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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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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
朴東熙 | Park Dong-Hee
출생 1968년 1월 4일[1]
(정부 직할) 부산시 동래구
(現 부산광역시 수영구)
사망 2007년 3월 22일 (향년 39세)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연초 - 초량중 - 부산고 - 고려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6년 1차 지명 (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0~1997)
삼성 라이온즈 (1997~2002)
종교 불교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롯데 자이언츠 시절2.3. 삼성 라이온즈 시절
3. 은퇴 이후4. 사망5. 플레이 스타일6. 연도별 주요 성적7. 기타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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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2. 선수 경력

그것이 바로 박동희였다. 때론 나약했고, 종종 무너져내렸던 미숙아. 그러나 팬들의 야유를 격려삼아, 끝없이 밀려드는 자괴감을 연료삼아, 눈 질끈 감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막아서는 자 누구든 추풍낙엽처럼 연속삼진으로 휩쓸어버리곤 했던 고독한 영웅.
때로는 나약했던, 그러나 다시 달렸던 영웅

2.1. 아마추어 시절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51296_STD.jpg

부산고등학교 시절.

프로 선수가 되기 이전부터 그 당시 몇 명 없었던 150km/h의 강속구를 구사하여 최동원, 선동열의 뒤를 이을 대형 투수로 낙점받게 되는데 부산고등학교 시절 봉황대기에서 평균자책점 0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진학한 후에는 1986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 야구 선수권에서 다승 1위로 대한민국을 준우승으로 이끌고, 1988년 춘계대회에서 노히트 노런[2] 포함 6승을 올려 우승하는 활약을 보였다. 같은 해 치러진 서울올림픽에서도 강기웅, 노찬엽, 김기범 등의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대표팀의 일원으로 뛰었다.

그러나 대학시절의 마지막 해인 1989년에는 건국대 1학년 이종범에게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맞기도 했다.[3] 이종범은 그 경기에서의 활약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어 1학년으로는 유일하게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또한 그해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선발 등판했지만, 최남수 감독이 같은 이닝에 두번 마운드에 올라가는 실수를 저질러 조기 교체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결국 해당 경기는 연세대가 승리했다.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294112_STD.jpg

그의 선수 시절을 대표하는 롯데 자이언츠에서의 모습.

메이저 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탐을 내기도 했지만, 1990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4] 계약금 1억 4천만원이라는, 선동열을 뛰어넘는 당시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고 계약금 기록을 세우며 입단한 것이다.[5]

데뷔전인 1990년 4월 11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전에서 6회 구원 등판해서 4이닝동안 6연속타자 탈삼진을 포함해[6] 탈삼진을 10개나 잡았고, 삼성구단에 측정 된 패스트볼의 최고구속은 151km/h를 기록하며 비공식적으로 KBO 최초 150km 이상의 구속을 기록하며 자신의 명성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기사[7] 이날 4이닝을 던지면서 14타자를 상대해 6연속타자 탈삼진 포함 10탈삼진,[8]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선풍적인 데뷔전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9]

데뷔시즌 최종 성적은 10승 7패 7세이브 3.04의 평균자책점. 신인으로서는 무난한 성적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상 최고액의 계약금[10]을 받고 입단한 선수로서는 기대치에 미달하는 수준이었다.[11] 특히 당시 소속팀 롯데가 하위권에 허덕이던 상황이어서 더욱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2년차인 1991년엔 14승 9패 3세이브에 2.4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이며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공헌했다. 특히 이 시즌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박동희가 보여준 투구는 아직도 롯데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아있다. 2대 1로 앞선 3회 말 1사 주자 3루에서 구원등판해 첫 타자인 류중일과의 승부에서 보크[12]를 범하면서 맥없이 동점을 허용했지만, 이후 무려 연장 13회까지 10⅔이닝을 혼자 책임지며 5피안타 1실점 탈삼진 15개를 잡는 놀라운 투구를 선보였다.[13][14] 이 경기는 1990년 데뷔전과 함께 박동희의 선수 시절을 대표하는 경기들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시즌 후에는 사상 최초의 한일 슈퍼게임에서 대표팀 1차전 선발투수로 출장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일본 프로야구를 공식적으로 상대한 첫 투수였던 셈. 당시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이 대회 직전 발목부상으로 1차전 등판이 어려워지자, 코칭스태프는 앞선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인상적인 투구를 보여줬던 박동희를 대신 1차전 선발투수로 기용했다. 당시 박동희는 4이닝동안 7피안타 3실점을 기록했다. 우리나라보다 확연하게 한 수 위였던 일본 대표팀의 전력과 도쿄돔이라는 낯선 환경을 감안한다면 비교적 호투했지만, 결국 한국팀이 3:8로 패하면서 패전투수의 멍에를 써야 했다.

