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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3:45:00

더 스미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0;"

마이크 조이스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373a3c,#373a3c {{{#!folding [ Studio Albums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tablewidth=100%>

1984

1985

1986

1987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373a3c,#373a3c {{{#!folding [ Compilation Albums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84

1987

1987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373a3c,#373a3c {{{#!folding [ Singles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Hand in Glove
1983
This Charming Man
1983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1984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
1984
William, It Was Really Nothing
1984
How Soon Is Now?
1985
Shakespeare's Sister
1985
Barbarism Begins at Home
1985
The Headmaster Ritual
1985
That Joke Isn't Funny Anymore
1985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
1985
Bigmouth Strikes Again
1986
Some Girls Are Bigger Than Others
1986
Panic
1986
Ask
1986
Shoplifters of the World Unite
1987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
1987
Sheila Take a Bow
1987
Girlfriend in a Coma
1987
I Started Something I Couldn't Finish
1987
Last Night I Dreamt That Somebody Loved Me
1987
Stop Me If You Think You've Heard This Before
1987
Sweet and Tender Hooligan
1995
}}}}}}}}}}}}}}}}}} ||

더 스미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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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vening_Standard_logo_투명.png
이브닝 스탠더드 선정 20대 영국 록 밴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25deg, #1D1D1B, #1D1D1B 20%, #1D1D1B 83.9%, #DD052B 83.9%); color:#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rowcolor=#000,#fff> 2019년 영국의 일간지 이브닝 스탠더드 The 20 greatest British rock bands of all time를 발표.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레드 제플린 라디오헤드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스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더 스미스 오아시스 더 큐어 더 클래시 스톤 로지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킹크스 블러 블랙 사바스 더 후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록시 뮤직 티렉스 더 잼 슈퍼 퍼리 애니멀즈 조이 디비전
같이 보기: 영국 밴드, 미국 밴드
}}}
}}}}}} ||

파일:D35299F0-A94E-4256-858A-16C852ABB793.png 파일:Acclaimed-Music-Logo-Dark.png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어클레임드 뮤직의 올타임 아티스트 순위. 기본적으로 역사상의 앨범/노래의 순위를 매기는 형식의 사이트이지만, 개인의 취향을 모두 배제하고 음악 평론가들, 또는 잡지 등의 매체들이 매긴 순위를 종합해서 포인트를 줘서 순위를 매기는 사이트다. 순위가 매겨진 앨범과 곡의 리스트를 공개된 공식을 바탕으로 합해 올타임 아티스트들의 순위도 매긴다.
<rowcolor=#fff>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밥 딜런 롤링 스톤스 데이비드 보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rowcolor=#fff>6위 7위 8위 9위 10위
라디오헤드 레드 제플린 닐 영 프린스 비치 보이스
<rowcolor=#fff>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R.E.M. 엘비스 프레슬리 칸예 웨스트 더 후 U2
<rowcolor=#fff>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일스 데이비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너바나 더 클래시 지미 헨드릭스
<rowcolor=#fff>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마빈 게이 핑크 플로이드 엘비스 코스텔로 스티비 원더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
<rowcolor=#fff>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마돈나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더 스미스 마이클 잭슨 밴 모리슨
<rowcolor=#fff>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토킹 헤즈 켄드릭 라마 아케이드 파이어 아레사 프랭클린 비요크
<rowcolor=#fff>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JAY-Z 제임스 브라운 톰 웨이츠 존 콜트레인 PJ 하비
<rowcolor=#fff>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킹크스 퍼블릭 에너미 버즈 비스티 보이즈 조니 미첼
<rowcolor=#fff>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벡 한센 더 큐어 존 레논 도어즈 LCD 사운드시스템
<rowcolor=#fff>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블러 크라프트베르크 레너드 코헨 픽시즈 루 리드
<rowcolor=#fff>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조니 캐쉬 소닉 유스 록시 뮤직 오아시스 플리트우드 맥
<rowcolor=#fff>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듀크 엘링턴 더 밴드 아웃캐스트 다프트 펑크
<rowcolor=#fff>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사이먼 앤 가펑클 프랭크 시나트라 척 베리 프랭크 오션 비욘세
<rowcolor=#fff>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조이 디비전 AC/DC 윌코 오티스 레딩
<rowcolor=#fff>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뉴 오더 메탈리카 화이트 스트라입스 라몬즈 더 폴리스
<rowcolor=#fff>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스투지스 브라이언 이노 엘튼 존 뱀파이어 위켄드
<rowcolor=#fff>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섹스 피스톨즈 매시브 어택 레이 찰스 스틸리 댄 블랙 사바스
<rowcolor=#fff>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케이트 부시 악틱 몽키즈 찰스 밍거스 패티 스미스 포티스헤드
<rowcolor=#fff>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건즈 앤 로지스 페이브먼트 수프얀 스티븐스 알 그린 펑카델릭
101위 ~ 4112위: 공식 사이트 }}}}}}}}}

파일:D35299F0-A94E-4256-858A-16C852ABB793.png 파일:Acclaimed-Music-Logo-Dark.png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80년대 최고 아티스트
<rowcolor=#000,#fff>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5px"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프린스 더 스미스 U2 브루스 스프링스틴 R.E.M.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돈나 마이클 잭슨 더 큐어 픽시즈 토킹 헤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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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me500album.jpg
NME 선정 500대 명반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02D35> 1위 2위 3위 4위 5위
파일:The Queen Is Dead.jpg
파일:91AL-aLarsL._SL1500_.jpg
파일:Hunky Dory.jpg
파일:external/1.bp.blogspot.com/is_this_it.jpg
파일:attachment/velvet_underground_nico_cover.jpg
더 스미스 비틀즈 데이비드 보위 스트록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The Queen Is Dead Revolver Hunky Dory Is This It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rowcolor=#F02D35> 6위 7위 8위 9위 10위
파일:different class-1995.jpg
파일:external/fanart.tv/the-stone-roses-4e3e320e50858.jpg
파일:Doolittle.jpg
파일:beatles_1968_transparent.png
파일:external/images-na.ssl-images-amazon.com/61-8CEFlawL.jpg
펄프 스톤 로지스 픽시즈 비틀즈 오아시스
Different Class The Stone Roses Doolittle The Beatles Definitely Maybe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f> 파일:The_Smiths_(Logo).png 더 스미스
The Smiths
}}}
파일:GettyImages-1174272681_the_smiths_2000.jpg
▲왼쪽부터 조니 마 모리세이 • 마이크 조이스 • 앤디 루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다른 사진 보기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스미스2.gif
5인조로 투어 당시, 모리세이 / 앤디 루크 / 조니 마 / 크레이그 개넌 (객원 멤버[1]) / 마이크 조이스 }}}}}}}}}
<colbgcolor=#fff><colcolor=#000>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결성 1982년
잉글랜드 맨체스터
데뷔 1983년 5월 13일
싱글 Hand in Glove
데뷔 앨범
해체 1987년 6월
멤버 모리세이 (보컬)
조니 마 (기타)
앤디 루크 (베이스)
마이크 조이스 (드럼)
장르 쟁글 팝, 인디 팝, 포스트 펑크, 인디 록
레이블 러프 트레이드 레코드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스포티파이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결성2.2. 활동2.3. 해체
3. 해체 이후4. 영향력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5.2. 라이브 앨범5.3. 컴필레이션 앨범
5.3.1. 활동기간 중 발매
5.4. 싱글
6. 여담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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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547787393.jpg }}}||
비틀즈 이래로 어떠한 영국 그룹보다 많은 영향을 불러 일으킨 밴드.
BBC, 2013년 #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로, 조니 마의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2] 모리세이 사춘기 정서가 넘치는 가사로[3] 1980년대 영국 록씬을 주름잡았다. 그리고 여타 레전드 밴드들과는 다르게 단 한번도 재결성을 한 적이 없다. 모리세이의 강경한 태도로 봤을 때 재결합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들은 단 5년 정도의 활동 기간으로 다른 유명 밴드들에 비해 단명하였으나,[4] 이 기간 동안 80년대 영국의 인디씬을 강타했으며 후대의 브릿팝과 인디 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오아시스 블러에게 영향을 끼친 건 물론, 현재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까지 스미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의 영향력을 쉽게 설명하면 인디 록 힙스터 문화가 유행하기 이전에 그걸 구현했던 밴드가 더 스미스다.

스미스의 베스트 앨범은 꽤 많이 나왔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2008년 조니 마가 직접 리마스터링하고 모리세이가 타이틀을 지은 'The Sound of the Smiths'. 입문용으로 적당하고 호평이 많다. 2012년 전 앨범이 리마스터링되어 재발매되었다.

