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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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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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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성
李昊星[1] | Lee Ho-sung
출생 1967년 7월 17일
전라남도 순천시
사망 2008년 3월 10일 (향년 40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650
반포대교 남단 인근 (現 세빛섬)[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서석초등학교 (졸업)
광주충장중학교 (졸업)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 86 / 학사)
조선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3]
병역 육군 제31보병사단[4] 방위병 복무만료(1992~1993)
신체 신장 182cm[5], 체중 80kg[6], A형
포지션 외야수[7]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0년 1차 지명 ( 해태)
소속팀 해태- KIA 타이거즈 (1990~2001)
경력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 (2001)
본관 전주 이씨
종교 개신교[8]
1. 개요2. 생애
2.1. 선수 경력
2.1.1. 연도별 성적
2.2. 은퇴와 몰락
2.2.1. 반론
3. 논란 및 사건 사고4. 기타
4.1. 야구 게임에서의 이호성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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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사업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좌익수 및 우익수)였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제3기 회장직(2대)을 역임한 바 있다.

2. 생애

1967년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광주에서 보냈다. 그의 형제들은 의사, 법조인 등 상당히 성공한 직업군에 속했고, 후술할 사업을 함께 벌인 친형도 대기업에 다녔으며 굉장히 엘리트 집안이어서 그런지 제법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호성의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을 보고 체육교사의 권유로 야구에 입문했으나 고등학교까지는 그렇게 큰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호성의 사망직후 해태의 대선배인 김봉연의 인터뷰 허나 아버지는 일찍 별세했다.

2.1. 선수 경력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0, 1991)
파일:external/pds20.egloos.com/d0010203_4e224038761e9.jpg
파일:해태나랑께.jpg
파일:19991130000014515.jpg
해태 타이거즈 시절

