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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8:17:16

디페시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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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고어
데이브 가안
앤디 플레처†

{{{#!folding [ 전 멤버 ]
[ 관련 문서 ]
||<tablebgcolor=#fff,#191919><width=1000> 디스코그래피 ||

디페시 모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름 디페시 모드
Depeche Mode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마틴 고어, Dave Gahan, 앤디 플레처, 전 멤버(빈스 클라크, 앨런 와일더)[1]
입성 연도 2020년
후보자격 연도 2006년
후보선정 연도 2017년, 2020년 }}}

파일:D35299F0-A94E-4256-858A-16C852ABB793.png 파일:Acclaimed-Music-Logo-Dark.png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1980년대 아티스트
30위

파일:A75A5D13-D37C-4A62-94E4-4B9BA96D570A.png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 2010년 미국의 케이블 음악채널 VH1에서 음악평론가와 현직 뮤지션, 기타 음악산업 종사자 등 총 200명 이상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순위를 정했다.
<rowcolor=#fff>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마이클 잭슨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스 밥 딜런
<rowcolor=#fff>6위 7위 8위 9위 10위
지미 헨드릭스 프린스 엘비스 프레슬리 제임스 브라운 스티비 원더
<rowcolor=#fff>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밥 말리 데이비드 보위 더 후 너바나 비치 보이스
<rowcolor=#fff>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돈나 핑크 플로이드 U2 마빈 게이
<rowcolor=#fff>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더 클래시 AC/DC 벨벳 언더그라운드 척 베리
<rowcolor=#fff>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닐 영 아레사 프랭클린 엘튼 존 라디오헤드 에어로스미스
<rowcolor=#fff>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존 레논 블랙 사바스 건즈 앤 로지스 티나 터너 조니 캐시
<rowcolor=#fff>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폴 매카트니 플리트우드 맥 슬라이 & 더 패밀리 스톤 킹크스 폴리스
<rowcolor=#fff>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밴 헤일런 메탈리카 레이 찰스 조니 미첼 알 그린
<rowcolor=#fff>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라몬즈 JAY-Z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팔리아멘트-펑카델릭 샤데이
<rowcolor=#fff>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빌리 조엘 비욘세 리틀 리처드 퍼블릭 에너미 피터 가브리엘
<rowcolor=#fff>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키스 스투지스 칩 트릭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 휘트니 휴스턴
<rowcolor=#fff>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크림 제네시스 노토리어스 B.I.G. 토킹 헤즈 도어즈
<rowcolor=#fff>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저스틴 팀버레이크 콜드플레이 오티스 레딩 투팍 샤커 데프 레파드
<rowcolor=#fff>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R.E.M. 재니스 조플린 밴 모리슨 더 큐어 러시
<rowcolor=#fff>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Run-D.M.C. 레너드 스키너드 주다스 프리스트 에미넴 메리 제이 블라이즈
<rowcolor=#fff>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ABBA 스틸리 댄 어스 윈드 & 파이어 커티스 메이필드 더 밴드
<rowcolor=#fff>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N.W.A. 조지 마이클 비 지스 비스티 보이즈 엘비스 코스텔로
<rowcolor=#fff>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그린 데이 LL Cool J 펄 잼 머라이어 캐리 아웃캐스트
<rowcolor=#fff>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저니 프리텐더스 디페시 모드 홀 앤 오츠 앨리샤 키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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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eche M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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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마틴 고어 · 데이브 가안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다른 사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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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epeche mode Spirit 2017.jpg
2017년 앨범 프로모.[2]
왼쪽부터 앤디 플레처† · 데이브 가안 · 마틴 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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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결성 1980년
잉글랜드 에식스 베이즐던[3]
데뷔 1981년 2월 20일
싱글 <Dreaming of Me>
멤버 마틴 고어
데이브 가안
전 멤버 빈스 클라크
앨런 와일더
앤디 플레처†[4]
장르 신스팝, 얼터너티브 록
레이블 Mute[5], Sire[6], Reprise, Capitol, Virgin, Columbia,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7]
링크 파일:deprche mode logo.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스포티파이 아이콘.svg

1. 소개
1.1. 결성 과정과 데뷔1.2. 빈스 클라크의 탈퇴와 앨런 와일더의 합류1.3. 1983년 변화의 시작1.4. 1984년 문제적 히트작 Some Great Reward1.5. 컬트로서 대중을 사로잡다(1986~1987)1.6. 리즈 시절과 앨런 와일더의 탈퇴(1990~1995)1.7. 3인조로 새출발1.8. 2000년대 이후1.9.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2. 멤버
2.1. 마틴 고어
2.1.1. 음악2.1.2. 여담
2.2. Dave Gahan
2.2.1. 음악2.2.2. 여담
3. 전 멤버
3.1. 빈스 클라크3.2. 앨런 와일더
3.2.1. 여담
3.3. 앤디 플레처
4. 음악적 특징
4.1. 가사4.2. 종교관4.3. 음악계에 미친 영향
5. 디스코그래피6. 수상 경력7. 뮤트 레코드와의 관계8. 여담
[clearfix]

1. 소개

“They’re the biggest cult band in the world”
"그들은 세계 최대의 컬트 밴드입니다"
안톤 코빈 NME
"the most popular electronic band the world has ever known"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가장 인기 있는 일렉트로닉 밴드
Q #

영국 신스팝 밴드.

80년대에 뉴웨이브가 유행할 당시에 뉴 오더, 펫 샵 보이즈와 함께 신스팝을 이끌었고, 2010년대의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의 신스 팝적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는 메탈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마릴린 맨슨, 나인 인치 네일스, 람슈타인, 스매싱 펌킨스, 데프톤즈, 트래비스, 린킨 파크, 콜드플레이 등 당대 최고의 밴드들이 심심찮게 그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2014년 NME가 선정한 '영향력 있는 100대 아티스트' 중 37위에 들었다. 링크 매머드 신스 사운드와 음산한 기타 리프를 동등하게 다루는 아레나 지향형 록 사운드는 디페시 모드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되어 있다.

2004년 Q 매거진이 선정한 세계를 바꾼 50대 밴드에도 포함되어 있다. 링크

2017년 시점 기준으로 전 세계 누적 앨범 판매량이 1억 장에 달할 정도로 여전히 음반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밴드이다.
물론 투어는 말할 것도 없다. Spirit 활동 당시 투어인 <Global Spirit Tour>는 2017년 5월 5일에 시작해 2018년 7월 25일에 마무리한, 무려 130번 무대에 섰던 대장정이었으며, 이는 그들의 투어 역사상 두 번째로 긴 기간이었다.[8] 노익장이 대단하다.

창단 당시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던 키보디스트 앤디 플레처가 2022년 5월 26일 사망하여, 이젠 남아 있는 멤버가 마틴 고어, 데이브 가안 둘 밖에 없다.

2022년 8월 16일 공식 인스타그램에 생존 멤버인 마틴 고어와 데이브 가안이 스튜디오에 있는 사진이 올라왔다. 링크

그리고 9월에 인터넷상에서 디페시 모드가 10월 4일 베를린에서 컴백 발표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가짜 뉴스로 치부되었으나, 9월 28일 공식 트위터 계정에 4.10.22 날짜가 뜬 데 이어 Berlin 4.10.22란 문구와 함께 스튜디오 장비 사진이 등장했다.

9월 30일에는 영상에 13:00 CET라는 문구가 추가되었으며, 마틴의 얼굴과 데이브의 팔이 공개되었다. 또한 “Join us virtually” “more info soon”라는 문구도 추가되었다. 결국 NME가 일련의 티저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링크

결국 2022년10월 4일 베를린에서 컴백 발표를 하고, 이듬해인 2023년에 15집인 Memento Mori을 발표하여 2인조로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밴드 명칭 표기와 발음법

위키피디아의 경우, 본인들의 발음을 기준으로 디페쉬 모드라고 표기했으나, 이 문서의 경우, 영어의 ʃ 발음이 단어 끝에 올 경우 로 통일하는 국립국어원 기준을 따라 디페시 모드로 표기되었다. 링크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 또한 국립국어원의 프랑스어 표기법과는 동떨어져 있다. 나무위키의 표기는 프랑스어에서 비롯한 단어에 영어 단어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한 일종의 절충식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는 발음이 비슷하다.

이는 프랑스 패션지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영국 밴드라는 복잡한 정체성 때문이다.

본래 프랑스어로 지은 이름이고, 본인들도 최대한 프랑스어에 가깝게 발음하려 하므로, 최대한 현지 발음에 가깝게 적는다면, 디페쉬 모드가 그나마 비슷하다. 링크
하지만, 국립국어원의 프랑스어 표기법을 따른다면 데페슈 모드가 되며, 이는 현지 발음이나 본인들 발음과도 동떨어진 표기법이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 이 문서가 만들어졌을 당시 이러한 절충식 표기를 한 듯하다.

물론 발음기호상으로는 é는 발음에 해당하므로, 적어도 De 부분은 라고 적는 것이 옳으나, 네이버 프랑스어 사전 발음을 들어 보면 Dépèche에서 é 발음이 희미해서 에 가깝게 들린다. 의 중간 정도 느낌이며, 멤버 본인들의 발음도 이와 비슷하다.

이처럼, 한글로 적기에 애매한 프랑스어 발음 탓에 우리나라에서 유독 표기법이 갈리는 밴드이다.
프랑스어 표기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데페슈 모드라고 표기한 경우는 이 이름의 유래가 된 프랑스 패션지를 언급한 경우가 유일하며, 실제로 이를 따르는 경우는 전무하다.

이 때문에 옛날 신문 기사를 검색할 때 애로 사항이 많다(...)현재 검색되는 기사 중 가장 오랜 기사가 데뷔 시절 기사인데, 여기서는 디페치 모드라고 표기했다. 링크
그리고 1996년 뉴스위크 한국어판 기사에서는 디페슈 모드라고 표기했다.

그래도 90년대 후반부터는 본인들 발음을 기준으로 디페쉬 모드로 통일되는 듯하지만, 아직까지도 국립국어원에서 표기법을 제시하지 않은 탓에 최근에도 가끔 표기법 혼선이 빚어진다. 나름 메이저급 언론에서도 데페체 모드, 데페셰 모드 등, 제각각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

그런데 본고장인 영어권의 경우, 표기법 문제는 당연히 없는 반면, 발음법 때문에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프랑스어식으로 디페쉬 또는 디페시라고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어식으로 읽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영국인들이 프랑스 패션지인 Dépèche Mode를 데페체 모드, 또는 디페체이 모드라고 잘못 발음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디페시 모드 본인들도 활동 초기에는 잘못 발음했다가 프랑스에 가서 이게 잘못된 발음인 걸 뒤늦게 알고 바로잡았다(...) 링크
즉, 우리나라의 초기 언론 기사에서 디페치 모드라고 표기했던 것은 본인들의 잘못된 발음을 고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우리 언론은 잘못이 없다.

현재 본인들은 최대한 프랑스어 발음에 가깝게 디페쉬 모드라고 발음한다.[9]

하지만, 지금도 영어권 방송을 보면 영어식으로 더페쉬, 더페치라고 발음하는 사람들이 많다.[10]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바른 발음을 알리는 동영상이 있다.

여담으로, 밴드의 이름을 지어 준 메인 보컬 Dave Gahan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서, 게이한, 게헌, 개헌, 게이언, 가한 등 천차만별이다. 구글에서 Dave Gahan으로 검색했을 때 뜨는 게한도 잘못된 표기이지만, 일부 방송에서는 저렇게 발음한다. 하도 저런 일이 많아서 가수 본인도 일일이 정정해 주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 그나마 원래 발음에 가까운 표기가 '간', 가안인데 한글로 적으면 이상해 보여서 그런지 잘못된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 마디로, 알파벳의 음가가 너무나 다양해서 빚어지는 혼선이라 할 수 있다. 세종대왕님께 감사

1.1. 결성 과정과 데뷔

파일:Depeche Mode 1981.jpg
초창기 멤버는 Dave Gahan과 마틴 고어(Martin Gore), 앤디 플레처(Andrew Fletcher), 빈스 클라크(Vince Clarke)였다.

사실, 디페시 모드의 전신이 되는 밴드가 이미 있었다. 원래는 학교 친구인 앤디 플레처와 빈스 클라크는 No Romance in China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그런데 1980년 어느날, 베이즐던(Basildon)에 있는 반 고흐(Van Gogh)라는 에서 마틴 고어를 만나 신시사이저를 추가한 3인조 밴드가 되었고, 밴드명을 컴퍼지션 오브 사운드(Composition of Sound)라고 바꾼다. 이후 Dave Gahan이 오디션을 통해서 우연히 보컬로 합류한다. 사실은 말이 오디션이지 순전히 우연으로 결정되었는데, 컴퍼지션 오브 사운드 멤버들이 프론트맨 역할을 할 메인 보컬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을 때, 지역의 스카우트 홀[11]에서 누가 데이비드 보위 Heroes를 부르는 걸 빈스 클라크가 듣고 인상적이어서 합류 제의를 했다고 한다. Dave가 훗날 말하기를, 사실 그 노래는 잼 세션 중에 여러 사람이 뒤섞여 부른 거였는데 그냥 내가 했다라고 대답하고 합류 제의에 응했다고. 링크

그리고 2주 후 빈스 클라크가 Dave에게 전화를 걸어 오디션을 치르게 했다. 이때 세 곡이 주어졌는데, 두 곡은 빈스 클라크가 쓴 곡이었고, 한 곡은 록시 뮤직의 곡이었다. 빈스 클라크의 회고에 따르면 Dave가 빈스의 자작곡을 불렀을 땐 그저 그랬는데, 록시 뮤직 노래는 꽤 잘해서 합격시켰다고 한다. 링크

보컬이 정해지면서 밴드명이 바뀌었는데, Dave Gahan이 우연히 테이블에 놓인 프랑스의 패션 잡지 Depeche Mode를 보고 즉석에서 결정했다고 한다. 링크 의미는 패션을 빠르게 전달한다(fashion dispatch)는 뜻으로, 그 뜻에 걸맞게 유행을 주도하는 그룹이 되고 싶어서였다고.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유행 통신 정도. 디스패치와 어원이 같다.

이후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인지도를 쌓았는데, 런던의 어느 에서 공연을 했을 때 뮤지션 Daniel Miller가 자신이 세운 인디 레이블인 뮤트 레코드에 들어오라고 50 대 50으로 제안을 한다. 거액을 제안하는 회사들도 많았지만, 그가 가장 믿을만해서 뮤트 레코드에 들어간다. 링크 앤디 플레처의 말에 따르면 당시 멤버들은 돈보다는 Daniel Miller의 음악을 좋아해서 그의 레이블을 선택했다고 한다. 2017년 인터뷰에서 만약 당시에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에 와서 이 인터뷰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링크

이렇게 해서 선보인 데뷔 싱글 'Dreaming Of Me'가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이 곡은 2020년에 롤링 스톤이 역대 위대한 데뷔 싱글 100곡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링크

1집은 빈스 클라크가 대부분의 곡을 썼는데, 여타 신스팝 밴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뿅뿅거리는 사운드의 발랄한 음악을 보여 주었다.

1.2. 빈스 클라크의 탈퇴와 앨런 와일더의 합류

하지만, 그들은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빈스 클라크와 자주 다투었는데 Yazoo 다큐멘터리를 보면 빈스 클라크는 너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얻은 성공이 부담스러웠고, 스튜디오 작업을 선호하여 대중들을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럼으로써 불행했었다고 고백했다. 그 당시 기자들이나 음악쪽에 종사한 사람들의 인터뷰도 같이 있는데, 당시엔 디페시 모드와 빈스 클라크 모두 순진했었다고.
빈스 클라크와 더불어 앤디 플레쳐도 인터뷰에 응했는데 앤디는 그는 이미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원년멤버였던 빈스 클라크는 탈퇴하게 된다.[12] 그러나 빈스는 자기신념이 확고했던 사람이었고, Alison Moyet과 Yazoo를 결성해 성공을 거둔다. 이후 The assembley를 거쳐, 앤디 벨과 함께 이레이저를 결성해 자기 만의 길을 갔다.

1982년 2집부터는 마틴 고어가 팀의 주도권을 쥐면서 전곡을 작사 작곡했다. 그리고 빈스 클라크의 자리를 대신할 연주자를 구하기 위해 회사에서는 음악 잡지 멜로디 메이커에 구인 광고를 냈다. 광고에는 Keyboard player needed for established band – no timewasters(기존 밴드에 필요한 키보드 연주자 - 시간 낭비자 없음) 21세 이하라고 적혀 있었다.

59년생인 앨런은 당시 나이가 만으로 22세였으나 나이를 속이고 지원한다. 그래서 멤버 중 유일한 50년대생이자 최연장자가 되었다.
파일:Alan Wilder.jpg

이 때도 발랄 콘셉트에서 아예 벗어난 건 아니었다. 2집 수록곡 <Meaning of Love> 뮤직비디오를 보면 뽀뽀뽀가 따로 없다. 참고로 앨런 와일더가 합류했을 때 촬영한 것이다. 뒤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는 꽃미남이 앨런이다.

사실, 가사 내용은 동화적인 뮤비 내용과는 딴판이다. From the notes that I've made so far Love seems something like wanting a scar(지금까지 내가 만든 노트에서 사랑은 상처를 원하는 것 같다)라며 사랑의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후 가사의 방향성이 암시되는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 활동은 보이밴드 초통령 이미지로 갔다.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충격과 공포의 방송이다.
독일의 TV 쇼에서 닭을 안고 2집 타이틀 곡 'See You'를 립싱크하는 모습

2015년에 Dave Gahan이 당시를 회상한 인터뷰. 텍스트본 2017년 방송에서도 회자된 흑역사 링크 다행히도 이 방송을 끝으로 이런 예능에 나갈 일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독일이다.

1.3. 1983년 변화의 시작

1983년에 발매된 3집부터는 드디어 앨런 와일더(Alan Wilder)가 정식 멤버가 되어 편곡으로 큰 활약을 한다.

이 해에 발매된 앨범 <Construction Time Again>은 2017년 앨범 Spirit 공개 후 다시 거론되는 앨범인데, 사실상 이 앨범부터 밴드의 색깔이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변했다는 평가가 있다. 링크

이는 이 앨범에 사회를 다룬 곡들이 다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폐기물에서 나오는 소리를 활용하는 등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실험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앨범의 히트곡인 'Everything Counts'는 발랄한 멜로디와는 달리 여피 시대 기업의 탐욕을 냉소적으로 픙자하는 내용이다. 가사에는 뜻밖에도 Korea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가사 번역 다만 Korea는 'Career', 'Insincere'와 라임을 맞추기 위해 들어가서 특별한 뜻은 없다. Martin Gore에 의하면 동양의 다국적 기업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당시 전 세계를 휘어잡고 있었던 동양의 다국적 기업은 일본(Japan) 기업밖에 없어서 당연히 Japan이 들어갔지만 들어보니 라임이 영 아니여서 Korea로 변경했다고 한다. 당시 인터뷰에 따르면 영감을 준 나라 중에 태국도 있었는데, 서구의 사업가들의 부패한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같은 앨범 수록곡 'Shame'은 이에 대해 느낀 부끄러움을 담았다.

'The Landscape Is Changing'은 환경 재앙을 우려하는 메시지를 담은 곡이었다. 또한 'Pipeline'은 폐기물을 이용한 소리를 넣어 노동 문제를 다루었다고 한다.

당시 언론은 이들에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기도 했다. 마틴 고어는 앨범에 관한 인터뷰에서 선진국이 후진국을 착취하는 것을 비판했고, 우리가 사회주의에 대해 말했을 때, 그것은 영국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제 사회주의를 의미한다(The thing is when we talk about socialism, we don’t mean “English Socialism” we mean “International Socialism”.)라는 발언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는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대립하던 냉전 시대였다.

