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라팔가르 해전 기념화[1] |
트라팔가르 해전 영어: Battle of Trafalgar 프랑스어: La bataille de Trafalgar 스페인어: La batalla de Trafalgar |
||
일시 | 1805년 10월 21일 | |
장소 | 트라팔가르 곶 | |
교전국 | 영국 |
프랑스 제국 스페인 |
지휘관 |
호레이쇼 넬슨† 커스버트 콜링우드 윌리엄 카네기 |
피에르 빌뇌브 피에르 뒤마뉘르 찰스 드 메디나† 페데리코 그라비나 이그니시오 데 아라바 나바레테 안토니오 데 에스카뇨 발타사르 데 시스네로스 |
전력 |
1급 전열함 3척 2급 전열함 4척 3급 80문 전열함 1척 3급 74문 전열함 16척 3급 64문 전열함 2척 5급 프리깃 4척 스쿠너 1척 커터 1척 |
1급 전열함 4척 80문급 전열함 4척[2] 74문급 전열함 24척 64문급 전열함 1척 프리깃 5척 브리그 2척 |
피해 |
458명 전사 1,208명 부상 |
4,395명 전사 2,541명 부상 8,000여 명 포로 1척 격침 21척 나포 |
결과 | 영국[3] 해군의 승리 |
[clearfix]
1. 개요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 U T Y.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호레이쇼 넬슨의 깃발 신호 문장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호레이쇼 넬슨의 깃발 신호 문장
Now, gentlemen, let us do something today which the world may talk of hereafter.
자, 제군, 오늘 훗날 세상의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짓을 해보자고.
커스버트 콜링우드, HMS 로열 소버린을 이끌어 연합함대의 전열을 돌파하기 직전
자, 제군, 오늘 훗날 세상의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짓을 해보자고.
커스버트 콜링우드, HMS 로열 소버린을 이끌어 연합함대의 전열을 돌파하기 직전
나폴레옹 전쟁 중이던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남서쪽의 트라팔가르[4] 곶(El cabo de Trafalgar)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 스페인 해군 연합함대의 결전.
2. 배경
이미 유럽 대륙을 거의 제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는 마지막 장애물로 영국이 남아 있었다. 1803년 영국은 바로 전 해 체결된 아미앵 화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우월한 해군력을 활용해 프랑스의 해안을 봉쇄하였다. 또한 영국은 지상군 전력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스웨덴,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끌어들였다. 일명 오스트리아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시작했다.선전포고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패권을 가로막는 마지막 방해물인 영국을 점령하기 위해 18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새로 편성하여 영불 해협과 접한 불로뉴 해안에 집결시켰다. 하지만 이들을 해협 건너편인 영국에 상륙시키는 것은 프랑스의 해안을 봉쇄하고 있는 영국 해군을 와해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프랑스의 해군력으로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고 와해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천재적 전략가인 나폴레옹 본인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이집트 원정 당시 아부키르 만 해전의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을 전부 섬멸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군대를 상륙시키는 데 필요한 6시간을 포함해서 단 24시간 동안의 영불 해협의 제해권이었다. 나폴레옹은 영불 해협을 방어하는 영국 해군을 섬멸하고 24시간만 영불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으면 6시간 안에 18만 명의 지상군을 영국에 상륙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다. 상륙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상전에서 그때까지 불패를 자랑하던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나폴레옹 본인의 몫이었으므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이른바 나폴레옹의 전성기 시절이어서 후반기 보여주는 판단 착오나 실수는 거의 없었다.[5] 반면, 대불동맹군은 아직 나폴레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신나게 털리기만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24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프랑스 해군의 임무였다. 나폴레옹은 해군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동맹국이 된 스페인 함대까지 끌어들인 후에 연합 해군으로 하여금 영불해협 근처의 영국 주력함대를 유인하여 영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킨 후, 영국 해군 함대가 분산된 이후에 프랑스 해군함대를 집결하여 영국 해협함대를 상대하며 영불해협에서 수송함대가 무사히 해협을 횡단할 시간을 벌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해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해군에 정확한 시간에 육군식으로 맞추는 요구를 했는데, 범선 시대에 해군이 그런 정확한 타임테이블을 맞출 수는 없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가장 경험많고 능력이 뛰어난 영국 해군에게도 절대 불가능에 가까운 무리한 요구였다. 물론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 함대를 분산시킨 후 각개 격파후에 시간을 끈다는 자체는 좋았지만 전열함이라는 전함들의 특성과 바다 기후의 특성을 간과한 것은 나폴레옹의 착각이었다.
게다가 이 작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삐걱이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해전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었던 제독인 트레빌이 갑자기 사망한 것. 트레빌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해 영국 해군을 격파한 적도 있고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아이티 쪽에 프랑스군을 보내는 임무에서도 중추를 맡아 잘 수행하기도 하는 등 경험있던 제독이다. 무엇보다 항구에서 방어한 것이기는 해도 넬슨을 막아낸 적도 있었는데 1804년에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6] 이 공백을 채워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나폴레옹도 한참 고민했으며, 급기야 나폴레옹은 후보 3명을 비서에게 언급하며 누가 제일 나은지 묻는다. 비서는 패전이긴 해도 해전 경험이 있기는 했던 빌뇌브를 선택했으며[7] 결국 빌뇌브가 툴롱 함대 및 연합함대의 사령관을 맡아 넬슨의 느슨한 포위망을 뚫고 출발하게 된다.[8]
그래도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무사히 카디스 항에 도착하여 그라비나 제독의 스페인 함대와 합류하였고, 1805년 4월에 서인도 제도를 습격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 지중해에 있던 호레이쇼 넬슨은 황급히 서인도 제도로 달려갔다. 그러나 빌뇌브 함대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귀환하던 중 칼더 제독의 영국군 함대와 만나 교착에 빠졌다(피니스테리 곶 해전. 1805. 7. 22). 그리고 자신의 연합함대의 부족한 실력을 현실적으로 잘 알고 있어서 처음부터 자신없던 빌뇌브는 영불해협으로 항진하지 않고 카디스로 대피했다. 이 순간에 이미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진공계획은 무산되었다.
로버트 칼더(Robert Calder) 제독.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는 피니스터리 곶에서 빌뇌브의 연합함대를 격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칼더 제독은 넬슨과 인연이 있는데, 세인트빈센트 곶 해전에서 넬슨이 존 저비스 제독의 명령에 항명하고 전공을 세우자 저비스 제독의 함대 부관이었던 그가 넬슨의 항명을 지적했으나, 저비스 제독이 오히려 괜찮다고 넬슨을 옹호한 적이 있다. 여하튼 칼더 제독은 피니스테리 곶 해전 이후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제독이 귀환하는 배가 프리깃함이어서는 안된다고 박박 우겨 넬슨에게서 전열함 1척[9]을 얻어내 영국으로 돌아갔다.
빌뇌브의 함대가 카디스에 박혀 있던 사이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라인 강 방면으로 진격해오자 나폴레옹은 불로뉴에 주둔 중이던 영국 진공군을 라인 강 방면으로 돌렸다. 사실상 영국 진공을 포기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진공을 위해 단단히 훈련시켜 두었던 이 군대를 십분활용해 대륙에서 동맹군을 탈탈 털어버린 후 빌뇌브에게 이탈리아 공격을 위한 육군 수송을 지시하며 나폴리로 항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넬슨의 함대가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스페인 주력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애초에 단순히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함대 실력 수준을 잘 알았던 빌뇌브는 함대 수리 및 보급문제로 출항을 보류 중이었으나[10] 여기에 크게 화가 난 나폴레옹 1세 황제가 자신의 후임으로 프랑수아 로실리 제독을 보낸다는 정보를 접하고 출항을 결정한다. 그런데 하필 이날은 카디스 항 앞바다의 바람이 약하고 파도가 높은 날이었다. 잠시후 서로 마주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영국 함대는 교전에 들어간다.
3. 양측 편제
출처3.1. 영국
전열 중앙 돌파가 적에게 반격을 허용할 시 득보다 실이 커지는 전술이었기에, 계획한 2열의 전열을 이미 구성한 후 움직였다. 넬슨의 풍상향 전열은 적 전열의 중앙을, 콜링우드의 풍하향 전열은 적 전열의 후미를 공격할 부대였다.