광주서석초 - 광주충장중 - 광주일고를 나온 광주-해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호타준족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광주일고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세대 시절에는 더욱 기량이 발전하여 4번타자로 활약하였다. 4학년 때는 제1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나름 국대 경력도 있는 선수.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고교-대학 동기인 포수 정회열과 같이 1990년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2순위 지명을 받아 해태에서 데뷔했으며,[9] 등번호는 27번을 받았는데 바로 원년 홈런왕이자 까마득한 연세대 대선배였고 입단 당시 해태의 타격코치였던 김봉연의 번호였다.[10] 대선배의 번호를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팀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전성기 시절의 이호성은 김봉연과 마찬가지로 중심타선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입단 1년차인 1990년부터 99경기에 출장해 0.304의 타율에 4할에 육박하는 출루율과 4할6푼의 장타율로 wRC+ 141.8을 찍고 당당하게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을 하며 혜성같이 등장했다. 특히 커리어하이인 데뷔 2년차 1991년에는 21홈런을 때려내며 OPS 0.887에 wRC+ 150.7을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 속에 2년 연속으로 외야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며 전성기 해태 타이거즈의 중심타자로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특히 1991년에는 외야수 최초로 20-20 클럽에 가입하면서 30-30 클럽 후보로도 거론될 만큼 호타준족의 상징과 같은 선수이기도 했다.[11] 이렇듯 그는 80년대 해태의 중심타선이었던 김성한 한대화의 뒤를 이어 홍현우, 이종범 등과 함께 1990년대 해태 중심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특히 팀이 1990년대에 차지한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에서 모두 주축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91년 제1회 한일 슈퍼게임, 1993년 한일 프로친선대회, 1997년 한일 프로골든시리즈 등 당시 몇 없는 국제경기에도 꾸준히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다만 부상을 자주 당했기 때문에 91년을 제외하고는 풀타임으로 뛰지는 못했으며, 특히 93년과 95년, 98년에는 상당한 경기를 결장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최전성기였던 1990년~1992년과 앞의 3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100안타와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부활한 1997년을 제외하고는 연도별 성적 자체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1993~96 시즌은 투고타저가 쭉 이어졌던 시기라[12] 25~30홈런 치면 홈런왕이고 팀 평균자책점이 개나 소나 3점대 초반도 심심치 않게 찍을 정도로 투수들의 리그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타자들의 기록이 저평가받기 쉬운 시절이다.[13] 그래서 타율이나 홈런갯수만 보면 그저그런 성적으로 보이는 이호성도 실제로는 93년에는 75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OPS 0.856에 wRC+가 165.7로 비율상으로는 91년 이상의 타격을 자랑했으며, 94년에도 105경기 출장에 wRC+ 115로 이전에 비하면 아쉽지만 그래도 자기 몫은 해준 타자였다. 95년과 96년에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으나, 95년 이후 김성한이 은퇴하고 선동열이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하며 팀의 핵심전력이자 베테랑들이 이탈한 상황에서 이 상황 속에서도 후배들을 잘 다독여서 팀의 2년 연속 우승에 기여했다.[14] 특히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현대와 시리즈스코어 2승 2패로 팽팽히 맞선 5차전에서 팀이 1:0으로 리드하는 상황에서 잠실 야구장의 좌중간을 훌쩍 넘기는 투런 홈런을 작렬시키며 해태의 3:1승리를 이끌었고[15] 이호성의 한방으로 시리즈의 분위기를 잡은 해태는 6차전도 승리하며 96년의 챔피언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특히 투고타저가 끝난 97년에는 110경기에 출장해 0.276의 타율에 15홈런을 때리며 OPS 0.799에 wRC+ 126.8을 기록하며 다시금 팀의 핵심타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전성기인 97년을 마지막으로 이호성의 성적은 서서히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으며, 선수 생활 마지막 해인 2001년에는 KBO와 선수협을 문화관광부가 중재하고서 3대 선수협 회장을 지낸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호성은 김태형, 류지현, 김기태, 김경기 등과 함께 선수협 5적으로 꼽힐 정도였는데[16] 선수협을 거부하며[17] 프런트의 지시에 따라 선수협에 찬성하는 해태 선수들을 불러다가 주장이자 군기반장이었던 자신이 직접 빠따로 때렸기 때문.[18] 강병규의 트위터에 따르면 자기가 주장인데 왜 애들을 멋대로 부르냐며 양준혁을 때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강병규가 양준혁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호성을 언급했다. # 따라서 이러한 행보로 인해 구단에서 어용 회장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저 연봉 인상이나 복지기금 조성[19] 등을 이뤄내며 선수협 회장으로서 제대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1년 하반기에는 KBO의 외국인선수 기용 확대 움직임에 맞서 '포스트시즌 보이콧'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하여 한 때 KBO와 구단 측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결국 플레잉 코치로 시즌을 보내다가 2001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사실상 방출되어 은퇴했는데 이는 이호성을 어용 회장으로 앉혀놨더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수협을 이끌어나가자 구단이 당황하여 은퇴를 종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 앗! 시리즈> 중 87권인 <야구가 야단법석>에서 꽤나 많이(3~4번) 언급된 선수이기도 하다. 글러브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모자로 공을 받아서 상대팀 주자들을 3루 진루시켰던 사례가 담겨있다. 해당 책이 출판된 해는 2001년 무렵으로 이호성이 은퇴하기 직전이었다.

힘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것으로 유명해서 신인 시절에는 라커룸 벤치에 튀어나온 못을 엄지손가락으로만 눌러서 박았다고 한다. # 또한 홈런을 쳐서 무등구장 바깥의 무등수영장 기둥까지 공을 날렸던 선수이다. 게다가 싸움 실력까지 대단했는지 광주 시내에서 조직 폭력배 4명과 붙어서 4 대 1로 순식간에 조폭들을 때려잡은 전설도 있다.[20]

그 외에도 LG 외야수인 이병훈에게 대타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허용한 외야수가 이호성이다. 이 후 1994년에 LG에서 해태로 온 이병훈이 이적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싸운 선수가 당시 입단동기인 이호성이었다. 덕분에 둘은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두 사람의 자세한 일화는 이병훈 문서를 참조.