디페시 모드 멤버들은 대부분 노동 계급 출신이었기에 당시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링크 이는 80년대 초 잡지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는데, 메인 보컬 Dave Gahan은 왜 우리 나라에 미군기지를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마가렛 대처의 군비 축소 정책을 대차게 깐다. 링크 참고로 마가렛 대처는 군비 축소 효과를 보기 위해 미국의 군사 정책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앨런 와일더는 유일하게 중산층 출신이었으나, 2000년대 초반 팬이 마가렛 대처를 단어 하나로 표현해 보라고 질문하자, Senile(노망난)이라고 했을 정도로 대처를 극혐했다. 링크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던 것은 아니다. 마틴 고어는 당시 인터뷰에서 왜 사람들이 정치에 발을 들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And Then'의 가사에서 언급한 혁명도,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라는 의미였다고 하며, 이는 2017년에 발표한 앨범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생각이다.
I really don’t understand why people go into politics – what makes someone at 16 or 17 decide to go into parliament? It’s got to be people themselves. People’s attitudes have got to be changed. For instance, when I wrote “All we need’s universal revolution”, I didn’t mean, like, everyone to take up arms, but more a total change of attitude.

저는 사람들이 왜 정치에 입문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16세나 17세의 사람들이 국회로 진출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우리에 필요한 모든 것은 보편적 혁명"이라고 썼을 때, 저는 모든 사람들이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완전히 바꾸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Construction Time Again> 앨범의 마지막 수록곡인 'And Then'의 가사를 보면 Let's take the whole of the world/The mountains and the sand/Let all the boys and the girls/Shape it in their hands라는 구절이 있다.
즉 세상을 알아서 다시 만들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며, 앨범의 제목과도 일맥상통한다.

한편, 이 앨범부터 1986년작 <Black Celebration> 앨범까지는 데이비드 보위가 < Heroes> 앨범을 녹음했던 독일의 Hansa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이는 80년대 초반 파운드화 강세로 인해 베를린에서 녹음을 하는 것이 제작비가 훨씬 싸게 먹혔기 때문이었다. 링크 그래서 1983년작, 1984년작, 1986년작을 디페시 모드의 베를린 3부작으로 부르기도 한다.

1.4. 1984년 문제적 히트작 Some Great Reward

이후에는 음악 성향이 어둡고 서정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인더스트리얼, 고딕을 대폭 수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의 성향은 점점 동시대 밴드들과 구분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포텐은 초기의 명반으로 꼽히는 Some Great Reward에서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전작에 이어 독일의 Hansa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음반으로, 35년 후인 2019년에 Hansa 스튜디오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이들의 녹음 모습을 담은 사진을 올려줄 정도로 기념비적인 앨범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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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자 스튜디오에서 Some Great Reward 앨범을 녹음하는 디페시 모드
가사 역시도 BDSM, 페티시, 신성모독, 간통과 같은 매우 불건전한 주제를 내세워 대중음악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이들의 핵심 주제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문제작 'Master and Servent'는 제목부터가 BDSM을 암시하여 논란이 됐었고, 이를 계기로 디페시 모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BDSM이 됐다.

다만, BDSM을 다루었다고 해서 SM 플레이를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고, 비유적인 표현으로 등장한다. 연인 관계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거나 어느 한 쪽에게 리드당하는 것을 이러한 관계에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곡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BDSM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 불평등에 대한 일종의 풍자라는 해석도 있다.

빌보드지 에디터가 꼽은 디페시 모드의 명곡 20선 기사에서도 단순히 BDSM으로만 해석한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곡으로 해석했다. 링크

참고로 마틴 고어는 이 앨범을 준비할 시기에 극도로 보수적인 기독교인 여친과 헤어지고 베를린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호기심에 현지의 BDSM 클럽을 탐방한 적은 있으나, 이를 주제로 다룬 곡은 한두 곡에 불과하다고. 링크[13]

이들의 미국 시장 첫 히트곡 'People Are People'도 사람에 대한 차별과 증오를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았기에 당시에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노래로도 인식되었지만, 게이 커뮤니티의 지지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노래는 미국 시장에는 1985년에야 알려졌으나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3위까지 올랐다. 링크

특히 'People Are People'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1위를 했는데, 이 곡이 1984년 서독 올림픽 관련 TV 방송에서 BGM으로 쓰인 것이 계기였다. 덕분에 이들의 인기가 치솟자,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는데, 인터뷰를 못 따낸 매체에서는 주작까지 저질렀다고 한다. 대표적인 매체로는 지금도 10대 타깃으로 발행되는 팝음악 잡지 <Bravo>가 있는데[14], 예를 들면 이들이 20세 이하의 모든 사람들을 혐오한다는 식이었다. 링크 이런 류의 스토리가 먹혔기 때문에 잡지는 잘 팔렸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어그로 유튜버가 ' 방탄소년단은 급식충을 싫어한다'라는 썸네일을 내세워 조회수를 올리고 광고 수익을 얻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 <Bravo>의 표지를 장식했던 디페시 모드의 모습이다. #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표지에 등장한 연예인들의 모습 링크

이 시기 히트곡인 'People Are People'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회자되어 2012년 독일에서는 폭스바겐 골프 7세대 광고의 BGM으로 쓰였다. 링크 이 광고에는 노래를 부른 장본인인 Dave Gahan도 깜짝 출연했다. 근데 하필 해당 차종이 디젤게이트에 휘말렸고, 사람을 대상으로 무의미한 배기가스 노출 실험을 한 사실까지 폭로됐다(...). 여러모로 가수에게 빅똥을 투척.

'Blasphemous Rumours'는 원래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이었으나 종교계의 거센 반발로 인해 방송 금지를 먹었기 때문에 'Sombody'를 더블 타이틀 곡으로 밀었다고 한다. 링크 이 곡에는 타악기 샘플이 쓰였는데 초기 인더스트리얼 음악 스타일이 이 곡을 통해서 나타났다.

여담이지만, 1985년도에 국내에서 발매된 Some Great Reward 앨범을 보면, 곡 제목마다 번역이 되어 있었다. 링크 여기서는 'Master And Servent'가 삭제된 채로 발매되었다.

반면 본국에서 신성모독 논란이 있었던 'Blasphemous Rumours'는 아무 문제 없이 발매되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단체의 세력이 강함을 생각하면 매우 의외인 부분인데, 가사의 내용이 자살을 기도한 소녀가 자살에 실패한 후 마음을 고쳐 먹고 신앙심을 갖고 살았으나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소녀의 오빠가 이를 슬퍼하며 하느님의 유머 감각이 역겹다고 비난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원 출처

다만, 유교 사상이 강한 우리나라 특성상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높으신 분들 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묘사한 부분에 공감했을 수도 있다. 참고로 당시는 해외 음반도 검열을 해서 발매 여부를 결정하던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이었다.

이처럼 10대를 대상으로 하는 20대 초중반 밴드로서는 파격적으로 금기시되는 소재를 다루었기에 이들은 종교적인 가정에서 학대를 당하거나 또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청소년들,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에 이들은 공산주의 진영인 동구권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링크 당시는 냉전 시대라 서방 서계의 음악이 금지되었음에도 이들은 1985년 헝가리 폴란드에서 첫 공연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음악이 동구권에서 특히 인기를 끈 이유로는 음악의 우울함과 인더스트리얼적인 성향이 거론되며, 공산주의 정권에 배신감을 느낀 동구권 젊은이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1.5. 컬트로서 대중을 사로잡다(1986~1987)

1986년에 나온 Black Celebration은 잘 만들어진 앨범이기는 했어도 전작보다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많았으며 상업적으로도 부진한 편이었다. 다만, 이 앨범이 가지는 의미는 인더스트리얼과 신스팝으로 대변되던 이들의 전기와 록을 받아들이는 후기를 이어주는 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를 기점으로 컬트적인 팬층이 형성된다. 링크

그런데, 상업적으로 부진하다는 것은 전작 <Some Great Reward>에 비해 미국 차트 실적이 부진했다는 것일 뿐, 독일 차트 성적은 오히려 상승해 2위를 차지했다. 독일의 경우 이미 3집 <Construction Time Again>부터 7위를 차지해 꾸준히 탑텐 자리를 지켜왔다. 특히 프랑스에서 순위가 떡상했는데, 이전 앨범들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2집이 간신히 194위에 턱걸이했을 뿐 3집은 아예 차트인도 못했다. 심지어는 미국 내에서 성공한 <Some Great Reward>도 프랑스 차트는 못 뚫었는데 <Black Celebration>은 19위를 했던 것이다. 링크 그래서 당시엔 프랑스 매체와도 인터뷰를 했다. 이처럼, 다른 유럽 국가에서 인기가 높았다는 것도 이들이 컬트로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15]

동명의 타이틀곡인 'Black Celebration'은 허무적인 가사를 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노래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 느끼고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링크

2022년 10월 31일 롤링 스톤에서 공개한 역대 베스트 고스 송 50(The 50 Best Goth Songs of All Time)에서는 33위에 들었다.

수록곡인 'Spripped'는 90년 후반에 람슈타인이 리메이크하기도 했으며, 기술과 탐욕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무너진다는 문제 의식을 담았다는 점에서 30년 후에 재조명되기도 한다. 링크

또한, 1981년 1집 때 이들의 앨범 속지 사진과 잡지 표지를 촬영한 것으로 인연을 맺었던 포토그래퍼 안톤 코빈이 이들의 뮤직비디오를 처음으로 맡게 되면서 다시 이들과 만나는데, 그때부터 이들의 사진과 뮤비의 대부분은 안톤 코빈이 맡아 제5의 멤버와 다름없는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보컬 Dave Gahan의 외모도 이 시절을 기점으로 달라지는데, 그 전에는 금발로 탈색을 하거나 눈썹을 다듬었지만, 코빈의 조언을 듣고나서는 탈색을 그만두고 눈썹도 다듬지 않았다고 한다. 즉, 음악뿐만 아니라 시각적 분야 전반에서 디페시 모드 하면 떠올리게 되는 다크 섹시 이미지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듬해인 1987년에 나온 Music for the Masses에서 이들은 본격적으로 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평론과 대중들은 이러한 변화에 꽤 호의적인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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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for the Masses 앨범 프로모 사진. 디페시 모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다만 대중을 위한 음악이란 이 앨범명은 원래는 반어적인 의미였다. 1984년도 히트곡인 'People Are people'처럼 빌보드 싱글 차트 상위권에 진입한 곡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독특한 취향을 가진 청취자를 겨냥한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알려져 미국에서도 굉장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고, 로즈볼에서 콘서트까지 하게 된다. 성황리에 끝난 이 공연은 <Music For The Masses> 앨범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투어이자, 101번째 투어였다. 그래서 라이브 앨범 명칭은 <101>로 명명되었다. 이 공연 실황은 밥 딜런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D. A. 페네베이커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으며, 이듬해인 1989년에는 시사회까지 했다. 이는 주류에서 다소 벗어난 음악을 하는 밴드가 로즈볼이란 큰 무대에 설 정도로 수많은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감독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들의 공연을 보러 가는 팬들에게 초점을 맞춰 다큐멘터리를 진행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2014년에 롤링 스톤이 선정한 위대한 록 다큐멘터리 40에 꼽히기도 했다. 링크

이 공연 후 음악지 <Spin>의 인터뷰에 응한 Dave는 공연이 끝난 후 어떻냐?(What about after a gig?)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공연이 끝난 후 폐쇄공포증을 느끼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만약 감정이 끓는점까지 치솟아 누군가를 해칠 것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온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내용이다. 후술하겠지만, 이후에 그는 약물중독에 빠지며, 7년 후에는 자살 기도까지 한다. 링크 아카이브
When it comes to a close situation in a small room, I often feel very claustrophobic. I don’t like that kind of intensity. Sometimes you get to the boiling point where you actually think you can kill someone, just to release some energy or to find out what it feels like. I don’t know if I could actually do it if it came to it, but I’m not scared of being killed myself.

1.6. 리즈 시절과 앨런 와일더의 탈퇴(1990~1995)

1990년에 나온 Violator는 팬들과 평론가들 양쪽 모두에게 극찬을 받는 명반으로, 독일의 크라우트 록과 블루스, 일렉트로니카를 모두 섞어 전기와 후기를 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앨범이었다. 빌보드 싱글 차트와 앨범 차트 상위권을 모두 석권하여 이들이 미국 시장까지 정복한 월드스타로 자리매김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들은 1991년이 되어서야 정확해진 판매 집계 시스템의 수혜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링크 그 이전에 빌보드가 차트를 기록하던 방식은 라디오 방송국과 레코드점에 전화를 걸어서 문의하는 무자료 집계 방식이었으나, 닐슨 사운드스캔(Nielsen SoundScan)의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포스기에 기록된 실제 판매량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고, 이 때부터 비로소 정확한 판매량 집계가 가능해지면서, 힙합 얼터너티브 록 등 그동안 소외되었던 장르가 사실은 엄청난 구매층을 보유한 장르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16] 1987년에 발매된 <Music For The Masses> 앨범의 경우 빌보드 앨범 차트는 35위였으나, 이듬해에 로즈볼을 가득 메운 콘서트가 가능했던 것도, 기존 집계 방식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숨은 팬층이 있었기에 가능했단 얘기다.

이 음반을 발매한 후에 메인 보컬 Dave Gahan은 미국의 여러 밴드들에게 흥미를 느꼈는데 그 중에서 제일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제인스 어딕션이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그런지, 얼터너티브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는데, 이들을 보고 자신이 10대 시절 펑크 밴드 댐드를 봤을 때 느꼈던 전율을 다시 느꼈다고 한다. Dave가 이 밴드의 보컬리스트 페리 페럴을 동경해서 그런지 락커 스타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부인의 취향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부인이 머리 긴 남자를 좋아했다고. 이 여성은 원래 디페시 모드의 미국 홍보 담당자였는데, 제인스 어딕션 관련 업무도 담당하고 있어서 그에게 미국 얼터너티브 록을 소개했다. 문제는 헤로인까지 소개했다는 것.

이들의 최전성기였던 90년대 초반은 멤버들의 마약 문제가 심각한 시기이기도 했다.

디페시 모드 관련 인터뷰를 집대성한 전기물 <Stripped: Depeche Mode>에 따르면 마틴 고어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Martin Gore: There were diffrent levels of debauchery for all the diffrent members of the band. I think I was worse on the Violation tour - there was a lot of ecstacy still lying around. we use to go out all the time and take quite a lot.
밴드의 다른 모든 멤버들의 방탕의 정도는 달랐습니다. (90-91년) Violation 투어에서는 제가 더 심각했던 것 같아요. 거기엔 다량의 엑스터시가 늘 놓여있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밖에 나가서 꽤 많이 복용하곤 했습니다.

이미 80년대 후반에 마틴 고어는 당시 클럽에서 유행하던 엑스터시를 복용해 봤고, Dave도 같이 했었다. 다만 마틴은 부작용으로 우울증을 경험하고 엑스터시를 바로 끊었지만, Dave는 점점 강한 마약을 찾다가 헤로인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17][18]

또한 같은 책에서 앤디 플레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인터뷰 당시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40세 미만은 본인 세대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Andy fletcher: "Ecstacy has never been my choice of drug-most people under the age of 40 have tried. but, you never know, I could be Prime Minister one day; I just tasted it and spat it out again."
(당시) 40세 미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도했던 마약인 엑스터시는 결코 저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가 알겠어요. (복용을 한다면) 제가 언젠간 총리가(된 듯한 기분이) 될 수도 있겠죠. 저는 그냥 맛만 보고 또 뱉었어요.

이 때문에 당시 멤버 전원이 엑스터시를 복용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앨런 와일더의 복용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타인의 마약 복용에 굳이 개입하지는 않았던 입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2000년대 초반, 팬이 먀약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 Take ’em or leave ’em.(하든지 말든지)라고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답변했었다. 링크 다만, 표현은 그렇게 했어도 실제 앨런은 Dave의 마약 복용을 말리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스튜디오에 오랜 시간 틀어박혀 있는 워커 홀릭이라 유흥과도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또한, 당시 어지간한 젊은이들 대부분이 엑스터시를 해 봤다는 앤디 플레처의 말은 변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19]

다만, 1992년,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앨범을 녹음했을 당시부터는 멤버들도 심각성을 인식했고, 앨범 발매 후, 투어에 들어갔을 때는 멤버들이 데이브를 위해 심리 치료사를 붙여 주기도 했다. 문제는 데이브가 심리 치료사를 찾지 않았다는 것.[20] 당시 데이브는 마틴에게 너도 폭음을 하는 주제에라고 말하며 화를 냈다고 한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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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앨범 발매 후에 진행된 'Devotional' 투어 프로모 사진으로, 안톤 코빈이 촬영했다.
1993년, 새 앨범 Songs of Faith and Devotion을 발표했는데 사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앨범은 종교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를 담았다. 참고로 촬영지는 캘리포니아의 가톨릭 선교 단체 건물인 Old Mission San Luis Rey이고, 벽에 걸린 그림은 과달루페의 성모이다.[21] 안톤 코빈은 이 시기에 이들의 사진, 앨범 디자인,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콘서트 무대 디자인까지 도맡으며 이들의 시각적 이미지 전반을 아울렀다.

얼터너티브, 가스펠, 트립 합, 인더스트리얼 록 음악까지 수용한 Songs of Faith and Devotion은 미국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게 되고, 그들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으나 Dave의 약물 중독과 이혼, 자살 기도, 마틴 고어의 알코올 의존증, 앤디 플레처의 신경쇠약으로 인해 밴드의 내부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앨런 와일더는 탈퇴하게 된다. 당시 멘탈이 멀쩡했던 멤버는 앨런 와일더밖에 없었다. 멤버들의 멘탈이 나갔을 때 나온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앨범은 그래서 여러모로 앨런의 공헌이 컸다.

당시 투어는 157일간 이어진 밴드 사상 가장 긴 투어였는데, 투어의 규모가 큰 만큼 통제가 어려웠다고 한다. 한 번은 이들의 소속 레이블인 뮤트 레코드의 사장 대니얼 밀러가 투어에 나가 봤는데 공식 마약상을 소개받고 경악했었다고. 링크

참고로 대니얼 밀러는 뮤지션이 마약을 하는 것이 창의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인물이었다. 디페시 모드 멤버들이 데뷔 당시 대부분 10대였기 때문에, 마치 보호자가 된 심정으로, 이들이 마약에 손대지 않도록 보호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고, 멤버들의 부모님도 일일이 다 만나 봤다고 한다. 링크

게다가 원래 멤버들이 소속사 사장 대니얼 밀러를 뮤지션으로서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밀러 앞에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처음엔 회사가 워낙 작아서 사장이 운전 기사 역할까지 했고, 스튜디오에선 공동 프로듀서로서 함께했으니 애초에 일탈을 할 틈이 없었다. 사장님이 보고 계셔 덕분에 80년대의 대부분은 비교적 관리가 잘 되었으나[22] 80년대 후반부터 투어가 많아지면서 연차가 쌓여서인지 슬슬 일탈을 하기 시작했다. 링크

당시 투어는 1993-1994년까지 이어졌는데, 데이브는 마약을 구할 수 없을 때는 퍼코셋, 바이코딘을 처방받았다고 한다. 링크 여담으로 둘 다 헤로인과 마찬가지로 오피오이드 계열 진통제이며, 오남용 문제가 심각한 약물이다. 링크

당시 투어는 여러 괴담도 불러왔는데, 약에 취해 살았던 데이브가 자기가 뱀파이어 줄 알고 기자의 목을 물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기자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악의 없는 장난에 가까웠다 한다. 링크 기자의 워딩에 따르면 “really more of love bite”, 즉 키스 마크를 남기는 키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기자는 남성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둘이 만났을 때 데이브는 기자에게 그날 밤 나에게 괜찮은지 묻는 유일한 사람이었다.(“You know, you were the only person that night who thought to ask me if I was OK.”)라고 말했다 한다. 링크 다만, 공연하기 전에 관 모양 침대에서 잠을 청했던 건 사실이라고(...). 링크

이런 해프닝으로 인하여 이 시기 디페시 모드를 묘사한 기사들을 보면 엽기 코미디 영화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에 비유한 문장들이 종종 등장한다.