2010년대 들어서 조니 마는 과거 태도와 달리 앤디 루크와 종종 협연하기도 하였다. # 비록 스미스 재결합에는 회의적이지만 스미스 시절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건지 스미스 곡을 연주하고 노래도 그냥 자기가 직접 부른다. 모리세이도 물론 백업 밴드와 함께 스미스 곡을 부른다. 조니 마 공연 실황에는 '노래를 모리세이가 불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댓글이 달리고 모리세이 공연 실황에는 '저 백업 밴드 치우고 조니 마를 데려와라'는 댓글이 달린다. 노엘 갤러거도 딱 이런 요지로 스미스 재결합을 언급한 적이 있다. #

2014년, 2015년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스미스가 미국에서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인지도가 없는 만큼 헌액까지는 시간이 걸리지 않겠냐는 게 중론.

2024년 9월, 16일, 모리세이는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조니 마가 "더 스미스" 이름의 소유권과 지적 재산권을 단독으로 취득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로써 조니 마는 공식적으로 "더 스미스"의 활동이나 투어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며 조니 마가 자신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이러한 권리를 취득한 것을 비난하였다.

이에 조니 마가 성명문을 냈는데 글을 요약하자면 조니 마는 본래 모리세이하고 같이 스미스 상표권을 등록하려고 했으나 모리세이가 응답이 없자 조니 마 본인의 이름으로 상표권을 등록할 수 밖에 없었으며 2024년 모리세이의 변호사들과 합의 후 상표권을 공동 소유로 남겼기 때문에 효력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모리세이의 서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조니 마가 모리세이가 아닌 다른 보컬리스트와 함께 스미스로 투어를 돌 것이라는 루머도 명백한 허위사실이라고 밝혔다.

2. 역사

2002년 다큐멘터리

2.1. 결성

집에 틀어박혀서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딘에 몰두하며 시와 평론을 쓰고 그것을 틈틈이 잡지에 발표하던 모리세이를 눈여겨 본 조니 마가 1982년 봄, 모리세이의 집에 쳐들어가서 같이 작사-작곡 콤비[5][6]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7]

마는 집에만 있는 모리세이와 친해지기 위해 모리세이의 지인인 스티븐 폼프릿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와 모리세이의 집에 갈 수 있었다. 폼프릿은 모리세이가 조니 마에게 아무 관심도 없을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모리세이와 조니 마는 음악 취향에 공통점이 아주 많았는데, 둘은 펑크 DIY적인 태도에 빠져 있었고 걸그룹 로커빌리 음악의 열성적인 팬이었다. 조니 마가 자서전에 묘사하기를, 모리세이는 마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좋아하는 싱글을 틀어보라고 했는데, 마는 60년대 걸그룹 The Marvelettes의 싱글 'You're The One'를 골랐고 그에 모리세이는 "Good choice."라고 얘기했다. 마는 그 싱글의 B-Side인 'Paperboy'을 틀었고 그걸 좋아한다는 표시로 따라 불렀다. 그리고 모리세이 역시 B-Side에 있는 곡을 더 좋아했다.[8] 폼프릿에 따르면 모리세이를 만나고 오는 길에 조니 마는 단 한마디 말만 했다고 한다. "이건 미래야."라고. 대박을 직감한것. 이들은 곧바로 더 폴의 드러머인 사이먼 울스텐크로프트의 도움을 받아 함께 첫 데모를 제작하였다.

가을이 되자 두 사람은 밴드 이름을 더 스미스로 정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프랭키 고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9] 같은 긴 이름에 대항하여 간단하게 지었다고 한다.[10] 그리고 베이시스트 앤디 루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11]를 영입한다.[12] 이후 모리세이와 마는 지난 해부터 틈틈히 만들어 놓은 곡을 가지고 데모를 제작하나 조이 디비전을 배출한 맨체스터 음반사 팩토리 레코드와의 계약은 불발되었다. 이와 관련해 모리세이는 2013년 자서전에서 팩토리 레코드의 사장인 토니 윌슨이 버즈(The Byrds) 노래 들고 장난치지 말라고 한 소리 했다고 주장했다. #[13]

하지만 토니 윌슨은 다른 주장을 했는데, 당시는 레이블 설립 3년차였으며 뉴 오더 Blue Monday가 히트하기 전으로, 레이블의 상황이 너무 나빴기 때문에 스티븐(모리세이)과 그의 훌륭한 밴드가 다른 레이블에 가길 바랐다고. # 또한 윌슨에 따르면, 팩토리 레코드의 또다른 사장인 Rob 또한 스미스를 좋아했고 스미스가 제2의 비틀즈라고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닌 사람이었지만 정작 Rob이 들은 스미스의 데모가 끔찍하게 구려서 계약을 거절했다며, 괜찮은 데모를 가져오면 계약을 맺었을 것이라 덧붙였다. #

이후 행동력 있던 조니 마가 데모를 가지고 상경해 런던의 인디 레이블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에 쳐들어가서 몇 시간을 기다려 사장 제프 트래비스를 만난다. 마는 트래비스를 만나자마자 "이런 거 어디서도 못 들어봤을 겁니다."라며 데모를 건네줬다고. # 스미스는 데모를 좋게 들은 러프 트레이드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14]

2.2. 활동

스미스는 1983년 < Hand in Glove>를 싱글로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하였고 언더그라운드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데뷔 싱글은 영국 인디 차트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주간 음악 잡지들도 이들의 등장을 찬사했다. 전작의 성공에 이어서 두 번째 싱글 < This Charming Man>도 성공을 거두어서 영국 인디 차트에선 1위를 차지하고, 영국 싱글 차트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그 직후 스미스는 'The Tube'를 통해 방송에 데뷔했고 ' 탑 오브 더 팝스[15]'에 출연 #[16]하여 영국의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세 번째 싱글 < What Difference Does It Make?>의 영국 싱글 차트 12위 기록에 힘입어 전국적인 지명도를 확보했다.

1984년 2월, 밴드는 데뷔 앨범 < The Smiths>를 발표하여 영국 앨범 차트 2위까지 오르는 대박을 터뜨렸다.[17] 스미스는 무명시절이 없이 등장하자마자 대중들과 평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모리세이는 훗날 이것에 대해 "우린 성공을 위해 준비(preparation)는 했지만 결코 노력(effort)을 할 필요는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그 해 말에는 BBC 라디오에서의 라이브와 싱글 B-side 곡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 Hatful of Hollow>[18]를 발표했고 그 해 글래스톤버리 페스티벌 피라미드 스테이지의 헤드라이너로 섰다. 스미스 공연 중 무대 위로 난입하는 관객들[19]

1985년 2월, 비건계 채식주의자 조니 마 모리세이의 주관이 확실히 드러난 앨범인 2집 < Meat Is Murder>[20]를 발표하면서 기어이 영국 앨범 차트 1위에 오른다. 그해 말에는 밴드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3집 < The Queen Is Dead>의 녹음을 끝냈다.[21] 그러나, 앨범은 러프 트레이드 사와의 갈등[22]으로 인해 1986년 7월에 발매되었고,[23] 앨범 발표 직후에는 베이시스트 앤디 루크가 헤로인 중독으로 인해 밴드에서 해고[24] 당했다가 복귀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때 크레익 개넌(Craig Gannon)이 임시로 베이시스트를 맡았고 1986년 말, 앤디 루크가 다시 밴드에 복귀한 이후에는 투어의 리듬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25]

이러한 문제들 속에서도 이때가 스미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비평적으로도 < The Queen Is Dead>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데다가 대중적인 인기도 절정에 다다라 스미스는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밴드가 되어있었기 때문아다. 당시 영국에선 여자는 듀란 듀란, 남자는 스미스빠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마는 훗날에 "개인적으로는 암흑에 있었던 시기였지만 예술적으로는 최고의 것을 창조해냈던 때이다. 락앤롤은 인생을 걸만한 가치는 없는 것이지만 정말 훌륭한 것을 하고 있을 땐 가끔 그럴 가치도 있다"라고 회상했다.

