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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20:37:52

미요시 요시오키


三好義興
1542년 ~ 1563년 9월 12일

1. 소개2. 생애3. 평가 및 기타

1. 소개

미요시 나가요시의 적자이자 후계 예정자. 미요시 정권의 핵심 인물 중 하나. 지용을 겸비한 인재였지만 이른 나이로 사망하였다.

2. 생애

1542년 미요시 나가요시의 적자로 탄생했다. 1552년 11살의 나이로 원복, 요시오키(慶興)라는 이름을 칭했다. 1558년 키타시라카와의 전투 뒤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미요시 정권이 화해하여 막부가 교토로 복귀하게 되자 이듬해 2월 아버지와 함께 상경해 쇼군과 만났고, 동년 막부 쇼군가의 통자인 요시(義)를 하사받아 요시나가(義長)로 개명했다.

쇼군의 교토 복귀 이후 요시오키는 1560년 부친의 거성이던 아쿠타가와 성을 물려받았다. 이후 그는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보좌를 받으며 미요시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교양을 갖춘 문화인인 동시에 뛰어난 무사였던 요시오키는 공가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검호 쇼군이라 불릴 정도의 무예를 갖추고 있던 6살 연상의 요시테루와도 친분을 쌓았다. 요시테루는 요시오키에게 나가요시와 같은 수준의 대우를 해주었고, 두 사람의 친분은 막부와 미요시 정권을 연결하는 끈 역할을 했다.

미요시의 군사력을 담당한 숙부 소고 카즈마사가 1561년 급사하고 벌어진 롯가쿠, 하타케야마 연합군과 미요시 정권의 전쟁에서 요시오키는 그 군사적 재능을 뽐냈다. 그는 교토 주변 전선을 히사히데와 함께 담당하며 롯가쿠 군을 상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미요시 짓큐 총지휘의 미요시 시고쿠 군단과 하타케야마 군 사이에 벌어진 쿠메다 전투에서 짓큐가 전사하여 미요시 군이 패퇴, 요시오키의 군단도 교토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요시테루를 설득해 막부의 지지를 확보한 요시오키는 교토를 버리고 후퇴, 탄바, 셋츠 일대에 군을 배치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이후 벌어진 하타케야마 군과의 대규모 결전 쿄코지 전투에서 오시오키는 거성에서 나오지 않은 부친을 대신해 전선에 나온 부대의 총지휘를 맡았고, 대승을 거두어냈다. 이후 요시오키는 기세를 몰아 롯가쿠 군을 교토에서 축출, 막부를 교토에 복귀시켰다.

이렇게 명장으로 재능을 보이고 후계자로서 업무를 행하던 요시오키는 1563년 갑자기 병마에 쓰러졌다. 명의 마나세 도산이 그를 진료했고, 나가요시와 요시테루 등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쾌유를 기원했지만,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20대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3. 평가 및 기타

부친 나가요시와 같이 지용을 겸비한 인재로, 천하를 다스리기 걸맞은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런만큼 그의 요절은 미요시 정권에게 큰 타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