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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8:10:51

아랍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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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아랍의 봄/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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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여름 新아랍의 봄, 아랍의 여름
관련 인물 모하메드 부아지지,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와엘 그호님,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호스니 무바라크, 무함마드 무르시, 무아마르 카다피, 알리 압둘라 살레, 바샤르 알 아사드
기타 튀니지 혁명,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리비아 내전, 예멘 민주화 운동, 예멘 내전, 2011 이집트 혁명,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바레인 반정부 시위, 이라크 내전, 이라크 반정부 시위 }}}}}}}}}


1. 개요2. 상세3. 혁명의 특징4. 시위의 이해5. 아랍권 시위6. 비아랍권 시위7. 세계의 반응 및 끼친 영향8. 평가
8.1. 왜 완성될 수 없었는가?8.2. 서구의 인식 변화8.3. 다른 나라들과의 차이점
9. 新아랍의 봄 또는 아랍의 여름10. 관련 문서
10.1. 관련 인물
10.1.1. 튀니지10.1.2. 이집트10.1.3. 리비아10.1.4. 예멘10.1.5. 시리아

1. 개요

الشعب يريد إسقاط النظام
인민들은 정권 타도를 원한다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혁명으로 폭발하여 2011년에 절정, 그리고 2024년 현재까지도 여파가 미치고 있는 아랍권의 민주화 시위.[1] 아랍의 정의는 다양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1945년 설립된 아랍 연맹에 속해있는 국가를 말한다. 자세한 건 아랍 문서 참고.
파일:external/hespress.com/presidentarab_bnzz.jpg
2010년 10월 10일, 리비아에서 아랍- 아프리카 정상회담에 모인 4명의 독재자.
왼쪽부터 벤 알리( 튀니지, 망명, 사망), 살레( 예멘, 정권이양, 암살),
카다피( 리비아, 사살), 무바라크( 이집트, 축출, 사망).

2. 상세

2010년 ~ 2011년, Arab spring Timeline(아랍의 봄)[2]

아랍권 국가들이 장기 독재 중인 정부의 부패, 인권의 유린, 빈곤 등의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큰 원인이 되었나, 결정적으로는 2007년~ 2008년 사이에 있었던 21세기 첫 세계 식량위기가 영향을 미쳤다.

세계 금융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2009년을 전후로 막대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식량가격이 떨어졌다. 그러나 전세계의 많은 전문가들이 '식량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으로 잠시 무뎌졌을 뿐, 위기는 머지않아 다시 시작될 것이다'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2010년에는 세계 경제 상황이 다시 호전되고 러시아가 흉작으로 식량, 특히 밀 수출을 막기 시작하면서 금융위기 이후 잠시 내려가던 국제 식량 가격은 다시 오르기 시작, 21세기 2번째 세계 식량위기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2007-2008 식량위기와 2010-2012 식량위기는 세트로 같이 엮이는 경우가 많다. 아예 둘을 합쳐서 2007-2012 세계 식량위기로 지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찌 됐든 이러한 식량위기 사태에 달러화 약세까지 겹치면서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아랍권의 경제와 식량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3][4] 이에 따라 민중들은 정부에 곡물 가격 문제 해결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각지에서 소규모 시위, 분신 시도 등이 벌어졌고 이것이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프랑스가 주식용 빵값을 규제하듯이, 하술할 정권이 뒤집힌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대부분 식량자급률이 형편없어 자기들이 먹는 주식인 밀조차 수입하는 세계 최대의 밀 수입처이고, 그마저도 미국이나 유럽산 밀은 가격 문제 때문에 대부분 흑해를 통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의 밀을 수입해 먹었다. 그러다보니 밀값이 널뛰면 당장 국민들이 굶게 되고, 국민들이 굶주리면 눈이 돌아가 정권도 널뛰기 때문에 식량가격 안정을 위해 국가가 책임지고 밀가루를 저가에 공급했다. 보조금을 지급하면서까지 가격통제를 해왔는데 이것이 무너진 상황이 당시 북아프리카의 밀 부족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기의 이유로는 설명하기 힘들 만큼 시위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너무도 큰 규모로 일어났다는게 문제. 초기에 안정적으로 보였던 국가들조차도 어이없이 무너져내렸으며, 약발이 잘 먹혔던 오일 달러 분배 정책도 효과를 잃었다.[5]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정보화다. 줄리언 어산지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튀니지 벤 알리 일가의 부패상이 "튀니리크스"라는 사이트로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도 벤 알리가 축출된 한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당시 튀니지뿐 아니라 다른 아랍권 국가들의 부패상도 위키리크스를 통해 어느 정도 까발려졌기 때문에 아랍권 정계는 유례 없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더욱이 튀니지에서 국민들이 벤 알리를 축출하는데 성공하자 다른 나라 시위대에게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격이 되었기 때문에 시위는 점점 격화되었다.

이렇게 정치 지도층의 적나라한 부패 아랍권의 트위터 등으로 퍼지며 혁명이 시발하는데 상당부분 일조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 위키피디아 # 경향신문 기사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는 케이스가 시리아다. 시리아는 아랍권에서 가장 강력한 유무선망 도청과 검열체계를 갖춘 나라이기도 하며, 이미 시리아는 그 저주받은 지정학의 문제로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국가가 시리아를 뜯어먹기 위해 숟가락을 얹은 탓에 나라가 쑥대밭이 됐고, 이중 가장 시리아 이권 뜯어먹기에 필사적인 이란과 러시아가 아사드 정권을 비호해 밀어붙인 결과, 시리아 땅에 풀한포기 안남아도 아사드 정권은 유지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3. 혁명의 특징

'아랍의 봄'이 처음 언급된 시기는 2005년 초기였다. #, #

가장 기본적인 혁명의 목표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였다. 한국의 경제구조에만 살다보면 체감하기 힘든 문제인데, 아랍의 봄으로 정권이 넘어간 수많은 나라들의 특징은 산업의 내재화가 되어있지 못하고 식량자급률까지 떨어져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들조차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환율 악화, 국제 원자재 가격상승 하나만으로도 일상 생활이 흔들릴 정도로 내수경제의 요동이 심하다. 괜히 대한민국이 어떻게든 쌀만은 자급자족하려고 국가적으로 밀어붙인게 아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먹을 것을 달라는 식량가격 안정화와 공급요구였지만, 이것이 일종의 뇌관이 되어 그동안 쌓여있었던 사회, 민생경제 등 각자의 불만이 어느순간 합쳐지더니 순식간에 정치적 요구로 연결되고 있으며 부패한 정권의 교체나 인권 보장, 민주주의 확립 등의 요구가 나왔다. 물론 이런 목소리가 모두 일치한 것은 아니다. 2011 이집트 혁명의 영상에서도 볼 수 있지만 요구사항은 정말 다양했다.

IT의 발전 역시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시위대는 트위터 휴대 전화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직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또한 카타르 알 자지라가 아랍권 방송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혁명에 대해서 상세히 보도하였기 때문에 점점 더 주가가 올랐다.

또한 아랍권 내부에서 그동안 묻혀 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여성 지위 향상,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소수민족들이나 정치적으로 약세인 종파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당연하지만, 민생경제 악화때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자들이 사회적 약자기 때문이다.

결국 시위의 불길은 연간 밀 수입 상위국가들인 북아프리카 국가들부터 마치 다이너마이트 도화선처럼 주욱 타들어갔고, 결국 그 폭탄이 리비아에서 터지는 바람에 도미노처럼 시아파가 주도 세력인 이란이나 사하라 사막으로 떨어져 있는 중부 아프리카 일대는 물론 지중해를 사이에 둔 서유럽, 심지어 저 멀리 떨어진 중국에까지 시위가 번져나갔다.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은 권역별, 국가별로 주된 이유가 달랐다. 그러나 종파, 민족, 정치 부패 등의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귀결되는 문제는 삶의 질의 문제다. 상술한 모든 것을 수입품에 의존해야하는 경제구조로 인한 생활물가의 폭등, 아랍권 전역에 뿌리 깊게 퍼져있는 계급적 사회 구조와 그에 따른 부의 분배의 불평등과 참정권의 불평등 등. 그래서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비교적 부의 분배와 참정권의 평등을 점진적으로 진행해 가고 있는 국가의 소요 사태는 극히 미미하거나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대체로 혁명 이후 들어선 신 정부들의 기본적인 성패가 이와 동일함을 볼 때 이러한 주장은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빵과 참정권이 시위의 발단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세속주의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의 과실은 종종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창하는 권위주의 정권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아랍 권역의 특수한 사회적 현상이자 중심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의 종파간 갈등과 그에 따른 역학 관계, 그리고 이집트 케이스와 같은 군부의 정권 장악 역시 혁명의 진행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혁명의 본래 정신과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음은 그간의 중동의 현대사에서 반증되었다. 결국 시리아와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위는 2012년이 되면서 잦아들었다. # 분석기사 - 멀어저 간 봄날

이라크 전쟁이 아랍의 봄을 일으켰다는 가설도 있지만 이는 억지 및 확대해석으로, 굳이 정확히 보자면 이라크 전쟁 이후 일어났던 시민들의 일부 반사담 후세인 저항 및 동시에 일어난 반미군정, 반친미정권 시위들이 이후 아랍권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한다.[6] 당연히 미국과 영국, 이라크 친미 및 친서방 정권의 이라크 침공은 제대로 된 명분도 없었고 '민주화 작전'이라면서 나중에는 일부 정치인 중에서 이라크 바트당 출신 정치인을 올리려고 제안하거나 올리는 등 모순적인 행보를 보여왔다.[7] 애초에 침공 자체가 민주주의와는 거리도 있었고.[8] 2005년 1월 퍼플 혁명이라 불리는 사건이 있었지만 이는 사담 후세인 몰락 이후 이라크 최초의 민주선거였을 뿐, 나중에 이 선거로 뽑힌 정치인들도 무능한 준독재를 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2018년과 2019년 후기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들이 열렸다.

2009년-2010년, 아랍의 봄이 일어나기 직전, 이란에서 이란 민주화 운동(녹색운동 또는 녹색혁명이라고도 부른다)이 일어났는데, 비록 이란에서는 미완성, 정권퇴진 실패로 끝났지만 나중에 2010년 12월 아랍의 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9]

4. 시위의 이해

각국의 기성 언론들은 대부분 사실을 외면했으며 정부는 알 자지라나 CNN, BBC, NYT와 같은 해외 언론의 취재를 저지하였다. 이집트에서 알 자지라의 등록을 취소하고 수 명의 스탭을 강제 억류했던 것이 그 예. 기자에게 대놓고 사격을 하기도 했고, 이집트의 경우에는 저격수에게 사망한 기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바레인의 경우 헬기가 기자를 향해 사격하기도 하였다.