한편, 밴드의 이런저런 일로 힘들어 하던 마는 3집 투어 직전 14살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 앤지 마와 결혼[26]하였는데, 이때부터 모리세이는 마가 결혼하더니 스미스 활동을 소홀히 한다면서 조니 마를 갈구기 시작하였다. 마가 다른 뮤지션들의 세션으로 참여하거나 도와주는 꼴도 못봤다.[27] 후에 조니 마가 록시 뮤직 브라이언 페리와 몰래 작업하고 그의 신곡 뮤직비디오에 나온것을 보고 모리세이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28] 또한 3집 부터 조니 마는 ES-335의 기타 사운드와 현악기를 활용하여 스미스의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넓히고 흑인 음악을 스미스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으나 모리세이는 흑인 음악의 정서는 스미스의 음악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조니 마가 작곡한 곡들 중 흑인 음악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곡들에는 노랫말을 짓기 거부하였다.[29] 마는 한창 새로운 장르의 개척, 새로운 뮤지션들과의 콜라보레이션에 대한 욕망이 큰 상태였는데 모리세이의 요구로 60년대 여자 가수들 노래나 커버[30]하고 있어야 하니 (자신이 과거에 아무리 그걸 좋아했다 하더라도) 불만이 컸다. 이로 인해 조니 마는 모리세이와의 밴드 활동에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2.3. 해체

1987년, 밴드는 메이저 레코드사인 EMI와 계약한 뒤[31] 러프 트레이드와의 마지막 앨범으로 계획했던 4번째 앨범 < Strangeways, Here We Come> 작업을 시작하고, 컴필레이션 앨범 <The World Won't Listen>과 <Louder Than Bombs>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밴드 내부 갈등은 최고조로 올라갔고 조니 마는 밴드 활동에 환멸을 느껴 투어에 불참했다. 이에 모리세이는 대체 기타리스트를 찾아 공연했고 마는 모리세이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해체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는 모리세이와의 우정이 깨지고 그와 협업하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음악과 미래에 대한 문제가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해체 직전에 이런 일도 있었다. EMI와 계약한 스미스는 본격적인 미국 진출을 위해 'Sheila Take a Bow'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뮤직비디오 촬영 당일 모리세이는 변덕을 부리며 나타나지 않았고[32] 스태프들은 당황하여 모리세이를 데리러 그의 집으로 갔다. 마는 그 모습에 "이 밴드는 끝이야"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결국, 조니 마는 밴드 활동 안팎을 돌봐야 하는 스트레스[33]와 이 사건 때문에 모리세이에게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애정마저 없어짐을 느끼며 바로 다음 달 LA로 잠적한 뒤 토킹 헤즈와 작업한다. 발빠르게 이 사실을 알게 된 NME는 조니 마가 밴드를 떠났고 스미스는 해체할 것이라는 기사를 냈는데, 마는 그 기사가 모리세이의 언론플레이라고 오해하고[34] 결국 그렇게 영영 밴드를 떠났다.

해체의 주요 원인은 스미스의 유명세 때문에 밴드 안팎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마가 팀을 떠난 것이다.[35][36] 해체 후 마는 스미스의 엔지니어에게 "오늘 아침에 기쁜 마음으로 일어날 수 있었어. 난 더이상 스미스가 아니니까."라고 했다. 모리세이는 새 기타리스트인 아이버 페리(Ivor Perry)를 영입하여 마의 공백을 메꾸고 스미스의 활동을 지속하려 얼마간 노력하였으나 그는 마처럼 모리세이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결국 모리세이와의 갈등 끝에 곡 작업 도중 스튜디오를 뛰쳐나갔다. 모리세이는 스미스를 지속하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 Strangeways, Here We Come> 발매 직후 스미스 해체를 공식 발표했다.

갑작스런 해체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리암 갤러거에 따르면 스미스가 해체를 발표한 날 맨체스터 사람들은 '목 잘린 '처럼 어쩔줄 모르며 서성댔다고. 해체 직후 덴버의 라디오 방송국에는 스미스 팬이 난입해 DJ에게 총을 겨누고 스미스 노래를 계속 틀도록 협박해서 결국 5시간 동안 스미스 노래를 튼 사건[37]도 있었다.

3. 해체 이후

3.1. 모리세이

더 스미스가 해체된 후 모리세이는 왕성한 솔로 활동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1988년 작 < Viva Hate>와 1992년 작 <Your Arsenal>, 1994년 작 <Vauxhall & I>, 2004년 작 < You Are the Quarry>가 있다. 2002년부터는 할리우드로 이주해서 활동하고 있으며, 앨범을 엄청나게 많이 팔지는 않지만 현재도 일단 발매하면 영국 차트에서는 5위권 내이고 빌보드 200에서도 10위권 초반안에는 든다. 라이브 투어는 굉장히 인기가 많아서 LA에서는 아레나 공연임에도 늘 매진이고 다른 지역 투어도 꾸준히 다닌다. 특히 LA 멕시코에서 인기가 대단하다. 드물게 미국에서 성공한 영국 뮤지션.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히스패닉 청소년들이 모리세이의 음악을 접하면서 모리세이가 쓴 가사를 자신들의 비참한 생활에 감정이입하여 모리세이 열풍이 일었고, 미국에서 모리세이의 음악이 재발견되었으며, 이에 힘입어 모리세이는 남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히스패닉들은 모리세이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데 이 때문에 2000년대 이후 미국 대중 문화에서 히스패닉=모리세이 팬이라는 클리셰가 정착됐다.[38] 최근 모리세이의 주요 팬층을 차지하고 있는 히스패닉 마초적인 정서를 가진 이들이 많고 모리세이에게는 열광하지만 스미스나 영국 록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모리세이는 인터뷰에서 "내가 솔로 활동을 시작한지 한참이 됐어도 사람들은 항상 스미스 시절만 생각한다."면서 불만을 드러낸 적이 여러번 있었는데 히스패닉으로 대표되는 미국에서 새로 생긴 모리세이의 팬층은 스미스 시절의 과거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모리세이는 그들을 매우 각별하게 여기고 있는 듯 하다.

모리세이는 인기에 걸맞게 락스타로서 모든걸 누리며 산다. 요즘 사람들에겐 뮤지션 이라기보다 하나의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모리세이는 유명한 토크쇼들에 출연하고, 노벨상 축하공연을 하는가 하면 그의 자서전은 무려 펭귄클래식에서 발매되었다. 한편으로는 스미스 때부터의 온갖 기행과 신랄한 독설 때문에 안티도 많다.

사실 80년대 당시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활동 재개를 원했었다.[39] 실제로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베이시스트였던 앤디 루크가 작곡한 곡들을 솔로 1집 앨범에 수록하였고 자신의 솔로 1집 투어 하이라이트로 1988년 크리스마스에 열릴 울버햄튼 공연에서 스미스 멤버들을 모두 불러서 공연하고 이후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하여 스미스 재결성을 천명하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다. 다른 멤버들은 모리세이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조니 마는 스미스를 재결합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공연에도 불참하였다.[40] 모리세이는 이 때의 조니 마가 보여준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이후 한동안 여러 매체들을 통해 "지금까지 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스미스를 조니 마는 너무 손쉽게 끝내버렸다."며 공공연히 조니 마를 비난하였고 3년 동안 투어를 돌지 않는다.

이후 90년대부터 모리세이가 솔로 뮤지션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자 이제는 오히려 모리세이 쪽에서 재결합을 거절하고 았다. 1994년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앨범을 CD로 재발매할 것이라는 소식을 레코드사로부터 전해듣고 "새삼스레 스미스 앨범의 재발매라구요? 지금 나에게 스미스란 강둑에 말라붙어 죽어가는 물고기와 다름없는 의미일 뿐인데도 말입니까?"라고 말하면서 스미스 앨범들의 CD 발매를 반대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1995년에는 조니 마를 제외한 나머지 스미스 멤버들에게 스미스 시절의 로열티 지급 문제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41] 그전까지 모리세이는 인터뷰에서 금전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 때문에 가수 활동을 한다고 얘기해왔기에 모리세이가 금전적인 문제로 발생한 소송의 당사자가 되자 평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영국의 언론들은 모리세이를 향해 "돈만 밝히는 위선자"라며 매우 큰 비난을 가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은 모리세이는 소송이 끝난 1997년부터 한동안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가 2002년 헐리우드로 이주한 후 2004년이 되어서야 음악계에 복귀했다.

