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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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민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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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빙그레 이글스|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13번}}} | |||||||||||||||||||||||||||||||||||||||||||||||||||||||||||||||||||||||||||||||||||||||||||||||||||||
팀 창단 | → |
한희민 (1986~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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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홍 (199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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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1번 | ||||||||||||||||||||||||||||||||||||||||||||||||||||||||||||||||||||||||||||||||||||||||||||||||||||||
신경식 (1991~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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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민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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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순 (1995~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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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수 (1998~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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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민 (2004~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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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2010~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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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민 韓禧敏 | Hei-min 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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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2년 7월 19일 ([age(1962-07-19)]세) |
충청북도 영동군[1]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이수초등학교 (
졸업) 영동중학교 ( 졸업) 세광고등학교 ( 졸업)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 체육교육학 82 / 학사) |
신체 | 188cm, 77kg[2]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언우타 |
프로 입단 | 1986년 1차 지명 ( 빙그레) |
소속팀 |
빙그레 이글스 (1986~1992) 삼성 라이온즈 (1993) 줜궈 베어스 (1994~1995) |
지도자 |
한화 이글스 투수 인스트럭터 (2003)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4~2007) 논산시 리틀야구단 감독 (2014~2019) 영동군 리틀야구단 감독 (2021~) |
병역 | 예술체육요원[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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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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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자 빙그레 이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군과 함께 빙그레 이글스의 원투펀치를 이룬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빙그레 이글스(1985년 창단)의 창단 멤버로서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창단 초기 빙그레에서 한희민은 이상군과 함께 쌍두마차를 이루어 에이스 노릇을 하였다.1986년 4월 1일 선발 장명부를 구원하며 첫 등판한 한희민은 4월 5일 첫 선발 등판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화려한 데뷔를 한다. 이날 한희민의 완봉승이 이글스 창단 첫 승이었다. 이후 1986년부터 88년까지 탈삼진 3위, 1988년 다승 2위/승률 3위, 1989년 승률 2위를 기록하는 등 팀의 2선발이자 리그를 대표하는 언더핸드 투수로 활약을 펼쳤다. 특히 프로 2년째였던 1987년 시즌은 30경기 206이닝을 던져 ERA 2.36에 WHIP는 0.97, 피홈런은 7개[4]밖에 맞지 않았을 정도로 가장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던 시즌이었다.
김영덕 감독의 타이틀 만들어주기로 피해를 받은 사례 중 한 명이었다. 1992년 시즌 송진우를 다승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시즌 막판 해태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잘 던지고도 5회에 송진우로 교체되었던 것. 이에 앞서 1990년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팀이 4:2로 앞선 7회 말 선발 한용덕이 솔로 홈런을 맞아 1점 차로 추격 받으면서 구원 등판했지만, 9회 말 김용철과 이만수에게 연속 솔로 홈런을 허용하여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는 북일파 한용덕의 승리를 비북일파(세광고) 출신인 한희민이 무산시킨 모양새로 비춰졌다.
그러나 사실 빙그레의 북일파 Vs 비북일파 파벌이 존재하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이며 정확한 실체가 드러난 것은 아니다. 일례로 송진우 다승왕 에피소드에서, 송진우는 천안북일고 출신이 아닌 세광고 출신으로 한희민의 직속 후배였다. 주목해볼 것은 한희민의 시즌기록인데, 1987년부터 1990년까지 경기출장과 선발등판 횟수가 비슷함에도 이닝과 FIP, WAR 및 각종 비율지표가 완연히 우하향을 그린다. 1991년에는 K/9, HR/9 및 FIP가 반등하였으나, 이 시즌 한희민은 27경기 16선발 출전에 1완투를 기록하고 규정이닝 달성에 실패했다. 16경기 출장으로 선발은 당시 팀 내 4위이나, 공동 2위였던 송진우/ 김인권이 17경기 선발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당시 한희민에게 선발기회는 최대한 보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희민은 송진우와 김인권은 물론 12경기에 선발출전한 장정순보다도 못한 이닝소화력을 보였다. 거기에 한희민은 당시 한국나이로 31살이었으니, 슬슬 선발로의 생명은 끝났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희민의 불만은 코칭스태프에겐 '예전같지도 않으면서 밥그릇은 챙기려 드는', 팀 분위기를 저해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다.[5]
개인적으로 100승을 목표로 하던 한희민이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는 피할 수 없었고 결국 1992년에는 15경기 8선발 등판에 그쳤다.[6] 이에 한희민은 1992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는 소동을 벌였고, 1993년 1월 25일 빙그레 이글스가 현금 3,000만 원과 박철희를 받는 조건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트레이드 되었다.[7] 관련기사
삼성에서 기록한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이적 후 첫 경기(5월 26일 대구 태평양 더블헤더 1차전)에서 선발 승을 거둬 팀 통산 700승에 공헌하였고 6월 23일 대구 LG 더블 헤더 2차전에서 구원 승으로 자신의 통산 80승을 올렸다.