한편, 이런 일화가 국내에선 '해외 사람들은 데이브를 진짜 뱀파이어로 생각했다'는 식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트렌트 레즈너는 관 속에서 생활한다는 괴담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세기말적 사회 현상으로 인한 해프닝인 듯 하다.

그리고 2001년 Q 매거진의 Dorian Lynskey 기자가 디페시 모드를 인터뷰했을 때, 데이브는 기자에게 "물지 않을 테니 이리 와요. 이미 얘길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Come here, I won't bite you. Despite what you may have heard.")"이라고 농담을 건넸다. 링크[23]

1.7. 3인조로 새출발

투어가 끝난 후 마약 중독이 악화된 데이브는 여러 번 재활원을 찾았지만, 재발이 반복됐고, 1996년 <Ultra> 앨범 녹음 도중에는 목 상태까지 악화되어 도중에 녹음을 중단한다. 그리고 그해 5월 28일에는 데이브가 마약 과다복용으로 2분간 심정지 상태에 이르렀다가 응급조치로 간신히 소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자 그대로 죽었다가 깨어난 것이다.

당시 마틴은 상황이 절망적임을 절감하고, 데이브가 소생하지 못한다면 원래 썼던 곡들을 본인의 보컬로 녹음해 완성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하지만 멤버들은 포기하지 않고 데이브가 재활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

1997년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몇몇 사람들은 앤디 플레처에게 왜 보컬을 교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앤디 플레처는 데이브는 절대로 나에게 마틴 대신 다른 작곡가를 쓰라고 하지 않았다며 데이브의 목소리와 마틴이 쓴 곡이 디페시 모드라고 했다.

훗날, 이 앨범의 프로듀서인 Tim Simenon[24]은 당시를 회고한 인터뷰에서 정규 앨범이 나올지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뮤트 레코드의 사장 대니얼 밀러가 일단 3곡을 작업하자 했다고 한다.

녹음 도중에 Dave가 병원에 실려가고, 임상적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약 2주 후에 Dave는 신원 보증인을 대동한 상태에서 'Barrel of a Gun'을 녹음했다고 한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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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Ultra> 앨범 프로모 사진.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심기일전하여 제작한 1997년 재기작 <Ultra>로 그들은 또 한번 건재함을 알렸다. 이후 3인조로 2022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차트 성적은 좋았지만, 이 앨범은 유일하게 투어가 없었던 앨범이다. 이는 멤버들이 투어로 인한 스트레스를 또 받고 싶어하지 않았고, 특히 보컬 Dave Gahan의 건강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아서였다. 링크

그럼에도 매체 인터뷰 요청은 쇄도했다. 이는 1996년 Dave의 약물 사고로 인해 이들이 비로소 사회면에 등장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25]

게다가 심정지 상태에서 소생한 것 자체가 대중들의 흥미를 끌 만한 가십 거리가 되었고, 저 당시 전 세계적으로 헤로인 중독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다른 유명인들의 헤로인 중독 문제와 맞물려 거론되었던 것이다(...).[26][27]

당연히 그중에는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는 기레기도 섞여 있었으나, Dave는 고해성사를 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중독 체험을 적나라하게 털어놨는데, 이는 화장실에서 헤로인을 흡연하는 청소년들을 실제로 봤기 때문이었다. 링크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수치플을 무릅쓰고 스스로 치부를 털어놨다는 것이다. 1997년 Q 매거진 3월호 인터뷰가 그중 하나인데, 1994년 연말에 아들이 자신을 보러 왔을 때 마약 복용 사실을 들켰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28]

여담으로, 당시 데이브를 포함한 여러 뮤지션들의 약물 중독 문제로 인해 음악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음반 업계에서 아티스트의 창의성 증진을 위해 마약과 술을 제공하기까지 했었으나, 90년대 초중반에 잇따라 터진 마약 사망 사건을 계기로 음악인들의 정신 건강 문제 해결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인 MusiCares Foundation이 출범했다. 링크[29]

훗날, <Ultra> 앨범의 프로듀서 팀 시메넌과 친분이 있었던 기자가 Dave를 호텔 방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16년 후 SXSW에서 재회한다. 링크 기자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Dave는 엉망인 상황이었지만, 기자에겐 키스 문 같은 로큰롤 아이콘을 만나는 것 같은 영광이었다고 하는데, Dave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뻘쭘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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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베스트 앨범 <The Singles 86-98> 프로모 사진.
이듬해인 1998년에 베스트 앨범인 <The Singles 86-98>를 발매하면서 투어를 재개한다. 이 앨범엔 신곡으로 Only When I Lose Myself가 실렸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보컬 Dave Gahan은 투어 기간 내내 전문 상담 기관의 상담 프로그램을 성실히 따랐다고 한다. 관련 기관 상담사와 지속적인 미팅을 가졌던 것인데 이 기사를 통해 미국의 재활 프로그램이 어떤 식인지를 엿볼 수 있다.[30]
여담으로 훗날 2017년 인터뷰에서 Dave Gahan이 투어 뒷얘기를 털어놓았는데 그에게는 술을 전혀 안 마신 상태에서 참여한 생애 첫 투어였다고 한다. 와인 1잔 정도는 괜찮았기 때문에 당시 멤버별로 와인이 배분되었으나, Dave는 자신이 일단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폭음하는 스타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참고 있었다가 탈의실에서 멤버들이 다 보고 있을 때 알코올 탈덕 인증 차원에서 와인 6~7병을 벽에 던졌다고 한다 링크 아카이브
원문은 “I remember launching[31] six or seven bottles of wine at the wall because I couldn’t drink it”

참고로 마틴은 1993-1994년 투어 당시에는 하루에 와인을 두 병이나 마셨고, 결국 과음으로 인해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후 술을 하루에 와인 두 잔으로 줄였지만, 아예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Dave에겐 주변에 애주가가 있다는 게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훗날 2003년 독일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1996년의 마약 과다 복용 사건 이후, 금주를 하며 절제된 삶을 잘 유지하고 있는 데이브의 자제력에 경의를 표한다며 동료를 칭찬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은 다행히도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었다고.

다만, 2005년 무렵 마틴이 이혼으로 인해 과음 습관이 재발하자 이후 그도 술을 끊어, 과거 모든 멤버가 술을 즐기는 주당 밴드였음에도 밴드 내에 금주자가 2명으로 늘어났다.

1.8. 2000년대 이후

2001년 밀레니엄 첫 앨범인 Exciter가 발표되었다. 이 앨범은 비외르크 앨범의 프로듀서였던 마크 벨이 프로듀서로 참여하여 과거 앨범과는 달리 힘을 빼고 차분한 음악들로 변화를 시도해 역대 디페시 모드 앨범 중 가장 편안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가사도 이전 앨범에 비해 삶을 관조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특히 앨범의 마지막 곡 Goodnight Lovers는 자장가를 부르는 듯이 나긋한 Dave의 보컬이 가장 큰 변화인데, 실제로 어린 딸에게 노래를 불러 준다고 생각하면서 녹음했다 한다.

다만, 달라진 음악적 색채로 인해 당시 이 앨범에 대한 평가는 역대 다른 앨범에 비해 박했다.

21세기에 나온 앨범들에 대해서는 편곡으로 디페시 모드 특유의 색채를 만들었던 앨런 와일더의 부재로 인해 과거 역작 Violator 등에 비하면 실망스럽다는 의견이 있으나 꾸준히 준수한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2020년대에 와서는 그동안 혹평받았던 Exciter 앨범조차도 재평가받는 분위기이다.

2003년에는 마틴 고어와 Dave Gahan이 모두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마틴은 1989년에 이어 두 번째로 리메이크 앨범을 냈고, Dave Gahan은 자작곡으로 채운 앨범으로 싱어송라이터에 도전했다.

2005년 <Playing The Angel> 앨범부터는 보컬인 Dave가 작사 작곡에 참여하면서 매 앨범에 자신의 곡을 3곡 정도 넣으며 서브 작곡 멤버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앨범을 기점으로 프로듀서가 벤 힐리어로 바뀌는데, 이후 Sounds of the Universe(2009), Delta Machine(2013)도 그가 프로듀서를 맡는다. 그래서 이 앨범들을 벤 힐리어 3부작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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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나온 Sounds of the Universe 앨범은 제52회 그래미 어워드 Best Alternative Music Album 후보에 들기도 했다.

2013년 앨범 <Delta Machine>은 블루스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데 집중한 앨범이었다.

2016년 인터뷰에 멤버들이 설명하는 역대 앨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2017년 3월 17일에 14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Spirit이 발매되었다. 메타크리틱이나 롤링 스톤을 비롯한 평단에서는 비교적 호평이지만, 늘 그렇듯이 팬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2017년 독일에 기반을 둔 음악 웹진 NBHAP가 디페시 모드 역대 모든 앨범들의 최악의 부분과 최고의 부분을 분석한 기사를 내놨다. 링크 앨범으로서 수록곡들과의 유기적인 조화를 중시하는 관점이므로, 워스트 파트로 지적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곡 자체의 완성도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2017년,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 공개 40주년을 맞아 이 곡을 커버한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그룹 탄생의 계기를 만든 곡이고, 마틴 고어와 Dave Gahan이 보위 팬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곡.
이 커버는 2021년 문화 웹진 farout Magazine이 선정한 역대급 데이비드 보위 커버곡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링크

2017년 투어에서 보컬 Dave Gahan이 최초로 랩을 시도했다. 전체 영상 여기에 추가된 랩은 1997년 <Ultra> 앨범의 타이틀곡 'Barrel of a gun'을 부를 때 마지막에 힙합 그룹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32]의 곡 <The Message>에 나오는 랩을 인용한 것이다.

인용된 가사는 Don't push me ’cause I'm close to the edge/I'm trying not to lose my head(It's like a jungle sometimes/It makes me wonder how I keep from going under)으로 빈민가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묘사한 내용이라고 한다. 링크[33]

사실, 원래는 마틴 고어가 'Barrel of a gun'을 쓸 때 랩의 느낌을 가미하려고 의도했는데, 이 곡의 가사 내용은 성경의 카인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 절망에 빠진 죄인의 심정을 묘사한 것이었다. 내용적인 면에서나 스타일 면에서나 맥락이 있는 인용이자,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에 대한 오마쥬라고 해석할 수 있다.

2019년 11월에 안톤 코빈이 감독한 다큐 영화 <Spirits In The Forest>가 극장에 공개되었다. 디페시 모드의 투어를 보러 가는 여러 지역의 남녀 6명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내용이라 한다. 현재 온라인으로 다운받아 볼 수 있다. 링크

1.9.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2017년에 처음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 후보로 선정되었다. 링크
201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수상후보로 본 조비, 라디오헤드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 아쉽게도 수상은 본 조비에게 돌아갔다.

202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수상후보로 또 들어갔다. 결국 2020년에 공연자 부문에 헌액되었다. 링크

특기할 만한 점은 전 멤버 빈스 클라크와 앨런 와일더도 같이 들어갔다는 점이다. 애초에 홈페이지에서 투표를 실시할 때도 현재 사진이 아닌, 전 멤버 앨런 와일더가 있던 시절인 1987년도 사진을 내걸었다.

이로써 디페시 모드는 존경하는 데이비드 보위 선배의 뒤를 따라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참고로 보위가 헌액된 해는 1996년인데 이 해는 Dave Gahan이 마약으로 죽을 뻔해서 디페시 모드가 해체될 뻔한 해였다.

여담으로, 디페시 모드의 팬인 나인 인치 네일스도 같은 해에 헌액되었다. 트렌트 레즈너가 라디오 채널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팬들과 디페시 모드에게 축하드린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참고로 트렌트 레즈너는 1986년에 디페시 모드의 <Black Celebtaion> 투어를 클리블랜드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경험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링크
“It was the summer of ’86. I’d dropped out of college and was living in Cleveland trying to find my way in the local music scene. I knew where I wanted to go with my life but I didn’t know how to get there. A group of friends and I drove down to Blossom Music Center amphitheatre to see the ‘ Black Celebration’ tour. DM was one of our favourite bands and the ‘Black Celebration’ record took my love for them to a new level.
“I’ve thought about that night a lot over the years. It was a perfect summer night and I was in exactly the right place I was supposed to be. The music, the energy, the audience, the connection… it was spiritual and truly magic. I left that show grateful, humbled, energized, focused, and in awe of how powerful and transformative music can be… and I started writing what would eventually become ‘Pretty Hate Machine’.”

이 공연에서 음악의 마법 같은 힘을 체험한 레즈너는 데뷔 앨범인 <Pretty Hate Machine>에 들어갈 곡을 쓰기 시작했으니, 레즈너에게 디페시 모드는 자신을 뮤지션의 길로 이끈 운명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34]

당시 코로나 19로 인해 시상식 행사는 특집 방송으로 대신했으며, 연사는 샤를리즈 테론이 맡았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멤버들이 각자 온라인으로 수락 연설을 했다.

전 멤버로서 같이 헌액된 빈스 클라크와 앨런 와일더에 대해서는 DM(디페시 모드) 패밀리의 일원이자 역사의 일부라며 감사를 전했다.

데이브는 같이 밴드를 할 기회를 준 멤버들에게 감사한다면서, 음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솔직히 말해서 뭘 했을지 몰랐을 거라고 하니, 앤디 플레처는 넌 여전히 자동차를 훔쳤겠지라고 짓궂게 디스하고, 뻘쭘해진 데이브는 음악이 내 인생을 구했다고 대답한다. 대신 음악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훔치는 큰 도둑이 되었다. 이어서 마틴이 우리도 여기 없었을 거다라면서 서로서로 멤버들에게 감사하는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투어 세션인 Peter Gordeno, Christian Eigner, 뮤트 레코드의 대니얼 밀러, 매니저인 조너선 케슬러, 자신들을 멋있게 보이게 해 준 안톤 코빈, 멤버들의 가족, 팬 등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마무리했다. 링크

2. 멤버

2.1. 마틴 고어

파일:MGPR.jpg
본명 Martin Lee Gore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출생 1961년 7월 23일 ([age(1961-07-23)]세) / 잉글랜드 에섹스 대거넘

2.1.1. 음악

디페시 모드에서 대부분의 곡을 작사작곡하고, 신시사이저를 비롯한 각종 악기(기타, 베이스 기타, 피아노, 멜로디카)와 보컬, 코러스까지 담당하는 만능 뮤지션. 1999년에 이보 노벨로 상을 받았을 정도로 작곡 실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시상식 장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작곡은 매우 기이한 경험이라고 한다. 영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솔직히 모르겠다고 했다. 링크

매 앨범에 마틴 고어가 부르는 솔로곡이 한두 곡은 꼭 있으며, Dave Gahan이 부르는 곡에도 코러스를 꼭 넣는다. 음반에 보너스 트랙으로 실리는 데모 버전 보컬도 마틴이 도맡았다. Dave Gahan이 진한 바리톤 음색이라면 마틴 고어의 보컬은 청량한 바이브레이션이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양몰이 창법

빈스 클라크 탈퇴 후에는 사실상 모든 곡을 작사 작곡하면서 음악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2005년부터 보컬 Dave Gahan도 작사 작곡에 참여하고 있다. 빈스 클라크, 앨런 와일더와 음악적 견해차로 다투어 이들이 탈퇴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독재자라는 평도 있었고, Dave Gahan도 한때 그 점에 불만을 내비친 적이 있었으나, 2005년 이후에는 음악적 접근 방식이 바뀌면서 Dave Gahan과도 협업해 곡을 만들 때도 있다.

원래 마틴에게 작곡은 개인적인 작업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작업은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굳이 음악적 견해차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 2004년에 그웬 스테파니에게 같이 곡을 쓰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그러한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그녀의 곡을 위해 기타를 연주해 주었는데, 그 곡이 'Wonderful Life'이다. 원래는 그녀의 솔로 1집에 실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곡이 넘쳐서 2006년에 발매된 2집에 실리게 되었다고 한다. 링크

사실, 이 곡에는 사연이 있었는데, 그웬 스테파니의 첫사랑이 디페시 모드의 팬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요절했고, 첫사랑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옛 남친이 좋아했던 밴드의 송라이터에게 곡 작업을 요청했던 것이었다. 링크 마틴이 그 곡을 위해 기타를 연주해 준 것은 팬심에 대한 보답이었던 것.

2003년, 솔로로서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했을 당시 인터뷰를 보면, 고독을 즐기는 듯한 노랫말과는 달리 솔로 활동은 외롭다며 밴드 활동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기도 했다. 앨런 와일더가 있었을 당시엔 넷이서 서부 영화의 무법자들처럼 같이 술을 마시면서 즐거웠는데, 이젠 멤버들 중에 술 친구가 앤디 플레처밖에 없다는 내용.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Dave Gahan도 솔로 앨범 활동을 시작해서 밴드 해체 궁예 기사가 나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2005년 앨범부터는 Dave도 작곡에 참여하고, 공동 작곡까지 하는 등 오히려 파트너십이 굳건해졌다. 2013년 같은 매체에 실린 Dave Gahan의 인터뷰에 따르면, 마틴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작곡가로서의 마틴에 대해 진정으로 경탄과 존경심을 느낀다고 한다. 링크

음악적으로 데이비드 보위 크라프트베르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학창 시절 외국어 과목으로 독일어를 선택한 것을 계기로 독일에 관심을 가졌는데, 1985년 당시에는 현지 여성과 베를린에서 동거한 적도 있었다. 베를린을 좋아하는 이유는 밤새 신나게 놀 수 있어서라고 링크 실제로 독일에서 2년을 생활한 덕분에 독일어가 유창하며, 독일어 노래를 리메이크한 적도 있다. 링크

디페시 모드의 2009년 앨범인 <Sounds Of The Universe>의 수록곡 'Peace'를 리믹스한 독일의 DJ Justus Köhncke가 들려준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마틴은 먼저 기타로 작곡을 하고 이를 전자 악기로 변환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링크

2013년 프랭크 오션과 함께 녹음을 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channel ORANGE 앨범의 후속작으로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묻힌 듯하다. 링크 참고로 프랭크 오션은 디페시 모드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디페시 모드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눴고, 이를 계기로 마틴 고어와 녹음을 했던 것이다. 링크

SF 장르 애호가이기도 하다. 2015년에 나온 솔로 앨범 <MG>는 SF 장르에서 영감을 얻은 연주곡 음반이다. 링크 당시 12살이었던 아들과 블레이드 러너를 감상했다고 한다.
솔로 디스코그래피

2.1.2. 여담

알고 보면 2010년대 케이팝 남자 아이돌들의 아이템인 하네스를 80년대부터 착용한 패션 리더였다. 심지어 셔츠 위에 착용하는 것도 아니고 상탈한 상태에서 착용했다
파일:DepecheMode-2622-1038x623.jpg
당시 패션을 보면 이건 약과이고, 스커트를 착용하거나 아예 여장을 한 사진도 다수 있다. 당시 인터뷰를 보면 여친과 옷, 화장품을 공유했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도 아들의 여장을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집을 방문했을 때 스타킹 같은 걸 신고 있었는데, 벗은 스타킹을 어떻게 해야 햐냐고 질문했더니 그냥 검은 빨래와 함께 세탁기에 넣으라고 대답하셨다 한다. 링크
여담으로 스타킹은 본래 남성용 군복에서 유래했다.
벨트에 장식용 수갑을 달기도 했는데, 요즈음 세대가 보기에도 파격적이어서 팬아트로 등장한다. 그리고 Dave Gahan과 커플링으로 엮인다. 링크

80년대 중반 마틴의 패션은 밴드의 막내인 데이브에게 종종 놀림감이 되었다. 데이브의 말에 따르면 자기네들이 게이처럼 보이긴 했지만, 마틴이 카우보이 모자에 맥시 스커트를 착용한 건 게이를 넘어선 것이었다고... 링크 치마는 더 이상 안 입지만, 매니큐어는 즐겨 바른다고 놀린 적도 있었다. 링크 하지만 데이브 본인도 1997년에 매니큐어를 바른 적이 있었다. 지금도 아이 라인을 그리고 무대에 오른다(...).

