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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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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9대 국왕
숙종 | 肅宗
파일:숙종추정어진.jpg
숙종 추정 어진[1]
출생 1661년 10월 7일
(음력 현종 2년 8월 15일)
한성부 경덕궁 회상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즉위 1674년 9월 22일 (12세)
(음력 현종 15년 8월 23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720년 7월 12일 (향년 58세)
(음력 숙종 46년 6월 8일)
한성부 경덕궁 융복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명릉(明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667년 2월 13일 ~ 1674년 9월 22일
(음력 현종 8년 1월 21일 ~ 현종 15년 8월 23일)
조선 제19대 국왕
1674년 9월 22일 ~ 1720년 7월 12일
(음력 숙종 즉위년 8월 23일 ~ 숙종 46년 6월 8일)
서명
파일:숙종(조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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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광(爌) → 순(焞)
부모 부왕 현종
모후 명성왕후
형제자매 1남 3녀 중 장남[2]
배우자 인경왕후 (1671년 혼인 / 1680년 사망)
인현왕후 (1681년 혼인 / 1689년 폐위 / 1694년 복위 / 1701년 사망)
폐비 장씨 (1690년 왕비 책봉 / 1694년 강등)
인원왕후 (1702년 혼인)
후궁 희빈 장씨, 숙빈 최씨, 명빈 박씨
영빈 김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
자녀
6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공주(1677 ~ 1678)
차녀 - 공주(1679 ~ 1679)
미상 - 유산(1680)
장남 - 경종(景宗, 1688 ~ 1724)
차남 - 왕자 이성수(李盛壽, 1690 ~ 1690)
3남 - 왕자 이영수(李永壽, 1693 ~ 1693)
4남 - 영조(英祖, 1694 ~ 1776)
5남 - 왕자(1698 ~ 1698)
6남 - 연령군(延齡君, 1699 ~ 1719)
반려동물 반려묘 금덕(金德), 금손(金孫)
종교 유교 ( 성리학)
아명 용상(龍祥)[3]
명보(明普)
전호 효령전(孝寧殿)
묘호 숙종(肅宗)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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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
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
(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
시호 조선: 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 희순(僖順)
섭정 세자 이운 ( 1717년 ~ 1720년) }}}}}}}}}
파일:attachment/1263947987_126346462971269.jpg
숙종의 어필(御筆)
1. 개요2. 생애
2.1. 조선 왕조 역대 최강의 왕권2.2. 포악한 성격과 화병2.3. 환국(換局) 정치2.4.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철천지 악연2.5. 치적2.6. 추증과 복권2.7. 국방 정책2.8. 정유독대와 최후2.9. 능침
3. 가계4. 선대 가계5. 여담6. 어진7. 직접 쓴 글과 시8. 대중매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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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9대 임금이자 경종, 영조, 연령군의 아버지.

아버지 현종의 이른 사망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다. 당시 모후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숙종은 왕비를 세 번 들였고,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가 희빈 장씨이다.

2. 생애

2.1. 조선 왕조 역대 최강의 왕권

숙종의 아버지 현종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 본인은 현종과 정실 부인인 명성왕후 소생의 외아들이었다.[4] 이것만으로도 정통성으로 꿀릴 것이 없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외척과 관련된 트러블도 전혀 없었던 덕분에 부계와 모계 모두 완벽한 정통성을 타고난 왕이었다.[5]

초명은 '광(爌)'이었으나 1666년 전한 때 장군 이광(李廣)과 음이 같고 폭군의 대명사였던 수양제의 이름인 '양광(楊廣)'과도 음이 같다는 대사헌 조복양의 지적을 받아들여 공모를 통해 를 '순(焞)'으로 고쳤다. 물론 전한 장군 이광 및 수양제와 숙종의 이름 한자는 다르지만, 한국 한자음이 같기에 바꾸자고 한 것 뿐이다. 고종 때 간행된 ​ 《열성어휘》에 음이 '돈'으로 적혀 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暾(아침해 돈)'을 써두었기 때문에 '순'이 아닌 '돈'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1670년 작성된 숙종의 작명 단자에는 음이 '純(순수할 순)'으로 적혀있고 뜻풀이 글자로 '明(밝을 명)'을 써두었다.[6] 전자는 당사자인 숙종 사후 170여 년 뒤에 작성된 것이고 후자는 숙종 생전에 작성된 것임을 고려하면 '돈'보다는 '순'으로 발음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독자였기에 연산군 때의 중종처럼 폐위시키고 세울 마땅한 대군도 없었고, 남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경계대상이었던 인평대군의 아들들은 삼복의 옥으로 제거되어 동평군 정도만 남게 된다.[7] 이 때문에 친어머니인 명성왕후[8] 법적 증조모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장렬왕후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숙종을 거의 견제하지 못했다.[9] 이 때문에 14세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바로 친정(親政)에 나섰다.[10]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원자(원손) - 세자 - 왕 순서로 정상으로 왕의 임무를 수행했으며[11]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 장수하기까지 한 왕이다. 역대 조선 왕조의 적장자[12]들은 단명, 숙청, 폐위 등 유난스러울 정도로 큰 풍파에 시달렸으나 숙종만큼은 이런 풍파를 무난히 피해갔다. 숙종의 험악한 성깔은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에게서 유전된 것도 있으나 이처럼 귀한 아들[13]인 탓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어머니도 세자빈 - 왕비 - 대비 테크를 제대로 차근차근 하나 둘씩 밟았다. 추가로 계증조모 대왕대비까지 있었으니 수양대군 같은 야심 많은 종친이 있었다고 쳐도 계유정난 같은 쿠데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이 개념인으로 보일 만큼 엄청나게 막나가는 종친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다행히도 그런 종친은 당시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14]

문종 인종 헌종[15]은 왕위에 올라 단명한데다, 정확히 말해 문종은 원손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16] 상기된 최초의 금지옥엽 + 정통성 + 상왕까지 올랐던 단종[17]은 3년만에 수양대군에게 반강제적으로 양위당하고,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원손 - 세손 - 왕의 절차를 밟은 정조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지만 어쨌든 생부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18] 비슷한 예로 아버지 현종이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현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소현세자이니 원손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세자 교체와 관련한 효종의 원죄가 남아 예송논쟁이 발생하고 현종 자신 또한 비교적 요절한지라 조금 '격'이 딸린다. 아들인 경종도 장희빈이 중전에서 폐위되어 사사당했으므로 적자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순종 황제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 왕조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 면에서 완벽한 그는 왕권을 눈치보지 않은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換局)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완벽한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2. 포악한 성격과 화병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평가한 숙종의 성격.

유년기에 몸이 허약한 것과 다르게 매우 포악한 성격이었다. 부왕인 현종과 친할머니 인선왕후가 온화한 성격인것에 반해 숙종은 반대로된 성격이었다.[19][20] 숙종의 포악한 성격은 아들인 경종 영조는 물론 증손자인 정조도 물려받는다. 궁녀들이 왕실의 행사를 위해서 머리를 빗기고 옷을 입히려고 시도하면 몸서리를 칠 정도로 혐오하였다. 결국 궁녀들이 난감해하는 바람에 머리를 빗기는 것은 명성왕후가 맡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손길마저도 참지 못하고 투정을 부려서 참다 못한 명성왕후가 빗으로 숙종의 머리를 때려가면서 빗긴 일화가 존재한다. 조선에서 가장 독선적인 왕비로 평가받던 명성왕후조차 숙종의 포악한 성격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직 내전이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 그 간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소. 주상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시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것을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오.
출궁당한 희빈 장씨의 입궁을 간청하는 인현왕후에게 명성왕후가 남긴 말.

인현왕후가 출궁당한 희빈 장씨를 불러들이자고 간청하자 명성왕후는 며느리에게 숙종의 성격을 언급하며 반대하였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인현왕후의 간청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사실이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폐비 윤씨를 출궁하면서 칠거지악을 모토로 조선의 여성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결정하는데 그것이 바로 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현왕후는 왕비의 덕목을 지킨 것이다. 그 외에도 숙종에게 승은을 입고도 특별상궁이나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한 궁녀에게 첩지를 내리자고 간청하였고 더 나아가서 명성왕후에게 출궁당한 희빈 장씨도 다시 입궁시키자고 간청하였다. 이후 인현왕후의 주장이 관철되어 명성왕후가 사망하자 간택령을 내려서 부르는 방식으로 희빈 장씨는 다시 입궁한다. 연령군의 생모인 명빈 박씨도 이 시기에 특별상궁으로 승차한다. 풍문에 의하면 부왕인 현종에게 후궁이 없는 이유가 명성왕후의 독선적인 성격 때문인데 첩을 들이는 일이 잦은 숙종을 보고 명성왕후는 항상 불만을 표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상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점차 번뇌가 심해져서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마음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번뇌가 심하였다.
1688년 7월 16일의 숙종실록에 기록된 숙종의 상태.