하지만 갑작스런 중간계투 보직 변경에 불만을 품어 2군으로 강등된 후 퇴단하고 다음 해인 1994년에는 대만프로야구에 진출했다. 대한민국 선수 중 최초의 대만 프로야구 진출. 쥔궈 베어스(현 푸방 가디언즈)에 입단해[8][9]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2년 동안 겨우 6승 16패를 기록했다.
단, 1994년 기준으로 쥔궈 베어스는 창단 2년차의 리그 최약체였다. 감독이 무려 두 번이나 교체[10]되었고, 1선발에 윌리엄 플린트(William Flynt)가 무려 231.1이닝을 던지고 11승 13패 삼진 갯수 1위를 거두 었고, 2선발의 토종 선발 린차오황(林朝煌)[11]은 147.2이닝 동안 고작 5승 15패를 거두는데 그쳤다. 팀 뎁스도 무척이나 얇아 플린트, 린차오황, 한희민을 제외하면 꾸준히 선발 등판할 수 있는 자원은 거의 없었다. 같은 해 쥔궈 베어스는 한희민말고도 삼성 출신 투수 감병훈, 김종국, 삼성 출신 외야수 박인구, OB 출신의 투수 김형균 등의 선수들을 데려왔으나 한희민 이상의 주축급 성적을 거둔 선수는 전무했다.
부진한 팀 성적에도 한희민은 규정이닝을 지키는 주축선발로 자리매김하기는 했으나 빙그레 시절부터 삼성 시절까지의 시간을 감안하면 대만리그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우선 고질적인 체력문제와 우완 언더핸드라는 피홈런 핸디캡[12]를 안고 있었는데 당시 현지 야구팬들의 언급으로는 체력문제로 5이닝 이상 이닝을 오래 이끌지 못했고 곧이어 장타를 맞는 선수였지만 상당히 좋은 변화구로 타자를 농락[13]하던 선수로 긍정적으로 회자되고 있다. 1995년 그리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프로 입단을 타진했으나 실패하며 결국 현역에서 은퇴했다.
한편 데뷔 첫 해 청보에게만 3완봉승을 기록했고 다음 해 거둔 3완봉승 중 2승이 청보전이었으며 1988년 4 완봉승 중 MBC전 2승(4월에만 2완봉승), 롯데전 2승을 기록했다.[14]
3. 플레이 스타일
우완 언더핸드 투수로, 온몸을 비틀어서 던지는 투구폼이 유명했다. 이 폼은 교과서적인 폼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주 무기는 슬라이더와 싱커로, 특히 낙차가 커 타자들이 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이 선수의 강점은 제구력으로, 통산 BB/9가 2.64에 1987년에는 1.92를 기록할 만큼 매우 준수한 제구능력을 자랑했다.[15] 언더핸드는 제구력이 강하다는 속설을 증명하는 투수였다. 탈삼진 능력 역시 준수하여, 1986~88년 연속으로 탈삼진 3위를 기록했으며 K/9 역시 4-4-2위를 기록할 정도였다.[16] 이러한 지표들은 '한희민이 왜 한국 언더핸드 에이스 계보의 한 축으로 꼽히는가'라는 궁금증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될 것이다.
언더핸드 투구폼 때문에 홈런에 취약해서, 홈런 공장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데뷔 시즌 피홈런 1위를 기록[17]했고, 1988~90년 시즌에는 피홈런 3-2-2위를 기록했다. 이는 언더핸드 투구폼이 좌타에 약하고, 아래로 던지기 때문에 홈런이 나오기 쉽기 때문이다.[18] 또한 언더핸드 폼은 부상 가능성에도 취약한 편인데, 한희민 본인이 큰 체격을 비틀어 던지는 폼을 가졌다 보니 허리나 다리 등에 부상을 달고 다니기도 했다.
