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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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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
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
2009. 07.25. 한국야구위원회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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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
2020. 08.26. KIA 타이거즈 공식 어플리케이션 팬 투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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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모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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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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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1982~1983 1984 1985 1986~1988 1989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주장직 폐지[1]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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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모 한대화
이순철
선동열 김정수
<rowcolor=#000> 1997 1998 1999 2000~2001 2002~2004
이건열
이순철 (임시 주장)
이강철 이강철 이호성 이호성 이종범
<rowcolor=#fff> 2005 2006 2007 2008 2009~2010
김종국 이종범 이종범 장성호[2] 장성호 김상훈[3] 김상훈
<rowcolor=#fff> 2011 2012 2013 2014~2016 2017~2018
최희섭 김상훈[4] 차일목 김상훈 이범호 김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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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 안치홍[5] 양현종 나지완 김선빈 나성범
[1]: 김일권 이후 장기간 주장직 폐지 출처
[2]: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3]: 마무리 캠프 직전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4]: 스프링 캠프 후 주장 교체
[5]: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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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7번}}}
팀 창단 김종모
(1982~1992)
이종범
(1993~1997)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5번}}}
백기성
(1983~1991)
김종모
(1993~1995)
권오성
(1996~1999)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75번}}}
박현수
(1990~1993)
김종모
(1996~2000)
김지훈
(2005~201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장호연
(1998~2000)
김종모
(2001~2004)
조계현
(2006~2009)
{{{#fff [[KIA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등번호 87번}}}
박철우
(2001~2005)
김종모
(2006~2007)
김동재
(2008~2010)
{{{#fff [[KIA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등번호 71번}}}
김종윤
(2003~2007)
김종모
(2008~2009)
백인수
(2010~2018)
한화 이글스 등번호 76번
김민재
(2010~2012)
김종모
(2013~2014)
정민태
(201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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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종모.jpg
김종모
金鍾模 | Kim Jong-mo
출생 1959년 11월 1일 ([age(1959-11-01)]세)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서림초 - 광주동성중 - 광주상고 - 영남대
포지션 우익수, 좌익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제일은행 야구단 (1981)
해태 타이거즈 (1982~1992)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및 1군 타격보조코치 (1993~1995)
해태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1996~2000)[2]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1~2004)[3]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06)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07)[4]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07)[5]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08~2009)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2)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3~2014)[6]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14)[7]
해설위원 광주MBC 야구 해설위원 (2011)
kbc 야구 해설위원 (2018~2019)[8]
경력 KBO 재능기부위원 (2023~)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해설자 경력5. 여담6. 연도별 주요 성적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해태 타이거즈의 우투우타 외야수이자 前 해태 타이거즈-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의 코치.

해태 타이거즈의 원년 멤버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 골든글러브 4회 수상자이다. 정교한 타격과 연속 경기 무실책 기록[9]으로 유명했으며, 현역 시절 등번호는 7번[10]이었다. 광주상고 출신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3 ~ 1984, 1986 ~ 1987)
해태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외야수로서, 1980년대 당시 초호화 스타군단이었던 해태에서 김봉연, 김성한, 이순철, 선동열, 한대화에게 가려져 있었지만[11] 클린업과 하위타순을 넘나들며 5차례나 3할 이상을 기록하며 1980년대 해태 왕조의 건설에 기여한 선수였다.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등의 거포가 많았던 80년대 초중반 해태에서 컨택트에 초점을 맞춘 교타자라는 점이 주요 특징으로 꼽히곤 하는데, 사실 은퇴 시점에서도 홈런 10위권 대에 위치해 있었고 1982년부터 1988년까지 7년간 기록으로는 7위까지 기록했던 펀치력도 준수한 전형적인 중장거리형 교타자였다.[12] 특히 1984년에는 부상으로 24경기나 까먹고도 리그 5위에 해당하는 14홈런을 쳤으니 중장거리의 교과서로 봐야 할 듯. 즉 우타자판 장성호였던 셈이다.

