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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9:57:19

성묘교회

주님 무덤 성당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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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전경 내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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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가톨릭 주님 무덤 성당
정교회 부활 기념 성당
이칭 성묘교회
영어 가톨릭 Basilica of the Holy Sepulchre
정교회 Church of the Resurrection
고전 그리스어 Ναός της Αναστάσεως
아람어 ܥܕܬܐ ܕܩܝܡܬܐ
아랍어 كنيسة القيامة
히브리어 כנסיית הקבר
라틴어 Basilica Sancti Sepulcri Jesu Christi
ecclesia Sancti Sepulchri
아르메니아어 Սուրբ Հարության տաճար

1. 개요2. 종파간 분할 관리3. 2017년 보수공사4. 건축5. 예수의 무덤에 대한 다른 가설

[clearfix]

1. 개요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성당이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가톨릭· 정교회와 더불어 오리엔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를 아울러 기독교 교회 6군데의 공동 성지이다. 예수 십자가형을 당하고 무덤에 매장되었다가 사흗날에 부활했다는 종교적 사건의 무대이다.

약 325년경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친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가 성지순례를 하다가 발견한 예수의 빈무덤 자리이다. 326년경 콘스탄티누스 1세가 예수의 무덤자리라 추정되는 곳에 성당을 짓게 하였다. 이후 이교도의 파괴와 기독교도의 재건축을 거쳐 오늘날까지 1600여 년이 넘도록 교파를 가리지 않고 세계 각지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성지순례의 단골코스가 되었다. 또한 부활절 지정에 아무런 점화 장치가 없는데도 홰에 저절로 불이 붙는다는 거룩한 불 현상이 일어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기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장소라는 세계구급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은 데다가 주변은 시장과 모스크로 둘러싸여 부지도 협소한 상태이다. 매년 수백만 관광객이 찾아오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과 비교하면 초라하게 보일 정도인데, 이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예루살렘을 놓고 공방전을 반복하면서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성묘교회의 운명도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 세력에게 점령된 예루살렘을 1192년 아이유브 왕조 술탄 살라흐 앗 딘이 다시 점령했을 때, 살라흐 앗 딘은 자신과 가까운 무슬림인 조우데흐 가문과 누쎄이베흐 가문에 각각 성묘교회의 열쇠와 문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겨[1] 성당을 보호했다. 특히 누쎄이베흐 가문은 637년에 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의 통치 때부터 성묘교회의 관리인 보직을 맡고 있었던 가문이었다. 약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 두 가문이 성묘교회의 관리를 맡는다. 매일 두 번, 조우데흐 가문의 일원이 열쇠를 문으로 가져오면 누쎄이베흐 가문의 일원이 문을 한 번은 잠그고 한 번은 연다. 무슬림 가문이 기독교 성지를 보호하는 이유는 제3자가 지킴으로써 종파간의 분쟁을 막는다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다고 한다.

2. 종파간 분할 관리

파일:external/2.bp.blogspot.com/Picture9jpg.jpg
정교회
가톨릭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정교회· 가톨릭·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공동

여길 두고 각 그리스도교 교파가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1852년에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에서 종파별로 성묘교회의 구역을 나누어 맡게 하여 지금까지 이어진다. 개신교는 여기서 구역을 배정받지 않았는데, 개신교 전체를 대표할 만한 교단도 없거니와 당시 예루살렘에서 개신교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고려대상에서 빠져버린 것. 여기에는 가톨릭과 빚는 갈등 문제 때문에 처음부터 성묘교회를 인정하기 꺼린 부분도 있다. 아래에 언급할 정원 무덤을 개신교 측에서 주장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다만 이는 공식적인 교단의 입장이고 일반 개신교 신자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성지순례로 방문하는 사례가 많다. 실제로 개신교 성지순례객들은 교파간 각축전이 험악하게 벌어지는 성지에서 꽤 자유로운 편이다. 강 건너 불 구경

이런 종파 문제 때문에 어느 부분이 낡아 고치려고 해도 다른 종파 구역을 넘어서기에 제대로 고치지도 못하는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이게 뭔 말인가 하면 가톨릭은 대문을 책임지고 창문은 시리아 정교회가, 창문 난간은 그리스 정교회가, 이렇게 나뉘서 관리하다보니 창문이 낡아서 고치려고 해도 난간에 시리아 정교회인들이 사다리를 둠을 그리스 정교회 측에서 거부한다는 식이다. 실제로 아래의 건축 항목에 나오듯이 이런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150여 년 동안 사다리를 방치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성지에서 각 기독교 종파의 분열과 갈등을 실감할 수 있다.