2005년 투어 때는 날개를 달고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2009년 투어부터는 더 이상 날개를 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동영상이 마틴의 날개옷이 등장한 공연 장면이다. 앞서 언급한 스커트도 착용했는데, 80년대와는 달리 바지 위에 착용했다. 우리나라의 철릭과 비슷한 느낌. Dave는 제이린드버그의 수트를 입었다. 2분 경에 마틴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을 때 Dave가 등 뒤로 다가와 합체하는 부분이 하이라이트.

2009년 인터뷰에 따르면 티셔츠 청바지 차림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링크 다만, 80년대 당시의 파격적인 패션은 지금 자기가 봐도 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할 수 없다(I look back at some of those pictures in the ’80s and I just can’t imagine what was going through my head.)고 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자녀들이 당시 사진들을 봤다고 한다. 여담으로 둘째딸 패션도 아버지의 패션 DNA를 물려받은 듯하다.
⭐ 금발에 벽안인 전형적인 백인의 외모라 믿기진 않지만, 사실 마틴 고어는 친부가 미군 육군 병사인 흑인 혼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부모는 이혼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틴 고어가 태어났을 당시만 하더라도 흑백 결혼은 범죄시될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틴 고어가 어렸을 때 친모는 백인과 재혼하여 그는 새아버지가 친아버지인 줄 알고 자라왔다고 한다.

마틴이 쓴 80년대 초반 히트곡 <People Are People>은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 곡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마틴 고어는 자신의 친부가 흑인인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90년대 초반으로 미국에서 친부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는 훈훈한 사연이 전해져 온다. 다만, 마틴은 인터뷰 때마다 친부와 관련된 일을 자세히 말하는 것을 거절하는데, 가족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 한다. 이미 소속사 차원에서 사생활 관련 질문은 안 받는다고 사전에 기자들에게 통보하여 철저히 선을 그어 왔다고 하는데, 악명 높은 찌라시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반응. 링크
⭐ 평소 성격은 내성적이고 과묵하다고 한다. Enjoy the Silence 가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래서 좀처럼 드러내놓고 남을 칭찬하는 일이 없지만, 일단 표현을 하면 깊숙이 진심을 담는 타입인 듯하다.

멤버 Dave Gahan은 2017년 인터뷰에서 마틴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를 소개했다. 언젠가 자신에게 이메일로 이러한 메시지를 보냈다 한다. 평소에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얘기라 그 메시지를 받는 순간 정말 기뻤다고.
2001년 <Exciter> 앨범 활동 당시 보도 자료에 따르면 Dave는 마틴과의 관계를 오래된 스카프 신발의 착용감에 비유했다. 한국말로 옮기면 어감이 뭔가 이상하지만 넘어가자. 서로 성격이 너무나 다르고, 서로를 그렇게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 디페시 모드 활동 전에는 테스코에서 계란 파손 관리를 했다고 한다. 링크 20분마다 깨진 계란을 치우고 새 박스를 놓았는데, 20분 후에 가 보면 새 박스에 든 계란도 깨져 있었다고 한다.

만 16세[35] 때인 1977년에 은행 캐셔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주말에 밴드 활동을 해 오면서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은행 업무로 번 돈으로 야마하 CS5 신시사이저를 구입했다고. 빈스 클라크의 말에 따르면 이 장비 때문에 같이 밴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링크
⭐ 운전을 배운 적이 없어서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는 아내가 운전을 하는 듯하다.
비디오 게임을 좋아했다. 80년대 초반 인터뷰를 보면 좋아하는 게임 목록이 나온다. 링크
2005년 앨범 타이틀곡 'Precious'는 이혼을 한 마틴 고어가 자녀들을 위해 쓴 곡이다. 그래서 월간조선의 음악 기사 담당 기자가 아빠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담았다며 이 곡을 소개하기도 했다. 링크
2014년에 댄서[36] 겸 배우 출신인 20세 연하 여성과 결혼하여 도둑놈 대열에 등극했다. 이후 딸 둘을 낳았다. 2017년 앨범 수록곡인 'Eternal'은 핵전쟁이 났을 때 아이를 지키겠다는 아빠의 마음을 담은 곡이다. 여담으로, 전처 사이에서 이미 2녀 1남을 낳아 현재 아이가 다섯인 다둥이 아빠이다.
헤르만 헤세, 카프카 등 여러 문호들의 작품을 좋아하고 영향을 받았다. 1988년에는 사진 작가 안톤 코빈과 사진 촬영을 위해 디페시 모드 멤버들과 함께 체코를 찾았는데 이때 카프카의 묘지를 참배했다. 링크 그런데 훗날 Dave Gahan은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카프카 변신을 언급하기도 했다.
⭐ 건강식품을 좋아한다. 1988년 스핀 인터뷰에서 합성 식품을 먹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인삼은 먹지만 비타민은 먹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링크 2017년 슈피겔 인터뷰에선 가장 좋아하는 약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reddish rice라고 했는데 링크 자막과 텍스트 버전 기사를 보면 설명이 길다. 번역기를 돌려보면 홍국쌀로 추정된다(...).
2013년 7월 23일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공연에서 Dave에게 생일빵으로 기습 키스를 당했다. 링크 물론 볼에 한 키스이다. 활짝 웃는 마틴과 호다닥 도망가는 Dave의 모습이 깨알 같은 포인트.

2.2. Dave Gahan

파일:Godfather of glam.png
본명 David Gahan(개명 전 David Callcott)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출생 1962년 5월 9일 ([age(1962-05-09)]세) / 잉글랜드 에섹스 에핑

2.2.1. 음악

디페시 모드에서 메인 보컬을 맡고 있다. 독보적인 바리톤 음색이 매력적이며, 영국의 음악잡지 Q 매거진이 선정한 위대한 가수 100명 중에 들었을 정도로 뛰어난 라이브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링크

1997년 로스앤젤레스의 라디오 채널인 K-ROQ FM에서 했던 발언에 따르면, 마틴은 신을 통해서 노래를 얻었고, 이를 데이브를 통해서 들려주고 싶어했다 한다.
He said that he got his songs from God, but that he had to channel them through me. And that was the message that he got. And it made me feel really great, and so I just keep hold of that, that's how it works.

이는 1993~1994년 투어 당시 마틴이 살짝 취했을 때 했던 발언이라 하는데, 당시 밴드 내에서의 역할에 대해 자괴감을 느꼈던 데이브는 이 말에 감동하여 밴드에 잔류하기로 했다고 한다. 링크

본래 작사 작곡은 마틴 고어가 전담해 왔는 데다가 보컬리스트의 역할까지 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마틴의 재능을 부러워하던 데이브는 노래만 할 줄 아는 자신은 마틴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괴롭혀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3년에 솔로 앨범 <Paper Monsters>에서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을 선보인 후, 2005년 <Playing the Angel> 앨범부터는 밴드의 작사 작곡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2009년 앨범에 보너스 트랙으로 실린 <Oh Well>은 마틴과 공동 작곡했다. 링크

디페시 모드로서 활동하지 않을 때는 본인의 솔로 앨범을 내거나 다른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한다. 2003년과 2007년에 솔로 앨범을 냈으며, 2012년과 2015년에는 Soulsavers라는 팀과 컬래버 음반을 냈다.

마틴 고어와 마찬가지로 블루스 가스펠의 영향을 받았으며, Soulsavers와 컬래버를 했을 때 이러한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링크 Soulsavers와 두 번째 컬래버 음반을 낸 2015년 당시, 마틴 고어를 LA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마틴은 너 우릴 두고 바람 피우고 있어(“You’re sort of cheating on us”)라고 농담을 시전했다 한다. 링크[37]

의외로 메탈을 좋아한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팬이라고 한다. 그들이 로스앤젤레스에 머물 당시에 서로 이웃이라서 꽤 많은 친분이 있었다고. 그리고 메탈리카 제임스 햇필드와도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2021년, 메탈리카의 블랙 앨범 30주년 기념 리메이크 앨범에 참여하여 생존 신고를 했다. 링크 11월 12일 평소 협업하던 Soulsaver와 함께 여러 뮤지션들의 곡을 커버한 리메이크 앨범 <Imposter>를 발매했으며, 12월 5일에는 런던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다. 링크

앨범의 제목은 가면증후군에서 따 왔다. 링크

2.2.2. 여담

성씨 발음으로 인해 영고라인에 든 유명인사다. Gahan의 원어 발음은 아일랜드어의 특성상 h가 묵음이 되어 간ː에 가까우나 영국 현지에서도 제각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주로 가한이라고 잘못 읽는 경우가 많다. 데뷔 이후 30년이 넘도록 이러한 일들이 워낙 많다 보니 본인도 포기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독일 미디어에서 올바른 발음을 알리는 동영상까지 만들었다. 참고로 이 동영상에 garn이라고 쓰인 실타래가 나온 것은 꼬아서 만든 실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garn과 발음이 같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본래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면 데이브 가안이 되어야겠지만, 우리나라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다면 이라고 써야 한다. 참고로 그의 성씨는 아일랜드계 새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1989년 팬클럽 소식지를 통해 밝혀진 내용인데, Gahan이란 성씨가 아시아계 성씨냐는 팬의 질문에 아일랜드계 새아버지의 성씨라고 답변했다. 링크 훗날 자신의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새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 Dave Gahan의 친부는 말레이시아[38] 영국인인데, Dave가 아기였을 때 이혼한 후 연락이 끊어졌다. 이후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남성과 재혼하여 그는 새아버지 친아버지인 줄 알고 자랐다. 빅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던 새아버지 덕분에 그는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자랐다. 링크

하지만, 새아버지는 그가 10살 무렵 돌아가셨고, 이후 갑자기 친부가 나타났다가 1년 후 사라져 그에게 정신적 혼란을 주었는데, 이후 비행청소년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자동차를 훔쳐 타고 폭주를 즐기다 14살 때 경찰에 잡혀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이 시절 그래피티를 하다 경찰에 잡힌 적도 있었는데, 자신의 성씨 태그 써서 꼬리를 밟힌 웃픈 일화가 있다. 그리 흔한 성씨도 아니어서 금방 들켰다고 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접하면서 정신을 차렸고 이것이 훗날 디페시 모드 멤버들과 만나는 인연이 된다. 링크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를 걱정하여 친부에 대한 것은 일절 묻지 않았으나, 훗날 가정을 꾸리고 아들이 태어난 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친아버지의 행방을 찾았다. 1989년에 팬클럽 소식지를 통해 자신의 혈통을 밝힌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또한 아들이 태어나기 직전인 1988년에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가 무슨 사연으로 가정을 떠났는지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아버지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보셨다면 연락을 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링크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90년대 초 사망 소식이었다고 한다. 1997년 인터뷰에 따르면 누군가를 통해서 뒤늦게 소식을 들었는데, 그의 친부도 그가 디페시 모드의 멤버인 걸 알고, 아들의 기사를 스크랩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호테이 토모야스 생부 이야기와 비슷하다. 여담으로 그의 친부도 몸에 문신이 많았다고 한다.

나중에 데이브가 밝힌 바에 따르면, 생부는 종적을 감춘 후에도 자식들이 사는 동네의 이웃 사람을 통해 꾸준히 자식들의 안부를 물었다. 70년대 당시에는 영국에도 전화기가 없는 집이 많았기 때문에, 전화기가 있는 집은 동네 사람들을 위한 통신 수단 역할을 했는데, 데이브의 생부는 자식들이 사는 동네에서 전화기를 가진 몇 안 되는 이웃에게 부탁해 자식들과 통화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데이브의 어머니는 이를 전해 듣고도 자녀들에게는 함구했던 것이다. 링크 결국 데이브의 생부는 먼 발치에서 아들의 활동을 응원하며 쓸쓸히 눈을 감았다.[39]

하지만, 데이브는 어머니가 연락을 차단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도, 어머니를 전혀 원망하지 않고, 저 당시에 자기처럼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면서 덤덤했는데, 아마도 어른의 사정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받아들인 듯하다.
👑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첫 번째 고비는 1993년,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대성공을 거둔 투어를 돌 때였는데, 공연 도중 마약으로 인한 심장 발작을 겪었다. 두 번째 1995년에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을 때였다. 세 번째 1996년 헤로인 코카인을 섞은 스피드볼 주사를 놓아 심정지가 2분간 왔었을 때였는데, 구급대원이 포기하지 않고 응급조치로 살려냈다. 이때 임사체험 비슷한 것을 했다고 한다.
당시 외신에 따르면 재활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마약을 했기 때문에 내성이 없어서 금방 쓰러진 것이었다고 한다. 이미 1994년부터 치료는 시도해 왔으나[40] 금방 재발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다 막다른 곳에 와서야 겨우 끊을 수 있었다. 여담으로 재활에 성공한 후에 딸이 태어났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때 구급대원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던 아이였다. 구급대원의 나비 효과[41]
네 번째 2009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공연을 할 때였는데, 갑자기 대기실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처음에는 위장염 진단이 나왔으나, 추가로 한 초음파 검진 결과 방광암 초기임이 밝혀져 바로 암 제거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치료가 성공적이라 지금까지 멀쩡하게 활동하고 있다. 본인 말에 따르면, 초기에 암을 발견한 덕분에 항암치료 기간이 짧아서 모발을 사수할 수 있었다고. 링크 이 때문에 별명이 Cat인데 고양이 목숨이 9개라는 속담에서 온 것.

또한 암 진단을 받은 것을 계기로 금연도 했는데, 이후에는 앤디 플레처가 옆에서 담배를 피우면 '나 이따가 노래해야 하니 담뱃불을 끄라'고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링크
👑 같은 멤버인 마틴 고어와 마찬가지로 성공한 데이비드 보위 덕후이다. 게다가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로 만나는 행운을 만나기도 했다. 자신의 딸이 보위의 딸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나이도 비슷해서 자주 얼굴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보위가 뉴욕에서 콘서트를 했을 때, 백스테이지에서 보위와 만난 적도 있었는데, 보위가 먼저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한다.

Dave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우상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기이했다고. 처음엔 부담스러워 정중히 거절하려 했으나, 같이 콘서트를 보러 온 아내가 가 보라고 해서 용기를 내어 만났다고 한다. 링크[42] 아카이브

2013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 따르면 인터뷰 도중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는데 데이비드 보위 곡 'Rebel Rebel'이었다고 한다. 링크

방황하던 청소년 시절 Dave Gahan에게 데이비드 보위는 은인인데,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자신은 결국 납지붕[43]이나 훔치는 좀도둑으로 전락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링크 펑크 음악과 데이비드 보위를 접한 것을 계기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보위의 <Heroes>를 부르는 그를 우연히 본 마틴 고어, 앤디 플레쳐, 빈스 클라크가 그를 밴드의 보컬로 영입해 디페시 모드가 결성되었으니, 여러모로 운명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보위의 별세 소식을 들었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끼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때 아내와 딸이 다가와 안아주며 위로했다고. 링크.

2009년 인터뷰에서는 보위가 마약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에 좀 더 귀를 귀울였어야 했다고 반성했다.
👑 첫아들 잭은 2015년 결혼했고, 딸 스텔라 로즈는 미술을 전공하면서 음악도 겸하고 있다. 링크 스텔라 로즈는 16살 때 아빠 앨범의 표지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2015년에 발표된 Soulsavers와의 컬래버 앨범 표지가 딸의 작품이다. 링크 앞서 허핑턴 포스트 기사에는 디페시 모드 앨범 이미지라고 나와 있지만, 기자의 착오인 듯하다.

이 앨범의 수록곡 Shine 뮤직비디오는 둘째 아들인 지미가 찍어줬는데 현 부인이 이전 배우자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Dave는 평소 인터뷰를 통해 자녀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며, 고마움을 표현해 왔는데, 지미도 어려서부터 아빠의 인터뷰에 자주 언급되어 왔다.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미디어에 관해 아빠에게 조언도 할 정도라고 한다.

스텔라 로즈는 2021년, 아버지의 리메이크곡 앨범인 <Imposter>가 나왔을 때도 표지 사진을 담당했다. 링크

2022년부터는 인디 록밴드인 Stella Rose and the Dead Language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밴드의 프론트 우먼으로서 보컬, 작사 작곡, 기타를 담당하는데, 아버지의 TS 버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외모와 목소리가 리즈 시절 아버지를 빼닮았다. 2022년 10월, 음악계에 정식 데뷔했다. 데뷔 곡인 Muddled Man은 막 내지르는 거친 펑크록 스타일이며, 후속곡 Angel은 복고적인 사운드의 감성적인 곡인데, Stella Rose의 섬세하면서 파워풀한 가창력이 드러난다.
👑 멤버 중 유일하게 20대 초반에 결혼했으나 이후 2번 이혼했으며, 지금의 부인과 1999년 2월 14일에 3번째 결혼을 하여 2024년에 결혼 25년 차, 즉 은혼식을 맞았다. 실제로 부인이 자신의 인스타에 Silver Wedding이란 문구를 올렸다.

첫 번째 부인은 10대 시절 만났는데, 음악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가까워졌다. 디페시 모드 활동 초기에는 팬클럽 관련 업무도 맡는 등 정성껏 내조를 했으며, 팬들 사이에서도 이미지가 좋다. 2번째 부인은 원래는 불륜 상대였는데, 그에게 헤로인을 소개하여 둘이 같이 마약을 했지만, 그가 더 깊숙이 빠지자, 질려서 떠났다고 한다. 참고로 Dave는 처음에는 헤로인을 흡연하는 방식으로 즐겼고, 약쟁이들 사이에서도 정맥주사는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어서 절대로 주사기는 쓰지 않겠다고 2번째 부인에게 맹세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링크[44]
👑 그의 갱생에 큰 도움을 준 현 부인 Jennifer Sklias는 배우 겸 독립영화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미국 드라마 FBI: Most Wanted 시즌 3의 20화에서 Giselle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링크[45][46]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인 1995년 경엔[47] 그가 유명인인지도 몰랐으며[48], 알고 나서도 평소와 다름 없이 대했다고 한다. 반면 Dave는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반했다고... 하지만 처음에는 친구 사이로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2005년 앨범에 수록된 Dave의 자작곡인 Suffer Well 뮤직비디오에 현재의 부인이 천사 역할로 등장했는데, 가사가 자전적인 내용이자 흑역사 셀프 디스임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 솔로 부대가 받을 정신적 충격을 고려해, 막짤인 부부 키스신은 썸네일로 가려 주었다. 뮤비에 달린 댓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팬들도 적절한 캐스팅이라고 인정. 여담으로 이곡은 제49회 그래미 어워즈의 Best Dance Recording 부문 후보에 들었다. 링크 그 외에도 본인이 쓴 여러 곡에서 현재의 부인이 뮤즈로 등장한다.

Jennifer Sklias는 2019년에 단편 영화 <Matilda>를 공개했는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를 했다. 여담으로 원래는 중독 문제를 다룬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일이 잘 안 풀려서 잠시 중단하고, 단편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영화가 나온 것이라 한다. 감독은 그녀의 아들이며, OST는 남편인 Dave가 담당했다. 링크
👑 이 문서의 메인 프로필 사진에 보이는, Dave가 착용한 큰 해골 반지는 부인이 선물해 준 것이다. 2013년 인터뷰에 따르면, 반지를 선물한 부인이 이걸 보면 항상 삶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그때부터 이 반지를 즐겨 착용해 왔으며 뮤비에도 등장한다. 몇 년 후 Dave는 아내의 생일에 즈음해 자신의 팔에 아내의 이름을 문신으로 추가하여 화답했다.
👑 자신의 공연에서 팬을 며느리로 맞게 되었다. 디페시 모드가 이스라엘에서 공연했을 때 Dave의 아들이 아버지의 공연을 보러 왔는데 마침 그 자리에서 현지 여성과 대화를 트게 되고 결혼으로 이어졌던 것.
👑 딸바보이다. 2013년 당시 인터뷰에 따르면 딸에게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LOL이라고 나름 유행어를 써서 보냈더니 딸이 아빠.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 축구를 좋아하는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축구에 관심이 없고 농구를 좋아한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옷이 더러워져서라고 한다(...). 둘째 아들과 마찬가지로 뉴욕 닉스의 팬이라 부자가 다정하게 농구장에 출몰한다. 다만 장남은 축구를 좋아한다고.
👑 80년대 리즈 시절 모습이 샤이아 라보프가 연상된다는 반응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있다. 링크 해외 웹에선 앞으로 디페시 모드 영화가 나온다면 젊은 시절 Dave Gahan은 샤이아 라보프가 맡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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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 이름을 패션 잡지에서 따와서 지어준 장본인답게 패션 브랜드 광고에도 여러 번 출연했었다. 2004년 SPA 브랜드 H&M 광고에 출연했으며, 2006년에 제이린드버그 광고에 출연했는데, 당시 투어와 뮤직비디오에서 착용했던 회색 수트도 이 브랜드 제품이었다. 2017년에는 디올 옴므 광고 캠페인에도 등장했다. 링크.

