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초상화[1] | '쵸소카베 모토치카 첫 출진 동상(長宗我部元親初陣の像)'[2] |
長宗我部元親(ちょうそかべ もとちか)[3] 1539년 ~ 1599년 7월 11일 (음력 7월 11일) |
일곱가지 괭이밥[4] |
(1539년 ~ 1599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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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흔들림없는 시코쿠의 패자.(揺るぎない四国の覇者。)일본 센고쿠 시대 토사의 다이묘. 쵸소카베 쿠니치카의 장남으로, 쵸소카베 가문 21대 당주이다. 아버지가 쌓아올린 군사적 기반과 전쟁실력이 뛰어난 동생인 키라 치카사다와 코소카베 치카야스의 보좌를 받아 토사를 정복 하였으며 이후 아와, 사누키, 이요까지 침공하여 시코쿠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한 영주다.[5]
종래엔 한 지방을 정복한 영웅적 영주로 각광받아, 시코쿠 전역을 통일한 탁월한 전쟁능력과 일반 군인을 위무하는 일화를 가지고 그의 리더십을 찬양하는 평가가 주를 이루던 영주였다. 특히 센고쿠 시대를 매체로 하는 미디어에서는 독특한 미남형 캐릭터로 설정하거나 미래를 내다본 혜안을 가진 초천재 능력자, 최종적으론 불운한 사건들에 의해 폐인이 되어버린 불쌍한 캐릭터로서 모토치카를 그려냈고, 이는 일반적인 평가의 요소와 합쳐져 폭발적인 인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쥐로 비유당한 일화를 근거로 한, 단순히 시코쿠라는 소규모 영지를 정복하는 것에 그친 동네 깡패 수준의 다이묘로, 다른 대세력엔 빌빌 기던 전쟁능력, 사사재흥과 금주령 일화를 근거로 한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군인, 최종적으론 히사타케 치카나오라는 간신에게 총애를 쏟아 일족 멸망의 원흉격이라는 부정적 평가 또한 따라다니기도 했다. 더욱이 현재는 과도한 평가를 받았던 인물들을 저평가하기 시작하는 풍조에 따라 모토치카의 이미지는 긍정과 부정 양극단을 오가는 지경에 놓인 상태다.
반면 역사학계에서는 모토치카의 시코쿠 전역 정복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정복한 지역에 켄치 등을 행하는 등 시코쿠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주였으며, 토사 진쟈라는 토사의 이치노미야 진쟈를 재흥시키고 이와 관련된 사료를 잘 남겨둔 토목공사에 능한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내걸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소카와 일족의 일반 부교에 위치하던 쵸소카베 일족을 1국을 통치하는 도요토미 다이묘로 끌어올린 성과와, 이 시기에 작성한 현존 문서인 쵸소카베 치켄쵸, 쵸소카베시 오키테카키, 하타시 세이지키라는 사료를 근거로 들어 모토치카의 위정자로서의 내정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거는 등, 여전히 시코쿠의 패자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영주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쵸소카베 모토치카/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3.1. 시코쿠 통일은 달성됐는가?
보통 모토치카하면 시코쿠 정복을 달성한 다이묘라는 인식이 상식과도 같았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모토치카가 시코쿠 정복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학설이 제시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모토치카가 시코쿠의 '완전 정복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가장 힘을 얻고 있다.모토치카가 '정말로 시코쿠 전토를 정복, 통일했었나?'는 최근까지 논란이 많은 주제 중 하나로, 쵸소카베 일족의 사료는 정말 대부분이 소설에 가까운 군키모노에 근거하고 있거니와 시코쿠 전토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고, 그가 시코쿠 정복을 완수했다는 1585년에서 1년도 되지 않아 시코쿠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기에 확실한 흔적을 찾기 힘든 상황이다. 현재에 와서는 구석진 지역을 제외하고 각 영토의 중요지역을 전부 점거하는데 성공하여 대부분 통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술했듯, 아와는 본거 쇼즈이는 불타사라졌지만 동쪽에 잔존세력이 남아있음, 사누키는 본거 야마다가 떨어졌지만 당주 소고 마사야스가 토라마루 성에서 계속 모토치카와 전쟁했었음, 이요는 본거 유즈키에서 토사계의 기와가 발견되어 모토치카는 이요 중심부까지 정복했었거나 코노 일족이 노시마 무라카미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아직 모름. 이라고 판단된다.
