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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식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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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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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7번 | ||||
팀 창단 | → |
강만식 (1982~1987.4.12.) |
→ |
조계현 (1990~1997) |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37번 | ||||
이강호 (1986) |
→ |
강만식 (1987.4.13.~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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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문식 (1988) |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17번 | ||||
민문식 (1986~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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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식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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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천 (1989~2003)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2번 | ||||
정용생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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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식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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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일 (1990~1997) |
{{{#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99번}}} | ||||
결번 | → |
강만식 (1991~1992) |
→ | 결번 |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71번}}} | ||||
양승호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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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식 (1996~1997) |
→ |
강태정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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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식 姜晩植 | Kang Man-s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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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7년 2월 15일 ([age(1957-02-15)]세) | |||
전라남도
광주시 (現 광주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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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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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광주제일고 - 고려대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 |||
소속팀 |
농협 야구단 (1976) 롯데 자이언트 (1981) 해태 타이거즈 (1982~1987) 빙그레 이글스 (1987~1988) 삼성 라이온즈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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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
쌍방울 레이더스 1군 투수코치 (1991~1992) OB 베어스 2군 투수코치 (1995~1996) OB 베어스 1군 투수코치 (1997)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99) 광주충장중학교 야구부 감독 (2005~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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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위원 | SBS, KBC 야구 해설위원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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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로 활동했고 선수 말년에 빙그레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했다.2. 선수 경력
광주일고 재학 시절이던 1975년 대통령배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는 광주일고 야구부 전국대회 첫 우승이다.[1] 그 해에 광주진흥고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또한 광주일고의 유일한 퍼펙트게임 기록이다. 고교 졸업 후 실업팀인 농협 야구단에서 활동하다 고려대에 진학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2] 고려대 졸업 후에 실업팀 롯데에 입단했다.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연고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1984년에는 11승, 1985년에는 13승을 올리며 이상윤과 더불어 해태의 중심투수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연봉조정 때문에 팀에서 골칫덩어리가 됐으며 급기야 1986년에는 4승에 그치자 1987년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첫 해에는 고작 5경기에 등판하여 2승 3패에 그쳤다. 게다가, 성적부진으로 사임한 배성서 감독의 뒤를 이어 1988년 김영덕 감독이 오면서 북일파와 비북일파[3]로 나눠졌는데 이 과정에서 해태 시절처럼 지난하기 이를데 없는 연봉조정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인 데 이어 비북일파란 이유로 김 감독의 미움을 사 88년에는 구원투수로 2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였고 그 해 11월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다가 다음 해 5월 13일 빙그레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이후 곧바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였으며[4] 그 해 5경기에서 1패 밖에 거두지 못한 채 시즌 후 은퇴했다. 광주를 대표하는 투수였지만 1987년 해태를 떠난 뒤 고향 팀에는 더 이상 돌아오지 못했다.[5]
은퇴 후 해태 시절 인연을 맺은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1년부터 쌍방울에서 투수코치를 맡았으나 1992년 시즌 후 신용균 감독이 부임하자 팀을 떠났다. 이후, 1995년 김인식이 OB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1997년까지 2군에서, 투수코치를 했으나 그 해 말 계약만료로 팀을 떠났다. 1999년 모교 광주일고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모두 지역예선에 탈락했고 봉황대기에서 32강에 머무르자 한시즌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6] 그 후 광주충장중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고 2013년 6월에 나길남[7] 당시 수창초등학교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3. 여담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1984년에 MBC 청룡의 이원국과 더불어 연봉조정신청을 한 최초의 선수이다. 그러나 결국 구단제시액을 받는데 그쳤다.해태에 있던 시절에는 투수교체를 하러 나온 김응용 감독의 교체지시에 거부했다가 김응용 감독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다.[8]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1982년 창단 당시 선수단을 설명할 때 투수진 5명( 신태중, 강만식, 김용남, 이상윤, 방수원)의 한 명이었다. 강민식이 빙그레에서 뛸 때 장진범이 해태에서 방출된 후 진로를 정하지 못하자 빙그레로 오라고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장진범은 빙그레와 계약하지 못하고 결국 선수생활을 마쳤다.
4. 연도별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2 | 해태 | 29 | 144 | 5 | 11 | 1 | 0.313 | 4.44 | 152 | 11 |
79 (3위) |
86 |
93 (5위) |
71 | 1.54 |
1983 | 22 | 94 | 6 | 4 | 0 | 0.600 | 2.78 | 83 | 5 | 27 | 51 | 42 | 29 | 1.12 | |
1984 | 28 | 129⅔ | 11 | 4 | 0 |
0.733 (3위) |
3.26 | 124 | 14 | 43 | 60 | 58 | 47 | 1.23 | |
1985 | 41 |
198⅔ (5위) |
13 (5위) |
8 | 0 | 0.619 | 3.31 | 178 | 22 | 63 | 63 | 78 | 73 | 1.12 | |
1986 | 19 | 72⅔ | 4 | 6 | 2 | 0.400 | 4.33 | 91 | 6 | 30 | 24 | 39 | 35 | 1.60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7 | 빙그레 | 5 | 28 | 2 | 3 | 0 | 0.400 | 6.11 | 27 | 5 | 13 | 4 | 20 | 19 | 1.36 |
1988 | 2 | 1⅓ | 0 | 0 | 0 | 0.000 | - | 0 | 0 | 2 | 0 | 0 | 0 | 1.50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9 | 삼성 | 5 | 11⅓ | 0 | 1 | 0 | 0.000 | 7.94 | 15 | 2 | 6 | 4 | 10 | 10 | 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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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통산 (8시즌) |
151 | 679⅔ | 41 | 37 | 3 | 0.526 | 3.76 | 670 | 65 | 283 | 292 | 340 | 284 | 1.30 |
5. 관련 문서
[1]
현재의 광주일고로 학제가 개편된 후 첫 우승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서중 시절이던 194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서중-일고 야구부 역사의 첫 전국대회 우승이다.
[2]
당시에는 금융팀, 실업팀에서 뛰다가 대학에 입학하는 케이스가 있었는데 고졸보다는 대졸이 향후 직장생활에 유리하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대학졸업 후 원소속팀으로 복귀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3]
공주고, 세광고, 대전고 등
[4]
큰 기대를 건
최동원이 연봉 재계약 문제(6월 23일 마침)에 따른 부진으로 투수 확보에 비상이 걸리자 영입했다.
[5]
본인처럼 지겨운 연봉조정 문제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 고향을 떠났다가 삼성에서 은퇴한 최동원은 한화에서 코칭스태프를 지냈으나 그 이후 고향 팀 롯데에 돌아오지 못한 것과 비슷한 대목이다.
[6]
지역 라이벌 광주상고는 1999년 봉황대기 준우승을 차지했다.
[7]
나광남 심판의 동생으로 진흥고-건국대를 졸업했다.
[8]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과
김종모가 술회하길
방수원도 투수교체를 거부하다가 화난 김응용 감독이 무서워 경기중에 도망친 적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