2006년 인터뷰에서 모리세이는 "더 스미스의 재결합은 돈과 관련된 게 아니고, 매우 감정적인 문제입니다. 단순히,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래할 순 없거든요."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

이후에도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재결합 얘기가 나올 때 마다 "스미스를 재결합 하느니 내 불알을 먹겠다. 이게 채식주의자에겐 최선이지." "스미스를 예전처럼 한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하는 방법은 우리들을 다 총으로 쏴죽여서 시체를 한 구 씩 갖다놓는 방법밖에 없다." 등 악명 높은 발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24년, 한 공연 기획사가 스미스의 재결합을 모리세이와 조니 마에게 제시하자 모리세이는 승낙했다고 모리세이 본인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밝히기도 했다. 비록 조니 마의 거절성 무시로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3.2. 조니 마

더 스미스를 해체시킨 조니 마는 프리텐더스, 더 더, 일렉트로닉, 모디스트 마우스, 크립스 등의 여러 밴드를 돌아다녔다. 기본적으로 같은 시기에 두 밴드에 소속되어 있었던 적도 많다. 국내에서는 더 스미스 해체 이후 조니 마가 있었던 밴드들을 듣보잡이라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모디스트 마우스는 1990년대에 데뷔해서 미국 인디 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밴드로 평가받으며, 2007년에 낸 앨범 <We Were Dead Before the Ship Even Sank>가 빌보드 200 1위를 기록했다. 그것도 조니 마가 밴드에 합류한 뒤에 녹음한 앨범이다. 그리고 조니 마가 참여한 더 더의 앨범 <Mind Bomb>도 굉장한 명반. 맷 존슨과 조니 마가 약빨고 만든 앨범이다. 문자 그대로... 그러나 그의 레전드로서의 영향력이나 대우는 차치하고, 모리세이만큼 성공적이고 일관된 커리어를 잇지는 못했다는 게 중론.

이는 조니 마 본인이 어느정도 의도한 부분도 있다. 크립스 모디스트 마우스 같은 밴드들은 밴드 자체가 조니 마 개인보다 인지도가 낮은데도 그들의 음악에 끌려 함께 활동하는 등 조니 마는 기본적으로 어느 한 지점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사운드와 뮤지션들을 찾아 해매는 성향에다 스미스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본인의 유명세로 안해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지 못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니 마는 대중들이 자신에게 씌운 ' 징글쟁글 사운드'의 대가라는 편견을 무척 싫어한다.

2013년에 발간된 모리세이의 자서전에 1992년 모리세이에게 쓴 조니 마의 편지 전문이 있는데, 여기서 마가 스미스의 재결합에 대해서 왜 그렇게 완고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 있다.
{{{#!wiki style="width=100%"
Dear Moz,
Sincere thanks for your letter last week and for your concern. I do realize that it must have taken a lot of brainache/heartache to have gotten in touch. The main thing that I want you to know is that I really regret us not being friends. I've only recently come to realize that you genuinely don't know all the reasons for my leaving. To get into it would be horrible, but I honestly hated the sort of people we became. I have no ambitions to be a solo guitar player. I will never point the finger at anyone but myself, and I am glad I took a step towards making my life sane.
After getting your postcard I felt that the only way to explain things would be to come round and see you personally. I also felt bad that you were so unhappy and it's only circumstances that made it possible.
I hope I see you soon.
 Love, Johnny}}}
{{{#!wiki style="width=100%"
모즈에게, 지난주에 보내준 편지와 배려 고마워. 연락하기 위해서 분명 머리도, 마음도 많이 아팠을 거라는 거 알아. 무엇보다도, 더 이상 우리가 친구가 아니게 된 것을 후회한다는 걸 네가 알아줬으면 해. 내가 왜 떠났는지에 대해 네가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되었어.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끔찍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들이 싫었어.[42] 난 기타 히어로가 되고 싶은 야심같은거 없어. 나 아닌 누구도 탓할 생각 없고, 그냥 내 생활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는 게 기뻐. 너의 엽서를 받고 나니, 이런 얘기들을 자세히 하려면 널 직접 보는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많이 우울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 마음도 속상하지만. 조만간 볼 수 있기를 바라. 사랑을 담아, 조니 }}}
이 편지를 쓴 직후 조니 마와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노래 'Suffer Little Children'의 배경이 된 지역 Saddleworth Moor에 함께 차를 타고 가 대화하였지만 의견 차를 좁힐 수 없었다고 한다.

조니 마는 락스타가 되기 싫어서 스미스를 탈퇴한 직후 옷입는 스타일까지 죄다 바꿔버렸다. 90년대 찍은 사진을 보면 '이 사람이 스미스의 그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 맞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 2000년대에 조니 마가 힐러스로 활동할 때 공연에서 관객들이 스미스 노래를 연주하라며 난동을 피웠지만 마는 관객들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다. 조니 마는 이 시기에 딱 한 번 공연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자 10초간 'Bigmouth Strikes Again'을 연주했으며 좋아서 날뛰는 관객들에게 "다시는 이런 짓 안할겁니다."라고 했다.

2010년대부터는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13년 첫 정규 솔로앨범 <The Messenger>를 냈고 호평에 힘입어 바로 그 다음해 두번째 솔로앨범 <Playland>를 냈다. 평이한 보컬과 구린 앨범 커버 및 뮤직비디오는 단점이지만 역시 클라스가 있다보니 음악은 좋다라는게 일반적인 평. 2018년 6월에는 3집 정규앨범 <Call The Comet>을 발매하였다. 여기에 조니 마는 인셉션이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같은 영화 음악 작업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도 조니 마는 마치 스미스 때처럼 정력적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다.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스미스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건지 스미스 시절의 곡들을 공연 셋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노래도 그냥 본인이 직접 부른다.

조니 마는 더 스미스 음악 자체가 아닌 재결합이나 모리세이에 대한 질문에 항상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편. 아니면 갑자기 모리세이 디스를 시전한다!

결국, 이러한 조니 마의 언행을 더 이상 참지 못한 모리세이는 2022년 1월에 조니 마에게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한 언급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담은 편지를 썼다. 이 사실은 2022년에 모리세이가 직접 공개했다. #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This is not a rant or an hysterical bombast. It is a polite and calmly measured request: Would you please stop mentioning my name in your interviews? Would you please, instead, discuss your own career, your own unstoppable solo achievements and your own music? If you can, would you please just leave me out of it?
The fact is: you don’t know me. You know nothing of my life, my intentions, my thoughts, my feelings. Yet you talk as if you were my personal psychiatrist with consistent and uninterrupted access to my instincts. We haven’t known each other for 35 years - which is many lifetimes ago. When we met you and I were not successful. We both helped each other become whatever it is we are today. Can you not just leave it at that? Must you persistently, year after year, decade after decade, blame me for everything … from the 2007 Solomon Islands tsunami to the dribble on your grandma’s chin ?
You found me inspirational enough to make music with me for 6 years. If I was, as you claim, such an eyesore monster, where exactly did this leave you? Kidnapped? Mute? Chained? Abducted by cross-eyed extraterrestrials? It was YOU who played guitar on ‘Golden Lights’ - not me.
Yes, we all know that the British press will print anything you say about me as long as it’s cruel and savage. But you’ve done all that. Move on. It’s as if you can’t uncross your own legs without mentioning me. Our period together was many lifetimes ago, and a lot of blood has streamed under the bridge since then. There comes a time when you must take responsibility for your own actions and your own career, with which I wish you good health to enjoy.
Just stop using my name as click-bait. I have not ever attacked your solo work or your solo life, and I have openly applauded your genius during the days of ‘Louder than bombs’ and ‘Strangeways, here we come’, yet you have positioned yourself ever-ready as rent-a-quote whenever the press require an ugly slant on something I half-said during the last glacial period as the Colorado River began to carve out the Grand Canyon. Please stop. It is 2022, not 1982.
Morrissey. January 2022.

이것은 폭언이나 히스테리적인 호언장담이 아니야 정중하고 차분하게 요청하는 거야. 인터뷰에서 내 이름을 언급하는 것 좀 그만할 수 없어? 대신에 네 자신의 커리어, 네 자신의 거침없는 솔로 업적, 너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아?
너는 나를 몰라. 너는 내 삶, 내 의도, 내 생각, 내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런데도 넌 인터뷰에서 항상 내 본능에 대해 차단당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나의 개인 정신과 의사처럼 말하고 있잖아. 우린 서로 연락을 안한지 35년이 넘었어.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단 말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너와 나는 성공한 삶을 살지 못했었고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지금의 모습이 될 수 있었지. 그러니 우리가 스미스로서 함께했던 날들을 그냥 그대로 놔둘수는 없나? 꼭 그렇게 끈질기게 몇 십년이 지나도록 모든 것을 날 탓해야만 하는거야?
넌 6년동안 음악을 만들도록 영감을 주기 충분했던 날 찾아냈지. 네가 주장하는 것 처럼 내가 그저 너를 밴드에서 이탈하게끔 만든 눈꼴시려운 괴물이었다면 너는 유괴를 당하거나 감금당해서 스미스 활동을 했던거야? 사시눈깔을 달고있는 외계인한테 납치라도 당했던건가? 'Golden lights' 의 기타를 연주한건 다름아닌 ​"너​" 라고 - 내가 아니라.
그래 잔인하고 야만적인 영국 언론들은 네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어떤 말이든 기사로 내보낼 거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어. 그리고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지 못하지. 그러니 계속 그렇게 행동해 봐. 넌 마치 나를 언급하지 않고는 네 두 다리를 꼬지 못하는 것처럼 처량해 보이기만 하니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아주 오래전 일이고, 이후 다리 아래에 수 많은 양의 피들이 흘러내릴 정도로 세월이 흘렀어. 그리고 이젠 너 자신의 행동과 커리어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너의 건강을 챙겨야 할 나이가 됐지.
그냥 내 이름을 갖다가 어그로나 끌지 좀 말았으면 해. 난 너의 솔로 작업들과 솔로 활동을 하는 너의 삶을 비난한 적도 없고 Louder than bombs 와 Strangeways, here we come 시절의 너의 천재성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박수를 보내. 하지만 지난 빙하기시절 콜로라도 강이 그랜드 캐니언을 깎기 시작하던 때만큼 오래 전 내가 대충 했던 말들에 대해 언론이 추악한 비평을 요구할때마다 넌 언제나 너의 이득을 위해 논평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자세였어. 이제 그만좀 해. 지금은 2022년이야. 1982년이 아니라고.
2022년 1월, 모리세이가