이닝은 생각보다 적지만, 통산 128선발 47완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닝이팅 능력이 좋지 않았다고 보는 건 비약이다. 특히 1986년은 19선발 12완투 175.1이닝, 87년은 22선발 14완투 206이닝을 기록하였으며 이는 선발 2경기 중 1경기 정도는 완투를 했다는 것이다. 즉 누적출장이 적은 편이고 하락세가 빨리 시작되어서 그렇지, 전성기 적에는 준수한 이닝이팅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잠시 대전 유성구에서 야구교실 사업을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접은 뒤 야구와 한동안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간만에 매스컴을 탔는데, 고향 영동의 산으로 들어가서 도인이 되었다. 도인 같이 수염을 기르고 머리도 길러 꽁지머리로 묶고, 찻집을 운영하며 평소에 좋아하는 난초를 기르고 있었다.
2003년 초 한화 이글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하며 하산했고, 2004년에는 KIA 타이거즈 2군 코치로 선임되었으나[19], 서정환 감독이 잘리면서 당연히(?) 같이 잘렸다. 이후 2년 동안 광주동성고, 경북고, 강릉영동대, 대전고 등에서 코치로 있었다.
2013년 6월 KBS 2TV에서 방송한 스포츠다큐 승부의 잠수함편에서 그의 투구를 설명하면서 인터뷰를 하였다. 해당영상
그리고 다시 입산했다. 관련기사 의외인 점은 고향 쪽이 아닌 광주 근처로 갔다.[20] 그곳에서 식당 하나를 차렸는데 손재주 하나는 뛰어났던지 시설 등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꽤나 인심이 좋다고 한다. EBS방송에서 그가 운영하는 오리식당이 방영된 적이 있다. 2011년 5월 대전일보 보도에 따르면 광산구의 저수지 근처 수위가 높아져 충청남도 계룡시 쪽으로 가게를 옮겨 운영하였다.
2014년 5월 28일 NC 다이노스와 한화 이글스가 치른 경기에서 관중석에 모습을 보였다.[21] 2017년 현재 리틀 야구단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운영하던 식당까지 접고 야구에 전념한다고 한다.
2018년 9월 5일 대전에서 열린 롯데와 한화의 경기에 참관하였다. 이날은 논산시 리틀야구단이 초청되어 애국가를 부른 날이었으며, 한희민은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이날 해설이었던 차명석 해설위원도 빙그레 이글스의 레전드가 재능기부라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덤으로 이날 선발이었던 김재영도 사이드암 투수였다.
2021년 현재는 논산시 리틀야구단은 정리하고 고향인 영동군에서 리틀야구단 감독을 맡고 있다. 관련기사
5. 여담
- 현역 시절 별명은 ET.
- 큰 키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농구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진학한 중학교에 농구부가 없고 야구부만 있어 야구를 시작해 야구 선수가 되었다.
- 대학 동기인 前 해태 타이거즈 포수 장채근과는 절친이다. 장채근이 프로 입단 초기에 한희민이 있는 빙그레로 트레이드시켜 달라고 했을 정도다. 한희민이 은퇴 후 KIA 타이거즈에서 코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장채근의 추천 덕분이라고 한다.[22] 장채근에게 홈런을 내준 게 친구여서 일부로 치기 좋은 공을 준게 아니냐는 주위 사람들의 말은 잘못됐으며 '홈런을 쳐야지'라는 마음보다는 그냥 친한 친구가 던지니까 편하게 마음을 먹고 타격에 임하니 장채근이 홈런을 때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 그리고 그 장채근은 자신이 받은 공 중에서 최고의 공은 던진 투수는 한희민이라고 말한다. 절친이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절친이어도 자신이 오랫동안 뛰었던 해태 타이거즈뿐만 아니라 KBO 리그에서도 내로라하는 투 수 들이 던진 공보다 좋은 공을 던졌다고 한 것은 그만큼 한희민이 뛰어난 투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선동열? 한희민이 최고였다”
- KBO 리그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은 1991년 6월 19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빙그레-해태전에서 해태의 선발로 등판한 선동열이 13이닝 완투하면서 기록한 18개이다. 이 경기에서 빙그레의 선발투수가 한희민이었다. 한희민 또한 13이닝 완투하였으며[23], 당시 프로야구는 시간제한이 있었던 탓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1 대 1 무승부로 끝났다.