F-프랑스 노획함 출신
* 선두[11]
* 선두[11]
함명 | 함종 | 함급 |
층수, 포문 수 |
아프리카 HMS Africa |
3급 전열함 |
인플렉시블급 |
2층 64문 |
함명 | 함종 | 함급 |
층수, 포문 수 |
빅토리 HMS Victory[13] |
1급 전열함 |
빅토리급 |
3층 104문 |
테메레르 HMS Temeraire[14] |
2급 전열함 |
넵튠급 |
3층 98문 |
넵튠 HMS Neptune |
2급 전열함 |
넵튠급 |
3층 98문 |
리바이어던 HMS Leviathan |
3급 전열함 |
쿠라쥬급[쿠] |
2층 74문 |
컨커러 HMS Conqueror[16] |
3급 전열함 |
컨커러급 |
2층 74문 |
브리타니아 HMS Britannia[17] |
1급 전열함 |
로열 조지급 |
3층 100문 |
아가멤논 HMS Agamemnon |
3급 전열함 |
아르덴트급 |
2층 64문 |
에이잭스 HMS Ajax |
3급 전열함 |
애이잭스급 |
2층 74문 |
오라이언 HMS Orion |
3급 전열함 |
캐나다급 |
2층 74문 |
미노토어 HMS Minotaur |
3급 전열함 |
쿠라쥬급[쿠] |
2층 74문 |
스파시에트F HMS Spartiate[19] |
3급[F]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 풍하향[21] 전열(Lee Column) - 커스버트 콜링우드 중장
함명 | 함종 | 함급 |
층수, 포문 수 |
로열 소버린 HMS Royal Sovereign[22] |
1급 전열함 |
로열 소버린급 |
3층 100문 |
벨아일F HMS Belleisle[23] |
3급[F]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마스 HMS Mars |
3급 전열함 |
마스급 |
2층 74문 |
토낭F HMS Tonnant[25] |
3급[F] 전열함 |
토낭급 |
2층 80문 |
벨레로폰 HMS Bellerophon |
3급 전열함 |
애러건트급 |
2층 74문 |
콜로서스 HMS Colossus |
3급 전열함 |
콜로서스급 |
2층 74문 |
아실리 HMS Achille[27] |
3급 전열함 |
폼페이급[28] |
2층 74문 |
리벤지 HMS Revenge[29] |
3급 전열함 |
리벤지급 |
2층 74문 |
폴리피머스 HMS Polyphemus |
3급 전열함 |
인트레피드급 |
2층 64문 |
스윕셔 HMS Swiftsure |
3급 전열함 |
스윕셔급 |
2층 74문 |
드레드노트 HMS Dreadnought |
2급 전열함 |
넵튠급 |
3층 98문 |
디파이언스 HMS Defiance[30] |
3급 전열함 |
엘리자베스급 |
2층 74문 |
썬더러 HMS Thunderer[31] |
3급 전열함 |
컬로든급 |
2층 74문 |
디펜스 HMS Defence |
3급 전열함 |
벨로나급 |
2층 74문 |
프린스 HMS Prince |
2급 전열함 |
런던급 |
3층 98문 |
- Attached[32]
함명 | 함종 | 함급 | 포문 수 |
유라이얼러스 HMS Euryalus[33] |
5급 프리깃 |
아폴로급 | 36문 |
나이아드 HMS Naiad |
5급 프리깃 |
아마존급 | 38문 |
피비 HMS Phoebe |
5급 프리깃 |
피비급 | 36문 |
시리우스 HMS Sirius |
5급 프리깃 |
시리우스급 | 36문 |
피클 HMS Pickle |
스쿠너 | 8문 | |
안트레프리난테F HMS Entreprenante[34] |
커터 | 10문 |
3.2. 프랑스/스페인
1~6급의 분류는 영국 해군의 분류로,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나라의 함선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편의를 위해 함께 기술한다. 이에 따르면 3층 이상에 100문을 넘는 비상식적인 전열함이 1급, 3층에 90~98문을 단 거대한 전열함이 2급, 2층에 64~80문을 단 일반적인 전열함이 3급, 2층 갑판을 지녔으나 하단갑판은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상단에만 20~40문을 단 프리깃이 5급,그 이하의 소형 프리깃을 6급으로 분류한다.
B-영국 출신 노획함
* 프랑스 해군 - 피에르 드 빌뇌브 중장
* 프랑스 해군 - 피에르 드 빌뇌브 중장
함명 | 함종 | 함급 |
층수, 포문 수 |
시피옹 Scipion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포미더블 Formidable[35] |
3급 전열함 |
토낭급 |
2층 80문 |
뒤게 트루앵 Duguay Trouin[36]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몽 블랑 Mont Blanc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에호 Héros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뷔생토르 Bucentaur[37] |
3급 전열함 |
뷔생토르급[38] |
2층 86문[39] |
넵튠 Neptune |
3급 전열함 |
뷔생토르급 |
2층 80문 |
르두터블 Redoutable[40]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엔돔프타블 Indomptable[41] |
3급 전열함 |
토낭급 |
2층 80문 |
푸귀에 Fougueux[42]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에트레피드 Intrépide[43] |
3급 전열함 |
산 일데폰소급[44] |
2층 74문 |
플루토 Pluton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에글 Aigle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알제지라스 Algésiras[45]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스윕셔B[46] Swiftsure |
3급 전열함 |
엘리자베스급 |
2층 74문 |
아고노트 Argonaute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아실리 Achille |
3급 전열함 |
테메레르급 |
2층 74문 |
베릭B Berwick |
3급 전열함 |
엘리자베스급 |
2층 74문 |
코넬리 Cornélie |
5급 프리깃 |
비르지니급 | 40문 |
헤르미온 Hermione |
5급 프리깃 |
오르탕스급 | 40문 |
오르탕스 Hortense |
5급 프리깃 |
오르탕스급 | 40문 |
라인 Rhin |
5급 프리깃 |
비르지니급 | 40문 |
테미스 Thémis |
5급 프리깃 |
코퀼리급 | 40문 |
퓨렛 Furet |
브리그 | 18문 | |
아흐거스 Argus |
브리그 | 16문 |
- 스페인 해군 - 페데리코 그라비나 대장
함명 | 함종 | 함급 |
층수, 포문 수 |
넵투노 Neptuno |
3급 전열함 |
몬타녜스급[47] |
2층 80문 |
라요 Rayo |
1급 전열함 |
라요급 |
3층 100문 |
산 프란치스코 데 아시스 Ssn Francisco de Asís |
3급 전열함 |
산 파스쿠알급[48] |
2층 74문 |
산 어거스틴 San Augustín |
3급 전열함 |
산 파스쿠알급 |
2층 74문 |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Nuestra Señora de la Santíscima Trinidad[49] |
1급 전열함 |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급 |
4층 136문 |
산 레안드로 San Leandro |
3급 전열함 |
산 풀헨시오급[50] |
2층 64문 |
산 후스토 San Justo |
3급 전열함 |
산 호아킨급 |
2층 74문 |
산타 아나 Santa Ana[51] |
1급 전열함 |
산타 아나급 |
3층 112문 |
모나르카 Monarca |
3급 전열함 |
몬타녜스급 |
2층 74문 |
바하마 Bahama |
3급 전열함 |
바하마급[52] |
2층 74문 |
몬타녜스 Montañés |
3급 전열함 |
몬타녜스급 |
2층 80문 |
아르고나우타 Argonauta |
3급 전열함 |
몬타녜스급 |
2층 80문 |
산 일데폰소 San Ildefonso |
3급 전열함 |
산 일데폰소급 |
2층 74문 |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 Príncipe de Austrias[53] |
1급 전열함 |
산타 아나급 |
3층 112문 |
산 후안 네포무세노 San Juan Nepomuceno |
3급 전열함 |
산 파스쿠알급 |
2층 74문 |
4. 전투
트라팔가르 해전 상황. 붉은색 화살표가 돌격하는 영국 함대. 오른쪽의 푸른색 선박은 프랑스 함선, 검은색 선박은 스페인 함선이다.