숙종이 평생을 호소한 질병은 산증인데 하복부가 아프고 대소변이 원활하게 배출되지 않는 증상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간질성 방광염으로 보는데 방광 근육 내부의 궤양과 섬유화로 방광의 용적이 줄어들고 하복부 통증이 지속되며 혈뇨가 배출되는 증상이다. 산증으로 고통을 겪으며 포악한 성격에 더욱 강한 불이 지펴진 것이라고 파악이 가능하다.
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동의보감이 설명한 산증의 원인.

당시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느끼던 숙종이 자연스럽게 화병을 얻었고 화병의 영향으로 산증까지 앓게 되었다고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신경성인 사람이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스트레스성 질환을 얻은 상황과 유사하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희빈 장씨는 악녀이고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현혹되어 조강지처를 버린 왕이라는 인상이 강한데 전혀 아니다. 숙종이 다혈질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여 여러 문제를 일으킨 왕이라는 사실은 여러 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숙종도 자신의 포악한 성격을 인지하여 자신의 성격과 병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였다.
나의 화증이 뿌리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이 갈수록 깊은 고질이 되어 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오랜 시간 일하면 화염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1704년 12월 11일의 숙종실록.

숙종의 아들인 영조도 산증에 시달린 점을 감안하면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신경성이 유발한 스트레스성 질환이거나 방광의 질환이 유전되어 통증의 만성화되자 성격이 포악하게 변화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아버지가 온화한 성격인 반면 어머니는 조선의 왕비 중에서도 가장 강직하다고 평가받는 왕비이니 숙종의 성격은 모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명성왕후는 1675년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이자 숙종의 당숙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내시들을 심복으로 만들고 나인들과 간통하여 아이를 낳은 이유로 탄핵당한 홍수의 변이 일어나자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님에도 대전으로 행차하여 통곡하는 물의를 빚었다.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이 삼형제의 행각이 드러나자 앞장서서 삼형제를 탄핵하였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오히려 삼형제와 남인에게 무고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몰린다. 신하들도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라고 명성왕후를 비판하였다.

1688년에 희빈 장씨가 경종을 출산하자 희빈 장씨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다. 이를 목격한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 소유들이 희빈 장씨의 어머니가 탑승한 가마를 부순다. 부서진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조선의 법에 의하면 정3품 이상의 관리인 당상관의 여성 가족이 타는 가마다. 소유들은 법을 지킨 것이지만 이 사태를 듣고 격노한 숙종은 소유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숙종의 명령을 뒤늦게 인지한 신하들이 겨우 뜯어말려서 국문은 중단되었지만 의금부에 끌려가서 국문을 받던 소유 2명은 고문으로 사망한다. 당시에 상궁들도 가마를 타는 등 암묵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법이었으나 원칙에 입각하여 법을 적용하면 희빈 장씨의 어머니가 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주제를 넘은 것이다. 신하들의 극심한 반발이 이어지자 숙종도 마지못해 물러서서 법을 지킨 소유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소유들에게 상을 하사하고 이 사건을 지적한 대간들을 칭찬하였다.

목적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면모를 숨기지 않는 숙종. 법대로 일을 처리한 소유들을 죽인 것은 희빈 장씨의 환심을 사려고 한 일이며 희빈 장씨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인 송시열과 서인들을 숙청하려는 의도였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래서 서인의 수장인 송시열이 사망하자 숙빈 최씨를 이용하면서 희빈 장씨를 외면한 것이다. 계비인 인현왕후마저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을 거론하며 폐서인으로 만들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삼는다. 5년 후에 희빈 장씨의 가치가 사라지자 다시 인현왕후를 왕비로 삼으면서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지만 폐서인 시절에 얻은 병이 악화된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7년 후에 사망한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의 죽음을 희빈 장씨의 저주로 돌리고 사사한다. 숙종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일이 없고 오로지 사건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왕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간언하는 신하들도 가차없이 사사하고 왕비라는 자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아들인 경종의 삶도 엉망으로 만들고 만다. 인현왕후는 5년이라는 길고 열악한 폐서인 생활이 사망에 영향을 미쳤고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는 증거도 고문으로 인한 궁녀들의 거짓 자백인데 다시는 일어날 없도록 가차없이 사사한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사사될 당시의 경종은 어린이도 아니고 충분히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14세였다. 헌대의 기준으로도 서양이나 동아시아나 14살에 부모가 사망하는 건 비극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숙종도 14세에 즉위하고 친정을 한 유능한 군주이므로 14세의 경종도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숙청을 자행한 태종도 충신들과 원경왕후는 물론 후궁도 건드리지 않은 사실을 상기하면 숙종이 얼마나 잔혹한 왕인지 알 수 있다.

숙종의 포악한 성격으로 극단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은 이유는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숙종과 다르게 왕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남인에게도 힘을 주고 사약처럼 극단적인 처벌은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현종의 치세에 정치적으로 피바람이 분 사실이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모후의 독선적인 성격을 많이 물려받은 것도 있지만 명성왕후가 세자인 숙종의 양육자로서 숙종에게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아버지와 할머니인 인선왕후가 오래 생존하였다면 숙종도 잔혹한 수단을 남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인선왕후는 아들처럼 인자한 성격이었고 시어머니인 장렬왕후와도 사이가 좋았다. 거기다 시아버지인 인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를 통해서 왕이 후궁을 이용하여 왕권을 남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오래 살아서 숙종이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를 이용하며 마구잡이로 왕권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절대 용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인현왕후가 명분없이 폐위당하고 송시열과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의 거물들이 왕의 뜻에 반한 이유로 사사될 정도로 잔혹함이 심한 기사환국은 대왕대비인 장렬왕후가 사망하고 1년 후에 발생한다. 장렬왕후가 숙종과 피가 섞이지 않은 증조할머니라지만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사망한 이후로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대왕대비인데 그런 장렬왕후의 상중에 확실한 명분도 없이 시증조모상을 지내는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신하들을 사사하는 반인륜적인 행동을 자행한 것이다. 정당한 명분도 없었기에 이것은 유교적인 측면에서도 물론이고 객관적으로 봐도 비정하고 인륜을 저버린 행위이다.[21] 그래서 숙종은 당대의 백성에게 인기가 높았어도 숙종의 면모를 아는 당대의 신하들과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군으로 인식할 수 없는 왕이다.

그래도 숙종은 연산군과는 다르게 정치력은 뛰어난 왕이다. 연산군이 눈에 보이는대로 짓밟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을 사사하고 가족도 억압한 반면 숙종은 어지간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만 사사하고 가족은 건들지 않으며 절제하였다. 그리고 재위 말기에는 왕의 의무에도 무관심하며 사치와 향략에 물든 연산군과 다르게 숙종은 왕의 의무를 절대 잊지 않았고 자신과 무관한 인물은 억압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국정을 방치한 기간은 2년 남짓이지만 단기간에 저지른 추태로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서 폐위당한 반면 숙종은 46년을 재위하면서도 숙청으로 발목이 잡힌 사례가 없다. 포악하지만 정치력은 연산군보다 숙종이 더 뛰어난데 숙종이 무자비하게 숙청을 자행하며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시기가 기사환국을 벌인 1689년이다. 이 시기에는 숙종의 (법적)증조모[22]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장렬왕후까지 사망하여 왕실어른이 아무도 없는 상태였는데 그걸 노린 것이다. 연산군은 노쇠한 조모인 인수대비에게 대놓고 불순한 언행을 저지르고 적모인 정현왕후에게 위협을 가려려 한 탓에 결국 정현왕후와 반정세력에게 폐위당하는데 적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사망한 후에야 숙청을 시작한 숙종은 정치력이 더 뛰어난 왕임을 알 수 있다.

2.3. 환국(換局) 정치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모든 권력이 독점(일당독재화)되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는 식으로 계속 전개되었다.권력 돌려막기

여기서 왕실 종친들,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 복선군, 복평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 인조의 3남)이 서인 세력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고 숙종의 외척들인 서인 김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23] 서당숙인 동평군 또한 장희빈과 남인 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였는데 숙종의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었고[24]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었다.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었고 장인 민유중과 처남 민진후, 민진원, 처숙부인 민정중도 서인이였다. 또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친척인 조사석도 서인이었다.[25] 게다가 숙종의 매제인 오태주[26]도 서인 중진인 오두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 김수항, 김수흥 가문의 종질녀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27]

즉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갔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었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 기축옥사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 것과 비슷했다.[28]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 장희빈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준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환국 정치(換局政治)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더욱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왕을 향한 충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했다.[38]

숙종은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39]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5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너죽고 나죽자 하는 피비린내 싸움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서인→노론)의 일당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겨우겨우 밀어붙여야만 했다.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은 숙종이 균역법이란 이름으로 최초로 만들었다.