프로에 데뷔 한 후 김종모는 좌효조, 우종모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컨택 능력에 있어서 비교될 선수가 역대 최고의 교타자였던 장효조 뿐일 정도로 빼어난 컨택능력을 자랑했다.[13] 그러나 역시 타격의 신이라고 평가받는 장효조의 벽은 넘지 못해서 자주 3할을 넘나 들었음에도 타격왕은 차지하지 못하는 2인자였다.[14][15] 83년 3할 5푼의 타율의 성적을 시작으로,[16] 4번의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 올스타전에 6번 출전, 특히 1987년 KBO 올스타전에서는 패전팀(서군) 소속임에도 MVP로 뽑히는 등 원년부터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84년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허리부상 때문에 경기 출장수가 많지 않은 편이다. 프로 통산타율이 0.298인데, 이는 앞서 말한 부상으로 인한 말년의 부진 때문. 김종모는 앞서 말한 뛰어난 타격 실력으로도 유명하지만, 타격 뿐만 아니라 안정감 있는 외야 수비실력을 지녀 265경기 연속 무실책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17] 그 외에도 항상 싱글벙글 웃는 모습으로 인품도 매우 훌륭하다고 알려져 있다.
1992년까지 잦은 허리부상 등으로 부진 했지만 92년 겨울,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서 스프링캠프때도 전년과 확연히 달라진 몸상태를 보여 본인과 코칭스태프가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시범경기를 앞두고 캐치볼을 하다가 공이 구강쪽을 강타하는 불의의 부상으로 인해 한 달여간 제대로 된 식사와 운동을 하지 못해서 스프링캠프 때 몸을 만들어 놓은 것이 허사로 돌아가 구단의 코치 권유에 의해 은퇴를 하게되었다.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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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타격코치 시절 (출처 :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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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타격코치 시절 (출처 :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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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타격코치 시절 (출처 : 포토로)

해태 타이거즈에서 김봉연과 함께 타격코치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1996년 초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 당시 코칭스태프였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길 코칭스태프 중 최선참이었던 유남호가 현역 선수 중 최선참인 이순철의 뺨을 때려놓고도 가만히 있자 오히려 김종모가 광주상고-해태 후배인 이순철의 부탁을 받고 잘 풀어보려다 "너도 똑같은 놈이네?"라는 말을 유남호로부터 듣고 더 이상 갈등을 봉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스승인 김응용이 2001년부터 삼성 감독으로 옮길 때 따라 삼성 코치를 역임하기도 했다. 김응용 감독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지도자인데, 김응용의 야구관을 잘 알기 때문에 시키기 전부터 먼저 알아서 했기 때문에 김응용의 총애를 받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2004년 선동열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자 한대화와 같이 타격코치로 1년을 있다가[18], 코치진 개편 과정에서 해임되었다.

2006 시즌에 서정환 감독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1군 타격코치가 되어 타이거즈에 복귀했고, 2007년부터 2군으로 내려갔으나, 팀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이건열과 자리를 맞바꿔서 1군 타격코치로 다시 올라왔다.[19] 2008년 조범현 감독이 부임할 때 KIA 수석코치로 승격되었다[20] 구단에서는 조범현 감독을 선임할 때, 성적 부진을 대비해서 조범현에게 수석코치를 이순철과 김종모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했고 조범현은 과거 삼성 라이온즈에서 함께 일한 경력이 있었던[21][22] 김종모 코치를 선택하면서 수석코치 발령이 이뤄지게 되었다.[23]



결국 2009년 KIA 우승으로 조범현 감독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자 우승 4일 만에 조범현의 입김으로 해임된다. 이에 대해 KIA 팬들의 반발이 많았다. 선임 때 해임 전에 미리 언질을 준다는 약속을 했으나 지키지 않고 당일에 바로 해임을 하였다고 한다. 우승 축하연에서 정의선 구단주와 대면하는 자리에서, 김종모가 조범현 옆에 서 있자 조범현이 김종모를 슬쩍 밀어내고 황병일을 데리고 와 옆에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후임 타격 코치로는 조범현의 측근으로 불리던[24] 황병일이 맡게 된다.

해임 후 광주 상무지구에 평소 모밀을 좋아해 종모밀이라는 모밀전문점을 2년 정도 운영하다가[25] 2012년에 모교 광주동성고 감독으로 선임되어 폐업을 하였다. 1년간 고교야구 감독을 하다가 2012년 페넌트 레이스 종료 후 스승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 이글스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 2014년 6월 26일, 김성한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수석코치에 임명되었다.[26] 이후 김성근 감독이 2014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코치직을 사임(구단의 재계약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의 행보는 불명확하나, 수석코치로 여러 번 우승을 하면서 나름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공석인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현장의 지도자들이 60년대 중, 후반에 태어난 감독들로 세대가 바뀌고 있는데다가 외야수 출신이라는 점, 한화 말년의 처참한 성적 등의 한계점이 있어 동기인 김성한보다 인선될 가능성이 더 낮았다는 평이 있었다. 기아가 김기태를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그냥 추측으로 끝났다.