4.1. 넬슨의 계획
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당시의 해전 양상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지금이야 바다 어디서든 레이더에 적함이 포착되고, 구축함의 미사일 시정거리 안에 들면 미사일을 발사하는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물론 배의 형태 자체는 지금과 같은 세로로 길고 가로로 좁은 형태지만, 무기가 그냥 '대포'였다. 이런 대포들은 포탄이 그냥 쇳덩이라, 쏘면 포탄이 다른 배에 맞고 폭발하지 않고 그냥 나아가던 방향대로 쭉 나가서 다른 배를 관통하는 방식이었다.[54] 또한 배의 형태상 함선의 앞뒤에는 포를 별로 놓지 못하고 좌우에만 많이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전후와 좌우의 화력차이가 극심했다.따라서 내 함선의 측면을 얼마나 오래 다른 배로 향하게 할 수 있는지가 포격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었다. 상술했듯이 함선의 전후면은 화력이 매우 부족하고, 측면의 화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당시 포격전은 '내 배의 전후면은 절대 내주지 않고, 측면만 내줘서 대포를 맞더라도 나도 그만큼은 쏜다.'라는 전략이었다. 그래도 간혹 배와 배가 평행이 아니라 직각으로 만나서 한 쪽이 신나게 얻어맞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는데, 이런 배치는 '종사'(Raking)대형이라고 한다. 즉, 일반적으로는 위의 사진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넬슨의 함대가 어느 지점에서 배를 돌려서, 프랑스+스페인 함대와 평행하게 선 다음 대포를 쏘는 것이[55] 당시의 해전 양상이었다는 얘기다.
또한, 영국 해군과는 다르게,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포격에 있어서도 '함체'가 아니라 '돛대' 쪽을 쏘도록 훈련했다. 전열함의 돛대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거대한 하나의 나무가 아니라, 큰 통나무 두세 개를 이어붙인 형태였고, 상당히 무거웠기 때문에 밧줄로 선체에 고정하는 형태였다. 흔히 전열함하면 생각나는 그 치렁치렁한 밧줄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바람에서 돛대를 덜 흔들리게 하려고 연결해 놓은 것이다.
어차피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전열함을 보면, 선체보다는 돛대가 더 크게 보이고, 선체에 구멍이 나면 승조원들이 어떻게든 수리를 하여 전투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지만, 돛대를 맞히면 전열함이 그 자리에 서 버리기 때문에 훨씬 전투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당시 함선들은 승조원들이 많은 경험을 쌓지 않는 이상 원하는 대로 기동하기 힘들었고, 함대전에서 일단 난전에 돌입하게 되면 당시의 신호체계는 무용지물이 되어 그냥 일단 적 배에 쏘고보는 전투가 일상이었다. 따라서 승조원들의 숙련도나 장교들의 경험과 대응능력이 떨어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가능하면 난전을 피하고 어떻게든 전열을 구성한 채로, 즉 단순하고 정적인 기동만을 하면서 큰 변화가 없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여기서 넬슨의 신묘한 전략적 사고가 발동한다. 영국 해군은 장대한 역사를 가진 반면, 프랑스 해군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스페인이야 아르마다가 있었지만, 어쨌든 당시 모인 연합함대 승조원들의 항해나 포격실력은 영국 해군보다 미숙했다. 그래서 넬슨은, 종사를 당하더라도 어차피 쟤네들은 많이 못 맞힐 거 같으니까, 일단 치고 들어가서 우리가 종사를 퍼붓자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전술교범과 반대되는 작전을 구상한 것이다.
이렇게 영국 함대가 이전의 상식인 단종진과 전열전술을 수행하지 않은 이유는 아래와 같다. 원래 영국은 전열전술에 집착하여 지나치게 경직된 함대 운용을 한 나머지 메노르카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이때 희생양으로 책임자인 존 빙 제독을 처형[56]한 뒤, 이 전열 전술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를 하다 대안을 한가지 제시되었다. 리처드 하우 제독이 고안한, 전열을 유지하되 상황에 따라 약간은 융통성있게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크게 개선된 교전법으로, 이걸 그외에 다른 제독들이 연구하여 만들어낸 것이 후에 '넬슨 터치'라고 이름이 붙는 중앙 돌파 전술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유기적인 신호체계와 함대 운용교리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중앙 돌파 전술은 난전시 깃발에 의한 신호가 무력해지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전열내에 적함이 없으면 마냥 노는 게 아니라 지시가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아군함을 지원하는 식으로 움직일 수 있게끔 짜여졌고, 트라팔가르 해전 전날, 넬슨 제독은 각 함선의 지휘관들을 모아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며 그 때문에 해군성에서 함장들에게 따지면 언제나처럼 자신이 모두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면서 그렇게 독립적으로 행동하도록 하였다. 이 중앙 돌파 전술이 채택되자마자 해전의 양상은 아군함 2척이 적함 1척을 사이에 끼고 두들기는 양상이 자주 보이게 된다.
물론 전열 전술이 전혀 쓸모없어졌다거나 영국 함대가 전열 전술을 전혀 사용 안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전열 돌파 전술은 어디까지나 트라팔가르 해전같이 훈련도와 조직력이 떨어진 함대 상대로는 유효하지만 전열이 제대로 구성된 함대를 상대로는 오히려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한 예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 영국 함대의 로드니 제독은 전열 돌파 전술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려고 했으나 당시 프랑스 해군 최고의 방어전 전문가인 드 기생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굳건한 전열을 유지하는 방어적 전열 전술을 구사하자 돌파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전열함들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당시 드 기생 제독은 영국 함대측에서 전열 돌파를 시도할 상황에 대한 대응법이 적힌 교전수칙을 모든 함장들에게 제공하고 그에 대한 훈련과 설명도 충분히 시행해서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당시에는 프랑스 해군의 수병들 훈련이 대단히 잘 되어있었던 것도 프랑스 함대가 크게 활약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유능한 해군 장교들을 잃었고 새로이 그 자리를 메꾼 나폴레옹의 하수인들은 대규모의 함대를 운용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넬슨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아채긴 했지만 조함술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함량 미달이었기에 궤멸을 피할 수 없었다.
4.2. 교전 개시
10월 20일, 카디스를 출항하여 항해하던 연합함대의 시야에 대규모 전열함들로 구성된 함대가 포착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였다. 영국 함대는 전열함 27척과 프리깃 6척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프랑스는 전열함 18척과 프리깃 8척, 스페인은 전열함 15척으로 함대를 구성한 상태였다.양군이 서로 대치 중이던 10월 21일, 넬슨은 잉글랜드는 제군이 각자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57]는 메시지를 깃발 신호로 보낸 후, 선제포격과 돌격을 시작하면서 전투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진형 한가운데를 돌파하여, 단종진을 이룬 채로 전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전투 현장에서의 숫적 우위를 확보하여 각개격파하고자 했다.
영국 해군이 약 1.6km의 거리를 두고 11자로 자기들한테 돌진하는 것을 본 연합함대 함장들은 처음에는 저게 뭐하는 거지 의아해 하다가도, 바보는 아닌지라 넬슨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생전 처음보는 전술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어 일단 상대의 돛대를 향해서 대포를 쏘긴 했지만, 포격 실력이 부족해서 명중탄을 거의 맞히지 못했다. 실제로 전열의 최선두에서 연합 함대를 치고 들어간 콜링우드의 기함 로열 소버린은 푸귀에를 비롯한 4척의 적선에게 종사를 허용했음에도 고작 10분만 포격을 받았다.
