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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00:25:06

이상윤(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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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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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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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3 1986 1987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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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1 1993 1996 1997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투수 마일스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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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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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1983~1992)
1987년 / 124승
최동원
(1983~1990)
1990년 / 103승
선동열
(1985~1995)
1990년 / 146승
장호연
(1983~1995)
1993년 / 109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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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97)
1994년 / 117승
정삼흠
(1985~1996)
1996년 / 106승
이강철
(1989~2005)
1996년 / 152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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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126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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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2000)
1998년 / 126승
정민철
(1992~2009)
1999년 / 161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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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군
(1986~2001)
2000년 / 100승
한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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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120승
정민태
(1992~2008)
2000년 / 124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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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134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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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
(1998~2012)
2007년 / 112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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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09)
2008년 / 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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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 123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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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012)
2009년 / 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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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015)
2010년 / 103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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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 138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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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20)
2015년 / 121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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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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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 17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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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 132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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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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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 109승
니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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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 101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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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024년 / 108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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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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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환
(2005~)
2021년 / 400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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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탈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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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1989~2009)
2008년 / 2048탈삼진
양현종
(2007~)
2024년 / 2076탈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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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KBO 리그 타자 마일스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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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6번
팀 창단 이상윤
(1982~1989)
문희수
(1990~1995)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8번}}}
임신근
(1985~1987)
이상윤
(1990~1995)
이호준
(1996~2000.6.1.)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78번}}}
추평호
(1995~1997)
이상윤
(1998)
김봉근
(2001~2002)
해태/ KIA 타이거즈 등번호 88번
결번 이상윤
(1999~2004)
이건열
(200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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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external/dimg.donga.com/50096938.10.jpg
이상윤
李相潤 | Lee Sang-Yun
출생 1960년 12월 21일 ([age(1960-12-21)]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서림초 - 광주동신중 - 광주제일고 - 한양대 (중퇴)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1990~2000)
해태-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01~2003)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4)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5)
병역 예술체육요원[1]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경력
3. 은퇴 후4. 여담5. 연도별 성적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이자 선동열 입단 이전의 초대 에이스. 포지션은 투수였다. 초창기 프로야구의 미남선수로 유명했다. 위력적인 패스트볼 때문에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등번호는 16번.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광주 출신. 광주동신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나 광주일고 진학을 선택하자 반발한 재단 측에서 광주동신고 야구부를 해체하는 우여곡절을 겪였다. 중학교 때는 포수, 광주일고 입학 당시에는 3루수를 맡았으나 강한 어깨를 인정받아 투수로 전향하였다. 고3때 팀의 에이스 역할을 수행했으며[2] 한양대 재학 중 한국프로야구가 창설되자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3] 학창시절에는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의 주역으로 베스트 10에 뽑히기도 했다. 이 준우승 덕분에 병역혜택을 받았다. #

2.2. 프로 경력

1982년 해태의 원년 멤버였으나[4], 부상때문에 원년에는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3년에 20승으로 다승 2위를 거두는 대활약을 펼치고 해태 타이거즈의 첫번째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5][6] 1983년 한국시리즈의 5차전에서 해태의 첫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마운드에 있었던 투수도 이상윤이었다.[7]

당시 145km/h의 강속구를 던졌는데, 지금이야 어지간하면 그 정도 던지지만[8], 당시에는 최동원이나 선동열을 제외하면 저정도 던지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130km/h 후반을 던지면 강속구 투수라고 일컬어졌다.[9] 그 다음해에도 10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선수층이 빈약한 팀 사정 때문에 심지어 14완투를 거두며 20승을 일궈냈던 83년 시즌에도 출장 경기수의 거의 ⅓ 가까이 구원 알바도 병행해야 했다. 80년대 에이스 투수의 숙명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최동원급의 초인이 아닌 이상 2년 간 440이닝을 던지며 전천후로 등판하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1985년에는 부상으로 거의 쉬다시피 했으며 그의 에이스 자리는 선동열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도 1986년 다시 10승을 넘어서며 해태 타이거즈의 두번째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1988년 16승을 거두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부상 때문에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KBO 리그 통산 8시즌 175경기 843.2이닝 65승 46패 14세이브 33완투 6완봉 평균자책점 3.13을 기록하였다.