숙종은 또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40] 숙종 17년( 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儉弱, 검소하고 절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41] 그 내용을 다룬 만화, 송시열과 윤휴의 혼백이 숙종을 디스하는게 압권.
從古禍人國/莫如黨比酷/東西纔標榜/老少轉橫拆/公道時淪喪/私心日係着/須知殷鑑邇/終始竭忠力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힘은 붕당보다 혹독한 것이 없는데, 동서(동인과 서인)가 겨우 주장을 내세우자 노소(노론과 소론)가 바로 마구 헐뜯어대어 공도는 때로 아주 없어지고 사심이 날로 이어 붙어 있으니 모름지기 은감이 가까운 줄 알아서 끝내 충성의 힘 다하여야 하리라."
숙종실록 숙종 17년( 1691년) 7월 11일 갑자 1번째기사

2.4.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철천지 악연

이렇게 숙종은 피튀기는 환국을 일으킨 끝에, 세자 시절부터 미워했던 서인의 영수, 그 송시열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서 숙종의 증조부 인조, 조부 효종, 부친 현종까지 내리 3명의 선대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도 별 수 없이 끝내 목숨을 잃었다.[42]

숙종의 송시열 사사는 철저한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을 원자로 삼고, 더 나아가 세자로 삼는 것(세자 건저)을 송시열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43]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다고 추측된다. 숙종은 애초부터 송시열을 싫어했던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답게 경종의 원자책봉을 밀어붙였고, 송시열 역시 하던 버릇대로 원자책봉을 열렬히 반대하며 숙종과 각을 세우다[44]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이로 인해 송시열을 따르던 서인계 유생들과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마저 죄다 유배를 보내는 불같은 성질을 보여줬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이 난 숙종은 송시열을 국문(고문)하기 위해 그를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직접 불러들였다. 그때 송시열이 유배지에서 올라오는 길에[45] 그를 따르는 노론 추종자들이 몇백 명이었다고 하며, 점점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송시열을 졸졸 따르는 이가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결국 숙종은 사약을 든 선전관을 출동시켜서 결국 송시열을 사사시켜버렸다.

송시열은 할아버지인 효종을 둘째 아들[46]이라 못을 박고[47], 그 부인인 인선왕후에 대해서도 대공복 주장을 폈다.[48] 이는 적자 - 적손으로 이어지는 숙종의 정통성( 역린)을 건들게 되는 일이니 좋아할리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는 단순 반대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다. 송시열 같은 정치 거물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다면 세자 정통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했던 숙종이 정작 죽을 때 경종 정통성을 크게 훼손해서 노론으로 하여금 경종으로 인정하지 않게끔 만든 게 한편으로는 역사의 아이러니.

숙종과 송시열의 다툼은 야사에서는 숙종 탄생 시기까지 간다. 숙종의 회임 기간으로 볼 때 숙종을 임신한 시기가 하필이면 효종 초상기와 맞물린 것.[49] 야사에선 이때 송시열이 원자(숙종 이순) 축하를 대놓고 디스했다고 한다.[5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단행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학통이 교조화되는 데 한몫한 군주도 다름 아닌 숙종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이런 송시열에 대해 정치적 연륜이 너무 엄청나서 맞대결하기가 더욱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얻기도 전인 즉위 직후인 14살 시절부터 서인의 영수이자 원로인 송시열을 갈구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죄다 내쫓고 송시열을 귀양보낸 게 바로 숙종이었다.

2.5. 치적

국왕으로 재위했던 시절, 숙종은 비록 당쟁의 대립으로 인한 조정의 분열을 예방하지 못하고 사적인 애정관계 또한 잘 다스리지 못해 결국 조선 후기 당쟁의 극한 대립을 초래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학식과 온후한 성품으로 역대 조선조 국왕 중 치세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몇 안 되는 성군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 『肅宗春坊日記』에 나타난 숙종의 세자 생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章閣, Vol.33, pp. 21-40, 주기평)

경제적으로는 대동법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 즉 화폐 제조를 실시했다.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숙종 즉위 초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해 전국의 중앙, 지방 관청에서 유통되었다.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조선 조정에 있어서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숙종의 의도가 적중해서 이후 조선 말까지 화폐 제조를 통한 이익으로 국가 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일본과의 은 무역에서 크게 번영했다.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국가 재정 역시 탄탄했다. 특히 숙종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서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대동법의 영남 / 황해 확대와 후술하는 을해정식을 통한 궁방전 억제 등이 대표적이다. #

조선의 국경도 숙종 연간 사실상 확정되었는데, 조정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널리 알려졌듯 1690년대 안용복 울릉도는 우리 땅(덤으로 독도도)을 외치고 왔고, 앞서 말했듯 북쪽은 백두산에 청과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를 세워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壓綠 東爲土門)을 적어넣었다. 문제는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청나라 관리 목극 등의 문제로 근 170년쯤 뒤에 간도 떡밥이 시작되어 버린 것. 이는 조선 왕실에서도 알아챘기 때문에 숙종실록에 토문강을 치면 간도 떡밥을 분쇄하는 가장 큰 근거가 나온다. 다만 그 뒤에 대한 대응은 적혀있지 않다.

숙종연간인 1678년에 안남왕 희종은 안남( 베트남)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은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그냥 표류한 것으로만 처리하였다.

조선 후기 숙종의 치적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19세기의 민담이 일률적으로 '숙종대왕 호시절에'라는 표현을 채용하는 것으로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는 긴 치세동안 큰 기근들도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환국정치가 있어 평화롭다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매우 긴 46년의 치세동안 조선의 회복과 중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정책을 펼쳤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의 수많은 왕이 평복으로 변장하고 민간에 다니면서 능력 있고 선량한 사람을 발천(發闡)하게 하는 내용의 설화인 조선 시대에서 왕미행설화에서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숙종이다. 정치와 궁중에서 매우 냉혹한 군주였으며, 인구의 감소까지 초래한 큰 기근이 두 번이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수많은 민담에서 백성에게 따뜻한 군주이며 호시절을 살게 한 성군으로 기억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군주라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숙종의 군주로서의 역할 수행에 대해 백성들의 평가가 높았다는 뜻이다.

2.6. 추증과 복권

조선 왕조의 과거사 정리[51]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을 왕으로 종묘에 신원을 회복(신주를 가져다가 모시는 일)시킨 후 깨끗이 복권시켰다.

정종은 본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이라는 짧은 시호만 있어 약칭 '공정왕'이라고 불리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에야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시호 또한 조선의 다른 왕과 동일한 글자 수(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를 갖추게 되었다.

'노산군(魯山君)'이라 불렸던 단종은 숙종 7년( 1681년)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격상되었다가 숙종 24년( 1698년)에 단종의 묘호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의 시호를 받아 복위되었다. 이 때 혜빈 양씨 사육신도 복권되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이유는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므로,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물론 이때도 단종을 폐위, 사사한 실제 책임자가 세조였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았지만 명분상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52]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상왕(上王)으로 존봉(尊封)하신 뜻이 지극히 극진했었는데, 그 때의 대신들이 그 아름다움을 따르지 못하고 정청(庭請)하고 억지로 간쟁(間爭)하여, 세조대왕의 어지신 마음으로 하여금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神)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참으로 오래 되었습니다.
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 1702년) 5월 14일
물론 한 번에 복위한 것은 아니고 이들에 대한 동정론을 배경을 바탕으로,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치기는 했다. 단종 복위 때는 그 기념으로 특별 과거까지 친히 특별히 열었다.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때였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의 역적[53]처럼 간주돼 그 후손들은 연좌제에 따라 족보상으로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다. 인조 때 그나마 군역과 세금을 면제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복권된 건 아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했던 신덕왕후의 아들들인 이방번 이방석도 복권시켜서, 이때부터 이들은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이라는 정식 시호(왕자)로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기도 했다.[54]

숙종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忠)'을 강조하고[55]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56]

숙종 자신이 출생 배경과 성장 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이 여느 왕과 달리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왕권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쯤 폭넓게 들어줘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이 크게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왕권이 강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반대 의견을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의 왕권쯤은 있어야 복권도 할테니까 물론 설사 왕권이 허약했더라도 여론의 뒷받침이 있다면 복권쯤은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영조 때는 김종서, 황보인이 복권되었고 중종의 왕비였지만 즉위 이후 7일만에 폐위되었던 신수근의 딸이 단경왕후로 복권되었으며 정조 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이 복권되었고 순조 때에는 남이도 복권되었으며 철종 때에는 광해군의 사돈이자 소북의 영수인 박승종 또한 복권되었다. 고종 때는 정도전 건국에 공이 있다고 완전히 복권시켰고[57] 인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 유효립도 복권되었고[58] 순종 대에 이르러선 김일경, 유자광, 윤원형, 정인홍 같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들의 대부분과, 심저어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이징옥조차 복권된다. 참고로 이완용이 건의하고 주도했다. 어차피 순종 조에는 이미 일본의 속국 신세(일단 고종이 강제 퇴위에 반발하는 중에 순종의 즉위가 권정례로 치러진 상황)라, 망하기 전에 역사를 정리한다는 차원이었을 뿐이다.

2.7. 국방 정책

숙종은 방위 체계를 수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물갈이하듯 손 봤다.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오군영 제도가 확립된 것이 숙종 대로 평가되는데 방어 체계가 수도 중심으로 재편된 김에 북한산성을 축성한다. 상대적으로 한양도성은 성곽이 너무 길어 수비하기가 어렵고, 강화도는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못막으며, 남한산성 한강을 도강하는 위험함이 있다는 이유였다.