콜링우드는 "자, 제군, 오늘 세상이 나중에 두고 이야기할 만한 짓을 해보자고.(Now, gentlemen, let us do something today which the world may talk of hereafter.)"라는 말을 한 후, 로열 소버린에게 고속으로 돌진할 것을 명했다. 로열 소버린은 단신으로 연합함대의 전열 중앙을 돌파한 후 스페인의 1급 전열함 산타 아나와 교전을 시작했다. 뒤따라온 벨라일은 집중포화로 마스트를 잃고 항행 능력을 상실했으나 교전을 계속했다. 둘의 분전으로 1급 전열함으로서 중요 전력 중 하나였던 산타 아나가 완전히 발이 묶임과 동시에 다수의 함선들에게 신명나게 조리돌림당하기 시작했고, 로열 소버린의 탱킹 덕에 풍하향 전열의 함선들은 포격을 퍼부으며 연함함대의 전열에 돌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로열 소버린은 완전히 대파되어 콜링우드는 기함을 프리깃인 유라이얼러스로 옮긴다.[58]
한편 넬슨의 빅토리는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위시한 연함함대의 포격을 뚫고 계획했던 대로 빌뇌브의 기함 뷔생토르에게 정확히 돌격해 포격으로 뷔생토르를 대파시켰다. 이후 르두터블이 빅토리를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자 3급인 컨커러와 뷔생토르보다 한 체급 위인 테메레르, 넵튠이 빅토리를 대신해서 뷔생토르를 탈탈 털어버린다.
이렇게 영국함대가 전열 가운데를 완전히 쪼개고 들어오면서 종사를 당하게 된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이 전술에 연합함대는 삽시간에 분단되어 전투지휘가 이루어지지 않고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한 채 개별 선박 단위로 저항하다 격파당했다.
-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빌뇌브 제독이 탑승했던 기함인 뷔생토르급(개량형 토낭급) 80문 2단층 전열함 뷔생토르(Bucentaur) 호의 모형. 뷔생토르는 전투 초반 빅토리의 포격으로 대파되어 기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4.3. 르두터블과 빅토리의 혈전
그 와중에 프랑스 74문 전열함 르두터블(Redoutable)이 영국함대 기함 HMS 빅토리에 접현, 돌격해 오면서 백병전투가 벌어졌다. 함선의 덩치나 승무원 숫자로는 배가 크고 갑판이 높은 빅토리가 압도했으나, 르두터블은 이때 당시 프랑스 함대 승무원 중 가장 정예인 수병들을 태우고 있었고, 르두터블의 함장인 장 자크 에티엔 루카스(Jean Jacques Étienne Lucas)는 카디스에 숨어있는 동안 포격전으로는 영국 함대에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수병들에게 열심히 머스킷 소총 사격과 수류탄 투척 등 선상 백병전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육박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선상 백병전이란 개념을 임진왜란 때 왜군과 연결해서 구식 전술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19세기 초 당시의 유럽 해군도 100%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치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당시의 화포로도 함선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기는 어려웠다. 일방적인 포격을 가해서 격침 직전까지 가게 할 정도의 승기를 잡았다고 해도 적함 점령과 포로 나포를 위해선 결국 적함으로 직접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여야 했다.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당시 프랑스-스페인 해군의 전체적인 능력은 처참한 수준이었고, 르두터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기간에 열심히 훈련을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선상 백병전 능력이라도 향상시켜서 비교우위를 점하자는 게 루카스 함장의 판단이었고, 이 판단은 적어도 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선 매우 유효했다.실제로 백병전에 들어가자 상갑판에 모여있던 빅토리의 수병들은 르두터블의 망루와 돛대, 갑판에서 쏟아지는 프랑스 수병들의 수류탄(200개 이상!)과 총알들을 뒤집어쓰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넬슨 제독도 마스트 위에서 사격하던 저격수에 피격당해 그 부상으로 해전 종료 직후에 전사하였다. 넬슨의 전사 원인은 르두터블의 함장인 루카스 함장이 적극적으로 수류탄 투척 훈련과 장루 머스킷 사격훈련을 시킨 것도 있지만 넬슨이 장루 사격[59]에 의한 화재를 염려하여 장루사격을 금지한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일로 배를 잃은 일은 없었다. 거기다가 부하들이 저격을 염려해 수수한 제복을 입도록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늘 입던 금실장식에 훈장이 여럿 달아놓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고, 결국은 장루 저격수에게 저격당했다. 각종 기록화에서는 빅토리의 함장과 장교들이 갑판에 쓰러진 넬슨의 주위에서 그의 임종을 지키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피터지는 혈전을 벌이느라 함장과 장교들 모두 정신없는 상황이었다.[60] 실제로 저랬으면 당시 일방적으로 총알과 수류탄들을 뒤집어쓰던 빅토리 호의 상황을 봤을 때, 유언을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몇 발 더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빅토리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아니라서 달라붙은 르두터블에게 죽어라 포격을 해댔지만 배들끼리 너무 가까이 붙어 빅토리의 3층 갑판이 더 높은 상태에서 턱밑에 붙은 르두터블의 상갑판(과 르두터블의 수병들)을 포격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르두터블은 초기에 포격을 하다가 빅토리가 가까이 오자 포문을 닫고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수병 대부분을 갑판과 돛대에 집합시켰기 때문에 르두터블 선체 내부에는 수병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빅토리의 강력한 포격에도 선체 내부의 사상자는 거의 없었으며 이렇다 보니 백병전에서 병력의 숫자도 르두터블이 앞서게 되었다. 빅토리가 전체 승무원은 800명 이상으로 르두터블보다 200명 이상 많았지만, 500명 이상의 함포 운용 인원들 때문에 빅토리 갑판 위에 위치한 수병은 300명 정도였는데, 대부분의 수병이 갑판에 집결한 르두터블보다 백병전이 가능한 병력에서 열세였다.[61] 그래서 르두터블이 정말로 빅토리를 나포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영국 해군은 다 이긴 전투에서 기함이 함락당하는,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꼴이 벌어질 대 위기였다.
그러나 함대전에서 한 척의 힘만으로 이길 수는 없는 법이라, 르두터블의 수병들이 마스트를 넘어트려 다리를 놓고 빅토리에 뛰어들기 직전.... 뒤따라오던 98문 전열함 HMS 테메레르의 일제포격 한 방에 선상 백병전을 준비하던 르두터블의 수병들은 손실률 81%로 말 그대로 전멸하고 만다.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일제포격 한 방에 상갑판에서 대기하던 수병 200여 명이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르두터블의 정원은 643명이고 전투 후 전사자가 300명, 부상자가 222명이다. 참고로 프랑스-스페인 함대에서 르두터블을 제외한 가장 높은 손실률을 보인건 아킬레스의 64%, 영국 함대의 경우 벨레로폰의 35%가 가장 높은 손실률이었다. 이렇게 큰 손실을 기록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르두터블 수병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한 탓에 테메레르에서도 흔히 알려진 것보다 의외로 사상자가 다수 나왔고[62] 파손도 심했다. 거기에 르두터블에서 던진 수류탄 한 개가 테메레르 3층 포갑판까지 굴러가 폭발했는데, 하필 그 근처에 탄약고가 있었기에 운이 없었다면 테메레르의 탄약고에 불이 붙어 유폭할 뻔했다고 한다.
하지만 르두터블 수병들의 투지는 아직 살아있어도 20분간 양쪽에서 얻어맞은 르두터블은 돛대가 전부 박살나고 침수 상태로 한계에 달했다. 결국 루카스 함장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테메레르에 항복한다. 이후 빅토리에서 르두터블로 넘어간 영국 수병들이 제일 먼저한 일은 펌프로 달려가 물 퍼내는 걸 돕는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르두터블이 너무 많이 두들겨맞아서 르두터블의 자체 승무원으로는 침몰을 막을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으며, 당시 적선을 나포하면 나포 포상금이 많이 나왔지만 침몰시키면 보상금이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프랑스 전열함들은 같은 대포 문수의 전열함일 때 영국제 전열함보다 배가 더 크고 여유있으며 더 튼튼했기 때문에 사람만 많이 달라붙으면 침몰을 막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그리고 르두터블의 함장인 루카스는 항복한 사실에 대해서 양측 모두에게 전혀 비난받지 않았다. 74문급 전열함 한 척으로는 106문함인 빅토리와의 1대1조차도 힘든데 98문함 테메레르의 협공까지 당한 이상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 오히려 빅토리와 테메레르 2척이 협공하고도 르두터블에게 진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르두터블보다 크고 강력한 함선 두 척을 상대로 분투하고 여기에 더해서 영국의 명제독인 호레이쇼 넬슨을 전사[63]시켰으니, 프랑스 입장에서는 오히려 르두터블 한 척으로 엄청난 이득을 봤다고 칭찬을 해줄 일인 것이다. 이후 포로 교환으로 귀국한 루카스 함장은, 비록 불가항력으로 패배했으나 최선을 다해 싸웠고 넬슨 제독을 전사하게 한 전공을 인정받아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직접 수여받았다. 일설에는 루카스 함장이 훈장을 받은 후 해군성에, 살아남은 르두터블의 승무원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는 말도 있다.