대신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과 관련 사진 및 영상이 전해졌다. 시위의 뇌관이 되는 영상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전해졌고 페이스북 그룹이나 트위터를 통해 시위의 일정이 전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이 그렇듯이 시위가 격화되면 정부는 SNS의 접속을 차단하며 아예 인터넷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를 우회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이 강구되었다. 구글에서는 이집트의 인터넷 차단을 우회하기 위해 휴일임에도 개발자들이 모여서 Speak2Tweet 서비스를 만들어서 정해진 전화번호로 음성 메시지를 남기면 #egypt의 꼬리표를 달고 트위터로 글에 올라가는 서비스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구글은 이집트 외에도 리비아와 같은 인터넷이 차단된 국가로 Speak2Tweet 서비스를 확대하였다.

대규모 시위는 금요일에 많이 열렸다. 이슬람 신자는 금요일에 반드시 예배를 봐야 하며 이로 인해 금요일은 사실상의 휴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5대 의무 중 하나인 صلاة‎(Salah)의 일부분인 جمعة(Jumu'ah)이며 꾸란에 규정되어있기에 정부가 모스크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는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아랍권의 시위는 금요일 모스크에 모인 사람들이 시위대로 자연히 바뀌는 패턴을 보여왔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역시 금요 예배 직후에 있었던 시위에 탱크와 헬기를 동원한 발포로 수천 명이 사망한 '검은 금요일' 사건이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금요예배를 주관하는 성직자들의 성향에 따라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집트의 경우는 성직자들이 반 무바라크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위가 더 격화되기도 했지만, 2009년 이란의 경우 금요 예배를 하메네이가 직접 주관하면서 반정부 시위대를 비난하여 동력을 꺾기도 하였다.

2011년 8월에 이슬람권이 라마단 기간에 들어서면서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기로에 들어섰다. 대부분의 나라는 시위가 잦아들었으나 이를 뛰어넘은 나라들은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튀니지, 이집트를 제외하면 완전한 민주화 운동이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랍권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5. 아랍권 시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osni_Mubarak_facing_the_Tunisia_domino_effect.png

카툰과 같이 전형적인 도미노 효과가 예상되다.

Carlos Latuff의 그림.

각국의 순서는 첫번째 시위 발생 날짜를 기준으로 하였다.

혁명이 성공한 곳은 ※로, 반쯤 혁명으로 보기도 하는 경우는 ☆로 표시하며, 옆의 년도는 독재 정권이 붕괴된 해이다.[10]

5.1. 튀니지※ (2011)

2010년 12월 18일 첫 시위 발생, 2011년 1월 정부가 타도되고 3월 정권 교체 완료. 그러나 2021년 전후로 다시 독재로 회귀하고 있다. 튀니지 혁명 문서 참조.

5.2. 알제리※ (2019)



2010년 12월 28일 시위 첫 발생. 큰 규모의 시위. 최소 8명 사망, 수백명 부상.[11] 부패, 장기독재, 빈곤 등으로 이집트의 상황과 비슷한 알제리가 다음 타자가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알 자지라에서도 알제리에 대해 특집 페이지를 만들면서 주목하고 있다. 튀니지의 시위 직후 시위가 발생했으며 부아지지와 같은 분신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11년 2월 12일, 수도 알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출처. 2천 명의 시위대가 수도 알제의 '5월 1일 광장' 에서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했으나 3만 명의 경찰들이 진압하고 말았다. 알제리 민주화 연합 단체는 2월 18일 다시 시위를 하기로 예정하였다. 미국은 당국의 시위 진압에 우려를 표했다.

알제리 당국은 2월 14일, 19년 동안 계속된 비상사태를 '머지않은 시간 내에(within days)' 해제하기로 하였다. 19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였지만 강력한 경찰의 압박으로 중심부에 모이려는 행동을 저지하였다. 25일 계속 되는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알제리 정부가 그동안 계속 유지해오던 비상 상태를 해제하였다. 이후 잦아들었다. 독재가 유지되고 있지만 시위대와의 협상을 통하여 탄압을 중지하였고 시위대들도 시위를 적게 하는 등 절반은 성공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8년 이후 2019년 2월부터 4월까지 시위가 다시 나타났고, 그 영향으로 부테플리카는 결국 사임했다. '히라크'라는 명칭으로 기념되고 있다.

5.3. 리비아※ (2011)

정권 교체 완료.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리비아 내전 문서 참조. 하지만 카다피 사망 이후 들어선 반군 정부가 이슬람주의 세력과 세속주의 파벌 간의 대립으로 인해 이슬람주의 세력의 트리폴리 정부와 세속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토브룩 정부로 분열되면서 내전이 재발하였고 다시 재발발한 내전으로 인해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안샤르 알 샤리아와 다에쉬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혼란한 상황이지만 최근 다에쉬와 안샤르 알 샤리아 등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을 제외한 토브룩 정부와 트리폴리 정부가 아프리카 국가들과 유엔, 서방국가의 중재하에 통합 연립 정부 구성에 합의하였다. 다만 아직까지는 때때로 크고 작은 분쟁이 드문드문 보이는 양상이다.

5.4. 요르단

2011년 1월 14일 시위 첫 발생. 리파이 내각이 개편되었다.

1월 28일 금요기도 이후 수천명의 시위대가 고물가와 실업 문제 등 경제난에 대한 불만으로 시위를 벌였다. 정권 퇴진 구호는 이 상황에선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았다. 그러자 재빠르게 압둘라 2세 국왕은 2월 1일 사미르 리파이 총리 내각을 해산하고 군 장성 출신인 마루프 알 바히트(바키트) 전 총리를 재기용했으며 이슬람 지도자를 만나 개혁 방안을 논의하는 행보를 보였다. 또한 쌀과 설탕, 연료 등의 주요 생필품 가격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무슬림 형제단 등의 야권 정파가 입헌군주인 압둘라 2세의 축출까지는 목표로 삼고 있지 않기에 이 정도로 마무리 될 것 같다는 예상이 나왔다.

2월 9일 마루프 알 바히트 총리는 좌파 노조주의자와 무슬림 형제단의 전 회원, 여권 운동가 등의 야권 인사를 등용한 통합 내각을 구성함으로서 야권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야당격인 무슬림 형제단은 직접적인 내각 참여는 거부했지만 개혁을 지켜보겠다고 하면서 한 발 물러섰다.

2월 18일 이런 조처에도 수도 암만에서 2천여 명의 왕의 권력 제한을 외치는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경찰과의 충돌로 부상자가 나왔다.

20일 압둘라 2세 국왕은 조속하고도 실효성 있는 개혁을 약속하면서 보수적인 관료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25일 금요기도 후 주민들과 이슬람 행동전선을 비롯한 20개 야당의 야권 지도자, 노동조합원들이 모여서 6천 ~ 1만명 가량이 모여 6주 연속 금요일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하지만 약속된 개혁이 더딘 모습이 보이자 계속해서 불만이 제기되었으며, 몇달 후 국왕 압둘라 2세는 정당들의 불만에 바히트 총리와 바히트 내각을 해산시켰다. 국왕은 다시 아운 카스완네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관을 새 총리로 임명했다. 총리는 다시 파예즈 타라우네흐로 교체되었으며, 2012년 10월 10일 타라우네흐의 뒤를 이은 압둘라 엔수르 총리까지 요르단의 부패 척결, 개혁행보는 현재 진행형이다. #

5.5. 수단 공화국※ (2019)

2011년 1월 17일 시위 첫 발생. 작은 규모의 시위. 식료품 가격 안정과 인권 문제 해결 등을 촉구하다가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위에 고무되어 요구사항을 정권 퇴진으로 확대시켰다고 한다.

2월에 접어들어선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쪽은 아무래도 남부 수단의 분리 독립이 더 중요한 문제였던지라... 1993년 이후 계속 권좌에 있는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2010년 대통령 선거가 가장 최근 선거였으며 수단 헌법상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

2015년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에도 독재는 이어졌으며 2019년 4월 11일 시민들의 저항 및 쿠데타로 알바시르는 결국 축출되었다. 하지만 수단 시민들은 그 이후에도 군부에 저항을 하고 있다.

5.6. 모리타니

2011년 1월 17일 분신을 통한 항의가 있었으나 이후 시위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

5.7. 예멘※ (2011)

예멘 민주화 운동 문서 참고.

5.8. 사우디아라비아

2011년 1월 21일 시위 첫 발생. 분신이 있었다고 하며 1월 28일에는 두번째로 큰 도시이며 최근 홍수를 겪은 제다에서 사회 기반 시설 건설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시위 15분만에 경찰이 중단시켰다고 하며 30~50명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23일 허리디스크 수술로 인해 몇 달 동안 사우디를 떠나있던 압둘라 국왕이 사우디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리기도 전에 15% 가량의 임금 인상, 학비와 실업자 지원 등으로 40조를 내놓기로 하였고 2014년 말엔 교육-SOC-의료 개선을 위해 450조원을 내놓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항상 그러하였듯이 오일 달러로 불만을 무마하려고 하고 있다. 시위가 발생하지 않고 있는 사우디이며 대부분의 전문가도 사우디는 이번의 반대 물결을 비껴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하고 있지만 주변 국들의 변화에 내심 걱정을 하는 듯.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둘러싼 국가들이 전부 난리를 겪고 있는 데다가 수니파-시아파 관계가 비슷한 바레인의 시위 상황이나 수니파 강국인 이집트가 정권이 바뀌었으니.

28일까지 직접적인 시위는 일어나진 않고 있지만 대신 각 계층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한이나 탄원서가 계속 올라오고 있고 유화책 발표 이후에도 불만을 가진 국민들이 많기 때문에 언제 또 한순간 폭발할지는 모르는 상황이다.

이번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향후 진행 상황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과연 사우디에서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나는지다.

3월 11일 사우디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 인터넷상으로 시위 언급이 금지되어있으나 시위 관련 페이스북의 팔로워 수는 시위 하루 전인 3월 10일 현재 3만 3천명 가량으로 꽤 많은 상황. 요구는 입헌군주제, 여성 인권 보호, 정치범 석방 등이다. 주소는 https://www.facebook.com/revolution.hanin이지만 아랍어 크리.

그리고 11일 시위가 일어났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경찰 등의 강경 대응으로 해산되었다.