실록에 보면 이 과정에서 신료 사이에 의견이 크게 갈려 싸우게 되는데 숙종은 이미 마음을 먹어놓고선 계속 논의토록 지시한다. 아마도 청나라의 간섭[59] 때문에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711년에 청에서 해구[60]의 준동이 있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와 도성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 험하디 험한 북한산[61] 6개월 만에 성을 쌓아 올리고 행궁을 만든다.

이후에도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방비가 허술하다며 탕춘대성을 만들고, 크고 수비하기가 어렵다고 한 한양 성곽을 고치고,[62] 허술하고 멀다고 한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김포에 문수산성을 축성했다.

또한 추가로 개성 개풍군에 있는 대흥산성을 고쳐 쌓고, 평안도 남포에 황룡산성, 강화성, 경상북도 칠곡 가산산성, 황해도 해주 수양산의 수양산성, 평안북도 염주의 용골산성,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산성을 증개축하고, 남한산성 행궁을 증축한다. 이래저래 성도 많이 짓고 북한산성 행궁 남한산성 행궁에는 각각 행차하여 잠시 지내고 오는 등 재위 동안[63] 수도 방어에 각별한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이때 만들어진 수도 방어 체계는 영조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정조 장용영을 만드는 등 약간의 변화를 거치긴 하지만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덕분에 이때의 산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손실된 내부 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 잘 남아있다.

또 한꺼번에 무과 합격자를 1만 8천여명이나 뽑아서 국방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 중 구관당상을 제도화 한 8도구관당상제(八道勾管堂上制)를 전면 도입하였다. 각 도에 1명의 구관 당상관이 임명되어 군무를 분담하여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처리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터지자 예의주시하며 북벌(北伐)을 준비하는 구절이 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결국 흐지부지 하긴 했지만...[64]

2.8. 정유독대와 최후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세자를 연잉군( 영조)으로 바꾸려는 노론과 경종을 지키려는 소론이 끊임없이 싸웠다. 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자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숙종의 의중은 이미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넘어가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당시나 지금이나 주를 이룬다. 경종에게 후사(後嗣)가 없었고 그가 희빈 장씨의 친아들이라는 점도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자 교체는 그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 정작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경종의 정통성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고, 경종 본인도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경종이 한 발언은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가 거의 전부일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경종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딱히 거둔 성과는 없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실책을 저지른 일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폐세자가 곤란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숙종이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면 왕위 문제가 한동안은 조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기어코 분란의 씨앗을 남기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정유독대(丁酉獨對)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숙종은 노론 이이명을 불러 독대를 한다. 조선 시대에 사관도 없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것은 관례상 불법이었다. 더욱이 왕의 임종이 임박한 시점의 독대는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독대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후 이이명의 말과 행동, 노론이라는 그의 위치로 볼 때 세자 교체나 경종 즉위 후에라도 연잉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된다. 어쨌든 숙종의 정유독대라는 나비 효과는 경종 치세기간 끝 없는 정쟁의 씨앗을 제공했고 신임옥사(신축옥사와 임인옥사)로 이어져 결국, 당사자 이이명을 죽게 만든다.

어쨌든 재위 46년째인 1720년 6월 8일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숙종은 역대 조선 왕 중 사망할 때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된 왕인데 사망할 무렵에는 왼쪽 눈 시력을 잃었으며 오른쪽 눈 역시 잘 안 보이게 되었으며 복수(腹水)[65]가 차서 배가 불룩 나온 상태였다고 하며 사망하던 날에는 계비 인원왕후 세자, 연잉군, 신하들이 와서 엎드리며 울면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하들과 연잉군이 서로 대화하던 사이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피를 토하고 끝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9. 능침

파일:attachment/숙종(조선)/Example.jpg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있는 명릉(明陵). 숙종과 2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나란히 묻혀 있는 쌍릉과 3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가 혼자 묻힌 능 1기가 오른쪽 위 언덕에 따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은 명릉 내에 있지 않고 아예 따로 조성되었다. 서오릉 내에 있는 익릉(翼陵)이 그것. 숙종의 명릉은 서오릉의 능역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다.[66]

덤으로 이 명릉 택지와 관련해서 야사도 있다. 숙종이 암행을 나갔다가 어떤 청년이 딱 봐도 안 좋아보이는 물가에[67] 부모의 묘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물어보니 어떤 풍수가가 그렇게 하라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풍수가가 돌팔이라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고는 청년에게 거금을 하사하고 관아에게 말해서 명당 자리로 이장하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풍수가가 살고 있던 초막으로 찾아가서 화를 내면서 따지니까 풍수가 역시 화를 내며, "그 곳은 거금을 받은 뒤 명당 자리로 이장하게 되는 명당 자리다"라고 자부했다. 이에 놀란 숙종은 자신의 풍수 실력에 그렇게나 자신이 있으면 왜 이런 허름한 초막에 살고 있냐고 묻자, 풍수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풍수를 이용해선 안 되며, 그래도 이 자리는 언젠가 왕이 찾아오는 자리라고 말했다. 숙종이 그러면 언제 왕이 찾아오는 거냐고 묻자 풍수가는 날짜를 계산해보다가 오늘이 바로 왕이 찾아오는 날이라는 걸 알고는 그제서야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왕이라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라 넙죽 엎드려 절했다. 숙종은 그의 실력에 탄복해서 거금을 주겠으니 자신의 묫자리를 봐줄 것을 부탁했고, 풍수가는 천하의 명당 자리를 알려주었으나 사례는 끝까지 받지 않은 채 떠났는데 그곳이 바로 명릉이라는 이야기. 풍수계의 전설 갈처사 개그 요약 버전

3. 가계

4. 선대 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숙종
(世宗)
<colbgcolor=#fff3e4,#331c00> 현종
(太宗)
<colbgcolor=#ffffe4,#323300> 효종
(太祖)
인조
(桓祖)
인열왕후
(懿惠王后)
인선왕후
(神懿王后)
신풍부원군 장유
(安川府院君 韓卿)
영가부부인 김이순
(三韓國大夫人 朔寧 申氏)
명성왕후
(元敬王后)
청풍부원군 김우명
(驪興府院君 閔霽)
김육
(閔忭)
파평윤씨
(陽川縣夫人 陽川 許氏)
덕은부부인 은진송씨
(三韓國大夫人 礪山 宋氏)
송국택
(宋璿)
진주강씨
(達城 夏氏)


숙종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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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순번 작호 생몰기간 모후 비고
<colcolor=#ffd400> 1남 <colcolor=#b82647,#d94767><colbgcolor=#fff> 왕세자
王世子
<colbgcolor=#fff><colcolor=#000> 운
<colbgcolor=#fff><colcolor=#000> 1688년 ~ 1724년 <colbgcolor=#fff><colcolor=#000> 희빈 장씨 20대 국왕
- 왕자 성수
盛壽
1690년 <colbgcolor=#fff>
- 왕자 영수
永壽
1693년 숙빈 최씨
2남 연잉군
延仍君

1694년 ~ 1776년 21대 국왕
- 왕자 - 1698년
3남 연령군
延齡君

1699년 ~ 1719년 명빈 박씨 }}}}}}}}}

5. 여담

나는 기르던 고양이가 죽자 사람에게 싸서 묻어주게 하였는데, 귀한 가축은 아니나 고양이가 주인을 연모한 것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해진 수레 덮개를 버리지 않는 것은 개를 묻어주기 위함이다.”라 하였고, 주석(註釋)에 이르기를, “개와 말은 모두 주인을 도운 힘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은혜를 보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양이가 비록 주인을 도운 힘이 없을지라도 가축으로 주인을 그리워하였으니, 고양이를 베에 싸서 묻어줌이 지나친 것이 아님은 마땅한 일이다.
열성어제, 죽은 고양이를 묻다(埋死猫)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왕 때 금손의 추도문을 지은 것이 어제 안에 실려 있다. 비록 미미한 짐승이라 해도 슬픔을 다하는 말이 있고 말단에는 신명이 흠향하는 말이 있는데, 지금 봉보부인의 치제문에는 슬픔을 다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이 어찌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영조 2년 8월 21일 기사
우리 숙종대왕에 이르러서는 덕이 천지와 짝하고 밝음이 일월과 나란히 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과 백성을 사랑하는 은혜가 사람에게 흡족하고 만물에 미쳤으며, 옥지(玉趾)가 전폐(殿陛)에 임하여서는 우 임금이 죄인을 보고 운 것을 본받았으니, 금손의 이름은 그 양덕(陽德)이 짐승에까지 미친 것이라...

영조 1년 11월 9일 기사

6. 어진

파일:숙종추정어진.jpg
숙종의 익선관본 추정 어진.
일제강점기 당시 익선관본 어진이 원본 + 이모본 형태로 총 2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관리 실수로 인한 화재로 소실된 줄 알았지만... 사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화재 당시 구출한 숙종으로 추정되는 어진 1본이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절반이 훼손된 탓에 용모 파악은 불가능하며 오른쪽 표제가 불타버린 탓에 해당 어진이 원본인지 이모본인지 조차도 알 수 없다. 이 어진의 경우 훼손이 심한 탓에 보존처리만 마치고 수장고에 계속 보관되어 있었고 2019년 하반기에야 공개되었다.

