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수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노상수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2번 | |||||||||||||||||||||||||||||||||||||||||||||||||||||||||||||||||
팀 창단 | → |
<colbgcolor=#fffff0> 노상수 (1982~1983) |
→ |
김한조 (1984~1985) |
||||||||||||||||||||||||||||||||||||||||||||||||||||||||||||||
김한조 (1984~1985) |
→ |
노상수 (1986~1991) |
→ |
강성우 (1992~2000) |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1번 | ||||||||||||||||||||||||||||||||||||||||||||||||||||||||||||||||||
결번 | → |
노상수 (1994) |
→ | 결번 | ||||||||||||||||||||||||||||||||||||||||||||||||||||||||||||||
결번 | → |
노상수 (1996~1999) |
→ | 결번 | ||||||||||||||||||||||||||||||||||||||||||||||||||||||||||||||
결번 | → |
노상수 (2002~2004) |
→ |
이철성 (2005) |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0번 | ||||||||||||||||||||||||||||||||||||||||||||||||||||||||||||||||||
에레라 (2002) |
→ |
노상수 (2006~2008) |
→ |
양승호 (2011~2012) |
}}} ||
|
|
노상수 盧相守 | No Sang-Soo |
|
출생 | 1958년 5월 5일 ([age(1958-05-05)]세) |
경상남도 밀양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삼랑진초 - 동성중 - 부산상고 - 고려대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언우타 |
프로 입단 | 1982년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 |
소속팀 |
농협 야구단 롯데 자이언츠 (1982~1991) |
지도자 |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1992)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1993)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1994, 1996~1999, 2002~2004, 2006)[1]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06)[2]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07~2008) 개성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2~2015) 부산개성중학교 야구부 코치 (2016~)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자 現 부산개성중학교 야구부 코치.2. 선수 경력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의 원년 멤버로 프로에 입단해 232.1이닝으로 최다 이닝 투구, 탈삼진왕을 기록하는 등 롯데의 우완 언더핸드 스로 에이스였으나 1983 시즌 후 현역으로 입대해 1985년에 제대한 뒤로는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1991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3] 현역 시절 등번호는 12번이었다.
그는 최동원 입단 이전 원년 롯데의 에이스였다. 1982년 3월 28일 구덕 야구장에서 열렸던 롯데 자이언츠의 프로야구 첫 경기인 해태 타이거즈 전에 선발로 등판해 6이닝 1실점으로 롯데의 첫 승리 투수가 되었고[4] 원년 최다 이닝 및 최다 탈삼진 등의 기록을 세웠다.[5] 다만 프로 원년 롯데의 전력이 변변찮았던 탓에[6] 시즌 19패를 당하며 다패왕의 오명도 같이 쓰고 말았다.[7] 1983년에는 국가대표 에이스 최동원의 입단으로 에이스 자리는 내주었지만, 2선발로 역시 팀의 핵심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1982~1983년 두 해 동안 402이닝이나 던졌는데, 최동원에 가려졌을 뿐이지 명백한 혹사였다.[8] 때문에 롯데의 에이스 혹사 계보 중 최상단에 위치한 선수로 볼 수 있다.
그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문제는 병역이었다. 병역을 현역 일반병으로 마치면서 선수 생활에 공백기가 생긴 것도 컸다. 프로 선수의 군팀 입대가 불가능할 뿐더러 복무한 기간도 30개월로 길었고 또 선수 수명이 2020년대보다도 짧았던 1980년대 당시에 현역 입대는 선수 생활 사실상 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9]
원년 이후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이듬해 입단한 최동원이 롯데의 에이스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언더핸드 투수로 원년 당시 리그 내 상위권의 활약을 보였음을 생각한다면 한희민 이전 프로야구의 언더핸드 에이스로 봐도 될 법한 수준. 원년 이후에도 활약을 펼쳤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남긴다는 점에서 상당히 아쉬운 선수라 할 수 있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를 역임하다 2014년 6월 7일 개성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서 고교야구 주말리그 경남고등학교 야구부전 경기 9회말 끝내기 스퀴즈 번트로 승리한 후 인터뷰했다. 그러나 개성고에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정원욱에게 지휘봉을 넘겼으며 현재는 개성중학교 야구부 코치로 재직 중이다.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 ||||||||||||||
<rowcolor=#ed1c24> 연도 | 팀 | 출장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1982 | 롯데 |
44 (3위) |
232⅓ (1위) |
14 (5위) |
19 (1위) |
2 | - | 2.94 |
216 (2위) |
18 (3위) |
59 | 10 |
141 (1위) |
1.18 |
1983 |
42 (3위) |
169⅔ | 8 | 11 | 3 | - | 4.14 | 179 |
17 (2위) |
52 | 12 | 69 | 1.36 | |
1984 | 군 복무( 현역) | |||||||||||||
1985 | ||||||||||||||
1986 | 16 | 49⅓ | 3 | 5 | 0 | - | 5.66 | 65 | 8 | 20 | 7 | 16 | 1.72 | |
1987 | 13 | 66 | 4 | 2 | 0 | - | 4.23 | 70 | 5 | 20 | 5 | 25 | 1.36 | |
1988 | 28 | 104⅔ | 4 | 5 | 5 | - | 4.73 | 106 | 9 | 27 | 4 | 41 | 1.27 | |
1989 | 17 | 37 | 1 | 3 | 1 | - | 7.30 | 65 | 3 | 10 | 0 | 11 | 2.03 | |
1990 | 15 | 29 | 1 | 1 | 1 | - | 4.03 | 27 | 1 | 10 | 1 | 10 | 1.28 | |
1991 | 1 | 3 | 0 | 0 | 0 | - | 12.00 | 5 | 1 | 3 | 1 | 2 | 2.67 | |
<rowcolor=#373a3c>
KBO 통산 (8시즌) |
176 | 691 | 35 | 46 | 12 | - | 4.14 | 733 | 62 | 201 | 40 | 315 | 1.35 |
5. 관련 문서
[1]
~5월 21일
[2]
5월 22일~
[3]
이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팀 역사상 단
두
번 뿐이었던 우승을 모두 놓쳤다.
[4]
해태의 선발 투수는
방수원이었으며 1회말 아웃 카운트를 한 개도 잡지 못하고 난타당하다가 강판당해 패전투수가 됐다.
[5]
그러나 정식 시상 타이틀은 없었다. 이닝 부문 타이틀은 지금도 시상 대상이 아니며, 탈삼진 부문 타이틀은 1993년 신설되었다.
[6]
1982년 롯데의 시즌 최종 성적은 31승 49패로 6개 팀 중 5위였다. 15승 65패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압도적 꼴찌를 차지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밑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사실상 하위권이나 다름없었다.
[7]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 시절부터 롯데의 팬을 자처한 축구 해설위원
한준희는 노상수의 원년 성적을 보고 롯데의 향후 앞날이 순탄치 않겠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직감은 여지없이 적중하고 만다.
[8]
아직 마운드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던 1983년만 해도 평균 자책점이 전년 대비 1.2점이 올라갔는데, 국가대표 선수들의 입단으로 인한 리그 수준의 급격한 상향 문제도 있었겠으나 바로 전년도 최다 이닝을 기록할 정도로 혹사를 당했던 것 또한 이유로 볼 수 있다.
[9]
이 시기에 현역 일반병으로 입대했던 다른 선수들(
양세종,
정학수,
최계훈 등)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