3.3. 다른 멤버들

1995년, 밴드의 베이시스트 앤디 루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 심지어 투어 멤버였던 크레이그 개넌까지 모리세이와 조니 마에게 스미스 시절 저작권료와[43] 투어 로열티 미지급 문제로 소송을 걸었다. 1997년까지 이어진 이 소송에서 루크는 합의 후 취하, 조이스는 승소하였다.

소송 당시 모리세이는 "스미스는 나와 조니 마의 것이고 니네는 언제든 대체 할 수 있는 잔디깎이나 다름 없었어!"라면서 크게 분노하였다. 이때 모리세이는 소송을 지속할 의욕이 없었던 조니 마도 같이 비판했다. 이 사건은 팬들과 언론이 계속해서 밴드 재결성 소망을 드러내도 스미스가 재결합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된다.

마이크 조이스와 앤디 루크는 소송 이후부터는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시네이드 오코너, 스톤 로지스의 멤버였던 아지즈 이브라힘, 오아시스의 멤버였던 폴 아서스 등 여러 뮤지션들의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

2023년 5월 19일, 앤디 루크가 췌장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향년 59세.

4. 영향력

It’s amazing to think that what we did still means so much to so many people. From the very first writing session that Morrissey and I had in my attic lodgings, we were excited and high with it. We couldn’t get our ideas out fast enough and that feeling remained in the studio for all of us when we were making the records. Greatness is the best achievement, greatness and recognition from your peers and other artists you respect. We had and still have that, plenty of other stuff too, good and bad and dramatic. But that’s The Smiths. We loved each other and we loved what we were doing more than anything. That’s probably why we still sound good. There’s love in it, inspired musicians, great words and some pretty good tunes, too.“Bless you.”

우리가 한 일이 아직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의미하다니, 생각해보면 굉장한 일이군요. 내 다락방에서 했던 첫 송라이팅 세션 때, 모리세이는 흥분하며 잔뜩 고양돼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아이디어를 가능한 빨리 뽑아내어서, 그 느낌이 남아있는 동안 스튜디오에 가 레코드를 만들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죠. 위대함이란 것은 최고의 성취입니다. 위대함 그리고 당신의 동료와 당신이 존경하는 다른 아티스트들에게서 인정받는 일 말입니다. 우린 그걸 가졌었죠. 지금도요. 우리의 많은 작업물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 중 어떤 것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또 너무 극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스미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우리가 하고 있었던 것들을 무엇보다도 더 사랑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음악이 아직도 좋게 들리는 이유일테죠.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영감을 줬던 뮤지션들, 훌륭한 언어들과 꽤 근사한 튠이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조니 마 ( 2007년)
스미스보다 더 나은 밴드는 있었지만, 미학을 표현하는 능력과 결합된 협업의 긴장에 의해 형성되는 독특하고 신중하며 강력한 미학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더 완벽한 밴드는 없었다.
피치포크 #
더 스미스는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록 밴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 이들의 시각과 음악성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브릿팝 밴드와 전세계의 많은 얼터너티브 록 밴드 그리고 인디 밴드 등 수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영향력을 쉽게 설명하면 인디 록 힙스터 문화가 유행하기 이전에 그걸 구현했던 밴드가 더 스미스다.

스미스는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의미의 인디 밴드였는데 어떤 곡을 쓸지, 어떻게 만들지, 언제 어떻게 발표할지부터 앨범 커버와 무대구성 등 세세한 컨셉 하나하나까지도 모리세이 조니 마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기 때문이다.[44] 따라서 그들의 개성이 스미스 그 자체였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스미스는 관객들의 스테이지 인베이전을 적극 부추기고, 멤버들이 입장할 때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틀어놓는 등 다른 밴드들이 시도하지 않은 특이한 공연문화를 고안해 냄으로써 점점 더 특별해졌다.

조니 마의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는 지금도 많은 밴드가 참고하고 있다. 1980년대 당시에 주류 기타 연주라고는 70년대 메탈 장르의 기타 솔로 중심의 잔재나, 펑크 장르의 3개 코드만을 사용하는 단순한 기타스타일 등으로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화를 중시하는 조니 마의 시도는 신선하면서도 60년대 전통으로의 회귀였다. 기타라는 악기의 본연의 특성에 충실한 그의 스타일은 이후 90년대 브릿팝 사운드의 기반이 된다. 실제로 스웨이드 버나드 버틀러, 오아시스 노엘 갤러거 등 수 많은 브릿팝 기타리스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45] 물론 당시에도 펠트, 아즈텍 카메라 등 찰랑찰랑 거리는 기타 사운드를 내세운 팝 밴드들이 있었지만, 몇십 트랙의 기타 음을 채워넣고 또 채워넣어 빈틈없는 사운드를 만드는 조니 마의 시도는 굉장히 독특한 것이었다. 스미스의 모든 곡을 작곡하고 실질적으로 밴드의 음악적 브레인이었던 조니 마의 기타 철학은 '음을 낭비하지 않고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음을 채워 넣는 것'. 또한 장단조를 넘나들며 기묘한 코드 진행의 작곡법은 사춘기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세한 내용은 조니 마 항목 참조.

모리세이가 쓰는 가사는 사춘기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담으면서도 매우 재치있는 비유와 날카로운 단어 선택이 돋보이고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는 지성미가 넘친다. 무엇보다 그의 가사는 블랙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준다. 오늘날 모리세이가 쓴 가사들은 문학계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 또한, 모리세이는 더 스미스의 보컬로서 보컬 멜로디와 노랫말을 담당한 것 뿐만 아니라 팀명, 앨범명, 앨범 커버아트[46], 의상, 무대소품[47], 무대매너 등에 고유의 개성을 담아냄으로써 스미스의 독창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48]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모리세이는 엄청나게 많은 추종자를 자아냈다. 덕분에 스미스 시절부터 공연장은 모리세이에게 날아오는 부겐빌레아 꽃[49]과 모리세이와 포옹하려고 무대 위에 난입하는 관객들로 야단법석이었다. 스미스 시절 깽판 조니 마가 곤혹스러워했던 공연 모리세이의 솔로 시절 자행된 대규모 깽판. 마지막 곡 Everyday Is Like Sunday를 보아라!

스미스는 모리세이의 기행 버프를 받아서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오히려 모리세이가 없었으면 스미스는 좀 더 순수한 록큰롤 밴드로서 그들의 음악만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을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스미스 전반을 지배하는 컨셉은 무엇보다 호모섹슈얼리티라고 할 수 있는데, 조니 마와 모리세이가 품고 있었던 70년대 락음악과 컬쳐의 마초스러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이 표출된 결과다.[50] 첫번째 앨범 The Smiths[51]를 비롯해 여러 싱글의 앨범 커버를 게이 포르노에서 크롭한 것[52]이나 드랙퀸의 사진을 썼으며 대표곡 'This Charming Man'을 비롯해 많은 노래가 남자와 남자의 관계에 대해 노래 하고 있다. 물론 대놓고 하지는 않고 은유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다룬 노래도 없지는 않는 데, 이의 경우는 여자를 불신하거나 저주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남자로 추정되는 화자가 여자랑 결혼하려는 남자를 질타하는 노래(William, It Was Really Nothing)[53][54], 도 있다. OUT 매거진이 게이 예술가들을 상대로 설문한 가장 게이적인 앨범 100선에서도 스미스는 단일 아티스트로는 가장 많은 앨범을 리스트에 올렸다. # 영국 퀴어 시네마의 거장 데릭 저먼은 스미스의 뮤직비디오들을 만들었다. 이런 동성애적인 성격은 모리세이의 솔로시절 더욱 두드러지는데, Your Arsenal[55] 같은 앨범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참고로 모리세이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남자와 여자 모두와 사귄 적이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스미스의 영향력은 음악에만 국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릿팝 조류에 있었던 밴드가 아니더라도 90년대 영국 밴드라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거의 모두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는 그들의 노래 <1985>의 가사에서 'In 1985, my words they came alive, friends were made for life, Morrissey and Marr gave me choice.(1985년, 내 말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고 동지들이 생겼다. 모리세이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라고 노래했다. 한편 피트 도허티[56] 크리스 마틴같은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뮤지션들도 스미스가 음악을 하게 한 원천 중 하나라고 밝히기도.