14일 사우디는 계속 되는 반정부 움직임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바레인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국 군대를 파병하였다.

현재 아랍권의 다른 중요한 축이였던 이집트가 혁명으로 무너진 만큼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 페르시아 만 일대 독재 국가들이 시위로 무너지지 않도록 지원해주는 스폰서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부랴부랴 불만을 다독이고자 무려 5천억 리얄(150조원!)이라는 거액을 쏟아부으면서 공무원 및 군인들에게 엄청난 월급 및 수당, 여러가지 복지 혜택을 준다고 압둘라 국왕이 직접 발표했다. # 그러나 공무원직에만 혜택이 돌아간다고 민간기업 근무자들의 불만이 되려 더 커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도 공무원 철밥통인 듯. #

6월 28일에는 사우디 의회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현지시각 9월 25일 드디어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5.9. 이집트※ (2011)

정권 교체 완료. 2011 이집트 혁명 참조.

5.10. 파일:시리아 아랍 공화국 국기.svg 시리아※ (2024)

가장 최후에 벌어진, 그리고 가장 장기화 되고 있는 혁명(내전). 여타 나라에서 무너진 구 집권주체들이 강대국들의 명시적인 지지와 군사적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것과 다르게,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다른 나라에 비해 극소수인 종파와 민족이 정권을 독점하면서도 러시아[12] 라는, 자국의 안보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력한 동맹을 확보했다. 튀르키예와 쿠르드, IS와 이라크,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수준으로 내전이 벌어졌지만[13], 아사드 정권은 근 13년간 건재했다.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문서 참조.

2020년 6월 7일부터 6월 15일까지 시리아 남서부, 정부군의 영역 중 한 곳인 수와이다 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시리아의 총리 이마드 카미스가 물러났다. 이마드 카미스는 아사드가 고용한 총리였다. #

2024년 12월 8일, 13년만에 러시아 이란의 도움이 없는 사이 미국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는 반군에게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었으며, 이에 따라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축출되었다.

5.11. 모로코

2011년 1월 30일 작은 규모의 시위가 발생하였고 분신을 통한 항의가 있었으나 금세 가라앉았다. 페이스북을 통해 2월 20일의 시위가 조직되었다.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서 3~5천여명의 시위대가 모여서 국왕(무함마드 6세)의 권한 축소, 총리 퇴진, 경제 평등 확보 등을 외치면서 튀니지와 이집트 국기도 흔들었다고 한다. 최대도시 카사블랑카에서는 4천여 명이, 마라케시 등 20개 장소에서 시위가 열렸다고 한다.

21일 시위가 끝난 후 불탄 시체 5구가 발견되었다. 백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왕정에서 이를 의식한 듯 6월 19일에 왕권을 상당 부분 축소하는 입헌군주국 개헌안을 발표했고 7월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권력 축소가 안 되면서 시위가 계속 되었으나 잦아들은 편이다. #

2013년 8월 모로코 국왕이 스페인 국적의 아동성범죄자를 사면하여 출국시키면서 2년만에 시위가 격화되었지만 결국, 국왕은 철회했다. #

지금 현재 모로코는 아랍권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손 꼽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중동 및 아랍과 유대인 문화권에서는 이스라엘, 튀니지 다음으로 민주주의 지수가 높은 나라이다. 그리고 국왕이 계속 인권개선이나 사회개혁 행보를 걷고있어서 사실상 모로코의 아랍의 봄은 거의 성공했다고 볼수있다.

5.12. 지부티

2011년 2월 1일 시위 첫 발생. 큰 규모의 시위로 최소 두 명 사망.[14] 같은 날 약 300여 명의 시위대가 수도인 지부티 시티에서 오마르 구엘레 대통령의 다음 선거 미출마와 자유 보장,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의 시위는 별 충돌 없이 평화롭게 끝났다.

18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기장을 차지하고 시위를 벌이다가 시위가 격화되면서 몽둥이와 최루탄으로 진압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하는 시위대가 충돌을 빚었다.

19일 충돌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최소한 한 명의 경찰과 한 명의 시위대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 21일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졌으나 이후 잦아들었다.

5.13. 바레인

2011년 2월 4일 시위 첫 발생.

자세한 정보는 바레인 반정부 시위를 참고. 바레인 왕실은 국민들에게 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동시에 일부분 강압적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일부분은 개혁되기도 했다.

5.14. 이라크

2011년 2월 10일. 작은 규모로 첫 시위가 발생. 이라크 전쟁 이후의 치안 불안을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2월 12일. 공공 서비스에 대한 접근과 사법 시스템의 부정부패 척결 등을 외치며 바그다드와 카르발라 도시 지역에서 수백 명의 시위가 있었다. 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 누리 알 말리키 총리는 2014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하고 월급을 자진 삭감하여 절반만 받기로 하였다.

16일, 이라크 동부 도시인 쿠트에서 주지사의 사임과 공공 서비스의 확충을 이유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시위를 벌였다. 진압 과정에서 3명이 숨지고 30여명이 다쳤다.

17일, 이라크 북부 도시인 쿠르디스탄의 술라이마니야에서 수백 명의 시위대가 부패와 고실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다쳤다.

18일, 이라크 남부 도시인 바스라에서 천여 명의 시위대가 주지사의 사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5일 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바그다드 거리를 메웠으며 다른 도시들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이 날 보안군의 발포로 최소 1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쳤다. 시아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라크는 바레인 시위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걸프 국가들이 반발하고 있다.

2012년, 2013년, 2014년 1월에 걸쳐서 부패한 총리의 불만에 대한 반정부시위/항쟁이 연달아 일어났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그 시위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중에 막장인 ISIL이 본격적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결국 2014년 이후 최악의 사태로 연결되고 말았다. 이라크 내전 참조.

2018년 이후로 IS 세력들이 거의 토벌된 뒤에는 이라크인들 스스로 폭력에 의존하는 행위의 위험성을 깨달은 것인지 총까지 든 내란 수준의 폭력시위는 확 줄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불만이 없어진 건 아니어서 내부의 부패 및 부정선거로 인한 의혹 등에 대한 불만에 의거한 일반적인 시위는 계속되었으며, 2019년 10월 시위가 다시 나타났다. 결국 2019년 10월 31일, 이라크의 새 총리는 유혈진압에 대한 책임으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또다른 시위가 나타나는 중이기도 하다. 결국 11월 28일에 마흐디 총리는 사퇴하였고, 2019년 12월 27일에는 대통령조차 물러났다. # 이라크 반정부 시위 참조.

사담 후세인 바트당 정부가 이라크 전쟁으로 붕괴되지 않고 이때까지 존속했거나 혹은 사담 후세인의 아들인 쿠사이 후세인이 대통령이 되는 등 부자 세습이 이뤄졌다면 잔혹한 유혈 진압이 일어났거나 이웃나라 시리아처럼 종파간 내전으로 발발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사담 후세인 추종 및 잔존세력과 새로운 정권과의 분쟁이 제2차 이라크 내전 등 2019년 이전까지 이어졌다가 종식되기도 했었다.

5.15. 소말리아

2011년 2월 13일 작은 규모로 시위가 발생. 너무 헬게이트라 되려 시위가 없을 것만 같던 소말리아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수도 모가디슈의 임시 정부 청사 앞에서 청년 수백여 명이 모여 정권 퇴진과 생활 안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소말리아는 정부가 있긴 해도 정부가 정부가 아닌지라(...)

5.16. 쿠웨이트

2011년 2월 18일 작은 규모로 첫 시위 발생. 2월 8일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숨진 상인의 치사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의사당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 계획이었으나 정부가 내무장관을 긴급 경질하면서 집회 일정을 1달 미루었다.

18일, 북서부의 자흐라과 술라이비야에서 유목민의 후손이며 무국적자인 비둔인 1천여 명이 모여 국적 및 혜택 부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최루가스와 고무총탄 등을 사용해 강제 해산을 하였으며 최소 7명이 다치고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5.17. 오만

2011년 2월 19일 시위 첫 발생. 큰 규모의 시위. 오만은 술탄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 국왕이 40년째 재위하면서 아랍 동맹 국왕에서 최장 기간 집권했다. 그러나 카부스 국왕은 독신으로 자녀가 없으며 후계자도 없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인척들조차 정부 요직에 기용하지 않은 상황으로서 국왕 이후가 불안정한 상황. 정세가 비교적 안정적이던 오만에서도 결국 시위가 벌어졌다!

26일, 국왕은 개각을 단행하면서 일자리 5만개 창출과 구직자에 매달 390달러(45만원 가량)의 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유화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2월 19일, 수도 무스카트에서 작가와 교수 등 800여 명의 시위대가 의회에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할 것을 촉구하는 거리 행진이 벌어졌으며 26일, 소하르에서 진행된 시위에는 1천여 명이 참가했다. 이 시위 진압 과정에 2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당하면서 시위 열기가 차츰 늘어갔다.

27일, 소하르 등지에서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가 열렸다. 도로를 막고 슈퍼마켓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경찰이 고무탄을 발포해 시위 참가자 6명이 숨졌다.

28일, 소하르에서 소하르항의 접근 도로를 트럭으로 막고 700여명이 '오일 달러의 공평 분배'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초, 정부가 개각과 "슈라 위원회" 역할 확대로 시위대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시위는 상당히 잦아들었다. 6월에도 시위가 있었으나 시위자 30명이 구속되는 등 소요는 말끔히 해결되어버렸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Qabus_bin_Said.jpg

이는 오만 국왕이 " 르네상스"에 비견 할만한 개방과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파 출신으로 1970년 아버지[15]를 영국의 지원을 받은 무혈 쿠데타로 몰아낸 후 무스카트·오만 왕국에서 오만 왕국으로 국호를 바꾼 것도 국왕. 즉위 직후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1996년 기본법(헌법)을 만들었고, 2003년 전 국민에 참정권을 부여했으며, 매년 초 2∼3개월 간 각료들을 대동하고 각 지방을 돌며 민의를 살피고 이를 국정에 반영한 것도 국왕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역시 이러한 특성 때문에 막았다. # 결국 오만 시위의 원인은 정치 개혁과 민생 해결이지, 반국왕이 애초에 아니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1940년생) 오만 국왕의 후계 문제는 왕권 유고(사망)시 3일 이내에 왕가 회의인 통치가문위원회가 선출하도록 되어있는 상태이다.

9년 후인 2020년 1월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가 40년의 통치 끝에 지병인 암으로 사망하였다.