아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해당 어진을 숙종어진으로 추정하게 된 결론의 근거이다.
관모 부분은 소실되었지만 곤룡포를 입었기 때문에 익선관을 착용한 어진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바닥에 깔린 화문석은 조선시대 어진 제작 연대의 지표가 되는 것으로 처음에는 태조와 세조의 어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화문석이 아닌 채전을 그렸다. 채전이 화문석으로 바뀌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숙종대부터이다. 화문석의 용문양을 순조어진( 1830년 도사)과 철종어진( 1861년 도사)을 통해 분석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 용문양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묘사, 채색이 정교해지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와 비교해 보면 이 어진의 크고 거친 용문양은 순조어진보다 더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화문석을 그려 넣은 순조 이전의 어진으로는 숙종, 영조, 정조 어진이 있으며 이 중 익선관본은 숙종과 영조의 어진이다. 곤룡포에 나타나는 양식은 18세기 초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 어진이 숙종의 어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궁중서화Ⅱ_소장품도록 제14책,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 44쪽
열성어진에서도 간략하게 그려진 숙종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다만 열성어진에 실린 어진들은 대체로 조선의 공식 어진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 초상화 또한 숙종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파일:숙종 어진 열성어진본.jpg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 초상화

7. 직접 쓴 글과 시

봄날에 누이를 그리워하다
그대가 세상을 떠난 뒤로
불현듯 벌써 봄이 돌아왔네
심원(공주의 정원)의 나무들이 쓸쓸하고
봉각(대궐)의 티끌이 서글프네
꾀꼬리 소리에 눈물을 흘리고
밝은 달에 배나 마음이 아프네
후덕해도 보답이 없었으니
추억함에 슬픔이 더욱 새롭네
열성어제[96]
누이인 명안공주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남한산성 행궁에 있다가 감회가 일다
천연의 금탄성지가 왕기를 진무하고
봉황 날고 용이 서려 대궐을 옹위하네
군영에 달이 밝아 딱따기 소리 들려오고
행궁에 바람 빨라 피리 소리 드무네
험천[97]에 비가 내려 마음이 아프고
쌍령[98]에 구름 짙어 슬픔이 더해지네
조정 계책 좋지 않아 진실로 한스러우니
충신과 의사가 옷자락에 눈물 적셨네
열성어제[99]
남한산성에 갔을 때 쓴 시이다. 이 시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겪었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8. 대중매체

숙종의 냉혹한 정치관으로 여러 숙청을 행한 왕이긴 하지만 숙종이 다스리던 시절 장희빈이라는 후궁의 등장, 두번째 부인이던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다가 다시 장희빈을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인현왕후를 복위 시키는 등 갈대같은 여성관으로 인해 보통 미디어에서는 여자들의 암투에 휘둘린 국왕으로 그려진다.