2021년부터 서울 은평구BC(베이스볼클럽) U-16 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 하지만 이듬해 여름에 다시 광주로 내려와서 쌍촌동 금호베어스 타운에 서장군이라는 고깃집을 차렸다. 2022년 9월, 재창단 준비 중인 영선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을 맡게 되었으나 2달 만에 감독이 교체되면서 다시 요식업으로 돌아왔다.

4. 해설자 경력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8 시즌 kbc MyFM에서 KIA 타이거즈 홈경기 코믹 편애 중계방송 '양원경 김종모의 말로홈런'의 야구해설을 맡게 되었다. 캐스터는 참고로 전남 출신 개그맨 양원경. 지역방송이니까 가끔씩 사투리도 섞어가면서 편안하게 해설을 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과거 지상파에서 해설을 할때 사투리 때문에 조심스럽게 하다보니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역방송으로 와서는 사투리 문제가 해결이 되어 팬들에게 많은 야구 지식등과 일화등을 전달해주었다.

파일:탐욕종모.png

2019년에는 중계 플랫폼이 지상파 라디오에서 유튜브로 변경되면서 원정경기 중계도 하게 됐는데, 매 경기마다 캐스터 양원경과 함께 신들린 먹방을 선보였다. 다만 9월을 끝으로 양원경의 말로홈런이 중계권 횟수 만료로 종영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설위원직에서 내려왔다.

5. 여담

우승복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야구인이다. 선수 시절 6개의 우승메달[27]를 건 뒤로, 해태 코치로서 1993, 1996, 1997년 우승. 거기에 2001년에는 김응용 감독을 따라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뒤에서 거기서도 우승(2002)을 하며 2005년까지 삼성에 몸을 담았다가, 선동열이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물러났다.

다시 친정인 KIA 타이거즈로 돌아가 2009년까지 타격코치를 하며 KIA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11회 우승으로 김응용 감독보다 더 많다. 한마디로 김종모가 1군 코치로 부임하는 동안에는 그 팀은 우승한다. 하지만 결국 한화에서는 비밀번호 2자리만 더 늘린 채 팀을 떠나게 되면서 징크스가 깨졌다.

이건열과 더불어 마산아재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타자 헬멧 쓰고 외야 수비를 본 인물로 추정된다.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 김성한과 한 번, 김봉연과 한 번 같이 출연하였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풀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타이거즈 77 258 .291 75 12 0 10 43 28 7 20 .453 .342
1983 86 311 .350
(2위)
109
(5위)
17 2 11 44 51 7 29 .524
(4위)
.406
(2위)
1984 74 272 .316
(5위)
86 12 1 14
(5위)
44 38 2 35 .522
(4위)
.394
1985 57 147 .231 34 2 0 4 20 9 1 11 .327 .285
1986 104 383 .313
(2위)
120
(3위)
19 2 11 61
(3위)
59
(5위)
6 42 .460
(5위)
.381
(2위)
1987 88 332 .331
(5위)
110 13 1 9 41 43 2 25 .458 .377
1988 105 353 .300 106 8 2 4 35 36 1 29 .368 .350
1989 57 127 .236 30 4 0 0 16 6 0 10 .268 .288
1990 117 381 .286 109 20 1 10 64 41 0 46 .423 .360
1991 64 155 .206 32 4 1 8 23 15 0 12 .400 .262
1992 21 20 .200 4 0 0 1 4 3 0 6 .350 .385
KBO 통산
(11시즌)
850 2739 .298 815 111 10 82 395 329 26 265 .435 .356