5.18. 레바논

2011년 10월 7일 금요예배 후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바샤르 알 아사드의 인형을 불태우는 등의 시위를 벌였다. 2015년 7월 ~ 8월에는 거리 주변의 쓰레기로 인한 문제로 반정부 시위가 다시 나타나기도 했으며, 2019년 10월, 이라크의 영향으로 레바논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나타났으며, 레바논의 하리리 총리가 사퇴를 밝혔다.

5.19. 팔레스타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 대한 자료 유출의 책임을 지고 협상 대표가 사임한 것도 연관하여 내각을 개편하기로 하였다. 추가로 6년 만에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일단은 선거제로 열리기에 그다지 큰 시위는 없을 듯 했는데...

요르단강 서안의 파타와 가자지구의 하마스로 나뉘어있는 분열을 해소하고(정치 및 여러 당들이 통합하는 것)[16] 함께 공동의 적(=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자는 것을 기치로 하여 시위가 조직되고 있다. 전에 시도가 있었으나 가자지구에서는 하마스에 의해,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서는 파타와 이스라엘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집트 연대시위 또한 이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다시 인터넷상에서 3월 15일 날을 거행일로 시위가 조직되고 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뿐 아니라 요르단과 레바논의 난민 캠프에서도 이루어질 예정이며 이미 수천 명의 지지자가 생겼다.

파타와 하마스는 단합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카이로와 같은 것을 원한다면 허가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등 시위에 대한 거부감을 밝혔다. 여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도 있다.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향방을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과연 팔레스타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지 였으나, 이는 압바스 행정 수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다. 2차 가자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확실한 반 이스라엘 + 국가 인정의 방향으로 이어졌다. 결국 2013년 1월 3일, 자치 정부에서 국가로 바뀌고, 국가가 설립됨을 주장함으로써 독립되었다. 총리나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았음에도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총리,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은 곳에서 아랍의 봄이 성공된 사례이다. 물론 주권이 있지만 정착촌 문제 때문에 일부 불법점령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는 등 반은 자치와 비슷한 성황에 있으며, 파타와 하마스는 준독재 위치에서 결국 후반에 독재가 되었다. 물론 언급되었듯이 자치정부 시대에도 내부의 개혁을 주정하는 반정부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소규모, 간접적으로서의 반정부 시위가 조금씩 나타나기도 했으며 훗날, 2019년 가자 지구에서도 하마스의 억압적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2019년 3월 14일에 시작되어 3월 18일에 끝났다. 시위자들은 파타당이거나 친 파타에 속한다.

5.20. 시위 미발생 국가

5.20.1. 카타르

카타르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지지도가 높은 상황이라 반정부 시위의 물결에 별 여파가 없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는 반국왕파가 쓴 것으로 보이는 칼리파 알타니 국왕에 대한 퇴진을 촉구하는 글이 나왔으나 무시당했다.[17]

5.20.2. 아랍에미리트

카타르처럼 일단은 왕가에 대한 지지도도 높은 편이며 무엇보다 7개의 토후국으로 이뤄져 왕이 7명이나 되는 점으로 각 지역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기에 대규모 시위로 갈 가능성은 그리 없었다.

게다가 UAE는 오일 머니로 인해 충성도가 높고 경제적으로 1인당 GDP가 5만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풍요롭다. 고실업률이나 빈부격차의 문제도 드러나지 않는 편. 바레인 시위를 촉발시킨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도 별다른 차별 대우가 없는 상황이다. 야당이 뚜렷하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바레인이 무너지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는 있는지 바레인의 파병 요청을 검토했으며, 이후 자국의 경찰 500여 명을 바레인에 파병하였다. 그러면서 리비아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투기를 파병했다. 카다피는 싫었나보다

5.20.3. 코모로

아프리카 동남부 군도의 코모로에서는 시위가 나타나지 않았다. 2002년 이전까지의 분리 분쟁이 있었다가 2002년 이후 안정화가 되었던 동네다. 다만 여러 섬들로 이루어졌었던 만큼 섬들의 자치를 인정하기로 했었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2008년 앙주앙 섬이라는 곳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정부군과 아프리카 연합군의 도움으로 반란이 진압되었고, 이를 계기로 2009년 모든 섬의 자치를 약속하려고 노력하면서 겨우 안정이 되었다.

6. 비아랍권 시위

6.1.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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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아랍 국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2011년 2월 15일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수십만 명이 테헤란 도심에서 경찰과 충돌함. 경찰이 최루탄을 시위대에 발포했고 시위대는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며 방어하는 와중에 최소 3명이 총상을 입었다.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는 2명. 이집트의 혁명을 보면서 좋아하던 이란 지도부들은 시위 발생으로 순식간에 당황하게 되었다. 사실 2009년 6월에서 2010년 2월까지 부정선거로 인해 시민들이 분개하면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녹색혁명(Iranian Green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정권을 타도하지 못했고, 오히려 유혈진압으로 인해 2011년 전까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이 사건을 언급하기 어려웠다. 이란판 천안문사태로 비유되기도 한다.

야권 지도자인 무샤비가 실종되면서 시위대의 분노는 더 타올랐으나, 2월 21일 야권 인사인 메흐디 카루비 전 의회 의장의 아들 부부가 체포되었다. 3월 1일 테헤란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들이 곤봉 등을 휘두르며 강경 진압해 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하메네이가 반정부 시위를 비판하는 설교에 나서면서 점차 잦아들었고, 다만 2013년 6월 온건파인 하산 로하니가 재선으로 임기가 끝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어느 정도 개혁의 숨통이 티워졌다.

한편 이란 집권 세력들은 시아파 세력의 확대를 꾀했다. 2월 22일에는 1979년 혁명 이후 처음으로 이란 군함 2척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으며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혈 진압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3월 말엽부터 영향권이라 볼 수 있는 시리아의 반정부 시위가 커저버리면서 바레인 시위를 계기로 세력권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무너졌다.

6.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몇몇 아프리카 나라들에도 변혁의 불길이 사하라 사막의 험난함을 넘어서 번졌다. 부르키나파소는 시민들의 시위와 군인들의 반란으로 소요 사태가 벌어진 바 있고 가봉의 경우 야당 후보가 대선 결과가 조작되었다며 스스로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많은 시위대가 야당 후보를 지지했다.

그 외 차드, 우간다,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카메룬 등 중부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들이 얄궂게도 2011년에 주요 선거가 몰려있었다. 각국 선거들을 합쳐서 약 30여 건의 선거가 치러졌다. # 여기도 국민들의 불만이 많은 만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큰 의미의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 영향을 인해 2011년부터 시작된 사헬 내전 2012년 벌어진 말리 내전 역시 참고해볼만 하다.

6.3. 튀르키예 · 쿠르드족

아랍 민주화 열풍을 타고 쿠르드족의 오랜 염원인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시위가 벌어졌다. 쿠르드인이 다수 거주하는 이라크에서도 쿠르드족이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쿠르드족의 상황은 아랍 민주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을 점치기는 어려웠다. 이들의 거주지역 및 분포는 애초에 튀르키예 외에도 시리아와 이란, 이라크 그리고 아르메니아[18]와 연관이 커서 실현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시리아 시위 이후 튀르키예 정부는 시리아 시위대의 편을 들어주었다.

뒤늦게 튀르키예에서도 2013년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나 결국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7. 세계의 반응 및 끼친 영향

아랍권의 정치적 변동은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나 테러와의 전쟁, 이스라엘의 안전 문제 등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질 사안이기 때문인데, 도호쿠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잠시 관심을 쏠리기는 했지만 리비아 내전 이후 다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여기에 아랍권 시위에 영향을 받은 미국과 유럽의 시위대가 월가 점령 시위를 시작으로 반 세계화 시위를 벌였고 있고 이는 점점 확대되었다.

그러나 결국 2012년 이후 혁명에 성공한 나라들이 튀니지를 제외하면 혼란과 정국 불안이 극에 달하면서 "아랍의 봄"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시리아 내전의 경우 현재 진행형.

7.1. 미국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전전긍긍이었다. 이집트, 사우디, 예멘 등의 친미 정권이 흔들리면 중동에서의 입지가 현저하게 약화되기 때문. 그렇다고 해서 효과적인 개입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민주화를 들고 나온 이상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나설 수는 없었다.

다만 유일한 예외는 2011년 2월 15일 이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을 때였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 장관은 재빨리 "이란 곳곳의 도시의 길거리에 나온 용감한 이란의 반정부 시민들이 지난 주 이집트 시민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라며 이란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중동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유가 상승으로 이어져 미국 경제를 죄어왔고, 지속되는 무정부사태는 아랍에 대한 미국의 기본 외교 정책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과 맞먹는,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이 둘보다 훨씬 중대한 역사적 변혁의 시기를 맞이했으나 아랍권 전역에 개입할 명분도 힘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리비아의 경우에는 카다피가 스스로 개입할 명분을 만들어줬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런 정도까지 치닫지는 않았고, 다른 나라에 군사 개입이 필요해진다 해도 현재 미국의 악화된 경제 상황으로는 전쟁 비용을 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결국 미국은 시리아 내전에서도 개입을 포기하고 협상으로 나아갔으며, 석유 문제에 대해서는 자국 내의 셰일 오일을 탐사하는 등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재선하면서, 오바마는 제2의 지미 카터가 되는 악몽에서 벗어났다.

7.2. 유럽 국가들

북아프리카에 지분이 많은 프랑스 역시 전전긍긍했다. 알제리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 이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북아프리카 이민자가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이들이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끌시끌해질 판이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 개입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는 실패했고 프랑스 사회당 올랑드 후보가 당선되었다.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이탈리아 발칸반도 국가들도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구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으나, 베를루스코니는 그동안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비바!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람페두사섬[19]에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였다.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군이 손을 떼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이 운동의 여파로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한 점이 원래 있었지만 결국 EU가 붕괴하게 된다면 아랍의 봄이 결정적인 시작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2016년 4월 북마케도니아에도 부패와 정부의 무능함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식 색깔혁명이 나타났다.

7.3. 이스라엘

발등에 점화된 폭발물이 떨어진 형국이었다. 불과 30년 전에 우호적이었던 이란에서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노인네 하나가 정권 잡으면서 적국으로 돌변한 경험이 있다. 아랍권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던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쫓겨났고 다른 정권들도 어찌 될 지 알 수가 없다. 수틀리면 중동전쟁 시즌 5를 찍게 될 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2011년 6월 7일, 시리아 시위대가 골란 고원에 쳐진 철조망을 넘어 시위를 벌이자 국경 수비대가 발포를 해 23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안 그래도 아랍의 혁명의 불씨가 불타면서 불안한 이스라엘로서는 자살골을 넣는 행위나 마찬가지인 만큼 다시 중동이 전쟁의 불바다가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내부 불만이 많은 아랍 독재 국가들이 그 불만을 공공의 적 이스라엘로 돌리려는 시도를 한다면 남은 건 새로운 중동전쟁뿐이었다.

