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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13 00:41:34

미요시 나가하루

三好長治(みよし ながはる)
1553년(?) ~ 1576년 12월 27일

센고쿠 시대의 대표적인 암군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아와의 국주.

1. 소개2. 짓큐의 후계자3. 오다 가문과의 대립4. 친노부나가 정책 그리고 패망5. 평가
5.1. 쇼즈이 종론에 대하여5.2. 군키모노에서 묘사되는 나가하루
6. 기타

1. 소개

미요시 짓큐의 장남. 아명은 센츠루마루(千鶴丸), 만츠루(万靍)를 사용하였으며 겐푸쿠 후의 가명은 아버지와 같은 히코지로(彦次郎)를 사용. 이름은 나가하루를 사용했다. 현재는 무카시아와모노가타리(昔阿波物語)같은 군키모노들의 영향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아와 미요시 가문 멸망의 원인, 백성들에게까지 종교를 강요한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짓큐의 후계자

나가하루가 공식적으로 아와의 정무를 맡은 것은 1559년이다. 당시 짓큐는 반미요시 세력인 서 사누키의 카가와(香川) 가문을 정복하기 위해 나가하루에게 아와의 지배를 맡기며 미요시 야스나가 등을 붙여주었고 자신은 시노하라 나가후사 등을 대동해 사누키로 진군하였다. 짓큐는 사누키 정벌을 마치자 1560년, 미요시 나가요시의 부름으로 카와치로 건너가 하타케야마(畠山) 가문을 격파한 뒤 타카야 성(高屋城)을 거성으로 삼았기에 시코쿠 방면은 나가하루가 중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통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짓큐가 진출한 키나이에선 쇼군 무로마치 바쿠후를 사실상 지배하는 미요시 가문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갔고 결국 1562년 3월 5일, 쿠메다 전투(久米田の戦い)에서 짓큐가 전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키나이에 정착했던 짓큐의 가신 대부분은 본국인 아와로 귀국하였으나 곧 야스나가, 카지 모리토키(加地盛時), 시노하라 나가히데(篠原長秀), 야노 토라무라(矢野虎村)가 군사를 동원하여 5월 10일에 아마가사키로 도해해왔다. 도해한 이들은 미요시 요시오키,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협동해 반미요시 세력을 몰아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타카야 성으로 들어간 짓큐의 중신들은 야스나가 외 8명이 나가하루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서장을 발급하며 나가하루를 짓큐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밀어주었다. 이들 중 야스나가, 토라무라, 미요시 모리마사(三好盛政)는 키나이 미요시 가문의 미요시 산닌슈처럼 연서장(連署状)을 발급하며 영지를 통치해나갔다. 아와에서는 나가후사가 독자적인 분코쿠법(分国法)인 신카세이시키(新加制式,신가제식)를 제정해 실행하였으며 나가후사는 사누키로의 출병을 반복해나갔다.

3. 오다 가문과의 대립

1565년 5월 19일, 키나이에서는 미요시 요시츠구, 미요시 나가야스, 마츠나가 히사미치(松永久通)에 의해 에이로쿠의 정변이 발생해 쇼군이 공석이 되었다. 나가후사는 이 기회에 아와에 거처중인 아시카가 요시츠나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새로운 쇼군으로 만들 생각을 품었다. 이윽고 미요시 산닌슈 마츠나가 부자의 내분이 일어나자 나가후사는 산닌슈측에 참여해 공적을 올렸고 산닌슈측이 내분에서 승리하자 나가후사와 산닌슈는 요시히데를 14대 쇼군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나갔다. 나가후사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요시츠구는 히사히데 측에 투신했으며 이들은 연줄이 닿아있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상락을 노리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한편 1568년 3월 5일에 짓큐의 7회기가 열렸다. 공양을 위해 짓큐와 깊은 교류를 나누던 니치렌슈(日蓮宗) 묘코쿠지(妙国寺)의 니치코(日珖)가 참여했으며 나가하루와 소고 마사야스 또한 참여하여 청문하였다.

이윽고 노부나가가 키나이로 쳐들어왔지만 미요시 가문은 전혀 결속된 상태가 아니었다. 전투의 목적이 사전에 예고한 것과 맞지 않는다며 멋대로 귀국하는 코쿠진들이 발생하였고 나가후사의 동생이 요시츠구와 내통하여 나가후사를 살해하려했으나 실패하고 사카이로 도주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본국인 아와에서는 이미 나가하루가 1559년 6월 26일에 내린 토쿠세이 면제의 특권을 나가후사가 1568년 11월 26일에 다시 반복하여 내려주는 등 나가후사의 권력은 주군인 나가하루에 필적하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노부나가의 상락에 의해 아와로 쫓겨난 산닌슈 세력은 계속해서 키나이에 군사를 보냈으며 1570년, 나가후사와 혼간지 켄뇨가 연합하자 켄뇨는 나가하루에게 축의를 보냈다. 이런 미요시-혼간지의 동맹이 오다 세력을 어느정도 키나이에서 축출하는 것에 성공하자 롯카쿠, 아자이, 아사쿠라가 이에 호응에 불길한 움직임을 보였다. 노부나가는 이 사태의 원인인 미요시 가문을 잠재우기 위해 히사히데의 딸을 양녀로 받아 나가하루와 혼약시키는 것으로 미요시 가문은 오다 가문과 화친하여 1570년 11월 21일에 본거지 셋츠에서 철퇴하였다.[1]