스미스는 음악적으로는 스미스만의 완전한 오리지널리티로 계속해서 뮤지션들에게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고, 문화적으로는 소외받은 계층의 조용한 분노를 대변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스미스는 활동 당시에는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자국인 영국에서 붐을 일으킨 영국 인디 밴드였을 뿐이었지만 30년의 세월을 거치며 하나의 팝 아이콘이 되었다.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The Smiths ( 1984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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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Reel Around the Fountain
  • 2. You've Got Everything Now
  • 3. Miserable Lie
  • 4. Pretty Girls Make Graves
  • 5. 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 4:38
Side two
* 6. Still Ill
* 7. Hand in Glove
* 8.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 9. I Don't Owe You Anything
* 10. Suffer Little Children
Meat Is Murder ( 1985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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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The Headmaster Ritual
  • 2. Rusholme Ruffians
  • 3. I Want the One I Can't Have
  • 4. What She Said
  • 5. That Joke Isn't Funny Anymore
Side two
* 6. Nowhere Fast
* 7. Well I Wonder
* 8. Barbarism Begins at Home
* 9. Meat Is Murder
The Queen Is Dead ( 1986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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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The Queen Is Dead
  • 2. Frankly, Mr. Shankly
  • 3. I Know It's Over
  • 4. Never Had No One Ever
  • 5. Cemetry Gates
Side two
* 6. Bigmouth Strikes Again
* 7.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
* 8. Vicar in a Tutu
* 9.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
* 10. Some Girls Are Bigger Than Others
Strangeways, Here We Come ( 1987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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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A Rush and a Push and the Land Is Ours
  • 2. I Started Something I Couldn't Finish
  • 3. Death of a Disco Dancer
  • 4. Girlfriend in a Coma
  • 5.Stop Me If You Think You've Heard This One Before
Side two
* 6. Last Night I Dreamt That Somebody Loved Me
* 7. Unhappy Birthday
* 8. Paint a Vulgar Picture
* 9. Death at One's Elbow
* 10. I Won't Share You

5.2. 라이브 앨범

파일:4110AXK6XNL.jpg
Rank[57] ( 1988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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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The Queen Is Dead
  • 2. Panic
  • 3. Vicar in a Tutu
  • 4. Ask
  • 5. His Latest Flame/Rusholme Ruffians
  • 6.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
  • 7. Rubber Ring/What She Said (Medley)
Side two
* 8. Is It Really So Strange?
* 9. Cemetry Gates
* 10. London" 2:38
* 11. I Know It's Over
* 12. The Draize Train
* 13. Still Ill
* 14. Bigmouth Strikes Again

5.3. 컴필레이션 앨범

5.3.1. 활동기간 중 발매

Hatful of Hollow ( 1984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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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William, It Was Really Nothing
  • 2.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 3. These Things Take Time
  • 4. This Charming Man
  • 5. How Soon Is Now?
  • 6. Handsome Devil
  • 7. Hand in Glove
  • 8. Still Ill
Side two
* 9.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
* 10. This Night Has Opened My Eyes
* 11. You've Got Everything Now
* 12. Accept Yourself
* 13. Girl Afraid
* 14. Back to the Old House\
* 15. Reel Around the Fountain
* 16.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
파일:R-1756543-1586509929-1228.jpeg.jpg
The World Won't Listen ( 1987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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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Panic
  • 2. Ask
  • 3. London
  • 4. Bigmouth Strikes Again
  • 5. Shakespeare's Sister
  • 6.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
  • 7. Shoplifters of the World Unite
  • 8.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
  • 9. Money Changes Everything
Side two
* 10. Asleep
* 11. Unloveable
* 12. Half a Person
* 13. Stretch Out and Wait
* 14. That Joke Isn't Funny Anymore
* 15. Oscillate Wildly" B-side of "How Soon Is Now?
* 16. You Just Haven't Earned It Yet, Baby
* 17. Rubber Ring
파일:louderthanbombs.jpg
Louder Than Bombs[58] ( 1987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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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one
  • 1. Is It Really So Strange?
  • 2. Sheila Take a Bow
  • 3. Shoplifters of the World Unite
  • 4. Sweet and Tender Hooligan
  • 5. Half a Person
  • 6. London
Side two
* 7. Panic
* 8. Girl Afraid
* 9. Shakespeare's Sister
* 10. William, It Was Really Nothing
* 11. You Just Haven't Earned It Yet, Baby
* 12.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
Side three
* 13. Ask
* 14. Golden Lights
* 15. Oscillate Wildly
* 16. These Things Take Time
* 17. Rubber Ring
* 18. Back to the Old House
Side four
* 19. Hand in Glove
* 20. Stretch Out and Wait
* 21.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
* 22. This Night Has Opened My Eyes
* 23. Unloveable
* 24. Asleep

====# 해체 이후 발매 #====

5.4. 싱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더 스미스/싱글 목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여담