2011년 8월 20일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남쪽 도시들을 로켓으로 폭격해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가하면서 다시 평화가 흔들릴 위기에 처해있다. 아랍 연맹은 다시 회의를 열어 이번 사태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으며 이 공격으로 자국 군인 3명이 사망한 이집트에 대해 이스라엘은 이례적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혁명이 잦아들고 이집트의 이슬람 정권이 군부에 의해 무너지면서 다시 이스라엘은 살판이 난 상황이 되었다. 이는 총선을 앞둔 시기에 2012년 가자 전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 내 합리적인 세력들이 성장했다. 결국 국가의 위기는 넘겼으나 예전과 같은 과격한 행보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2014년에 하마스를 멸망시키겠다며 대규모 공격을 했지만 사상자와 피해만 커지고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어져 지친 나머지 휴전했다.

7.4. 알 카에다 등의 테러 집단

얼핏 혼란상을 좋아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전혀 반대였다. 오히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 등의 사태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가끔 성명 비슷한 것만 내보내는 정도였다.

반정부 운동 대부분은 알 카에다가 신봉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종교 광신주의를 기피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무조건적인 우선가치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알 카에다 등의 이슬람 광신 테러 집단이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테러 활동보다 민주주의를 위한 민주화 운동이 더 큰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입지를 좁혔다. 알 카에다의 2인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가 20년 동안 자행했던 테러와 폭력으로는 무바라크를 사임시키지 못했지만 불과 몇 주 간의 비폭력-비종교의 시민들의 저항으로 무바라크가 끝장났다. 당시 자와히리는 무바라크의 사임과 관련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받아버렸다고.

혼란상이 계속 된다면 테러 집단이 활동할 여지는 넓어질 수 있으나 지하드를 주창하는 폭력 테러리즘은 전략적으로 패배했으며, 무엇보다 오사마 빈 라덴이 2011년 5월에 미국에 의해 사살당했다. 아프가니스탄을 목표로 하는 원래의 전선에는 큰 변화는 없으나 아랍 혁명으로 이득을 본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14년 다에쉬가 서서히 본격적으로 중동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이후 2017년까지도 전 세계에 수많은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나마 세속주의와 친서방주의를 표방하던 독재자들이 실각하자 반지성주의와 극단주의를 앞세운 이슬람주의자들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전세계적인 테러리즘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7.5. 북한

아랍의 봄의 불길이 자국으로까지 건너올까봐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송 보도는 철저히 통제했지만 고위직들은 이미 이번 시위에 대해 논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가 북한에 투자한 게 많았는데 무바라크가 쫓겨나서 경제적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카다피의 방북 이후 리비아에 대한 정보가 북한인들 모두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도 문제였다. 그 후 리비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이 가져오는 소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리비아는 잘 사는 나라"라는 의식을 북한인들에게 심어주었다.(심지어 북한에서 리비아는 남한을 의미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이들이 퍼나르는 정보는 북한의 상황과 비교되어 "왜 리비아 같이 잘 사는 나라도 혁명하는데 우리는 왜 못 하지?"라는 생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이 집권한 뒤에도 리영호 장성택이 차례로 숙청되는 등 권력 불안 속에서도 큰 틀에서의 불안 요인은 사라졌다. 2011년 2월 후반에 잠깐이나마 신의주 등 중국-북한 접경 일대 및 일부 소도시 등에서 규모가 작은 항쟁이 일어났다고 국정원이 밝혔지만 실제로는 장마당에서의 단순한 다툼을 국정원이 민중항쟁으로 조작해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7.6. 중국

중동의 친미 국가들의 정권이 바뀌거나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싫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반면 대외적으로는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자국민들이 이집트 혁명을 보고 반정부 시위를 벌일까봐 우려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새 정권이 반중 성향일 경우 중국도 경제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도 고려 대상이었다.

중국은 이집트 혁명에 관한 뉴스들을 전면 보고 통제했으며, 후진타오는 인터넷 관리 감독을 강조하고 나섰다.

과연 중국에서도 시위는 있었다! 2월 20일 베이징 왕푸징 거리 맥도널드 앞에서 수백 명이 모여서 시위를 했지만 시작되자마자 공안이 싸그리 잡아갔다. 이는 이전에 중국 인터넷상에서 재스민 혁명을 재현하자는 취지의 글이 돌았던 것과 연관된 사건이었다. 27일 재시도되었으나 공안 당국의 감시와 탄압으로 KFC로 다시 옮겼고, 결국 당일 시위는 좌절되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친정부 시위 밖에 없었던 중국에서 이례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소규모로라도 일어났다는 점이 중국 정부와 세계의 이목을 끌었으나 중국 정부는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며 인터넷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4달 후인 6월 들어서서 중국에서 다시 시위가 일어났다. 다만 주체는 위의 민주화 세력이 아닌 농촌 이주민, 운송업계 노동자들로 중국 내 빈부격차가 극심한 데다 정부가 내놓은 중재안을 기업들이 편법을 써가면서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불만이 폭발했던 것. 중국 남부 주요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중이며 규모는 크지 않지만 비슷한 처지의 중국인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강경 진압과 임금 현실화 정책 등을 병행하면서 시위의 확산을 저지하였다.

이후 2013년 시진핑 정권이 들어서고 지지가 나쁘지 않으면서 중국의 민주화 가능성은 다시 잦아들었다.

일단 중국정부는 점점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이 사회불안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해결책에 부심하고 있다. 중국은 사회불만을 억제할 수 있는 경제성장률의 최저치를 약 8%로 잡는다고 한다. 경제성장률이 그 밑으로 떨어지면 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정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현재 무려 6%까지 내려가 나라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7.7. 한국

언론 보도 자체는 활발했다. KBS가 리비아 현지에 취재 기자를 급파했다가 폭격을 맞는 등 # #[20][21] 르포르타주도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하지만 방송 날짜가 날짜인지라 9시 뉴스 후반부에서야 겨우 보도할 수 있었다.

초기에 보수 언론들은 대개 이집트와 튀니지의 친미 독재자들 몰락을 우려했다. 이란처럼 북한과의 연계가 강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 반면 그와 같이 북한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듯.

이집트와 튀니지, 리비아가 경제적인 투자에 연루된 게 많은지라 기업들은 당장 우거지상이 되었다. 국제 유가도 이 요인으로 요동쳤으며 리비아에선 현지 건설현장이 습격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11년 말에는 외려 중동보다는 그리스발 악재( 유로존 위기) 때문에 더 곤욕을 치르는 게 한국을 비롯한 모든 서방 세계 경제권의 현실.

다만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은 시민 혁명 자체에 대해선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기는 하다. 수십 년간 장기 독재 체제를 시민들이 아래로부터 타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민주화운동을 새기고 있는 한국의 민중들도 남의 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란과는 다르게 미국이 내심 비호해주던 독재 정권을 시민들이 직접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들은 미국 위주의 외신 보도에 의존했는데, 연합뉴스가 이집트 민주화 운동을 소요 사태로 기술했다가 피 흘리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한국 네티즌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또 리비아 민주화 운동이 한참인 요즘은 SBS가 리비아 시위대를 폭도라고 하면서 대차게 까였다.[22] 그 뒤로 SBS는 리비아 반정부군을 계속 '시민군'이라고 칭했다.

이집트 민주화 운동 중에는 이집트 대사관 앞에 수백 명의 이집트 노동자들과 한국 좌익 단체( 다함께)들의 연대 시위가 두 차례 열렸고 21일 광화문에서 리비아 지지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는 경찰들에게 해산당했는데 광화문광장에선 시위나 집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이지 리비아 정부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다. 2월 25일 주한 리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신자와 한국 시민단체 회원 150여 명은 금요예배가 끝난 후에 이태원동 서울중앙성원에서 리비아 대사관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주 한국 리비아 대사의 사임을 요구하며 숨진 리비아인들의 사진과 서한을 전했다고. 이는 이미 집회 신고가 된 상황이었기에 별 문제 없이 끝났다.

7.8. 독립국가연합(옛 회원국들 포함)

2000년대 색깔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조바심이 나타났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 # # #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고 결국 2013년 11월 21일부터 유로마이단이 시작되어 2014년 2월에 본격적인 성공이 나타났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나타났다. #

남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었으나, 사퇴에는 실패를 했었다.
도리어 2013년에 더 재선이 되었다. # 하지만 그 이후에도 2015년에도 큰 시위가 있었고, 2018년 4월 후기에 결국 사퇴를 하게 된다. #

2011년 12월에는 카자흐스탄 서부 자나오젠이라는 도시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지만 당시 독재자였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에 의해 강제로 유혈진압을 당했고, 이는 2012년 1월에 끝났다. #
2019년 3월에는 결국 누르술탄이 스스로 퇴임했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있었고, 이는 수도 아스타나가 누르술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점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2019년 7월에도 반정부 시위가 나타났다.