3. 은퇴 후

해태/KIA 타이거즈(1990~2004년), 선동열 감독 시절의 삼성 라이온즈(2005년)에서 투수코치로 무려 16년 간 일했다. 특히 KIA 타이거즈의 첫 신장개업 시즌인 2002년에는 3년 연속 팀 ERA 5점대였던 약체 투수진을 수습, 3점대로 복구시키면서 2위로 5년만의 가을야구 잔치에 참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10] 야구선수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골프에도 능해서 몇 년간 중국 옌타이에서 골프장 사업을 했고, 이후 귀국하여 2011년부터 광주광역시 광산구 운남동에서 지역 프랜차이즈 마트인 '영암마트' 운남점 사장이 됐다고 한다.
파일:external/static.news.zum.com/NISI20110722_0004866855_web.jpg

4. 여담

5. 연도별 성적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해태 23 102 7 5 0 - 0.583 3.88 87 8 64 58 51 44 1.47
1983 46
(2위)
229⅓
(3위)
20
(2위)
10 6
(3위)
- 0.667 2.67 181 10 99 178
(2위)
83 68 1.20
1984 40
(4위)
211⅔ 10 13 8
(3위)
- 0.435 2.85 186 14 83 128
(5위)
75 67 1.22
1985 2 5 0 2 0 - 0.000 10.80 9 3 3 2 6 6 2.40
1986 21 115 10 5 0 - 0.667 2.97 91 7 54 47 45 38 1.24
1987 12 42 2 4 0 - 0.333 4.93 46 1 20 13 26 23 1.55
1988 30 137 16
(2위)
6 0 - 0.727 2.89 98 3 79 55 56 44 1.26
1989 1 1⅔ 0 1 0 - 0.000 16.20 4 0 2 1 3 3 3.60
<rowcolor=#373a3c> KBO 통산
(8시즌)
175 843⅔ 65 46 14 - 0.586 3.13 702 46 404 482 345 293 1.28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2년 5완투 0완봉
1983년 14완투
(5위)
3완봉
(4위)
1984년 8완투 1완봉
1986년 3완투 1완봉
1988년 3완투 1완봉
통산 33완투 6완봉

6. 관련 문서



[1]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 # [2] 고1이 선동열이었으며 이상윤의 강속구, 방수원의 컨트롤과 변화구를 보며 본인도 잘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3] 방수원은 영남대 중퇴, 김일권은 상업은행, 한양대, 육군팀을 거쳐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에 선발됐으나 배성서 코치와의 불화로 팀을 이탈하고 해태에 입단하였다. [4]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1982년 창단 당시의 얇은 선수층을 설명할 때 투수 다섯명 중 한 명이었다고 했다. 나머지는 강만식, 신태중, 김용남, 방수원이다. [5] 그러나 당시 삼미의 장명부가 무려 30승이라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우는 바람에 이 기록의 빛이 바래고 만다. [6] 그래도 이 20승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단일 시즌 최연소 20승 투수 기록(22세 8개월 21일)이다. [7] 이해창이 땅볼을 때렸고 유격수 서정환이 1루수 김일환에게 송구하며 아웃됐다. [8] 2022년 현재, KBO의 리그 평균 구속이 144.2km/h이다. [9] 그러나 최동원은 한국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출전하지 못했고, 다음 해에 프로에 진출했으나 그 해에는 이상윤 만한 활약은 펼치지 못했다. 선동열은 아직 고려대 재학중이었다. [10] 물론 거기에는 마크 키퍼, 다니엘 리오스의 원투 펀치의 공이 제일 크다. [11] 김응용은 선수단의 단합과 공정함을 제일로 쳤고, 그래서 뜬소문이 돌아서 선수단의 분위기가 나빠질까봐 친구조차 멀리한 것이다. 괜히 김응용이 명장소리를 듣는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