3.2. 그외
모토치카가 상락한 타이밍이 막 토사를 정복하여 기본적인 영향력을 확보한 시기였고, 중앙 정부와의 연결 방법도 정실 부인과의 혼인이라는 고전적이면서도 중세적이고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그의 정치적 행보는 확실히 이득을 계산해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시코쿠를 정복해 가는 과정 또한 군사적인 침공과 전략, 정치적 공작을 섞어 쓰는 등 굉장히 복합적으로 진행하였기에 그의 군사적, 정치적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고 평가되고 있다.모토치카 생애 대부분의 활동지인 시코쿠 내에서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다. 그의 고향인 현 난코쿠 시에서는 사카모토 료마의 후계자인 코치 현의 아이콘으로 밀어주고 있지만 코치 중, 동부의 반응은 미적지근한 편이며 시만토 시로 대표되는 서부는 사카모토나 쵸소카베보다 이치죠에 더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다. 코치 바깥의 도쿠시마현, 카가와현, 에히메현에서의 모토치카의 민간 이미지는 사악한 침략자 정도에 그치며, 시코쿠 바깥에서는 소규모 영지의 다이묘라고 깎아내리는 인식이 많이 퍼진 편이다.
4. 일화
모토치카는 키가 크며 피부색이 하얗고 유화하여 그 용모가 대단히 수려한 미소년과 같았지만, 필요할 때 이외에는 전혀 말을 하지 않으며 타인과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아니하고 그저 방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주변인들은 이것을 비꼬아 '히메와코'(姬若子, 공주같은 소년)라는 이명을 붙여 이를 비웃었다.[6] 또 나가하마의 전투에 나서서는 창의 사용방법을 몰라 아버지 쿠니치카로부터 "멍청한 놈!"이란 꾸짖음을 듣고 온 가신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개전에 앞서 가신인 진젠지분고가 창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의 눈을 찌르는 느낌이라고 귀뜸을 해주었는데, 창쓰는 법을 처음 배운 그 전투에서 제1전공을 세웠다. 그 이후 모토치카는 토사의 걸물(土佐の出来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7][8]토사 정복을 완수한 모토치카가 시코쿠 정복을 실시하기 전 운펜지 산(雲辺寺山)에 있는 운펜지(雲辺寺)에 가서 주지에게 시코쿠 정복의 꿈을 들려주자 주지는 "고작 주전자의 덮개가 물통을 덮으려는 행동"이라며 회의적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모토치카는 "내 덮개는 모토치카라는 명공이 만든 덮개며, 언젠가 시코쿠를 덮을 덮개가 될 것이다."라며 반문하였다.
노부나가에게 동맹의 사자를 보냈을 당시, 노부나가는 모토치카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시코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한 모토치카를 새 없는 섬의 박쥐(鳥無き里の蝙蝠)에 비유하며 이렇다할 강적이 없었기에 세력을 그만큼 키울 수 있었을 뿐이라고 평했다. 이때 회담을 진행한 쵸소카베가 사자는 나카지마 베쿠노스케(中島可之助)였는데 이 새없는 섬의 박쥐라는 말에 "노부나가 님은 봉래궁(蓬莱宮)의 カンテン"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말은 새없는 섬의 박쥐가 칭찬인줄 안 나카지마가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말로 노부나가는 뭔 소린지 몰랐다고 한다. 저 '칸텐'이란 말조차 관대하게(!?) 법을 집행한다는 '관대지전'(寬大之典)을 축약한 것이라는 둥, 아니면 텐구를 말하려다 말이 꼬였다는 둥, 심지어는 한천(…)이라고 말해서 노부나가를 조롱한 것이라는 둥 썰과 카더라가 아직까지도 분분할 정도. 일본 인터넷에서는 배트맨이라 불리는 등등 종종 까이고 있다.
