임진강 전투[日] · 정암진 전투[朝] · 사천 해전[朝]
6월
당포 해전[朝] · 제1차 당항포 해전[朝] · 용인 전투[日] · 무계 전투[日] · 율포 해전[朝] · 금화 전투[日] · 제1차 평양성 전투[日]
7월
웅치 전투[日] · 안덕원 전투[朝] · 전주성 전투[朝] · 이치 전투[朝] · 한산도 대첩[朝] · 제1차 금산 전투[日] · 안골포 해전[朝] · 우척현 전투[朝] · 제2차 평양성 전투[日] · 삭녕 전투[日] · 해정창 전투[日] · 영천성 전투[朝] · 지례 전투[朝]
8월
제3차 평양성 전투[日] · 청주 전투[朝] · 제1차 경주 전투[日] · 제2차 금산 전투[日] · 영원산성 전투[日] · 장림포 해전[朝]
9월
부산포 해전[朝] · 연안성 전투[朝] · 제2차 경주 전투[朝] · 북관대첩[朝] · 노현 전투[日] · 창원성 전투[日]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朝]
12월
길주성 전투[朝] · 독성산성 전투[朝]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3년
1월
제4차 평양성 전투[朝明] · 수원 전투[朝] · 성주성 전투[朝] · 벽제관 전투[日]
2월
웅포 해전[朝] · 죽주 전투/상주 전투[朝] · 행주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전선 고착화 및 국지전 시기, 정유재란 (일본군 대규모 재상륙)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日]
1594년
3월
제2차 당항포 해전[朝]
7월
거제도 진공작전[朝]
1597년
2월
부산 진공작전[朝]
3월
기문포 해전[朝]
6월
가덕도 해전[朝]
7월
칠천량 해전[日]
일본군 진격 시기
1597년
8월
고령 전투[朝] · 남원 전투[日] · 황석산성 전투[日] · 어란포 해전[朝]
9월
벽파진 해전[朝] · 직산 전투[明] · 명량 해전[朝] · 제1차 석주관 전투[日]
사로병진책,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7년
11월
제2차 석주관 전투[日]
12월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明] · 제1차 울산성 전투[日]
1598년
7월
절이도 해전[朝明]
9월
사천성 전투[日] · 제2차 울산성 전투[朝明] · 왜교성 전투[日]
11월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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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
鳴梁 海戰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597년 (선조 30년) 10월 26일 ( 그레고리력)
1597년 9월 16일 ( 음력)
장소

조선 전라도 해남 진도 사이 명량수도
(세칭 울돌목)
원인 조선 수군을 섬멸하고 제해권을 장악한 후 수륙병진을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왜군의 진격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일본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지휘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도도 다카토라 (대장군)
참전자

파일:조선 어기.svg 김응함 (미조항 첨사 중군장)
파일:조선 어기.svg 조계종 (영등포 만호 척후장)
파일:조선 어기.svg 우수 (안골포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안위 (거제 현령)
파일:조선 어기.svg 정응두 (평산포 대장)
파일:조선 어기.svg 김억추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파일:조선 어기.svg 배흥립 (조방장)
파일:조선 어기.svg 민정붕 (회령포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소계남 (발포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송여종 (녹도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나대용 (금구 현령)
파일:조선 어기.svg 이응표 (가리포 첨사)
파일:조선 어기.svg 류형 (해남 현감)
참전자

파일:이나바 가몬.svg 구루시마 미치후사
파일:와키자카 가문 문장.svg 와키자카 야스하루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간 마사카게
파일:모리 와카쓰키 가몬.svg 모리 다카마사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하타 치카시 (추정)
하치스카 이에마사
병력 조선군: 800명~900명[1]
조선 전선: 45척
- 판옥선: 13척
- 초탐선(협선): 32척
일본군: 수천 명 ↑[2]
일본전선: 333척 ↑
- 세키부네: 133척
- 후방: 200척 ↑[3]
피해 사상자: 13명 ↑
- 전사자: 10명[4]
- 부상자: 3명
- 그 외 불명[5]
31척 침몰 (난중일기)
100척 ↑ 침몰 (소 요시토시 보고)
반파된 전선 100여 척
도도 다카토라 휘하 군사 절반 사상[6]
결과 조선의 승리
영향 일본 수군의 진격 좌절[7]
보급 차단으로 일본 육군 전면 후퇴[8]

1. 개요2. 요약3. 의의4. 배경
4.1. 칠천량 해전에서의 수군 궤멸과 이순신의 석방4.2. 조선 수군 재건 및 전투 준비
5. 양측의 전력
5.1. 조선 수군 규모5.2. 일본 수군 규모
6. 전개
6.1. 전투 시작6.2. 전투 초중반6.3. 승리
7. 전과8. 전투 이후
8.1. 조선 수군의 후퇴와 재건8.2. 반전된 전황
9. 분석
9.1. 이순신의 압도적인 전과9.2. 강렬한 전투의지9.3. 엄정한 군율과 신뢰, 지휘력9.4. 군함 제원상의 우위
9.4.1. 보론: 일본 군함이 커지긴 커졌는데…
9.5. 일본군의 호승심과 촉박한 시간9.6.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물살
10. 명량해전 관련 다른 의견들
10.1. 명량 철쇄설10.2. 거북선 등장?10.3. 일본 측 입장10.4. 기타
11. 미디어 창작물
11.1. 20세기 이전11.2. 21세기 이후
12. 기타

[clearfix]

1. 개요

정유재란 당시였던 1597년( 선조 30) 정유년 9월 16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명량수도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정유재란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은 해전으로서 이 승리로 일본군에게 빼앗긴 제해권을 되찾았으며 망국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냈다. 한산도 대첩, 노량 해전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해전사에서도 길이 빛날 대첩으로 평가된다.

2. 요약

조선 수군 판옥선 13척과 일본군 함대 133척이 맞붙어서 조선 수군이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궤멸시키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대첩이다. 기적과 같은 승리로 끝났음을 역사가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데 종종 이를 믿지 못하고 왜곡된 가설들을 믿는 대중이 있다.[9] 초요기를 올려 거제 현령 안위와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다가오기 전까지, 이순신은 홀로 앞장서서 대장선 1척으로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모든 적선을 향하여 대포를 쏘아 깨부수고 불태우며 버티는 등 극적인 장면이 많다.

일본군은 이 대첩에서 크게 패배하여 전선 중 최소 31척이 침몰되거나 불에 탔다. 이 31척은 이순신이 직접 세어 난중일기에 기록한 것으로, 후퇴는 했으나 파손된 선박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후퇴했고, 이후 정유재란 내내 육군에게 해상로를 통해 물자를 보급하여 정비한 후 한양을 점령하고 삼남을 정벌하겠다는 기존 전략이 완전히 무산되었다.[10]

랑(朗) 해전이라고 그릇되게 표기하는 일이 많다. 명량(梁) 해전이 올바른 표기다. '명'자도 '밝을 명'(明)이 아니라 '울다 명'(鳴)이다. 명량의 순우리말이 널리 알려진 울돌목인데, 명량은 우리말 지명의 뜻을 한문으로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다. 한자로 울 명자에 들보 량자를 썼다. 노량, 견내량 등에도 쓰이는 梁은 제방 등 좁은 수로를 표현하는 데에 쓰인다.

3. 의의

명량 해전은 단순하게 소수의 전선으로 적의 대함대를 막아낸 전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모든 전투 중 조선의 존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격전으로서 단 한 번의 승전으로 조선의 패망을 막아내고 일본의 작전을 기초단계부터 꼬이게 만들어 버린 커다란 승전이였다.

그런데 이런 전술적, 전략적 양면에서 모두 완벽한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대첩을 묶을 때는 포함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3대 대첩이라 하면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살수대첩, 귀주 대첩, 한산도 대첩 또는 임진왜란으로 범위를 좁혀 행주 대첩, 진주 대첩, 한산도 대첩을 말한다. 물론 '명량 대첩'으로 부르기도 하나 마이너하다. 그 이유는 서술된 자료가 너무 부족하고 난중일기의 기록만으로는 객관성이 떨어져 이 기적적인 대승을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논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에서 격침한 적선의 수는 난중일기에만 31척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두루뭉술하게만 대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31척을 적선 전체의 비중과 비교해보면 전략적 정의에 따른 전멸이 아니라 진짜 숫적으로 완전 전멸시킨 살수대첩이나 절반 이상을 쓸어버린 귀주 대첩, 한산도 대첩에는 다소 못 미친다. 행주 대첩[11]이나 진주 대첩의 경우에는 적군의 피해 규모는 불명이나 전투 과정이 상세히 전해지기에 전략적 의의도 확실히 연구되었다. 반면 명량 해전은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학자들의 각기 다른 견해들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철쇄설이나 거북선 출현설같은 왜곡된 가설도 대중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만약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조선은 9할 이상의 확률로 정유재란에서 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조선은 길이 좁고 산세가 험해 각종 조세와 물자 수송은 수로 운송을 선택하고 있었고 따라서 주요 대도시들은 바다로 이어지는 강줄기에 자리잡고 있어 당시 한반도의 주요 대도시들은 전부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12] 만일 이순신이 패배하여 조선 수군이 전멸당했다면 그대로 모든 강을 통해 병력들을 수송해 주요 대도시들과 강변에 자리잡은 요충지들의 성들[13]을 점령한 후 바로 포위망을 형성해 빠르게 선조를 잡았을 것이고 그것은 곧 패배를 뜻한다.

이순신은 이러한 대전략을 모두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큰 전력의 열세와 엄청난 부담감을 가지고도 전투를 강행했던 것이다. 그가 당시 몸도 마음[14]도 엉망진창인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명량 해전의 승리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일궈낸 기적 같은 것이었으며, 패배한 일본군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미온적이고 오만했던 명나라 군에게는 조선의 긍지를 널리 떨친 그 무엇보다도 값진 대첩인 것이다.[15]

레딧에서 전 세계의 역덕들에 의해 이순신이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군지휘관 순위 해군 부문 1위에 랭크되었는데 #, 여기서는 한산도 대첩 대신 명량 해전을 이순신의 가장 위대한 승전으로 랭크하였다. 대첩의 사전적 정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승전의 가치로 따지면 3대 대첩 이상인 대승이었던 것이다.

4. 배경

4.1. 칠천량 해전에서의 수군 궤멸과 이순신의 석방

영화 《 명량》의 오프닝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칠천량에서의 처참한 대패로 인해 조선 수군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물론 함대의 절반 정도는 다른 쪽으로 성공적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긴 했으나 제대로 된 통제 아래에 모여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들이 이렇게 생존을 우선시한 덕분에 이순신의 복직 이후 도망쳤던 수군 병력들이 명량 해전 전후로 재결집하면서 조선 수군이 빠르게 복원되는 데에 보탬이 되었다. [16]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기존 자리였던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사실 선조는 칠천량 해전 이후 대책이 이순신뿐임을 알았지만, 이순신을 싫어한 터라 그의 복직을 내켜하지 않았다. 칠천량 패전이 보고된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문제로 떠들썩했지만 결국 유일한 적임자는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이 언급되자 불쾌하게 여기며 대답 없이 그 자리를 나가버렸고, 결국 남아 있던 대신들이 복직을 결정했다. 나라가 절단날 상황에서도 선조는 이순신을 경계하고 싫어하며 질투하기를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17]

하지만 정작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휘하에 전함 한 척 없이 직함만 있는 통제사였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선조가 이순신을 백의종군 이전의 계급으로 원복시키지 않고 더 낮은 계급으로 임명한 것이다. 통제사라는 보직은 같지만 이순신 개인의 계급은 오히려 하락했다.[18] 휘하 수군 절도사들과 계급이 비슷해지는 바람에 아랫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극상을 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칠천량 패전 이후 위태로운 형세에서는 수군 절도사라도 하극상은커녕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지라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안 하고 뒤에서 팔짱을 끼며 구경만 하던 명군까지 선조의 결정을 얼토당토않게 여겼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결전이 목전에 닥친 마당에 지휘계통을 어지럽힘은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냐고 비난했다. 그래서 계급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역시 영감으로 백의종군 이전보다는 낮았다. 원래는 정2품 대감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런 푸대접도 개의치 않았다.[19] 이순신은 조정에서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이미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날부터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머무르던 초계[20]를 박차고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장병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들을 입수했다. 다행히 칠천량 해전 이후 곧바로 밀려들 것만 같았던 일본 수군이 남해안 장악 등에 신경 쓰다가 8월에는 해상 작전에서 철수한 덕분에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일본군이 처음부터 원균을 무찌른 후 진군한다는 전략을 세웠다면 미리 진군 준비를 철저히 해놓았을 텐데, 일본군 입장에서도 칠천량 해전의 승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였기 때문에 오히려 진군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21]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셈. 이때 이순신의 바쁜 행적은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파일:attachment/beforeMyeongryang.jpg
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22]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7월 19일, 단성에서 숙박.

7월 20일, 진주 굴동에서 이희만의 집에 숙박.

7월 21일, 곤양을 지나 노량에 도착, 거제 현령 안위 등 패잔병을 수습. 거제현 소속 배 위에서 숙박.

7월 22일, 경상 수사 배설이 합류. 곤양에서 숙박.

7월 23일, 진주 굴동으로 돌아와 이희만의 집에 숙박. 배흥립이 합류.

7월 24일, 이홍훈의 집에 숙박. 배경남이 합류.

7월 27일, 손경례의 집에 숙박.
이후 이순신은 한동안 진주 굴동에 머무르다가 8월 3일 아침에 비로소 자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를 받았다. 조정에서 22일에 칠천량 해전의 소식을 접하고 내린 교서가 열흘이 지나 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단지 이순신을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통제사로, 권준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삼도 통제사 복직 교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保障)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禍)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大軍)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적들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초미(焦眉)의 위급함이 조석(朝夕)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대책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창 덤벼들던 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위엄과 은혜와 지혜와 재능에 있어서 평소에 안팎으로 존경을 받던 이가 아니고는 이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생각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水使)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 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謨策)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而尙致今日何敗言戰哉之辱也, 尙何言哉! 尙何言哉!)

이제 특히 그대를 상복(黑衰) 중에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白衣)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수사(水使) 이하 모두 그대가 지휘하고 통제하되 만약 일에 임하여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 군법대로 처단하도록 하라. 그대가 나라를 위해 몸을 잊고 기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남은 이미 그대의 능력을 다 시험해 보아서 알고 있는 바이니, 내 어찌 감히 많은 말을 보태겠는가. 아! 저 육항(孫陸抗)[23]이 국경의 강 언덕 고을을 두 번째 맡아서 변방의 군사 임무를 완수했으며, 저 왕손(王遜)[24]이 죄인의 몸으로 적을 소탕한 공로를 세웠던 것처럼, 그대는 충의(忠義)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교서(敎書)를 내리는 것이니 생각하여 잘 알지어다.
『이충무공전서』, 「상중에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파격이다. 요약하자면 '내가 모자라 네 관직을 빼앗고 너에게 벌을 줬다. 미안함에 할 말이 없다.'고 한 것이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임금이 신하에게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한 사례는 없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모친상을 당해 3년상 중이었다. 양반의 3년상 중에는 관직을 제수하지 않음이 불문율이었다. 3년상을 이유로 신하가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럴 경우에는 딱히 관직을 강요할 방법이 없었다.[25] 게다가 이순신의 모친이 사망한 원인도 반은 선조가 제공했던지라, 이순신이 3년상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에 조정은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조와 이순신 모두 그만큼 사직의 존망이 위태로운 줄 알았기에 수군 없는 수군 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복직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하지만 선조는 전술했듯이 이 와중에도 품계를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파직당하기 전 이순신 장군의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였으나 이때 돌려준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으로 일반 수사와 품계가 같다. 현대 해군으로 가정하면 해군참모총장에게 함대사령관과 같은 소장 계급을 달게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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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새벽에 복직 교서가 도착. 권관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

8월 4일, 곡성에서 숙박.

8월 5일, 옥과에 도착.

8월 6일, 옥과에서 숙박. 송대립 등이 일본군을 정탐.

8월 7일, 순천으로 가던 중 패잔병으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활과 화살을 탈취. 곡성 강정에서 숙박.

8월 8일, 순천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수령들을 잡고 방치된 군기를 처리. 순천에서 숙박.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 조양창에 도착, 이 과정에서 순천 부사 우치적이 합류. 김안도의 집에 숙박.

8월 11일, 임란 초부터 보좌해왔던 송희립이 최대성과 함께 합류.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8월 14일, 장계 일곱 통을 송부. 보성에 도착, 열선루에서 숙박.

8월 15일, 교지가 도착. 보성의 군기를 처리.