2017년 GQ가 선정한 여름 최대의 콘서트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남성 중 한 명에 포함됐는데, 참고로 이 리스트를 보면 더 위켄드 등 당시 나이로 20~30대인 젊은 남성들이 대부분이며, 백발이 성성한 50대 남성으로는 그가 유일하다(...). 링크

사실 가수를 하기 전에 패션 관련 분야를 전공했었다. 괜히 패션 잡지에서 밴드 이름을 따온 게 아니다. 배우 클로에 세비니와의 인터뷰에서 언급된다. 구체적으로는 Window Dressing이라고 매장 쇼윈도 디스플레이에 대한 것을 배웠는데, 밴드 활동과 병행할 수 없어서 3년 만에 그만두긴 했지만, 그때의 경험 때문에 무대에서 입을 의상을 선택할 때도 원단까지 꼼꼼하게 고른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가 다녔던 학교는 South Essex College로 빈스 클라크가 결성한 야주의 보컬 알리슨 모예도 이곳 출신이다. 직업 전문 학교와 비슷한 개념의 교육기관인 듯하다.[49]

2년 후 같은 잡지에서 이번에는 반대로 인터뷰어의 입장이 되어 당시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프리다 지아니니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링크 참고로 이 잡지는 패션계 인사들의 인터뷰가 실리는 인터뷰 전문 잡지이다.
👑 현란한 마이크 돌리기가 특기이다. 앞서 언급된 클로에 세비니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처음에는 수줍음을 타서 뭐라고요? 땅만 보고 노래를 불렀지만, 점점 자신감이 생기고 무대가 커지면서, 넓은 공간을 메꾸기 위해 이런 개인기를 개발했다고 한다. 안톤 코빈이 처음으로 감독한 A Question of Time 뮤직비디오에 살짝 등장한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잘 돌린다. 링크 1 링크 2 본인 말에 따르면 마이크는 댄스 파트너라고 한다.
👑 트렌드를 빠르게 전달한다는 밴드 명칭과는 대조적으로, 의외로 아날로그적인 면이 있었다.

2000년 Dave의 팬들이 디페시모드 공식 이메일을 통해 Dave의 생일을 축하하는 메일을 보냈으나 몇 달이 지나도 응답이 없자, 참다 못해 앨런의 홈페이지까지 찾아가, 왜 그는 답장이 없느냐는 질문을 보냈다. 링크 이에 대해 앨런은 이렇게 답변했다.
No, he just doesn’t get computers. Somehow, I doubt whether he has internet or e-mail access yet. It’s possible that he hasn’t even seen the DM website. Don’t be too hard on him – I’m sure he appreciates everybody’s wishes.
(그는 컴퓨터가 없습니다. 그가 아직 인터넷이나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요. 공홈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에게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 저는 그가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확신합니다.)
50년대생도 능수능란하게 하는 인터넷을 밴드 내 막내가 못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데이브는 2000년에 앨런의 홈페이지에 등판해 짧은 인터뷰를 했는데, 자신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느리다고 했다. 링크[50] 그 때부터 데이브는 앨런과 이메일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지속적으로 연락을 했다. 하지만 자주 이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2013년 타임지 인터뷰에 이에 관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 핸드폰 문자 메시지는 주고받지만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2009년 클로에 세비니와 했던 인터뷰에서는 팬들의 반응을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해 일부러 인이어 착용을 안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최근 공연에서는 착용하고 있다.

그리고 2020년부터는 첨단 기술을 적극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당시, 코로나로 인해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게 되자, 부득이하게 으로 인사를 나눠야 했는데 이때 에어팟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22년 앤디 플레처의 사망을 계기로 드디어 마틴 고어와 페이스타임 영상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 2020년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모든 가수들의 활동이 올스톱된 상황에서 부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마스크 착용과 자택에 머물 것을 홍보하는 사진을 올려 근황을 알렸다. 부인 또한 마스크를 착용한 커플샷을 올렸다. 같은 해 4월 18일 코로나 19 사태에 관한 공식 동영상이 올라왔다. 뮤트레코드에서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인디 레코드 가게를 돕기 위해 릴레이 동영상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소속 가수로서 동참한 것이다. 링크

3. 전 멤버

전 멤버인 빈스 클락과 앨런 와일더에 대해서는 이 에 대략적인 스토리가 소개되어 있다.

한때 사이가 멀어지기는 했지만, 현재는 모두 화해한 상태.

빈스 클라크와 마틴 고어는 2012년에 합동 음반을 냈고, 2010년 2월 17일 로열 앨버트 홀 자선 공연 때는 앨런 와일더가 깜짝 출연하여 Somebody를 공연했다.

2010년 앨런 와일더가 디페시모드 현 멤버들과 재회한 소감을 말하는 인터뷰

로열 앨버트 홀 무대는 데이브가 앨런에게 전화를 통해 연락하여 성사되었다. 링크

또한 마틴은 그해 10월에 열린 앨런의 프로젝트 밴드 Recoil의 공연에 등장해 디제잉을 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링크 영상

그리고 이를 계기로 앨런은 2011년에 발매된 디페시 모드 리믹스 앨범에도 참여한다. 리믹스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

2020년에 이들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 공연자 부문에 디페시 모드의 멤버로서 모두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다. 참고로 이 부문은 단지 그룹의 멤버였다고 무조건 드는 것이 아니라, 멤버별 개별 심사까지 거쳐 선정되는 것이다. 이는 심사 위원들이 이들의 기여도를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1. 빈스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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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을 마지막으로 떠난 창단 멤버이다.

요구르트 공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음악에 필요한 장비를 샀으며, 1집에선 대부분의 곡을 작곡했다. 원래는 기타를 연주했으나, 신시사이저를 구입한 뒤에는 신시사이저로 전환했다고 한다. 링크

2011년 리믹스 앨범인 Remixes 2: 81–11에 참여했다. 링크 그가 리믹스한 곡은 Behind the Wheel이다.

빈스가 마틴에게 테크노 앨범을 만들고 싶다고 오랜 만에 이메일을 보내자, 마틴은 이에 응하면서 리믹스 앨범에 참여해 달라고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링크 이렇게 성사된 컬래버 음반이 < VCMG>이다.

2020년에 디페시 모드의 멤버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 공연자 부문에 같이 들어갔다. 하지만, 팬들의 바람과는 달리, 수상 소감 발표 영상엔 등장하지 않았는데, 이는 디페시 모드가 후보로 지명되었던 2018년에 이미 불참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They deserve all of the credit. All I did was started the band — you know what I’m saying? I wouldn’t go. Apart from that, I don’t have a nice suit.
(그들은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저는 밴드를 시작한 것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저는 안 갈 거예요. 그거 말고도 이유가 또 있는데 저는 멋진 수트가 없어요)

2009년 피치포크 인터뷰에 응한 앤디 플레처에 따르면, 뉴욕에서 빈스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고, 한 번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3.1.1. VC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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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앨런 와일더

파일:Alan Charles Wilder.jpg
본명 Alan Charles Wilder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출생 1959년 6월 1일([age(1959-06-01)]세) / 잉글랜드 런던 해머스미스

1982년 합류 이후 1995년까지 함께했던 멤버. 앨범의 공동 프로듀서로서 디페시 모드의 최고 명반으로 손꼽히는 Violator 앨범에 큰 공헌을 했다. 해당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본래는 심플한 발라드 스타일이었던 'Enjoy the silence'에 비트를 가미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 앨런이었고, 편곡에 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왔다고 한다. 본래는 키보드 연주자로 영입되었으나, 드럼도 연주할 줄 알아서 1993년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앨범 때는 드러머를 맡는다.

멤버 중 유일한 런던 출신[51]이자 중산층 출신으로, 부모님의 격려를 받으며 8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St Clement Danes School 그래머스쿨[52]에서 플루트를 배웠다. 방과 후에는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을 배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투어를 위한 키보드 연주자로 들어왔지만, 이듬해인 1983년에는 앨범 녹음에도 정식 참여했다. 이 앨범에는 그가 작곡한 곡도 두 곡 있는데 'Two Minute Warning', 'The Landscape Is Changing'이다.

이듬해 1984년에 'If You Want'라는 곡이 정규 앨범에 수록되었고, 이후 마틴 고어, 대니얼 밀러와 공동 작곡한 'Black day'를 1986년에 싱글 B 사이드에 수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작곡에 참여하지 않고 편곡과 프로듀싱, 연주에만 전념한다. 여담으로 앨런이 밴드에 있었을 때는 앨범 프로듀서 명단에 Depeche Mode가 공동 프로듀서로 표기되어 있으나, 앨런 탈퇴 후 나온 앨범에는 외부 프로듀서만 기재되어 있다. 앨런의 공헌도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

그가 멤버로 있었을 때는 샘플링을 이용한 음악적 실험을 많이 했다. 1984년에 나온 이들의 히트곡 'People Are People'은 부엌에서 가재도구를 던져서 낸 소리를 녹음해 사용했으며, 1986년 앨범 <Black Celebration>의 수록곡 'Stripped'의 도입부에 나오는 소리는 실제 오토바이를 공회전시켰을 때 나온 소리를 샘플링했다고. 링크

1995년 7월 탈퇴를 선언한다. 마틴 고어와 앤디 플레처에게는 직접 통보했고, 미국에 거주하는 Dave에게는 그의 집주소로 팩스를 보내 알렸는데, 당시 헤로인에 쩔어 살던 Dave는 답장을 안 했다고. 링크

다만, 앨런이 본인의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뒷얘기에 따르면 1996년에 앨런의 딸이 태어났을 때 Dave가 꽃다발을 보내 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뒤늦게 연락을 하긴 했던 것 같다.

출처: http://www.recoil.co.uk/
I didn’t hear back directly from Dave but he did send Hep and I a huge bunch of flowers when Paris was born and we saw him on a couple of occasions quite soon after. I’m sure he understands exactly why I left and he has been nothing but a perfect gentleman regarding the whole situation.

Dave가 약을 끊은 후 앨런 와일더는 다시 연락을 주고받고 왕래를 해 왔으며[53], Dave도 종종 미디어를 통해 앨런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곤 했다.

2000년 무렵, 앨런 와일더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1999년 Dave Gahan이 현 부인과 결혼할 때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날 앨런은 스케줄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으나, 이후 부부 동반으로 만나 오랜 만에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링크

2000년 시점의 발언이라 이미 과거 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당시엔 Dave와는 여전히 가까이 지냈던 반면 마틴에 대해서는 다소 불편한 감정이 남았던 듯하다.[54]

1997년 앨범 <Ultra> 프로모션 당시 마틴은 전 멤버 앨런 와일더를 염세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이를 기억한 앨런의 팬들은 팬들과 자주 소통하는 그가 염세주의자라는 것은 이상하다고 질문을 보내 왔다. 이에 대해 앨런은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이 사람을 매우 가려서 사귀는 편이라 어떤 의미에선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마틴이 말한 염세주의자 앨런이 매우 냉소적이고 비꼬기를 잘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다만, 앨런이 미디어가 일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며, 기사에 나온 마틴과 앤디의 말을 크게 담아 두지 않는다고 언급한 부분도 있으니 판단은 알아서.[55]

한편, 비슷한 시기에 Dave가 라디오 채널 전화 인터뷰에서 앨런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앨런이 밴드에 공헌한 부분을 많이 언급하며, 10년 넘게 함께 한 가족 같은 존재임을 강조했다. 링크 더불어, Dave가 멤버들을 미운정 고운정 쌓인 형제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훗날 앤디 플레처가 Dave에 대해 비슷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이 밴드의 관계성이 드러나는 부분.

밴드 탈퇴 후 3년 시점에서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은 그룹 내에서 많은 보상을 받는 특권을 누렸고,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다고 한다. 링크

밴드 멤버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보다는 자신의 삶을 누리려는 결정이었던 듯하다.

여담으로, 활동 당시엔 일부 매체에서 앨런과 앤디를 구분하지 않고 기사를 내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앨런은 It just shows how little research some of these so-called journalists do.(소위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일부가 얼마나 조사를 안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1994년 말에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퍼스셔에서 직접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영국 공군(RAF)의 토네이도 전투기가 그가 운전하는 차량 바로 옆 언덕에 쳐박혀 비행사 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링크 앨런의 말에 따르면 10초만 더 나아갔어도 자신은 죽었거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라고 한다. 10억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나는 드문 일이 자기한테 있었다고

앞서 언급했듯이, 2010년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청소년 암 환자 돕기 자선 공연에 깜짝 출연하여 옛 멤버들과 재회한 후, 이듬해인 2011년에 디페시 모드 리믹스곡 앨범인 <Remixes 2: 81–11>에 참여했다. 그가 참여한 곡은 <Sound of Univerce> 앨범 수록곡인 'In Chains'이다. 링크

이 때문에 앨런 와일더가 디페시 모드 멤버들과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으나 앨런 본인은 개인 활동에 만족하고 있어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링크

3.2.1. 여담

앨런은 스티븐 호킹 박사의 팬으로 호킹 박사가 나오는 다큐를 즐겨 보았다고 한다. 이를 호킹 박사의 딸이 알고 아버지에게 전하자, 호킹 박사는 디페시 모드의 음악은 물론, 앨런의 개인 프로젝트인 Recoil 앨범까지 관심 있게 듣는 팬이 되었다고 한다. 호킹 박사의 딸이 이 사실을 앨런에게 직접 전했고, 앨런은 매우 영광스러워했다. 링크
Hi, I don’t know if this’ll reach you but as a Depeche Mode / Recoil fan, I happened to notice that you enjoyed my dad’s (Stephen Hawking) TV series last year. I have to admit that I found it rather boring but then that’s probably because there wasn’t a mention of me! Through me, my dad has become quite a DM / Recoil fan. Unlikely combination I know but it’s true! Anyway, just wanted to say keep up the good work!


Thank you- it’s good to know both of you like the music. He’s a top bloke, your old man – not that I pretend to know what he’s on about most of the time 😉 but I find the study of the universe absolutely fascinating nonetheless. Just last night I watched a very interesting documentary about ‘black smokers’ (no, not Samuel L Jackson); hydro-thermal vents on the bottom of the ocean located along a massive fault line which circles the planet and is wrapped up with the whole process of continental drift.

세 번 결혼을 했는데, 상대 여성이 모두 뮤지션이었다. 첫 번째 부인과는 아이 없이 이혼하고, 밴드 '미란다 섹스 & 가든'의 멤버인 여성과 90년대 중반에 두 번째 결혼을 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하지만 2010년대 초반에 이혼하고 20세 연하의 여성과 현재 결혼 생활 중이다. 여담으로, 그의 홈페이지에는 두 번째 부인이 남긴 멘트가 지금도 남아 있다. 남편이 주방을 어질러 놓는다는 내용이다

1988년 스핀 인터뷰에 따르면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같은 합성 섬유로 만든 의류를 착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링크 반면, 합성 식품은 먹는다고. 원래는 synthetics이란 단어를 활용한 언어유희성 질문이다.

3.3. 앤디 플레처

파일:Andy f.jpg
본명 Andrew John Leonard Fletcher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출생 1961년 7월 8일 / 잉글랜드 노팅엄
사망 2022년 5월 26일 (향년 60세)

창단 당시부터 탈퇴 없이 그 자리를 지켰던 멤버였지만, 위에 나와 있다시피 2022년 5월 26일에 사망하여 이제는 전 멤버로 분류된다.

태어난 곳은 노팅엄이지만 두 살 때 베이즐던으로 이주해서 빈스 클라크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본래는 베이스 기타 연주자였으나, 원년 멤버 빈스 클라크가 전자음악 밴드가 되자고 하여 졸지에 신시사이저를 연주하게 되었다 링크

하지만, 현재는 음악보다는 재정 실무나 매니저, 법무 관련 업무 등 사업 관련 영역에서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매니저가 24시간 상주하는 게 아니라서 매니저가 근무하지 않는 시간대에는 그가 사실상 매니저 역할을 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무대 위에서보다는 뒤에서 처리하는 업무가 훨씬 많은 멤버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로즈볼 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101>에서는 하는 거 없이 그냥 논다고 농담하여 졸지에 병풍 멤버 이미지가 박혔으나, 멤버들 간의 의견 차이를 조율하고, 생각을 체계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Dave의 말에 따르면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멤버라고. 링크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단순한 멜로디의 가벼운 팝을 좋아한다고 한다. 링크

이처럼 다른 멤버들에 비해 대중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멤버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밴드 음악의 색깔이 대중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중재자 역할을 해 왔다. 2023년 더 가디언 인터뷰에서 데이브 가안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앤디 플레처는 밴드의 음악이 너무 전위적으로 빠지지 않도록 조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의 의견이 다소 거슬렸지만, 결과적으로 밴드가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공헌했다고 한다.

2009년 로이터 인터뷰를 보면, 평소 앨범 수록곡 선정에 자신의 의견을 적극 피력함을 알 수 있다. 마틴이 독특한 곡을 넣고 싶어할 때마다 앨범 전체의 색깔을 고려해 이를 자제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앨범에 실리지 못하는 곡들이 많았다고. 다만 이 해에 나온 앨범의 경우 예외적으로 많은 곡들이 추가로 들어갔다고 한다. 링크

2011년에 디제이 셋으로 혼자 투어를 할 때 단독 내한한 적이 있었다. 무려 공식 홈페이지에 공지된 일정이었다. 링크 클럽 Eden에서 디제잉을 했다고 한다. 증거 영상

유일하게 안경을 착용했던 멤버였다. 그래서 멤버들이 대기실에서 앤디의 안경을 소속사 사장인 대니얼 밀러의 안경과 바꿔치기 하는 장난을 치곤 했다고 한다. 링크

하지만 2017년 무렵부터 Dave Gahan이 노안 때문에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했으므로 이젠 옛말. 그러나 공연 때를 기준으로는 유일하게 안경을 착용하는 멤버이다.

십대 시절 여친과 장기간 연애를 하다 30대에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고 죽기 전까지 해로한 보기 드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키가 무려 190cm로 멤버 중 최장신이다.

밴드에서 유일한 음주자였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주량을 많이 줄였는데, 그래도 일주일에 와인 5병을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2022년 5월 26일 자신의 집에서 숨졌다. 링크

안톤 코빈, 듀란 듀란이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링크 특히 고인과 각별한 인연이 있던 안톤 코빈은 두 건을 포스팅하여 고인을 기렸다. 링크 1, 링크 2

전 멤버 앨런 와일더는 정말 청천벽력(A real bolt from the blue) 같은 소식이라면서, 이 고통스러운 시기에 고인의 아내 그레인느를 비롯한 모든 가족에게 조의를 표한다고 트윗을 올렸다. 링크

2022년 5월 30일 LA 다저스 소속 오르간 연주자인 Dieter Ruehle은 LA 다저스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경기에서 앤디 플레처를 추모하는 의미로 디페시 모드의 곡을 연주했다. 링크

사후 검시관이 밝힌 사인은 대동맥 박리였다. 생존 멤버인 마틴 고어와 데이브 가안이 현지 시각 6월 27일에 공동으로 올린 추모사에 언급되었다. 링크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오래 고통받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편, 사망 원인 발표 1주일 전에 마틴 고어와 데이브 가안은 런던에 모여 유족, 동료들과 함께 앤디 플레처를 기리는 추모식을 열었다. 링크

4. 음악적 특징

멤버들은 록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신시사이저의 등장과 함께 테크노, 일렉트로니카까지 흡수하는 이색적인 행보를 보였다. 마틴 고어, 빈스 클라크, 앤디 플레처는 원래 일렉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으로 구성된 록밴드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마틴 고어가 모아둔 월급을 탈탈 털어 신시사이저를 구입하면서 신스팝 밴드로 전향하게 되었고, 원래 베이스 기타 포지션이었던 앤디 플레처는 졸지에 키보디스트가 되었다.

