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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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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대문 야구장.jpg 파일:동대문 야구장2.jpg
동대문야구장
東大門野球場 | Dongdaemun Baseball Stadium
약칭 동대문
개장 1925년 10월 15일 (최초 완공일)
1959년 8월 20일 (확장 공사 완공일)
폐장 2007년 12월 18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 을지로7가)[1]
홈 구단 MBC 청룡 (1982[2], 1988[A], 1989[B])
OB 베어스 (1985[5], 1988[A], 1989[B])
구장명 변천 경성운동장 야구장 (1925~1945)
서울운동장 야구장 (1945~1984)
동대문야구장 (1985~2007)
크기 좌우펜스 98m
중앙펜스 110m[8]
펜스높이 2m
잔디 천연잔디 (1925~1989)
인조잔디 (1990~2007)
좌석규모 26,874석
1. 개요2. 역사
2.1. 건립2.2. 아마 야구의 성지2.3. 철거
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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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아마추어 야구 성지이자 한국프로야구의 역사가 태동한 장소.

2. 역사

2.1. 건립

원래 조선시대 훈련원이 있던 자리이며, 서울성곽의 수문이 지나간 자리였다.[9] 그 뒤 개화기를 거치면서 이 공터에서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로 알려진 시합이 열리는데, 그게 1905년의 일이다. 영화 YMCA 야구단을 연상하면 될 듯 하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경성운동장이 완공되면서 야구장도 그 때 같이 완공되었다.[10]
파일:external/lee-ny.com/30611725_750x584.jpg
일제는 경기장 개장기념으로 제1회 조선신궁체육대회를 개최했지만 한국인들은 참관을 거부하고 제6회 전조선야구대회를 배재고보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11]

그후 동대문야구장을 포함한 동대문운동장의 사용을 한국팀들도 할 수 있게 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2.2. 아마 야구의 성지

확장 공사 이전의 서울운동장 야구장
해방 이후 1980년대 초까지 한국 야구의 메카로서 기능했다.
1958년 서울운동장 야구장 확장 공사 관련 영상
1958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유치한 후 이 대회를 열기 위해 1956년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내용은 외야 관중석과 전광판을 설치하는 초간단 공사였으나 6.25 전쟁 정전 협정 체결 직후 돈이 없었던 한국 정부는 이 공사의 비용마저 제대로 댈 수 없던 형편이었다. 결국 제때 공사를 끝내지 못하고 대회 개최권을 반납한다. 실제로 이 시기는 나라에 돈이 없어서 당시 동남아의 부국인 필리핀의 원조로 장충체육관을 지었다는 풍문이 남아있는[12] 시절의 이야기다. 결국 1958년에야 완공된다.

우여곡절 끝에 야구장 확장 공사를 마친 후 개축 기념 경기가 10월 21일에 열렸는데 이때 야구장을 방문했던 팀은 MLB 당대의 명문 구단이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이 시절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1940~1950년대의 레전드 스타였던 스탠 뮤지얼이 주축으로 뛰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카디널스 구단이 일본 등을 오가며 태평양 연안 국가 일대에서 친선 경기를 치렀다. 이때 대한민국도 방문지로 낙점이 됐다.

이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사실상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었던 전서울군(全서울軍) 팀과 맞붙어서 3:0으로 승리를 거뒀다. 이 경기에서는 당대 한국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던 김양중 선생도 등판을 했는데 무려 스탠 뮤지얼을 상대로 삼진을 잡기도 했다. 김양중 선생이 삼진을 노리려고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음에도 볼로 선언이 되자 그 다음 공을 일부러 헛쳐서 뮤지얼이 삼진을 당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참고로 이 경기 직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시구도 있었는데 그라운드로 내려오지는 않았고 본부석 하단에서 미리 뚫어놓은 안전 그물망 사이로 전서울군 주전 포수였던 김영조 선생에게 공을 던져줬다. 이 시구가 한국야구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대한민국 대통령의 시구 기록이다.
파일:external/cfs9.blog.daum.net/4767a0bc653b2&filename=운동장1.jpg
주경기장과 야구장에 조명탑이 세워진 1960년대 서울운동장 전경