타지키스탄의 독재자 에모말리 라흐몬은 아랍의 봄과 같은 현상이 나올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2012년 7월부터 반군과의 분쟁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이들은 이슬람 근본주의 계열에 가까웠고 2015년에 모두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
# 2013년 타지키스탄 대선과 내전 상황

2014년에는 반정부 시위를 막으려 인터넷을 차단했다. 반정부 시위 지도자가 징역선고 17년을 받았다. 2015년 3월, 반체제 인사가 터키에서 암살을 당했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이전부터 2010년 튤립혁명(2005년 레몬혁명에 대비해 2차 레몬혁명이라고도 부름)으로 인해 반정부시위는 없었고, 오히려 튤립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모습도 보였다. #

우즈베키스탄에서는 2016년 이슬람 카리모프 사망 이후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가 정치인이 되면서 어느 정도 정치적 문제점들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 #


러시아의 한 유튜버가 앵그리버드 아기 돼지 삼형제를 엮어 많든 풍자 영상이 화제가 된 적 있다.[23][24]
영상을 보면 돼지들의 이름이 순서대로 벤 알리, 무바라크[25], 카다피인데[26], 이 중에서 벤 알리와 무바라크는 축출된 것을 새의 공격에 한방에 무너지는 것으로 묘사했으며, 카다피 스테이지에서 계속 실패하는 것은 나머지 둘에 비해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후 마이티 이글에게 당하면서 끝. 그리고 파란 새는 트위터를 의미하며, 각종 SNS를 통해 공론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7]
러시아의 언론 RT에 해당 영상이 소개되었으며, 영상의 제작자와의 인터뷰도 한 적이 있다. #

8.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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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 민주주의 아랍의 겨울 : 반서방 이슬람주의 당선

2020년 시점으로 보면, 독재자의 몰락 이후 아랍에서는 사회가 안정되기는커녕 광범위한 사회 불안정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중동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보편적 국민 정서로서 박혀 있기에 그 사회적 영향력이 무지막지한 반면에 서구식 민주주의나 보편 인권에 대한 이해나 인식은 부족하다. 이 상황에서 민주화 바람이 일자 "민주화 → 다수결 민주주의 →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의 집권→ 인권 탄압"이라는 아이러니한 도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호스니 무바라크 벤 알리 같은 대부분의 아랍권 독재자들은 이같은 이슬람의 영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철저히 억제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서구화, 근대화, 탈종교와 보조를 맞추는 세속주의적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28], 이들이 하루아침에 축출되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정치의 주도권이 넘어가 아랍 사회의 방향이 이슬람 근본주의로 반동해버린 것이다.

혁명이나 개혁이 성공한 나라는 튀니지, 모로코, 요르단 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튀니지는 세계의 자유에서도 아랍권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나라 등급을 받을 정도로 자유화 및 민주화가 진전되었다. 모로코와 요르단은 혁명은 아니었으나 대신 정부들이 개혁을 하겠다고 주장함으로서 국민들과의 약속을 절반은 지켰다.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마흐무드 압바스라는 독재자가 있지만 컨트롤타워가 없어지면 팔레스타인 독립은 커녕 막장화가 진행될 것을 알기에 따로 큰 반발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가자지구의 경우 이미 2003년 팔레스타인 내전으로 하마스가 독점함으로서 이슬람 근본주의 독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면에 혁명 이후 국가 상황이 오히려 더 안 좋아진 나라가 훨씬 많다. 이집트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지향하는 신정권이 들어서자 군부가 다시 이를 뒤집어 엎었는데, 현재 이집트를 통치하는 엘시시 군부 정권은 무바라크 정권이나 이전 사다트 정권의 독재 체제 저리가라 할 정도로 억압적이다. 예멘은 독재 정권이 몰락하자 수니파 시아파 중 누가 신정권을 잡느냐는 문제로 내전이 일어나 버렸고, 시리아, 리비아 등의 나라에서는 권력의 공백기에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창궐하는 사태가 벌어져 인권 수준이 독재 시절보다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이라크 역시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고, IS가 나타났던 곳인 만큼 이들에게 시달리거나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게다가 아사드 같이 살아남은 독재자들은 테러리스트에 맞서는 영웅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막기 위한 중국, 러시아의 지원 속에 더욱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내전이나 테러는 없고 이들보다 상황이 나은 바레인조차 지금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지면서 맞서고, 경찰이나 군인들은 최루탄으로 이를 제압하고 있다. 2011년에 비하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 진행 중이고, 걸프 왕정들의 독재는 더 심해졌다. 이곳 역시 종파 갈등이 간접적으로 보이는데 다수의 주민들은 시아파지만, 왕정 등 정치계는 수니파가 집권 중이다.

튀니지조차도 내각제 도입 후 정권 초기에는 샤리아법 폐지를 천명하고 근본주의를 밀어내는 듯 했지만, 세속주의 정권이 경제정책은 다 말아먹고 부패한데다,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대통령 중심제로 전환하더니 사법권, 입법권까지 다 장악하는 사실상의 새 독재정부가 10년만에 구성되고 말았다. 결국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세속주의 입지가 좁아지고 튀니지 사회에 다시 근본주의가 들고 일어나는 중이다. # #

그나마 희망이라던 튀니지가 이 상황이 되면서 사실상 아랍의 봄은 거의 실패로 끝났다. 다만 아랍의 봄으로 기존 독재정권 축출 후 정파/부족 세력 사이에 내전이 진행 중인 옆나라 리비아나 아사드 독재정권의 정부군과 이에 대항하는 반군 세력들의 대결로 시리아 내전으로 폭발한 바다 건너 시리아에 비하면 튀니지는 그럭저럭 정국 안정에 성공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랍의 봄 이후의 반동주의적 상황을 "이슬람주의의 겨울(Islamist Winte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1. 왜 완성될 수 없었는가?

냉전시대부터 지속된 미국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수출 전략"에서 볼 수 있듯 미국과 그 동맹국으로 이루어진 제1세계 나라들의 정치인과 국민들은 독재 정권만 몰아내면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인권 수준도 자연스럽게 향상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믿음은 한국이나 동유럽의 독재 붕괴 후 민주화 양상을 목격하면서 더욱 공고해졌으며,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은 미래에는 전 세계가 민주주의라는 단일 패러다임으로 수렴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역사의 종말") 그렇기에 아랍 민주화 초기에 위키리크스 트위터 같은 매체는 아랍에서도 자신들과 같은 정치체제가 성립될 것이라고 믿으며 아랍권의 민중들에게 동기와 힘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주의가 자생하기 위해서는 ①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열망 ②사회 경제적 수준과 인프라가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중동 지역은 그 두가지가 모두 부족했으며, 그 때문에 외부에서 억지로 민주주의를 이식하려 해도 부작용만 일어난 것이다.

일단 첫째로 서구인들은 중동에서는 민주주의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망은 부족하고, 그것보다는 종교와 종파, 부족주의가 더 우선시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서구권의 시선은 정교분리가 당연한 사회에서 바라본 일종의 착각이었던 셈이다.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 중-동유럽의 공산화, 68혁명 등을 거치며 종교의 영향력이 많이 약해진 유럽-북미 등 서구권과 달리 아랍권은 그러한 역사적 사건을 겪지 못했기에, 이슬람교가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당연히 유럽의 종교 개혁 이전의 수준에 필적한다 보아야 한다. 기존의 독재자들은 이러한 이슬람교의 정치 참여를 자신의 독재를 위해서라지만 어찌됐건 철저히 틀어막고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퇴출되자 이슬람교의 정치 참여가 드디어 허용되었으며, 그것이 한국, 동유럽과 아랍의 결정적인 차이를 불러왔다.

"아랍권 민주화 운동"이라는 국제적인 명칭도 제1세계의 희망회로를 잘 보여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사실 시위의 가장 큰 목적은 민주주의 실현이 아니라 민생 문제 해결이었다. 물론 튀니지 이집트 같이 민주화를 부르짖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위대가 민생을 최우선으로 내걸었고, 이는 튀니지나 이집트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시위를 일으킨 민중들의 관심사도 정권교체와 부패척결 등 현실적인 것들에만 치중되었고, 종교과 충돌점이 있는 인권, 제도적 민주주의, 정교분리 등등의 의제는 끝내 대중의 관심사를 차지하지 못했다. 서구권의 시각은 이 부분에서 특히 나이브하였는데, 아랍의 민중들이 민생의 해결을 위해서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요구할 것이고 정교 분리도 알아서 주장하고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논리의 흐름을 좋을대로 믿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현실은 믿음과는 달라서 시리아 내전의 반군 주요세력을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원하는 온건파와 샤리아를 주장하는 원리주의자들이 섞여있다. IS의 준동을 목도하고 난 뒤에는 마냥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세력 중 일부랍시고 지지해주기도 뭣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 이런 복잡한 관계로 인해 서방세계는 시리아 내전에 거의 개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예 아사드의 재집권이 낫다고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 아사드가 비록 독재자였을지언정 오사마 빈라덴이나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광신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사드 같은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독재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광신도를 탄압해 왔다.

둘째로 중동지역은 사회경제적 인프라와 안정도가 부족했다. 그런 저개발 상황에서 혁명 등의 거대한 체제 변화가 일어나면 그나마 체계가 잡혀 있는 집단에게 권력의 기회가 오기 마련인데, 그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종교 집단과 군부이다.[29] 서구인들이 민주화의 우등생으로 꼽는 한국마저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섰으나 쿠데타가 발생, 1961년부터 1987년까지 군부 독재 체제가 장기간 유지되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붕괴 후 혼란기로 인한 사회불안 때문이다.

8.2. 서구의 인식 변화

서구권은 처음에는 민주화의 물결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싹 날아가는 민주주의의 승리를 생각하며 아랍의 봄을 극찬하고 따뜻한 눈길을 보냈으며, 독재자의 타도를 위해서 북아프리카에서 군사행동까지 지원해주었다. 당시에 나온 "아랍의 봄"이라는 만화를 보면[30] 오디세이 새벽 작전 등의 정부군에 대한 NATO의 공습이 리비아의 민주화를 만들어냈다는 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미국이 리비아 공습을 내켜 하지 않자 오바마를 독재자의 후견인인 마냥 비난했으나, NATO로 묶여서 끌려 들어간 미국이 하루 만에 토마호크 미사일 100발을 넘게 쏘아댄 반면, 유럽국가들은 작전 시작하고 얼마 안 가 미군에 탄약 보급을 요청하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그러나 서구권은 아랍 독재 정권들을 무너트린 민주화 주도 세력들이 자신들이 무너트린 독재 정권의 세속주의적 성격을 비난하고 이를 대신할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우며 대두되는 것을 보면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유럽 국가들은 중동에 민주주의도 정착시키지 못했으면서 난민 수용이라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똥덩어리를 덮어쓰고 말았다. 난민 문제는 유럽연랍 회원국간의 알력을 심화시켰고, 결국 영국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차라리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적어도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난민 루트는 통제되었을 것이기에 최소한 난민 문제에 관해서는 현재보다는 상황이 좋았을 것이다.