7. 외부 링크



[1] 정식 멤버는 아니나 통칭 '5번째 스미스'로 불리는 세션 뮤지션. 투어 활동 당시 리듬기타를 담당. [2] 이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를 중심으로 한 장르를 쟁글 팝이라고 한다. [3] 사실 스미스의 전체적인 비전과 의도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폭력성의 분출이 주였다. 가사도 사실 매우 과격하다. 모리세이는 마에게 스미스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복수이며 스미스라는 것은 거리를 다니며 집집마다 창문을 깨부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는 자신은 그런 분노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모리세이의 비전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4] 이마저도 결성일 기준의 활동 기간으로, 데뷔 당시부터 따진다면 5년보다도 더욱 짧아진다. 비슷하게 활동 기간이 짧은 밴드로 유명한 비틀즈가 약 8년 ~ 10년을 활동하였다. [5] 지향점은 버블검 뮤직을 바탕으로 강렬한 가사를 쓰는 80년대 버전의 라이버와 스톨러 [6] 모리세이-조니 마 콤비는 훗날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송라이터 중 하나로 선정된다. [7] 사실 1978년에 둘은 이미 패티 스미스 콘서트에서 만난적이 있었다. 조니 마는 모리세이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리세이 자서전에 따르면 그 때 조니마가 모리세이에게 "네 목소리 재밌다 You've got a funny voice."고 했기 때문에 모리세이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8] 그 노래들은 주로 60년대 걸그룹들의 노래였다. 펑크가 유행하던 시기였으므로 두 사람 다 '이런걸 집착적으로 좋아하는 놈이 나말고 또 있었다니.'라고 생각했다고. 그들은 스모키 로빈슨이 곡을 준 모타운 여가수들을 비롯해 샌디 쇼같은 영국 여가수도 열렬히 좋아해서, 데뷔 후에는 샌디 쇼와 몇 번 합동 공연과 텔레비전 출연 등을 같이했다. 하지만 모리세이는 수십년 후, 샌디 쇼와 함께 활동하면서 그녀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되었고 곧 우정이 깨졌다고 말했다. 이어 샌디 쇼가 너무 어린 나이에 성공해서인지 매우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그녀는 훌륭하고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9] Relax, Two Tribes라는 두 개의 대표곡이 있는데, 이 그룹은 이 두 노래로 당시 영국을 말 그대로 뒤흔들었다. 각각 5주, 9주 1위를 했는데 저 9주 1위는 보헤미안 랩소디, You're the One That I Want 이후 최초로 초장기 차트인한 노래이며, Relax는 성적인 가사 때문에 BBC에서 방송 금지되어 스트라이샌드 효과로 유명해진 곡이다. 1984년 노래인데, 1984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가사가 성적으로 직설적이다. Relax는 이외에도 11개국에서 싱글 차트 1위를 달성한 당시 유럽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이다. [10] "Smith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니 거기엔 어떤 가치평가도 할 수 없다. 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모리세이 / "난 이름을 롤링 스톤즈로 짓고 싶었는데 발음하기가 너무 복잡하더라고. 모리세이가 우리 이름을 결정했어." -조니 마 [11] 앤디 루크와 마이크 조이스, 초창기 매니저였던 조 모스까지 모두 조니 마의 친구나 지인들이었다. [12] 활동 초기에는 조이스가 들어오기 전 사이먼 볼스탠크로프트가 드럼을 맡거나, 루크 대신 데일 히버트가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고, 제임스 메이커라는 게이 댄서도 있는 등 멤버 교체가 있었다. 모리세이와 마는 볼스탠크로프트가 멤버로 있길 원했지만 그는 모리세이의 목소리가 마음에 안든다고 더 폴에 합류했다. 데일 히버트는 스미스의 게이 콘셉트를 좋아하지 않았고 모리세이와 마는 히버트의 연주를 맘에 들어하지 않아 그는 떠났다. 메이커는 모리세이의 친구였는데 마의 자서전에 따르면, 메이커가 무대에서 춤출 거라고 모리세이가 말했고 마는 그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별일 아니었기(unnecessary but not a big deal) 때문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몇 번 공연한 뒤 해고했다. [13] 스미스는 특유의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 때문에 외부에서 버즈와 엮이는 일이 너무 잦았고, 토니 윌슨은 스미스 해체 시기에도 멤버들 속을 긁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14] 계약상 스미스는 모리세이와 마 두 명이었고, 러프 트레이드와의 정식 계약서에 서명한 멤버 역시 모리세이와 조니 마 둘 뿐이었다. 러프 트레이드는 이전에도 인디 레이블로 명성이 있었으나 스미스 덕분에 크게 성장하게 된다. [15] TOTP(Top Of The Pops)는 BBC에서 1964년~2006년에 걸쳐 방영된 영국의 대표적인 주간 음악프로로, 당대의 인기 뮤지션들이 출연했다. [16] TOTP 무대에서는 대부분의 뮤지션이 립싱크, 핸드싱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모리세이는 첫 출연에서 마이크 대신 글라디올러스 꽃다발을 들고 등장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TOTP 데뷔 무대는 쇼의 포맷을 전복시킨 상징적인 순간으로 평가되며, 이후에도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TOTP 무대에서 마이크를 들지 않았다. [17] 당시 레이블 관계자가 회상하기를, 러프 트레이드는 예산 문제 카세트 테이프를 찍어내지 못했었고, 카세트 테이프를 발매했다면 1위를 기록했을 거라고 한다. [18] 컴필레이션 앨범이지만 상당히 훌륭해서 정규 앨범 급의 평가를 받곤 한다. 특히 이 앨범에 실린 ' How Soon Is Now?'는 스미스 최고 명곡 중 하나로 훌륭한 가사와 독특한 기타 리프로 유명하다. 조니 마는 이 곡을 구상할 때 '펍에 사람들이 있고 주크박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도입부를 듣자마자 무슨 노래인지 아는, 그런 곡을 쓰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19] 지금의 글래스톤베리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해 낙하산을 타고 무대를 침범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관중들의 무대난입은 스미스-모리세이 솔로활동까지 이어지는 전통이나 다름 없다. 관중들의 목적은 대개 모리세이에게 키스하거나 그를 껴안는 것이다. [20] 모리세이는 비건계 채식주의자이자 동물 애호가이다. 조니 마도 비건계 채식주의자. 모리세이는 80년대에 피트 번즈와 친구였는데 번즈가 언젠가 모피를 입었다는 이유로 모리세이는 그와 절교했다. [21] < The Queen Is Dead>는 2014년 초 NME 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선'에서 1위에 올랐다. [22] 3집 < The Queen Is Dead>의 수록곡 'Frankly, Mr. Shankly'가 러프 트레이드의 사장 제프 트래비스를 까는 곡이다. 그 후 30년이 지난 뒤에 나온 모리세이의 자서전에서도 모리세이는 제프 트래비스를 까는데 상당한 지면을 소비했다. [23] 결국 이들은 나중에 러프 트레이드 사와 결별하고 EMI 사와 계약하게 된다. [24] 앤디 루크에 의하면 모리세이가 앤디가 해고당했다는 것을 알리려고 주차권에다가 '스미스에서 나가. 잘 살아라'라고 써서 앤디 루크의 차 와이퍼에 끼워놓았다고 한다. 모리세이는 이런 루크의 주장을 부인했다. [25] 흔히 다섯번째 스미스라 불리운다. 스미스와 꽤 어울리는 기타리스트였다는 평이 많다. 스미스 결성 당시 조니 마는 세상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온다 해도 스미스에는 자신 외에는 어떤 기타리스트도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에 더 완벽한 라이브 연주를 위해 자신을 보조해줄 기타리스트를 원했다. 그런데 막상 개넌이 영입되자 그를 싫어해서 갈궜다. 개넌이 투어버스에서 베이컨샌드위치를 먹자 디스거스팅하다며 갈구는 등(...) 출처31:35 현재는 개넌이 그 당시 잘 대우받지 못한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26] 파티에서 만나자마자 하루만에 연인이 되었고 현재까지 함께하고 있다. 뮤지션으로서는 저니맨 이미지가 강한데 사생활은 완전히 그 반대. [27] 모리세이는 훗날 자서전에 이것에 대해 'monogamous I polygamous He' (일부일처제인 나와 일부다처제인 그)라고 짧게 표현하였다(...) [28] 스미스의 컴필레이션 음반에도 수록되어있는 'Money Changes Everything'은 모리세이가 가사를 짓기 거부했기 때문에 그저 마의 연주곡으로 남아 있었고, 마가 이것을 브라이언 페리에게 줬다! 모리세이는 그 사실을 몰랐는데 어느날 일정보다 일찍 작업실에 가니 페리와 마가 웅크려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리세이가 들어가니 페리는 자신의 물건들을 챙겨서 서둘러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이 연주곡은 페리의 손을 거쳐 'The Right Stuff'란 노래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29] 록 음악인이 흑인음악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다. 본래 록 음악이 흑인 음악인 리듬 앤 블루스에서 파생된 장르라서 록 음악 자체에 흑인음악적인 요소가 이미 그 근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더 스미스의 곡들 중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 'Rushholme Ruffians', 'How Soon Is Now?'는 전설적인 흑인 리듬앤블루스 뮤지션인 보 디들리 비트를 응용한 곡이고,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은 흑인 소울 가수 마빈 게이의 'Hitch Hike'의 영향을 받은 곡이다. 물론 이런 곡들은 흑인 음악 팬이었던 조니 마가 주도해서 작곡한 곡들이다. [30] 갈등의 불씨가 된 트랙은 'Girlfriend in a Coma' 싱글의 B-side로 수록된 'Work Is a Four-Letter Word'(원곡 Cilla Black, 1968년)이다. [31] 스미스의 해체 뒤 이 계약은 모리세이의 솔로 음반계약으로 변경된다. [32] 모리세이는 이 버릇을 못고치고 솔로 활동때도 공연 캔슬의 아이콘이 된다. [33] 사실 스미스를 인디 밴드에서 상업 밴드로 만들고 미국 진출에 망설였던 사람은 모리세이가 아닌 마였다. 게다가 밴드 활동을 하면서 모리세이는 매니저들을 비롯해 조니 마와 친한 스탭들을 집중적으로 해고했다. 