여담이지만 루카스 함장은 나중에 바스크 로드 해전에서 74문 레굴러스(Regulus) 호의 함장으로 전투를 지휘했는데, 배가 좌초되었는데도 기울어진 배에 새로 구멍을 뚫어서 포를 쏘는 기지를 발휘하며 화공선의 공격을 막아내고 배를 다시 항해할 수 있게 만들어 해군 내에서 또다시 전공을 세웠으며 나폴레옹의 완전 퇴위 후에 은퇴하고 지내다 병으로 죽었다. 그의 장례식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루카스 함장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루카스 함장의 옛날 부하들은 물론이고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한 영국 수병들도 일부나마 함께 했다고 한다.
4.4. 전투의 종료
하지만 르두터블의 저항은 말 그대로 혼자만의 분투에 불과해서 전세를 뒤집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프랑스 해군의 74문 전열함 푸귀에가 같은 74문 전열함인 르두터블을 구하러 테메레르에게 포격을 하면서 다가오며 싸우다가 결국은 98문함인 테메레르에게 화력에서 밀려 나포되는 등 다른 연합함대의 군함들이 전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별적으로 저항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초반의 돌격 이후에도 한동안 연합함대의 저항이 후부 대열을 중심으로 해서 지속되었고, 영국 군함이 크게 파손된 사례도 존재하지만, 돌격으로 인해 빌뇌브 제독의 기함인 80문급 2단층 전열함 뷔생토르가 초반에 빅토리의 포격에 완전히 불구가 되어서 행동불능, 전투불능에 신호까지 올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전열을 돌파당한 초전부터 연합함대는 제독의 지휘에서 이탈한 오합지졸이 된 것이다. 특히 단종진 선두에 있던 약 30% 정도의 함선들은 중앙과 후부 대열에서 뭔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파악도 못하다가 뒤늦게야 함선을 돌려서 전투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던 데다가 중앙과 후부의 전황이 자신들의 패배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귀신같이 깨닫고 곧바로 후퇴한다. 총 네 척이 살아서 후퇴했고, 그 중 하나가 뒤에 설명할 장수만세 뒤게트루앵이다.이렇게 해서 16시 30분을 기해 사실상 연합함대의 조직적 저항은 소멸했으며, 그 소식을 들은 직후 넬슨은 전사했다. 전투는 17시를 기해 종료되었으며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말 그대로 전멸했다.
5. 결과
영국 함대의 선박 중 격침된(다만 콜링우드 전대에서 선두에 선 군함 몇 척은 큰 손상을 입었다) 함선은 단 한척도 없었던 반면,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합쳐서 1척이 격침당하고 22척을 나포당하는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나포한 함선의 태반은 곧이어 들이닥친 태풍에 의해 침몰하는 바람에 영국 해군이 크게 증강되지는 못했다. 그 중에서 당시 최대의 화력을 자랑하는 전열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손실은 영국도 아까워했다. 르두터블도 이 때 침몰했다. 여담으로 나포 선박 중 유일하게 해피 엔딩을 맞이한 선박도 있었다. 스페인 함선이었던 알헤시라스(Algesiras)에 탑승했던 영국 해군의 나포조 수병들은 폭풍우가 너무 심해서 자신들만으로 함선을 운용할 수 없자, 하는 수 없이 갑판 밑에 수감했던 스페인 승무원들을 석방해야 했다. 당연히 이 스페인 승무원들은 배를 조종해 카디스 항구로 도망쳤다. 그나마 카디스에 입항한 뒤엔 영국군 나포조 수병들을 포로로 잡지 않고 영국 측에 인계해줬다고 한다.커스버트 콜링우드 경의 동상. 그는 넬슨이 전사하자 함대의 지휘권을 넘겨 받아 폭풍 속에서 함대를 보존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게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대손실을 가려주지는 못한다. 일단 격침당하거나 침몰당한 함선을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은 탈출에 성공했다지만 양국은 3,238명이 전사하고 2,53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약 8,000명이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 더 뼈아픈 상처였다. 함선이야 다시 건조하면 되지만 숙련된 선원은 그렇게 쉽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의 프랑스 함대나 스페인 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의 선원 숙련도보다 크게 떨어지는 선원들로 함대를 구성해야 했다. 포로 중에는 함대 총사령관인 빌뇌브 제독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석방된 후 3개월이 지나 어느 호텔방에서 점심 식사 후 식사용 나이프로 자살했다. 식사용 나이프로 자살을 했다는 점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당시의 나이프는 육류를 썰어먹기 좋게 끝이 뾰족한 식칼에 가까웠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가능했다. 더욱이 타살설은 식사용 나이프로 굳이 자기 심장을 찌를 필요가 있느냐는 심정적 정황만 있을 뿐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승리한 것 자체는 전혀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숫자는 많았지만 선원들이나 장교들이나 거의 경험을 쌓지 못해서 질적으로 크게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군이 졌다면 그게 더 기적에 가까운 일이였다. 당시 영국 해군 승무원과 연합함대의 숙련도를 비교해보면 질적 차이가 확연히 나는 것이 대포 사격술만 해도 영국 해군은 1분에 1발씩 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프랑스 해군은 2분에 1발, 스페인 해군은 프랑스 해군보다 더 심해서 3~4분에 1발을 쏘는 등 뒤떨어지는 숙련도를 보였다. 근거리에서 교전이 이루어졌던 당시인 만큼 명중율은 별 상관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영국 해군은 똑같은 포문이어도 상대방보다 3~4배 높은 화력을 낼 수 있었다는 소리이다. 대포의 점화방식도 차이가 나서 영국은 부싯돌, 프랑스의 경우 심지를 사용한 탓에 함선이 흔들거릴 때의 발사 명중률은 격차가 더 컸으며, 사격교리마저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당시 영국은 풍상에서 선체 사격을 선호했고, 프랑스의 경우 풍하에서 돛대 사격을 선호했는데, 전자는 선체를 직접적으로 타격, 후자는 마스트와 상부 구조물을 노려 전체적인 전투력 저하를 유도하는 식이었으나, 당시 대포의 정밀도를 보면 전자가 제일 효율이 높았다.
단, 풍하에서 돛대사격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쏜다는 위치 상의 특성 덕에 전장이탈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마침 주로 쏘게 되는 부분도 적함의 돛 부분이니 도망치기엔 더할 나위 없다. 양과 질 모두 압도적인 강자로부터 함대의 전력을 보존해야 하는 상황에선 합리적인 교리인 셈.
트라팔가르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문제는 단순히 포격대상이 선체냐 돛대냐가 아니라 해군 장병들의 기본적인 훈련도 자체가 너무 떨어져 있던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거기다 조함술까지 비교하면 연합함대는 출항하는 데만도 만 하루가 지났는데 완료를 못한 참 할 말없는 수준을 드러내었다.
이런 영국 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현격한 전력차를 보여주는 것이 트라팔가르 해전 바로 직전에 벌어졌던 피니스테리(Finisterre) 해전이다. 이때 함대 최후미에 있던 함장 불러(Sir Edward Buller)가 지휘하는 80문짜리 2단층 전열함 몰타(HMS Malta)는 짙은 안개 덕분에 멋모르고 적함대 대열에 들어갔다가 혼자서 5척의 적함을 상대하게 되는 압도적 전력 차에도 불과하고 오히려 84문짜리 스페인 전함 산 라파엘(San Rafael) 및 74문짜리 스페인 전함 피르메(Firme)를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고 그 과정에서 전사자 5명, 부상자 40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밖에 안 입었다. 그 이유는 몰타가 영국 해군에서도 소수만 존재하던 양현 동시 대포사격 훈련이 되어있던 배들 중 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몰타는 선체 일부의 손상이 조금 심해서 전투 후에 수리를 필요로 했다고 한다.
