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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22:34:42

장용영

壯勇營

1. 개요2. 상세3. 진짜 목적
3.1. 참조
4. 출신 인물5.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정조 대에 조직된 국왕 친위부대. 정조는 국왕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임시로 숙위소(宿衛所)라는 기구를 만들었고 홍국영을 숙위대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1779년에 홍국영이 쫓겨나자 숙위소도 폐지되었다. 이후 몇 년 뒤에 정조가 새롭게 조직한 친위 부대가 바로 장용영이다.

2. 상세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1782년에 명하여 무예출신(武藝出身)과 무예별감(武藝別監) 중 장교를 지낸 사람 30명을 뽑았다. 1785년에 추가로 20명을 뽑아 장용위(壯勇衛)가 발족되었고 이것이 장용영이 설치된 시초이다. 50명으로 시작한 장용위는 이때부터 꾸준히 해마다 인원을 늘려 왔는데 나중에는 그 수가 무려 2만여 명에 달하였다.[1] 장용영은 오군영에서 군사를 흡수하여 이에 못지 않은 규모의 별도의 강력한 군사 조직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수어청 총융청이 큰 타격을 입었다.[2] 장용영은 내·외영으로 구성되었는데 내영은 국왕 경호, 수도 방어 등의 임무를 위해 도성에 주둔하고 외영은 수원화성에 주둔하였다.

장용영의 지휘는 처음에 장용영병방(壯勇營兵房)이 맡았다가 1788년에 군영이 된 이후 대장을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장용영의 문서들에는 대장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래서 장용대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장용외영의 사령관인 장용외사(壯勇外使)는 수원유수(화성유수)가 겸직하였다. 당시 무반 중 유망주들이 장용영의 파총(把摠), 초관(哨官) 등 지휘 보직에 발탁되었고 장용영 출신 인사들이 19세기에 군영대장으로 발탁된 사례가 제법 있다.[3]

정조 자신이 직접 설립한 조직인 만큼 각별히 대했는데, 훈련도 자주 참관하면서 살펴보았고 활쏘기 시험도 자주 열었다. 복리후생도 빵빵했다. 장용영 군병 중에 부모의 상을 당한 자에게는 휴가 1백 일을 주고, 빈궁한 자들에게는 3기분의 보포(保布)를 미리 주어 구휼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4] 하지만 장용영은 대규모 조직으로 운영에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하여 환곡 둔전이 대규모로 조성되었는데 특히 환곡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는 정조 말년부터 비등하였다.

장용영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정조가 승하하자 사태는 급변하였다. 순조의 장인이 될 김조순,[5] 순조의 외조부 박준원[6]이 장용대장을 맡기도 했지만 장용영을 해체하고 그 막대한 재정을 활용하자는 논의는 대세가 되었다. 사실 장용영 자체가 정조가 양위한 뒤에 화성으로 내려가고 난 다음에 호위를 맡게 할 군대이기 때문에 없앤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해체를 주장한 심환지도 "그거 선왕이 필요해서 하신 건데 이젠 없애죠?" 라고 했다. 이후로도 장용영은 영구히 복구되지 않은 걸로 보아 시파 정권이나 그 이후의 이들도 장용영 해체는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남인인 정약용조차 장용영의 폐단이 적지 않음을 목민심서와 다산시문집에서 지적하고 있다. 결국 1802년에 대왕 대비였던 정순왕후 김씨의 명에 따라 장용영은 폐지되었다. 수원화성의 방어를 위해 수원에 주둔하였던 장용외영은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총리영(摠理營)으로 개편된다. 수원화성 역시 정조 시절에 비해 위상이 약화되었다.