그 뒤,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초청해 가진 만찬에서 대표팀 선수들이 다음 사항을 건의했다고 한다. "서울운동장에 조명 시설을 설치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콜! 조명시설 공사가 의결되었고, 그렇게 해서 야간 경기가 가능한 최초의 경기장이 되었다.[13]

이후 프로야구 출범 전까지 야구의 중심지로서 무수한 경기와 드라마가 펼쳐졌다. 한국 고교야구 4대 대회(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한국실업야구 대회 및 대학야구, 그리고 이들이 모두 출전해 벌이는 백호기까지. 특히 고교야구 최전성기 시절에는 표를 구하기 위해 사람이 몰렸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14]
파일:external/blog.donga.com/20090906115431.jpg
1970년대 고교야구 관중으로 가득 찬 서울운동장 야구장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개최 당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포함한 잠실운동장이 서울종합운동장으로 명명되면서 이 곳은 서울운동장에서 동대문야구장으로 명칭이 바뀐다. 이 해 MBC 청룡이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했고, 역사적인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장소가 이 곳이며 프로야구 원년의 처음과 끝을 수놓았던 이종도 김유동의 만루홈런이[15] 나온 장소도 이 곳이다.

그 외에도 지방 팀의 특별 홈구장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들 중 삼성이 7월 29일과 8일 28일(VS 롯데), OB가 6월 26일(VS 해태)(더블헤더), 해태가 8월 18일(VS MBC) 특정 팀과의 2홈경기 이상을 개최했다.[16]

MBC 청룡은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난 1982년 시즌 후반부터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으로 홈을 옮겼고[17] OB 베어스가 1985년 한 시즌 동안 이 곳을 썼다가[18] 1986년에 역시 잠실로 옮겼다. 그 뒤로는 주로 아마야구 대회 위주로 경기가 펼쳐졌다.[19]

사실상의 아마추어 전용 야구장으로 탈바꿈한 1990년에 천연잔디를 걷어내고 인조잔디를 설치했다.

2.3. 철거

1986년 이후로 동대문야구장이 수익이 나지 않는 아마야구 경기를 전담하면서, 동대문야구장을 포함한 동대문운동장은 유지비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20] 그 결과 1993년 11월 서울시의회는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시청사를 이전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 시청사 이전 논의는 녹사평역 인근에 새 청사를 짓는 방안으로 가나 싶었지만, 결국 1997년 외환 위기의 도래로 현재의 새 시청사 부지에 신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었다.

1996년부터 시행된 서울연고 공동화에 따라 LG는 안양, 유공은 부천, 일화는 천안으로 연고지를 새롭게 정하면서 동대문을 떠나고 2002년 월드컵 서울경기장 부지도 성산동 신축경기장으로 결정되면서 동대문야구장을 포함한 동대문운동장은 서울시의 골칫거리로 남게 되었다. 급기야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김민석과 이명박을 비롯한 모든 후보들이 동대문운동장의 철거와 재개발을 원칙적으로 찬성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기사 결국 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공사를 위해 동대문운동장을 주차장으로 개조하면서 동대문운동장의 철거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명박에 이어 2006년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자, 공약인 디자인플라자 계획의 부지로 동대문야구장 일대가 지목되었다.

체육계 및 야구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2006년 10월 동대문야구장의 철거가 결정되었다. 처음 철거를 반대하던 야구계는 결국 그 해 12월 들어 철거가 가시화되자 대체구장 건설을 요구하였고, 서울시는 동대문야구장을 대체하기 위해 구의동에 야구장을 지으려 하였지만 구의동 주민들은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아마야구장 대신 광진구에서 계획중이던 R&D센터의 유치를 바라며 반발했다. 결국 서울시에서 야구장 건설 계획을 가지고 있던 고척동 63-6 부지가 동대문운동장 대체용 2만석 야구장으로 확정되고 구의·신월에 성인용 각 1면, 난지에 동호인용 2면, 공릉·잠실에 유소년용 각 1면의 아마야구장을 건설하여 야구계의 불만을 달랬다.[21]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46480_STD.jpg
그러나 한국의 근현대사가 오롯이 담긴 곳이라는 점에서 이 곳의 철거에 대한 아쉬움은 계속 남을 듯 하다. 여운형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고, 신탁통치 찬반 집회[22]등이 있었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였다.