참고로 몰타는 원래 나일 해전에서 최후반에 패배가 확정되며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던 빌뇌브 제독이 타고 있었던 프랑스제 80문 2단층 전열함 기욤 텔이라는 전열함인데 나중에 영국 해군에 나포되면서 몰타로 이름이 바뀌었다. 프랑스제 2단층 80문함은 영국제 98문함과 길이와 배수량 무게 등의 크기가 실제로 비슷했다고 한다. 포문수에서는 열세지만 프랑스제 80문 전열함의 경우 60문 정도가 36파운드 포와 24파운드 포라서 대구경 대포 탑재비율은 의외로 높았다. 나머지 20문은 8파운드 포나 12파운드 포. 영국제 98문 3단층 전열함도 60여문 정도가 32파운드포와 18파운드 포였으며 나머지 30여문은 8파운드 포나 12파운드 포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해군이 아무리 여러가지 장점으로 2단층 전열함을 선호했다지만 80문 함이면 98문급 함들보다 작은 거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으나 사실은 프랑스 전열함들은 같은 급이면 영국 해군보다 배의 크기가 더 크고 더욱 튼튼했던 이유로 영국제 98문 전열함과 동급의 크기인 80문 급 2단층 전열함을 기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프랑스 해군도 멍청하거나 큰 배를 싫어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는 게 결론이다.
그 외에 영국 해군과 타국 해군의 능력차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일어난 단함교전[64]의 통계인데, 전부 합해서 약 200회 일어난 단함교전 중 영국 해군의 패배는 단 5회에 불과했다.[65] 동등한 입장에서 타국 해군이 영국 해군과 싸우면 승률이 3%에도 못 미쳤다는 이야기. 그나마 미국 해군이 좀 선전한 편이었지만 이쪽은 함대의 총 전력 차가 절망적이라... 미영전쟁 당시 미 해군에는 전열함이 한 척도 없었다. 이 때문에 미 해군은 최대한 함대 교전을 피하고 사략 행위를 통한 통상 파괴 전술 및 단함 전투를 강요해야 했다. 만약 미 해군이 영국 해군과 대규모 함대결전을 시도했다면 궤멸을 면치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물론 단함교전과 함대간 교전은 다르지만, 결국 수병의 능력은 동등한 상황에서의 교전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함대도 결국 개별 함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교전 시 영국 해군과 다른 해군의 질적 차이는 실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소설 혼블로워를 보면 이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온다.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은 영국 해군의 한끼 식사거리일뿐...위에서 언급했지만 르두터블 호의 루카스 함장이 백병전 훈련에 집중한 것도 이렇게 능력 차가 많이 나서 비교우위라도 점해보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형국이었으니 역으로 넬슨이나 다른 유능한 영국 제독이 입장이 바뀌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지휘했다고 해도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얼마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수준이 처참했냐면. 상황이 꼬여 빅토리 호가 정확히 종사를 얻어맞을 위치에 도착하자 빅토리 호를 끝장낼수 있는 일제포격을 가했는데 포탄이 전부 하늘로 날아가서 돛과 삭구에 손상을 입히는게 끝 이였을 정도다. 영국 해군도 빌뇌브의 도주 능력을 위협적으로 봤지 일단 잡히면 끝 인 정도로 취급했으니 말 다했다.
사실 넬슨의 중단돌파 전술은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사실상 실패에 가까운 전술이었다. 별 피해도 없이 이길 수 있는 전투였음에도 영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 특히 빠른 속도로 돌격해서 난입한다는게 중단 돌파 전술의 핵심이였는데, 당시 영국 함대의 전열함들의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한 상태였다. 오랜 기간 프랑스 해군을 봉쇄하느라 바다에서 시달려온 배들을 정비할 시간도 없이 긁어모은지라 돛, 활대, 삭구같은 소모품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고 교체할 재고도 넉넉치 못한 형편이라 제 성능을 내기 어려웠다. 흘수에 달라붙은 따개비 같은 생물체들 때문에 속도도 대폭 저하되어 최근 선저 구리판을 교체한 배와 못한 배의 속력차이가 눈에 띌 정도였다고. 당연히 식량, 식수도 아슬아슬한 형편이었고 심지어 이런 소모품이 너무 부족해서 아예 보급을 위해 회항시킨 전열함들도 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조준해서 포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면 영국 해군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테니 연합함대의 처참한 실력이 아니었다면 영국군은 대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이렇게 닥돌한 이유는 당시 넬슨의 입지가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넬슨은 불륜중이었고 본처와 이혼하고 상간녀와 혼인한다는 정신나간 짓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66] 하류층들을 제외하면 입지가 애매한 상태였고[67] 이런 상황에서 사교적 지위와 경제적인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단 한척도 살려보내지 않는 대승리가 필요했다. 이미 넬슨은 자기 실책 때문에 빌뇌브의 함대가 출항하는걸 막지 못하고 추격도 실패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정말 역사적인 대승리를 하지 못한다면 파국은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에 도박수를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빌뇌브의 지휘를 평가해보면 원래 목표 자체가 그 당시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내용이었고, 그럼에도 미숙련된 함대를 이끌고 카리브 해를 왕복해서 넬슨을 오판하게 하고 넬슨의 추격을 따돌리는데 성공한데다가 넬슨이 기존 전열전술 대신 함대를 분열후 각개격파하는 전열 파괴 전술을 쓸 것이라는 것까지는 예측했으니 나름대로 유능한 지휘관에 속했다. 단지 그가 지휘해야 할 함대의 훈련수준이 저급이었으니 다 알고 있어도 절대 불가항력이라 제독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상황을 뒤집기가 역부족이었다. 나폴레옹 때문에 본의 아니게 졸장으로 오명 뒤집어쓰게 된 비운의 장군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6. 영향
트라팔가르 해전은 당장의 전역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고대하던 24시간 확보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실망하지 않고 이미 영국 원정군의 방향을 되돌려 오스트리아 전쟁을 단행한 상태였다. 이 단호한 결단과 민첩한 기동,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적 전략전술에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격파되었다. 대륙 동맹국들이 격파되니 영국이라고 별 수 없었다. 대불 동맹군이 나폴레옹의 손에 개박살이 나자 영국 수상 소(小) 윌리엄 피트는 실의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또한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나폴레옹이 직접 영국을 침공할 수 없게 됨으로써 대륙 봉쇄령 및 러시아 침공으로 이어졌으니 전략적 의미도 만만치 않게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이 없어 프랑스 함대 전력이 무사히 보전되었다 하더라도 1,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해군처럼 항구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영국 해군도 장기간 해상봉쇄를 하는 과정에서 승무원의 충당과 건강관리, 선박 유지보수 등으로 어마어마한 지출이 나가던 탓에[68] 그냥 항구에 함대를 보존시키더라도 영국에 충분한 경제적 손해를 줄 수 있었으나, 공격적인 나폴레옹 1세 황제가 그걸 무시하고 육군식 사고방식으로 무리하게 공격적으로 나가다가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피해를 자초한 거였다.