1990~2001 시즌까지 1,090경기에 출장. 통산 타율 0.272, 홈런 102, 도루 167, 득점 562, 타점 526, OPS 0.780을 기록했으며, 11시즌만 뛰고도 sWAR* 27.50을 쌓았다. 특히 그의 wRC+는 118.2로, 99~00년 두 시즌동안 그렇게 까먹고도 120가까이 기록한 걸 보면 타격에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던 선수임에는 분명하다. 타격뿐 아니라 도루 역시 통산 167 성공에 55 실패로 성공률 75.2%를 기록해 매우 좋은 수준이었고, 특히 1992~93시즌에는 25연속 도루성공을 기록하기도 했으며[21] 타격에서 노쇠화가 분명했던 2000년에도 13도루 1실패를 기록하며, 주루센스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공수주 삼박자를 갖췄으며, 이종범이나 홍현우처럼 팀을 견인할 만한 특급 선수는 아니었지만 한 팀의 중심타자로서는 꾸준히 괜찮은 수준의 성적을 냈다고 볼 수 있다. 김상훈이나 유동훈, 김종국 등도 은퇴식을 치러주는 마당에, 영구결번급 레전드에는 못 미치더라도 충분히 은퇴식을 치러 줄 만한 선수이기도 했지만 바로 윗 문단에도 나왔듯이, 선수협 회장 경력으로 구단과 마찰을 빚으며 은퇴식 없이 은퇴를 하게 됐다.

즉 이종범이나 홍현우가 야구 천재였다면 이호성은 야구 수재라고 불러 줄 정도는 됐다. 커리어 초반 4~5년간 보여준 활약은 정말 눈부셨고 김응용 감독 또한 이호성 데리고 야구한다고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으나, 1993년 부상 이후로 성적이 한 풀 꺾여서 대선수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래도 이후로도 특급은 아니지만 1군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적은 내주었던 좋은 외야수였다. 21세기를 기준으로 하자면 전성기 기준 전준우, 손아섭, 박건우, 구자욱, 나성범 등과 비견될만한 호타준족이었며 현역으로 풀타임 시즌이 채 10시즌도 안됐으나 누적 sWAR이 30에 가까운 리그 상위권 외야수였다. 다만 현역 시절에 해태에는 상술했듯 당시 라인업에 너무나 훌륭한 선수들이 많아 묻힌 감이 있다. 그래도 주루능력은 20도루 이상을 기록했듯 빨랐으며, 외야 수비에서는 어깨는 강견이었으나 약간의 돌글러브 기질이 있었다.

2.1.1.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해태 타이거즈 99 313 .304 95 16 6
(3위)
7 48 57 16 49 .460 .395
1991 121 434 .288 125 12 7 21
(5위)
84
(3위)
98
(2위)
25
(4위)
79
(2위)
.493 .394
1992 110 374 .278 104 16 3 14 52 78 25
(5위)
73 .449 .393
1993 75 210 .310 65 14 1 3 22 35 10 44 .429 .428
1994 105 374 .265 99 10 2 9 49 63 21 57 .374 .358
1995 55 185 .249 46 9 2 5 22 24 6 16 .400 .307
1996 105 357 .258 92 9 0 9 63 38 16 29 .359 .310
1997 110 380 .276 105 13 0 15 63 51 20 58 .429 .370
1998 83 250 .276 69 16 1 4 30 28 5 28 .396 .348
1999 101 273 .249 68 17 0 6 35 43 10 39 .377 .342
2000 117 397 .242 96 25 0 8 57 52 13 69 .365 .353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KIA 타이거즈 9 16 .250 4 2 0 1 1 2 0 1 .563 .294
KBO 리그 통산
(12시즌)
1090 3563 .272 968 159 22 102 526 569 167 542 .415 .365