8월 16일, 보성 군수와 군관 등을 보내 피난했던 관리들을 데려옴, 궁장인 지이와 태귀상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과 김붕만 등도 합류.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그나마 구색만 갖추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때 배는 모두 합쳐도 판옥선 13척에 초탐선 32척이 전부다. 명량 해전 당시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330척에 이르던 일본군과는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열세였다.
근래 또 배신(陪臣) 겸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0일자 5번째 기사
비록 일본 수군의 주력인 세키부네들이 조선 수군의 판옥선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고는 하지만 전쟁에서는 숫자 앞에는 장사가 없음이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왜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133척은 바다를 새까맣게 덮었다는 백성들의 증언과 다르기 때문에 선발대의 규모가 133척이었다고 추정한다.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안에서 당장이라도 왜선 수백 척이 들이닥치리란 공포가 만연했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조선 수군은 싸움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정에서는 배도 없는데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합치자는 의견까지 나왔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 했다고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선조실록과 난중일기가 아닌 행록에만 등장하지만, 이토록 전력이 기울어졌으니 전략을 수정하더라도 무리는 아니었다. 중신들은 당파를 불문하고 이미 잔존한 조선 수군에게 희망을 잃은 채였다. 윤두수는 전선이 남았더라도 수졸이 없어서 전선을 운영하기 힘들 테니, 당분간은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수사들이 관할 해역을 방어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남은 전선을 강화도로 모아 방어하자고 제안했는데, 두 사람 다 모두 하삼도 수운 방어를 포기하자는 것이었다.[26]

물론 이는 사실상 국가를 버리는 대실책이었다. 조선은 지형적, 외세적 조건[27]으로 강을 길로 삼아서 물자와 인원을 유통했고, 실제로 행주 대첩에서도 적절한 순간에 한강을 통한 보급이 들어와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당연히 육상전은 일본군이 바라는 일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바다를 포기하고 육전에 임했거나 이순신이 지금까지 틀어막던 서해, 남해가 뚫리면 일본 수군을 이끌던 도도 다카토라, 가메이 고레노리,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키 요시다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적장들이 강화,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여 선조를 잡고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수도 있었다.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28]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이러한 조정의 여론 동요를 이순신은 위의 유명한 어록으로 잠재웠다. 이순신 역시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고 해도 제해권이 있어야 왜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순신의 이런 뚝심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다.[29] 전쟁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과 아군 및 적군의 압도적 전력 차이를 뒤집을 수 있는 숨은 요소들, 이를 바탕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필승의 신념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가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패기였던 셈이다.

4.2. 조선 수군 재건 및 전투 준비

사흘 동안 회령포에 머무르면서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8월 20일에 그보다 조금 더 큰 이진포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수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칠천량에서 겪은 패배로 장졸[30]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일본군의 대함대가 임박했다는 공포가 군사들을 짓눌렀다. 이순신의 묘사에 따르면 경상 우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기를 거부하는 등 공공연히 조정과 전쟁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었고[31]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사람됨이 미덥지 못했다.[32] 설상가상으로 이순신 본인도 21일부터 토사곽란으로 사흘 내내 몸져누웠다.[33] 그런 와중에도 다음 날에는 어란진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해서 군율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정유일기』 8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 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정유일기』 8월 28일.
28일에 어란진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작 수색대 8척이었지만, 조선 수군은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어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수색대를 물리친 후[34] 이순신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마침내 고위 지휘관인 경상 우수사 배설이 도주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순신은 이전부터 배설을 탐탁치 않게 보았으므로 단지 "배설이 달아났다."라고만 담담하게 적었다.[35] 이렇게 이순신이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 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자신감으로 이번 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의 승기를 잡자는 생각이었다.

일본 수군은 9월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9월 7일에 어란진으로 들어와서 벽파진의 이순신과 대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를 조롱하듯 처음에는 배 13척만 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는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한 번도 격침된 적이 없지만 수전에서 이토록 일본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 거의 최초임을 감안하면 일본군은 한 척의 대장선을 상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낙관한 것으로 보인다.[36]

배설이 도주한 이후의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9월 3일, 비오다.

9월 4일,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5일,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6일,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9월 7일,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 군관 임준영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진에 들어왔다고 보고. 미리 경계하고 있다가 신시(申時)에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구축, 이후로도 야습을 경계하다가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뭇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

9월 8일, 맑다. 적선이 오지 않다.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

9월 9일, 맑다. 적선 두 척이 아군을 정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추격하나 놓침.

9월 10일,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남.

9월 11일, 흐리고 비오다.

9월 12일, 비가 내리다.

9월 13일,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즉 맑은 날에는 계속해서 일본 수군이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14일에는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일본군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진에 입항했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의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인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오익창의 사호집에 의하면 이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의 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 탄환은 이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37]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이 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 해남의 전라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정유일기』 9월 15일[38]
이날 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과 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KBS에서 방송했던 한국사전에서는 밤에 이상한 징조도 많았다고 언급했다. 정말로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이순신도 꿈 속에서까지 승리를 바랄 정도로 긴장감을 느꼈다고 봄이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9월 16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5. 양측의 전력

5.1. 조선 수군 규모

기본적으로 선조실록과 충무공의 일기, 그리고 행장에 근거한다.

장수 및 일반 병졸 총합 900여 명가량. 노를 젓는 격군 및 사후선 및 탐망선의 인원을 포함하면 대략 2000여 명가량. 함선은 판옥선 기준 총 13척. 여기에 추가로 각지에서 가담한 마하수나 오극신 등의 의병들도 포함시켜볼 수 있다.

이순신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의 내용 때문에 오해를 할 수가 있는데, 이순신이 저 장계를 쓸 상황에는 배설로부터 인수한 판옥선 12척이었다. 장계를 보낸 이후 전라 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 1척이 더 추가된 것. 그래서 명량 해전 개시 기준으로는 13척이다. 어차피 끝까지 참전 안 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었지만.

5.2. 일본 수군 규모

조선역진법표에 기재된 일본 수군의 규모에 따른다. 화본태합기에는 와키자카가 명량해전에 참전한 것으로 나온다. 가토 요시아키, 간 미치나가는 참전이 불확실하다. 간 미치나가의 아들 간 마사카게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아, 간 미치나가 본인의 참전 여부와는 별개로 그 군대는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방면 좌군 소속 수군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의 전선 수는 난중일기, 선조실록, 행록 등 기록마다 제각각이며, 심지어 난중일기의 기록 조차 3가지 버전마다 다르다.

난중일기에서 하필이면 이해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 일기가 일종의 날짜인 간지가 달라서 다시 쓰는 바람에 두벌이 존재한다. 먼저 쓴 것은 적선의 수를 133척, 우리배가 쳐부순 척수를 30척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뒤에 간지 착오를 바로잡으며 일부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쓴 일기에는 적선 130여 척, 쳐부순 숫자는 31척으로 나온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이 일기의 초서를 알아보기 쉽게 정자(正字)로 탈서(脫草)한 전서본에는 적선을 330여 척이라고 한다. 이충무공전서는 전서본을 따랐기 때문에 역시 330여 척이다.

어찌됐건 초판본에는 전투 초반에 적선 133척이 아군을 에워쌌다고 되어 있어 최소한 전체 수와는 별개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함선은 133척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도 다카토라 측의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과 명량해전 이후 군목인 모리 다카마사의 전투보고서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에는 명량에 돌입한 배들이 관선, 즉 주력부대는 세키부네로 구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20세기 초 일본의 연구 결과(?)와 이충무공전서의 기본이 되는 충무공 가승의 기록에서도 일본 전선 수는 330여 척, 직접 참전한 전선이 133척으로 나온다.[42]

300여 척이 넘어가는 함대를 이끌고도 울돌목에 진입한 배는 133척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후방 함대가 대형 전선 아타케부네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인 듯하다. 좁고 물살이 아주 빠른 울돌목에서 대형전선 하나 컨트롤 하기도 녹록지 않은데 200여 척이 모조리 진입하면 그야말로 대형참사가 날 테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또한 이순신이 의도한 바였다.

해남 어란포에 집결한 왜선은 333척이 맞지만 울돌목에 직접 진입하여 싸운 배는 세키부네 함대 133척이고, 후방의 아타케부네 함대는 울돌목에서 전투가 어려워 밖에서 대기하면서 전방 함대 지원을 도모함과 동시에 세키부네 함대의 승전 소식을 기다렸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를 두고 온전한 330여 척과 벌인 싸움이 아니라고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는 이순신의 전술적 혜안이 빛나는 사례로, 처음부터 30배에 달하는 적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전투 시작 전 분산하게 만들 목적으로 좁은 해협인 울돌목을 격전지로 선정한 것이다. 울돌목의 조건이 없었다면 정말 13척으로 330여 척을 그대로 받아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한 울돌목의 조류가 약해서 후방 함대가 진입하기 괜찮은 조건이라 가정해도 해협 자체가 좁기 때문에 일단 후방 함대는 뒤에서 대기하고 전방 함대부터 순차적으로 조선 수군을 압박하는 식으로 전투가 진행되었을 것임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후술할 영화 명량에서도 어느 정도 표현을 잘 해놓았다.

해전 이후 포로가 된 강항 간양록에 '배로 무안까지 간 자'(舟至務安)라는 표현으로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해안에 나타난 다이묘를 기록하였다. 도도 다카토라와 구루지마 등의 수군들과 함께 육군인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나카가와 히데나리도 언급되어 있으나 이들은 정작 해전 하루 뒤 전라도 정읍에서 작전회의에 참석하므로 휘하에 편성된 수군 부대가 움직인 듯 하다.

결론적으로 전투에 참전한 수군의 규모는 일본측 기록과 보고서에 기재된 순수한 수군 병력은 7200명에 일부 다른 영주들의 함대도 같이 움직였다는 가정하에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지만 명량으로 거대한 함대가 출정했음은 분명하다.

6. 전개

파일:Myeongnyang_battle_map.jpg
명량 해전의 전개도

6.1. 전투 시작

운명의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아침, 날씨는 맑았다. 이윽고 초병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왜선들이 접근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이에 이순신은 좌선[43]을 포함한 13척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나섰다. 이순신은 일기 기록에서 '전투원인 병사들이 왜군 규모를 보고는 겁을 먹어서 얼굴빛이 많이 질렸다고 하였고,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부드럽게 타일렀다.'고 당시 상황을 남겼다.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別望)이 나아와 보고하길, "수없이 많은 적선들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라 하였다. 바로 뭇 전선에 명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0여 척이 아군의 뭇 전선을 에워쌌다.
『정유일기』 9월 16일
울돌목 앞바다에서 참으로 보잘것없는 조선 수군의 잔존 전력과 조우한 왜군 함대는 곧장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자신하듯이 포위진을 짜고 돌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자랑하는 유인섬멸전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돌격해 나아갔다. 사실 본래대로라면 조선 군선들도 이에 맞춰 함께 전진해 나가며 판옥선의 체급과 울둘목의 유리한 지형을 믿고 함께 함대를 구성해 싸워야만 했는데, 아군의 12척이 겁을 먹어 전진하지 않았다. 때문에 함대의 중심이 되어야 할 대장선 혼자 적진으로 돌격하여 활과 포환을 마구 쏘아대고, 대장선을 좌우에서 보좌해야 할 군선들은 멀리서 구경만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 측의 지휘관이던 도도 다카토라는 전투의 시작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すいえん(水淵)と申す所にはん舟(番船)大しやう(大小)分十三そう(艘)い(居)申し候。大川の瀬よりはや(早)きしほ(潮)のさし引き御ざ(座)候所の内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潮のやわらぎ)申し候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舟居)申し候。 それを見附け、是非ともとり申すべきよし、舟手衆と御相談にて、則ち御取懸り成され候。 大舟(安宅船)にてハいまのせと(瀬戸)をこきくたし(漕ぎ下し)候儀ハ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関船)を御そろへ成され、御かゝり成され候」。(『高山公実録』)
스이엔(수연)[44]이라는 곳은 대소 판옥선이 13척 있었다. 큰 강의 하구에서 빠른 물결이 들고 나다가 잠시 물 흐름이 약해진 사이에 13척이 있던 것이다. 이를 발견하고 반드시 무찔러야 한다고 수군들과 논의하여 즉각 돌진했다. 대선(아타케부네)로는 이 좁은 해협 사이로 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판단하여 다들 세키부네로 통일해 전투에 임했다. <고산공실록>

일본 측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함대 13척을 보고 바로 승리를 확신했다는 점, 해협이 좁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고 비교적 작은 세키부네로 갈아탔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명량 해협의 조류에 대해 기록을 따로 남겼다는 것이다. 일본측 지휘부는 드나드는 조류가 몹시 빠른 곳의 물결이 잠시 잦아드는 것을 관측하고, 적의 규모가 작은 것을 보고 지금이야말로 승리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을 내려 지휘부의 합의 하에 세키부네로 환승한 뒤 일제히 돌격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이순신이 노린 대로였다.[45]

6.2. 전투 초중반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이 탄 좌선은 일단 앞으로 전진하며 접근해 오는 왜선들을 족족 격퇴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중과부적인 상황이어서, 심지어 명량 해협이 한눈에 보이는 망금산에서는 백성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몰려오는 왜선들을 좌선이 홀로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하여 통곡을 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적선의 숫자와 해협의 거센 역방향 물살에 압도당한 부하 장수들은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을 품은 채로 후방에서 뭉그적대고 있었으며,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던 이순신은 문득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46]
뭇 장선(將船)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배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정유일기』 9월 16일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수마장 뒤로 물러나서 아예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47] 거제 현령 안위, 녹도 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해남 현감 류형, 가리포 첨사 이응표 등의 장수들까지 후방에서 머뭇거렸다. 맞붙어 봐야 전멸이 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류마저도 왜군에게 유리하게 흘렀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地迫陿, 潮方盛, 水益急, 賊從上流乘潮揜之, 勢若山壓.
명량은 육지 사이가 좁은 데다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몰려 내려오는데 그 세력이 마치 산이 내리누르는 듯하였다.
이민서, 명량대첩비문
이순신이 묘사한 이 역류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는데, 현대의 연구로 당시 조류를 계산한 바에 의하면 전투 개시 후 물살이 아군에게 불리한 오전 내내 좌선 1척이 역류를 받아가며 전투에 임했음이 밝혀졌다.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좌선 1척을 제외한 12척들이 멀찍이 바라보고만 있었으며, 중군장[48] 김응함은 대장선의 신호도 무시했고 안위는 멀리서 주저하고 있었다. 심지어 김억추는 배 한 척을 한 마장까지 뒤로 빼서 이 전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이 초요기를 올려 아군에게 싸우러 오라고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이순신의 좌선은 홀로 울돌목의 거센 역류를 다 받아내면서[49] 물 밀듯이 조류를 타고 밀려들어오는 왜군 선단 수십 척에 맞서 물길을 틀어 막았다는 것이다.[50]

결국 이순신은 호각을 불며 중군영하기[51]와 초요기[52]를 걸어 중군장과 여러 전선들을 소집했다. 물론 평소라면 군령에 불복한 제장들을 군법으로 다스렸겠지만, 이 전투에서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데다 전력 하나하나가 매우 아쉬운 상황이었다. 결국 초요기를 올려 부하들을 부르자 그제서야 장수들이 슬금슬금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중 거제현령 안위가 탄 배가 좌선 근처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이순신은 안위를 향해 외쳤다.
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53]
『정유일기』 9월 16일
이에 안위는 황급히 전장에 뛰어들었고, 이순신은 뒤이어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비슷하게 위와 같이 호통을 쳤다.
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정유일기』 9월 16일

특히 김응함은 중군장으로서 좌선의 호위와 지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이순신의 실질적인 수족이 되어야 하는 최중요 장수였으나, 그마저도 방기하고 후방에 물러나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특별한 함대 편제상 직책이 없는 듯한 안위보다도 늦게 좌선과 합류했으므로 이순신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안위는 수군에 편제되지도 않은 일개 고을 수령에 지나지 않았기에 이순신 입장에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위는 가장 먼저 이순신의 명을 받아 전장에 뛰어든 반면, 김응함은 중군장임에도 더 늦게 합류했으므로 본래는 처벌받아야 마땅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김응함이 도주하지는 않았거니와 당시 전투에선 의미 없는 죽음이 너무나 뻔히 보였으므로, 군법을 엄히 적용함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순신 자신의 말마따나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야 할 필요가 더 컸다.

이렇게 안위와 김응함이 전장에 뛰어들었고, 밀물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자 명량 해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좌선의 위세에 기가 질려있던 일본 수군은 좀 더 상식적인(…) 적을 상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판옥선들이 전투에 끼어들자 옳다구나 하고 그쪽으로 돌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안위의 함선이 왜선 3척에게 포위당해 발이 묶이고 접선을 당했으며 일본 수군의 장기인 백병전 공격을 받고 사상자까지 나오는 상황에 처했다.

이렇게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 만약 조선 수군이 여기서 함선을 1척이라도 잃는다면 단순히 함대가 손실을 겪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되면 일본 수군에게 판옥선을 내줘 전고와 화력의 이점을 잃고, 또한 일본 수군의 사기가 올라 박빙으로 진행되던 전황이 당장 일방적으로 뒤집힐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한 이순신은 즉시 전진하던 좌선을 변침, 선회시켜 안위의 함선에 접선한 왜선 3척을 순식간에 영거리 포격으로 격침시키면서 안위를 구해냈다. 이때가 명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었으며, 그 와중에 산이 찍어누르는 듯한 기세의 물살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6.3. 승리

한편 함대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가 판옥선과 일본 배들의 태생적 차이 때문에 임란 내내 참상을 겪어 온 것을 망각한 일본 수군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일본 측 기록에서는 이 당시 적극적으로 도선 공격을 한 선두의 배들이 대부분 격파되고 병사와 중상급 무사들이 모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낫을 걸고 도선 공격을 가하려던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도도의 측근 도도 카게유(우지카츠)와 도도 마고하치로(타다시게)에게 구조되었다.[54]

이후 물살이 반대로 바뀌어 전황이 조선 수군 측에 크게 유리해졌고, 일본 배들이 역류를 맞으며 그 많은 배들끼리 앞에서 서로 엉키고 서로 부딪치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단체로 패닉과 혼란에 빠진 일본 함대는 이미 목을 가득 채운 상태라 뒤로 돌려서 빠져나가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윽고 정오가 되어 물살의 방향이 바뀌자, 아군의 처절한 분투를 지켜보고 있던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를 필두로 다른 전선들도 일제히 합세하여 왜군 함대를 공격하였고, 비로소 조선수군이 승기를 잡았다.

