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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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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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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수
文熙秀 | Moon-hei Soo
출생 1965년 3월 15일 ([age(1965-03-15)]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서석초등학교 (졸업)
광주충장중학교 (졸업)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4년 1차 지명 (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4~1995)
지도자 해태-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1998~2003)
동강대학교 야구부 감독 (2004~2015)
고창영선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6~201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2010)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경력
3. 은퇴 후4. 연도별 성적5. 여담6. 가족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해태 타이거즈의 야구선수로, 前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 이자 前 동강대학 야구부, 고창영선고 야구부 감독.

아마추어 시절부터 이름을 알린 선수로, 당대 흔치 않게 고졸 선수로 팀에 입단하였으며, 왕조 건설에 기여한 원클럽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현역 시절 별명은 한국시리즈 3차전의 사나이[1] 와 무등산 꽃돼지가 있다. 현역 시절 등번호는 20번이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광주일고 3학년생이었던 1983년, 방어율 0과 3할대 중반 타율을 기록하면서 광주일고의 시즌 3관왕[2]을 이끌었던 투타 만능의 에이스였다. 1983년 대통령배 결승전에서는 송진우 세광고와 대결하여 연장 10회 끝내기 2루수 내야땅볼 실책으로 힘겹게 우승했다. 1983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북일고에게 1회전에서 3-4로 패배,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군산상고에 3-4 패배, 봉황대기 결승에서는 포철공고에 5-3으로 승리, 황금사자기 결승에서는 대구고에 3-2로 승리하여 시즌 3관왕을 달성했다.[3][4]

1984년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뛰어들었다. 이 때 삼성 라이온스의 지명을 받은 정성룡, 롯데 자이언츠의 지명을 받은 조용철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고졸 신인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 때까지 2차례 있었던 신인지명에서 고3 선수가 단 1명도 호명되지 못했고 이후 해태의 역사에서도 고졸이 1차 지명을 받은 경우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점을 생각하면[5][6] 그가 야구 게임 유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허접한 투수가 결코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원래는 후보선수 두 명과 함께 동국대에 진학하기로 약속이 되었는데, 문희수가 프로로 돌아서는 바람에 친구 두 명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이 때문에 학부모들의 원성을 들은 광주일고 김대권 감독은 사표를 썼다고 한다.[7][8]

2.2. 프로 경력

프로에서의 성적은 입단 당시의 기대보다 좋지 못했다. 1984년 데뷔 시즌에 1승도 거두지 못했다.[9]

10승 이상을 거둔 시즌은 1985년, 1992년 두 번에 불과했고[10], 1989년부터는 무릎 부상과 급속한 체중 증가로 인해 재활병동에서 반년을 보내다가 가을에 잠깐 얼굴을 보이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1985년에는 선동열, 이상윤을 잇는 3선발[11]로 144이닝을 던지면서 12승8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오직 그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두고두고 회자될만한 활약을 펼치며, 한국시리즈의 사나이라는[12] 별명까지 얻게 된다. 가을까치 김정수와 함께 필승의 히든카드로 활약하면서 1988년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었는데, 같은 팀 동료들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大활약을 펼친 덕분. 198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 선동렬을 구원하여 마무리했고, 3차전에서는 리그 2호 한국시리즈 완봉승, 6차전에서는 1실점 완투승 등 총 2승 1세이브를 기록했다.

1988년 KBO 1호 더블헤더 연속 승리를 기록했다. 1988년 9월 1일 전주 야구장에서 롯데를 상대로 기록하였다. 1차전에서는 구원승, 2차전에서는 선발승이다.[13]

1988년 우승 이후 김응룡 감독은 체중을 늘리라는 지시를 하였고 술회하기를 "매일 저녁식사 때마다 한 양푼씩 밥을 먹었다"고 술회했다. 체중 증량에는 성공했으나 운동을 하면서 무릎 관절에 무리가 갔고 수술을 받았는데 이 수술이 선수생활 단축에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1993년에는 "3"선발로 시즌을 시작했는데, 4월 13일 인천 태평양과의 경기에서 "3"실점을 했고[14], 4월 18일 무등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대 쌍방울전 13연승을 끊으면서 연패 스토퍼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의 에이스 박충식과의 투수전에서 대등하게 맞서는 등 인상깊은 모습을 많이 남겼다. 다만 1993년의 경우는 3회에 강판되고 선동열 vs 박충식 구도가 성립됐다.