다만 이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시코쿠에선 나머지는 다 별론데 그나마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그나마 새와 비슷한 박쥐쯤은 되니까 시코쿠에선 가장 낫다는 의미기도 하다. 어쨌든 노부나가는 미요시 나가하루를 상대하기 위해선 시코쿠에도 같은 편이 필요했으니, 시코쿠 호족 중에선 그나마 괜찮은 모토치카의 힘이 필요했고 손을 잡은 것이다.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 일령구족)란 쵸소카베 영지만의 특이한 군제라 할수있는 관습인데, 당시 쵸소카베 영지의 영지민들이자 낭인같은 토착무사들이 평소 농사지을 때 밭 귀퉁이에 무구를 준비해두고, 출격의 호령이 들리면 일사불란하게 모이는 것이었다. 이들은 일반적인 군무에서 제외되는 대신에 영지민과 무사를 겸하고 있었기에 즉응성이 좋고 영지 규모에 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가농기에는 동원할 수 없었고, 농지에서 멀어지는 장거리 원정에 쓸 수 없다는 결점도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일반적인 ' 중세시대 유럽'의 반농반병과 별 다를바 없어보이고, 이런 반농반병의 결점을 타파하려는 오다 노부나가 등을 시작으로 유행한 병농분리책에 역행하는 쵸소카베 영지만 시행했던 구닥다리 정책이긴 했지만, 모토치카의 이치료구소쿠는 이들의 대우를 확실히 해서 대표자를 뽑아 격이 낮을지언정 자신의 가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아주었고, 회의를 할 때는 군인들의 의견도 함께 들어주었다. 아와 공략 당시 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전략을 수정하기도 했다. 세를 면해주고 병력으로 동원하는게 좋을까 싶지만 실제로 '일령구족'들의 충성심은 대단해서 쵸소카베 모리치카가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전으로 개역당하자 영주님 돌려달라며 대대적으로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새로 토사의 주인이 된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아주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 영지민이 무장을 허락받고 세를 면해주며 무사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다는 건 당시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쵸소카베 영지의 영지민만이 누렸던 최상급의 특권이었을 것이다.
사누키 침공에서 하유카를 공격할 당시, 모토치카는 전술의 일환으로써 무기나기(麦薙)[9]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런 전술을 사용하면 주변의 영지민들이 곤란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 결국 모토치카는 영지민들을 생각하며 한 두렁(一畦)의 곡식만을 취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주변 일대에 피해를 입히는 전술을 사용했음에도 영지민들의 매작은 절반씩이나 남게 되었고, 영지민들은 이를 보며 " 토사의 지배는 훌륭할 것이 틀림없다.", "빨리 평화가 오기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 10월 사천성 보수를 맡을 당시 감사역으로 파견된 카키미 카즈나오와 말싸움이 있었다. 카즈나오는 성벽에 설치하는 텟포사마(鉄砲狭間, 성벽에서 적을 쏘기위해 뚫어놓는 구멍)를 높게 만들 것을 주문했는데 모토치카가 이를 보고 허리부터 가슴까지의 높이가 아니면 철포를 쏘기 힘들다고 말하며 직접 자세까지 잡으며 충고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다.