이렇게 미요시 가문은 오다 가문과 화친을 맺게 되었지만 나가후사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 쿄토 사면(京都号御宥免)을 실시하였으며 비젠 우라가미 무네카게와 연합, 노시마 무라카미 수군에게도 원군을 요청해 노부나가와 동맹 관계인 모리 가문의 영지와 키나이로 쳐들어갔다. 이런 나가후사의 행동에 모리 가문은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요시아키와 노부나가는 모리 가문에게 나가후사와의 화의는 본심이 아니었다고 회답하였다. 그리고 미요시의 침공을 막기 위해 모리 가문에게 카가와 가문과 상담하여 사누키로 침공할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요시아키는 이요의 코노 가문에게 미요시 가문이 장악하고 있는 동이요 2군(郡)의 반환을 조건으로 코노 가문도 오다 세력에 붙을 것을 요청했다. 이런 혼란속에 이즈모의 아마고 가문은 모리 가문을 침공했고 토사의 쵸소카베 가문과 히젠의 류조지 가문은 모리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이런 나가후사의 반노부나가 전쟁의 주도로 인해 1573년, 노부나가 포위망이 발발하였다. 아와 미요시 가문과 이시야마 혼간지가 서쪽의 주력이 되었으며 한때는 적이였던 요시아키, 요시츠구, 히사히데도 여기에 참전, 키나이의 유력 가문인 이케다(池田) 가문과 하타케야마 가문, 유사(遊佐) 가문도 포위망에 참전하였다.

4. 친노부나가 정책 그리고 패망

오다 가문과의 전쟁을 완벽히 준비해 놓은 나가후사였지만 아와 미요시 가문에선 주군의 권력을 뛰어넘으려 하고 군사를 들이부으며 외교 관계를 박살 내놓는 나가후사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사카이에서는 짓큐의 차남인 마사야스 요시츠구에 대한 공격을 노부나가에게 제안했으며 아와에서는 나가하루가 아와슈고 호소카와 사네유키를 옹립하여 나가후사와 나가시게(長重) 부자를 토벌하였다. 대표적인 주전파이자 타도 노부나가의 전략을 세운 나가후사의 죽음은 반노부나가 진영의 약체화를 가져왔고 얼마 가지 못해 포위망은 붕괴되었다. 나가하루는 주전파를 몰아내며 노부나가와의 재화친을 위해 움직였지만 노부나가는 1573년 12월 12일, 모리 가문에게 나가하루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장까지 보내며 미요시 가문과의 화친을 완강히 거부했다.

노부나가와 미요시 가문의 관게는 이로써 완전히 파탄났다. 1575년, 노부나가는 키나이의 미요시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 대치하는 이즈미의 소고 세력을 몰살시켰고 카와치 야스나가는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노부나가가 야스나가를 용서해주었다는 보고를 받은 나가하루는 다시 한 번 노부나가에게 화친의 사자를 보냈지만 이번에도 화친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제 키나이에서 미요시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은 없어졌다. 나가하루는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아버지와 자신과 연결 관계가 있던 법화종승 니치코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1575년 10월에는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인 쇼즈이에서 종론이 열렸다(勝瑞宗論).

1576년 12월 27일, 나가하루는 노부나가와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포섭된 사네유키와 대립하게 되어 벳쿠나가하라(別宮長原)까지 몰렸으며 그곳에서 자결하였다.[2] 나가하루의 사망으로 인해 미요시 가문의 당주는 1578년, 마사야스가 잇기까지 잠시 단절되게 된다.

5. 평가

아버지부터가 군키모노에서 "주군을 살해한 대역무도한 자", "주군의 측실을 미녀라는 이유로 빼앗은 방탕한 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 아들내미인 나가하루의 평가는 불보듯 뻔한 일이다. 나가하루도 역시 "방탕한 자"라는 평가가 줄을 이으며 자신만의 편안함을 생각하여 간언하는 가신을 참언을 믿고 죽인 자, 동생의 간언조차 무시한 멍청한 자, 종교에 빠져 올바른 판단을 못한 글러먹은 자, 실권없는 주군에게 살해당한 무지렁이로 정말 가지가지 방면에서 까인다. 가히 아와 미요시 멸망의 진정한 원인으로 취급하는 중. 인지도도 바닥을 기며 게임에서는 언제나 구제불능의 능력치로 등장하는 것이 일상다반사다.