기 들릴이 그린 만화 "굿모닝 예루살렘"을 보면 이스라엘에서 이 건물 안에서도 각 종파들이 뒤엉켜 싸움질한다고 작가 자신이 '내가 무신론자라서 다행이다.'며 비꼬았다. 이를 두고 '오스만판 이이제이'라고 비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이제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리스도교 종파들의 이 교회 소유권 분쟁은 이 구역 배분이 일어나기 전인 17세기 오스만 제국을 둘러본 프랑스 왕국 대사도 참 난감한 문제라고 우려할 정도였다. 정교회에게 넘겨주면 가톨릭 나라들이 이를 빌미로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했으니. 그렇게 되면 더도 말고 딱 십자군 전쟁의 재림이나 마찬가지였고. 1820년대 그리스 독립 전쟁으로 열강에게 패하며 서구권의 저력을 체감한 오스만으로서는 놔두자니 종파간 분쟁이 이어져 시끄럽고 그렇다고 함부로 강짜를 놓자니 서구 열강이 문제가 되는 뜨거운 감자였다.

가톨릭은 성묘교회에서 프란치스칸 1회의 한 분파인 작은형제회를 가톨릭의 대표자로 삼았다. 예루살렘 작은형제회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성당의 모습을 가상현실로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작은형제회는 이스라엘 땅에 성지보호구(Custodia Terrae Sanctae)를 설정하고 국제적으로 수도회원들이 모여 활동하도록 한다. 여기서 '보호구(custodia)'란 관구(provincia)가 되기에는 규모나 여건이 여의치 않은 곳에 설정하는,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관할구역 명칭이다. 즉 '성지보호구'란 성지에 있는 보호구란 뜻이지, 성지를 보호하는 곳이란 의미가 아니다.

3. 2017년 보수공사

2017년 성묘교회를 보수공사하면서 성묘교회의 예수의 빈 무덤(시신 안치대) 부분을 수 세기 만에 다시 열고 보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먼저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안치된 윗 덮개 석판이 발견되었고, 그 아래의 석판은 연대측정 결과 4세기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의 것임이 밝혀졌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발견해 성묘교회의 시초를 놓았다'는 기록이 사실로 증명된 것이다. 동굴을 깎아 만든 선반 형태와 장식은 1세기 예루살렘 유대인 부유층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라고 한다.

성경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무덤자리는 산헤드린 공의회원이자 부자였던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준비한 무덤이었다. 복음서의 기록과 발굴 기록이 일치하는 것. 또한 이 작업을 지휘한 아테네 국립 공과대학의 안토니아 모로폴루 박사에 따르면, 동굴 서쪽 벽면에서 채집한 가장 오래된 회반죽 표본들은 4세기의 것으로 측정되었는데, 이는 기독교화 직후의 로마시대에 성묘교회의 건설작업이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추가 증거라고 한다. 박사와 동행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는 '석판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4세기 중반에 설치됐을 것임을 보여주는 새 연구 결과는 성스러운 유적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환영할 만한 놀라움을 가져다준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를 취재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에서는 성묘교회의 무덤 보수작업 과정에서 전문가들이 장비를 동원해 성묘 내부를 스캔했는데, 예수의 무덤 부분, 즉 예수의 시신이 만 하루 동안 누웠던[2] 무덤 위쪽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잘 작동되던 장비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멈춰버리는 신기한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

4. 건축

파일:external/www.seetheholyland.net/Holy_Sep_Plan-800px.jpg
사진 설명
파일:external/www.atlastours.net/holy_sepulcher_facade.jpg 정면(Façade)
성묘교회로 들어가는 입구로, 앞에는 작은 공터가 있다. 일반적인 성당 정면에는 넓은 광장이 있듯이 창건 당시에는 성묘교회도 지금보다 공터가 더 넓었지만, 7세기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제2대 칼리파 우마르가 성당 앞 광장에서 처음으로 알라에게 예배드렸음을 기념하고자 10세기에 무슬림들이 그 자리에 모스크를 지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협소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3]

성당 정면의 1층에는 아치문 2개가, 2층에는 아치창 2개가 있다. 1층의 아치문 중 오른쪽에 있는 문은 십자군 시대 군주들의 무덤이 있는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지만 벽으로 폐쇄되었고, 왼쪽에 있는 문은 성당을 출입할 때 사용하는 정문이다. 자세히 보면 1층 아치가 2층 아치보다 끝이 약간 뾰족하게 올라간 첨두식이다.