2.2. 은퇴와 몰락

어쨌든 이호성은 은퇴식도 제대로 못 치르고 은퇴했지만[22] 그동안 벌어놓은 많은 거액의 돈들을 바탕으로 몇 년 동안 준비를 해 두었는지 1999년에 자신의 친형인 이호진과 함께 컴퓨터 및 전산장비 도소매 업체인 진성정보시스템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01년에는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웨딩홀[23]을 차렸는데, 처음 2년간은 잘 나갔다. 직원은 70여 명에 연간 매출액이 70~80억여 원에 달했으며 2003년 경에는 본점이 위치한 광주 뿐만 아니라 순천 목포에도 2/3호점도 냈을 정도로 엄청 대박이 났다. 또한 스타 플레이어답게 현역 시절 야구계에 쌓아놓은 인맥도 탄탄했기에 장성호를 비롯한 여러 타이거즈 출신 선수들도 결혼식을 할 때 호성웨딩홀에서 올리는 게 반쯤 관례가 되고, 동료 선수들이 주변 지인들에게도 알아서 홍보를 해 줬기에 단골 손님들도 계속해서 있던 편이었다. 이 무렵 동강대학교의 야구부 설립에 후원을 하고 초대 감독에 내정되기도 했다. 뉴스 하지만 그는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사업을 넓히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이것이 바로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전남 순천에서 실내 스크린 경마장 사업[24]에 뛰어들었지만 100억 원 정도가 소요되는 마권 사업에 자본금이 모자라자 가족들을 보증인으로 해 10억을 빌렸고, 그것도 모자라서 은행에까지 담보를 잡고 35억 원을 빌렸다. 하지만 주민들의 도박장 반대 여론에 밀려 경마장 사업은 백지화되었고, 이에 절망한 이호성은 본인이 직접 '전 프로야구 선수 이호성을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한 농림부!'라는 제목의 탄원서까지 청와대에 올려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100억 원의 초대형 부도를 내고 사업을 망치고 말았다. # 이호성은 사업 과정에서 사채까지 끌어썼고 비정상적인 이자까지 붙어버리면서 총 270억 원의 부채에 시달렸다.

도박장 사업 역시 말 그대로 도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위험부담이 상당히 큰데, 철저한 사전 준비나 조사도 없이 남의 말만 무턱대고 믿어버리고 사업 자금을 무리하게 몰아넣은 것이 화근이었다.[25] 그냥 오로지 예식장 사업 하나에만 매진했으면[26] 이호성이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사건이 화제가 될 당시 일부에서는 그가 소위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휘둘린 결과가 도박장 사업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또 예식 사업도 해가 갈수록 잘 안 되어서 도박에 손을 댄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는 후에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운동선수만 하다가 사회 물정을 너무 몰라 벌어진 일이다. 사회 경험이 없어 아무나 쉽게 믿었던 것이 큰 화근이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실제로 운동선수나 군인, 연예인 같은 직종들은 각자 일들에는 베테랑이어도 워낙 폐쇄적인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데다가 남 부리고 살다 보니 자기 분야만 벗어나면 영락없는 문외한이다. 또 운동선수의 경우처럼 어린이 시절부터 그것만을 목표로 두는 경우에는 사회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어 어른이 되어 그 분야에서 은퇴하고 나면 세상 물정에 어두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호성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선수 시절에는 문제가 없던 사람이 은퇴 후 뭔가에 잘못 엮여 매스컴에 휘말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27]

2.2.1. 반론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몰락한 운동 선수의 대표 주자 격으로 언급되고 이호성 본인 또한 사업에 실패하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듯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호성은 맨주먹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일반적인 자수성가 자영업자와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형제들 가운데엔 의사 변호사가 있는 엘리트 집안 출신이었고, 스타 선수 출신에 광주일고 - 연세대라는 최강급 학연을 등에 업은 선수였으며, 적어도 그때까지는 자신의 호탕한 보스 기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십분 발휘해서 지역사회와 야구계 내외로 인맥도 잘 구축해 놨다.

게다가 이미 20대 현역 시절부터 사업에 관심이 많았는지 자신의 친형과 당시로선 신사업이었던 컴퓨터 솔루션 업체와 사무용 복사기를 공급하는 회사를 세워 투잡을 뛰는 등 사업가로 변신한 운동선수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되레 준비된 사업가에 가까웠다. 아니 이미 나름대로 성공한 사장님이었다. 이 사업체는 꽤나 건실했는지 이호성이 모든 걸 다 잃고 대량살인마로 전락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10년 가량 이호성 본인 소유로 계속 운영됐다고 한다.