1992년은 극과 극을 오갔던 한 해였다. 시즌 초 장티푸스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의사소통 과정에서 뭔가 꼬였던지 강병철 감독은 이를 태업으로 받아들여 박동희에게 무기한 출전정지라는 처분을 내려버렸고[15][16] 구단 안팎의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않고 전반기 내내 박동희를 쓰지 않는 뚝심을 보였다. 후반기부터 등판한 박동희는 7승을 거두는 데 그쳤지만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고 자신은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최고의 결말을 누렸다. 전반기의 징계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 해 포스트시즌에서는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4:0 완봉승을 거뒀고,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3차전에 선발 등판해 패전투수가 되었으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8이닝동안 삼진 10개를 잡아내며 선발승을 거뒀고, 4차전에선 6회부터 등판해 경기를 마무리하며 세이브를 기록했다. 5차전에서는 4회부터 윤형배에 이어 구원등판해서 경기를 끝까지 책임지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영광을 누렸다. 2승 1세이브로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

1993년은 방위 복무로 인해 많은 경기를 출전하지 못했고,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당시에 팀 타선의 지원도 받지 못해 6승에 그쳤다. 그러나 이 와중에 5월 13일 쌍방울 레이더스전에서 6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가 그대로 강우콜드로 경기가 종료되는 바람에 비록 비공인이긴 하지만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이 노히트 노런을 포함해 이 시즌 거둔 6승 중에 4승이 완봉승이었다.

1994년 시즌 초반엔 아직 방위복무를 마치지 못한 말년때라 좀 들쭉날쭉하게 롱릴리프 구원으로 등판하며 구원승을 따내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전역 후에는 당시 신임 김용희 감독이 마무리 보직으로 전업시켜 마무리 투수로 뛰었다.[17] 처음에는 마무리 보직을 상당히 힘들어했으나 적응되고 난 후 매우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마무리 보직이 몸에 완전히 익었던 후반기에는 거의 언터처블이었다. 73⅔이닝을 투구해 6승 5패 31세이브 3.01의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무리했으며 특히 사사구가 21개밖에 되지 않았다. 매 시즌 100사사구 이상을 훌쩍 넘을 정도로 제구력이 좋지 않았던 선수가 이렇게 영점을 잡은데 대해 마무리 전환은 신의 한 수였다는 평이다.

이 시즌 전반기 성적이 4승 4패 19세이브 4.08의 평균자책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평균자책점을 1점이 넘게 끌어내렸으니 후반기에 얼마나 안정적인 마무리였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시즌 롯데가 기록한 승수가 57승이었는데 박동희가 기록한 세이브포인트가 37이었으니 이 시즌 롯데가 거둔 승수의 65%를 박동희가 책임진 셈. 이 시즌 기록한 31세이브는 2012년 김사율이 34세이브를 올리며 기록을 갱신할 때까지 롯데 역사상 한 시즌 개인 최다 세이브였다.

1995년에도 여전히 마무리로 뛰었지만, 시즌 중반부터 결정적인 순간 구원실패를 저지르거나 아슬아슬하게 경기를 마무리하는 모습이 늘어나며 결국 후반기부터는 사실상 김상현에게 마무리를 넘겨주었고 포스트시즌에서도 중용되지 못했다. 7차전까지 갔던 이 해의 한국시리즈에서도 사실상 전력에서 배제되어 6차전에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추격조로 등판한 것이 전부였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이 시즌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던 탓으로 추정된다. 시즌 성적은 34경기에 등판해서 5승 3패 14세이브 1.50의 평균자책점. 60이닝을 던져 피안타 34개 사사구 24개를 허용해 WHIP가 0.97에 불과하여 외형상의 기록은 준수해 보이지만, 이 피안타와 사사구를 꼭 결정적인 순간에 허용한 것이 문제였다.