리비아 공습을 망설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옛날부터 남미에 친미 독재정권을 지원하여 국익을 도모해봤다는 점에서[31] 미루어 봤을 때 미국은 유럽보다 현실적으로 아랍 정치 사회를 들여다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미국은 남미에서와 달리 안정적인 친미 정권을 세울 기반작업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이라크 전쟁 종전 후 이라크에 친서방 민주주의 정권을 정착시키겠답시고 온갖 삽질을 벌였지만 실패한 경험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미국이 자기랑 다른 문화권에 워낙 적응을 못하는 것도 있지만, 굳이 그런 이유만이 아니라 쌩판 다른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재건을 주도하는 일 자체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며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데다 왜 우리 돈으로 남의 나라를 돕냐며 자국민의 눈총을 받기 딱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자국이 전권을 쥐고 진행한 이라크에서도 실패를 맛봤는데 나이브한 유럽 국가들과 조율까지 하면서 리비아에서 성공을 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미국 시민들도 테러와의 전쟁, 아랍의 봄에서 치른 큰 댓가를 통해 " 독재자는 그대로 두는 게 낫다", "미국도 만능은 아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이미 2016년 대권가도에 나섰던 도널드 트럼프 테드 크루즈와 같은 공화당계 주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언론 인터뷰에서 카다피를 축출시킨게 자신 인생의 가장 큰 과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서구는 자신들이 틀려도 한참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던 것과 달리, 독재 타도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아랍 세계의 반군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 압력을 동원해서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서방 정권이라면 다행이지만, 반대로 다수결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추대된다면 차라리 세속주의 반서방 독재자가 계속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차악론적인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로서 미국과 유럽내에서 냉전시대부터 이어져 온, 민주주의가 무조건 우월하다는 일종의 믿음에 금이 갔으며 결국 미국과 유럽은 더러운 타협을 하게 된다. 즉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독재나 권위주의적 정권과도 손을 잡기 시작한 것. 이를 가장 잘 보여준게 언론인 암살을 지시한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인 빈살만에 대한 조 바이든의 묵인이다.

거기에다가 미국은 이제 중동에 개입할 국력과 자원을 중국과의 경쟁에 모조리 쏟아 붓고 있는 상황이라 앞으로도 중동의 자유주의 세력들은 지원받기가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반증으로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2021년에 아프간 전격 철수를 단행해 아프가니스탄의 민주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사실상 묵인했으며, 2022년 이란 시위에서도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 외에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있다.

이렇게 서방세계가 적극적인 개입 혹은 중재조차 꺼리면서 시리아와 같이 양방의 세력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곳은 장기간의 내전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굳건한 이집트의 상황도 앞날이 불투명하게 되었다.

8.3. 다른 나라들과의 차이점

서유럽의 경우도, 프랑스 혁명이나 1848년 혁명 이후 주변 국가들(독일, 헝가리 등) 역시 민주주의 혁명이나 시위, 봉기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00년 혹은 그 이상이 지날 때까지 민주주의가 완벽히 정착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후술한 동유럽도 1989년 이전인 1956년 헝가리 혁명과 1968년 프라하의 봄 등 대규모 반소항쟁이 있었지만 동유럽의 민주주의는 1989년까지 몇 년이 걸렸다. 한국도 4.19 혁명 이후 여전히 민주주의는 꽃피지 못했으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민주주의가 도입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언론에서 꽤 비교 대상이 되는 1989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던 동유럽과는 달리, 왜 혁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선거나 부정부패, 독재로의 회귀나 권위주의 유지, 내전이 계속 일어나는지 의문인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통점은 있으나 배경이 달랐다. 오히려 1848년 혁명과 더 비슷하다.

대표적인 이유를 뽑자면 혁명 이전의 분쟁과 내전, 그리고 내전으로 혁명을 일으켰다는 점이 있다. 중동은 2011년 이전부터 진작에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 간 전쟁과 내전, 분쟁 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리비아의 경우는 진짜 내전으로 혁명이 일어났다.

동유럽의 경우엔 냉전 몰락 후 내전으로 분열, 해체된 유고슬라비아는 제외하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국가 간 전쟁이나 내전, 군부 쿠데타와 같은 정정 불안이 없이 조금씩 평화를 유지했고 1989년 동유럽 혁명 과정에서 적어도 내전으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 루마니아의 경우는 예외였지만 루마니아 역시 적어도 내전으로 변질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루마니아 역시 소규모의 유혈사태가 어느 정도 있되,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또한 동구권의 경우는 왕조나 군주정 체제의 국가가 없었다. 공산화 이전에도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같은 경우엔 왕이 지배하는 군주국이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반나치 게릴라,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토도르 지프코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같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전후 주도권을 장악하여 왕정을 폐지하고 공산당 1당 체제의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고 이들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당 정권들은 자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합리성이 있는 통치를 펼쳤다.

하지만 중동의 경우는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바레인 등의 진짜 전제군주정 국가가 있었고, 해당 국가들의 시위는 소규모 시위로 그치는 등 실패했다. 특히 바레인의 시위는 비참한 유혈사태로 종식되어 버렸다.

단순히 내전뿐 아니라 이미 중동 지역은 여러 부족들의 대립이나 지역감정이 있었는데다가 내전 이후로 그것이 더 심화된 나라들도 있었다. 게다가 예멘, 바레인, 이라크, 시리아처럼 종파분쟁까지 섞이면서 점점 종파 분쟁으로 변화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이나 아시리아인, 투아레그족처럼 분리독립을 윈하는 소수민족들의 분쟁까지 나타나면서 일은 더 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다른 동구권들은 적어도 나라 없는 소수민족들과의 분쟁같은 몇배로 골치아픈 일은 없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엔 민주주의보다는 소수민족들이나 차별받는 지역들의 분리독립 및 종교, 종파적 이유로 독립하는 것을 원했다. 유고슬라비아도 상황이 심했지만 중동만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불가리아 같은 경우 다수의 불가리아계가 소수 터키계를 탄압한 사례가 있긴 했지만 냉전 종식 후 공산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 혁명으로 새로 들어선 신 정부가 이들 터키계에 대한 탄압정책을 철폐하면서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내전 양상의 분리주의 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루마니아 등에도 집시가 있었지만 이들이 독립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집시들은 독립보다는 집시 차별 폐지를 더 원한다.

게다가 동구권은 경제도 어느 정도 나아졌고, 정교분리가 저절로 된 상태였지만, 이슬람권에 속하는 중동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엮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것이 세속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의 대립 및 내전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혁명 이후에는 알카에다 등의 극단주의자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에게 갈라진 일부는 다에시같은 무시무시한 단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아랍 지역의 토착 악습인 명예살인과 같은 잔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민주주의가 오기도 어렵고, 오히려 역효과일 가능성이 더 높다. 참고로 여성할례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랍 지역의 악습이라기 보다는 아프리카의 것이다. 북부 아프리카에 속하는 이집트에선 행해지지만 중동 지역에서는 그런거 없다.

그리고 동유럽은 노동 환경이 어느 정도 발전되었고, 덕분에 경제력조차 꽤 존재했다. 헝가리 오스트리아 이중제국을 형성했을 정도로 한때 강대국이었으며, 체코는 이중제국 시기부터 공업이 발달한 부국이었다. 2차대전 당시 초반에는 독일 제품 보다 정확도가 좋았던 건 체코 제품 이었다. 폴란드 역시 주변의 쟁쟁한 강국들의 영향을 받아 공업기반이 상당히 발전해 있었고 이는 동구권 붕괴 후에 값싼 인건비를 활용하려는 서양 국가들이 폴란드를 생산기지로 삼는 자양분이 된다. 하지만 아랍은 동유럽과 비교할 때 규모라면 석유덕에 꽤 크지만, 생산을 통한 성장이 이뤄지지 않아 노동 환경이나 경제 등이 동유럽에 비해 아직도 덜 발전되었다.

제일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동구권은 냉전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강대국들이 이곳에 패권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32] 서구권과 전쟁을 할 수도 있었을하지만 아랍의 봄 당시에는 강대국들이 중동의 자원 때문에 이곳에 패권을 잡으려 했고, 이들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게 만들었다. 바레인은 이란vs사우디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의 왕정국가들의 대립이 있었으며, 바레인보다 상황이 심각한 시리아도 미국과 서유럽, 사우디, 터키vs러시아 및 중국, 이란까지 참전하면서 상황이 심해져 갔다.

게다가 과거 동구권의 공산당 독재정권은 소련의 개입에 따라 수립된 꼭두각시 정권이었고, 이것이 1980년대 말에 이르러 반소-반러 감정으로 이어져 서구식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빠르게 수용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던 유고슬라비아가 공산정권 붕괴 이후 극심한 내전을 겪었다.

즉 독재정권에 대한 책임을 모두 소련으로 돌림으로써 갈등의 여지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랍의 독재정권은 외부의 개입에 의해 수립된 정권이 아니다. 따라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려도 내부의 갈등과 불만의 책임을 외부로 돌릴 수가 없다. 결국 혁명 이후 쌓여가던 내부 갈등은 일부 국가에서 내전이라는 최악의 결말까지 이끌어내고 말았다.

실제로도 아랍권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성공한 나라들인 튀니지, 요르단, 모로코는 하나같이 세속주의가 강하고, 근본주의가 심하지 않으며 국가 내부의 대립이 심하지 않고, 지정학적으로 이들에 개입하려는 강대국이 적었던 나라들이다. 그 외의 다른 나라들은 구 유고슬라비아보다 더 심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민주화 모범생으로 뽑히는 한국 역시 종교적 근본주의 풍토가 애초에 전혀 없고, 고려 왕조 조선 왕조를 거치면서 수 백년이 넘게 철저한 중앙집권 국가로 살아왔기에 지역갈등 역시 전 세계 어디보다 약한 편이라 중동의 뿌리깊고 억센 부족, 종파 대립과 비교하자면 애교에 불과하다. 열강의 개입도 오히려 시작부터 한국 전쟁으로 나라를 깔끔하게 분할해 버린 것이 역설적으로 이후 분란의 소지 자체를 제거하는 효과가 났다.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열강이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라는 요소를 통해 다른 열강들의 한반도 개입을 완벽히 차단해버린 것이다.

덕분에 최빈국에서 선진 민주국가의 대열에 진입하는데 거의 유일하게 성공했지만, 그런 한국조차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가 수십년간 지속되었고 민주화된지 이제 30여년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비교해보면 아랍권의 기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9. 新아랍의 봄 또는 아랍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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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11년 이후 10년도 안 되어 2018년 5월 및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019년에도 다시 아랍의 봄을 연상시키는 시위나 저항들이 다시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아랍권 독재정권들이 다시 물러서거나 시민들에게 눈치를 보는 상황이 오면서 조금 더 지켜봐야 하는 상황도 있다.

2018년 5월에는 요르단에서 다시 한 번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2018년 12월 수단에서 다시 일어났던 시위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알제리, 이집트, 팔레스타인(가자 지구), 이라크 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9년 4월 수단에서 군부들이 오마르 알바시르를 구금했으나, 시민들은 군부에게도 저항을 계속했었고, 알제리에서도 2019년 2월부터 4월까지 대규모 시위로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가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났다.