이렇듯 비록 100억대 부도를 내고 몰락하긴 했지만, 이렇게 이호성 수중에 돈이 들어올 구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고 또한 새로운 사업을 진행할 여력도 남아있었다. 부도가 난 상태에서 채권자들이 보통 빚을 받기 위해 이호성의 남은 재산을 경매에 붙이거나 했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던 걸로 보아 추가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이호성이 시간만 지나면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 채무기한을 연장해줬을 가능성이 높다.[28] 그래서 훗날 이호성이 4모녀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자살했을 때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았는데 처음 사건이 세상에 공개됐을 땐 빚이 많은 이호성이 내연녀의 돈을 노리고 살해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 우세했지만, 이호성의 또 다른 내연녀인 차아무개라는 사람은 이호성이 당장 돈 몇푼에 쪼들리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자기 회사가 있었으니 돈 나올 곳이 없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

이런 걸 따져 볼 때, 아마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했다면 은퇴 후 사회인으로서 실패한 선수들이 즐비한 현실을 극복한 모범 사례이자 성공한 운동 선수 출신 사업가로서 후배 선수들의 귀감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29]멀리 갈 것도 없이 이호성과 프로 입단 동기인 최해식은 프로야구선수로서는 실패했지만 사업가로서는 성공했다.

그리고 이호성이 한창 잘 나가는 선수 생활 때부터 사업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당시 프로 선수들의 활동 여건에서 나타났던 한계 때문이던 걸로 보인다. 그 시절엔 지금처럼 프로 선수 생활이 몸 관리만 잘해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 이어갈 정도에 아직 이르지 못했고, 연봉 수준도 지금보다 많이 낮아서 선수시절에 벌어들인 것만으로 은퇴 이후까지 보장받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는 프로 야구단들 중에서도 열악한 자금 사정으로 악명 높았던 해태 소속이었고, 특히 IMF 외환위기 해태그룹이 파산해서 주축 선수들이 차례로 트레이드되는 것도 보았다. 때문에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 현실적인 고민이 컸고, 지금 선수들보다 더 빨리 사회 진출을 준비할 필요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30] 이호성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당대의 스타이자 팀선배인 김성한도 현역 한창 때부터 이런저런 부동산 사업이나 여러 사업체를 굴리며 은퇴 이후의 삶을 대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걸로 유명했다. 이호성도 이를 참고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호성이 은퇴 후에도 야구 코치 등으로 야구계에 계속 남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반응도 많았지만, 선수협 초기에 선수협에 완강하게 반대한 이력 때문에 야구 은퇴 후에는 프로야구계에서 다시 발을 붙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31]

3. 논란 및 사건 사고

3.1. 이호성 살인 사건 및 사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호성 살인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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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녀와 그녀의 세 딸을 살해한 후 한강에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40세. 사망 시점은 2008년 3월 10일 새벽 시간대로 추정된다.[32]

일반적으로 업적이 많은 유명인사라면 아무리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서 자살했다 하더라도 장례식에 가족, 친척, 지인, 팬 등 수많은 조문객들과 조화가 가득 차고, 간혹 정치인들, 다른 유명인사들, 일반인들도 조화를 보내주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호성은 그 수준을 넘어 연쇄살인자로 전락해버린 탓에 그의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조화 또한 단 한 개도 없었다. 소수의 유족들이 기자들의 방문을 막은 채 위패와 영정만 올려두고 형식적으로나마 초라한 장례식을 치렀다. 더불어서 당일 장례식장의 장례 명단에도 이호성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이는 그의 유족들과 장례식장 관계자들이 재빨리 끝내려고 고의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4. 기타

4.1. 야구 게임에서의 이호성

이호성의 모든 가명 일람
( 2024년 기준)
게임 가명 비고
마구마구
마구마구 2024
장산격
마구마구 2017 성민철 2017 패치 이후 변경
서비스 종료
프로야구 매니저 신영수 서비스 종료
슬러거 이화민
프로야구 H2 사임수 서비스 종료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 이합민
넷마블 프로야구 2024 이세중
이사만루24 이한수
이사만루2015 KBO 이후선 실제 선수 사진 기재
서비스 종료

파일:이사만루2015이후선.jpg
* 이사만루2015 KBO에는 '이후선'으로 개명되어 있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1990년, 1991년 시즌의 슈퍼스타 등급 카드와 현역 마지막 주전시즌[48]인 2000년의 일반 카드[49]가 존재한다. 한편 실루엣 처리된 게임들과 달리, 모든[50] 이후선 슈퍼스타 카드에는 당시 이호성의 실제 흑백 사진이 나와있었다. 1991 이후엔 타격스탯이 준수한 15성으로 실장되었다.