8.1. 영화

8.2. 드라마

파일:external/img.kbs.co.kr/695k.jpg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95331_STD.jpg 파일:external/thestar.chosun.com/2013052401809_0.jpg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6032901567_0.jpg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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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사람의 형체가 소실되어 모습을 알 수 없으나 숙종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2] 효종- 현종-본인으로 귀결되어 이어지는 삼종 혈맥의 끝판왕. 2대 독자에 외동아들이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엄친아나 다름 없다. [3] 할아버지 효종이 붙여준 아명으로, 명성왕후의 침실에 뭔가가 이불에 덮여 있는 것을 열었더니 이 나왔다는 태몽을 꾸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숙종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붙여놓은 아명이라 태명이기도 한 셈. [4] 누나와 여동생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막내여동생인 명안공주 1명만 남았으나 명안공주도 가례를 올리고 성년을 넘기자마자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5] 숙종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있었던 왕으로 6대 왕이었던 단종이 있다. 단종은 적자, 적손, 장자, 장손원손-세손-세자-왕이라는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한 정통성을 가진 혈통 끝판왕이었다. 단종의 혈통은 세계사를 모두 둘러봐도 꿀리지 않는 정통성으로 유명하다.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계유정난이 당대에도 명분이 부족한 반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가 바로 단종의 완벽한 정통성 때문이었다. 숙종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현종이 세자가 아닌 왕이었기 때문에 원손 - 세손시절이 없이 원자 - 왕세자 - 왕 단계를 거쳤다. [6] '焞'의 뜻은 '돈'으로 읽을 때에는 '귀갑 지지는 불'이고 '순'으로 읽을 때에는 '밝다'이다. 그러니까 뜻풀이를 통해서도 저 글자는 '순'으로 읽는게 맞다고 명시한 것이다. 이름자의 뜻이 '귀갑 지지는 불'(...)일리도 없고... [7] 소현세자의 자손들도 있으나, 귀양과 석방을 되풀이하면서 종친으로서의 위계와 영향력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철종을 마지막으로 효종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후에는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 순종이 17촌, 18촌 이상 차이나는데도 효종계 직계 혈통에 각각 로 입적되어 차례대로 즉위했다. [8] 명성왕후도 숙종과 똑같이 한 성깔 하는 왕비였다. 숙종 이후 모든 왕들이 까칠하거나 성격이 난폭했던 원인을 따지고 보면 명성왕후의 핏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9] 명성왕후와 장렬왕후 역시 숙종을 통제하기는 다소 애를 먹긴 했지만 그래도 둘 다 왕실의 웃어른으로써 숙종을 분명히 견제할 수 있고 그럴 명분도 많았다. 실제로 숙종은 그들 살아 생전에는 대비들의 친정이 속해있기도 했던 서인들을 함부로 숙청할 수 없었고, 해도 사약 같은 극형을 내리지 못했다. 내명부 문제였던 인현왕후 장희빈 문제는 말이 필요없다. 그러다가 1683년에 대비 명성왕후가, 1688년에 장렬왕후가 사망하면서 숙종을 견제할 인물은 완전히 사라졌고, 결국 장렬왕후가 사망한지 불과 1년만에 국상중인데도 숙종은 참혹한 환국으로 손꼽히는 기사환국을 일으키며 남인까지 폐위를 반대한 인현왕후를 억지로 쫓아내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게 된다. [10] 근데 숙종이 설령 3~6살 정도에 즉위했더라도 친어머니 명성왕후와 친할머니 인선왕후, 법적 증조할머니 장렬왕후가 있었고 숙종의 정통성을 위협할만한 종친도 인조의 숙청을 비롯한 각종 사건에 휘말려 죽고 없었고, 그나마 위협이 될만한 인평대군의 자식들도 경신환국으로 죽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왕권이 형성되었다. 비슷하게 최고의 정통성을 가진 단종의 경우 친모가 산욕열로 사망한 상태였고(문종이 부인을 더 들였다면 든든한 뒷배가 되었겠지만 단종을 낳고 나서 문종이 부인을 새로 들이지 않았다. 또 단종을 일찍 결혼시키지 않아 단종의 든든한 처가를 구성하지 않았다.), 친할머니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세종 역시도 계비를 들이지 않은데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라는 기세등등한 종친이 있는 상황이었다. [11] 현대 왕정에서는 찰스 3세 정도가 조선 숙종에 비견되는 강력한 정통성을 지닌다. 당시 국왕의 장손이자 차기 여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머니의 즉위 직후 10살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어머니의 치세 말엽에는 사실상 공동 국왕 노릇을 하다가 정식으로 즉위했다. [12] 대표적으로 문종, 단종, 의경세자, 인종, 소현세자 등등 [13] 현종의 아들이라곤 숙종 혼자다. [14] 사실 그럴 가능성 자체가 없다. 예종이 계승권이 높은 가까운 촌수의 왕실 종친들을 관직에 아예 못 나가도록 법으로 철저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이 법으로 인해 조선의 왕족들은 경험, 야망, 인맥 등을 가질 모든 기회를 상실했고 이때문인지 예종 이후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역모에 억지로 추대된 거라면 몰라도 태종이나 세조처럼 왕족이 직접 주도한 쿠데타 인조반정 뿐이었다. 단종 같은 상황이 다시 오고 막장 숙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어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물론 왕대비인 명성왕후가 홍수의 변 같은 물의까지 일으키면서 인평대군의 자식들을 견제한 것에서 알수 있듯이 종친은 관직을 못나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족이기 때문에 위협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결국 경신환국으로 인평대군의 자식들인 삼복이 사실상 종친이라는 이유로 숙청이 되었으므로 종친은 여전히 경계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보면 왕실어른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종친들이 처신을 잘못할 때의 결과인 셈이다. [15] 다만 헌종은 워낙 어린 나이(고작 8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단명하긴 했어도 재위 기간은 짧지 않다. 세도정치 때문에 제대로 왕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서 그렇지. 반대로 문종은 재위 기간은 짧은데 아버지 세종의 말년부터 대리청정으로 실권을 쥐어서 실제 통치 기간은 그리 짧진 않다. [16] 문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양녕대군으로, 문종은 왕의 삼남의 적장자로 태어난 것 뿐이다. [17] 원손 - 세손 - 세자 - 왕 - 상왕을 모두 거친데다 정통성도 완벽한 유일한 왕이다. [18] 게다가 효장세자 사도세자나 둘 다 영조 서자다. 영조의 적자가 없어서 문제가 안 됐을 뿐이다. [19] 심지어 친할아버지 효종도 북벌론 이미지가 강해 마초적인 성격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통성 문제를 제외하면 대체로 온화한 편이었다. 사실상 조부모의 성격은 거의 안 물려받았다는 것. 이건 고모인 숙안공주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이쪽은 딸인 공주인데다 응석받이로 지냈을 환경이라는 걸 감안하면 아들이자 국본인 왕세자이기도 한 숙종이 특이한건 맞다. [20] 인자한 성품이었던 친할머니 인선왕후와 아버지 현종의 살아생전인 14살까지도 이런 기록들이 있는걸보면 아무리 혈육이자 세자보다 윗서열인 대비와 국왕이라도 유일한 아들(손자)이 몸도 병약하니 다혈질적인 성격을 표출해도 마냥 누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빗으로 때리면서 말렸다는 기록이 있는 모후 명성왕후,조차도 다혈질인것과 별개로 엄격한 어머니는 아니었고 오히려 훗날의 행적들까지 보면 문정왕후처럼 과보호 하는 타입에 가깝다. [21] 아이러니하게도 장렬왕후는 숙종의 세자시절부터 승하 직전까지도 숙종과 항상 사이가 좋았고 숙종도 지극한 효를 다했다.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사이 좋고 효를 다했던 적증조모가 사망하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 적증조모의 상중에 아내 인현왕후를 억지로 폐위시키고 신하들을 참혹하게 죽인것이니 패륜적인 행위를 했다는 것에는 아예 부정하기 어렵다. [22] 참고로 숙종의 친증조모는 인열왕후 한씨이다. [23] 본래 숭선군은 서인 집안(자의대비의 친정조카와 결혼했다.)과도 혼례를 맺었지만 김자점 일파와의 친분으로 인해서 서인들에게 탄핵을 받자 남인 편으로 돌아선 듯하다. [24] 김좌명은 1671년에 사망한다. [25] 다만 조사석은 서인이었지만 장희빈의 편을 들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애초에 육촌누나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부터가 중전인 인현왕후보다 장희빈을 예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가 사망하고 1년이 지난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에게 토사구팽 당하면서 귀양을 가게 된다. [26] 명안공주의 남편 [27] 일단 종친인 삼복이 몰락하는 경신환국이 일어나면서 이 대리전 자체는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외척 서인들의 승리는 이들 세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면서 숙종을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는 왕실어른인 대비 명성왕후와 대왕대비 장렬왕후 덕분이었는데, 명성왕후 1683년에 일찍 죽고, 1688년에는 장렬왕후까지 사망하면서 숙종 입장에선 골치아팠던 외척 서인들의 이용가치가 매우 떨어진데다 세력은 이미 커진 이들을 더 이상 놔둘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이를 뒷받침하듯 숙종은 장렬왕후가 사망한지 불과 1년 뒤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들까지 숙청하면서 최종적으로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면서 남인이 다시 승리했다. 게다가 조사석마저 기사환국이 일어난 이후 1690년 즈음에 귀양을 가면서 서인 세력은 거의 씨가 마르는 듯 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서인은 다시 부활했고 최종 승리는 서인의 독차지가 되었다. [28] 다만 이 때는 피바람이 한 번 뿐이었지만 숙종 때는 피바람이 숙종 자신의 변화된 입장따라 계속 몰아쳤다. 게다가 선조 때는 정여립의 옥사로 동인들이 많이 숙청되었어도 동인은 야당으로서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균형과 견제가 나름대로 이루어졌지만, 숙종 때 환국 이후로는 야당이 별로 힘을 못 썼다. 게다가 선조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한 지 2년 만에 다시 동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서인은 정권만 내놨지, 보복은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 때 환국이 일어날 때는 보복성 숙청이 많이 일어났다. 보복성 숙청의 시작은 다름 아닌 기사환국이었다. 심지어 선조 이전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때도 사화로 피바람이 불었지만 사림파는 야당으로서 나름 힘을 썼는데 숙종 때는 환국으로 인해 정권이 바뀌면 야당이 힘을 못 쓴 것이다. [29] 사실 현종 15년( 1674년) 갑인환국 이후 남인이 집권한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이 때까지는 좀 붕당 간에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 그리고 피바람도 없었다. [30] 그래도 기사환국 이전까지는 약간이나마 붕당의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졌고, 서인과 남인이 원수지간으로 변했을지라도, 상종의 여지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왕실의 어른인 명성왕후가 대비로 있고 왕실의 최고어른인 장렬왕후가 대왕대비로 살아있었던 것도 약간이나마 붕당의 균형과 견제가 이뤄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31] 많이들 오해하는데 왕비 교체는 남인도 당연 반대했다. 