7. 관련 문서


[1] 광주상고와 해태 후배인 장채근과 같은 화순군 남면 출신이다. # 참고로 남면은 2020년 1월 1일부터 현재의 사평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2] 전부터 수비코치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타격코치였다. 김봉연이 1군 타격 코치를 맡을 땐, 타격 보조 코치나 2군 코치를 하였고, 김성한이 코치로 합류한 1997년 전후론 1군 타격코치를 담당했었다. 김성한 전 코치는 코치 임명 첫해인 1996년 2군 타격코치로 계약하였고 주니치 드래곤스로 연수를 떠났었다. [3] 당시 삼성에 재계약하지 않을 때 타격코치인지 외야수비 겸 주루코치인지 명확하게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4] ~6월 17일 [5] 6월 18일~ [6] ~6월 25일 [7] 6월 26일~ [8] 2019년에는 유튜브 입중계로만 방송되었다. [9] 265경기 [10] 이후 이종범의 영구결번으로 처리 된 등번호이기도 하다. [11] 가려져 있었다고 표현되었지만 그 역시 KBO 리그의 8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빠짐 없이 꼽히고, 타이거즈 역대 올스타로 팀을 꾸려도 빠지지 않고 선정되는 프랜차이즈 스타 선수였다. 가려진다는 의미는 다른 팀이었다면 한 시대를 놓고 봤을때 간판 스타 중에서도 대표격이었을 선수가 그 정도까진 대우를 못 받았다는 정도이다. 지금도 타이거즈 팬들에겐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12] 오히려 거포로 알려진 김준환이 원년 홈런 2위를 기록한 이후론 단 한번도 10위 안에 들지 못하고 두자릿수 홈런도 단 두차례만 기록하는 모습을 보인다. [13] 세간의 평으로는 포수 미트에 들어간 공을 꺼내서 치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으며, 현역시절 정말로 공이 너무 좋아 못 칠것 같은 투수를 꼽아 달라는 질문에 자신에게 그런 투수는 없었다. 라고 말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삼미에게 무척강했다. 당시 삼미가 약팀이긴 했지만 타 선수들에 비해 유달리 강했다. [14] 83년과 86년에 타율 2위를 기록했는데, 특히 83년에는 .350의 고타율을 기록하고도 무려 .369의 타율을 기록한 장효조에 밀려 2위를 기록한다. 해당 타율은 역대 타이거즈 역사상 이종범, 김선빈에 이은 팀 내 3위 기록이다. [15]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소수정예로 운영된 해태 타이거즈의 팀 사정과 인위적인 기록관리로 타이틀 홀더를 만들어주는 것을 혐오하는 김응룡 감독의 성향 상 타율 관리를 목적으로 김종모를 빼주거나 할 수 없어서 타 팀의 수위타자들과 달리 타율관리가 힘들었다고 밝혔다. 출처 [16]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밝힌 1983년 .350의 고타율을 기록한 비화가 있었는데, 당시 해태 타이거즈 프런트에서 82년 시즌 종료 후 김종모에게 '내년 시즌에 타율 .350 이상을 치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 라고 했었다. 그리고 거기에 자극을 받은 김종모는 83년도 시즌에 정확히 .350의 타율을 기록했고 보너스를 받았다. 출처 [17] 이 기록은 훗날 조원우에 의해 깨진다. [18] 당시 한대화, 김종모, 박흥식 3명이 타격코치를 맡았지만 박흥식은 외야수비코치를 겸했다. [19] 하필 그 때 부정맥으로 병원에 실려가면서 바로 1군에 합류하지는 못 했다. [20] 당시 조남홍 기아자동차 사장 겸 기아 타이거즈 사장이 자신과 같은 인하대 출신 감독을 원했고 그래서 조범현 감독이 선임이 되었다. [21]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두 사람은 삼성 라이온즈 1군에서 각각 배터리코치와 타격코치로 일했다. [22] 사실 이순철도 조범현과 2000년에 삼성 라이온즈 1군에서 함께 동행했지만, 기간이 워낙에 짧았고 당시 1군 코치진 자체가 김응용 부임 이전의 땜빵 코치진이었던터라 결속력이 낮았다. [23] 당시 김종모는 자신의 야구 철학과 성격이 조범현과 맞지 않는다는것을 알고 계속해서 거절했으나 새벽까지 이어진 설득과 만약 해임을 할 시에 몇 달전에 미리 언질을 준다는 확답을 받고 수락하였다고 한다. 이 때 이순철은 해설위원을 그만두고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면서 그 자리에 대신 창단된 우리 히어로즈 수석코치로 취임했다. [24] 사실 황병일은 1990년 은퇴 이후부터 2002년까지 쭉 한화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2005년까지 LG에 있던 사람이었다. 즉, 장재중이나 최태원과 같이 조범현을 오래 보좌한 사람은 아니다. 허나, 2006년부터 조범현과 동행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야구관이 일맥상통하면서 조범현은 황병일을 중용하게 된다. 구단에서 보험용으로 선임했던 김종모 수석코치를 내치고, 황병일 타격코치의 수석코치 승격도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5] 다만 중간에 위치를 한 번 옮기기는 했다. [26] 마찬가지로 공석이 된 타격코치 자리는 장종훈 코치가 전담한다. [27]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이때까지는 한국시리즈의 우승팀 선수들에게는 우승반지가 아니라 메달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