5. 관련 문서


[1] 동명이인 야구선수인 1986년생 이호성과는 한자가 다르다. 2004년생 이호성은 한자가 불명이다. [2] 마포경찰서에서 발부된 수배지 상의 주소로 보면, 은퇴 후 광주와 서울을 드나들며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3] 석사 학위 논문: 전신지구력 운동이 폐기능과 운동 수행능력에 미치는 영향(1993. 2) [4] 제503보병여단 [5] # [6] 2000년 8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기재되었다. [7] 외야 전 포지션을 소화했다만 이순철이나 김창희가 중견수로 주로 나왔기에 좌익수나 우익수로의 출전비율이 높았다. [8] 아버지의 산소가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동묘지였으며, 더욱이 학력 사항을 보면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나온 것이 표시되어 있다. 80년대는 체육 특기자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자유롭게 학과를 정할 수 있던 시대였는데, 개신교 목회자가 되려는 목표를 가진게 아닌 이상, 굳이 신학과를 골라서 갈 이유도 없었고, 그의 장례식 때 위패에는 개신교를 뜻하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학번 상으로는 안내상, 우현, 이대연보다 후배다. 사실 이호성이 생전에는 독실한 편이었다고 생각되는게, 연세대 신학과가 대한민국 대학의 신학과 중에서 매우 높은 학벌이지만 목사가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 매우 힘든 직분이라서 신학생을 지망하는 수험생이 다른 문사철 지망 수험생보다 적은 특성상 연세대 인문계열 중에서는 인기가 가장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신학과를 골랐다는 것. [9] 광주상고를 졸업하고 고졸연고 자유계약을 통해 입단한 홍현우도 역시 프로데뷔 동기생이다. [10] 훗날 김봉연의 군산상고 후배가 되는 김상현도 KIA 이적 후 27번을 달고 홈런왕이 되었다. 현재 27번의 주인은 타자 김호령이다. [11] 장종훈도 21도루로 20-20을 달성했지만 앞으로 홈런타자로서의 기대가 컸기에 홈런에 몰두하길 바랬던 것도 사실이다. [12] 특히 1993년은 리그 평균자책점이 3.27로, KBO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 중 하나이다. [13] 극단적인 예시로,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박재용의 타율은 겨우 2할 5푼대에 불과했다. [14] 즉, 후배 선수들을 패기도 잘 팼지만, 챙겨주는 것도 잘했다는 얘기다. 1996년 시즌을 앞두고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이 터지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상조회장(주장) 이순철, 상조회 총무 송유석과 함께 팀을 다 잡았다. [15] 하지만 살인사건 이후로 해태가 한국시리즈 또는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한 하이라이트를 보여줄 때는 이 부분이 죄다 편집되거나, 한 경기가 통째로 1시간 분량이 나올 때에도 타자에 대한 언급은 일절 안하고 잘해야 타격하는 부분만 나온다. 1994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4번타자로 나와 정민철을 상대로 2안타 2타점에 고의사구까지 얻었는데도 9번타자 이경복까지 9번타자라며 자막이 나온다. 이 외에도 이호성이 나온다 싶으면 잘 안 보이도록 블러 처리 해버린다. [16] 이 외에도 조경택도 포함되기도 한다. [17] 선수협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선수협 자체에 반대했다기보다는 1기 선수협을 주도하던 인물들의 강경적인 행보에 대한 반발이었다. [18]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말한 바에 따르면 해태 타이거즈의 군기반장 계보는 김일권, 김성한, 이순철, 송유석, 이호성 순으로 이어진다. [19] 취임 당일 언론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2001년 당시 1,500만 원이었던 최저 연봉을 단계적으로 2백만 원씩 인상해 2002년에는 1,700만 원, 2003년에는 1,900만 원까지 인상해 줄 것을 전달했고, 싸움의 흔적을 다 치유시키고 후배 선수들이 좋은 환경에서 경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 밝혔었다. [20] 경찰서에서 훈방 조치되어 나가면서 앞으로 어디 가서 건달 족보가 어쩌니 하고 떠들어 대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고 한다. [21] 97년 이종범이 갱신할 때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22] 사실 이호성이 은퇴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프로야구 내에서 은퇴식 문화가 매우 희미했다. 