비록 왜군 함대가 여전히 수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우위였으나, 여태껏 이순신의 판옥선 한 척도 제대로 상대를 못 한 데다 물살이 역방향으로 바뀌어 버렸으므로 기세 좋게 전진하려던 후열의 함선들조차 좁은 해협에 밀집된 채로 거의 멈춘 채 물살에 떠밀리며 격파되는 배와 조선 수군에게 격침되는 배가 뒤섞였다.
降倭俊沙者、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在於我船上俯視曰:「着畫文紅錦衣者、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吾使金石孫鉤上船頭、則俊沙踴躍曰:「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賊氣大挫。
항왜 준사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였는데, 이때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굽어보며 말하기를
"저기 무늬가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 안골 진영의 적장 마다시(馬多時)[55]입니다!"
하였다. 나는 김돌손[56]을 시켜서 갈고리로 그 자를 뱃머리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준사가 보곤 펄쩍펄쩍 뛰더니
"맞습니다! 마다시입니다!"
하는 고로 즉시 목을 베었고 이에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9월 16일

오후 1시경이 되자, 완전히 조수가 바뀌어 물살이 역으로 빨라지면서 왜군 함대는 전장에서의 공세능력을 모조리 상실하고 패닉에 빠져 지휘통제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판옥선이 강한 물살을 타며 포격을 계속하자, 그나마 멀쩡하던 일본 수군의 함선들도 우왕좌왕하다가 순식간에 격파되기 시작했다. 후방에 있던 함대 사령관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대장선이 격파되고 구루지마 또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수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가 화살에 맞고 2군데 부상을 입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 수군의 패배를 확인하라고 파견한 중앙감찰관 모리 다카마사는 선두에서 도선 공격을 가하다가 빗발치는 포환과 화살을 못 이기고 바다로 뛰어들어 간신히 구조되었다.

일본 수군은 이 과정에서 추가로 격침된 전함만 11척에 달했으며, 결국 5시경 왜 수군의 잔여 함선들이 도주함에 따라 전투는 종료되었다. 조선 수군 또한 전장을 수습한 뒤 당사도로 일시 후퇴하였다.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이 날의 전투에서는 <일기>에서 감정을 절제하는 편인 이순신 본인조차도 실로 천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만큼 중요하면서도 대단한 전과였다.[57]

7. 전과

내 배에서는 순천 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 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8일
놀랍게도 난중일기에는 조선 수군의 피해는 좌선에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었다. 다만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좌선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장선만의 피해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과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냥 왜군들이 좌선한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거라고 믿을 전과다. 실제로는 전투 중반까지 좌선 혼자서 밀려드는 적선 수십 척을 상대로 2~3시간을 싸웠음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해전 전체에서 이런 사상자가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58] 이 외에도 실제로 접전이 벌어진 안위의 배에서는 일본 해군의 주특기가 월선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으니 사상자가 다수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수군도 화포류 외에 방패와 장창, 활, 신기전 등을 이용한 근접전을 구사하지만(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수군은 특유의 성가신 근접전이 장기라고 나온다) 아무래도 월선을 허용하게 되면 검술에 뛰어난 일본군에 의해 사상자가 다수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난중일기에는 거제 전선의 격군 대여섯 명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생각하면 사실상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날 적선 31척을 부수었다고 하였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는 전투 전반부에 20척, 후반부에 11척을 각각 격침시켰다고 썼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피해는 이렇게 단순히 31척으로 알려졌다. 실록에도 '적선 31척을 격침하고 수급 8개를 취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순신이 눈앞에서 확인한 전과만 적은 것이고, 다른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실제 전과는 더 컸을 가능성도 있다.[59]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패배하여 도망치는 적병의 뒤를 쫒아 목을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 급이고 무사히 탈출한 적선이 겨우 10여 척뿐이었으며 아군의 배는 모두 무사하였다.'고 적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적의 배는 겨우 10여 척이 도망쳤을 뿐이고 우리 배는 모두 무탈하였다.'고 기록했다. 10여 척만이 도망친 것은 다소 과장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만큼 일본 측 피해가 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60]

결정적으로 이는 당시 일본 수군의 피해 상황에 대하여,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명량 해전까지 종군한 조선인 포로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선조실록 선조 31년 2월 11일자 기사에는 임진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무술년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렸다.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저는 지난 임진년(1592)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 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2월 11일 -
이 증언에 의하면 전풍상은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했는데, 산도는 정유년(1597) 6월 적선 120여 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 해전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전풍상 이 사람은 칠천량과 명량이라는, 조선 수군의 극과 극을 모두 보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다. 산도의 배가 120여 척이라고 해도 이것은 전투선만이 아니라 사후선을 포함한 비전투선을 합한 수치일 수도 있다. 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실록의 해당 기사만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

강항의 간양록에도 칠천량 해전과 명량 대첩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 포로의 기록이 나온다. 그 포로가 증언하기를, '왜장 여럿이 서해를 따라 올라가 우수영으로 향했는데, 이순신이 전선 10여 척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했다. 왜장 내도수(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죽고, 민부대부(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며, 그 나머지 휘하 장수들도 죽은 사람이 여럿'이라고 했다.[61] 강항은 정유년에 쳐들어온 왜장들의 명단을 보면 진도까지 왔다가 배에서 사망한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증언으로도 구루지마 휘하 병력 이외에도 일본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일본군 총대장 도도 다카토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을 살펴보자.
先手の船ともハ敵船にあひ手負あまたいでき申し候。中にも来島出雲殿, 討死にて御ざ候。其の外ふね手の衆めしつれられ候。家老のもの共も過半手負い討死に仕り候処に、毛利民部大夫殿, 関船にて、番船へ御かゝり成され候.
ばん船へ十文字の鎌を御かけ候処に、ばん船より弓鉄炮は撃ち申し候に付き、船をはなれ海へお入りなされ、危うく候処に、藤堂孫八郎、藤堂勘解由両人船をよせ、敵船をおいのけ、たすけ申し候。
朝の五時分より酉の刻まで御合戦にて御座候。港の様子、ばん船能く存じ候に付き、風を能く見すまし、其のせと口をぬけ、津をひきかけ、はしらせ申すについて、是非なく追っかけ申す儀もまかりならず、いつみ(和泉守)も手をニか所, 負はれ候.
선봉의 배들은 적선을 만나 부상자가 숱하게 나왔다. 그 중에 특히 구루지마 이즈모노카미(来島出雲殿)[62]님은 전사하고 말았다. 그 밖에 선수(船手)[63]도 함께하였다. 가로(家老)[64]의 과반수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으며 모리 민부다이부 님(毛利民部大夫殿)[65]은 세키부네(関船)에서 적의 판옥선에 십자 낫을 걸고(도선) 공격했으나 판옥선에서 화살과 철포를 퍼부어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에 빠져 위험에 처해 있던 것을 도도 마고하치로(藤堂孫八郎)[66], 도도 가게유(藤堂勘解由)[67] 두 장군이 배를 대어 적선을 쫒아내고 구해내었다. 아침 5각 반[68]부터 유시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항구의 상태는 판옥선들이 잘 알고 있었기에, 바람을 잘 파악한 뒤 그 해협을 빠져나가 만에 가까이 대고 도주했는데 (일본군 측은)이를 어쩔 수 없어 추격하는 것도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즈미[69]도 손에 두 군데 부상당했다.
ㅡ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일본군 총대장 도도 다카토라는 고산공실록에서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수군과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적었다.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와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의 전투 보고서에는 모리 다카마사와 도도 다카토라 휘하의 함선이 직접 적을 공격했다가 함선이 통제불능이 되고 다카마사 본인은 도도 수군의 배가 구원하여 살아났다고 하는데, 이는 난중일기의 내용과 교차 검증이 된다.

난중일기에서는 안위의 배에 일본의 세키부네 두 척이 달려들어 접현 공격을 시도해 갑판 위에서 난전이 벌어져 위기에 빠졌으며, 이에 이순신의 배 및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합세해 집중적으로 제압사격을 가해 적들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 안위를 도왔다고 적혀 있는데, 다카마사의 보고서에도 자신과 도도의 기함이 적의 좌선에 직접 돌진해 접현을 시도했고 "자신도 달려들어 직접 배에 올라타 장시간을 열심히 싸웠으므로 이것이 비길 데 없는 공이다." 하고 뽐내는 어조로 적혔고, 도도의 <고산공실록>에는 다카마사가 직접 접현을 해 십자 모양의 낫을 던져 걸고 도선을 했으나 빗발치는 철포와 화살 공격에 바다에 빠져 버렸다고 쓰였다. 다이묘 급의 전사자는 많지 않으나 명량에서는 유독 다이묘, 가로 등 상급 무사가 전선에서 직접 싸우거나 부상당한 기록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 수군은 에도 시기의 <노지마류 수군 진형도>, 기타 당시 무라카미 수군의 진형도들에서 보듯이 본래 기함을 대형함 아타케부네 등으로 편성해 중앙에 배치하고 세키부네, 고바야부네 등 기동력이 좋은 배들로 전방의 돌격조를 편성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명량에서는 급한 물살과 자만심 탓에 하필 일본 함대가 다이묘들끼리 합의해 모든 함선을 잽싼 돌격용 세키부네로 통일한 기형적인 상황이었던 데다가, 유독 안위의 배가 조선 함대의 기함이라는 큰 착각을 한 나머지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을 내려서 다이묘의 기함이 손수 돌진해 들어가 필사적인 접현 공격을 시도하는 과감한 전술을 시도했고 그 결과 기함에 치명타를 입고 혼란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일본군 측의 기록은 조선군 측이 먼저 함대를 물렸고 적이 근처 지리를 더 잘 아는 탓에 함부로 쫓아가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카마사의 보고서는 자신이 조금만 있으면 조선 수군을 격멸할 수 있었는데 도망쳤다며 되도 않는 허풍을 치고 있으나, 피해규모를 상세히 서술한 다카토라의 비교적 정직한 기록에서도 조선 수군이 먼저 배를 물린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일본 수군이 괴멸한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 부분에서만은 어째서인지 <난중일기>와 일본군의 기록이 상충되고 있다.[70][71]

이 날 격침을 확실하게 확인한 적선의 수만 31척이고, 명량 대첩의 참패로 인한 일본군의 전체적인 손실은 그 이상으로 컸다. 침몰은 면했다고 하더라도 승선 인원이 몰살당하거나 큰 부상을 당하여 전투 불능에 빠지거나, 혹은 함선의 손상이 너무 커서 수리에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수리 자체가 불가능해서 기껏 퇴각해놓고도 폐기 처분해야 할 선박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명량 대첩 이후로도 조선 수군이 전력을 재건하는 동안, 일본 수군이 정면에서는 수효가 한참 부족했던 조선 수군에게 대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따져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격침 31척이란 전과 자체만으로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결과이다. 이는 임진년 때 조선 수군이 기습 공격과 신무기(거북선)의 투입을 통한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교전을 벌인 옥포 해전,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시의 전과와 맞먹는다.[72] 게다가 전투의 상당 부분을 통제사 좌선 1척만으로 치른 점을 감안하면 이는 더더욱 놀랍다. 병력으로 치면 333명의 병력 중 200명이 비전투부대, 133명이 전투부대인데, 부사령관을 포함한 참모, 고급 장교 급을 상당수 포함해 전투병력 133명 중 최소한 31명이 전사하고 생존자도 상당수가 부상, 중상으로 전투불능이 된 격인데 이는 당연히 전멸 판정이다.

일본군은 서해 진출을 통한 수로의 확보[73]와 한양 침공이라는 함대의 전략목표가 완전히 좌절되었을뿐더러, 일본군의 인적 손실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세인들의 인식과 달리 실제 미군 교범에서는 총 전투원 중 부상자를 포함하여 15~30% 가량 전투불능이 될 경우는 병력 재편성을 위해 후퇴해야 하고, 그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면 나머지 전투원 개개인의 육체적 건강 여부를 떠나서 더 이상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져 부대가 전멸한 것으로 본다. 상당수의 인원이 전사했고 거기에 더해 중급 지휘관들인 가로의 절반이 사망 혹은 부상으로 전투불능이 되었다.[74]

또한 일본의 수군은 주로 지방의 해적 세력으로 구성된 독립적 봉건영주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타격은 더욱 컸다. 일본의 수군은 몇 안 되는 해적 세력('스이군' 혹은 수군)에 의존하고 있었고, 구루지마 같은 군소 다이묘에게 도요토미 성씨를 내리는 파격적 조치를 한 것도 그 수군 세력이 바다 건너에서 싸우는 임진왜란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드물게 해전의 노하우를 가진 수군 세력의 장교단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다이묘가 죽었다. 수군 세력의 다이묘는 일본에서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이것은 일본 수군에 있어 통한의 일격이었다. 일본은 전쟁 수행 전체에 걸쳐 이날 치명타를 맞은 것이다.
근래 또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치계하길, "한산도에서 패배한 이래로 병선과 무기가 흩어져서 거의 사라졌는데, 신이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자니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을 거느리고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과 교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는데,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부수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아 적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머리를 벤 것도 8급이었습니다. 적선 가운데 큰 배 1척이 있어서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푸른 비단 장막을 둘렀으며, 적들을 지휘하여 아군 전선을 에워싸므로[75] 녹도 만호 송여종과 영등포 만호 정응두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격파하자 적이 크게 꺾이어 남은 적들이 멀리 물러났습니다. 진중의 항왜가 홍기를 단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하였습니다. 획득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 금의(錦衣), 칠함(漆函), 칠목기(漆木器), 장창(長槍) 두 자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소방(小邦)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을 조금 꺾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0일 기사[76][77]

선조가 명나라 측에 명량 대첩의 승전 소식을 알릴 때의 기사이다. 어떻게든 이순신과 명량 대첩을 깎으려고 드는 선조의 태도가 드러나 있는데, 분명히 명량 대첩을 두고 작은 승리로 적의 예봉이 조금 꺾였다고 하면서도, 이로 인해 '적선이 서해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단언하는 앞뒤가 안 맞는 언행을 보여준다. 뭐 이 발언 자체는 꼴에 예의 차린다고 겸양하는 걸로도 볼 수 있지만,[78] 이 시기의 선조는 명의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명량 해전의 전과를 폄하하고 다니기 바빴다.

오히려 명나라 경리 양호[79]가 선조를 타이르고 이순신은 뛰어난 장수라고 이야기하며[80] 선조에게 명량대첩 이듬해까지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 끈질기게 압박하여, 이전의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게 도와주기도 했다.

한편 명량해전이 끝난 후 이순신은 전투에 뒤늦게 뛰어든 중군장 김응함을 미조항 첨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고, 더 이상은 명량해전의 일을 두고 공과 과도 따지지 않았다. 반면 안위는 이순신의 명을 내리자 제일 먼저 전장에 뛰어들었으므로, 이순신이 전과를 안위에게 돌리며 추천한 덕에 종5품 현령에서 정3품 전라우수사(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직속 부하)로 파격 승진했다. 여기에서도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지 않는 이순신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물론 그 뒤 전쟁 말까지 또 다시 이순신 앞에서 머뭇거리는 장수는 하나도 없었다.

8. 전투 이후

8.1. 조선 수군의 후퇴와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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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에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정예수군 333척을 대파한 직후,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함대를 이끌고 금각포, 당사도, 어의도, 법성포, 위도, 고군산도로 이어지는 천릿길 수로를 통한 대장정에 돌입했다.
이것은 당시 전라도를 점령, 포진한 왜군은 물론, 이미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한 왜군에게
서해안의 제해권이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 천명, 그 예기를 꺾어버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결과,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던 왜군은 보급로 차단으로 또다시 고립될 것을 염려하여,
순천, 울산 등지로의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한편, 거듭되는 패전으로 전라도의 육지 방어선이 모조리 무너지자
인근 도서로 피신한 채 실의에 빠져있던 백성들은 크게 고무됐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불멸의 이순신 97화 中 내레이션
우리를 에워싼 적선 서른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난중일기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미 전라도 전역에 일본 육군이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도 잠시 북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아무리 수군이 강해도 수군 기지는 항구에 있고 왜군이 육지 쪽에서 공격해오면 보급물자 없이는 뗏목에 불과한 조선 수군이 자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수군이라 하여도 언제까지 물살이 강한 해역에서 버틸 수는 없었고, 그것을 버티지 못하는 순간 역으로 포위공격 당할 수 있었기에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을 건드릴 엄두를 못 내는 틈을 타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수군은 여전히 200척에 달하는 전선이 남아 있었기에 작정한다면 모험을 시도할 여지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순신도 난중일기에서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선과 일본 양 측이 판이하게 달라서 서로가 후퇴했다고 하는 것이다.

16일 17시경에 일본수군이 완전히 퇴각하였고 조선수군은 그날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돌목에서 가까운 해남 우수영으로 새벽에 진을 옮겨 머물다가 해류를 타고 준비해두었던 당사도로 이동해서 식수를 보급하고 숙영한다.(17일 오침) 그리고 같은날 신안 어의도(지도)로 이동했는데 이때 현령들이 찾아와 명량의 승전을 치하하고 양식을 준다. 18일에도 어의도에 머물고 19일에는 함대가 영광 법성포로 이동 20일에는 영광 위도로 이동 21일에는 전라도의 섬인 고군산군도(선유도)로 이동해서 12일간 머문다.