이들이 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1987년 Music for the Masses 앨범의 수록곡 'Never Let me Down'을 들 수 있다. 링크 이 곡의 에코가 많은 드럼 패턴은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이들의 대표 명반으로 꼽히는 Violator에서는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인 존 본햄의 연주를 샘플링까지 했다.
처음에는 키보디스트 3명 외에는 다른 악기 연주자가 없는 형식이라, 록계에선 배척받는 요인이었다. 물론 키보드는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에도 있었지만, 록 밴드에선 없어도 그만인 포지션인 반면, 기타는 필수 요소인데, 몇 년 동안은 기타 없이 신시사이저 3대로만 활동해 온 것이다. 이는 신시사이저로 다양한 소리를 실험하려는 의도였지만, 진짜 악기 연주가 아니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록 마니아들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오토튠 같은 효과를 쓰는 음악은 진짜 음악이 아니라며 아이돌 댄스 음악이나 EDM을 배척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또한 저 당시에는 록 음악보다는 격이 낮은 것으로 여기는 인식도 있었다. 마틴 고어의 말에 따르면 첫날부터 록밴드로 불렸다면 더 많은 존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링크 음악 잡지 '멜로디 메이커'의 1990년도 인터뷰에서 Dave Gahan은 보통의 록밴드가 전자 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의심이나 조롱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자기네들은 끌리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나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자신들은 팝밴드로 불리기를 선호할 뿐이라고 했다.[56]

그래서 이들이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았음을 종종 드러냈음에도, 해외의 레드 제플린 팬들 중 일부는 이들이 레드 제플린을 무시했다며 섀도 복싱을 하기도 한다.[57]

미국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며 로즈볼 스타디움까지 입성한 1988년 당시 기사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는데, 당시 미국의 소위 록 마니아들은 신시사이저밴드를 진짜 밴드가 아니라고 배척했다 한다. 앤디 플레처는 이에 대해 미국은 영국과는 달리 팝과 록을 분리된 영역으로 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미국에서는 테크노 씬이 발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신 이들은 그쪽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는다.

90년대에 들어서 음악에 기타가 전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하고, 특히 1993년 <Song of Faith and Devotion> 앨범 때는 마틴 고어가 일렉 기타 앨런 와일더가 드럼으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록밴드 형식으로 활동한다. 앨런 와일더 탈퇴 후에는 드러머와 키보디스트가 따로 영입되었고, 마틴 고어는 아예 기타리스트로 자리를 잡았다.

의외로 블루스의 영향도 강하다. 실제로 마틴 고어는 평소 기타를 들면 블루스를 종종 연주한다고 하며, 보컬 데이브 가안도 블루스를 즐겨 듣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 앨범이 2013년에 나온 <Delta Machine>이다.

이들을 발탁한 대니얼 밀러의 말에 따르면, 앤디 플레처가 팝적인 성향이라면 마틴 고어는 의외성이 있는 색다른(left-field) 성향이고, 데이브 가안은 좀 더 록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링크 이런 각자의 성향이 앨범에 잘 들어맞는다고.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의외로 노장 밴드 ZZ TOP과 접점이 있었다. ZZ TOP은 블루스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80년대에는 뉴 웨이브를 수용할 정도로 개방적인 성향을 보였는데, 실제로 ZZ TOP은 이들이 음악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았던 80년대에도 'Master and Servant'의 가사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디페시 모드가 2020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때, 축하 영상에도 등장했는데, <Delta Machine>의 수록곡인 'Soothe my soul'을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4.1. 가사

가사의 콘셉트가 노골적으로 성적인 의미가 강하다. 어떻게 보면 얀데레적인 요소가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가사의 화자로 등장하는 마조히즘적인 캐릭터들은 서브컬쳐에도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BDSM 같은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은유적인 표현이라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휘둘리겠다는 내용을 담은 지금의 아이돌 가사 콘셉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58] 특이한 콘셉트로 활동하는 몇몇 아이돌의 선구자 격인 셈. 앞서 언급한 <Master and Servant>가 대표적이다.

또 흔히 생각하는 달달하고 꽁냥꽁냥한 연인 관계가 아닌, 애증 관계를 콘셉트로 했다는 점에서 빌리 아일리시 bad guy에 묘사된 관계를 연상케하기도 한다.

다만, 한편으로는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풍자하는 중의적 표현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또한 디페시 모드 가사의 특징이다. 특히 뮤직비디오에 그런 의도가 두드러진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There's a new game 새로운 게임이야
We like to play you see 우린 놀고 싶어 보다시피
A game with added reality 현실이 더해진 게임

You treat me like a dog 넌 날 개처럼 다루고
Get me down on my knees 날 무릎꿇게 하지
We call it master and servant 우릴 주인과 하인이라 불러
We call it master and servant

It's a lot like life 그건 삶과 많이 닮았어
This play between the sheets With you on top and me underneath
종이 한 장 차이로 넌 위에 난 밑에서 놀지

Forget all about equality 평등은 모두 잊어버려
Let's play master and servant 주인과 하인 놀이를 하자
Let's play master and servant

It's a lot like life And that's what's appealing
그건 삶과 많이 닮았고 그게 매력이지

There's a new game 새로운 게임이야
We like to play you see 우린 놀고 싶어 보다시피
It's a lot like life And that's what's appealing
그건 삶과 많이 닮았고 그게 매력이지

There's a new game 새로운 게임이야
We like to play you see 우린 놀고 싶어 보다시피
A game with added reality 현실이 더해진 게임

You treat me like a dog 넌 날 개처럼 다루고
Get me down on my knees 날 무릎꿇게 하지
We call it master and servant 우릴 주인과 하인이라 불러
We call it master and servant

It's a lot like life 그건 삶과 많이 닮았어
This play between the sheets With you on top and me underneath
종이 한 장 차이로 넌 위에 난 밑에서 놀지

Forget all about equality 평등은 모두 잊어버려
Let's play master and servant 주인과 하인 놀이를 하자
Let's play master and servant

It's a lot like life And that's what's appealing
그건 삶과 많이 닮았고 그게 매력이지

If you despise that throwaway feeling From disposable fun
네가 일회용 재미로 날 깔본다면

Then this is the one 그래 바로 이거야

Domination's the name of the game 게임이란 이름의 지배

In bed or in life 침대에서나 삶에서나

They're both just the same 그건 똑같아

Except in one you're fulfilled At the end of the day
네가 결국엔 만족했다는 걸 빼면
Let's play master and servant 주인과 하인 놀이를 하자
Let's play master and servant
Let's play master and servant

Come on master and servant 어서와요 주인과 하인
}}}


이같은 연인간의 주종 관계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노예가 되겠다는 희생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설정으로 활용되기도 하므로 디페시 모드의 가사에는 은근히 여심을 공략하는 요소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Behind the Wheel>인데, 여기서 여자에게 운전대를 넘기겠다는 것은 그녀에게 기꺼이 조종당하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고로 작사가인 마틴 고어는 운전면허가 아예 없는데, 서구권에서 성인 남성에게 운전면허가 없다는 것이 남성답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걸 생각하면 파격적인 설정이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My little girl 나의 작은 소녀여
Drive anywhere 어디든 달려요
Do what you want 그대가 원하는 대로
I don't care 난 걱정안해요
Tonight 오늘 밤
I'm in the hands of fate 난 운명의 손 안에 있어요
I hand myself Over on a plate 나 자신을 기꺼이 넘겨요
Now 지금
Oh little girl 오 작은 소녀여
There are times when I feel 내가 이 시간을 느낄 때
I'd rather not be The one behind the wheel 난 차라리 운전대를 잡지 않겠어요
Come 다가와
Pull my strings 날 조종해요
Watch me move 내가 움직이는 걸 봐요
I do anything 난 뭐든지 해요
Please 부디
Sweet little girl 귀엽고 작은 소녀여
I prefer You behind the wheel And me the passenger
난 그대가 운전하고 내가 승객인 게 더 좋아요
Drive 달려요
I'm yours to keep 날 가져요.
Sweet little girl 귀엽고 작은 소녀여
I prefer You behind the wheel And me the passenger
난 그대가 운전하고 내가 승객인 게 더 좋아요
Drive 달려요
I'm yours to keep 날 가져요.
Do what you want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I'm going cheap 비싸게 굴지 않을게요.
Tonight 오늘밤
You're behind the wheel tonight 당신이 운전대를 잡는 오늘밤
}}}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찬송가스러운 가사들도 은근 포진해 있다. <Ultra> 앨범의 수록곡 'Home'이 그러한데, 가사를 번역한 블로거가 일부러 그런 문체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성경을 연상시키는 표현들이 많다. 링크

이는 마틴 고어가 평소 탐구한 주제가 성(Sex)과 성(Holy)이기 때문이다.

4.2. 종교관

분명 CCM 뮤지션이 아님에도 워낙 다루는 주제가 독특해 이 항목이 따로 있는데, 단순히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굳이 특이할 것도 없지만, 이 경우는 그렇다고 종교를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으며, 영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기 때문이다. 2009년 음악 잡지 <Mojo>에서 이 주제로 특집 인터뷰 기사를 낸 적도 있었다. 링크

전 멤버를 포함해 모든 멤버들이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며 성장했다. 특히, 원년 멤버인 빈스 클라크, 현 멤버인 마틴 고어와 앤디 플레처는 어린 시절 주말에 교회를 같이 다니던 친구였으며, 마틴은 음악 찬양 활동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앤디 플레처는 1980년에 크리스천 록 페스티벌에 갔을 때 U2를 본 적도 있다고 한다. 링크 참고로 앤디 플레처는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성경을 언급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Dave Gahan의 경우는 교회를 다니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엔 성가대 활동은 즐겼다. 중간에 합류한 멤버인 앨런 와일더의 경우, 아버지의 강요로 억지로 교회를 나가야 했기에 18세부터는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지만, 교회 음악은 즐겨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 멤버들이 음악적으로는 가스펠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가사가 많은 편이다. Blasphemous Rumors는 신앙의 아이러니를 꼬집는 내용이고, Personal Jesus는 TV를 통해 설교하고 전화를 통해 헌금을 모금하는 TV 선교사들과 그에 빠져드는 신도들을 비꼬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그들의 거의 모든 음반에는 종교에 대한 메시지를 꼭 넣고 있다.

다만, 무신론이라기보다는 종교계의 편협함을 꼬집는 내용들이 많은데 이는 마틴 고어의 전 여친이 극도로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여서 그를 속박했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TV에 나온 여성의 노출 장면을 보기만 해도 변태라고 낙인찍혔다고. 링크 결국 여친과 헤어지고, 베를린으로 이사를 간 마틴 고어는 그곳에서 유흥의 세계에 눈을 뜬다.[59]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노래를 부르는 밴드의 보컬 Dave Gahan은 그리스 정교회 신자라는 점이다. 출처 원래 어머니가 구세군에서 일했기에 어린 시절 기독교를 접하긴 하였으나, 종교와는 거리가 먼 방탕한 생활을 해 왔는데, 헤로인 중독으로 2분 동안 심장이 멈췄다 살아난 체험을 계기로 달라졌다. 당시 그가 마약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 준 여친이 그리스계 미국인이었고 이 커플은 정교회식으로 혼인한다. 즉 부인따라 개종한 것. 이후 Dave Gahan은 2008년 자신의 솔로 앨범을 통해 종교적인 언급을 해 왔고 이에 관한 팬의 질문에 답변한 인터뷰도 있다. 대략 요약하자면, 종교에 관해서는 수천 년 동안 혼란이 이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솔직히 무엇을 믿는다고 확언하긴 어렵지만 어떤 종류의 높은 힘이 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1997년 NME 인터뷰에서도 이미 신에 대한 믿음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엔 주일학교를 땡땡이쳤지만, 마약 중독으로 고통받던 시기에 마약을 끊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발언이 선교사 발언처럼 비치는 것은 싫다면서 이런 부류 사람들은 또 다른 종류의 약쟁이라고 신랄하게 디스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마틴 고어와 종교관이 매우 비슷하다. 2012년 CNN 인터뷰에서도 종교와 관련해 마틴과 비슷한 의구심을 느낀 적이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당시 소울세이버스라는 팀에 피쳐링을 했을 때 가사를 쓴 곡 중에 Presence of God(신의 임재)라는 곡이 있는데,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 열린 눈과 귀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진정하게 이해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마틴 고어는 딱히 종교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01년 Q 매거진 인터뷰에서 저는 매일 일어나서 햇빛을 보고 놀라운 산 경치를 봅니다. 그리고 저는 신이 무엇이든 간에 신의 손길을 좀 더 느낍니다(I wake up every day and I see sunshine and I see amazing mountain views and I do feel a bit more in touch with God, whatever God is)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후 Q 매거진 인터뷰에서는 그동안 종교를 가지기를 원했지만, 어떤 종교도 따를 수 없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링크 1 링크 2

마틴은 2001년 잡지 <Uncut> 5월 호 인터뷰에서는 예수는 사랑하지만 조직화된 종교를 거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60] 예수는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이며, 예수에 관한 책을 접할수록 점점 예수를 사랑하게 되지만, 기독교는 그와는 다른 것이므로, 예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인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링크
기독교 비판 메시지와는 반대로 은근 찬송가스런 가사와 곡들도 있다. 특히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앨범은 가사의 모티브를 성경에서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가스펠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신성 모독 논란을 불렀던 <Personal Jesus>를 조니 캐쉬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디페쉬 모드도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참고로 조니 캐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조니 캐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공교롭게도 이분도 과거의 삶이 Dave Gahan과 공통점이 있다.

2009년, 마틴 고어는 음악 잡지 'Mojo'와 가진 인터뷰에서 <Sounds Of The Universe> 앨범의 수록곡 'Peace'에 대해 영적인 주제를 다룬 곡이라고 설명했으나, 그렇다고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이나 뉴에이지 히피라는 인상을 주기를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우주(the universe)와 좀 더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는 한다고. 링크 참고로 원문의 the universe는 천문학적 개념의 우주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전 인류라는 개념으로도 쓰이는 표현이다. 해석은 알아서 링크 이후 마틴은 우주(the universe)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2013년, <Delta Machine> 앨범 발표 당시,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기자가 디페시 모드의 음악에 '십자가, 천사, 구원자들' 같은 신성한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링크 공동 송라이터인 Dave Gahan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Martin and I are both interested in that yearning to feel whole with yourself and the world. It’s something that we all want to feel.
마틴과 저는 둘 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온전하게 느끼고 싶은 열망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이 큰 턱수염을 달고 하늘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우주가 가진 진정한 힘을 믿고, 음악은 분명 그 일부분이라 생각하며 그것이 사람들을 조화롭게 모이게 한다는 것이다.(I don’t claim to have this image of a man in the sky with the big beard, but I do believe the universe has a real power and I think music is definitely a part of that. It brings people together in harmony.)

이 인터뷰가 나온 해에 발매된 <Delta Machine>의 타이틀 곡 'Heaven'의 가사와 뮤직비디오에도 이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Heaven'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숭고한 사랑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를 맡은 티머시 새센티(Timothy Saccenti) 감독은 테렌스 멜릭 감독의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영감을 얻어 아름답지만, 어둡고 뒤틀린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한다. 또한, 뉴올리언즈의 버려진 가톨릭 성당을 배경으로, 부두교에서 힌트를 얻은 상징적인 스토리와 이미지를 혼합했는데[61], 참고로 부두교 문서에도 나오듯, 원래 부두교는 흑인들이 백인들의 가톨릭 신앙을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수용한 종교 문화이며, 저주인형과는 무관하다. 어찌 보면, 서로 다른 문화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사례인 것이다.

당시 디페시 모드의 앨범은 흑인 음악 장르인 블루스 크라프트베르크로부터 영향을 받은 전자 음악이 섞여 있었는데, 감독은 이들 음악의 근원이 뉴올리언즈 부두교 문화에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현지 문화 조사를 했다고 한다. 링크 블루스 문서에 있는 설명처럼, 원래 블루스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이 부르던 노동요와 백인들의 기독교 음악이 합쳐진 것이다. 또한 부두교는 백인들의 가톨릭 신앙을 흑인들이 자신들의 토착 종교 문화를 바탕으로 받아들인 것인데, 이 모든 것은 당시 고난에 허덕이던 흑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뮤비에서는 신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흔히 알려진 턱수염 달린 남성으로 묘사되지 않고, 여성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는데, 이 점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링크

즉, 신의 존재는 받아들이지만, 교리에 얽매여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대립하는 것은 혐오하는 것이 이들의 신념인 것이다.

또한 2015년 인터뷰에서 Dave Gahan은 어떤 종교나 책에서도 확실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something more than that(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인간들의 삶이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해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링크

4.3. 음악계에 미친 영향

고딕풍 음악과 가사, 뿅뿅거리는 신스 간의 결합은 1980년대 말 태동한 초창기 레이브 음악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LFO의 리더 마크 벨[62]은 LFO의 데뷔작 Frequencies 앨범 속지에서 최면적인 그루브(Hypnotic Groove)의 개척자로 브라이언 이노, 탠저린 드림, 크라프트베르크,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와 함께 언급하기도 했다. 참조 마크 벨은 이후 Exicter에서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다. 벨 본인은 프로듀싱에 대해 재미있었지만 이상한 경험이라고 했는데, 12살때 팬이었던 밴드가 자신한테 휴가를 요청하거나 뭘 먹어야 할지 묻는 게 상당히 초현실적이었던 모양. 출처

신스팝 밴드이지만, 헤비메탈계에도 은밀하고 위대하게 영향을 미친 밴드이기도 하다. 이는 과거에 신스팝 밴드는 진짜 밴드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기타와 드럼이 있어야 진짜 밴드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찌 보면 헤비메탈 뮤지션들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글의 자료가 되는 롤링 스톤 기사를 참조하길 바란다.

디페시 모드는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두운 내면을 음악으로 표현해 왔는데 이것이 헤비메탈 뮤지션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데프톤즈, 린킨 파크, 스매싱 펌킨스, 더 킬러스, 트렌트 레즈너가 좋아하는 밴드 중에 하나이다. Personal Jesus는 마릴린 맨슨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또한 보컬 Dave Gahan은 이 기사에 대한 화답으로, 디페시 모드와 메탈리카가 의외로 공통점이 있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디페시 모드의 음악처럼 어두운 순간도 있지만, 그 깊숙한 곳엔 귀에 잘 들어오는 코러스와 팝적인 편곡이 있다는 것. 링크

이들의 곡을 좋아하는 뮤지션들은 장르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위 글에도 나오지만 디페시 모드의 곡을 리메이크한 뮤지션 중에는 수잔 보일, 조니 캐시도 있다. 팝페라, 헤비메탈, 컨트리 뮤직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초월한 것이다. 마틴 고어의 말에 따르면 리메이크 요청을 한 뮤지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닌 뮤지션들도 있었지만, 팬심에 화답하여 웬만하면 허락한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애플뮤직 같은 해외 음원 사이트에 엄청나게 많은 커버 버전들이 있다.

이들의 대한 헌정의 의미로 트리뷰트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는데, 참여 라인업이 매우 화려하다. 스매싱 펌킨스, 데프톤즈, 람슈타인, 더 큐어가 참여하였고 미국과 독일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람슈타인이 공연에서 자주 부르는 Stripped가 바로 이들의 곡이다.