그 명분이 너무 억지였기 때문이다. [32] 권대운 기로연회도(權大運 耆老宴會圖)라는 당시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33] 그래도 재집권 초만 해도 남인들 역시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는 등 서인과 상종의 여지는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듯 했지만, 서인의 거물급에 속했던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사를 당한 데 이어서 온건파였던 오두인, 박태보가 폐비 반대 상소를 올리다가 곤장을 심하게 맞고 귀양가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역시 온건파였던 이상진도 귀양에 처해진데 이어서 조사석도 귀양에 처해지고 민암 일파와 장희재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사이는 더더욱 나빠졌다. 심지어 이 때는 숙종의 어머니였던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도 한참 되었고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장렬왕후마저도 세상을 떠난 것도 당쟁이 사생결단으로 격화되는 데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34] 이후 남인은 다시는 제1당으로 올라서지 못했다. 크게 보면 동인에 대한 서인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35] 신사의 옥으로 인해서 당쟁은 사생결단 식으로 더욱 격화되었는데 그래도 신사의 옥 이전까지는 겉으로나마 유지되던 붕당의 균형이었지만, 신사의 옥 이후로는 붕당 균형이 완전히 파괴되기에 이른다. [36] 특히 이 사건을 기점으로 노론은 완전히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를 모두 완벽하게 장악했고, 이미 육조의 판서 자리도 완벽히 장악했다. 이미 무고의 옥 이전인 재위 22년인 1696년부터 노론이 정승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 사건으로 좌의정과 우의정은 노론 세력에 완벽히 넘어간다. [37] 다만 병신처분 이전까지는 소론도 같이 등용했다. [38] 해외파 중에서는 관우였고 조선의 인물 중 충의 상징으로 내세운 인물은 사육신이다. 남효온의 육신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선비들 사이에 사육신과 단종 복권론이 있긴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던 것을 실행에 옮기고 강조한 이가 숙종이다. 이후로 사육신의 사적을 복원하는 사업도 착착 진행된다. 사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사육신의 시조는 모두 원래 원작자 미상으로 전해오던 것을 숙종 ~ 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사육신의 것으로 '비정'된 것이다. [39] '신임사화'라고도 하나, '사화'란 사림이 화를 당한다는 의미이므로, 사림 대 훈구 구도가 종식되고 사화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40] 이것은 숙종의 성장환경도 영향이 있었는데 제일 큰 건 신하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정치를 펼친 아버지이자 부왕인 현종(조선)이 30대 초반에 나이에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14살이라 아버지 현종과 추억도 많았고, 천성적인 성격은 달랐을지라도 부자간의 관계는 좋았던지라 숙종은 아버지인 현종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것이 현종을 힘들게 한 신하들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나마 장렬왕후 생전까지는 나름대로 현종의 유지를 받들고, 신하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장렬왕후까지 사망하면서 이러한 태도도 아예 없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장렬왕후 사망 1년차에 기사환국을 일으키게 된다. [41] 후대에 당쟁이 가장 격화된 시기를 숙종의 시기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말이다. [42] 이 때 송시열이 사약 1사발에 약발이 돌지 않고 안 죽자, 3사발을 먹여서야 죽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사약 참조 [43] 송시열 曰 : " 중전의 춘추(나이)가 아직 미령(微齡, 어리신데)하신데, 후사(後嗣)를 들이시나이까"라는 간언으로 나아가 여차하면 머리 풀고 도끼 반대상소라도 할 작정으로 누구보다 격렬히 반대했었다. [44] 종묘에 고한 일을 뒤집으려했을 정도로 날뛰었다. [45] 당시에 국문이란 문자 그대로 고문 받고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게다가 송시열은 당시 80세가 넘어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었으니 그야말로 고문받다 죽는 것은 자명한 일. [46] 둘째아들 - 仁祖之次子. [47] 이렇게 대놓고 못을 박아버리면 효종은 정통성에 있어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차기 왕 현종과 그 아들 숙종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왕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48] 강빈 신원을 현종조에 주장하기도 했지만, 소현세자빈을 신원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숙종이었기에 이는 관련이 없다. [49] 원래 유교 사상으로 볼 때 상중에는 부인과 동침도 안 해야 한다. 예학이 교조화된 조선 후반기엔 시부(시아버지) 상중에 임신한 부인이 자살하는 일까지 나온다. [50] 사실은 상경하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기일을 못 맞추게 되자 송시열이 이것을 이유로 다시 고향으로 귀향해 돌아갔다. [51] 일종의 역사 바로잡기 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현대의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과도 닮아 있다. 조선총독부 철거 문서 참고. 다만 세부적으로 보면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보다는 노무현 정부 이후에 추진한 진실화해위의 과거사 정리와 어느 정도 닮아있다고 볼 수 있다. [52] 이건 굉장히 대단한 일인데 단종과 크나큰 악연이 있는 세조는 숙종 본인의 10대조 직계 조상이기 때문. 세조 이후의 조선 국왕들은 누가 뭐라 해도 모두 세조의 직계 후손들이다.(항렬상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인종/명종-선조-광해군/원종-인조-효종-현종-숙종)원래 세조 다음의 왕들은 단종을 추모하는 건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므로 단종에 대한 언급은 국왕들이 과민 반응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사화도 일어났는데, 수백년 대통이 이어져내려온 이상 이제 조상인 세조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자신의 정통성에 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왕의 권위가 크게 단단해졌기에 가능해진 것. [53] '사실상'인 이유는 회안대군과 그의 가족들은 한순간 직계 종친의 권세를 잃고 귀양 가는 선에서 그쳤기 때문. 대신 박포가 죄를 다 뒤집어 쓰고 처형돼 오랫동안 2차 왕자의 난이 박포의 난으로 불렸다.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안대군의 아들 이맹종은 위험 분자로 인식돼 결국 세종 때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게 된다. [54] 민회빈 강씨 사례 또한 위의 단종 사례만큼이나 대단한 건데, 그 누구보다 민회빈 강씨의 복권에 적대적으로 나온 사람이 바로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이었기 때문.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자식들을 챙겨줬을지언정, 형수인 민회빈 강씨만큼은 역강(逆姜)이라 표현할 정도로 자기 정통성에 있어 극도로 민감해서 그녀의 복권을 주장한 신하들을 처벌할 정도로 절대 신원시켜주지 않았다. [55] 그런 목적으로 단종의 충신들도 모두 복권되었다. 사실 사육신은 야사 논외로 치고 보면 정말 (조선 왕들이 좋아할 만한) 충신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육신이나 김종서, 황보인 등은 그렇다 쳐도 일개 무당까지 복권해서 위패를 배식단에 올려주는 후대 왕들의 행적을 보면 그 목적이 아주 노골적으로 보인다. [56] 역시 정통성에서 문제가 적었던 현종은 이러한 사안에서 무신경했는데 이는 아들인 숙종의 입지가 매우 탄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숙종은 정실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였고 후계자인 경종은 사친 장희빈이 사사당한 약점, 경종 이후 왕이 되는 영조는 사친이 한미한 무수리로 죽은 남편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거짓 소문(영조는 숙빈 최씨의 둘째 아들이기에 숙종의 자식인 점은 확실하다.)이 떠도는 등 후계자가 되는 두 왕자 모두 정통성에 크나큰 결함이 있었기에 이러한 작업 특히 단종과 그 충신들의 복권은 후계를 생각한 작업이라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선조 때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4대 사화에서 피해를 입은 사림파 인사들이 복권되기는 했지만 이 때 당시만 해도 김종서, 황보인 사육신은 복권이 되지 못했고 심지어 단종도 아직 일개 왕자로 불리는 노산군으로 남아있었다. 다만 그 이후로 광해군, 인조 등을 거치면서 조금씩 복권 여론이 생기기 시작해서 효종 때 단종 복권 논의와 현종 때 신덕왕후가 일단 복위되면서 복권 여론이 공론화 되기 시작하더니 숙종 때 본격적으로 과거사 정리가 추진되었다. [57]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처음 경복궁 한양도성을 기획하고 궁궐 내 각종 전각의 이름을 붙인 정도전의 업적을 인정해 그를 신원 복권시켰다. [58] 인조 6년에 반정을 계획했다가 잡혔는데 놀랍게도 광해군과도 접촉하였으며 광해군의 친필 편지도 있었다. 때문일까, 광해군은 사건의 실패를 접하자 한동안 밥도 먹는둥 마는둥 하며 서럽게 울었다고. [59] 조선은 호란의 패배로 인해 전쟁 준비가 일절 금지되어 있었다. 산성의 축성과 수리는 청나라 사신이 꼬투리 잡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문제였다. 자세한 것은 병자호란 참고. [60] 실록에 해구로 적혀있는데 왜구로 보거나. 이양선으로 보기도 한다. [61] 봉우리를 이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성벽을 따라 돌면 북한산 봉우리를 전부 돌아볼 수 있다. 이런 험한 산지에 성을 쌓고 보초가 기거하는 성랑을 만든 고생은 답이 없을 수준이다. 오늘날 성곽을 복원하는데 있어 헬기가 돌을 실어 나르는데 이를 등짐(사람이 하나하나 짊어서 옮기는 작업)으로 일일이 올렸다고 생각하면 그 고생이 짐작될 것이다. [62] 여담이지만, 숙종 시대에 축성된 부분은 돌들이 하나같이 크고 아름답다. 기본 가로세로 2(60cm)인 돌들이 한몸처럼 꽉꽉 짜맞춰져 있으니, 조선 전기에 축성된 부분이 짱돌처럼 보일 정도. [63] 재위 기간도 긴편이었다. [64] 이때 갑인예송 이후 정국을 주도하던 남인 측에서 북벌을 주장하며 군사권 장악을 시도했다. 이에 숙종은 남인을 경계하게 되었으며 이는 경신환국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5] 배에 물 또는 고름이 차서 밥을 먹어도 그대로 뱉어버리는 심각한 증세이다. [66] 나머지 서오릉의 능들은 정자각 쪽에서만 구경할 수 있고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없다. [67] 현실적으로 봐도 물이 불으면 무덤이 쓸려나갈 수 있다. 풍수고 뭐고 그냥 안 좋은 자리인 셈. [68] 승정원일기 354책 (탈초본 18책) 숙종 19년 10월 10일 경진 13/18 기사. 승정원일기 18책 (탈초본 354책) 숙종 19년 12월 13일 임오 7/11 기사 [69] 새로 탄생한 왕자(王子)가 졸(卒)하였다.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7월 10일 임오 1번째기사》 [70] 숙종은 김수항, 김수흥, 민유중, 민정중, 민시중, 김만기, 김만중, 김익훈, 김석주, 조사석, 정치화, 정지화, 정재숭, 오두인, 민진후, 민진원, 조태채, 민진장, 민진주, 조태구, 조태억 등의 외척들을 중용했다. 다만 숙종은 장렬왕후의 사망 이후부터는 기사환국을 통해 본인도 맘먹으면 외척을 내칠수 있다는 걸 증명하였다. 