그러나 이런 인지도 없는 인물에게도 희망은 있었으니 바로 그가 짓큐의 아들로 아와 미요시 가문을 이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짓큐는 키나이를 제압하고 무로마치 바쿠후를 웃도는 권력자인 미요시 나가요시의 동생으로, 형을 대신해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인 아와를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아와를 통치함과 동시에 사누키와 키나이에도 그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이윽고 나가요시 못지않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짓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나가하루인 것이다. 이 처럼 나가하루의 역사적 위치는 상당히 중요하기에 아버지 짓큐만큼은 아니지만 꽤 연구가 진행되었고 군키모노에 기록되어있는 몇몇 오해들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공정한 평가를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나가하루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는 "아와의 국주인 짓큐를 이어 아와를 통치하며 가신들의 의견에 따라 오다 가문과 싸워 나간 인물, 그러나 곧 친노부나가 성향으로 전환해 가신들을 처리하며 오다 가문과 동맹을 맺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미요시 가문을 고립 상태로 만든 인물, 그리하여 적대 세력에 포섭된 주군에게 사망하게 된 인물."로 정리된다.

5.1. 쇼즈이 종론에 대하여

군키모노에서 쇼즈이 종론은 법화 소동(法華騷動)이라고 불리며 최악의 폭정이라고 평가받는다. 사건은 나가하루가 니치렌슈에 심취하여 아와 전역을 니치렌슈로 강제 개종시키려는 행동에 타종파인 진언종 등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가하루의 행동에 분노한 타종파들은 이윽고 결집하였고 미요시 가문의 본거인 쇼즈이에서 종론을 벌이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니치렌슈 측에서는 니치코가 아와로 들어와 참여하였고 진언종 측에선 키이의 코야산(高野山)이나 네고로슈(根来寺)의 승려가 참여하였으며 논쟁의 결과 진언종 등의 법화 반대파가 승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중세 불교 종파의 활동을 확연히 보여주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연구의 테마로 사용되었으나 위의 사건은 대부분이 군키모노에서만 기록되어있으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니치코가 쓴 코교키에는 종론에 대해 자신이 문답에 대한 뜻이 있어 아와로 하향했으며 나가하루에게 예를 올린 후 정토종승과 대면하여 그들을 법힐(法詰)하였고 코야산에서 온 학승(学僧)과 문답을 나누며 법힐하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군키의 서술과 다르게 법화파가 승리한 것이다. 이후 종론을 끝마친 니치코는 아와를 떠나 아와지를 경유해 사카이로 돌아간 다음, 회의중에 종론의 승리를 보고하였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이번 종론에 관한 기록은 끝난다.

이 기록으로 일단 니치렌슈 측과 정토, 진언종의 사이에 확집으로 인한 논쟁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니치코의 기록에는 "소동"이라고 불릴만한 사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 기록에는 이번 종론이 "왜" 일어났는 지에 대한 이유가 전혀 기록되어있지 않다. 그저 니치코가 직접 아와로 하향하였기에 종론의 근원은 아와 쇼즈이에서 발생했을 거라는 추측만 가능한 상태. 長谷川賢二에 의하면 아와 미요시 가문과 니치렌슈의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에 니치렌슈에 편향적인 개종 계획을 실행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것이 군키에 묘사된 것처럼 아와 1국을 통째로 개종시키는 계획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고 한다.[3]

이처럼 기존의 통념과는 다르게 종론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쇼즈이 종론에 대해 기록한 1차 사료는 코교키가 유일하므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긴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5.2. 군키모노에서 묘사되는 나가하루

왕망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하면 이해가 가는가?

6. 기타

무카시아와모노가타리로 대표되는 군키모노에서 나가하루의 어머니는 코쇼쇼로, 사네유키와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1차 사료에는 그 이름과 관계가 보이지않기 때문에 이는 창작된 사실이라고 보여진다.


[1] 니치코의 일기 코쿄키(己行記)에는 1571년 정월 말에 나가하루와 시노하라가 하향하였다고 적혀져있다. [2] 나가하루의 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군키모노에 1577년 3월 28일과 1576년 12월 27일로 양분되어 기록되어있다. 통설로는 미요시키(三好記) 등의 1577년을 나가하루의 몰년으로 하였지만 켄뇨가 아타기 가문에게 1577년 1월에 나가하루의 자결을 알리는 서장을 받은 것이 밝혀져 학자들은 무카시아와모노가타리 등의 1576년을 나가하루의 몰년으로 사용하고 있다. [3] 덧붙여 사누키 아와지에도 니치렌슈가 영주 권력과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시킨 예가 존재하므로 이 점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 「天正の法華騒動と軍記の視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