7. 이후
영국 트라팔가 광장에 가면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기함 빅토리의 마스트 높이와 같은 55m짜리 기둥 위에서 영불해협을 바라보는 넬슨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넬슨 동상 주위엔 네 마리 사자 동상이 있는데 이 네 마리 사자가 앉은 모습이 너무 어색해서 프랑스 애들이 두고두고 씹는다. 사자는 영국의 상징인데 너넨 너네 나라 상징 동물 앉은 자세도 모르냐고(...). 영국 정부도 이 옥의 티를 많이 아쉬워한다. 그 큰 네마리 청동 사자상은 해전에서 승리 후 적군인 프랑스 함대의 대포를 가져다 녹여 만든 것이기에 더더욱(...).영국 해군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꾸준히 관함식을 열고 있으며, 자국의 공격원잠을 트라팔가급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테메레르급 전열함 뒤게트루앵(Duguay-Trouin)은 프랑스 함대의 전위에 배치되어 있었고, 덕분에 후미에서 벌어진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쫓아온 80문 전열함 시저, 90문 전열함 나무르, 74문 전열함 히어로와 커레이저스 외 수척의 프리깃과의 전투 끝에 나포되어 임플라커블로 개명되었다. 이후로는 영국 해군 소속으로써 발트 해에서 러시아 제국 전열함 브세보로드를 불태워버리는 등 활약했고, 전후인 1855년에 훈련함으로 전환되었다. 위 사진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트라팔가르 해전 기념식 당시의 모습.[69] 전쟁 중에는 연습함으로 사용되었는데, 결국 살았다(...). 그러나 전후 영국이 이 배를 유지할 돈이 없는 관계로 1949년에 자침[70] 처분되었다. 1920년대에 모금 운동까지 해서 살린 배란 점에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아래에서 동맹국이 된 이상 프랑스의 수치를 나타내는 이런 걸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침몰할 때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를 같이 달았다고. 반면 1815년에 건조된 동료 전열함 웰즐리는 결국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2005년 6월 28일에는 트라팔가르 해전 200주년을 기념해 국제관함식이 열렸는데, 40여 개국의 200척 이상의 군함들이 모여 엄청난 장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당시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HMS 빅토리 함이 잠시 사열을 위해 나왔고,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이순신급 1번함인 충무공이순신함도 참가했다. 이 관함식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전국인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도 함선을 보냈는데 선조들을 추모한다는 의미로 프랑스, 스페인 해군의 수병들은 검은 리본을 달았다고 한다. 프랑스는 샤를 드골급 항공모함을 보냈다.
8. 창작물
코드 기어스 세계관에서는 원래 역사와는 달리 프랑스가 영국을 이긴다. 여기서의 호레이쇼 넬슨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다.[71] 덕분에 나폴레옹이 영국에 상륙하여 영국을 멸망시키고 영국 왕실과 귀족들을 신대륙으로 피난케 함으로써[72]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했다.원피스의 등장인물 트라팔가 로의 성씨의 유래가 트라팔가르 해전이다.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언급으로만 나온다. 용들이 동원되었다는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비슷하게 진행된 듯 하나 호레이쇼 넬슨이 사망하지는 않았다.[73] 하지만 나폴레옹의 진짜 목적은 영국 공군의 주력이었던 엑시디움과 모르티페루스 편대를 카디즈에 최대한 잡아두는 거였고, 공중 수송선들로 공군 전력이 줄어든 영불해협을 돌파해 상륙을 시도하면서 도버 전투가 벌어진다.
9. 같이 보기
[1]
이 그림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영국 해군의 기함
HMS 빅토리 함(그림의 왼쪽 함선)과 프랑스 해군의
르두터블(Redoutable) 함(가운데 함선)이 혈전을 벌이는 가운데 극적으로 구원군인
HMS 테메레르(오른쪽 함선) 함이 접근, 반격을 가하는 장면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참조.
[2]
프랑스는 당시 전열함을 포문 수에 따라 1급(100문 이상), 80문급, 74문급으로 분류했다. 80문급은 영국의 분류상으론 3급에 해당하지만 체급상이나 기능상 2급에 준하는 함종이다. 여기에서 4척은 포문 수가 80문인 함선이 아니라 체급상 토낭급에 해당하는 기함용 대형 2층함의 수이다.
[3]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4]
7백년간 이슬람 지배를 받은 스페인 남부답게 아랍어 기원 지명이다. 만의 끄트머리라는 뜻인 '따라프 알 가르"의 스페인식 발음이다.
[5]
허나 이 말은 조금 잘못된 것이, 나폴레옹이 대전략 차원에서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러시아 원정 등의 실수는 있었지만, 그런 재앙 이후에 벌어진 나폴레옹의 몰락의 한 축인 1814년 독일 전역에서도 나폴레옹이 이끄는 본대와 붙은 연합군은 라이프치히 전투를 제외하면 모두 박살났다. 특히 드레스덴 전투는 이미 삼면으로 프랑스군을 몰아넣은, 아주 유리한 상황을 연합군이 만들었음에도 나폴레옹이 직접 나타나서 진두지휘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본인들이 반대로 포위당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끝에 결국 대패하여 물러났다. 패한 라이프치히 전투는 아예 나폴레옹 본대에게 싸울 기회를 주지 않고 나폴레옹만 보면 무조건 후퇴를 거듭한 것에 더해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이 이끄는 부대만 집요하게 노려 패배시키는 전략을 사용하여 전역 후반 연합군과 프랑스군의 숫적 우위가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자 마침내 나폴레옹과 붙은 결전으로, 그 불세출의 명장조차 끊임없이 쏟아지는 연합군의 병력을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진 전투다. 이런 패배 이후 벌어진 프랑스 본토 전투에서도 나폴레옹은 자신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거느린 프로이센의 맹장 블뤼허의 군대를 상대로 6일 동안 4번의 전투를 벌여 무려 교환비가 1:5~6에 가까운 사상자를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에 안기는 엄청난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6]
물론 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 해군 선원의 숙련도 차가 너무 커서 트레빌이 맡았어도 이길 가능성은 높지 않았겠지만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사망이었다.
[7]
3명중 1명은 나폴레옹의 신임을 못 받고 있었으며 빌뇌브를 제외한 나머지 1명인 로실리 제독은 정말 해전경험이 1도 없었다. 즉, 나폴레옹이 생각해도 빌뇌브보다 나은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인데 그냥 물어본 것으로 보여진다.
[8]
당시 넬슨은 일부러 느슨한 방어선을 짜서 적을 유인했다가 전면전으로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짰다. 그런데 포위망을 너무 느슨하게 했다가 오히려 빌뇌브가 탈출하게 된 것이다.
[9]
98문 2급 전열함인
보인급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 피니스테리 곶 해전에서 칼더의 기함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3급 전열함 한 척이 아쉬운 넬슨에게는 2급 전열함이 이딴 식으로 이탈하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10]
이때 스페인과 프랑스 함장들을 모아 투표를 통해 출발을 보류하는 일도 있었다.
[11]
전열의 선두를 공격하는 별도의 부대를 구성한 게 아니라 끝끝내 넬슨의 계획을 못 알아들어처먹고 단신으로 최선두에 닥돌해서 본대와 낙오된 것이다.
[12]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13]
넬슨 중장의 기함
[14]
'무모한' 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노획한 프랑스군 함선의 이름에서 따왔다. 다만 본 함은 노획된 것이 아닌 영국이 건조한 함선으로, 노획함의 함명을 계승한 것.
[쿠]
엄밀히 말하자면 나포한 프랑스 전열함 쿠라쥬(Courageux)를 역설계해 제작한 함급으로, 주로 쿠라쥬급(Courageux class)라고 하나 문헌에 따라 카나틱급(Carnatic class) 또는 리바이어던급(Leviathan class)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16]
정복자
[17]
카네기 소장의 기함
[쿠]
[19]
'
스파르타의' 라는 뜻의 프랑스어. 이 쪽은 테메레르와 달리 프랑스에서 건조되어 직접 노획된 경우다.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노획된 함선 중 상태가 양호해 군함으로 편입된 3척 중 한 척이다.
[F]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 출신 군함이라 영국 해군의 분류 체계를 적용할 수 없지만, 2층에 64~80문 전열함을 3급으로 분류했으므로[74] 이 기준에 따라 2층 74문인
테메레르급 전열함과 2층 80문인 토낭급 전열함을 3급으로 표기한다.
[21]
바람이 향하는 방향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22]
콜링우드 중장의 기함. 함명은 '군주'라는 뜻이다.
[23]
브르타뉴의 벨 섬(Belle île). 프랑스에서 노획한 함에 노획함에서 따온 함명을 계승시킨 경우. 그루아 섬 해전에서 노획되었으며, 노획 당시의 함명은 '포미더블(Formidable)' 이었다.