이집트에서도 9월 20일 2011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났었던 타흐리르 광장에서 다시 시위가 나타났으며,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는 3월에 시민들이 하마스를 향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0월 이라크에서는 본격적인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나타났으며, 이라크 국민들은 정권에게 민생문제 해결과 부정부패 척결 및 치안 안정을 주장하며 2015년 7월에 시작했었던 저항들이 다시 나타나는 중이다.

다만 수단 공화국의 경우는 독재자가 또다른 군부들에 의해 구금되었던 경우였고, 그 외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 지금도 대규모 시위들이 진행 중이거나 알제리처럼 독재자가 물러났음에도 작은 시위들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이라크와 레바논에서도 총리가 사퇴되었다. 물론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시위가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을 "신 아랍의 봄(New Arab Spring)" 또는 "두 번째 아랍의 봄(Arab Spring 2.0)"이라고도 부른다. 다음의 계절이 여름이라서 "아랍의 여름(Arab Summer)"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 편이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도 하마스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저항하기도 하며, 리비아에서도 동부의 하프타르 군부를 포함한 군벌들을 반대하는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다.

2019년 10월 31일 사퇴의사를 밝힌 이라크의 마흐디 총리가 의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라크는 10월 초부터 시작된 시위에서 정부의 과격 진압으로 시위대 사망자가 400명이 넘어섰으며, 11월 27일 이라크 나자프 주재 이란 영사관이 시위대에게 방화되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2019년 11월 30일 기준 중동의 4개 국가에서 기존 국가원수가 사퇴 및 축출되었지만, 정국 안정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33]

2020년에도 여전히 수많은 나라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으며, 코로나 19가 범유행적으로 퍼지면서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시위가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다. #

위의 네 나라들 중 레바논이 그래도 민주주의 지수가 높은 편이다.

또한 2011년-2012년 시기의 시위와의 차이점은 군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수단에서 오마르 알바시르가 군부 쿠데타로 축출되었음에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군부체제 자체에 반대했으며, 알제리에도 신군부 정권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라크 역시 군부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는 2013년 이집트에서 무르시 축출 이후 엘시시가 집권한 사례처럼 되지 않길 원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아랍의 겨울보다 나을 뿐, 일부만 제외하면 여전히 딱히 변한 점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

10. 관련 문서

10.1. 관련 인물

10.1.1. 튀니지

10.1.2. 이집트

10.1.3. 리비아

10.1.4. 예멘

10.1.5. 시리아


[1] 이는 새뮤엘 헌딩턴의 기준에 따르면 "제4 민주화 물결"이 된다고 한다. 제1민주화 물결이 유럽 미국의 보편선거권 운동이고 제2민주화 물결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독립이라면 제3민주화 물결은 1980년대 한국의 6월 항쟁을 포함한 많은 피플 파워 혁명이고 제4의 민주화 물결은 이 아랍의 봄이라는 것. 평가 항목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서구사회에서는 아랍의 봄 초기에 이런 나이브한 긍정적 기대가 주류였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탄생을 목도하면서 극적인 반전을 겪게 된다. [2] 연령 제한으로 인해 링크 처리. [3] 이슬람 문화권으로 구분되는 중동+북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가 밀을 주식으로 먹지만, 이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아예 농사가 불가능하거나, 농사를 지어도 수확량이 인구 전체를 먹여살리기 불가능한 국가들이 대부분이다. [4] 짖궃게도 과거 로마 시대때만 해도 북아프리카 지역과 중동 레반트 지역은 제국을 먹여살리는 곡창 지대로써, 이집트 지역은 아예 제국의 빵바구니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5] 예컨데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 1977년 신년 연설에서 " 팔라비 국왕의 이란은 불안한 중동 속의 안정된 "이라고 말했지만 그 후 불과 2년 만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앞 각주에서 설명한 80년대 제3민주화물결의 시발로 평가되는 케이스이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요소를 가진 혁명이기도 하다. (혁명이 아니더라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의 집권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제4민주화물결이 1979년을 선례로 만들 것인가, 반례로 만들 것인가는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는데, 결과는 이슬람 혁명도 민주정부도 아닌 군부인 것 같다. [6] 실제로 이라크 전쟁 이후에 이라크에서 반미시위와 반독재자 시위가 동시에 일어났으며, 반미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동시에 사담 후세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유지되었다 #, #. [7] 2003년 4월, 2003년 5월, 2003년 6월,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10년. [8] 이라크 전쟁과 아랍의 봄과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영문 기사들 #, #. [9] 실제로 이란 민주화 운동도 아랍의 봄처럼 트위터나 유튜브로 통해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10]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은 엄밀히 말하자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총리가 물러난 경우였다. [11] 2월 13일 알 자지라 보도. [12]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서의 군사개입을 통해 신생 러시아군의 훈련과 무기 시험 및 실험, 지중해권에 확고한 동맹국 및 주둔지와 흑해함대 기항지 확보,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에 대한 토벌 등 군사 외교적 이익과 명분들을 많이 챙겼다. [13] 리비아 내전도 그런 콩가루 양상이 있었지만 시리아는 대단히 심각하다. 반군끼리도 어제오늘 내일다르게 상황에 따라 모두가 모두의 뒤통수를 갈기고 있다. [14] 2월 19일 스카이뉴스 보도. [15] 성군 수준이던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오만을 중세시대로 전락시킨 폭군이다. 자세한 것은 사이드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 문서 참조. [16] 양측의 정부 전복은 목표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17]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왕족과 귀족의 땅을 국유화 하고 복지정책과 빈부격차 감소, 입헌군주국으로의 변화 등 민주화, 석유 국유화에 엄청난 힘을 쏟았다. 물론 지금까진 전제군주제적 성격을 띄고 있는 국가이지만, 선왕에 대한 충성심은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비견될 정도로 높다. [18] 여러 나라로 나뉘어지면서 쿠르드인들도 서로 갈등이 큰 점도 있으며 튀르키예만 해도 친튀르키예 쿠르드 조직과 정당까지 있다. 아르메니아는 쿠르드의 독립 요구 지역이 바로 자신들의 성지 아라랏산을 비롯한 곳이 대거 들어가서 독립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19] 튀니지에서 15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20] 시민군 근처를 따라가다 근처에 한 발만 떨어졌다. 다친 사람도 없고 취재진 입장에선 오히려 특종을 잡은 셈. [21] 뉴스 방송당시 이날은 참고로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22] 다만 실제로 시위대 일부의 무차별적 약탈 행위는 여러 경로로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해야 할 듯. 실제로 국제 정치/국제법 연구자들 사이에서 시민군과 시위대의 구분법은 기준이 있다고 한다. 리비아의 경우 실제로 시민들의 평화시위는 이틀 밖에 유지되지 않았고, 부족 간의 내전으로 변질되기도 했던 데다가 민주화보다는 민생 문제, 부와 자본 분배 등이 더 강했다. [23] 영상의 음원은 1933년에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아기돼지 삼형제"의 삽입곡이다. [24] 스테이지가 넘어가는 부분에서 자세히 들어보면 모탈 컴뱃 테마곡이 들린다. [25] 이집트라 그런지 파라오 모자를 썼다. [26] 이 셋 돼지들과 실제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27] 여담으로 1:33초경에 핵미사일과 함께 김정일로 추정되는 돼지가 나온다. 진정한 돼지 [28] 바샤르 알 아사드의 배경인 알라위파도 생존과 권력을 위해 좋든 싫든 서방식 마인드를 지니고 토착 기독교 등의 소수종교들과 연합해 수니파에 맞섰다 [29] 이는 중세 유럽 암흑시대의 가톨릭 조직이나. 일본의 센고쿠 시대 등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30] 원제:LE PRINTEMPS DES ARABES 저자는 장 피에르 필리, 그림은 시릴 포메스 [31] 문제는 그 방식이라는 것이 남미의 서민들에게는 유리한 정책을 펼치는 기존 정권을 자국의 국익을 해치려는(물론 국유화처럼 남미에 진출한 미국 기업의 이익을 해칠 것이 명백한 정책도 분명히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까지 꺼낼 정도로 자업자득인 경우가 많았던 데다 그걸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후술할 미국의 대응은 최악이었다.) 빨갱이로 간주한 다음에 CIA를 통해 물밑에서 반공우익 진영(특히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각국의 군 수뇌부)을 지원하여 쿠테타 등으로 정권을 강제로 뒤집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남미의 반공우익 정권들은 그들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국력과 냉전이라는 이념 대립 상황, 미국의 앞마당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유럽 대륙의 국가들보다 훨씬 낮아 주목받기 힘든 남미 국가들의 국제적 위상이라는 여러 이점으로 인해 무슨 일을 해도 곧바로 묻히기 쉬웠고, 따라서 자신들이 뒤엎은 정권이 있었을 때 보다 더한 악행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결국 냉전 종식 무렵에 반공우익 세력이 주도하는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그동안 억눌렀던 반미 감정이 극대화됨에 따라 남미 여러 국가에서 미국과 거리는 두는 좌파 정권이 집권하기까지 하기까지 하는 등 그야말로 소탐대실밖에 남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32] 거기다 동구권 뒤에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력을 가진 국가가 있어서 더더욱 손을 못 댄 것도 크다. 물론 냉전 말기 소련은 이전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망하는 그 순간까지 미국조차 상대하기 힘든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인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동구권의 민주화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패권을 잡으려는 행동을 노골적으로 보였다면(예를 들어 군대를 개입하려 했거나, 서방 정보기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사보타주를 대규모로 자행하는 등) 이에 자극받은 소련의 수뇌부가 동구권에서의 영향력을 지키기 위하여 온건노선을 철폐하고 강경하게 돌아서거나 아예 고르바초프와 같은 온건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아버려서 적극적으로 시위대를 유혈진압함에 따라 민주화 자체가 실패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서구권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역사를 봐도 1991년 7월까지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작동하고 있었던 데다가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반대하고 기존의 소련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당내 보수파와 과거 고르바초프 편에 섰던 인사들이 1991년 8월에 쿠테타를 일으킨 전적이 있었다. 따라서 서구권 입장에서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 바에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나았다. [33] 네 나라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2019년을 기준으로 10년 이상 지속된 내전의 경험이 있었으며, 내전이 끝난 후 조금씩 안정이 되어갔지만 동시에 부패와 비리, 부정선거 등은 변한 게 없었고, 여기에 지친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조금씩 안정이 되어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분쟁으로 인하여 악화된 치안 개선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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