이호성보다 훨씬 화려한 성적을 냈던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은 물론 불세출의 슈퍼스타인 선동열조차도 은퇴식을 치르지 못했다. 이호성의 은퇴 이전에 타이거즈에서 은퇴식을 치른 선수라고는 김성한이 유일했고 그나마 KIA에 와서 이강철 김종국을 필두로 은퇴식을 치르는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23]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 28-17 소재. 이후 샤론웨딩문화원, 퀸스웨딩홀을 거쳐 현재는 웨딩홀이 아닌 식자재마트로 바뀌었다. [24] 전라남도 순천시 팔마로 158( 덕암동 224-11). 이 사업이 망하면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치권 문제가 꼬인 상태다. [25] 주민들이 경마장 유치를 반대할 것을 예측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설령 주민들을 상대로 사전 조사 같은 것을 하여 반대가 많다는 것을 인지하였어도 나중에 충분히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단단히 착각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6] 다만 2010년대 후반 들어선 결혼률이 눈에 띄게 떨어져서 다른 업종과 병행하거나 아예 다른 업종으로 갈아탈 수 밖에 없기는 하다. 후술하듯 실제로 예식 사업도 이호성 사건 이전부터 매출이 떨어지고 있기도 했고. [27] 이 문제는 비단 야구 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스포츠계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데, 일본야구기구에서는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은퇴 선수를 위한 직업교육, 구직 활동 지원을 하고 있으나, 한국 스포츠계는 이런 제도가 지금도 상대적으로 미비하다. [28] 채권자 입장에서는 당장 받을 돈이 없어보이면 다른 채권자들보다 빨리 채무자를 뜯어먹어야 하지만, 이 사례처럼 유명인이라 야반도주도 쉽지 않고 추가 고정수입이 있다면, 빚을 유지하면서 이자를 받는 편이 당연히 더 좋다. 그러다가 채무자가 사정이 나아져서 갚으면 좋고, 정 못 갚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뜯어먹으면 그만. 채권자들과 오랜 관계 끝에 지금은 그냥 형동생하며 지내는 이상민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쉽다. [29] 경마장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 하락세인 웨딩홀 사업을 접거나 축소하는 대신 기존의 다른 사업에만 꾸준히 매진했거나, 아니면 사업도 하면서 본인의 광주 지역 야구인맥을 바탕삼아 유소년이나 아마추어 야구 육성에 재능기부도 해 이미지 회복도 하면 이호성의 네임밸류라면 이병훈(방송해설)이나 김기태(1군 감독)처럼 장기적으로 회생할 기회는 정말로 많았다. [30]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호성은 성적에 비해서 번 연봉도 적었다. 1990년 최저연봉 1,200만 원, 1991년 2,000만 원, 1992년 3,000만 원, 1993년 3,300만 원, 1994년 3,800만 원, 1995년 4,800만 원, 1996년 5,000만 원, 1997년 7,000만 원, 1998년 8,500만 원, 1999년 7,400만 원이다. 이후 2000~2001년은 성적 저하에 따라 연봉이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괜히 그가 선수 시절부터 투잡을 뛴 것이 아니다. [31] 그래도 선수협 5적으로 불렸던 김경기, 김기태, 류지현, 조경택, 김태형 등은 꾸준히 프로 팀에 코치진으로 남았는데 이호성 못지 않게 강성으로 손꼽힌 김기태 김태형 류지현도 1군 감독으로 승격된 경우를 생각하면 이호성도 범죄만 안 저질렀다면 야구계에 발붙일 기회는 충분히 주어졌을 것이다. [32] 당일 0시 7분에 내연녀와 통화했던 마지막 통화 기록이 존재하며 이때를 기점으로 기지국에 잡힌 통화 기록이 없다. [33] 물론 앞서 언급한 이만기 혹은 추성훈이나 김동현처럼 격투기가 주업인 사람과 동급까지는 아니다. [34] 사실 범행 은폐 수법은 당시 기준으로 전혀 어설프지 않다. 