- 자가용에 경광등과 스피커를 달아 경찰차처럼 꾸미고 길을 가면서 경찰 흉내를 내는 기행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러다가 결국 불법 부착물 때문에 경찰에 걸려서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 동시기 같은 팀에서 활약했던 이상군과는 1962년생 동갑내기지만, 한희민이 학창 시절 1년 유급했기 때문에 연차로는 이상군이 선배다. 순천 팔마야구장에서 녹화한 전설의 타이거즈 장채근 편에서 전화상으로 출연하였다. 장채근 옆자리에 있던 이상군과 통화 시에 '상군이 형'이라고 불렀다.
5.1. 콩라인
우승 0회, 준우승 4회[24][25]의 완벽한 콩라인. 이 정도면 홍진호한희민은 당대 최강 팀인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맞아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야 했는데, 4번의 준우승 중 한 번은 롯데 자이언츠에게 당했다.[26]
선수 시절 콩라인이었던 이정훈이나 성준은 코치시절에는 우승을 경험하였지만 한희민은 …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6 | 빙그레 | 29 | 175⅓ | 9 | 13 | 0 | 0 | 0.409 | 3.13 | 136 |
18 (1위) |
59 |
123 (3위) |
67 |
61 (5위) |
1.06 (5위) |
1987 | 30 |
206 (4위) |
13 | 8 | 4 | 0 | 0.619 |
2.36 (4위) |
156 | 7 | 48 |
116 (3위) |
64 | 54 |
0.97 (2위) |
|
1988 | 31 |
188 (2위) |
16 (2위) |
5 | 5 | 0 |
0.762 (3위) |
3.11 |
188 (3위) |
16 (3위) |
62 |
103 (3위) |
72 | 65 | 1.29 | |
1989 | 30 | 176⅔ |
16 (3위) |
4 |
6 (5위) |
0 |
0.800 (3위) |
2.50 (5위) |
130 |
16 (2위) |
61 | 74 | 52 | 49 |
1.05 (2위) |
|
1990 | 26 | 157 | 12 | 9 | 5 | 0 | 0.571 | 4.13 | 154 |
22 (2위) |
58 | 62 |
85 (2위) |
72 (3위) |
1.32 | |
1991 | 27 | 115 | 8 | 6 | 1 | 0 | 0.571 | 3.83 | 111 | 10 | 46 | 55 | 52 | 49 | 1.32 | |
1992 | 15 | 66⅔ | 2 | 5 | 0 | 0 | 0.286 | 5.54 | 66 | 11 | 20 | 41 | 48 | 41 | 1.22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3 | 삼성 | 16 | 40 | 4 | 1 | 3 | 0 | 0.800 | 3.38 | 37 | 4 | 19 | 21 | 16 | 15 | 1.38 |
KBO 리그 통산 (8시즌) |
204 | 1124⅔ | 80 | 51 | 24 | 0 | 0.611 | 3.25 | 978 | 104 | 373 | 595 | 456 | 406 | 1.1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4 | 쥔궈 | 22 | 122.1 | 5 | 10 | 0 | - | - | 5.67 | 134 | 22 | 31 | 78 | - | - | 1.35 |
1995 | 9 | 43.2 | 1 | 6 | 0 | - | - | 4.33 | 45 | 2 | 11 | 24 | - | - | 1.28 |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1986년 |
12완투 (공동 4위) |
3완봉 |
1987년 |
14완투 (3위) |
3완봉 (공동 3위) |
1988년 |
10완투 (2위) |
4완봉 (1위) |
1989년 | 8완투 |
3완봉 (공동 5위) |
1990년 | 2완투 | 0완봉 |
1991년 | 1완투 | 0완봉 |
KBO 리그 통산 | 47완투 | 13완봉 |
1994년 | 5완투 | 0완봉 |
1995년 | 2완투 | 0완봉 |
CPBL 통산 | 7완투 | 0완봉 |
7. 관련 문서
[1]
청주시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영동군 태생이다. 고등학교를 청주에서 보냈다.