특히 현재 아마야구가 열리는 목동야구장이나 키움 히어로즈의 홈구장인 고척 스카이돔에 비해 입지가 월등히 좋기 때문에 2000년대 후반부터 다시 불기 시작한 야구의 흥행 측면에서 남는 아쉬움도 상당한 듯 하다. 야구장이나 축구장 신축 계획 얘기가 돌면 한두번씩 언급되기도 했을 정도로 동대문 일대의 편리한 교통편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울 터. 거기에 근처에 장충체육관이 있으니 나름 스포츠 컴플렉스가 연결된다.[23]

2007년 시즌 중에 동대문구장의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는 각각 삼성 라이온즈[24]와 9월중에 마지막으로 동대문구장 고별전을 치르고자 하였으나, 외야 외벽이 붕괴 직전일 정도로 안전성 문제가 제기됐고, 주차장과 전기배선시설 등의 관련 시설의 문제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열린 공식 대회는 2007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경성대가 우승했다.[25]

2007년 12월 18일을 끝으로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동대문야구장이 있던 곳에는 2014년 3월 DDP가 들어섰다.

3. 여담

조명탑이 있는데 이건 아쉽게도 원래 종합운동장 근처에 있는 조명탑이라 아쉽지만 남아있는 시설은 전무하다. 역사가 있는 만큼 일부 시설을 보존하면 좋았을테지만...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에 의자와 부속 설비만이 남아있다.

야구장 1층 1루측에는 소방서와 스포츠용품점이 위치해 있었다.

조선일보 1975년 6월 4일자 야구원로들의 대담에 따르면 동대문운동장 전광판 자리에 포플러 나무가 있었고 뒤가 언덕이라 그 언덕을 넘겨야 홈런으로 쳤었다 한다. 거리로는 왼쪽이 110m, 중앙이 130m 되는 규모였다고. 1975년 당시에 과거를 회상하는 대담이었다. 50년대말 스탠드 공사가 이뤄지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고교야구 대회 준결승이나 결승 때 학교에서 대규모 응원단을 동원하는데, 좌익수 뒷편과 우익수 뒷편을 가득 매웠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산고 경남고의 응원실력이 돋보였다는 말이 많다.

구장의 인조잔디 훼손을 막기 위해서 징 스파이크는 오직 투수만 신을 수 있었다. 투수 교체 시, 내야수나 외야수가 투수 자리에 투입될 때 신발을 서로 맞바꿔 갈아신는 장면이 연출됐다.

편의점이나 먹거리가 없어서인지 매점이 독과점(?)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과자, 음료수, 라면의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당시의 여느 프로야구장처럼 고교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바구니를 머리에 지고 먹을 것을 팔던[26] 이동판매원(주로 중년의 여성)이 있었다.

영화에서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전영록, 손창호, 박영귀, 김보연, 김영철이 출연한 영화 꽃밭에 나비(1979년 작)에서 첫 장면 장소가 동대문야구장이었다.