10월 3일에는 다시 고군산군도를 출항해서 8일에는 어의도, 9일에는 해남 우수영에 다시 복귀해 3일을 머물고 10월 11일에는 신안 안편도에 있다가 29일에 새로운 통제영인 목포 고하도에서 108일간을 머물며 함대를 재건한다.

고군산군도에서 이순신은 명량 대첩의 승첩을 알리는 장계를 써서 27일 조정으로 올려보냈다.[81] 이에 따라 왜군도 서해로 북상하여 이 과정에서 간양록을 남긴 강항[82] 영광에서 왜군에게 잡혔고, 일부 왜장이 배로 전남 무안까지 다다랐음을 기록에 남겼다.[83] 즉 엄밀히 말해 일본군이 서해로 진입하는 것에 완벽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 몰아쳐서 끝냈으면 조선 수군을 이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 않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일본군은 조선수군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임진년 이래로 처음 진출해보는 서해안에 신안과 무안의 수많은 섬과 갯벌을 마주쳐야 했고, 좁은 섬들 사이로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를 조선 수군의 공격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다시 전투를 해야하는데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었다. 당장에 고작 13척의 조선 수군을 상대로 133척으로 공격했는데 패했다. 이런상황에서 정보도 없는 적진 한복판으로 무작정 돌입할 수 없는노릇.

정찰을 통한 지형 및 적의 군세 파악+각종 정보 수집+작전 계획 수립 검토+사령부의 승인+병력 및 물자 소집[84], 병력 충원[85], 보급선 유지 확보, 병장기 생산, 공격에 대비한 전술 훈련을 거쳐야 하므로 준비에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연락을 사람이 직접 하던 시절이니 더더욱 느렸을 것이다. 한마디로 명량 해전의 패배 1번으로 일본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해버린 것이다.

일본 수군은 당연히 12척에 불과한 수군 쪼가리들은 가볍게 밟고 진군할 것을 전제로 출정했을 테지만, 그 전제가 어그러졌으므로 다시 계획을 짜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수백 척 함대가 13척 함대를 못 이기고 거의 궤멸 직전이 되어 돌아왔으니 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을 것이 자명하다. 결국 궁극적 목표를 놓고 보았을 때 왜 수군은 서해안으로 세력을 확장하거나 서해안에 상륙하여 육군과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육상전력이 우세해도 해로를 통한 보급을 받지 못하면 그저 잠시동안일 뿐이다.[86] 당초 왜군의 목표였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왜 수군을 격퇴하는 위업을 이루면서 멀쩡하게 남아 있었고, 게다가 칠천량 해전 이후 숨어 있던 장수들이 승전 소식을 듣고 줄지어 함대를 이끌고 수군에 합류하면서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붙어도 이긴다고 보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87] 게다가 이순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군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왜군은 결국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기대를 접어야만 했다. 이때 왜군 사이에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앞으로 진짜 희망이 없다며 체념하는 분위기가 흘렀다.[88]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89],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
─ 이항복, <백사집> 고 통제사 이공 유사(遺事)

반대로 조선군 사이에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가 흘렀다. 왜 수군이 육군과의 공동 작전을 펴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군이 독립적으로 금강 하구, 가능하다면 한강 하구까지 진출해서 보급거점을 만들었어야 하지만 이것은 실패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왜 수군은 서해안 확보에 실패했다. 즉, 정유재란의 흐름 자체를 이순신 혼자서 돌려버린 것이다. 또한, 이때의 전투 결과로 숨어있던 수군 장수들이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순신과 합류하여 칠천량 때의 3분의 2에 약간 못 미치는 전력을 회복하였다. 조선 수군이 다시금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8.2. 반전된 전황

이 전투의 승리로 남해안 일대의 조선 피난민들에게 다시금 구심점이 생기게 되었고, 조선 수군이 아직 건재함이 알려져 재건에 활기가 생기기 시작되었으며, 서해안의 왜 수군의 활동이 제약받게 되었다.

일본 일각에서는 명량 대첩이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인 전투라고 주장한다.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입했고 이순신이 이를 피해 북쪽으로 퇴각했으므로 명량 대첩은 전술적인 작은 패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9월부터 시작되는 일본군의 후퇴 이유도 단순히 월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군이 월동을 위해 전방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은 명량해전의 큰 성과 중 하나이다.명량 해전은 양력 10월 26일에 있었다. 이순신 부대가 고군산도에 진을 친 때는 겨울 초입인 양력 11월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만약에 왜 수군이 전라도 해안에서 원하는 만큼 활개칠 수 있었다면 전주나 남원을 점령한 왜 육군에게 겨울을 버틸 물자를 제공할 수 있었겠지만, 근처에 있을 조선 수군 때문에 위축된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한 행동은 남해안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임진년에 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버텼다가 손실을 입는 일[90] 을 예방하고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군이 물러난 것도 한겨울에 계속 밀려가는 양상이었음이 조선과 일본 양측의 개인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일부 일빠들의 위와 같은 주장대로라면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의 승리가 된다.[91]

실제로 조선은 왜군이 직산[92]까지 다다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양의 주민들도 모조리 피난을 떠난 상황이었다. 일본 측 종군승 케이넨(慶念)이 쓴 일기에도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군은 한양을 재점령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9월 10일 안성을 거쳐 죽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명량 해전 직전에 돌연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케이넨의 일기에 의하면 이는 '항구'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전라남도 해안을 따라서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남해안 순천에 자리잡았는데, 그들 입장에서 안정적인 보급을 받으면서 월동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지게 된다. 그 보급이 명량 대첩 때문에 완전 틀어진 것이다. 육로보급을 하려면 백두대간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산지를 넘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조선은 이 산악지대마다 육로통행 최종보스인 호랑이가 진을 쳐 이를 잡기 위한 착호갑사를 따로 운용해야 했을 정도였고, 그 와중에 먹을 식량과 쌀을 호위할 병력 우마지기들이 먹을 식량까지 같이 가져 가야 한다. 게다가 일본은 점-선만 간신히 장악했을 뿐 면을 장악하는 데에는 실패해 후방에 의병은 물론이고 정유재란쯤 되면 아예 조선 정규군[93]깽판 활개치고 다닐 지경이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왜군이 호남 평야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전 군을 먹일 수 있는 보급을 충청도 전선까지 보내기는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94] 이쯤 되면 육로 운송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짓으로, 왜 조선 조정이 근세 말까지도 한강 뱃길로 세수를 확보했는지 알 수 있다.[95][96]

수군이 금강에 진입해 공주, 좀 더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와 청주쯤에 보급거점을 확보했다면 왜군이 구태여 점령지를 다 포기하고 오로지 월동만을 위해 경상도까지 철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안정적인 보급을 받으며 충청도 일대에서 버티고 앉은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밀어내기 위해서는 더 큰 희생을 감수했어야 했을 것이다. 전라도 방어선이 박살나 호남평야가 왜군의 직접적인 보급처가 되는 것은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97]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수계까지 포함하면 오근장까지도 19세기 말엽까지 배가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이 단순히 월동 차원에서 철수할 정도로 여유로운 입장이었다면, 굳이 한겨울에 고생해가면서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즉 왜군은 수군의 서해안 진입이 좌절된 시점에서 다시 봄이 온들 재북진은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경상도 연안에 틀어박혀서 존버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명량 대첩의 전략적 의미는 왜군의 한양 점령을 막았다는 것보다는, 아예 일본군이 삼남을 지배하겠다는 기본 전략 자체를 무산시켜버린 점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국지적인 전투라기에는 일본 수군의 피해 규모가 상당히 컸음도 사실이다. 물질적인 피해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최소 10배 이상의 전력에 내로라하는 수군 장수들과 정예병들이 총출동했는데 고작 13척의 적선에 장수들 다수가 전사하고 대부분이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친 걸로 모자라서 단 한 척의 판옥선도 격침시키지 못한 데다 명량 대첩이 끝나고 얼마 가지도 않아서 원균이 말아먹은 전력에서 절반 이상이 복구가 됐다는 소식까지 접하자 사기는 바닥을 치고 일본 수군들은 이순신이 버티고 있는 조선 수군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전투는 전황에 일정한 영향을 끼칠 때 비로소 전략적 목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일본 수군의 작전이 전황에 끼친 영향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명량 대첩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끝장내고 거점을 만들었다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조선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명나라와의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처치하지도, 조선 수군을 격파하지도, 서해안에 확고한 거점을 만들지도 못했으므로, 명량 해전은 전술과 전략에서 완벽하게 일본의 원정 실패로 이어지는 첫 걸음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빠져 죽을 뻔했던 일본군의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조선 수군을 추적해서 거의 이길 뻔했다고 거짓말을 잔뜩 섞은 대체역사소설 급의 보고서를 올려 후세의 사람들에게 큰웃음을 주고 있다. 자신의 실패에 대해 정직한 무사도 정신으로 일관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와는 정반대인데, 연명으로 이런 거짓말 보고서를 올리며 히데요시의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에게 잘 말해달라며 애걸한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히데요시의 분노가 무서웠던 듯.[98]
九月十八日付船手衆注進状
9월 18일 수군 보고서
謹而奉致言上候、先書如申上候、於全州各致相談候て、全羅之川口江罷出候事
삼가 말씀 아뢰옵니다. 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주에서 상의하여 전라도의 강 어귀에 진격한 것에 대하여 보고드립니다.

一 風時分ニ御座候付而、此度者大船共ハ彼川口ニ残し置、小関舟斗にて去十日ニ打立、赤国浦〻嶋〻過半発向仕候事
바람이 강하여 이번에는 큰 배는 강 어귀[99]에 남겨두고 작은 세키부네로 갈아타 지난 10일 출진하였으며, 전라도의 각 포구, 섬들에 출진하였습니다.

一 たいたんむろのむかひ水営と申城の瀬戸口ニ番舟・大船拾四艘、其外小舟数百艘かゝり居申候条、即十六日押懸申候而、卯刻より申刻迄相戦申候事
타이탄무로[100] 너머 수영(水營, 전라좌수영)이라 하는 성의 해협 입구에 판옥선/대선이 14척, 이외 소선이 수백 척이 대기하고 있어 이에 16일 진격해 들어가니 묘시(오전 5~7시)에서부터 신시(15~17시)까지 싸웠습니다.

一 毛利民部太輔のり舟壱艘、幷藤堂佐渡守家中の舟壱艘、番舟の大船へ相付申候、然処ニ民部太輔則切乗、やゝ久相戦申、自身貳ケ所手負、其上海上ヘ被打落候、右之仕合誠無比類手からにて御座候、則民部太輔事者、藤堂佐渡右之付申候舟へ乗移、異儀無御座候、幷民部太輔のり舟も無異儀引取申候事
모리 민부다이부(타카마사)이 탄 배 1척, 도도 사도노카미(타카토라) 가문의 배 1척이 판옥선 대장선에 돌진하여, 민부다이부가 직접 도선 공격을 하여 꽤나 오랫동안 교전하다 두 곳을 부상당해 바다에 떨어졌으나, 이러한 (근접)전투는 실로 비할 데 없는 공로이며, 도도 사도노카미의 배에 옮겨 타 무사했고 그의 배도 별 일 없이 무사했습니다.

一 申刻迄相戦、則見合を以悉可討果与存候刻、大風吹出、番船依為案内者、遠嶋帆に任逃退申候、則六七里斗追懸雖申候、暮に及、其上嶋〻無案内ニ付而、番舟の小舟共数艘やきわり申候事
신시까지 싸워 마침내 적을 격멸하려고 하던 차에 큰 바람이 불어 현지 사정에 밝은 판옥선들은 먼 섬으로 도망쳐 갔습니다. 6,7리 정도 쫓아갔으나 해질녘이어서 그 섬들을 알지 못하는고로 그저 조선 수군의 소선 몇 척을 화공으로 깨뜨리는 선에서 전투를 끝냈습니다.

一 右戦候翌日、彼番舟の有所早舟を以方〻浦〻雖相尋申候、近辺ニ相見不申候、尚従是先手羅州の川口へおし廻し、近郡発向仕、追〻可致言上候、此等之趣、宜預御披露候、恐〻謹言、
이 전투의 다음날, 조선 판옥선들이 있는 곳에 쾌선을 보내어 그쪽 방향의 포구들을 조사하였으나, 근처에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전방의 나주로 회항하여 근처 고을에 출동하려 합니다. 재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만, (타이코 전하에게도) 모쪼록 이러한 사정을 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삼가 말씀 올립니다.

九月一八日
9월 18일
藤堂佐渡守, 脇坂中務少輔 , 菅平右衛門, 藤堂宮内少輔, 菅三郎兵衛, 菅右衛門八, 加藤左馬助
발신인:도도 사도노카미(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나카츠카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간 헤에몬( 간 미치나가), 도도 구나이쇼( 도도 다카요시[101]), 간 사부로베에, 간 우에몬하치, 가토 사마노스케( 가토 요시아키)

増田右衛門尉殿, 石田治部少輔殿, 長束太蔵太輔殿, 徳善院
수신인:마시타 우에몬노조 님( 마시타 나가모리), 이시다 지부노쇼 님(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오쿠라노다이후 님,( 나츠카 마사이에), 도쿠젠인( 마에다 겐이)

모리고동문서[102]

당시 충무공 함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던 문신 출신인 오익창은 후방에 어선과 피난선으로 위장용 부대를 만들어 대기했는데, 이것이 모리의 말로도 교차 검증이 되는 셈이다. 근데 처벌을 두려워했는지, 모리는 어선과 피난선으로 만들어졌고 멀리 물러나 응원만 하던 그들을 모두 전력에 넣어 조선 수군을 자신들과 비슷하게 대소선 합쳐 수백 척이나 되는 대함대로 포장한 뒤, 그들과 전투를 했고 수 척을 격파해 조선 수군을 물러나게까지 했다며 잔뜩 거짓말을 섞어 보고한 것이다.[103] 13척이던 전력을 14척으로 슬그머니 부풀린 것은 덤. 그러나 도도 다카토라의 기록은 한산도 해전에서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처럼 담백하고 정직하기 이를 데 없어서, 수군은 물론 중상급 가신인 가로까지도 반절 이상 죽어나가고 모리도 죽다 살아났다는 전후 사정을 모두 써 남겼다.

명량 해전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자신들의 그러한 패배를 기점으로 정유재란에서 자신들이 입는 피해도 더더욱 늘어났으며, 이것은 장기적 차원에서 보면 정유재란을 포함한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친도요토미 세력들의 피해가 더더욱 커져서 이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쿠데타로 에도 막부가 세워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유재란의 확전이 도요토미 정권의 입장에서 단기적으로는 이익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손해였던 결과를 만들어낸 전투가 바로 명량 해전인 셈이다.

9. 분석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단순 교환비만 보고 명량 해전을 기적의 해전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이순신 수준의 위대한 장군이 아니었다면 승리는 절대로 불가능 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명량 해전의 승전은 임진왜란 이후 꾸준히 누적된 데이터들이 종합되어 이뤄진 '승리할 수 있던 전투'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조선에서 이 전투의 승산을 가늠해 냈던 사람은 이순신 단 한 명뿐이었다. 이순신이었기에 승리를 예상하였고, 이순신이라서 이겼으며, 이순신이 아니었으면 시작하지도 못했을 전투였던 것이다.

9.1. 이순신의 압도적인 전과

아래의 모든 요소들도 승전에 필수적이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순신 장군의 압도적인 전과와 카리스마라고 볼 수 있다. 고대~중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병사들의 사기'인데, 이 사기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아래의 모든 사항을 충족해도 직전의 칠천량 해전이라는 압도적인 패배 앞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회복될 수 없었을 것이다.[104]

하지만 이러한 암담한 상황에서 수군이 단 하나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순신이 그간 거두었던 수많은 전과와 그로 인한 군 내의 위용이었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임관 이후 전승무패, 단 한 척의 함선도 손실하지 않은 압도적인 승리라는 압도적인 전공이야말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래도 통제사께서 지휘하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다른 함선들의 지휘관들은 패배나 전사를 염려해 뒤에서 관망했으나, 최소한 대장선에 탑승한 군인들은 이순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압도적인 적의 물량에도 굴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105]

거기다 좌선이 수 시간동안 공격받고 있음에도 후미의 함선들이 설령 방관을 했을지언정 후퇴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압도적인 전과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133 이라는 전력 차이는 듣기만 해도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했고, 이순신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틈에 조용히 도망쳤다고 해도 책임을 물을 사람은 딱히 없었 것이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어째서인지 후방에서 관망만 했다고해도 전선에 남았으며, 이순신의 좌선이 분투하여 적의 공세를 막아내자 그제야 교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즉, 승산이 없어 여차하면 도주할 생각을 가졌던 자들조차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당시 이순신의 전과와 위상이 압도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9.2. 강렬한 전투의지

전술했듯 이 전투는 승리할 가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반드시 싸워야만 하는 전투였다. 조선 수군은 규모가 기존의 1/10 이하로 급감해 더이상 화력으로 적의 접근을 막을 수 없었으며, 육지는 이미 일본군이 물밀듯이 쇄도하는 도중이라 편안한 정탐과 보급도 불가능하며, 이순신의 장기인 정보전으로도 왜적이 울돌목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파악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으며,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데다 시간도 많이 남지 않은 일본군이 정면 대결을 걸어왔기에 지연전도 불가능했다. 일본군의 함선이 훨씬 빠르므로[106] 도주 가능성조차도 불확실하지만 막강한 백병전 능력을 자랑하는 일본군이 서해로 보급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했으므로 애초에 도주를 선택할 수조차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순신 본인조차 전투 전에는 고뇌에 휩싸여 절망적 심기를 토로하고 있었다.
9월 3일 (신묘)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뿌렸다.
밤에는 된바람이 불었다. 봉창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랴!
9월 12일 (경자) 종일 비가 뿌렸다.
봉창 아래서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개인적인 불안감은 숨긴 채 전투의지를 잃지 않고 임금에게는 "신이 아직 살아있고 전선 12척이 있으므로 적들은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의 유명한 상소를 올리고, 아군에게는 군령을 어기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함과 동시에 적은 병사로도 중요한 길목을 지키면 대군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로 격려했다.