여러모로 5군영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단순 군부대의 역할만 하던 타 군영과 다르게 신무기로 무장한 특공대 성격에 국왕을 호위하는 경호업무와 국왕 직속으로 활동하는 정보기관의 역할까지 다양한 업무를 맡은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국왕 직속에다 군사력까지 막강하다보니 상급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병조나 비변사도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며 무과 합격자 중에서도 최상위권 합격자들만 갈 수 있었던 보직이라고 알려져 있다.[7]

현대 대한민국 국군의 편제에 빗대어보자면 국군방첩사령부 육군특수전사령부, 수도방위사령부가 유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8]

3. 진짜 목적

장용영의 설치 목적은 정조의 호위문제보다는 조선 국방 체제 개혁과 군영통합으로 인한 지휘 체계 군사 일원화이다. 당시 조선은 중앙의 오군영체제로 운영되었는데, 문제는 이 오군영체제가 체계적인 계획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기관이다보니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다. 오군영으로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수어청, 총융청을 말한다. 훈련도감이 설치된 이유는 조총이라는 신무기 앞에 쓰러졌던 조선육군의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조총 및 화포 등 신무기의 사용과 체계적인 군사를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인조는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겪자 국왕경호와 도성방어 강화를 목적으로 어영청과 총융청, 수어청이라는 새로운 군영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또한 1680년( 숙종 6년)에는 훈련별대와 정초군을 합쳐 금위영을 설치하여, 기존의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과 함께 도성방어를 담당하는 중앙오군영 체제를 완성하였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도성방어가 주 임무였고, 수어청은 도성외곽의 남쪽(남한산성 중심)을, 총융청은 도성외곽의 북쪽(북한산성 중심에서 이후 1747년(영조 23년)에 탕춘대성으로 출진)을 방어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문제는 당시 조선의 빈약한 조세수입에 비해서 군영이 너무나도 과다했다는 점이다. 각 군영이 재정조달을 목적으로 둔전을 경영하였으나 당연히 이것만으로 운영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훈련도감의 경우 둔전 경영, 생선과 소금 판매, 시장에서 땔감, 숯, 건초 강제징수, 세곡 운송업(전라도 연해안 일대), 서적(군사훈련용 병서, 시문집, 국정수행 서적 등) 인쇄 출판 판매 등을 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경비를 조달할 수 없었기에 삼수미세를 징수하게 된다. 삼수미세(三手米稅)[9]란 전세에 기본 전세 외에 추가적으로 특별조세를 부담하게 한 것이다. 삼수미세는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시국에 설치된 것이지만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유지된 조세이다. 삼수미세 징수실적을 보면 1648년에는 약 4만석, 1671년에는 2만 5천석, 1691년에는 5만 5천석, 1701년에는 4만 9천석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의 1년 조세가 10만~15만석 정도로 추정된다.)

어영청의 경우 후금 방어 목적으로 수립된 부대이다. 어영청의 재정은 정군과 보인으로 구성했는데, 정군 1인당 보인은 총 3인이었으며, 보미는 쌀 12말, 보포는 포 2필이었다. 당연히 이것으로 재정이 충당되지 못하였고 숙종시대 이후에는 군영이 주전의 특권, 화폐발행권을 받게 된다. 주전의 이익이 엄청나서 한때 10만 냥에 달했다고 한다.

금위영의 경우 인조시대 정초군과 현종시대 훈련별대을 섞어 만든 부대이다. 여기서 정초군은 서인세력이 계속 장악해왔고, 훈련별대는 별도의 무력적 기반을 필요로 했던 남인세력에 의해 만들어졌다. 숙종시대 여러 환국을 거쳐, 최종적으로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해서 만든것이 금위영이다. 금위영은 어영청의 예를 따라 만든 기관으로 원칙적으로 보인에게 징수하는 미포로만 운영되어야 했으나 1684년 따로 토지를 매입하여 둔전을 설치함으로써 군영운영의 새로운 전례를 만들었다. 전남 완도의 약 70결을 매입하여 둔전으로 확보하였다.