5. 기타
묘지인 쵸소카베의 표기는 長宗我部와 長曽我部의 두가지가 보이는데 히데요시 등이 長曽我部를 사용한 반면 모토치카 본인과 모리치카는 長宗我部를 사용하였다. 이렇기에 옛날에는 최고 통치자가 사용했던 長曽我部 측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쵸소카베가가 본부로 하였던 지역의 이름이 소가베(宗我部)였던 것과 학자들의 의견 개진에 영향을 받아 長宗我部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10]여러모로 소설에 의해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장군 중 한 명. 히메와코라는 별명으로 졸지에 왜소하고 소심한 미청년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노부치카 사후에 사랑하는 후계자를 잃어버려 미쳐린 광인 포지션을 받아 그의 이미지를 정말 엄청나게 비판하고 깍아내렸다. 비록 후계자 지정 과정에서 많은 가신들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노부치카 사후에 이루어진 통치 흔적이 연구의 과반을 점하는 느낌으로, 1587년부터 1590년까지 4년에 걸쳐 이루어진, 도요토미기 켄치의 영향을 받아 실행한 모토치카의 켄치 흔적은 전술했듯 쵸소카베치켄쵸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야마우치 일족의 토사번이 대대로 보관, 필사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며 국가 중요문화재로도 등록되어있다. 다른 쿠니의 도요토미기 켄치와는 달리 상당히 세세하고도 정밀하게 기록한 것이 포인트.
1596년 8월에는 우라도에 스페인의 교역선, 산 펠리페호(サンㆍフェリペ号)가 표류됐던 사건이 있었다. 알고보니 선 펠리페호는 마닐라로부터 멕시코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배가 거의 망가져버리는 바람에 가까스로 일본에 정박했다고 하며 이를 본 치카나오는 모토치카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연락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곧 이 소식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직전에 일어난 진도 8급 대지진으로 인해 소모된 지출을 만회한답시고 돈을 벌 기회가 생겼다며 좋아하면서 그 스페인 교역선을 공격하여 뺏으려 하는데, 몇년전 내린 '배의 화물을 함부로 뺏지 말라'는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답시고 신부 추방령을 꺼내들어서 스페인 산 펠리페호를 공격하여 배의 화물들을 약탈해서 가져간 다음, 스페인의 신자들을 잡아서 잔인하게 학살하기 시작한다.
11월에는 분코쿠법[11] 쵸소카베 모토치카 100개조(長宗我部元親百箇条)를 만들어 다음 년 3월에 실시하였다고 한다. 내용으로는 절, 진쟈의 보호와 규정, 황실과 도요토미 일족의 카몬(家紋)을 쓰지 말 것, 사적인 사사로운 싸움이나 말싸움은 엄히 다스릴것, 과음을 하지 말 것, 남자가 밖에 전쟁하러 나갈때 여자는 집에 남자를 들이지 말고 자신이 밖으로 나가지 말 것 등이 기재되어 있다.
흔히 모토치카의 토리키리역으로 아케치 미츠히데가 유명하지만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요시 야스나가도 후반에 와서 모토치카와 외교활동을 펼쳤다.
현대에 와서 모토치카가 시코쿠 평정을 위해 토사에서 아와까지 진군한 산길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도산선을 타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군세는 오보케 고보케를 넘어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열차선 반대편으로 시코쿠 평정의 중앙거점으로 쓰였던 하쿠치 성터를 볼수가 있기에 거의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도산선의 코치까지 가는 노선을 타보면 에메랄드 빛 요시노가와의 협곡, 험난한 산길을 거쳐 거의 2시간 40분을 달려야 도착할 정도로 지세가 매우 험난하다.
그가 시코쿠 정복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고 하는 운펜지는 시코쿠 88개소(八十八ヵ所) 중에서 66번째의 절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 900M의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인도 편하게 올라갈수 있도록 로프웨이를 설치해 놓았기에 카가와현 칸온지 시에서 로프웨이를 타고 직접 방문해 볼수 있다.
임진왜란 참전 장군답게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전쟁포로로 연행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박호인'이라는 조선인 기술자인데, 임진왜란 때 쵸소카베가의 군인들에게 전쟁포로로 잡혀 끌려 왔다. 여기서 살면서 그는 의료기술이나 두부제조법 등 많은 조선의 기술문화들을 전래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아키츠키 타네노부는 쵸소카베 가문을 섬기게 되기도 하였고, 아키츠키 가문은 대대로 두부를 만들게 된다. 또한 그의 영지였던 지금의 고치 지역에는 역시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여인이 길쌈하는 법을 알려줬다고 하며 그녀의 무덤은 '조선국녀의 묘(朝鮮国女之墓)'라 해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12].