2.3. 삼성 라이온즈 시절

파일:external/www.cnbnews.com/54228a.jpg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6년도부터 3년만에 다시 선발투수로 전환했지만 무릎 부상이 표면적으로 도지기 시작하면서 고작 19경기에만 등판해 4승 5패 1세이브 3.8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치고 만다. 단순한 무릎 부상이 아닌 통풍성 관절염이었다고. 이 증세때문에 1997년도는 아예 등판을 하지 못하고 개점휴업했다. 그러던 와중 이동수, 박석진을 상대로 김종훈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다.[18] 그런데 삼성에서는 롯데에서 못 고쳤던 이 관절염을 완치시켰다고 한다.[19]

그와는 별개로 무릎 부상 이후 딱히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2000년 4월 7일 SK전에서 무려 7년만에 완봉승을 기록한 적도 있었지만 계속 그와 같이 안정적인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2001년 한국시리즈/4차전에서 김동주에게 만루 홈런을, 안경현에게 백투백 솔로홈런을 허용할 정도로 부진했고, 결국 2002년에는 1군에 오르지 못한 채 그 해 7월 25일 삼성 라이온즈에서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당한 뒤 프로 통산 59승 50패 58세이브라는 성적을 남기고 은퇴했다.[20] [21]

선동열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될 정도로 엄청난 체격과 그에 걸맞은 위력적인 구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선수 생활이 길지 못했다. 이는 전술했듯이 고질적인 왼쪽 무릎 부상 때문이다. 150km/h를 넘나드는 강속구에도 불구하고 직구-커브의 단조로운 구질과, 선발로 매년 100사사구 이상을 훌쩍 넘기는 등 결코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제구력 때문에 정상의 자리에 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런 단순명쾌한 투구 스타일이 단기전에서는 뛰어난 위력을 발휘했고, 롯데 팬들에겐 두고두고 기억될 활약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까지 롯데의 마지막 우승 순간인 1992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 마운드를 지켰던 선수가 박동희였던 것이 단적인 예.

3.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야구계를 떠나 서울 소재의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 이후에는 부산으로 내려가 해운대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여, 사회인 야구에서 활동하면서 아마추어 야구장 설립과 야구교실을 열기 위해 노력하였다.

4. 사망

2007년 3월 22일 영업 종료 후 본인의 현대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몰고 퇴근하던 중 새벽 3시경에 수영구 광안동에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39세의 젊은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5. 플레이 스타일

코너웍을 위해 힘을 빼고 살살 던지는 패스트볼이 140km대 중반, 전력 투구 시 150Km 이상을 찍을 정도로 패스트볼의 위력만은 당대 최고를 넘어 KBO 리그 역대 정상급 투수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제구력이 나쁘다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코너웍이 매우 좋은 투수였다. 또한 바깥쪽 코너를 상당히 잘 활용하는 편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구가 아니라 경기마다 기복이 심한 것이 문제였다. 어떤 날은 선동열이나 최동원 부럽지 않은 피칭을 펼치다가, 어떤 날은 볼 카운트 싸움에서 몰려 난타를 당하거나 사사구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심리적인 원인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인은 어려운 상황이다.