4. 관련 문서


[1] 구 도로명주소로 서울특별시 중구 흥인문로 35, 지번주소로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7가 143번지. [2]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날 때까지 임시로 사용했다. 창단 당시부터 홈구장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이다. [A] 1988 서울 올림픽 기간 사용 [B]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가 열린 1989년 9월 16일부터 9월 23일까지 사용. [5] 충청남 북도에서 연고이전한 후 동대문에 자리를 잡았지만, 아마야구의 반발로 3년동안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을 쓰고 동대문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으나 그대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을 사용했다. [A] [B] [8] 360ft. 1962년 10월4일 조선일보기사 / 1982년 7월 15일 경향신문기사 참조. [9] 서울성곽터는 야구장 철거 후 발굴 조사를 통해 발견되었다. 당초 경기장까지 세워진 부지인지라 흔적만 발견되면 다행이라고 판단 했으나, 실제 발굴 시에 이수간문을 포함 성벽 하부구조가 통째로 남아있어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때문에 학자들은 디자인플라자 따윈 때려 치고 전면 복원을 주장 했으나 서울시는 일부 부지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10] 첫 홈런을 친 선수가 이영민. 그래서 그를 기리기 위한 한국 아마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는 상이 이영민 타격상이다. 야구장과 축구장 위로(現 두산타워 부지) 덕수중학교 덕수상업고등학교가 보임을 알 수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수영장 부지 아래에는 한양중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덕수중학교는 을지로4가역 부근으로, 덕수상업고등학교는 1978년에 행당동( 한양대역 건너편 옛 서울교육대학교 자리)으로 이전했고 2024년에 위례신도시로 이전할 예정이다. [11] 당시 배재중고교의 전신인 배재고보는 중구 정동에 있었으며 1984년 2월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12] 이 포스팅을 보면 알겠지만, 필리핀의 원조를 받았다는 내용은 사실무근이다. [13] 이설에 따르면, 한국 일본과의 경기에서 다 잡은 경기를 야간 조명에 공이 들어가서 놓치는 바람에 야간 조명이 없어서 경험 부족으로 졌다고 해서 설치했다는 말도 있다. [14] 주최 신문사들은 대회가 끝나면, 직원들 몇 달치 월급이 나왔다고 한다. [15] 공교롭게도 두 홈런 모두 이선희가 맞았다. [16] 특히 앞서 언급한 팀들 중 해태는 8월 7일부터 8일(이상 삼성전), 롯데는 9월 22일(더블헤더) OB와 잠실에서 홈경기를 개최했다.(참고로 박철순의 22연승이 이 때 끊겼다.) [17] 198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잠실에서 열리자(9월 3일부터 13일까지) 이 기간 동안 동대문에서 홈경기 개최 예정이었지만 가을철 대학야구 리그 일정과 겹치자 불발됐고 청주, 마산, 전주, 춘천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르는 것도 검토됐으나 좌절됐다. [18] 다만 그 해 4월 26일부터 28일까지는 삼성, 5월 17일에는 롯데, 6월 1일부터 2일까지는 해태, 같은 달 5일에는 삼미, 8월 13일과 15일에는 삼성과 잠실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19] 다만 1988년 8월 이후에는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로 인해 MBC와 OB가 홈경기장으로 사용했고 89년 9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잠실야구장에서 열리는 바람에 MBC가 임시 홈구장으로 썼는데 그 해 9월 24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더블헤더 2차전이 마지막 프로야구 경기였다. [20] 그 당시 동대문운동장 프로축구 서울 3개 구단이 사용하고 있었다. [21] 당시 야구계는 실력저지까지 불사하겠다고 하더니 정작 철거에 들어가자 이렇다 할 태도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구장 철거 반대의 명분을 없애버렸다. 고척 스카이돔이 2006년 말 동대문야구장의 철거가 결정되면서 처음 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거의 모든 야구 팬들 및 미디어들이 알고 있지만 여기에 설명해 놓았듯이 원래 고척 스카이돔은 동대문야구장과는 별개로 서울시의 문화인프라 확충을 위해 계획되었던 사업이었다. [22] UN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은 축구장, 찬성하는 좌익은 야구장에서 각각 집회를 열었다. [23] 다만 동대문 운동장 부지에 새 야구장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동장을 헐고 보니 조선시대 때의 거대한 군사훈련시설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걸 엎고 운동장을 지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24] 원년 개막전은 MBC(LG 전신) vs 삼성으로, 원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는 OB(두산 전신)vs 삼성으로 열렸었다. 원년 개막전과 원년 한국시리즈의 중립경기는 모두 동대문구장에서 열렸다. [25] 경성대학교는 '慶星'으로 서울을 의미하는 '京城'과는 관련이 없다. [26] 소주도 팔았는데, 사실 당시 기준에서도 소주는 반입 금지 품목이었다. 다만 KBO B SAFE 시행 이전에는 소지품 검사를 잘 안 했던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