심지어 조니 마와 음악적으로 잘 맞았던 밴드의 프로듀서 존 포터 또한 모리세이의 독단에 의해서 해고당하고 신인 프로듀서 스티븐 스트릿으로 교체되었다. (모리세이는 자서전에서 존 포터가 스미스의 음악을 자신과 조니 마 두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프로듀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존 포터를 러프 트레이드와 묶어서 거세게 비난했다.) 이 때문에 마는 점점 을 더 많이 마시게 됐고 스스로가 망가지는걸 느꼈다. 스티븐 스트릿은 밴드의 프로듀서로 고용된 직후 미국 투어 때 스미스와 함께 했는데 이때 조니 마가 매우 망가지고 취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스미스의 전통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말한다. 그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모리세이와 마는 그때까진 서로를 존중했지만 끝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고. [34] 사실 모리세이가 아니라 NME 기자 대니 켈리(Danny Kelly)가 정보를 입수해서 기사를 낸 것. 모리세이는 당시 멘붕 상태라 집에만 있었다고. [35] 바보가 아닌 이상 언제 그만둬야 할지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조니 마 [36] 조니 마는 밴드를 해체시킨 죄로 나만큼 고통 받은 사람은 오노 요코 말고는 없다. 라며 인터뷰에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37] 이 사건은 스미스의 노래 제목을 차용한 <Shoplifters of the World>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는 중이다. 조 맹거넬로, 엘라 콜트레인 등이 주연으로 출연한다고 알려졌다. [38] 미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보면 히스패닉 죄수가 "모든 라틴계 여자들은 모리세이를 사랑하지"라고 말하기도. 울버린(마블 코믹스)이 잠시 사귀었던 히스패닉 여자도 모리세이(와 더 큐어의 로버트 스미스)의 열렬한 팬으로 등장한다. [39] 모리세이는 스미스가 앨범을 30장은 낼 줄 알았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40] 결국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임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크레이그 개넌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41] 모리세이가 소송을 당하자 스미스의 멤버들에게 바친 노래가 'The More You Ignore Me, the Closer I Get' # [42] 1987년 스미스의 미국인 매니저는 '너희 투어 한번만 더하면 U2같이 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니 마는 '근데…모두가 U2가 되고 싶은건 아니잖아?'라는 생각이었다고. [43] 모리세이와 조니 마가 각각 인세의 40%를 받으며 더 스미스의 수익을 독차지했다는 주장. [44] 레이블 사장을 신랄하게 까는 가사의 'Frankly, Mr. Shankly'가 가감없이 발매되었을 정도로, 스미스는 작업에 있어서 자유를 보장받았다. [45] 그럼에도 조니 마는 일명 브릿팝 밴드들과는 협연한 바가 거의 없고 스미스 해체 후 '일렉트로닉'을 결성하여 댄스 음악을 하는 등 음악적으로 여러 실험을 했다. 그의 팬인 노엘 갤러거 버나드 버틀러에게 종종 기타를 선물로 주곤 했지만... [46] 모리세이는 앨범 커버에 쓰일 이미지, 전체적인 컬러톤 및 폰트의 스타일, 위치, 색상, 크기 등의 모든 디테일을 직접 스토리보드로 만들어서 스탭에게 넘겼다. 그가 동경하던 영화배우, 작가, 소셜아이콘들의 이미지를 즐겨 쓴 것으로 유명하다. [47] 글라디올러스, 안경, 보청기로 대표된다. [48] 물론 조니 마는 80년대 중반 기준으로 지극히 파격적이었던 그 모든 컨셉트를 쿨하게 받아들이고 파트너인 모리세이를 전폭 지지해줬다. [49] 스미스 시절부터의 상징물로, 모리세이는 바지 뒷주머니에 꽃을 꽂고 무대를 온통 꽃으로 장식한것으로 유명했다. 모리세이와 스미스를 은근 꼴뵈기 싫어했던 더 잼의 폴 웰러는 '꽃은 흔들라고 있는게 아니라 보라고 있는거야'라고 충고(?)하기도. 그는 영국 인디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86년 '레드 웨지 투어'때 참가한 조니 마를 은근 갈구며 따시켰는데 마는 자존심이 상한건지 투어 막판에 스미스 멤버들을 불러서 게릴라 공연을 펼쳤고, 자기들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이후 인터뷰에서, 마는 '레드 웨지 투어' 중 빌리브랙을 제외한 밴드들의 분위기가 좆같았다고 밝혔고(the atmosphere around the other bands on that tour was really shitty), 당시의 게릴라 무대는 스미스가 한 최고의 일 중 하나(one of the best things we ever did)라고 회상했다. 그렇지만 현재 폴 웰러는 조니 마와 사이가 좋다. [50] 이 컨셉은 활동 초기때부터 설정된 것이라고 하는데, 상술했듯이 밴드의 초창기 베이시스트였던 데일 히버트는 이것 때문에 갈등을 겪어 그만 뒀다. 그는 아이가 둘이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모리세이와 마가 우리 컨셉이 게이 밴드라며 그에 맞게 옷을 입게 하고 머리를 자르게 했다고 히버트는 주장했다. 마의 기억은 조금 다른데 '히버트는 우리가 걔 머리 자르게 해서 그만뒀어. 원래 스타일보다 훨씬 나았는데 말야.'라고 주장했다(...) [51] 이 앨범은 2009년 게이예술가들을 상대로 설문한 '역대 가장 게이같은 앨범'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52] 조니 마가 이러한 모리세이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드러머인 마이크 조이스에게 설명하자 조이스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와 교구목사님의 표정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고 한다. 앤디 루크의 아버지의 첫반응은 "이거 남자 엉덩이네?"였다고(...) [53] 당시 모리세이와 스캔들이 있었던 그룹 '어쏘시에이트'의 멤버 빌리 맥켄지에게 쓴 곡이라는 설이 있다. 어쏘시에이트는 답가로 'Stephen(모리세이의 퍼스트 네임은 Steven), You're Really Something'이라는 곡도 만들었다. [54] 이런 특이한 내용을 담은 탓인지는 몰라도 이 곡은 이례적으로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에서 43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더 스미스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How Soon Is Now?는 이보다도 낮은 477위고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은 아예 목록에 등재되지도 않았다. [55] 모리세이의 몸짱 근육이 드러난 세미 누드를 표지로 썼다. [56] 그런데 피트 도허티가 동경하던 모리세이를 마침내 만나게 되었을 때 모리세이가 그를 냉대했고 언론에다 '피트 도허티는 ' 시드 비셔스'나 따라하는 클리셰'라고 까서, 도허티는 '모리세이를 한 대 친 다음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준 후에 화해의 의미로 콜라보레이션을 제안하고 싶다'(..?) 라고 말하기도. ("When I see Morrissey the next time, I would punch him. And when he is lying on the ground, I would give him my hand. I remove the dust from his clothes - and then I would offer him a collaboration as an act of reconciliation.") 반면 모리세이는 칼 바랏과는 꽤 잘 지냈다. [57] 스미스의 유일한 라이브 앨범으로 모리세이는 처음에 이 앨범의 이름을 <The Smiths in Heat>로 짓길 원했으나 러프트레이드가 이를 거절해서 랭크 영화사의 창립자인 J. Arthur Rank의 이름에서 Rank를 따와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런던의 코크니 사투리에서 자위란 뜻으로 쓰이는 압운속어이다(...) [58] 피치포크에서 9.4점을 줬을 정도로 Hatful of Hollow에 못지 않게 완성도 높은 앨범이다. [59] 이것은 스미스의 모든 정규 앨범과 라이브 앨범 <Rank>, 활동할 때에 나왔던 컴필레이션 앨범을 모은 박스셋이다. 더 이상 판매하지 않는다. 대신 개별 앨범 리마스터판이 단품으로 나와있어서 이걸로 모아도 된다. [60] 모리세이가 코첼라 서브헤드라이너를 섰을때 야외 공연이라 바비큐 굽는 냄새가 나자 공연 중에 "어디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나서 불쾌하군. 그게 사람고기였으면 좋겠어."라고 발언해 큰 물의를 빚었다. 코첼라 에이전트는 바로 그걸 미끼로 썼다. [61] 그 중에는 크립스와 합동 투어를 하는 내용도 있었다. [62] ' 데이비드 캐머런. 스미스 좋아한다고 말하는거 그만해라. 아니. 넌 안 좋아해. 내가 그거 금지한다 David Cameron, stop saying that you like The Smiths, no you don't. I forbid you to like it.' [63] 잘 알려졌듯이 모리세이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 조니 마도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 영국인. [64] 조니 마는 최근에서야 스미스의 곡들을 연주하는데, 다시 연주하게 된 동기가 다른 뮤지션들의 스미스 커버 때문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참고로 모리세이의 백밴드는 허구한 날 조니 마 같은 사운드를 못낸다면서 까인다. [65] Q: t.A.T.u의 'How Sooon Is Now?' 커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Morrissey: 아름다운 리메이크야. 그들이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Q: 그들은 러시아 10대 레즈비언들이에요. Morrissey: 안 그런 사람도 있나..? (...) [66] 관객들이 제프 버클리의 아버지이자 60년대 유명 뮤지션 팀 버클리를 연호하자 제프 버클리는 "60년대 음악은 다 헛소리야. 70년대 음악은 더하지. 80년대..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스미스는 빼고"라고 발언한다. [67] 마크 E 스미스(The Fall), 로버트 스미스 (Cure) 그리고 장전된 스미스 앤 웰러 권총이 있다면 누굴 먼저 쏘겠습니까? / Morrissey : 그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한방에 둘 다 동시에 관통시킬 겁니다. [68] 미발표곡인데다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남은 음원이 없다. [69] 'Still Ill'의 유명한 구절. [70] 조니 마는 인터뷰에서 "왜인진 모르겠지만 엘리엇 스미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미스도 좋아하더군요"라고 코멘트 한 바 있다. 그리고 자신도 엘리엇 스미스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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