당시는 CCTV가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고 피해자의 아파트 현관, 지하주차장에 CCTV가 있었기에 이호성의 범행을 쉽게 잡을 수 있었지, 만약 약간 사건 당시 기준 몇 년 전처럼 CCTV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면 상당히 치밀한 범죄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영구미제 실종사건이 됐을 확률이 매우 높다. [35] 빈스 맥마흔이 "그를 다루는 일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그가 역사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라며 현재는 기록만 다시 되살아난 상태다. 물론 기록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 그가 죽은 이후 현재까지도 WWE에서 공식적으로 그를 언급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36] 단, 영구제명 기록말살형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KBO뿐만 아니라 MLB를 포함한 모든 야구계에서는 제명당한 선수들의 기록까지 말살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일부러 지우지 않는 게 아니라 함부로 지울 수 없는 것인데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에서 제명당했다고 기록을 말살해버리면, 상대 선수는 귀신을 상대로 기록을 달성한 것이 되기 때문에 후일 범죄자가 되거나 약물복용이 밝혀지거나 해도 기록 자체는 지우지 않고 추가설명을 하는 것으로 대신 한다. [37] 물론 출시 당시엔 현역이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38] 해당 게임은 당시 야구장에서 주얼CD를 뿌려댔다는 소문이 있다. [39] 해당 별명을 가진 또다른 인물인 박흥숙도 이호성처럼 네 사람을 죽였으나, 무분별한 개발과 철거에 저항하다가 살인까지 이어진 것이므로 이 자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40] 현재에는 포털사이트에 이호성을 검색하면 동명의 1953년 생 배우가 나온다. [41] 2명 이상을 살해하고도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이호성의 경우는 금전적 목적으로 피해자를 살해한 터라 참작사유는 없고 거기다 13살밖에 안된 막내딸을 포함한 아이들까지 같이 죽였으므로 더 가중처벌되었으면 되었지 감형될 가능성은 없다. [42] 前 롯데 오리온즈-치바 롯데 마린즈 소속 투수로, 1988년 최다탈삼진을 한 차례 기록한 것 이외에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었다. [43] 선수시절 번 돈은 많았으나 돈관리를 못해서 버는 대로 다 써버리는 스타일이었고, 은퇴 후에도 월급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흥비와 휴대폰 성인사이트 등으로 엄청난 돈을 썼다고 [44] 특히 2024년 들어 엘리트의 기준이 대폭 하향된 현재로서는 엘리트는 따놓은 수준이다. [45] 2005년 노동자 다섯 명을 마체테로 공격하고 휘발유를 부으려고 했다. 14년 7개월형 선고받고 현재는 임시 석방 상태다. [46] 전자는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커리어하이를 찍은 선수고, 후자는 LA 다저스로 트레이드되기 직전까지 갔던 선수라 한국인 메이저리거들과 엮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47] 사실 단순한 무지이거나, 초기부터 있어왔던 특정팀 편애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전자의 경우 동명이인을 동일선수 취급 또는 좋은 스탯을 주거나, 94 한대화처럼 똑같은 선수카드를 2장 내거나 흑인과 백인을 바꿔 내는 등의 일이 빈번하게 발생해서 카드를 대충 내놓는 것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48] 직전에는 00년이 마지막 시즌이라 했지만 사실과 다르다. 01시즌 16타수 4안타를 쳤으며 청주 야구장에서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홈런을 쳤다. [49] 레전드 등급까지 승급 가능 [50] 1990 이호성 슈스에도 사진이 있다. 다만 정면 사진은 아니라 파급력은 좀 덜한 듯. [51] 1996, 1997년에 2할 4푼치고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받은 박재용도 노말과 스페셜 사이의 능력치를 가진 레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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