지치고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정예병들[107] 이외의 모든 무기를 잃은 조선 수군이었지만, 그런데도 이순신은 끝끝내 강점을 활용하고 약점을 가릴 방법을 찾아냈으며 큰 전략적 시각에서 본인이 물러서면 전쟁이 패전으로 끝난다는 판단 하에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또한 극단적인 전장 환경을 이용해 전투 전개까지 극단적으로 몰아가 정상적인 전투가 진행되기 어렵도록 만들어 끝끝내 승리를 쟁취했다.

그야말로 이순신의 천재성과 함께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가 빛났던 전투였다. 먼 훗날 일본군 바보 같은 삽질 때문에 가끔 폄하되기도 하는 의지의 중요성이 가장 크게 작용한 전투였다.

9.3. 엄정한 군율과 신뢰, 지휘력

명량 해전 이전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합류시키자는 논의가 오가고 있었고, 이순신이 가장 신뢰하는 용감한 장수들도 칠천량 해전의 패전 직후 전투를 거부할 정도로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불가능할 것 같은 전투에 참전하고 공포심에 물러났다가도 공포를 이기고 돌격명령에 다시 응한 데는 이순신의 지휘력과 리더십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평소의 군율이 바탕에 있다.

이순신의 지휘력은 엄정하게 군율을 세우면서도 휘하 군인들과 놀이를 즐기거나 술자리를 가지고 사이사이 의견교환을 나누는 긴밀한 소통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고, 군인들은 무패의 경력을 자랑하는 이순신의 절대적인 수준의 지휘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육전과 달리 도주할 곳도 없는 해전에서, 그것도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도주 일보직전의 군인들이 돌진을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의 수군은 평소의 숙련도가 매우 높았고 지휘관인 이순신이 개별 함선들을 매우 정확하게 지휘했기 때문에 명량 해협의 맹렬한 물길에서도 조종, 사격 등 함선의 운용을 비교적 능란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같은 압도인 제원의 함대를 가지고도 정보 수집도 않고 무리하게 항행을 강행한 끝에 흐지부지 궤멸당한 원균과 비교하면 지휘관의 중요성이 어떤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 수군이 사용하는 대형 총통들의 운용 기록을 보면 지상보다 사거리가 매우 짧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울돌목의 해류는 앞서 언급했듯 동아시아 최고로 점쳐질 만큼 빠른 곳이었고, 이런 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낸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

9.4. 군함 제원상의 우위

일본군은 끝내 잔인할 정도의 군함 간 제원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조선군의 함대 규모를 보고 그동안의 제원 차이로 인한 참패들을 망각하고 돌격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체급 차이를 무시하고 울둘목의 지형만 생각해 아타케부네를 투입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다.

<고산공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전투에 투입한 함선은 대부분 세키부네(80명 탑승)였는데, 이에 반해 조선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130명 탑승)은 해상의 성이라 불리던 아타케부네(290명 탑승)와 비슷한 크기였으니, 조선군이 가뜩이나 격류인 울돌목에서 질적 우위를 확보하고 전투를 펼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판옥선의 구조 자체가 철저하게 한 가지 기능, 즉 연안에서 화포를 쏘기 위한 이동식 포대 겸 장벽으로 사용하려는 목적만을 위해서 설계된 구조였다. 쉽게 말해 물에 뜬 전차인 셈. 따라서 제작에 사용된 재료도 참나무 적송 등 가장 단단한 목재로 건조됐다[108]. 애당초 해협에서 통행세를 걷으려는 목적으로, 상대 함선에 상륙해 백병전을 벌인 후 치고 빠지는 용도로 설계된 세키부네보다 몇 배는 더 튼튼할 수밖에 없었다[109]. 당연히 배끼리 부딪치더라도 세키부네가 먼저 박살났다.

즉, 일본군이 자신들의 군함보다 월등히 큰 조선군의 판옥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해류 위에서 난데없이 공성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조선군 입장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화살, 창 등으로 상대하면 그만. 한가지 유의할 점은 처음 좌선 혼자 울돌목을 막았을 시점에 물살은 일본군에겐 유리한 순류였으며, 조선군에겐 역류였다. 일본군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유리한 물결을 보고 돌격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일본 수군의 전술은 고대~중세 해전에 머물러 있었다. 구조상 함포를 다는 것이 불가능해서 포격을 그대로 맞으면서 전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술도 배에 접근 후 도선해서 백병전을 치러 함선 내 인원들을 몰살한 후 빠져나오거나, 배에 불을 질러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게 다였다. 그러나 접근해도 조란환, 화살 등이 위에서 날아오고 좁은 곳에 배가 밀집한 전투 상황상 아군의 배와도 뒤엉켜야 했으므로 정상적인 교전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었다.

더불어서 조선군은 강력한 화포들을 다량으로 적재할 수 있었다. 천자총통[110]과 현자총통은 백여 개의 조란환, 혹은 대장군전을 쏴서 정면이든 원거리에서든 함선끼리의 싸움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당시부터 이미 저평가되고 있던 승자총통마저도 장대에 달아서 조란환을 쏘는 구조 덕분에 방어전에서 상당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111]

크기 면에서만 판옥선의 대항마라고 할 만한 아타케부네는 편성되지 못해서 일본 수군이 더 불리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전의 안골포 해전의 예시를 보면 알겠지만, 아타케부네가 편성되었다고 해도 단순 크기만 비슷할 뿐 방어력에서 상대가 안 되는 판옥선 앞, 그것도 독기가 바짝 오른[112] 이순신의 기함 앞에서는 그저 덩치만 큰 목표물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안택선은 주로 다이묘 계급의 상징이었기에 전력상으로 의미를 가질만큼 수효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고산공실록에는 좁은 해협을 보고 아예 편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순신이 장계에서 붉은 깃발과 푸른 휘장을 두른 대선을 격파했다고 하고 총대장인 도도 다카토라가 화살에 맞은 것으로 보아서는 전투 후반에 판옥선들이 후방의 대장선에 당도하여 교전에 휘말리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는 있다. 이 경우 운신이 어려운 좁은 지형에서 한두 척만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으니 대함 미사일 격인 대장군전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좋은 표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첨저형 선박은 구조상 제자리 회전이 불가능하다. 거센 물살로 주위에 소선들이 어지러이 밀집된 상황에서 이런 선박이 기동하기란 아군을 짓밟는 팀킬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113]

그러나 판옥선과 화력의 우위라는 이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하고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원균을 생각해볼 때, 아무리 조건이 좋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능력이 변변찮으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반대로 이러한 이점들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유능한 지휘관 이순신을 만나자, 사실상 전투는 대장선 혼자 하고 나머지는 그 대장선에게 학살당하는 세계 해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의 일방적인 전투가 가능해졌다.

9.4.1. 보론: 일본 군함이 커지긴 커졌는데…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封典)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이는 알 수 없고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30년 7월 22일
칠천량의 패전을 보고받고 선조가 비변사와 회의를 하면서 일본군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커졌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으니 김응남이 그렇다고 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일본 수군은 바보는커녕 전쟁의 베테랑들이었으므로 조선 수군에게 호되게 당한 뒤 여러 대처법을 시도했고 그중 하나가 군함의 대형화이다. 일본 수군이 진단한 패인은 화포 대응력 부족이었는데, 당시의 화포는 작렬탄이나 포도탄 같은 건 없기 때문에 함선의 크기가 곧 방어력이었다. 작은 배라면 포 두세발에 가라앉을 것도 크기가 크면 계속 떠다닐 수 있고(나무니까) 심지어 여러 발 얻어맞아도 속도만 느려지고 운행까지 가능하다. 명량 해전 당시 일본군의 불행이라면 후술할 내용에 따른 문제점 탓에 함선의 대형화라는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애초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패배했던 이유는 단순히 배의 체급 차이가 아니라 기본적인 전술에 있었다. 일본의 기본적 전술은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라 해서,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백병전을 선호했다. 일본 수군도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본인들이 직접 경험한 화포의 강력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화포는 어떤 자가 어떤 적을 상대로 어떤 전과를 올렸는지 분별할 수 없다는 (적어도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단순히 원흉과 같이 탐욕스럽다고만 하긴 어려운 문제인데, 만약 여기서 어떠한 전과를 누가 올렸다는 것을 소상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일명 군감이라고 불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직할의 정치장교들이 이를 허위 전과라고 히데요시에게 보고해 그 다이묘들이 직접적인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당시 일본은 하나의 거대한 군집단이 아니라 작은 국가들의 연합군[114]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동원한 병력들이 고스란히 본인들의 백성들이었고, 여기서 어떤 징계라도 당하면 장래의 자신의 후손들까지도 그 불이익을 볼 수가 있었단 것.

사실 이때 일본 수군의 등선육박전술을 가리켜 멍청하다고 비웃을 수만도 없는 것이, 이보다 약 200년 후의 유럽 해군도 그저 화포만으로 적 함대를 격파하지는 못했고, 적의 배에 뛰어들어 직접 선상 백병전을 벌이는 식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프랑스 해군도 영국 해군과의 결전을 대비하여 선상 백병전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다만 일본이 멍청한 이유는 그게 명량이었고, 적의 배에 뛰어들다가 추락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배에 뛰어드는 과정이 헬게이트 그 자체라 문제였던 것이다.

9.5. 일본군의 호승심과 촉박한 시간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얻은 황당한 승리, 그리고 조선 함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자신감이 급상승했다. 당사자인 도도 다카토라 본인이 현장에서 조선 함대 13척을 보고 제장이 승리를 확신하고 격파하기로 합의를 보고 달려들었다고 했을 정도다. 정유재란(2차 침략)으로 일본에서 새로운 병력들까지 가세했으므로, 이러한 자신감은 더욱 확고해져서 조선을 최대한 가뿐하게 밟아주겠다는 호승심에 취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에서 가끔 돌아다니는 '진도 우회 떡밥'도 여기에서 나온다. 어째서 일본군이 진도군 남쪽으로 우회하지 않고 명량이란 좁은 통로로 왜 굳이 들어왔냐는 떡밥인데, 당시 일본 수군의 입장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판옥선이 일본의 배보다 체급이 우월하다지만 13척과 300척은 20배도 넘는 압도적인 물량차가 있으니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심지어 그 13척에 탄 병사들도 전부 직전의 전투에서 참패한 상대들에 불과하고, 실제로도 조선군은 공포에 질려서 한동안 대장선을 버려 두고 전투에 참여하지조차 않았을 정도다. 이 쉬워 보이는 먹잇감을 두고, 그동안 처참하게 당해왔던 이순신이 가장 약해졌을 때 복수할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다른 길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여기서 약해진 이순신을 잡아내면 조선 수군은 부활할 일말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본 수군으로선 울돌목에서의 전면전을 피하려 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시기는 양력 10월 하순이라 날이 갈수록 추워져가는 상황이고, 한양을 노리던 육군은 직산 전투에서 격퇴당해서 물러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수군이 더 이상 지체하면 육군은 보급 문제로 인해 한양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따라서 빠른 시간 내에 서해로 진입해서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목표였다. 아무리 상대가 그 무서웠던 이순신이라지만 고작 판옥선 13척을 정면으로 싸울 자신이 없어서 진도를 돌아 가거나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기습 공격을 가해서 전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방법을 써가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진도 외해로 돌아가는 길이 편한 길도 아니었다. 진도 외해의 바닷길인 장죽수도, 맹골수도 역시 울돌목 만큼이나 험한 해협이고 곳곳에 암초와 섬들이 널려 있다.[115] 특히나 첨저선 위주인 일본군 입장에선 물길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의 항해거리가 늘어나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했고, 그렇다고 조선인 향도를 구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구한다 한들 어떻게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116]

왜군이 조선수군을 격파하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수상보급로를 뚫기 위해서였다. 최단거리인 울돌목을 놓아두고 진도 외해를 빙 둘러갈거라면 애초에 그 많은 돈을 퍼부어 함대를 건설해가며 조선수군과 드잡이질을 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진도 외해를 둘러가는 거리는 장장 80km로 한산도에서 부산포까지의 거리보다도 멀었다. 서해에 진입만 한다고 끝이 아니라 추가적으로 항구나 보급거점도 확보를 해야 했다. 게다가 이 섬들 사이에서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조선 수군의 기습도 고려해야 했다. 이순신 함대를 놔두고 섣불리 북상했다가는 후방 기습을 당해 단체로 털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명량수도에 보기 좋게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정면으로 밀고 나가서 최단 거리인 울돌목을 빠르게 돌파하는 정공법이 당시 일본 수군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방심해서 돌격을 한 것도 아니고 남은 적선이 13척인 걸 알아낸 뒤 일부러 13척 정찰을 보내는 도발행위를 하고, 해류가 거친 명량에서 싸울 것 같자 그런 해류에 익숙한 구루지마를 선봉으로 내세우는 등 전략 준비도 철저히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의도적으로 일본군이 대선단과 대형선이자 첨저선인 아타케부네의 이점을 살릴 수 없는 좁은 물길로 일본군을 유도했고, 그들의 호승심을 부추겨 자신들의 우위를 포기하게 하였다. 결국 일본군은 그 함정에 완전히 넘어가 소형선인 세키부네로 갈아 타 돌격전을 벌이는 자살행위를 저질렀다. 상대가 누구인지, 자신들이 왜 판옥선에 농락당해 대형선을 건조해야 했는지도 잊고,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을 격멸했다는 이유로 승리에 취해, 적을 좁은 물길로 유인해 포위섬멸한다는 이순신의 승리 비결이나 주 전략조차 완전히 망각한 것이다.

9.6.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물살

사실 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무엇도 아닌 지형에 있다. 울돌목은 폭이 약 300 m 정도로 매우 좁아서 이순신 휘하의 십수척의 판옥선으로도 일자진을 펼치면 완전히 틀어막는 게 가능할 정도다. 이런 식으로 틀어막아서 병력 수의 불리함을 가능한 줄이고 들어오는 왜선을 오는 족족 박살내자는 게 기본 전략이었다. 유사한 예시로 좁은 협곡에서 300명의 병사스파르타...와 7천명 이상의 그리스 연합군으로 페르시아 대군을 막아낸 테르모필레 전투가 있다.

물론 이 지역의 조류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기존의 판옥선의 선회 능력을 사용해서 한번 쏘고 반대면에서 한번 더 쏘는 식으로 포의 발포 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강한 화망을 형성하는 전략은 쉽지 않았으며, 휘하 장수들이 뒤로 물러나서 왜선이 좁은 울돌목을 돌파해버리면 가뜩이나 조류의 흐름이 불리한 상황에서 함대의 진형을 회복할 수 없고 그대로 각개격파당해서 무너지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순신은 이 점을 잘 알고 근접전의 위험을 감수하고 제자리에서 왜선을 맞아서 싸운 듯하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는 휘하 장수들의 행동을 막지는 못했고, 간신히 초요기를 세워서 불러들이는 식으로 휘하 전선들을 불러와 제자리에서 진형을 유지하게 해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류가 바뀌면서, 조선 수군의 공세로 인해 과하게 밀집되어있던 왜선들이 밀려나게 된다.

결국 명량 대첩의 기적을 일으킨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일본군의 방심이나 혼란도 아니고 기적도 아닌 지형적인 이점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진형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면서 유리한 때를 기다린 이순신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10. 명량해전 관련 다른 의견들

10.1. 명량 철쇄설

명량 철쇄설이란 조선 수군이 울돌목에 쇠사슬(철쇄)를 깔아서, 울돌목의 급류에 밀려 쇠사슬에 걸린 일본의 전선들이 대파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1971년에 상영된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 이미 철쇄를 사용한 것으로 그려졌으며, 1999년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방송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명되었다. 2005년에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면서 조류가 바뀔 때까지 시간을 끈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2000년대 이래로 철쇄로 적선을 부수었다는 설 자체는 많이 수그러들었고, 대신 철쇄를 전투에 보조하는 형태로 사용하여 전투의 효율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들도 아래의 이유등으로 많이 반박되면서, 2010년대 후반부 이후로는 역사 연구 반영이 늦은 일반 대중매체에서도 철쇄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10.2. 거북선 등장?

철쇄설에 비해 빈도는 적지만 가끔 등장하는 떡밥으로, 명량 대첩 당시 거북선이 있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거북선은 일반인들에게는 조선 수군의 결전병기 수준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명량 대첩이라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 거북선이 등장했다는 것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통설은 철쇄설과 마찬가지로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건조한 거북선들은 모두 칠천량 해전 당시 손실하였고,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난중일기 및 실록의 보고서 등에는 거북선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거북선이 있었다고 해도 크게 의미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북선은 실제로는 판옥선을 보조하는 돌격선[119]으로 거북선 홀로 교전을 수행하기는 어렵고, 원거리 지원 세력이 든든하게 받쳐줘야 한다. 칠천량 해전 이전 수십 척, 백 척이 넘는 전력을 유지했을 때도 거북선은 기록상 3~5척에 불과했다. 가용 가능한 군선이 20척도 안 되는 상황에서 거북선을 운용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때는 이언량, 나대용 같은 뛰어난 돌격장도 부재했기 때문에 거북선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다.