커브도 수준급이었으나 이 역시 확실한 결정구[22]로 쓰기에는 제구가 좀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커브의 떨어지는 각이 심할 정도로 들쭉날쭉했다. 신체조건 등 타고난 재능만큼은 분명 KBO 리그 역사에 손꼽힐 정도를 자랑했지만, 결국 꽃을 피우지 못 했으니 아쉬워 하는 팬들이 많은 편이다.[23]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ed1c24> 연도 출장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sWAR
1990 롯데 31 145 10 7 7 0 3.04 101 3 117
(1위)
146
(4위)
1.48 4.22
1991 30 189⅔ 14 9 3 0 2.47 132 4 104
(1위)
152
(4위)
1.20 6.14
1992 17 98 7 4 1 0 4.13 98 6 54 67 1.53 2.19
1993 19 90⅓ 6 11 1 0 3.79 82 5 39 59 1.32 1.32
1994 46
(3위)
74⅔ 6 5 31
(2위)
0 3.01 67 3 21 61 1.17 3.50
1995 34 60 5 3 14 0 1.50 34 1 24 41 0.97 2.71
<rowcolor=#000000> 연도 출장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sWAR
1996 롯데 13 69⅔ 4 5 1 0 3.88 64 6 34 34 1.41 0.60
<rowcolor=#ffffff> 연도 출장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sWAR
1997 삼성 1 1 0 0 0 0 0.00 0 0 0 1 0.00 0.05
1998 16 39⅓ 1 3 0 0 6.86 51 8 21 29 1.83 -0.15
1999 7 12 0 1 0 0 11.25 20 3 7 16 2.17 -0.12
2000 19 57⅓ 4 0 0 0 5.49 66 6 37 37 1.69 0.55
2001 18 45⅓ 2 2 0 0 6.15 54 10 22 22 1.68 -0.01
2002 1군 기록 없음
<rowcolor=#373a3c> KBO 통산
(12시즌)
251 882⅓ 59 50 58 0 3.67 769 55 457 665 1.39 21.01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0년 3완투 1완봉
1991년 10완투 1완봉
1992년 6완투 0완봉
1993년 4완투 4완봉
1996년 2완투 0완봉
2000년 1완투 1완봉
<rowcolor=#373a3c> KBO 통산 26완투 7완봉

7. 기타

현역시절 별명은 그의 강속구에서 유래한 ' 콩코드',[24] '슈퍼 베이비'다. 특히 후자의 별명이 유명한데,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화려한 데뷔전, 1991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의 인상적인 투혼, 한국시리즈 MVP 등 빛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끝내 기대했던 만큼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뒤섞인 중의적인 의미의 별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마때 워낙 거물이었던 선수라 자부심이 강했던 때문인지, 프로 입단 후 초반엔 다소 불성실한 모습을 보여 코칭스태프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후배들에게 만큼은 배려를 아끼지 않은 좋은 선배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그의 1년 후배인 박정태는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 박동희의 집으로 주소만 옮겨놓고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서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프로 입단 후에도 신인들과 2군 선수들을 잘 챙겼다고 한다. 박정태 외 공필성, 주형광, 손민한 등 롯데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오래 활약하지 못했던 삼성에서도 김기태, 배영수, 임창용, 박한이 등이 특히 박동희를 잘 따랐다고.

예외적으로 염종석이 입단 첫 해부터 워낙 잘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탓에 질투심이 생겨서인지, 원정경기 룸메이트 시절 좀 많이 갈궜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염종석이 박동희의 갈굼을 견디다 못해 울면서 코칭스태프에게 달려가 방 좀 바꿔달라고 했을 정도. 특히 헤드락을 많이 걸었다고 한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일본과의 준결승에 구원 등판하여, 훗날 노모 히데오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명포수가 된 후루타 아츠야 배터리와 상대했다. 여기서 후루타가 희생플라이로 결승점을 기록했고, 노모는 7회 1사 만루부터 9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 일본이 승리하였다. 3년 후인 1991년 최초의 한일 슈퍼게임에서 다시 후루타와 재회했는데, "너처럼 빠른 공을 가진 투수가 아직까지 상 하나도 못탔다고?"라는 말을 들었다.[25][26] 이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박동희는 이듬해인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의 우승에 기여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탔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장진범이 술회하기를 구심을 보다가 박동희의 투구가 타자의 배트를 스쳐 본인의 어깨를 직격했고 결국 게임을 마치지 못하고 대기심으로 교체됐다고 했다.[27]