린킨 파크의 마이크 시노다가 이들의 히트곡 Enjoy The Silence를 리믹스하기도 했다. 또한 이 밴드의 보컬 체스터 베닝턴은 어린 시절 디페쉬 모드의 5번째 멤버가 되고 싶어했다고 한다.

5. 디스코그래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디페시 모드/디스코그래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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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상 경력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정리된 바와 같이 다수의 수상 실적이 있다. 주로 유럽에서이며, 특히 독일에서는 독일판 그래미 시상식이라 불리는 에코 어워드의 베스트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두 차례나 수상했다.
링크 영상[63]

또한 미국에서는 2020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음악사에 끼친 영향력도 인정받았다.

다만, 평단의 높은 평가에도 그래미 어워드와는 인연이 없는 편이다. 지금까지 5개 부문에서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유일한 수상은 Spirit 앨범의 수록곡인 'You Move'의 리믹스 버전인 'You Move(Latroit remix)'가 베스트 리믹스드 레코딩 부문에서 수상한 것이었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리믹스 아티스트가 받은 상인 셈이다(...)

심지어 2023년 앨범 Memento Mori의 경우는 자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이례적으로 이견 없이 호평을 받았음에도, 앨범은 전혀 후보 지명을 받지 못했고, 리믹스곡만 유일하게 리믹스 레코딩 부문에서 후보 지명을 받았다.

7. 뮤트 레코드와의 관계

뮤지션 대니얼 밀러(Daniel miller)가 설립한 인디 레이블 뮤트 레코드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스타로, 알고 보면 중소기획사 출신 스타이다. 대니얼 밀러는 디페시 모드 정규 5집까지 공동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1980년 가을, 영국의 어느 에서 공연하는 그들을 본 대니얼 밀러는 백스테이지를 찾아가 언제 또 연주할 거냐, 다음에도 또 보고 싶다고 말을 걸었고, 이게 인연의 시작이 된다. 링크

그 다음 주에 다른 클럽에서 이들의 공연을 본 대니얼 밀러는 싱글 음반을 내자고 제의를 했다.

당시 대니얼 밀러는 이들을 메이저 레이블과도 연결시켜 주려고 했으나, 멤버들은 뮤트 레코드에서 나온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서 대니얼 밀러와 함께하기를 원해 결국 뮤트 레코드에 안착한다.

다만 계약서로 묶인 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에 굳이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던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원래 대니얼 밀러는 이들을 메이저 레이블과 연결해 주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 더 좋은 조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놓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링크

그래서 처음부터 수익 배분도 50 대 50이었다. 정식 계약서 작성은 2001년부터인데, 그 전까지는 매니지먼트 관련 부분은 멤버들에게 어느 정도 재량권을 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보험 회사 출신인 앤디 플레처가 그룹의 재무설계까지 짰다고 한다. 그룹의 재정 업무는 지금까지도 앤디 플레쳐가 맡고 있으며, 마틴 고어는 스스로 Grabbing hands라는 저작권 회사를 세운다.

회사가 워낙 작다 보니, 처음엔 사장인 대니얼 밀러가 이들을 공연 장소에 데려다 주는 운전기사 역할도 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팬클럽 운영 업무는 Dave Gahan의 당시 여친이 맡았다. 그리고 몇 년 후 Dave의 첫번째 부인이 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 사이에서는 첫부인이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걸 보면 병크 없이 운영을 잘한 듯하다.

아무래도 인디 레이블이다 보니, 이처럼, 초창기에는 가내수공업(?) 같은 시스템으로 매니지먼트가 이루어졌다.

다만, 1986년을 기점으로 업무 체계가 나름 전문화되기 시작한다. 1986년에 이들이 <Black Cepebtaion> 투어를 했을 때, 투어 활동을 담당하는 회계사로, 당시 22세였던 경영대학원 출신 Jonathan Kessler가 영입되었는데, 점점 업무 범위가 넓어지면서 30세도 되기 전에 임원급 매니저로 올라섰다. 링크 그는 지금도 밴드와 인연을 이어 가는 매니저이다.[64]

2013년부터 디페시 모드는 더 이상 뮤트 레코드 소속이 아니지만, Daniel miller는 그들에게 멘토로 남아 인연을 이어 가고 있다. 링크 2017년에 나온 최근작인 Spirit의 프로듀서 제임스 포드도 대니얼 밀러가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Daniel miller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2017년까지는 뮤트 레코드의 마크가 새겨졌다. 2023년 앨범인 Memento Mori에서는 이 마크가 더 이상 등장하진 않지만, 대니얼 밀러는 A&R(artist and repertoire) 담당자로 기재되어 있다.

디페시 모드 멤버들은 자신들을 발탁한 대니얼 밀러가 아니었다면, 80년대 당시에 쏟아져 나온 뉴로맨틱스 밴드들의 아류로 인식되다 곧 사라졌을 거라며 매우 고마워한다.[65]

또한 멤버 개인은 아직까지는 뮤트 소속으로 남아 있다. 마틴 고어의 경우, 2015년에 발매한 솔로 앨범은 뮤트의 고유 넘버가 새겨졌다. 링크

대니얼 밀러가 이들과 함께 했던 기간에 나왔던 앨범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정리한 기사가 있다. 대니얼 밀러의 말에 따르면, 마틴 고어는 스튜디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반면 앨런 와일더는 사운드에 관심이 많아 미세 조정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링크

8. 여담

밴드명을 따온 프랑스 패션잡지 디페쉬 모드는 1976년에 창간되어 2001년에 폐간됐다. 이젠 디페시 모드하면 밴드를 먼저 떠올리는 상황이 되었다. 참고로 원조 디페시 모드 잡지 표지는 이렇게 생겼다. #
동성애자들이 굉장히 선호하는 밴드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멤버들은 그런 성향이 없다고 밝혔다.
듀란 듀란의 보컬리스트 사이먼 르 봉이 80년대 초에 무시했던 밴드였다고 한다. 디페쉬 모드가 2005년에 모 방송에서 가장 무례하게 대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언급한 내용인데, 사이먼이 데이브 면전에서 너, 너! 내 앞에서 디페시 모드 얘기 하지 마!(Don't tell me Depeche mode)라고 했다고. 해당 동영상 4분 44초 쯤에 나온다.[66] 또 다른 사용자가 올린 같은 영상의 댓글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는 1982년경, 영국의 음악 프로그램 'Top of the Pops' 출연 당시의 일이었을 거라고 한다.

디페시 모드에 대한 전기물 <Stripped: Depeche Mode>에 따르면 80년대 초에 앤디 플레처 또한 사이먼 르 봉을 불편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They saw themselves as top of the premier football league(그들 자신을 프리미어 축구 리그에서 최고라 여겼다)는 것이다. 링크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듀란 듀란의 프런트맨 사이먼 르 봉은 한때 연예인 병에 걸렸다는 평판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이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고. 베이시스트 존 테일러가 Dave Gahan과 록시 뮤직 트리뷰트 앨범에서 컬래버를 한 적도 있었다. 마침 둘 다 LA에 거주하고 있었고, 록시 뮤직의 팬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반 정보 녹음 시기는 1995년이었지만, 1997년에 발표한 음반으로 보컬은 Dave Gahan, 베이스 기타는 존 테일러가 맡았다. 링크 아쉽게도 애플뮤직에서도 검색이 안 되는 절판 음반이라 유튜브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앨범 표지에 나온 여성은 녹음 당시 존 테일러의 와이프였던 어맨다 드 카드네(Amanda De Cadenet)이다. 당시 듀란 듀란을 탈퇴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로 결심한 존 테일러가 세운 인디 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음반이었다. 다만, 존 테일러는 몇 년 후 다시 듀란 듀란으로 복귀한다. 2002년에 존 테일러가 듀란 듀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Dave의 보컬 스타일을 사랑한다고 한다. 가수로서 훌륭한 스타일을 지녔다고 생각한다고. #

또한 듀란 듀란의 키보디스트 닉 로즈는 2011년 'Personal Jesus' 리믹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링크 Personal Jesus(M.A.N. Remix)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서 M.A.N.은 Mark Ronson, Andrew Wyatt, Nick Rhodes를 말한다. 그전에 닉은 2008년 인터뷰에서 80년대는 창의성이 가득한 시대였다면서 더 큐어, 더 스미스, INXS, U2, 마돈나, 프린스와 함께 디페시 모드를 거론했다. 링크

그리고 2015년에 사이먼 르본 본인이 트위터에 등판해 I've always lovd Depeche Mode ... always!라고 멘션을 남겼다. 사이먼도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젠틀하고 소탈하게 태도가 바뀌어 현재는 거만하다는 평판은 많이 사라진 듯. 양쪽 팬들도 위에 언급된 저 일화는 그냥 웃고 넘어가는 분위기인 듯하다. 실제로 양쪽 다 덕질하는 팬들도 많은 편이다.
국내 언론에는 좀처럼 등장할 일이 없는 밴드이지만 평창 동계올림픽 기사 갑자기 등장한 적이 있었다. 디페시 모드의 투어 전담 마사지사가 평창동계올림픽에 온 미국 남자 아이스 하키팀의 마사지를 맡았다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영문 기사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있는데, 디페시 모드의 곡 제목을 이용한 드립들이 깨알 같다.
배우 클로에 세비니가 이들의 열성 팬이다. 클로에 세비니가 2009년에 Dave Gahan과 대담을 나눈 인터뷰 기사도 있다. 입덕 초기에 1988년에 열린 101 콘서트를 가려고 했는데, 베이비 시터 알바로 받는 돈은 티켓을 사기에 너무 부족해서 아는 남자애를 통해 티켓을 구하려 했더니 핸드잡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순진했던 그녀는 그 말이 뭔지를 몰랐는데, 친구들이 하지 말라고 해서 응하지 않았고, 결국 콘서트는 못 갔으나 그 뒤에는 콘서트를 여러 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서양판 백괴사전 언사이클로피디아에 Dave Gahan은 초능력 마법사로 분류된다 설정은 80년대 미국 애니메이션 히맨 시리즈에서 따왔는데 마이크로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다고 한다. 링크 마틴 고어는 Dave의 영혼의 형제이며 또 다른 이름은 Adora 공주라고.
80년대에는 관객들이 신발을 던지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90년대에는 공연장에서 관객이 마약 봉지를 던지기도 했다고. 링크 21세기에 들어서는 다크 초콜릿 투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링크
마틴 고어와 Dave Gahan은 열성적인 데이비드 보위 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보위가 별세했을 때 각각 자신들의 페이스북을 통해 애도 메시지를 남겼다. Dave의 페북 메시지 특히 마틴은 평소 과묵한 성격에 비춰 보면 이례적으로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독일의 인더스트리얼 밴드인 KMFDM가 'Kill Mother Fucking Depeche Mode'란 문구에서 이니셜을 따서 밴드 이름을 지었다는 루머가 있었다. 실제로 이들의 노래 'Sucks' 가사 중에 we hate Depeche Mode라는 구절이 있다. 링크 이에 대해 잡지 '스핀'의 기자가 Dave Gahan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니,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죠'라고 반응했다. 링크 그런데 KMFDM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는 그런 문구가 아니었다고 한다. 링크 본래는 Kein Mehrheit Für Die Mitleid(다수를 동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독일어 문구 이니셜이었으나, 영어권 사람들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무슨 소리냐고 자꾸 되물었고, 누군가가 Kill Mother Fucking Depeche Mode라고 하는 건 어떠냐고 장난을 쳐서 그때부터 그걸 컨셉으로 밀었다고.
2017년 슈피겔이 마틴 고어와 데이브 가안을 독점 인터뷰했을 때, 즐겨 사용하는 독일어 단어가 무엇이냐(Ihr deutsches Lieblingswort?)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마틴 고어는 샤덴프로이데, 데이브 가안은 Nein!(안 돼)라고 대답했다. 기사 링크 동영상
리믹스 곡이 엄청나게 많은 밴드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일의 전자 음악 전문 웹진 '일렉트로닉 비츠'에서 그중 베스트를 따로 선정한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링크 밴드 명칭도 그렇고, 특이한 옷차림으로 유명했던 밴드라, 이들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패션을 주제로 한 기사도 있었다.
자국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반응이 좋은 밴드이기도 하다. 오아시스 리암 갤러거우린 스페인에서 디페시 모드가 아니었어라고 할 정도. 링크 그렇다고 영국 차트에서 흥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나, 관객 동원력에서 차이가 있다. 이들의 역대급 공연으로 회자되는 로즈볼 공연만 해도 미국에서 열린 것이었는데, 자국에서 열린 단공보다 규모가 컸고, 독일에서는 아직도 그 정도 규모의 관객 동원력을 유지한다고 한다.

인기와 음악적 평가 양쪽에서 이들의 위상이 높았던 나라는 독일인데, 앞서 언급된 바처럼, 마틴 고어가 독일과 유독 인연이 깊었고, 크라프트베르크의 나라인 만큼, 키보드가 중심이 되어 첨단 장비로 다양한 사운드 실험을 하는 이들의 음악이 독일 대중들의 취향에 맞았다. 또한 원래 유럽이 테크노 계통 장르가 유독 발달한 문화권이기도 하다.
음악을 심층적으로 다룬 기사도 독일 쪽에서 많이 발견된다.
2009년 에코 어워드 시상식 무대에서 최초로 신곡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으며 링크, 컴백 발표는 매번 독일에서 하고 있다.
공산주의 독재를 겪었던 동유럽 국가에서도 꾸준히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심지어는 서방 음악이 금지되어 정식으로 음반이 들어오기 전에도 팬층이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러시아 팬들은 우리나라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러시아의 전승 기념일 5월 9일이 보컬 Dave Gahan의 생일이기도 하여 자국의 국경일인 이 날을 Dave의 날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는 이들을 배출한 도시 베이즐던의 독특한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본래는 사회주의적 비전에 따라 야심차게 설계된 신도시였으나, 의도와는 달리 실업난으로 인해 막장 환경이 되었고,[67] 템즈강의 모스크바라는 멸칭까지 붙었으나, 오히려 이런 파란만장한 지역의 역사가 창조성의 배경이 되어 다른 영국 밴드들과 차별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앞서도 언급됐듯이, 마틴 고어가 독일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도, 자국보다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요인이 됐다. 디페시 모드의 인기가 유독 높았던 서독의 영향을 받아 동독의 젊은이들이 이들의 음반을 구해서 들었는데, 감시 경찰의 눈을 피하느라, 일종의 저항 문화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링크 그래서 공산권 국가에서 이들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한다.

그 덕분에 여러 유럽 국가의 팬들이 베이즐던으로 성지순례를 하지만, 정작 그 지역에서는 반응이 시큰둥하다고 한다.[68] 팬들은 왜 이 지역에서 디페시 모드 동상을 안 세우는지 의아해 한다고. 2020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을 때, 전시실에 베이즐던이라 쓰인 간판이 붙어 있는 것과 매우 비교된다. 기사[69]
마틴 고어와 앨런 와일더는 1983년부터 인터뷰를 통해 윤리적 이유로 인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밝혔다. 구글에 자동적으로 뜨는 Dave Gahan 연관 질문을 찾아보면, Dave도 채식주의자인 것처럼 나오지만, 이는 국제채식연맹 홈페이지에서 마틴 고어의 발언을 Dave의 발언으로 잘못 인용해 와전된 것이다. 원출처에 따르면 마틴 고어의 발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틴과 앨런이 비건인 것은 아니다. 팬클럽 회지에 따르면 마틴 고어는 한때 생선도 먹지 않기로 했다가 Rock Eel을 거부할 수 없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참고로 Rock Eel은 영국의 대표음식인 피시 앤드 칩스에 들어가는 생선이다. 또한 2015년 팬과 채팅을 했을 때 피시 타코를 좋아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여전히 생선은 먹는 듯하다. 링크