다만 거북선 및 뒷받침할 전력의 존재여부를 떠나 명량의 좁은 해협을 생각해보면, 거북선을 운용할 수 있었다면 대단히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세키부네는 거북선에게 유효타를 가할 수단이 전무했고, 거북선은 적들이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지 않는 한 적진을 휘저으면서 화포를 쏘거나 충각도 가할 수 있는 위협적인 돌격선이었기 때문이다.

명량 대첩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기록 중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내용은 이순신의 행적을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선 회령포에서 이순신이 잔여 함대를 인수한 뒤, 장수들에게 전투선을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선 실제로 판옥선 중 한두 척을 거북선으로 개조했다는 설과 해당 내용 자체가 후대에 가필[120][121]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 외에 명량 대첩에 대한 일본의 기록 중엔 조선 수군의 전선이 모두 거북선이라서 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문헌 비교에서부터 전형적인 아군 추태 가리기 식의 적 전력 과대 평가라는 것을 입증할 근거가 충분하기에 신빙성이 없다. '대쥬신제국사'로 유명한 유사 역사학자 김산호는 '대제독 이순신'을 비롯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두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이 명량에서 사용한 판옥선은 일반 판옥선과 거북선의 중간 형태의 개량형이라는 주장을 하였으나, 근거는 전혀 없다.

10.3. 일본 측 입장

일본은 메이료카센(명량해전, 鳴梁海戦)이라 부른다.

대안우파 넷우익들은 일본어 위키피디아 등에서 조선측의 전술적 승리이지만, 일본측의 전략적 승리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도도 다카토라의 고산공실록 등 당시 명량해전 참전 일본 장수들조차 일본군의 대패로 묘사하고 있다.[122]

또한, 현대 일본 학계 주류 의견 역시 명량해전은 조선측 승리로 보고 있다.[출처]

10.4. 기타

명량 해전의 전황을 상세히 기록한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124]에 의하면, 이순신이 왜군과 싸울 때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개발되는 면제배갑이 떠오르는 장면이긴 한데, 솜이불을 뱃전에 걸어봐야 어차피 조총에서 발사되는 탄환은 두꺼운 소나무 판재로 제작되는 판옥선 선체에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125]

따라서 3층 상갑판에서 아래로 이불을 걸었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만약 일본군의 입장에선 조선군의 배에 이불이 걸렸다면 이상하게 여겨 누군가는 반드시 기록했을 터이다. 더욱이 현장 지휘관인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의구심을 품게 한다.[126] 방탄복은 옷 안에 실을 그물처럼 짜서 총알에 맞게 되면 그 실이 잡아당겨지는 힘 즉, 인장 강도로 총알의 운동에너지를 줄이는 원리이다. 면제배갑처럼 13겹의 섬유(삼베)를 겹치면 그만큼 인장강도가 늘어나기 때문에 총알을 막아 낼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방탄용으로 만든 것도 아닌 한두 겹 솜이불 정도로는 인장강도가 거의 없어 총알을 막을 수 없다.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박의 일종)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또 이순신의 어릴 적 일화가 떠오르는 장면. 즉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명량해전은 양측의 교전 기록은 있으나, 정확한 교전 위치는 특정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해전이 벌어진 장소가 울돌목이 아니라는 주장이 간간히 있다.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 등이 이를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해전은 울돌목이 아니라 우수영 앞바다의 양도 근처라는 것. 근거로 당시 울돌목의 조류는 판옥선이 해전은커녕 그 자리에 버티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므로 더 잔잔한 우수영 앞바다가 합리적이라는 것과, 난중일기에서 '우수영에서 바다로 나가니 곧 적들이 우리 배들을 감쌌다'라는 표현을 꼽고 있다.

하지만 이는 소수설로 그치며 정설은 기존의 울돌목으로 비정하고 있다. 당장 거센 역류가 흘렀다는 묘사 자체가 난중일기에 있으며, 우수영 앞바다라면 다른 판옥선보다도 더 뒤에 물러나 있었다는 김억추의 위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11. 미디어 창작물

임진왜란의 전투 중에서도 대단히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혈전이었으나 이 전투만을 소재로 한 창작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유명한 것은 영화 명량. 창작하는 사람들, 아니 이순신 본인조차도 '이건 천행이다'라고 적었을 정도로 도대체 어떻게 이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전투라서 오류도 많다. 위의 명량 철쇄설이나 기타 이런저런 잡설들도 결국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건지 짐작이 안 되니 이런저런 추측이 생겼을 것이다.

11.1. 20세기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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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명의 명량해전도

11.2. 21세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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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DRAMA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올린 주요 장면.
다만 고증 오류가 여럿 되는데, 먼저 당시 조선 함대는 이순신의 좌선을 제외하면 모두 도망갈 생각에 전전긍긍했지만 본작에서는 (상단 표 지휘관 란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명량 대첩에 참가한 바도 없는) 권준, 이영남, 우치적 등이 이순신의 행동에 동조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우는 것으로 묘사되었고,[129] 철쇄설을 답습한 한편 이순신이 직접 백병전을, 그것도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문구가 새겨진 칼을 들고 벌였다. 이 검은 실제 길이가 2m에 가까운 검인데[130] 아무리 소품으로 경량화를 시켜도 검술에 익숙하지 않은 배우가 다루기엔 힘든 까닭에 실제 검보다 대폭 축소된 검을 소품으로 사용하였다. 이순신은 수군 최고지휘관이었던 만큼 직접 적과 검으로 교전한 기록이 없지만 작품 내에서는 검으로 적장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포함하여 33명의 적을 베는 걸로 표현되었다. 또한 안위가 겁에 잔뜩 질린 모습은 그럭저럭 잘 고증되었지만, 문제는 그 부분만 잘 되었다는 것.[131] 그 밖에 권준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132] 그리고 김억추의 판옥선이 진격한다. 실제 김억추는 물살이 바뀌었어도 끝까지 진격하지 않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참전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133]

이렇듯 문제가 적지 않기는 하지만, 절대 다수의 왜군을 상대해야하는 악재에 내몰린 이순신 이하 조선 수군의 처절하기 그지 없는 전투신은 상당히 훌륭하다. 그 이전까진 조선 수군은 백병전에서 왜군보다 약하다는 언급이 자주 나왔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창이나 칼을 놓친 상황에서 허리춤에 가지고 있던 조선낫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적들을 한 번도 아니고 두세 번 반복해서 찔러 죽이고 얼굴에 피가 튀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잔인함보다는 처절함이 느껴진다. 특히 일본 무사에게 어깨를 한 번 베여 쓰러지고 다시 칼 맞아 죽기 직전 성한 팔로 무사의 발을 잡아 넘어뜨린 다음 낫을 뽑아들어 악 받친 비명을 지르며 무사를 마구 찔러 죽이는 조선 수군 졸병의 모습은 극에 달한 처절함을 잘 연출하고 있는데, 졸병이니만큼 단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들만큼 훌륭한 장면을 연출했다.[134] 또한 초반 다른 전선들이 물러나 있는 동안 혼자 한참동안 전투를 치르고 있는 대장선의 묘사라던가 그 휘하 병졸들은 다른 장수들과 다르게 적선의 숫자에 당황하거나 겁을 먹지 않고 그동안 훈련한 대로 지시에 따라 침착하게 전투를 수행하는 모습도 잘 그려진다.

또한 처절함 이후 이순신이 내지르는 "적의 예기가 꺾였다! 우리 조선 수군은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의 힘으로 이 나라 조선을 구하라! 돌격하라!" 라는 일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조선 수군의 역관광 세리머니에서는 절로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며, 일본 수군 무장들이 그와 대조적으로 집단 멘붕하는 모습도 감상 포인트. 특히나 와키자카(김명수 분)가 주저앉은 채 "어찌, 어찌 이~ 이런…일이…" 라며 한탄하는 것과 "퇴각해….. 퇴각↘하란↗말이야아아아아아!!!" 라며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 도도(최동준 분)가 나자빠진 채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다! 하아하하핳-!!" 하며 절규하는 장면[135] 등은 당시 일본군이 맛봤을 절망을 조금이나마 간접 체험하게 해 준다.[136]

와키자카(김명수 분)가 고양이를. 그것도 터키시 앙고라를 던지면서 '미시(未時: 13시~15시)야, 미시…!!!' 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함선에 고양이를 데리고 탄 것은 눈의 동공을 보면 시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137] 그러니까 이 장면은 단 한 척의 판옥선도 격파하지 못한 상태서 일본 수군에게 물살이 유리한 시각마저 끝났다고 한탄하면서 그 분노를 고양이한테 화풀이하는 장면인 것. 한편 조선군은 앙부일구를 보며 시각을 확인하고 신기전으로 시각을 알리는 장면이 나오며, 자막으로도 오후 1시라고 나온다.

그 밖에 이순신이 임지로 향하는데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됐어도 전선은커녕 소수의 부하들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통상이 돌아오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따라나서는 모습이나. 출전 직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이 조선 수군들에게 대장선이 선봉이 될 것을 선언하며 전투 의지를 북돋는 장면도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위엄과 휘하 병사들의 충성심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명장면이다. 연설 직후, 병졸들도 어쩔 줄 몰라 하고 그걸 보던 배설이 실실 비웃는데 다른 병사들 사이에 있던, 하반신이 불구가 된 정대만이 창이나 칼도 아닌 돌을 내리찍으며 이순신을 따라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자 다른 병사들과 하급 군관들도 사기가 올라 창을 찍으며 함성을 내지르는 장면은 꼭 한 번 볼만할 명장면. 해당 영상
명량 해전.
이것은 단 13척의 배
적선 333척을 물리친 실로 기적적인 승리였다.
이 날 분멸한 적선의 수는 모두 31척,
분멸, 격침되진 않았으나, 전투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적선의 수는 92척에 달했으며,
물리친 적의 수는 모두 1만 8466명에 이른다.

당시 일본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 패전으로 인해
한산에서 여수까지 제해권을 확대하고,
수륙병진(水陸竝進)을 통한 도성 장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명량 대첩은 바로 그 일본군의 전략을 모조리 무산시킨 일전(一戰)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휘하 장수들, 이름없는 군사들과 백성들. 그들의 강인한 투지와 저력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또한 이후, 정유년에서 무술년으로 이어질 수군 재건과,
23전 23승 이순신의 빛나는 전승 신화.
그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 불멸의 이순신 명량 해전 편 내레이션