파일:external/www.choicenews.co.kr/19775_10172_4750.jpg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문희수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3차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1987, 1988, 1989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연달아 승리투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그것을 믿고 김응용 감독이 페넌트레이스에서 부진했던 문희수를 선발로 넣었지만 결과는..[15]

참고로 통산 한국시리즈 기록은 9경기(6선발) 4승 무패 1세이브 40이닝 ERA 0.68 WAR 2.08이다.

KBO 리그 통산 12시즌 241경기 943.1이닝 59승 49패 13세이브 17완투 5완봉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하였다.

3. 은퇴 후

1995년 은퇴한 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해태와 그 후신 KIA의 투수코치를 맡았다가 2004년부터 동강대학의 야구부의 감독을 맡고 있다. 동강대 야구부는 통산 8년 동안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2013년 드래프트에서 KIA 타이거즈에 7라운드 지명으로 박준표가 지명되기 전까지 단 한 명도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했을 정도로 약팀이지만[16], 그래도 계속 감독직을 맡는 것을 보면 학교재단 측이나 학부모들의 신뢰가 상당한 것 같다.

2015년을 끝으로 동강대학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동강대 감독은 팀 후배인 홍현우. 이후 새로 창단한 고창영선고등학교 야구부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2016년 고창영선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전태준 선수가 두산 베어스로 지명받는 등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019년 도중 개인사정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현재는 야인.

2020년 6월 20일에는 KIA 타이거즈의 올드 유니폼 데이를 맞아 김봉연과 함께 시구, 시타를 하며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 홈런을 갱신한 나지완에게 꽃다발을 수여하고, 구단으로부터 감사패와 특별 유니폼을 수여받았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4 해태 5 12⅔ 0 0 0 0 4.26 12 0 5 1 14 1.34
1985 39 144⅔ 12 8 1 0 3.48 159 11 48 5 64 1.43
1986 15 75 7 2 0 0 3.00 66 2 24 3 22 1.20
1987 22 109⅓ 7 7 2 0 2.22 89 5 27 4 37 1.06
1988 26 110⅓ 8 7 3 0 3.02 101 9 33 1 55 1.22
1989 26 121⅓ 6 10 1 0 3.93 110 7 65 2 59 1.44
1990 5 18 0 0 0 0 2.50 14 0 8 0 5 1.22
1991 28 75 4 0 4 0 2.88 61 5 37 2 46 1.31
1992 33 145⅓ 10 8 1 0 5.08 145 12 56 12 73 1.38
1993 18 63⅔ 5 2 0 0 3.82 71 2 14 5 35 1.34
1994 18 53⅓ 0 5 1 0 5.40 58 4 25 5 21 1.56
1995 6 14⅔ 0 0 0 0 7.98 26 0 3 0 7 1.98
KBO 통산
(12시즌)
241 943⅓ 59 49 13 0 3.69 912 57 345 40 438 1.33

5. 여담

운동선수로는 보기 드문 진보 정당 지지자로 진보신당 당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보신당 당원들은 당원 체육대회에서 야구를 하면 문희수가 속한 광주시당에게 질게 뻔하니 당원 체육대회에서 야구 종목을 빼자고 했었다고. 현재 당적은 불명. 그래도 보수적 인사가 많은 체육계에서 흔치 않은 진보적 인사다보니 진보 정당 등에서 여러번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은퇴의 계기가 매우 황당하다. 또한 코치로서도 KIA 구단에게서 아무런 통보 없이 해고당한 일이 있어서, 캐리어에어컨 노동조합 정리해고 철회 투쟁에서 노동조합원들을 격려하러 방문하기도 했다.

전설의 타이거즈 2022년 11월 방송분에서 김성규가 문희수는 광주에 거주중이라고 밝혔으며 문희수의 1년 후배인 송유석은 문희수를 인생의 스승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6. 가족

