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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守禦廳조선의 오군영을 구성하던 군영. 남한산성을 방비했다.
1626년 인조 때 수어청을 설치하여 남한산성을 수비하였다.
2. 역사
광해군 때 경기 병사 겸 총융사였던 이서의 관할 하에서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했으나 병자호란 이후 독립적인 군영으로 분리되어 수하에 수어청을 설치하게 된다.[1]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다. 수어청의 대장은 수어사(守禦使)였다. 수어청은 약 1만 6,500명의 병력을 보유하였으며, 이들의 주요목표는 남한산성의 방위였다. 초기에는 본부가 도성 북부에 설치되고, 한성부윤이 수어청의 업무도 겸하되, 주요 방어거점인 남한산성은 광주 부윤(종2품)이 운영하였다.이런 지휘계통의 이원화는 당연히 문제를 불러일으켰고,[2] 거기다 붕당이 극심화되면서 특정 당파의 군사력 독점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정조는 1795년 본부를 아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 유수(정2품)가 수어사를 겸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에 있던 수어청은 호조로 편입되었다. 수어청은 1795년 정조가 장용영을 만들면서 통째로 흡수되었다가, 정조 사후 장용영이 공중 분해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물론 예하 병력 대다수가 각 고을 소속이나 속오군화되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던 수어청이었으나, 정조 이후에는 아예 수어사가 광주 유수 겸임으로 바뀌어 독자적인 지휘체계를 갖지 못하게 되고, 군영으로서의 성격을 잃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지못미하게도 최초로 철폐된 오군영이 되기에 이르렀다.
3. 복식
수어청의 군사들은 당시 조선군의 표준 복장이였던 전립과 청전복[3]을 착용하였으며 갑옷은 입지 못했던것으로 보인다.(기록에 없음)
[1]
정확히 설명하자면
정묘호란 때 독립적인 군영이 됐으며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 방어를 전담하게 된다.
[2]
덧붙여 정조가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에 힘을 몰아주기 위한 정치적 포석도 수어청의 개혁에 한 몫 했다.
[3]
마병의 경우 홍색 소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