2층 오른쪽 아치창 앞에는 나무 사다리 하나가 외벽에 걸쳐 있는데, 이 사다리를 치우자는 종파 간 합의가 없었기에 오랜 세월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이 사다리는 현존하는 기록상으로는 1728년 판화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1757년 "현상유지(Status Quo)"가 발효된 이후로 그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있다. 즉, 최소 300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부동의 사다리(Immovable Ladder)'라 불린다. 물론 아예 고정되어 방치된 것은 아니라 청소와 수리 목적으로 잠시 안으로 옮긴 적은 있었다고.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시도사건 한 달 후에 이 사다리를 치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저지당했고, 1997년에 사다리가 사라졌다가 몇 주 뒤에 되돌아온 사건도 있었다. 2009년에도 종탑의 비계를 치우기 위해 잠깐 사용된 적이 있다.

성당의 정면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종탑이 있다. 십자군 시절인 1160년에 세워진 이 종탑은 1545년에 지진으로 붕괴되었다가 재건하면서 돔 지붕이 사각뿔 지붕으로 바뀌고 높이도 낮아졌다.
파일:external/ivarfjeld.files.wordpress.com/stone-of-the-anointing2.jpg 성유석(聖油石, The Stone of Anointing)/도유석(塗油石, The Stone of Unction)
정면의 현관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닳아서 윤이 나는 붉은색 대리석 하나가 깔려 있는데, 이 판석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이곳에 눕히고 향유를 바르며 염한 성유석으로, 성유석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성화에도 그 내용을 묘사하였다. 성유석 네 귀퉁이에는 촛대 1개씩 4개를 세웠다. 성유석 윗부분을 가로질러 걸린 등잔 8개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콥트 정교회· 정교회· 가톨릭에서 봉헌한 것이다. 사실 이 돌 위에서 예수의 시신을 염했다는 전승은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 알려진 것으로,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유석은 1810년에 깔았다. 그럼에도 종교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성유석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뿌리는 성유를 손수건이나 천에 적셔 가져가려는 순례자들로 항상 붐빈다.
파일:external/imgc.allpostersimages.com/godong-golgotha-chapel-at-the-church-of-the-holy-sepulchre-jerusalem-israel-middle-east.jpg 골고타(Golgotha)/갈바리(Calvary)
예루살렘 성벽 바깥에 있는 언덕으로 예수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된 곳이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과거부터 성묘교회가 골고타 언덕 위에 세워졌다는 전승이 내려와 지금에 이른다. 그리스어 '크라니온(Κρανίου)'에서 라틴어 '칼바리오(Calvario)'로, 영어 '캘버리(Calvary)'라고 들어왔는데, 모두 해골이라는 뜻이다. 한국 개신교는 이를 '갈보리'로 음차하였다. 한국 가톨릭은 현재는 아람어를 옮긴 '골고타'라는 음차를 널리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라틴어를 따라 '갈바리오' 내지는 '갈바리아'라는 음차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언덕의 지형이 해골의 모양과 비슷했거나,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정교회가 관할하는 십자가 못 제대가 있는데, 그 아래에 있는 구멍으로 십자가가 세워졌던 홈을 볼 수 있다.

5. 예수의 무덤에 대한 다른 가설

이곳 외에 예수가 죽어서 묻힌 장소가 다른 곳이라는 주장도 있다. 1883년 영국 찰스 조지 고든이 예루살렘 성벽 바깥의 정원 무덤을 발굴했는데 이곳이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무덤에 대한 묘사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

유럽의 개신교 측에서는 성묘교회의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이 정원 무덤이 좀더 예수와 연관된 곳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는 정원 무덤의 관리를 성공회에서 맡고 있다. 성공회 측에서 정원 앞에 "예수께서는 여기에 묻혀계시지 않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두었다고. 하지만 이 정원이 예수의 무덤이 아니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 정원이 예수의 무덤 자리라는 주장의 근거는 예루살렘 도시를 둘러싼 성벽인데, 이 성벽이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가 아닌, 16세기 초중반 오스만 술탄 술레이만 1세 때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가장 강력한 반박근거이다.

[1] 조우데흐 가문이 성묘교회로 열쇠를 가져오면 누쎄이베흐 가문이 그 열쇠로 문을 열도록 허용한다는 구조. [2]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금요일 오후 3시 무렵에 숨을 거두었고 일요일 해 뜨기 전 어느 시점에 부활하였으므로, 시신이 무덤에 있던 기간은 만 하루밖에 되지 않는다. [3] 무슬림 측 기록에 따르면 우마르는 소프로니우스 예루살렘 총대주교로부터 성당 안에서 예배를 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러면 후대 무슬림들이 이걸 이유로 하여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할 것을 우려, 일부러 성당 바깥에서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