7. 관련 문서


[1] 한국시리즈, 그중에서도 3차전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인 것에 대해 취재진들이 붙인 별칭. [2]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3개 대회에서 모두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최우수선수로 1년 후배 박준태가 대통령배, 황금사자기에서 선정됐고 동기 김성규가 봉황대기에서 선정됐다. [3] 당시 우승 멤버는 문희수, 박준태, 이강철, 김목정, 이호성, 서창기, 천상주, 김선진, 정영진, 김성규였다. [4] 1983년 대구고의 2루수는 손경호였으며, 훗날 대구고 감독으로 2018년 황금사자기에서 광주일고와 대결했으나 준우승에 머물렀다. 서창기는 훗날 순천효천고 감독 겸 야구부장을 맡았으며 2024년 현재 목포과학대학교 감독을 맡고 있다. [5] 더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고졸 선수의 경우 '고졸우선지명'을 통해 연고 팀의 지명을 받는게 흔했고 1차 지명의 경우 대졸 선수들이 대상이었다. 고졸 선수들이 1차 지명을 받게 되는 건 1999년 말 고졸우선지명제가 폐지되고 나서이다. [6] 다만 1984년 당시 1차 지명 TO는 무제한으로, 2차보다 1차에서 지명되는 선수가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7] 당시에는 고교 운동선수들은 실력이 부족하여 운동선수로 성공하지 못할 거 같으면 일단 특기자로 대학을 들어가서 운동을 그만두고 학업을 충실히 하는 쪽으로 전환하여 대졸 학벌로 취업을 하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교 때까지 운동만 하다가 그 자체를 그만두고 갑자기 대학 입시공부를 하는 건 불가능 수준으로 어려우니 일단 입학은 체육특기자로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같은 학교의 동창 중 잘하는 선수를 따라 입학하는 걸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근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감독이 사표쓸만 했다. 비슷한 경우로 박경완도 본래 원광대로 진학하려다가 죽마고우 김원형의 소개로 쌍방울 레이더스 연습생으로 입단하면서 졸지에 다른 친구들이 피를 제대로 봤다. 그로 인해 대학을 못 가고 함께 신고선수로 입단한 동기들에 의해 선수단 내에서 나쁜 쪽으로 소문이 퍼졌다. 결국 쌍방울 초기 박경완은 동료를 배신한 이기적인 선수+연습생 신분의 고졸선수+친구따라 들어온 낙하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팀 선배를 비롯해 암암리에 온갖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참고로 대학의 케이스는 아니지만 축구 선수 안정환의 경우도 같은 중학교 축구부 동창들을 끼워팔기처럼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축구 명문고가 아닌 유명하지 않은 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기도 했었다고 한다. [8] 김대권 감독은 광주일고, 휘문고, 천안북일고, 경기고 등 여러 고교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9]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팀 1년 후배 송유석이 술회하기를 문희수의 신인 시절 실패 때문에 송유석에게 거액의 정식계약 대신 1년짜리 연습생 계약을 해태에 제시했고 연세대 등록기한을 이미 넘겨 어쩔수 없이 해태의 헐값계약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10] 그나마도 1992년은 5점대 방어율에 145이닝을 던지는데 그친, 다분히 운이 따른 10승이었다. [11] 4선발 겸 원조 마당쇠는 차동철이었다. [12] 혹은 3차전의 사나이라고도 한다. 한국시리즈 시합 중에서도 유독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신들린 듯한 활약을 펼친 데서 나온 별칭. [13] 훗날 더블헤더 연속 승리는 여러차례 나왔으나 선발승이 끼인 기록은 문희수가 유일하다. [14] 그해 해태는 태평양과의 경기에서 17승 1패, 인천에서 전승, 광주에서 8승 1패를 기록했는데 이날 6회 6:3까지 몰리면서 하머터면 질 뻔했다. [15] 우용득 감독이 지휘하는 삼성의 강세가 유독 두드러진 시즌이기도 했다. 정규 시즌 종료를 앞둔 1달 동안, 삼성과 해태가 1, 2위 순위가 두 번 바뀌고, 1위를 탈환한 해태가 순위 확정 1주일 전까지 0.5게임 차 ~ 1.5게임 차로 간신히 선두를 유지하는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것. 이런 분위기가 한국시리즈에서도 이어져, 해태 김응용 감독이 믿고 내보낸 투수 이강철, 문희수 모두 5회를 넘기지 못하고 조기 강판시키는 상황이 이어졌다. ※ MVP 이종범의 93 한국시리즈 타율이 27타석 7안타로 2할 5푼을 조금 넘긴 수준. [16] 2011년까지 고율, 차정구, 전준호 등 3명이 신고선수로 프로에 입단했다.[17] 2011년 삼성에 입단한 이경록도 이후 대불대(현 세한대)에 편입했지만 원래 동강대에 입학했었다. 여담으로 이 4명 다 입단한 팀이 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