오히려 붕당 간의 화합을 무너뜨리며 훗날 외척의 발호 여지를 남겼다는 것. [71] 고려 시대의 고종 역시 정확히 45년 10개월이나 왕위에 있었다. [72] 비슷한 시기 청나라 강희제(61년)와 건륭제(60년)가 121년 재위한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숙종과 영조는 부자지간이지만 강희제 건륭제는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이다. [73] 이 때 숙종이 '선조 대왕도 임진왜란 후에 사배(四拜)를 드렸다'라는 전례를 근거로 들었는데 선조는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준 상황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데 반해 숙종은 진심으로 빠돌이 마음가짐이었다. [74] 관우와 현실 정치는 별개로 봤는데 특히 이 시기 북쪽에서 많이들 들어온 중국 이민자들이 재조지은이나 상국을 운운하며 차이나타운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 강제 부역이 가미된 동화정책을 실시해 정리해버렸다. 조선에서 살고 싶으면 세금을 내라는 것이 숙종의 지론이었던 것. [75]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으로 처음 보네. ㅡ <현충사 제문>. 여담으로 숙종의 증손자인 정조 또한 이순신 빠돌이로서 이순신을 아주 높이 평가하여 정1품 영의정으로 추증할 정도였다. [76] 《숙종실록》 권38 숙종 29년 12월 무인. “召對玉堂官 講東國通鑑 至高麗安市城事 上歎曰 高麗 一小國耳 以善守城名 能抗隋唐百萬之師 我國地方 比高麗倍之 山川險阻 古今一也 而丙子之亂 虜兵如入無人之地, 竟有下城之辱 言念及此 不覺痛心 [77] 땅의 넓이가 아닌 국력의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고구려의 만주는 척박한 땅이여서 크기에 비해 별 가치가 없었고 조선은 백제+ 신라의 땅에 고구려의 주요 곡창 지대였던 대동강 유역까지 차지한 국가였다. 고구려의 권역을 정확히 알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만주의 가치를 낮게 생각하면 고구려의 최대 권역은 만주+ 대동강+ 한강 유역 정도인데, 숙종은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만주가 추운 지역이다보니 가 자라기에 부적합한 것이지 엄연히 만주는 큰 이 여기저기 흐르고 땅도 비옥하고 여름이면 적절히 도 오고해서 지금도 옥수수, 대두, 밀, 보리와 같은 밭농사를 짓기에는 최적의 지역이다. 다량의 고품질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고 풍부한 산림 지대가 이어지는데 이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보다 더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78] 특히 인현왕후의 폐위는 정말 생억지에 가까울정도로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에 남인들까지 반대했을 정도였다. 하다못해 인성 문제로 후대에 까이고 후궁을 더 예뻐한 선조도 정실인 의인왕후가 40이 넘어도 자식을 못낳는데도 내치지 않았으며, 인조도 후비인 장렬왕후를 홀대할지언정 내쫓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신하된 당연한 도리로 반대한 사람들을 자신의 말에 거역한다는 이유로 싸그리 귀양or사형과 고문을 일삼았으니 바른 말을 해야할 신하는 숙종 대에 남을래야 남을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왕권을 강화한다는 명목하에 외척이란 이유로 자기 처가와 사돈인 심온을 무고하게 죽인 태종도 바른 말 하는 신하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역할을 하는 대간의 역할을 위축시키려는 대신들의 제안을 거절했을 정도. [79] 물론 이 시기 신하들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는데, 왕의 의도에 부화뇌동해 상대당파 제거에만 바빠 환국의 공범이 되었다는 것. [80] 폐단이 더할나위 없이 크던 왕족의 토지 사유 등을 방치 [81] 을해정식으로 황무지를 개간해서 땅을 무한정 늘리는 '절수'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고 이제 각 궁방은 매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아울러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가 시행되어, 궁방은 소유권과 무관한 민전에 호조수세분(戶曹收稅分)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절수지의 규모를 대략 200결 단위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궁방전의 확대와 이후 궁방재정 통제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다만 을해정식은 지금까지 절수된 궁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정확히는 을해정식 7년전 무진정식 이후)부터 절수될 궁방에 대한 것이기에 저자가 이부분을 설령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저자의 비판이 유효한 부분은 있다. 즉, 앞으로는 특권을 내려놓겠다면서 이제까지의 특권은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시적인 면세지 감축 규모도 을해년 무진년 사이에 칠년동안 절수된 삼천결에 불과했고 개혁의 성과가 이처럼 초라하다는 비판은 타당한 면이 있다. [82] 여말 선초와 같은 대격변기가 아닌 이상, 특히 조선 시대와 같은 보수적 유교 사회에서 세법같이 민감한 주제의 개혁은 임금 하나가 마음먹는다고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동법이 실시되기까지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까지 100년 동안 엄청난 수의 논의와 다양한 중간 조치들이 있었음을 떠올려 보자. 영조 시절 균역법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도 숙종 시대의 여러 조치들이 기반이 되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83] 세종도 백부인 정종이 승하하여 장례를 치를 때 지나치게 소식한 나머지 신하들이 걱정할 정도였고 좋아하던 고기도 먹지 않아 애간장을 태웠다. 이후 어머니였던 원경왕후가 사망하여 상중이던 세종에게 아버지인 태종은 세종에게 고기를 허락했고 심지어 자신의 사후에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세종은 고기를 먹게 하라고 미리 지시한다. 이런 태종의 조치는 후대에 모범이 되어 상중이라도 허약해질 정도로 하지 말자는 인식이 자리잡는다. [84] 오태주는 글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고 스스로도 시를 즐기던 숙종은 오태주와 시를 주고받았다. 이 시기 왕실의 문서에도 숙종이 오태주를 통해서 지은 문서가 많다. 그런데 오태주의 아버지이자 명안공주의 시아버지인 오두인은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지독한 국문을 받았는데 결국 국문 후유증으로 유배 중에 사망하였다. [85] 사실 어찌보면 당연했던게 명안공주가 사망한 1687년 당시 숙종과 가까운 혈육은 명안공주 밖에 없었다. 어머니 명성왕후는 4년전에 사망했고, 고모인 숙안공주를 비롯한 효종의 딸들이자 현종의 누이들은 사리사욕과 권력욕이 넘쳐서 조카이자 국왕인 숙종의 신경을 긁어대기만 했다. 거기다 당시 숙종과 피는 안섞였어도 사이가 좋았던 대왕대비 장렬왕후도 병환이 깊었던 상태였고, 실제로도 명안공주 사후 1년 뒤인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후궁 장옥정이 출산을 하기도 전에 창경궁 내반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86]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사람이 지혜를 기르려면 배워야 한다. 좋은 글솜씨를 갖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스승님을 자주 찾아뵈어 여쭤봐라." [87] 살림집과 정자. [88] 근데 실록에는 연잉군의 가례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연잉군에게도 들인 비용이 많았다는 당시의 견해가 있었다. [89] 실제로도 조선 왕들 중에서는 제일 오래 살았으니 그의 말대로 되었다. [90] 헨리 8세가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파탄난 인성 및 막장적인 사생활과 더불어 본인의 조강지처인 캐서린에게 악질적인 여러 행위들 때문이다. 왕의 말이 거의 신의 말이라는 인식이었던 근대 이전의 강력한 왕권 국가라도 왕의 막장적인 행태를 모두 마냥 용납하진 않았다. 헨리 8세와 숙종이 본인들의 왕비인 캐서린 왕비와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는데 애먹은 것도, 여전히 안좋게 평가받는 것도 인현왕후와 캐서린의 친정이 각각 왕가와 명문가라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하들의 반대도 큰데다 정치를 잘 모르는 당시 백성들조차 안좋게 볼정도로 악질적이었기 때문이다. [91] 첫번째 계비 인현왕후, 희빈 장씨, 인원왕후 모두 실록의 행적들을 보면 객관적으로 지고지순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원왕후는 그나마 왕비 시절에는 겉으로나마 그런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는 숙종의 정치적 계산으로 들인 왕비인데다 숙종의 성격이 꼬장꼬장한걸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를 말릴 왕실어른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기 때문에 강제로(...) 그런 처세를 할 수 밖에 없던것에 가깝다. 반면 정비 인경왕후는 대놓고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지고지순한 성격임이 묘사되었고 그런 성격인거치고는 숙종의 변덕 때문에 힘들어한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게다가 둘이 부부가 되고 숙종이 즉위할 시점에 사춘기인걸 감안하면 갈등이 특별히 없었던게 은근 대단한셈. [92] 숙종은 인경왕후가 천연두에 걸리기 전까지 관계를 가지며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인경왕후가 천연두에 걸리고 금방 사망하였는데 숙종도 그 당시 앓아누웠고, 아들인 국왕 숙종의 심신을 걱정한 대비 명성왕후는 인경왕후의 죽음을 하루 늦게 전해주었다. 숙종은 이에 매우 슬퍼했고, 이후 어머니 명성왕후의 압력으로 인경왕후의 3년상도 제대로 못 치르고 새로 왕비를 맞이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 간택된 계비 인현왕후에게 애정을 갖지 못했으며 이런 숙종의 마음을 대왕대비인 장렬왕후가 캐치하여 명성왕후 사후에 쫓겨난 희빈 장씨의 환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93] 다만 인경왕후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원인 중 하나가 천연두에 걸리기 이전부터 임신과 유산을 반복하고 그 와중에 낳은 딸(공주)들이 모두 죽어서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였다는 것도 감안해야한다. 그래도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면 인경왕후는 어쨌든 산욕열로 죽지는 않았고, 제인 시모어와 캐서린 파는 사실상 산욕열 하나로 인해 일찍 사망하게 됐다는 것. [94] 참고로 숙종의 고모인 숙명공주도 소문난 냥덕이었다. 다만 고양이에 대한 애정 성향이 고모에서 조카로 직접적으로 이어졌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95] 현재 유료화 [96] 김남기 번역본 [97] 병자호란 중이었던 1636년 12월 29일에 있었던 전투를 뜻한다. [98] 병자호란 중 조선군이 패배한 전투가 있었던 곳 [99] 김남기 번역본 [100] 사실 이 드라마에는 송시열이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드라마에서 숙종 당대의 실제 신료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극중 조정 대신들의 모델이 되는 인물은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좌의정 오태석( 정동환 분)은 남인의 영수이자 우의정을 지냈고 갑술환국으로 숙청되는 민암이 모델. [101]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숙종의 손자인 사도세자 역을 맡기도 한다. [102] 여담으로 당시에는 아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담배처럼 그닥 나쁘지만은 않았던 모양인지 왕족이나 양반들이 아편을 즐겨 피웠다는 기록이 왕왕 있는 편이다. 비슷한 시기 청나라의 황제인 건륭제나 도광제도 아편을 즐겨피웠다는 기록이 있다. [103] 머리채를 잡는건 대본에는 없었던 최민수의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104] 사극들을 보면 '과인'이 남발되는 경향이 있는데 '과인'은 왕이 스스로 자신의 과실을 인정할 때 등 스스로를 낮추는 경우에 한정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평소에는 평범하게 '나'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왕조실록> 상에는 '여(予)'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 스스로를 '나'로 지칭하는 극의 숙종은 고증이 잘 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