12. 기타


[1] 비전투 인원 및 협선 병력 포함 시 약 2200명 추정 [2] '日本戦史 朝鮮役' 본편 354쪽 [3] 기록상 최소 330~최대 500여 척이나 울돌목에 진입한 전선은 130여 척이다. 전황으로 미루어보아 후방의 함대는 울돌목에 진입하지 못하는 대형전선 아타케부네가 주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4] 안위의 전선에서 익사한 8명을 포함한 수치. [5] 사망 및 부상자 수는 난중일기에 근거한 수치이나,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좌선만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6] 왜군의 인적 피해와 관련한 교전 참가자들의 증언이 전체 병력에 대한 것인지, 자신이 목격한 것만 말한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상당한 피해가 있었음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7] 조선 수군이 힘겨운 1승을 했을 뿐, 제해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다. 중과부적인데다 외해를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고군산도까지 섬들 사이사이로 후퇴하였으나, 일본 수군이 추격해오지 않자 다시 남해로 내려왔다. 이후 배설의 함대처럼 각지에 숨어있던 70여척의 함대가 조선 수군에 합류한다. [8] 이 시점이 양력으로 10월 말이다. 일본 수군의 보급을 통한 수륙병진이 없으면 일본군은 혹한을 견딜 수 없다. 이에 일본군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라도 남해안 4개 왜성으로 꽁꽁 틀어박혀, 완벽히 조명연합군 육군도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9] 먼치킨물 소설에서나 볼 법한 전황이 일어나 현실은 소설을 능가한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10] 당시 전주, 남원도 함락된 상태였다. [11]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과의 관계와 비슷하게 행주 대첩의 승장 권율도 다소 덜 알려진 이치 전투를 지휘했다. 이치 전투의 전공 또한 3대 대첩과 명량 해전에 결코 뒤지지 않는 대단한 전공이었으며, 권율 본인은 이치 전투가 행주 대첩보다 더 힘들었다고 언급하였다. [12] 조선이 전반적으로 도로망을 정비하지 않은 까닭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실질적으로 지형의 차이가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는 산이 대다수의 면적을 차지하며, 동고서저의 지형이 뚜렷하므로, 북쪽의 개마고원으로 부터 이어 내려오는 고도가 높은 지형(태백산맥 및 소백산맥)으로 인하여 동쪽은 높은 산들이 즐비한 가운데, 서쪽은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내부에서 발달한 옛 대도시 및 도읍들은 대부분 서쪽에 분포하며(서울, 평양 등), 이름있는 곡창지대 역시 서쪽에 있었다.(대전, 호남평야 등) 만약 서해가 뚫린다면, 도로망과는 별개로 넓은 평야지대와 곡창지대가 언제든지 왜군의 손쉬운 상륙으로 인한 직접적인 공세에 노출되므로, 서해를 통한 왜군의 공세가 성공적으로 실행되었다면 조선은 이전과는 다른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실제로 전란 초기에 조령(문경새재)이 뚫리자마자 파죽지세로 진군한 왜군을 그 예시로 들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일어났었던 요나라의 공세 역시 해안선을 따라서 한반도 서쪽으로 진입하였고, 퇴각 역시 서쪽을 통해 빠져나갔다. 이러한 지리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퇴각하는 요나라 군을 요격한 것이 그 유명한 귀주대첩. [13] 대표적으로 진주성과 행주산성이 있다, 행주성은 몰라도 진주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이다. [14] 고문 후유증과 만성 위염에 어머니의 모친상도 지키지 못했으며 아끼던 막내아들 또한 왜적에게 보복당해 숨을 거두었고 자신이 피땀흘려 이뤄낸 수군 병력들도 원균의 큰 실책으로 인해 궤멸된 상태였으니 무엇 하나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참고로 조선에서는 효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는데 모친상을 지키지 못한 현실을 상당히 괴로워했으며 더욱이 이순신은 극진한 효자이기도 했으니 그 고통은 차마 표현 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정말 상황이 무엇하나 좋을 것이 없었던 셈. [15] 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의 이순신은 철저하게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치밀한 전략과 확실한 정보를 통해서 비로소 승리가 점쳐진 전쟁을 했다. 아군의 손실이 크거나 의미가 없는 전장에는 아무리 일본군이 도발하고 유인해도 일절 응해주지 않았다, 그런 이순신이 전멸을 각오하고 결사 항전할 정도로 조선의 매우 중요한 전투였고 결국 불패 신화를 이어나가 나라와 민족을 구했다. [16]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배설의 12척 이후로 명량 해전을 거치고 조선수군이 단기간에 급속도로 복원되었기때문에 정황상 그렇게 추측한다. [17] 사실 의심이 많고 이기적인 성질을 가진 선조에게는 이순신의 존재는 매우 거슬릴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일단 본인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전쟁의 장기화로 의병들의 규모가 매우 커졌고, 그들을 관군으로 편입시켰으나 정부의 사정상 그들을 통제하는게 아니라 정부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는 수군도 마찬가지였고,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정부의 지원없이 자체적으로 규모를 불리고 역으로 정부에게 물품을 만들어 가져다주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서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초기부터 버텨주고 있었기때문에 호남은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었기에 주변 민심 역시 이순신에게 이루 말할것없이 우호적이었다. 즉, 선조에겐 이순신은 자체적으로 군을 유지할 능력이 있으면서 그것을 활용할 방법을 알고, 조선 수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해군 총사령관인데다 지역 민심까지도 우호적인 그야말로 역심을 품으면 정권을 뒤집을 만한 힘이 있는 인물로 보였을것이다. 그리고 이 루트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서 나라를 뒤집고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게 바로 이성계다. [18] 현대의 군 체계로 따지면, 해임되었던 해군 대장인 해군참모총장이 복직하는데 계급은 대장이 아닌 중장으로 복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9] 역사학자들이 이순신의 인격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보통의 일반 장수 같으면 그동안 나라를 위해 사력을 다해 적과 싸워 수없이 이기기를 반복한 자신을 말도 안되는 거짓 정보 하나에 휘둘려 의심하고 박해하며 파직시켰다가 뒤늦게 조정에서 자기들이 잘못했으니 다시 자리를 맡아달라고 굽신거리면 단칼에 거부하거나 그대로 잠적해버려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나, 자그마한 원망은 커녕 자길 내치고 자기가 피땀 흘려 일군 해군을 몰살시킨 조정의 부탁을 군말없이 받아들이는 초월적인 행보를 보인 이순신의 마음은 오로지 애국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기막힌 사실은 이때 이순신은 모친상 중이었다. 조선의 근본 교리중 하나가 효이기 때문에 부모의 상중인 인물은 얼마든지 왕의 임명을 거절할 수 있었다. 더욱 기가 찬 사실은 이순신의 모친은 아들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상경하다 사망한 것으로 선조의 책임이 적잖은데 그 원망을 억누르고, 효를 목숨보다 소중히 하는 조선에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불효자가 되기를 각오하며 관직을 받은 것이다. [20] 어이없는 점은, 선조가 이순신에게 초계 지역으로 백의종군을 시켰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의 본관을 떠올려보자. [21] 사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을 벌일 예정조차 없었다. 원균이 함대를 띄웠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 원균이 어떤 놈인지 잘 모르던 일본군은 그 규모를 알아본 후 이전에 없었던 규모임을 확인한 후 '드디어 우리가 죽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쌓아 놓은 모든 것을 총동원해 방어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부딪혀 보니 조선 수군의 실태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원균이 얼마나 조선 수군을 내부적으로 말아먹었는지 알 수 있다. [22] 전술했듯이 이순신을 복직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권율이 찾아왔다. 즉 조정 내에서 이순신을 대체할 인물이 없음을 이미 기정사실로 여겼단 뜻이다. [23]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 오의 마지막 명장으로 인정받는 장수로, 그 유명한 육손의 아들이다. [24] 명나라 때 관리. 성품이 곧아 남의 모함에 빠져 귀양 갔다가 풀려나 복직되었음. [25] 물론 조선에도 '기복 제도'가 있어서 꼭 필요하다면 임금들이 그런 관례를 깨고 '상중이라도 상복을 벗고 관직으로 나오라' 하여 불러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 세종조의 명재상 황희나 천문학자 이순지 등도 모친상을 당해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있을 때 세종이 친히 기복 명령을 내렸다. 당시 좌의정이던 황희는 임금의 기복 명령을 받들어 조정에 다시 나왔지만, 이순지는 상례를 다 치러야 하는 이유를 적은 글을 올려 출사하지 않았다. 세종이 이순지의 대체 인력을 확보하면서도 다시금 기복을 명령하고 나서야 이순지는 관직에 나왔다. 아무튼, 이순신도 이순지처럼 상중이라 벼슬길에 나올 수 없다고 뻐팅기는 것도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당장 이순신의 자당 본관과 백의종군하며 지낸 지명을 생각해 보자. [26] 윤두수가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됨이 싫어서 칠천량 해전 직후에 각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김경진이 퍼트린 낭설일 따름이다. 실록에서 해당 기사를 전부 읽어보면 전혀 그런 맥락이 아니다. 임금도, 신하들도 수군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유효한 방어책을 논의하다 나온 의견이었을 뿐이다. [27] 한반도는 호남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토가 산지였으므로 도로공사를 하려면 큰 인력이 필요했다. 예부터 한반도를 침략한 외적은 주로 북방의 유목민족이었으므로 도로를 잘 닦았다가 외침을 당했을 경우의 위험이 높았다. 그래서 조선은 도로 건설에 열을 올리지 않고 수로를 주로 이용했다. 교통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2010년대 이후로도, 만항재로 대표되는 강원도나 경북 지역 일부는 산지에 터널을 뚫지 않아서 그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야 하고 당연히 그만큼 교통사고도 많이 난다. [28] 원문 상에는 도적 적자가 없지만 주어를 넣어서 의미를 이해한다. 한문에서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기 때문. [29] 이와 비슷한 예로 약 400년 후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이 있다. 당시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은 이순신의 대장선이 반나절 가량 일본군의 포화를 받아냈듯 후계함들이 오기 전까지 전선을 홀로 유지하며 크게 활약했다. 해군소장 토마스 C. 킨케이드가 남긴 "…그렇지만 응급 수리된 항공모함 1척이 남아 있었다." 라는 말이 유명하다. 이후 엔터프라이즈도 직접 참여한 그 어떤 해전에서도 전략적으로 패하지 않고 해전의 전설이 되었다. [30] 장졸이라고 하지만 패잔병과 노병이 대부분이었다.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따르던 정예 수군들은 이순신이 재부임했을 당시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31] 배설의 행동을 봤을 때 PTSD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저런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선조가 원균 빨아주다가 일어난 칠천량 해전에서 죽다 살아난 사람이라서 PTSD에 걸리건 선조한테 정나미가 떨어지건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던지라... 그래서 배설의 이후 수상한 행적과 연관하여 이때부터 배설이 다른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32] 이순신은 일기에서 "만호나 하면 딱일 인간이 우수사라는 과분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김응남과의 연줄 때문이다." 라며 김억추를 평했다. 다만, 이순신은 원체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편인지라(그 권율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했고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사직의 위엄과 임금의 총애덕이지 자신이 잘한게 아니라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평가 문서 참조.) 직접적으로 칭찬을 한 인물은 녹도 만호 정운(특히 이순신이 아낀 인물인데, 정운이 전사하자 제문을 올리며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정운과) 의논하면 상황이 술술 풀렸고 믿는 사람은 그대(정운)밖에 없었다."같은 표현을 넣었다.), 광양 현감 어영담("경상, 전라 두 지역의 변장으로 임명되어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계책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가 전염병으로 죽자 애석해하는 표현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등 극소수였다. 그걸 감안하면 만호 정도의 실력은 갖췄다고 평가한 김억추는 상대적으로 괜찮게 본 거긴 하다. [33] 이순신은 지병으로 만성 위염에 시달렸기 때문에 종종 몸져 누웠었다. [34] 이때의 교전을 어란포 해전이라고 부르는데, 백의종군 후 이순신의 첫 번째 승전이었다. [35] 배설은 결국 선조 32년(1599)에 선산에서 잡혀 효수되었다. 별다른 말 없이 한 줄만 쓰여져 있어서 평소 이순신은 배설을 준수하게 평가했고 도망간 데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전부터 배설에 대해 이순신이 안 좋게 봤던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명량 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하는 데에도 미적거려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가 괘씸하다고 적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도 이 묘사가 나온다. 그래도 배설의 행위에 대해서는 참작할 여지가 있다. 칠천량 당시 패한 기록으로 PTSD도 있을 것인데, 몇 척 안 남은 배로 강력했던 적에게 다시 도전한다면 평범한 사람은 도망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명량 해전은 지휘관이 이순신이라 이겼을 뿐인 전투인데 배설은 이순신과 같이 싸운 적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 승리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못 싸우겠으면 그냥 빨리 지휘권 인계하고 사직하거나 보직 변경을 하던가 병가 내고 쉬던가 했어야 하는 걸 그냥 빤쓰런해버린 게 문제지.. [36]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기함인 아타케부네( 안택선)와 크기가 비슷했는데, 일본 수군은 아타케부네를 해상의 성(海上之城)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대한 배라고 인식했다. 주 전투함인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의 반 정도 크기였다. [37] 보통 전투직전에 배에 물을 뿌려 혹시 있을지 모르는 화공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면 솜이불에 물을 먹여 걸어둔 것도 화공 대비책일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다만, 굳이 배에 물을 뿌리는 게 아니라 솜이불을 두른걸 고려하면 현재 가용 가능한 전선 전부를 가지고 온 것이기에 혹여나 조총사격 등으로 배가 파손될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기 위해 내구도를 보강하려는 목적을 겸했을 가능성이 높다. 육상전으로 치자면 탱크에 임시로 장갑을 보강하는 것과 비슷한 목적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셈. 다만 이 기록 자체가 사실확인이 힘든 면이 있어서 100% 신뢰해선 안되는 기록이다. 그런데 대장선 혼자서 장시간 전투를 치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니 처음부터 무쌍을 고려한 조치였을지도… [38] 이순신이 병법에서 인용한 말은 모두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지만 오자에 나오는 경구와 이순신의 인용문은 차이가 있다. 오자병법의 원문은 치병(治兵)편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기를 바라면 죽는다(必死則生 幸生則死)'와 여사(勵士)편의 '한 사람이 목숨을 걸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 [39] 회전 직전 도주. [40] 실록에는 정응두로 오기. [41] 실록에는 영등포 만호로 오기. [42] 이런 혼란 때문에 후대의 작가들은 난중일기에서 한가지 버전을 채택하기 보다는 각 버전에서 마음에 드는 숫자만 취사선택해서 쓰는데, 예를들어 '적선 133척에 쳐부순 척수 31척'하는 식으로 재조합 하는 게 일반적. 심지어 모 도서에서는 아예 침몰한 배가 133척이라고 잘못 나온다. [43] 좌선: 기함, 대장선을 이르는 조선 시대 군사 용어 [44] 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수연이라는 지명은 다른 지도에 보이지 않으며 수연이라는 것은 웅천의 옆 땅을 말하는 것이다.' 정한위략, 나베시마 가기(家記) [45] 화포로 덕지덕지 무장하고 체급또한 커다랬던 판옥선에 비해 세키부네는 화포를 탑재하지 않았던데다가 체급또한 약간 작았기 때문에 사실상 전차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숫자가 적다고 얕보고 장갑차를 꺼낸격이다. 몰론 숫자가 이렇게 많으니 일단 10대중 1대만이라도 근접하면 이길수 있겠지만 그것도 예상하여 쉽게 다가올 수 없는 지형을 선정한 것이다. [46] 갓 부임한 김억추야 그렇다 치더라도 안위, 송여종, 유형 등 모두가 이순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장수들이다. 그런 자들마저 두려움에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47] 이상한 것은 김억추는 이후 전황이 반전되어 조선 수군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어 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버텼다는 것이다. 이후 김억추가 육군으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여 옮겨간 걸 보면 해전 지휘에 문외한이라서 소극적으로 굴다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쫄아서 못 움직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량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배는 칠천량 패전 후 수습한 12척에 김억추가 가져온 배 1척을 합하여 군선 13척이라고 본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김억추가 가져온 배는 규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므로 군선이라고 보기 애매했거나 병장기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준비가 된 판옥선은 모두 전투에 투입됐기 때문. [48] 중군장은 좌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는다. [49] 오후가 되어서야 조류가 바뀌어 조선 수군에게 유리해졌다. [50] 명량 해전 자체가 온갖 왜곡된 정보들이 알려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나온 명량 철쇄설과, 울돌목의 조류를 이용해 왜선들이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깨져 피해가 속출했다는 정보이다. 실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이와는 정반대로 조류까지 불리한 상황이었음이 드러났다. [51] 중군에게 명령을 하달할 때 거는 깃발. 난중일기에서 초요기와 함께 걸었다고 언급된다. [52] 조선시대 군영에서 대장이 장수를 부를 때 사용되던 깃발로, 북두칠성이 그러졌다. # [53] 어차피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달아나도 조선이 일본에게 장악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명예롭게 적과 싸우다가 죽고 싶은지 치욕스럽게 군법에 따라 죽고 싶은지 묻는 것이다. 쉽게 말해 "너 싸우다 죽을래, 나한테 죽을래?"라고 일갈한 것. 특히 난중일기에서 두 번이나 이 구절을 적어 강조한 점이 특기할 만하다. 난중일기에서 이렇게 두 번 말하는 강조법을 쓰는 구절은 몇 군데 더 발견되는데, 류성룡이 죽었다는 루머가 돌자 사실이라면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대목, 부모와 아들의 죽음을 통곡하는 대목 정도밖에 없다. 그만큼 당시 사정이 다급했다는 것. [54] 후일 이들 중 도도 우지카츠는 모리를 구출한 공으로 영토를 포상으로 받게 된다. [55] 마타시로(又四郎)를 이렇게 표기한 건데, 이때 전사했으며 별명이 마타시로인 자가 둘 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가리킨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간 마사카게(菅正陰)라는 설도 존재한다. [56] 조선 수군의 무상(舞上)이자 사부(활 쏘는 병사). 한문으로 쓸 때는 金石孫이지만 읽을 때는 '김돌손'으로 읽는다. [57] 실제로 이순신의 해전 중 명량해전을 제외하면 모두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선제공격을 가한 전투들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만큼은 13척이라는 숫자로 절대 피할 수도 없고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전투를 감행해야 했으니 천행에 바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58] 그래도 당시 판옥선의 구조상 붙어봐야 3척이 붙었을테고, 세키부네보다 높은 판옥선의 특성상 이점을 충분히 살려 한척씩 격파했을것이다. 그렇지않으면 이런 전과는 나오는게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순신은 그 이점을 극대화시켜 몇시간에 달하는 전투중에서도 사상자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한것이다. [59] 더 크다고 하는 것은 주로 난중잡록에 의거한 것이고, 133척 중에서 10척만이 온전히 살아 돌아갔다면 사실상 출전한 일본 주력함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조선수군이 굳이 고군산도까지 후퇴할 이유가 없으며, 일본함대가 전라도 남서부 해안가를 유린할 상황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난중잡록 자체는 기록유산으로서 인정받지만, 주워들은 이야기까지 쓰는 등 불확실한 부분도 많다. 그리고 명량해전 직후 일본 함대는 벽파진에서 멀뚱거렸으므로 이순신 장군이 전과를 작성할 시간은 있었다고 본다. [60] 아니면 선발대 133척에서 피해 없이 본대에 재합류한 병력이 10여 척이라는 내용을 두루뭉술하게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 [61] <고산공실록>과 같으므로 매우 신뢰성 높은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62]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무가관위가 이즈모노카미(出雲守)이다. 간양록에서 '내도수'라고 한 것이 이와 관련이 있다. [63] 주사, 즉 수군을 말한다. 이 수군이 격군을 포함했는지, 아니면 갑판의 아시가루와 무사 등 전투원만 일컫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선조실록에 실린, 일본 수군에게 잡혀 명량 해전에 참전한 조선인 포로가 '울돌목에서 통제사와 접전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말한 증언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64] 일본에서는 봉건 체제에서 다이묘 소묘의 중신(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을 가로라 칭한다. [65]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이었다가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자리를 옮긴 군감 모리 타카마사(1559~1628). 2만 석의 영토를 가진 상당한 고위직 가신이다. 본래는 모리(森, '모'자가 단음이다.)씨였으나 후일 히데요시의 수하에 들어가자 허가를 받아 본래의 주군인 모리(毛利, '모'가 장음이라는 차이가 있다.)의 성씨를 칭하였다. 