모토치카가 시코쿠 통일의 근거지로 사용했던 오코 성터는 현재 코치현립 역사민속자료관이 설치되어 있으며[13] 성터는 역사 유적으로 잘 정비되어 남아있다. 코치역에서 버스를 타면 약 30분 정도 지나서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치시내에서 꽤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성터 자체가 공원 비슷하게 정비되어 있고 목재로 만든 건물들은 철거되어 있지만, 흙으로 만든 토루이나 카라보리(空堀), 타테보리(竪堀)가 온전히 남아 있고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어 유적에 대해 일본어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데다, 센고쿠 다이묘의 본성 치고는 상당히 소~중규모의 성터이기 때문에 중세 일본의 성에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성터가 되겠다.
성우 소가베 카즈유키는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14]
6. 대중매체
[1]
초상화의 제목은 켄폰챠쿠쇼쿠 쵸소카베 모토치카 가조(絹本著色長宗我部元親画像)이며, 모리치카가 모토치카가 사망한 뒤인 케이쵸 4년(1599)에 작성한 작품이다. 찬사어구도 포함되어있으며 모리치카가 이쿄 에이테츠(惟杏永哲)에게 직접 의뢰했다는 구절이 적혀있다.
[2]
코치 현 코치 시에 있다. 글자 그대로 모토치카의 첫 출진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다. 그가 사망한지 딱 4백년 되는 1999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3]
이름이 동시대의 인물들 중에서도 많이 특이한 편인데, 당대의 인물인 타몬인 에이쥰(多門院英俊)이 자신이 관여한 일기인 타몬인닛키(多門院日記) 텐쇼 13년 6월 21조에 "챠우스카메(チャウㇲカメ) 로 읽히는 듯 한데 재밌는 이름이다"라며 대놓고 별난 묘지라고 인증해버렸다... 국립국어원 표기법대로면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되고 한국한자음 그대로 읽으면 장종아부원친이 된다.
[4]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모리치카와
가몬(문양)으로 괭이밥을 사용했다. 괭이밥은 쵸소카베 가문 사용했다. 원래는 초록색이나 초록색은 전투나 전쟁에만 쓰였고 쵸소카베 가문으로는 검은색이 사용되었다.
[5]
하지만 생애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정복 반년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대부분을 빼앗기고 만다.
[6]
나가하마 전투에서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오니와코'(鬼若子, 귀신 같은 군인)로 바뀌었다.
[7]
출처는 《토사군키》(土佐軍記) 등으로 보인다. '토사노데키히토'(とさのできひと)라고 읽히는데 '데키히토'는 번역하자면 "뛰어난 군인" 정도의 의미다. 한국에 정발된
노부나가의 야망 천상기와
장성록에서는 '도사의
위인'으로 의역했다.
[8]
보통 出来人는 "데키비토"로 읽혀왔는데 쵸소카베를 중점으로 연구하는 津野倫明 씨는 "데키히토"라고 그 읽는 법을 규정했다 - 長宗我部元親と四国(2014, 吉川弘文館) p.11
[9]
성을 위시로 하는 적군의 방어거점 주변의 보리 등을 싸그리 쓸어버리는 병참공격계의 작전.
[10]
長宗我部元親と四国(2014,吉川弘文館)p.20
[11]
分国法, 한자로 분국법이라 읽으며
다이묘가 자신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지정한 법령이다.
[12]
모토치카의 가신 오타니 요쥬로(小谷与十郎) 끌고온 것인데, 그녀를 마음에 들어해 자기 아들과 혼인하길 권했으나 조선국녀는 '나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몸'이라 거부했고 결국 독신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한 많은 삶을 일본에서 마치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그녀의 비문은 요쥬로의 증손자가 세운 것
[13]
한국어 팜플렛이 있다!
[14]
모리치카의 카이에키 이후, 쵸소카베의 말예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옛 성인 소가베로 바꾸어 생활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 일본에서는 소카베와 쵸소카베가 모두 쓰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