[2]
KBO 공식 프로필
[3]
198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
#
[4]
선발로 활약한 시즌 중 유일하게 리그 피홈런 10걸에 들지 않은 시즌이다. 당시 한희민의 피홈런 순위는 13위.
[5]
쌍두마차였던 이상군 역시 (부상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서도 있었겠으나) 신예들에게 밀려 92시즌에는 중간계투 출장이 주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상군은 이에 불만을 갖지 않고 묵묵히 던졌으며, 결국 팀에 끝까지 남아 100승을 채우고 2001년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6]
그럼에도 1992년 시즌의 빙그레는 한희민의 공백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송진우와 한용덕, 장정순, 김인권 등 기존 투수진에
정민철이라는 신예가 가세하였기 때문이다. 현재도 92시즌 빙그레는 이글스 역사상 투수진이 매우 뛰어났던 시즌 중 하나로 꼽힌다.
[7]
이를 두고 한희민이 1988년 선수회 창립 시도때 초대 총무를 맡는 등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구단측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8]
당시 삼성과 쥔궈는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쥔궈 팀 사장이 한희민을 트레이드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9]
다만 삼성을 빼고는 대만 리그가 KBO와의 선수 협정을 맺지 않아 다른 팀과는 트레이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1994년 겨울에
OB 베어스가
항명 파동에 가담한 선수였던
장호연을 무상 트레이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욕을 많이 먹었다.
[10]
천슈슝(陳秀雄) →데라오카 타카시(寺岡孝)→차이잉중(蔡榮宗)
[11]
1969년생 우완투수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야구대표팀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수상한 적이 있었다.
[12]
피홈런 22개 공동 1위를 기록
[13]
삼진 78개 12위
[14]
순수 신인 단일 시즌 특정 팀 최다 완봉승 기록은 1986년 한희민(VS 청보전) 외에도 1992년 빙그레
정민철(VS 쌍방울전)이 기록한 3완봉승이 최다 기록이다.
[15]
그러나 팀메이트였던
이상군, 그리고 빙그레-한화 후배인
한용덕,
송진우,
이상목 등 원체 괴물같은 제구를 자랑한 선수가 많아 한희민의 제구력은 상대적으로 묻히는 모양새다.
[16]
2위를 기록했던 1988년 시즌 한희민의 K/9는 4.93으로, 이 시즌은 전체적으로 1위
선동열을 제외하면 투수들의 K/9가 신기하리만치 낮았다. 당시 선동열은 10.09라는 어나더레벨스러운 수치를 기록했다.
[17]
당시 2위는 이상군인데, 이상군은 한희민보다 홈런 1개를 덜 맞고 68이닝을 더 던졌다.
[18]
여담으로 한희민의 홈런 공장장 타이틀은 바로 다음 세대 언더핸드 에이스인
이강철이 계승하게 된다. 1990년 시즌 한희민은 피홈런 2위를 기록하는데, 공교롭게도 1위를 이강철이 기록하면서 마치 세대교체를 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19]
당시 신인이었던
윤석민에게 체인지업을 전수했다고 한다.
이광우에게 배운 슬라이더까지 종합해서 윤석민은 리그를 대표하는 우완투수로 거듭난다.
[20]
입산 후 인터뷰에 따르면 2004년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아내를 만났고, 그 시기 남도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 처가가 있는 광주로 입산 했다고 한다.
[21]
이날 한화는 18:1로 완전히 무너졌다... 그래서 표정이? 다행히 찍힌건 3회초 1점차였다
[22]
당시 KIA의 배터리코치였던 장채근이
김성한 감독에게 한희민을 2군 투수코치로 적극 추천해 아무 연고가 없던 KIA에서 코치로 일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광주에 정착할 때도 장채근이 개인적으로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23]
여담으로 이날 한희민은 6탈삼진을 기록했다. 이날 한희민은 173구를 던진 탓에 반 달을 쉬고 6월 30일에 한 번 등판한 후, 부상으로 한 달 가까이를 더 쉬어야 했다.
[24]
빙그레 이글스의 준우승 횟수와 동일한 횟수로 사실상 콩그레 전설의 산증인이다.
[25]
1993년에 소속 팀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했지만 한희민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26]
당시 롯데는
염종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