앨런의 경우에는 홈페이지 Q&A를 보면, 스시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Yes, although I prefer sashimi.라고 응답한 것으로 나온다. 육사시미는 안 먹지만 사시미는 먹는다. 게다가, 이들은 육고기는 포기해도 가죽 제품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즉 어디까지나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선에서만 절제하는 것이지, 남에게 채식주의 메시지를 설파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1] 전 멤버들도 디페시 모드의 멤버로서 같이 헌액되었다 [2] 참고로 1983년 앨범에도 망치를 들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3] 영국 발음은 베이즐던이지만, 미국식 발음인 바즐던으로도 흔히 통용된다. 링크 [4] 탈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망으로 인한 것이다. [5] 2013년 이후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으나, 전 소속사 대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음반에는 계속 표기한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6] 80년대 당시 영국 아티스트 음반의 미국 배포를 담당했던 레이블이다. [7] 컬럼비아 레코드가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산하로 흡수되었다. [8] 참고로 이들의 전성기였던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앨범 활동 당시 투어는 1993년에 시작해 1994년까지 이어졌으며 공연 횟수는 총 157번이었다. [9] 이 영상에서 앤디 플레처의 발음이 디페쉬 모드에 가깝다. [10] 더페치라고 읽는 경우는 영어단어 디스패치의 어원이 프랑스어 단어인 Depeche와 같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영어식 액센트로 인해 한국인이 들었을 때 발음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11]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보이스카웃에서 쓰는 건물이라고 나온다. 아마 지역 문화 시설 같은 개념인 듯. 링크 [12] 멤버들이 화나 있었다고 위에 언급한 다큐멘터리에서 빈스가 말하는 부분이 있다. [13] 참고로 BDSM을 비롯한 서구권의 페티시 클럽은 불상사 예방 차원에서 사전에 룰을 고지하고 이를 준수할 것을 의무화하는데, 그중에는 모르는 사람과 동의 없는 신체 접촉을 하지 말라는 것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할 것. [14] 참고로 사이트만 들어가 봐도 하이틴 타깃 잡지임을 알 수 있다. 링크 여담으로 방탄소년단 기사를 따로 모아 놓은 페이지도 있다. 링크 즉, 이 잡지에서 주로 다루는 대상이 십대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돌 스타라는 얘기다. 그리고 방탄소년단에 대한 검증도 안 된 루머를 여과 없이 보도하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찌라시임을 알 수 있다. [15] 흔히 해외 가수의 인기를 말할 때는 미국, 영국 차트 위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1집부터 3집까지 앨범 차트 탑텐을 차지하며 미국 시장을 석권했던 듀란 듀란도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탑텐에 들지 못했다. 데뷔 앨범은 그래도 독일 차트에서 22위를 차지했으나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2집 <Rio>는 독일 차트에 아예 오르지도 못했다. 또한 프랑스의 경우 1집과 2집은 아예 차트인도 못했고, 3집이 비로소 20위에 들었다. 그리고 <Black Celebration>앨범과 같은 해에 나온 <Notorious> 앨범은 프랑스에서 30위를 차지했다. 링크 즉, 독일, 프랑스로 한정하자면 이때 디페시 모드의 인기가 듀란 듀란을 앞지른 것이다. 다만, 듀란 듀란의 경우 이탈리아에서 유독 인기가 높았고, 상업적으로 실패했다는 앨범도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차트인을 했다. 이처럼 유럽 각국의 특성이 뚜렸했기 때문에 미국 시장에서 실패했을지라도 인기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 흔히들 차트 경쟁이 치열했던 80년대가 빌보드 차트가 공신력이 있었던 시대라고들 하지만, 실제 판매 자료 없이 전화 문의에 의존했던 80년대야말로 차트 조작이 쉬웠던 시대였다고 한다. 다만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의혹 제기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닐슨 사운드 스캔 집계 방식이 도입되자 비로소 차트 주작 의혹이 등장했다. 일례로 폴라 압둘의 90년대 빌보드 핫 100 1위 곡인 The Promise of a New Day는 실제 판매량에 비해 차트 순위가 너무 높다는 의혹이 있었다. 물론 21세기에도 빌보드 차트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과거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집계하지 않고, 중복 집계를 걸러서 집계하므로, 현재 논란의 대부분은 자료 조작이 아니라, 음원 헐값 판매나 다른 상품에 끼워 팔기 같은 상술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얼터너티브 록의 시대인 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차트의 공신력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절 록 마니아들의 록부심이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17] 그런데 Dave는 이미 청소년 시절 약물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서구권에서는 합법적인 의약품인 암페타민을 오락용으로 복용했었는데, 17세에 어떤 약물을 암페타민인 줄 알고 복용했다가 구토를 했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약물은 헤로인이었는데 순도가 낮은 불량품이어서 그랬는지, 중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후 공포를 느껴 불법 약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20대 중반까지는 나름대로 건실한 청년으로 살았었다. 하지만 90년대에 순도가 높은 헤로인이 암시장에 풀리자, 헤로인을 흡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당시 불륜 상대였던 여성이 이런 방식으로 헤로인을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다가 중독되었다. 17세 때 우연히 접한 불량품 헤로인과는 달리 처음부터 부작용 없이 너무나 잘 받아서 주변 약쟁이의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복용했다고(...). [18] 여담으로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앨범 시절 약친구였던 프라이멀 스크림의 바비 길레스피도 데이브의 마약 남용에 기겁하며 약을 끊어 버렸다고 한다. [19] 훗날, 60~70년대에 출생한 영국 정치인들이 정부 요직을 맡은 후, 젊은 시절 마약 투약 흑역사가 뒤늦게 드러나 빈축을 샀는데 이들이 했던 마약은 무려 코카인, 아편으로, 그나마 소프트 드러그로 분류되는 엑스터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마약이었다. 그리고 보리스 존슨 총리는 코카인은 흡입했으나 재채기를 해서 몸에 흡수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링크 이는 서구권에선 엑스터시를 마약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래서 마약 중에서 최고로 쎈 헤로인에 중독된 Dave만 약쟁이로 인식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뒤늦게 클럽에서 엑스터시가 유행하여 신종 마약 문제가 심각했다고 대서특필했지만, 본고장에선 이미 구종 마약이었다. [20] 결국 데이브를 위해 고용했던 심리 치료사는 다른 멤버와 스태프들을 상담해 주게 되었다. 링크 [21] 이 사진은 Old Mission San Luis Rey의 대기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다. 물론 미사를 보는 장소에서는 멤버 모두 경건한 자세로 촬영했다. 여담으로 저 사진에 등장한 벤치는 2009년 시점에서는 버려진 나무를 재활용한 벤치로 대체되어 있다. 데이브가 깔고 앉아서 망가진 게 아니다. 링크 [22] 여담으로 80년대 초중반 영국 뉴웨이브 씬에서도 나름 마약 문제가 심각했다. 컬쳐 클럽의 보이 조지는 1986년에 헤로인 중독 사실이 발각되어 치료를 받았고 이는 그룹 해체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 듀란 듀란의 경우는 비교적 상황이 양호했지만, 이들이 코카인을 즐긴다는 루머가 돌아다녔고, 이는 훗날 멤버들의 고백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같은 시기 디페시 모드는 이러한 일에 휘말리지 않았다. [23] 이때 기자가 이 말을 한 데이브의 얼굴에 늑대 같은 미소가 번졌다고 묘사를 했는데, 사실 기자는 디페시 모드의 진성 덕후였다. 훗날 더 가디언으로 이직한 기자는 디페시 모드 데뷔 40주년 기사에서 일부러 팬심을 숨겼다고 회고했다. 링크 [24] 80년대 후반에 Bomb The Bass라는 예명으로 음악 활동을 펼쳐 댄스음악계에서 명성을 쌓았다. 성공한 디페시 모드 덕후이기도 하다. 2016년부터 음악계에서 은퇴하고 프라하에서 미트볼 가게를 운영했다. 링크 [25] 참고로, 당시 사건 보도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미 1995년에 호텔에서 자살을 시도한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두 사건을 뒤섞어 기억한 경우도 있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약물에 연루된 뮤지션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기자가 정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자잘한 오류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 세부적으로는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참고로, 2013년 앨범 <Delta Machine>의 라이선스반 해설지도 몇몇 외신의 영향을 받아 저런 식으로 잘못된 정보가 있었다. 다만, 해설지를 맡은 불싸조의 한상철이 뮤지션 출신이라, 음악 정보를 알차고 깔끔하게 정리한 부분은 읽을 만하다. [26] 당시 같이 거론된 인물들은 스매싱 펌킨스종신 드러머 지미 체임벌린, 스톤 템플 파일럿츠의 보컬인 스콧 웨일런드, 앨리스 인 체인스의 레인 스탤리,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다들 하나같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었다(...). 링크 그리고 그중 지금까지 멀쩡하게 활동하는 인물은 지미 체임벌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뿐이며, 스콧 웨일런드와 레인 스탤리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27] 앞서 각주에 언급된 뉴스위크 기사는 한국판에도 실렸는데, 여러 사건을 축약했기 때문에 두루뭉술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스콧 웨일런드, 지미 체임벌린, Dave Gahan 모두 무죄를 주장했다(All three pleaded not guilty)고 언급된 부분인데, 마약 복용 무죄를 주장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저 당시 TV 보도를 보면 취재진 앞에서 마약 복용을 사과하는 Dave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보통, 뮤지션들이 이런 사건으로 걸리면, 경찰은 현장에 발견된 마약의 분량을 1회 사용량으로 나눠 계산한 후, 혼자서 먹기에 좀 많다 싶으면 거래, 교부 혐의까지 적용하러 하는데, 사건이 법정으로 가면 판사는 피고인들을 그냥 중독자로 보고 재활 치료를 명령하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보통 마약 몇 명분이라 나오는 것은 마약 초보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만성적인 중독자이면 당연히 복용량이나 횟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도 이런 케이스에 따라 재활 치료를 명령받았다. [28] 원래는 아들을 만날 때만큼은 약을 하지 않았으나, 마약류 중에서도 내성이 심한 헤로인의 특성상, 금단증상을 막기 위해 더욱 자주 투약해야 했고, 결국, 과다복용을 하여 아들에게 들키게 된 것이다. 물론 당연히 전처는 그 이후 아들을 못 만나게 했고, 해당 인터뷰에도 언급되지만, 재활원 치료를 마친 1996년 12월에야 어렵게 허락을 받아낸다. [29] 이 기사에 등장하는 중독 상담사인 Bob Timons(Timmins, Timmons로 표기된 기사들도 있지만 정황상 동일 인물로 보인다.) 머틀리 크루의 니키 식스를 도운 사람이다. 그래서 데이브가 마약 소지죄로 체포되었을 때 소속사는 그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데이브가 마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이 사람의 공로도 컸다. Bob Timons는 정신질환으로 시설에 수감된 어머니를 둔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방황하다 마약에 빠져 학교를 중퇴했으며, 20대에는 강도죄로 수감되었는데, 이때 국선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중독 상담사가 되었다. 그에게 감화를 받은 중독 청소년 중에는 훗날 변호사가 된 이도 있었다고 한다. 2008년에 그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니키 식스는 마약을 끊고 그에게 칭찬을 들은 것이 살면서 들은 가장 다정한 말이었다면서 그를 추모했다. 링크 [30] 여담으로 이 인터뷰에서는 Dave의 전처 소생 아들이 자신의 엄마의 허락을 받고 콘서트를 보러 왔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즉 전처도 Dave의 갱생을 인정했다는 얘기다. [31] 진수식에서는 술병을 깨는 의식을 하는데, 여기서 유래된 표현이다. 진수식에서 술병이 잘 깨져야 배가 무사하다는 믿음이 있는데, 여기서 데이브는 술병을 깨고 다시는 안 마셔야 무사히 투어를 마칠 수 있다는 의미로 저런 말을 한 것이다. [32] 1979년에 데뷔한 힙합계의 전설적 그룹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들어간 힙합 아티스트이다. [33] 1982년에 발표된 이 곡은 그 전까지만 해도 파티용 음악이었던 힙합이 흑인들의 삶의 목소리를 담아 내는 음악이 될 수도 있음을 알리는 의미 있는 곡으로 평가된다. [34] 그리고 2017년에 레즈너는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Dave Gahan과 마주쳤다 한다. Q 매거진 기사 [35] 참고로 영국은 의무 교육 기간이 만 16세까지이다. [36] 산타바바라의 극장에서 서커스의 요소가 있는 극장식 댄스 쇼를 무대에 올리고 있으며 청소년 댄서 유망주들도 양성한다고 한다. 링크 [37] 여담으로 이 인터뷰에서 기자는 마틴 고어가 빈스 클라크와 컬래버를 했던 사실을 언급하는데, 마치 전 남친이랑 만난 것처럼 해석되게 중의적인 말장난을 친다.(This is a rum old do considering that in 2012 Martin hooked up with an ex, and recorded an entire album with Vince Clarke.) 근데, 사실, 디페시 모드 결성 전에는 마틴 고어가 두 밴드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중 한 밴드가 데이브의 친구가 몸담은 밴드였고, 데이브는 리허설을 하는 친구를 위해 음악 장비를 옮겨 주러 갔다가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를 불러 봤는데, 이걸 빈스 클라크가 듣고 데이브를 영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틴이 양다리를 걸친 덕분에 데이브를 영입할 수 있었다. [38] 해외 사이트에선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이 부계 쪽 조상이라 나온다. 나무위키의 말레이시아 문서에도 나오듯이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민족 중에는 인도계도 있다. [39] 생부의 사망 시기는 아들이 Enjoy the Silence의 히트로 정상에 오른 직후였다. [40] 훗날 1997년 Q 매거진 3월호 인터뷰를 통해 그 시절 일을 적나라하게 털어놨었는데, 1994년 연말에 자신의 어머니와 전처 소생 첫아들이 오랜 만에 자기를 보러 집에 찾아온 날에도 마약을 하다 기절했었고, 깨어난 후에도 마약 주사기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어머니와 7살 난 아들의 진심 어린 위로에 뉘우치고 재활원에 들어갔지만 나오자마자 재발했었다. 아들이 인생 2회차 [41] 참고로 이와 아주 비슷한 일이 이미 9년 전에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머틀리 크루의 니키 식스 관련 내용을 참조할 것. 이 때문에 지금도 해외 음악계에서 이들의 사례가 죽었다가 살아난 뮤지션들의 사례로 같이 묶여서 회자된다. [42] 현재 사이트가 중국으로 넘어가서 과거 화면 캡쳐로 대신함. [43] 참고로 영국의 과거 건축물 지붕은 납으로 만든 판자를 올려 만들었는데, 21세기에도 이런 건축물의 지붕을 벗겨 가는 도둑들이 있다고 한다. 기사 여담으로, 노트르담 대성당도 납지붕을 올린 건축물이라, 화재 사건 당시 주변의 대기가 으로 오염되었다고 한다. 링크 그래서 대신 티타늄 같은 친환경 자재를 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전통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영국에서 납 지붕 절도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도 사실은 유적 보호법 때문에 매번 전통 그대로 복원해야만 해서 생기는 문제다. 알고 보니 유해 건축 자재를 알아서 제거해 주는 의적이었다. [44] 2번째 부인은 원래 디페시 모드의 미국 쪽 홍보 담당자였다. 그래서 1988년 로즈볼 콘서트를 다룬 다큐 영화 <101>에도 등장했다. 이 시점부터 불륜이 시작되어 별거로 이어졌고, 미국으로 이주해 1992년에 결혼식을 올리는데, 결혼 선물로 흡연용 헤로인을 받았다고 한다(...) 앤디 플레처는 평소 이 여성을 탐탁치 않게 여겨서 그 여자의 이상형은 약에 쩔어 삐쩍 꼴은 남자인데, Dave도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디스했다. 링크 같은 기사에서는 이 여성이 Dave와 결혼하기 이전엔 건즈 앤 로지즈의 드러머였던 스티븐 애들러와 동거한 경험이 있다 언급되는데, 스티븐 애들러도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다. 다만 Dave는 자신이 마약을 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두 번째 부인이 자신을 마약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Dave의 설명에 따르면 두 번째 부인은 살짝 손을 댄 수준이었는데, 자신이 더 깊이 빠져 부인을 비참한 지경에 빠트렸기에 부인이 자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름 죄책감을 드러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45] 뉴욕 대학교 동문회 블로그 내용에 따르면, 본래 저널리즘이 주전공, 정치가 부전공이었으며, 졸업 후 다큐멘터리 관련 일을 했다고 한다. [46] 현재 블로그가 폐쇄되어 아카이브로 대체 [47] Dave가 잠시 머물렀던 애리조나의 재활원에서 만났는데, 훗날 Dave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현 부인은 그곳에 다른 이유로 왔었다고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재활원에서 만난 동료 환자라는 억측이 난무했기에 해명한 듯. 동문회 블로그에 육아와 학업을 병행했고,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환자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약 저 시기에 재활원에 입소했다면 다른 걸 떠나서 양육권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48] 그도 그럴 것이, 현 부인은 원래 재즈 마니아로, 빌리 홀리데이, 존 콜트레인이 활동했던 시절 음악이 관심사였다. 나중에 연인 사이가 되었을 때,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시절 장발의 Dave가 나온 잡지 사진을 보고 이 사람 누구야?라고 했는데, Dave는 그 순간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링크 참고로 부인과 교제할 당시의 Dave는 긴 머리를 자르고 과거의 깔끔한 스타일로 돌아왔다. [49] 참고로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언급되지만 영국에서 college라는 단어는 16세까지 의무 교육을 마친 후 대학 입시 준비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가는 2년제 교육기관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대학교 개념이라,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학력 위조를 했다고 오해하기도. 링크 [50] 가운데 네모칸 중에서 가장 오른쪽에 마우스를 대면 나온다. [51] 사실 디페시 모드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에섹스이다. 영어권 사람들이 느끼기에 에섹스 사람들이 구사하는 영어는 에섹스 특유의 액센트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방에서 결성된 밴드의 유일한 서울 출신 멤버 같은 위치인 듯. [52] 7년제 대학입시 대비 인문계 중등학교를 말한다. [53] 앨런의 말에 따르면 약만 안 하면 Dave는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과거 Dave의 마약중독에 대해 도덕적인 이유로 비난하지 않고, 마약 때문에 본래의 좋은 성격을 잃어버린 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54] 앨런이 디페시 모드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전 뉴비였던 Dave와 가장 친했다는 얘기도 있다. 디페시 모드의 전신인 컴퍼지션 오브 사운드 멤버들이 영입한 게 Dave였으니 어찌 보면 뉴비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링크 [55] 홈피 곳곳을 보면 앨런이 언론을 얼마나 극혐하는지를 알 수 있다. 여담으로 해외에 출간된 디페시 모드 전기 <Stpipped>에 인용된 내용을 보면 1993년 투어 당시 NME 기자가 유독 앨런을 공격하는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에 앨런이 조목조목 반박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NME 기사는 앨런에게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수위가 센 내용이었다. 또한, 같은 시기 Q 매거진 인터뷰를 보면, 기자가 앨런과도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앨런이 거절했고, 멤버들도 앨런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기로 했다고 나온다. 링크 교차검증을 해 보자면 정황상 기레기의 농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56] 참고로 같은 시기 활동한 듀란 듀란도 팝밴드로 분류됐다. 그리고 이는 듀란 듀란이 신나게 까였던 주요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듀란 듀란도 장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디페시 모드와 비슷하다. 80년대 당시 두 밴드의 사이는 사이먼 르 봉의 어그로로 인해 그리 좋지 않았지만, 듀란 듀란의 닉 로즈가 디페시 모드의 대표곡 'Personal Jusus'를 디페시 모드 데뷔 30주년이 되는 해에 정식으로 리믹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공통점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57] 이는 지미 페이지가 신시사이저가 중심인 밴드를 극혐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인스타에서 신스팝 전성기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58] 빅스의 <다칠 준비가 돼 있어> 라든가 블락비의 <Toy> 등이 이런 계열이다. 심지어 빅스는 <Chained UP> 활동 시 노예 콘셉트를 내세우기도 했다. [59] 여담으로 앨런 와일더의 말에 따르면, 그 이후 마틴은 껍데기에서 나와 클럽과 바를 찾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이때부터 마틴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고 한다. 당시 마틴의 술버릇은 옷을 벗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지인들끼리만 어울리는 프라이빗한 술자리라 문제가 되진 않았다. 참고로 마틴은 원래 나체 수면을 즐겼다. 공교롭게도 마틴이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는 나체족이었다. [60] 사실, 기독교를 인정하느냐와는 별개로, 예수님은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오래 전부터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즉 기독교 반대≠예수 혐오가 결코 아니다. [61] 정황상 부두교의 정령인 로아를 표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로아는 인간과 신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정령으로, 아프리카에 기독교가 전래되자, 흑인들은 가톨릭의 수호성인들을 로아로 해석했고, 성모 마리아는 미를 담당하는 여성 로아로 해석했다. 뮤비에서 모델 같은 미지의 존재가 나오는 것은 이 여성 로아를 감독이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62] 비요크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2014년 수술 합병증으로 타계 [63] 2018년에도 후보에 들었으나, 이 시상식에서 수상한 힙합 그룹이 나치를 찬양하는 병크를 저질러 시상식 자체가 없어졌다. 즉, 디페시 모드가 후보로 들어간 마지막 연도인 것이다. 이후 대안 시상식을 만든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흐지부지 된 듯하다. [64] Jonathan Kessler는 독립적으로 사무실을 꾸려 여러 가수들의 업무를 맡고 있는데 그가 담당한 뮤지션 중엔 위켄드도 있다. 보컬 Dave Gahan의 절친이기도 하며, 그가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17년에는 Artist & Manager Awards에서 상을 받았다. 링크 [65] 디페시 모드 데뷔 초에는 듀란 듀란, 스팬다우 발레 같은 뉴 웨이브 밴드와 같이 묶여서 거론됐었다. 문제는 애초에 이들의 음악적 성향이 각각 다름에도, 단지 예쁘게 치장하고 나와서 노래부른다는 이유로 같은 카테고리에 묶였다는 것이다. 링크 당시 마틴 고어는 자신들의 사진이 멋지지 않아서 결코 듀란 듀란처럼 될 수 없다고 셀프 디스를 했다. 이처럼 뉴로맨틱스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음악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외모에 주목한 것이어서, 당시 스매시 히츠 같은 십대 잡지에선 음악에 대한 질문은 없고, 양말은 뭐 신느냐 같은 질문들만 나왔다 한다. 이런 상황에 질려서 결국 빈스 클라크는 탈퇴한다. 하지만 빈스 클라크 탈퇴 후에도 멤버들은 난감한 상황을 겪어야 했는데, 앞서 언급된 닭 방송처럼 예능 쪽을 계속 돌다 보니,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만 인식이 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게 영국에서 디페시 모드가 진지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원인이기도 하다. [66] 아마 사이먼이 데이브가 디페시 모드 보컬인 걸 모르고 뒷담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암튼 당시 충격 먹은 데이브는 이 일을 20여 년이 흐른 후에도 잊지 못하고 방송에서 언급한 것이다. [67] 1970년대 당시엔 베이즐던 사람은 훔친 차를 타고 교회에 간다는 지역 드립까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저렇지 않으니 무슨 슬럼가를 생각하면 안 된다. [68] 일단, 해외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베이즐던의 치안이나 경제적 상황이 많이 개선되었다는 방증이기는 하지만, 영국 내에서 베이즐던은 공업도시일 뿐, 관광지로는 인식되지 않아서 외국인이 베이즐던을 찾는다고 하면 현지인들이 의아해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해외 케이팝 팬들이 방송국 많은 서울에 안 오고 경기도 외곽 신도시를 찾아온 것처럼 뭔가 생뚱맞은 느낌인 듯. [69] 참고로 기사에 달린 현지 주민의 댓글에 따르면, 디페시 모드 같은 사례는 지극히 예외적이었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이 이 지역의 음악 역사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디페시 모드 같은 인재가 배출될 수 있도록 새로운 문화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