취미는 낚시. 좀 개그성 에피소드가 있는데, 박동희가 현역 시절 롯데 선수단은 매년 시즌 종료 후 납회식을 겸해 1박 2일간 낚시대회를 열었다. 어느 해 낚시대회에서 1990년대 중반 당시 시세로 100만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고가품이었던 핸드폰이 1등 상품으로 걸려있었는데, 아쉽게 2등을 하는 바람에 핸드폰을 놓친 걸 1년 내내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음해 낚시대회에서는 그야말로 밤에 잠도 안자고 사활을 걸고 고기를 낚았고 심지어 후배들이 자신 주변에서 고기 잡으러 오는 것도 내쫓았을 정도였다. 이 지극정성 덕택에 박동희는 그 해 낚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였으나 하필 이 해부터 1등 상품이 바뀌었는데 그 바뀐 상품이 100만원 상당의 도자기. 시상식에서 도자기를 받은 박동희는 벙쪄서 "왜 도자기를 주지?" 라고 하더니 "이거 진짜 백만원짜리 맞냐?"고 되물어 선수단 배꼽을 뒤집어 놨다고.

현역 은퇴 후 건설회사 직장생활이나 식당 운영 등 야구와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진짜 꿈은 유소년 야구단 운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간 아껴 모은 돈으로 김포시 과천시에 유소년 야구장 부지를 확보하고 난 후 정말 좋아했다고 하는데, 하필 그 시점에서 안타까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사후에야 이 사실이 알려졌고 남몰래 봉사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지면서 더욱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가 선수 시절에 늘 달았던 등번호 21번은 아버지 박두일 씨의 이름인 두일에서 따온 번호라고 한다.[28] 아마와 롯데 시절은 항상 21번을 달았으며 1997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을 때 그 시즌 삼성 투수 장정순[29] 이미 21번을 사용해 잠시 48번을 달았으나, 장정순이 팀을 떠난 이듬해부터 다시 21번을 받아 은퇴할 때까지 계속 21번을 달고 활약했다.

이후, 윤동희가 2022년 입단하면서, 박동희 - 한동희에 이은 본인이 세번째 동희라고 언급하면서 다시 한 번 롯데팬들에게 박동희라는 선수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8. 관련 문서