[F]
[25]
'천둥치는' 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스파시에트처럼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노획되었다.
[F]
[27]
아킬레우스의 프랑스식 발음으로, 이쪽은 테메레르처럼 노획함명을 계승한 영국 군함. 참고로 '아킬레스(HMS Achilles)' 라는 함명은 따로 존재하며, HMS 아실리와 HMS 아킬레스가 동시에 존재했던 시기도 있다.
[28]
노획한
테메레르급 전열함 폼페이를 역설계해 건조한 함급. 그냥 테메레르급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여담으로 함급의 이름이 된 폼페이가 노획함 출신이라 엄밀히 말해
HMS 폼페이는 폼페이급이 아니다. 이는 상기된 쿠라쥬급도 마찬가지.
[29]
복수
[30]
반항
[31]
천둥을 일으키는 자
[32]
체급이 너무 작아 직접적인 포격전에 참가하진 않고, 두 전열 간 신호를 전달하거나 예인선 등의 역할을 한 5급 이하의 선박들.
[33]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 에우리알로스.
[34]
'진취적인' 이란 뜻의 프랑스어 entreprenant의 여성형으로, 스파시에트, 토낭처럼 노획된 군함.
[35]
뒤나뮈르 소장의 기함. 알헤시라즈 전투에서도 기함을 맡았던 수훈함이다. 함명의 뜻은 '어마무시한'
[36]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기 맹활약한 프랑스
사략꾼 르네 뒤게트루앵(Renè Duguay-Trouin)
[37]
빌뇌브 중장의 기함. '뷔생토르'는
베네치아의 상징적인 선박의 이름이었으나, 나폴레옹의 베네치아 정복 때 파괴되었다. 이후 베네치아 점령을
축하하기 위해 이름을 따온 것.
[38]
토낭급의 개량형이며, 아예 토낭급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39]
뷔생토르급 자체는 토낭급 처럼 80문이다. 다만 기함이다보니 약간의 개조를 더해 일반적인 뷔생토르급보다 6문을 더 단 것.
[40]
위험한
[41]
불굴의
[42]
격렬한
[43]
용감한
[44]
스페인에서 건조했고 프랑스에서 구매했다. 하단의 스페인 해군 함선 목록의 산 일데폰소와 자매함이다.
[45]
알헤시라즈 전투, 메디나 소장의 기함
[46]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오리앙을 불태워버린 그 HMS 스윕셔다. 안타깝게도 1801년 프랑스에 나포되어 아부키르에서 함께 싸웠던 미노토어, 디펜스, 그곳에서 나포한 토낭, 스파시에트에게 포문을 겨누게 되었다.
[47]
74문급인 산 일데폰소급의 개량형으로 동일하게 74문을 장비해야 했으나 모나르카만 74문으로 유지, 몬타녜스는 74문을 달다가 6문을 추가했고, 나머지 2척(넵투노, 아르고나우타)은 동일한 함체에 80문을 장비했다. 다시 말해 무장은 80문을 달았어도 함선의 체급은 74문급이라는 것이다.
[48]
산 후안 네포무세노급이라고도 한다.
[49]
시스네로스 소장의 기함
[50]
74문급인 산 일데폰소급의 64문 축소형
[51]
나바레테 중장의 기함
[52]
3급 2층 64문형인 산 페드로 알칸타라급을 74문형으로 개량한 버전
[53]
그라비나 대장의 기함
[54]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이나
대장군전도 마찬가지였다.
비격진천뢰를 본 일본군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도 당대의 방식을 초월하는 신개념 무기였기 때문이다.
[55]
일렬로 전열(戰列)을 이루어 싸운다는 소리다. 전열함(戰列艦)의 영어 명칭인 'Ship-of-the-line'도 여기에서 따온 것.
[56]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싸웠던 데다 당시 전열을 깨는 행위를 엄벌하던 영국 해군의 관례로 인해 패전한 것이기 때문에 빙 제독이 억울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국왕
조지 2세는 빙을 사면하지 않고 끝내 처형했다.
[57]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항목 참조
[58]
넬슨도 교전 시작 전 이 유라이얼러스에서 전투를 지휘할 것을 추천받았다. 빠르고 교전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니 양 전열을 왕복하며 안전한 지휘를 할 수 있었지만 빅토리에서 직접 지휘할 것을 고집했었다.
[59]
장루(topcastle)란 돛대에 있는 일종의 망루이다. 해적 등을 다룬 해양 창작물에서 선원이 돛대의 받침대에 올라가서 주변을 정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받침대가 바로 장루이다. 당대의
머스킷은 발포시 총구 안에 있던 마개 역할을 하는 천쪼가리가 불이 붙은 채 뿜어져 나왔기에 장루 등 돛에 가까운 곳에서 함부로 사격을 했다가는 불똥이 튀어 화재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60]
참고로 넬슨은 갑판 밑으로 후송되고 난 뒤 몇 시간 후에 사망했다.
[61]
당시 범선은 함포만 갑판 아래에 있을 뿐 추진을 담당하는 마스트가 위에 있었기에 상갑판이 점거당하면 그대로 패배했다. 상갑판이 점거당했다면 항행능력을 빼앗긴 셈이고 함장과 부장 등 고위 장교가 후부갑판에 있으니 이미 전사했거나 중상, 혹은 항복했다는 의미였다. 임무형 지휘체계 따윈 없던 시절이니 사관 대다수가 무력화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항복을 해야 할 이유로 충분. 설사 갑판 밑의 후임사관이 결사항전을 결심하고 수병들을 선동하여 최후까지 저항한다고 해봐야 위에서 수류탄 던지면 끝이었고, 아예 해치만 잠궈버리면 올라갈 수가 없어서 그대로 포로 신세나 다름없었다. 정말 미쳤다면 화약고에 불을 던져 자폭할 수야 있겠지만, 그 정도로 유럽의 해군은 미쳐돌아가지 않았고 명예로운 항복 개념이 살아있던 시기라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그냥 운 없는 탄약고 유폭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62]
수병 사상률 17%(사망 47명, 부상 76명)에 상부돛대 3개가 모조리 박살나서 기동불능에 빠졌다.
[63]
실제로 넬슨 사후 영국 해군 지도부는 대부분 그렇게 유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제독들이 차지하게 된다. 트라팔가르가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대규모 해전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만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에 부사령관이며 넬슨보다 10살 연상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콜링우드 제독 같은 사람은 몇 안 되는 유능한 제독이라서 예외였다. 참고로 콜링우드 제독은 냉정 침착한 성격에 상황판단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64]
함선 간의 1대1 교전.
[65]
Miller, Broadsides, p.337
[66]
넬슨이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곤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해전에 대해 모르는 상류층 일부와 서민층의 인기였지 해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기는게 당연한 전투'에서 이겼던 사람일 뿐이었다.
[67]
지금이라면 모를까, 당시 체면을 굉장히 중시 여기던 영국 상류층에서 대놓고 그런 짓을 벌인다는건 사교적 자살행위였다.
[68]
당시 선박 유지보수 물품들은 대부분 북유럽에서 비싼 돈 주고 수입한 것들이었다.
[69]
"영국은 제군이 각자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넬슨 제독의 개전 신호를 깃발로 표현하고 있다.
[70]
선체 하부를 폭파시켰다. 근현대적 철제 군함이 아닌 목제 군함이라서 밸브를 열어 물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71]
아마 여기서는 빌뇌브가 너무 강해서 넬슨도 어쩔 수 없었다고 봐야하거나 아니면 그냥 삼류 제독에 불과했거나 둘 중 하나다.
[72]
코드 기어스 세계관에서는
미국 독립 전쟁이 실패한 것으로 나온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쪽에 포섭되는 바람에
요크타운 전투에서
조지 워싱턴이 대패했다. 또한
하노버 왕조-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윈저 왕조 순으로 왕조가 교체된 현실의 영국과 달리 이쪽의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은
엘리자베스 1세의 사생아가
튜더 왕조를 이으면서 튜더 왕조가 존속하여 이후 브리타니아 황조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73]
스페인 용 하나가 빅토리에 접근해서 돛에 불을 뿜고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