히데요시에게 2만 석의 영토를 받았으며, 왜란 후에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동군에 항복한 행적이 참작되었고 친분이 있던 도도가 탄원해준 덕에 영토를 고스란히 보전해 사이키 번의 번주가 되었다. [66] 도도의 코쇼(小姓, 종자) 출신인 측근 가신으로 이름은 도도 타다시게이다. 본래 성씨는 이마이씨이지만 도도 성을 하사받았다. [67] 도도의 가신으로, 이름은 도도 우지카츠이다. 역시 본래 성씨는 나가이씨이나, 이 공으로 인해 명량 해전이 끝나고 더 많은 영토와 도도 성을 하사받았다. 오사카 전투에서 전사했다. [68] 현대의 시각으로 아침 9시. [69] 도도 다카토라를 말한다. 그의 무가관위가 이즈미노카미(和泉守)이다. [70] 관점의 차이이다.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에 나온 것 처럼, 박살이 나서 더 이상 조선군을 건드릴 수 없던 것을 초점으로 둔다면 일본군이 물러났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고, 결국 수적 열세 때문에 물러나게 되었음을 촛점으로 본다면 일본군의 기록이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조선 수군을 건드리지 못했다는 말을 안 썼을 뿐이다. [71] 몇몇 일본 논문들이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들어 앞뒤 맥락을 생략하고 조선군이 도망쳤다며 정신승리에 쓰기도 한다. 다이묘 클래스에서도 사상자가 나오고 가로와 수군이 괴멸한 전투에서 지엽적인 서술이 서로 상충된다는 이유로 명량에서 조선군을 패주시켰다면서 승리선언을 하는 사람들이 일본에는 놀랍게도 실존한다. [72] 그렇다고 이순신이 항상 불리한 전황에서 극적으로 승리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항상 연합함대를 중시하여 늘 왜선보다 숫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싸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이순신은 신중의 신중을 거듭해 아군의 피해가 크거나 그 의미가 없는 전투는 왜군들이 아무리 유인하고 시비를 걸어도 결코 하지 않았다. [73] 전근대에는 수로가 육로보다 훨씬 용이한 수송루트였고, 그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서해의 수운이 핵심적인 보급루트였다. [74] 위에 나온 전멸 항목에서는 지휘관과 부관이 피해를 입으면 병력 손실이 10%만 되어도 전멸로 칠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133 가운데 31이라는 건 20%가 넘는 수치이다. [75] 상술했듯 이것은 군감 모리가 탑승한 일본 수군의 함선이 도도와 함께 직접 돌진해 도선 공격을 가한 것이다. 여기에 이순신 본인과 송여종, 정응두가 지원사격을 가해 스스로도 낫을 던져 안위의 배에 걸고 건너가 도선해 열심히 육박전을 벌이던 모리를 물에 빠뜨렸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도도의 가신들에게 구출됐다. [76] 참고로 해당 기사의 내용은 제독 총병부에 보내는 자문(咨文), 즉 현재로 따지자면 전시 총사령부인 한미연합사령부에 보내는 공문이다. 명량 해전의 승리가 워낙 큰 승리였고, 실제로 선조가 임란 중반부터 이순신을 견제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이하 서술되는 내용에서처럼 "소방의 수군이 작은 승리를 거둬 적봉이 조금 좌절됐다"는 것을 "폄훼다"라고 보는 시각 또한 충분히 가능하나, 애초에 "소방(小邦)"이라고 일컬은 것은 대국인 명나라에 대하여 조선을 겸허하게 말하는 것이고, 이미 한중일 3군 모두가 자타공인한 대승이었던 것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이었고 반박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으므로 이에 뒤따라오는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幸得少捷)"라던가, "적봉이 약간 꺾였으니(稍挫賊鋒)"라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구절만을 근거로 "선조가 대승을 작은 승리라며 대놓고 폄훼하려는 의도가 뻔히 드러난다"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는 부분도 있다. 실록상 대첩(少捷)이라고 쓴 표현들을 보면 내부 문건들이기도 하고.. [77] 아래 서술되는 양호 에피소드와 비슷하게, 선조실록 31년 8월 15일 기사의 진린과의 접견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진린의 공을 훨씬 더 치하하고, 소방의 수군 또한 명 황제의 위엄에 힘입어 약간의 승리(賊鋒)를 했다고 표현했는데, 진린 또한 이에 대해 "이순신이라 가능한 일이었지, 명군이었으면 작은 승리도 못했을 것"이라며 이순신을 치켜세우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에도 "소방의 수군"이라 칭하며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정말 비열한 군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선조가 실제로 이순신을 견제했던 것도 사실이긴 하나, 언어 자체만 놓고 본다면 당시 외교 장면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표현들이었음을 감안하자. [78] '소방'이라는 단어는 조선 초부터 사용한 데다가 이 시기는 명나라가 참전한 만큼 기존보다도 더 굽실거릴 이유는 충분했다. [79] 이 사람은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에게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내어 표창하며 "배에다 괘홍(붉은 비단을 내걸어 축하한다는 뜻)하는 예식을 올리고 싶으나 길이 멀어 가지 못한다." 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11월 16일) 또 1598년에는 선조에게 이순신의 벼슬을 올려주라고 압박할 정도로 이순신을 좋아하던 장수이다. [80] 양호가 선조와 만나자 선조는 '경리 님 덕분에 나라를 구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조촐하지만 받아주십시오.'라며 큰 선물을 준비했는데, 정작 왜군들과 싸워 공을 세운 것은 조선 관군들과 의병들인지라 아무리 외국에서 온 명나라 양호라도 함부로 받을 수 없어 거절했으며, 양호가 이순신의 명량 해전 승리를 경축하기 위해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선조가 "그건 장수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데 왜 그런 상을 내렸습니까?"라고 따지자 양호가 반박한 것이다(선조실록 30년 10월 20일 기사). 명량 해전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승리라 명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될 정도인데, 양호 입장에서는 막상 그 이순신의 상관인 왕이 그의 공적을 깎아내리니 화가 난 것이다. 명군의 입장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어 수송로가 확보되고 조선이 패배하면 곧바로 자신들에게 칼날이 들어오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어떻게든 명은 조선을 방파제로 일본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순신이 오히려 13척으로 수백 척이나 되는 대규모 함선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 것도 모자라 왜군 지휘관 여러 명을 전사시켰으니, 이순신은 수많은 명나라 장병들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 된다. 소설로 써도 작위적이라 불려도 할 말 없을 만한 전과를 알리는 소문이 안 나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선조가 이순신의 전과를 폄하하니 명군은 "당신은 말하는 것이 마치 '명군도 거기 있었으면 더 크게 이길 수 있었는데 명군이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만 해서 결과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됐다'고 비꼬는 말로 들리네?" 하고 발끈한 것이다. [81] 노량 해전을 제외한 이순신의 장계는 기록에 남아있는데 유일하게 명량해전의 장계만이 전해지지 않는다. 선조가 장계를 받아본 것은 확실한데 전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선조가 읽고 파기했다는 설도 있다. [82] 육군 소속으로 군량을 담당하는 자였으나 집으로 복귀 후 뗏목을 타고 가족들과 함께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피란가던 중 일본군에게 잡힌다 [83]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부하인 노부시치로라고 적었는데,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 [84] 군인 수천 수만 명이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과 물자는 대단히 많으므로, 예상 소비량을 계산한 뒤 소비 계획을 세워서 최대한 비축한 뒤 전시에 들어가야 한다. 보급을 제대로 안 하면 그 많은 병력들이 빈손이 되거나 밥을 굶는다. [85]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병력을 동원하여 아군 물량이 많은 상태에서 적을 격파하는 게 당연히 유리하므로, 각지에 있는 군대들이 합류하기까지도 또 시간이 걸린다. 전시에는 더더욱 전투에 대비해 편제, 편성을 손보고 결원은 보충 요청을 해서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86] 애초에 조선은 육로 정비를 등한시하고 해로 수송에 몰빵한 국가라 육상에선 대군을 움직일만한 보급을 원활히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던 상황이었다. [87] 왜군은 이순신의 기함 판옥선 한 척조차도 격파하지도 못 하고 쩔쩔매기만 했는데, 칠천량 이후로 흩어져 숨어있던 일부 해군과 백성들이 합류해 조선 수군이 어느 정도 다시 재건되었다. 싸우러 나섰다간 격파는커녕 도리어 자신들이 격파당하게 생긴 상황이 된 것이다. [88] 이순신의 위엄을 증명하는 일화로, 행주 대첩 때 충청 수사 정걸이 판옥선에 화살 수 만발을 실어 한강을 타고 올라왔는데 왜군들이 단순한 수송선단을 조선 수군의 지원이라고 생각해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어 퇴각한 사건이 있다. 만일 제해권을 빼앗겼다면 이때 온 것은 화살이 아닌 엄청난 수의 왜군이었을 것이니, 이순신은 행주대첩의 승리에도 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89] 이 당시에는 소금이 매우 비싼 값에 판매되는 물품이었다. 기록상 2개월 이내에 수만 석 곡식이면 엄청난 가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과장이 일부 섞였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전쟁통에 소금의 가치가 매우 높았음은 분명하다. [90] 1593년 한양을 내주고 남하할 때, 그들은 처음 투입 병력의 50%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91] 미 해군 역시 일 해군 항모를 격침시킨 후 전장에서 전함으로 구성된 일 해군 본대의 추격을 피해 후퇴했기 때문이다. [92] 현재의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인근에 수도권 전철 1호선 직산역도 있다. [93] 보통은 의병이 함께 편제되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경주에서조차 임진왜란 발발 4개월뒤에 관군과 의병이 1·2차 경주 전투를 벌였을 정도였다. [94] 더군다나 경로 중간을 노리고 있을 조명연합군을 일일이 박살내면서 수송해야 했다 [95] 이는 현대도 마찬가지인데 육상 물류 운송수단이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발달한 현대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물량이라면 같은 양을 옮기는 데에는 수운을 사용하는 편이 압도적으로 싸다. [96] 나름 육로를 활용했다는 유럽이나 일본도 사정이 다르진 않아서, 서유럽은 정말 오만곳에 운하를 파대서 공장 좀 돌아간다 싶은 곳에는 당연히 배가 들어갔고, 일본에서도 에도의 물류를 책임진 것은 도카이도의 육로가 아니라 수운이었다. [97] 전근대 금강 수운은 부강까지 올라왔으며 1927년 일제의 자료를 보면 공주 100석, 대평리·부강 60석까지 운항이 가능했다고 한다. 토사의 퇴적이 덜했던 16세기 말엽이라면 이보다 항행조건이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98] 이시다 미츠나리는 임진왜란에서 몇몇 다이묘의 활약상에 대해 히데요시에게 참소해 두고두고 피해자들과 원수를 진 적이 있는 인물이다. 무서울 수밖에 없다. [99] 이들이 출진한 섬진강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00] 진도를 일컫는 것으로 추측된다. [101] 도도의 아들로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이었으나 도도의 양자가 되었다. [102] 사도노카미, 나카츠카사 등은 모두 당사자의 무가관위, 즉 관직명이다. 조선군으로 치면 '이 수사', '정 만호'처럼 부르고 있는 격. [103] 물론 장수의 몸으로 직접 전선에서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일본의 호조 우지야스가 부하에게, 원균의 친척이 원균에게 한 말처럼 애초에 장수 본인이 전선에서 싸울 만한 상황을 만드는 것은 따지고 보면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104] 특히 칠천량 해전은 대체 어떻게 졌는지 모를 해전이라 평가될 정도로 조선 해군의 전력이 압도적이었다. 즉, 지금보다 훨씬 강력할 때에도 졌는데 압도적 열세인 지금은 무조건 지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배설의 도주도 그 연장선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05] 애초에 아무리 이순신이 천고의 명장이라지만 대장선의 군인들이 겁먹고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면 1 vs 133의 전투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대장선이 홀로 1시간 이상을 적의 공격에 맞서 싸우면서도 사망자 2명, 부상자 소수만이 나왔다. 올라탄 병사들도 사기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06] 일본의 배는 깊은 바다에서 속도를 내기 위해 뱃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이라 물의 저항을 덜 받으므로, 물길이 구불구불한 한반도 연안을 돌아다니기 위해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제작된 판옥선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대신 선회력에선 세키부네가 더 열등하기에 명량 해전에서 후퇴하는 세키부네들이 서로 부딪치는 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07] 놀랍게도 기록에서는 숙련된 정예병들보다 신병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나온다. [108] 잘 건조시켜 가공한 참나무나 송판은 웬만한 철판보다 단단해서, 화살뿐만 아니라 조총탄도 막아냈다. 괜히 사극에서 판옥선 난간 위 방패가 나무로 제작된 것이 아니다. [109] 세키부네는 삼나무 가문비나무처럼 강도는 떨어지지만 가공이 용이한 목재를 썼다. 자동차로 비교하면 판옥선은 장갑차나 전차, 세키부네는 철판을 덧댄 일반 민간차량 수준. [110] 다만 위 난중일기 기록에서도 나오듯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사용되었다. 천자총통은 너무 크고 화약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등에서는 1593년 이래로 천자총통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 사실 왜선은 내구력이 그리 좋지 않아서 지자총통 및 현자총통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111] 단, 이러한 화포들은 접현이 이루어지는 근접전에서는 그 활용이 제약되었을 것이다. 일본 함선들의 높이가 조선 군함(판옥선)보다 현저하게 낮으므로 접현시 지자 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는 하향 사격을 해야 하는데, 이때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높고 그것을 방지해주는 장치가 없어 하향 사격이 불가능했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하향 사격(Depressed Fire)을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지만, 현존하는 조선 시대 화약 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다만 승자총통의 경우엔 이중 토격을 사용하여 하향 사격을 가능케 한 부분이 존재한다.) 더구나 현재 학계의 연구처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차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대신 정상적인 교전이 벌어지는 50~200 미터 정도의 거리에서는 최고 효율을 발휘했다. [112]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군대만큼 무서운 군대는 없으며 그 군대를 상대하는 것이 병법의 최 하법이라 했다. [113] 이것 역시 의도했을 것이다. 물살이 극도로 센 전장환경이 딱히 조선군에게 더 유리한 것은 아니고 모두 힘든 환경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전장 환경으로 아타케부네를 편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114] 지금으로 따지자면, UN군 정도로 보면 된다. [115] 여기는 온갖 최첨단 선박들이 돌아다니는 현대에도 연 평균 4~5회씩은 선박 조난 사고가 일어나는 험한 곳이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바로 여기서 발생했다. 더욱이 물살에 쉽게 휩쓸리는 나무로 만든 옛날 배는 쉽게 들락날락할 곳이 못된다. [116] 연안 환경에 맞춰 평저선을 주력으로 운용하던 조선은 당연히 진도 내해를 주로 이용했으니 고작 고깃배 정도나 오가는 진도 외해 뱃길에 대해서는 조선인 포로를 붙들어봐야 별다른 정보가 나올 리가 없었다. 이렇게 뱃길에 대한 정보 없이 배를 들이밀면 무슨 꼴이 나는지는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아주 잘 묘사했다. [117] 김억추가 검풍을 휘날리자 왜선 수백여 척이 침몰하였다던가,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잡고 세 발로 전열을 무너뜨렸다던가, 막내 동생 김응추가 10여 장을 뛰어올라 20여 급을 베었다던가. [118] 1592년 1월 17일의 철쇄공석(鐵鎖孔石), 2월 2일의 철쇄횡설(鐵鎖橫設), 2월 9일의 철쇄관장목(鐵鎖貫長木), 3월 27일의 철쇄횡설. 사실 이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수군 수영들에는 철쇄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119] 거북선이 적 함대를 향해 돌격해서 휘젓고 다니면서 진형을 흐뜨러뜨리면, 판옥선은 그 흐트러진 진형에 엄청난 화력을 투사해 격멸시키는 것이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었다. 실제로 거북선 함장보다 판옥선 함장의 품계가 더 높았다. [120] 근거로 행록의 판본 중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없는 판본도 있음을 내세운다. 번동아제의 포스팅 [121] 애초에 행록, 즉 행장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 믿기가 힘들다. 행장이라는 것이 원래 고인의 행적과 성품을 기록한 것인 데다가 고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최대한 좋게 써주며 더하여 후대인이 보라고 쓰는 글이기 때문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넣는 것도 모자라 있는 사실을 과장하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어 써주기 마련이다. [122] https://dl.ndl.go.jp/pid/1920302/1/211 [출처] 智将李舜臣龍と伝説 , 金永治雄 著. 叢文社, 2008.9; 李舜臣と秀吉 : 文禄・慶長の海戦 片野次雄 著. 誠文堂新光社, 1983.7; 李舜臣覚書 Books 藤居信雄 著. 古川書房, 1982.7 [124] 오익창은 명량 해전 직전 피난민들과 사대부들에게 공문을 돌려 이순신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문신이다. 오익창은 물자를 이순신 함대에 지원하고, 자신의 호소에 응답한 사람들을 모아서 군량과 무기를 운송하면서, 피난용 어선들로 적 교란용 위장선 병력을 만들어 후방에서 지원하였다. 이 전적을 인정받아 전후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25] 구경을 늘린 오오즈츠, 즉 대조총을 동원해도, 판옥선 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며 판옥선의 3층의 사부들을 보호하는 참나무 방패에나 간신히 약간의 타격을 내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이점은 영화 명량에 충실히 반영되어, 이 영화에서 조총은 방패 틈 사이로 날아든 탄환 말고는 노 젓는 격군조차 못 죽이는 위엄을 달성한다. 오죽하면 영화 내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그리고 실제 역사는 그보다 더 적었다. 물론 총탄에 직접 맞지 않더라도 파편에 의한 피해는 막을 수 없기에 솜이불이나 가죽 판으로 둘러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126] 전형적인 개인 행장록 특유의 '공훈을 과장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행장에 임란 당시 '장군님께 이러저러한 계책을 상신했다.'느니, '활을 들고 함께 적을 섬멸했다.'느니 하는 글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특히 행장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를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쓰는 글이니만큼 이런 과장된 기록이 남음은 당연한 일이다. [127] 그런데 이 당시 기술력의 부족으로 일본 특촬팀이 지원하는 중이었다. [128]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체급 차이, 일본 측 화기가 거의 무력화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발휘된 조선 화포의 뛰어난 화력과 같은 것. [129] 권준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영남은 최소한 사천 해전부터 이순신을 깊이 신뢰하고 생사를 같이한 인물로 묘사되며, 우치적은 이순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라는 원균의 유지를 받든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역사를 비틀어 이들을 명량 해전에 참가한 것으로 설정한 이상, 도망치지 않고 싸우는 것으로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130] 현충사에 보관된 유물의 설명에는 의장용이라 써놨지만 실제로 이정도 장검은 충분히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검이며 이는 이 검과 비슷한 길이의 일본 노다치가 현대에도 충분히 수련이 이루어지고 실전적 동작이 충분히 잘 구사되는 걸로 입증이 된다. 오히려 사극에서 잘 묘사되는 지휘관의 짧은 검이 의장용 내지 비상용으로만 사용되는 검이라 장병기를 든 적을 상대로 대적할 수가 없다. [131] 실제 인물 안위는 상당히 용맹한 인물이었으며, 상술되었듯이 이순신의 대열에 가장 먼저 합류한 인물도 그다. 당장 제작진들이 검증은 제대로 안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32] 권준이 명량 대첩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충청 수사였던 데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한 달 전의 칠천량 해전만 보더라도, 충청 수사 최호는 칠천량에서 전사했고, 그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 권준이다. 당시 권준이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칠천량 패전 이후 수습이 가능했던 충청 수영 휘하 함선이 아직까지는 없었던 데 있다고 봄이 더 합리적이다. [133] 대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김억추가 아니라 그의 군관인 서한수다. [134] 의외로 조선낫은 다른 나라의 낫에 비해 다재다용으로 쓸 수 있는 구석이 많다. 자세한 것은 조선낫 참조. [135] 이 장면은 대본에서는 망연자실하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고 대사는 없다. 즉 배우의 애드리브였던 셈. [136] 바로 직전 있었던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쁨에 가득찬 환희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137] 일본에서 시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고양이의 눈을 확인해 시간을 알아보는 기록이 있긴 있다. 닌자들도 주변의 고양이들의 동공을 통해서 시간을 알아봤다라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그만큼 고양이들이 시간에 따라 들어오는 햇빛의 양에 따라 동공의 수축과 확장을 하기 때문이다. 고증에 맞지 않는 건 당시에는 일본에 해당 묘종인 터키시 앙고라가 전래되기 이전이라는 것이다. [138] 시신들은 방치하면 부패하고 썩어 전염병을 일으키기에 방치하기도 뭣했을 테고, 무엇보다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은 원통함에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물귀신이 된다는 미신도 있었기에 측은지심도 들었을 것이다. 옛날에 해군을 기피하는 이유 중에는 배가 침몰하면 시신도 못 찾는다는 것이 있었다. [139]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140] 숫자가 10배수 차이가 나는 전투(육전, 해전 모두)는 자동으로 전멸로 처리된다. [141] 다만, 나카가와 히메다마의 경우는 임진왜란 후 명으로 압송당해 처형당했다는 기록도 있어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