[1] 음력 1967년 12월 5일 [2] 1988년 4월 21일 vs 원광대 [3] 이종범이 스톡킹에서 술회하기를 박동희의 속구를 치기 위해서 피칭머신에서 나오는 강속구를 계속 보면서 눈에 익혔다고 한다. [4] 토론토는 1980년대 초에 최동원의 영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5] 2022년 현 시점에서 롯데 자이언츠 역대 최고 계약금은 5억 3천만원을 받은 김수화다. [6] 7회 말부터 8회 말까지 류중일, 이종두, 강기웅, 장태수, 김성래, 이만수 등 삼성의 중심 타선을 상대로 기록한 삼진이었다. [7] 공교롭게도 이날 삼성의 선발은 과거 롯데의 에이스이자 부산 야구의 전설적 영웅 최동원이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1년 전 선수회 결성 주도에 대한 보복으로 김용철 등과 함께 삼성으로 이적한 후 부진을 겪었고, 이날 경기에서도 홈런 등을 맞으며 패전했다. 그리고 그해 6승만을 기록한 채 쓸쓸히 은퇴했다. [8] 7~8회 6타자 연속 탈삼진 후, 마지막 9회에는 첫 타자가 땅볼을 쳤으나 남은 두 타자를 다시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마무리. 6회 2개, 7회 3개, 8회 3개, 9회 2개로 총 10탈삼진을 기록. [9] 훗날 태평양 돌핀스 위재영이 데뷔전에서 구원등판 하자마자 폭투 후 홈송구 아웃. 이후 연속 삼구삼진으로 잡아낸 것이 그나마 버금갈 정도다. [10] 지금이야 신인 선수의 억대 계약금은 흔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선동열과 같은 특급 신인에게만 해당하는 매우 드문 사례였다. 그만큼 구단에서도 기대가 엄청나게 컸단 얘기. [11] 게다가 같은 해 삼성에 입단한 투수 이태일은 계약금이 박동희의 30%에도 못 미치는 3,500만원[30]을 받았지만, 더 많은 승수와 노히트 노런까지 기록해서 대조를 이루었다. [12] 타자에게 투구를 했지만, 공이 손에서 빠지지 않아 보크로 선언되었다. [13] 경기는 결국 연장 13회까지 3:3 무승부로 종료. [14] 이는 KBO 준플레이오프 역대 최다 탈삼진 기록이다. [15] 비단 장티푸스 건 하나만으로 징계를 내린 것이 아니라 박동희가 그간 다소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온 것에 대한 경고 차원이었다. 어차피 장티푸스 때문에 장기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몸을 만들어야하니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이므로 진짜 징계라기보단 상징적인 의미가 컸을 듯. [16] 또 다른 설로는 강병철 감독이 91년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미친듯한 혹사를 당한 박동희에게 출전정지를 핑계삼아 휴식을 주려고 했다는 의견도 있다. 정규시즌에 플레이오프와 한일 슈퍼게임까지 거의 주구장창 굴렀기 때문에 팔이 망가지기 전에 구단에 위장징계 한 거 아닌가 하는 것. [17] 박동희는 롯데구단 역사상 최초의 전업 마무리 투수다. 마무리 첫 해에 31세이브를 거뒀는데, 그전까지 롯데에선 한 시즌에 두 자릿수의 세이브를 기록한 투수가 아무도 없었다. [18] 이 트레이드가 재미있는 부분이 한국시리즈 MVP 출신의 박동희와 불과 2년전 신인왕이었던 거포 이동수가 메인인 트레이드였고, 김종훈과 박석진은 팀에서 포기한 유망주들로 트레이드의 곁다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정작 메인인 박동희와 이동수는 기대한 활약을 해주지 못한 대신, 김종훈과 박석진의 포텐이 터져 버렸고 둘 모두 정규시즌은 물론 가을의 사나이라는 수식어를 달 정도로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을 해주었다. [19] 삼성에서 당시 박동희의 몸 상태를 체크해서 그 정도라면 완치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 트레이드를 승인했다고 한다. 이미 1990년대부터 삼성구단의 메디컬 시스템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다. [20]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부진도 방출에 한몫했다. [21] 당시 룸메이트 안지만에 말에 따르면 은퇴직전에도 140중후반대의 공을 뿌렸다고 한다. [22] 예를 들면 소속팀의 레전드인 최동원의 커브, 선동열과 염종석의 슬라이더, 송진우의 서클 체인지업, 류현진의 체인지업 등. [23] 이는 여담 문단에서 후술할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만난 후루타 아츠야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24] 20세기를 풍미했던 프랑스제 초음속 여객기다. 당대 최고의 투수이자 고려대 선배였던 선동렬의 별명 '무등산 폭격기'에 대응하는 별명이기도 했다. [25] 참고로 후루타는 1991년 그해 센트럴 리그 최초로 포수 타격왕을 수상했다. 포수로는 스승인 노무라 카츠야 이후 2번째. [26] 노모 히데오는 박동희와 같은 1990년 데뷔 시즌 때 트리플 크라운에다 최다 탈삼진 기록으로 신인왕, MVP, 사와무라 상까지 휩쓸었다. [27] 장진범 심판은 김기태의 타구에 얼굴을 직격당하며 교체된 적도 있다. 장진범 주심, 타구에 맞아 병원행 [28] 비슷한 원리로 등번호를 정한 케이스가 0번을 택한 공필성, 13번을 택한 장원삼 등이다. 이대호 오릭스 버팔로스 입단 첫 해에 등번호를 52번으로 하려 했다가 이걸 뒤집은 25번을 등번호로 결정했는데 52번은 자신의 할머니였던 고 오분이 여사의 성씨와 끝자를 따왔다고 한다. [29] 전 빙그레, 한화, 삼성 투수이자 현 세한대 야구부 감독. 대불대 감독을 하면서 은퇴하고 야인으로 있던 노장진을 투수코치로 데려갔다. 1996년에 박동희와 완투대결을 벌여 1:3으로 패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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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그래도 그해 신인 계약금 4위로 나름대로 이때 당시로선 대형계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