수어청은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가 설립한 군영이다. 수어청은 처음부터 둔전을 설치하고 둔전에 둔병을 배치하여 그들이 납부하는 둔세를 주요 재정기반으로 하였다. 수어청의 둔전은 경기에 17곳, 충청 4곳, 강원 3곳, 황해 8곳 등 전국에 총 48곳에 이르렀다. 수어청의 둔전의 규모는 다른 군영들과 비교해서 가장 컸다고 한다. 그 규모는 약 1852결에 해당한다고 한다.[10]

총융청은 경기도의 군대를 개편하여 만들어진 군영이다. 총융청의 재정기반은 둔전과 환곡이었다. 총융청은 둔전을 통해 확보한 재정을 환곡을 통해서 그 규모를 키웠다. 약 10%의 이자를 받았고, 한때는 모곡의 양이 전체 세수의 3분의 1 규모에 해당했다.

문제는 이러한 오군영 모두 위에서 언급한 방법으로 재정을 확실히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은 군역에 의존하게 된다. 조선말기 군포가 가장 큰 말썽을 부린 이유는 오군영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죽은사람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이 군포를 부담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정조는 오군영을 하나의 군영으로 통폐합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 장용영이다. 초기 장용영의 시도는 실패했다. 둔전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는 목적이었는데, 충분한 재정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당시 둔전을 관리하는 둔감의 횡포가 심각했다. 이에 정조는 장용영외영을 화성유수부에 설치하여, 장용영 가족들과 유이민 그리고 화성유수부 농민들까지 둔전경영에 참여하게 하였다. 즉, 개간한 토지를 둔전용으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저수지 축조와 둔전경영을 통해서 화성유수부의 토지는 증가했고,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또한 기존의 군영이 지니고 있던 조세권과 부서를 장용영으로 이전시켜 하나의 군영으로의 통폐합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장용영의 조세규모는 커져갔고, 정조말기에는 호조가 장용영에게서 재정을 대출받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화성건축의 경비가 모두 장용영에서 나왔다.

3.1. 참조

최학심, 조선시대 훈련도감과 기타 중앙군영 및 장용영의 재정조달에 관한 연구

4. 출신 인물

5. 관련 문서


[1] 단, 조선 시대 군영의 총원을 전력과 등치하는 것은 곤란하다. 훈련도감을 제외한 군영들의 인원 중 상당수는 복무를 군포 납부로 대체하는 인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용외영의 실복무 병력은 3,175명 정도였으며, 여기에 유사시 동원되는 성정군 등이 포함되어 2만 명을 채운 것일 뿐이었다. [2] 수어청과 총융청은 각각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수비를 관장하는 군영이었지만 본청을 한성에 두고 있었다. 1795년에 수어청은 장용영에 인원을 대거 이전하고 한성에 있던 본청을 매각한 뒤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3] 하지만 세도 정치기의 군영대장 임용은 세도 정권 인사들이 대거 발탁되어 이전과 의미가 달라졌다. [4] 정조 25권, 12년(1788년 무신) 2월 10일(계묘) 1번째 기사 출처 [5] 이때까지 정식으로 순조의 혼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정조가 생전에 김조순 집안을 사실상 낙점하다시피 한 상황이었고 정순왕후 김씨도 김조순을 사실상 국구로 대우하고 있었다. [6]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아버지.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과는 먼 친척이다. [7] 실제로 조선 후기 무관들 중 장용영 보직을 시작으로 육군참모총장 격인 훈련대장이나 대장 급이라고 볼 수 있는 총융사, 수어사 등을 거쳐 정승, 판서까지 올라간 사례가 꽤 있다.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의 한국군 엘리트 코스인 수방사령관/특전사령관에서 기무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한 후 3군사령관을 맡은 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는 코스와 상당히 유사하다. [8] 대통령 직속기관은 아니지만 국방부 직속기관으로 활동한다는 점, 현재는 폐지되었지만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재껴놓고 대통령에게 독대 형식으로 대면보고를 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유사하다. [9] 조선시대 전세인 세목의 하나. 농민의 원성을 샀던 특별 지세의 하나로, 훈련도감에 두었던 포수(砲手) • 사수(射手) • 살수의 삼수군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설치한 세제이다. 선조 35년(1602)에 실시하여 고종 31년(1894)까지 이어졌다. [10] 금위영이 약 67결, 어영청이 약 327결, 총융청이 약 968결, 경리청이 약 44결이었다. [11]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404029_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