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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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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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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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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요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 · 군정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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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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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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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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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토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코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코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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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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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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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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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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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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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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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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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6·7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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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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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라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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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다 스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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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 소스케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1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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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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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요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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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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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정우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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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요네조
시마다 도시오
나카지마 치쿠헤이
당 분열기 (1937~1940)
혁신파
나카지마 치쿠헤이
총재대행위원 (쿠하라파·정통파)
쿠하라 후사노스케
미츠치 추조
요시자와 겐키치
정통파
쿠하라 후사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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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Itō Hirobumi
[1]
파일:伊藤博文.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41년 10월 16일
스오국 쿠마게군 쓰카리촌
(現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사망 1909년 10월 26일 (향년 68세)[2]
러시아 제국 하르빈시 하르빈역 역사
(現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역사)
묘소 도쿄도 시나가와구 니시오이
재임기간 초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제5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제7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제10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초대 한국통감
1905년 12월 21일 ~ 1909년 6월 13일
서명 파일:이토 히로부미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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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통칭 리스케(利助) →
도시스케(利助)[3] → 슌스케(春輔)
슌포(春畝)
부모 부친 이토 주조, 모친 이토 고토네
배우자 선처 이토 스미코, 후처 이토 우메코
자녀 장녀 이토 사다코(요절)
차녀 스에마쓰 세이코 - 사위 스에마쓰 겐초
삼녀 니시 아사코 - 사위 니시 겐시로
사녀 오타케 사와코 - 사위 오타케 다케
양자 이토 히로쿠니
서장자 이토 분키치
서차남 이토 신이치
외외증외현손자 마쓰모토 다케아키
학력 쇼카손주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4][5] (중퇴)
종교 무종교 ( 무신론)[6]
신체 154cm[7]
작위 공작[8]
정당
약력 참의[9]
제4·6대 내무경
초대·제5·7·10대 내각총리대신
제6대 외무대신
초대 입헌정우회 총재
귀족원 의원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제3·8대 추밀원 의장
황실제도조사국 총재
초대 한국통감
}}}}}}}}} ||

1. 개요2. 생애3. 한일합병 반대론자?
3.1. 반박
4. 평가5. 어록6. 여담7. 대중매체에서
7.1. 영상물7.2. 만화7.3. 대체역사물7.4. 기타
8. 사건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의 초대, 제5, 7, 10대 내각총리대신.

야마구치현 쿠마게군[10] 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 조슈 3존"으로 불리는 인물. 한국 한자음은 이등박문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토 히로부미 사살( 암살)[11] 이후 이토를 기리기 위해서 서울 남산에 지어진 사찰도 히로부미 절, 즉 박문사(博文寺)이다.[12] 참고로 박문초등학교, 박문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나 출판사 박문각은 이 사람과 무관하며 한자 이름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박사 박학다식에 나오는 것처럼 "학문에 힘쓴다."는 뜻이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들 중의 한 명으로서, 대일본제국 헌법의 초안 작성, 일본 의원내각제 시행, 양원제를 포함한 의회 제도의 확립, 일본 민법의 제정에 기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 내각총리대신직과 대신직들을 비롯한 행정부, 그리고 입법부( 일본 국회)는 이토가 그 시작을 주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3] 총리로서는 도합 7년 6개월(2,720일)을 지냈는데, 1885년 당시 만 44세의 일본 역사상 최연소 총리로 취임해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에 조금 모자란(만 59세 7개월) 나이였다. 일본에서는 정치, 법, 황실 등의 방면에서 업적을 많이 남긴 개국 공신 중 한 명이자 초대 총리를 역임한 정치 거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대한민국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장본인이자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어 남녀노소 막론하고 아는 사람이 많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와 큰 연관이 있는 사건이 발발하던 당시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팽창주의를 부르짖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미나미 지로, 도조 히데키, 이시이 시로, 기무라 헤이타로, 고이소 구니아키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인 것과는 대조적이다.[14]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했던지라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통감 정치를 했다는 점이 더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물어보면 "초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라는 답보다 "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 당한 사람"이라는 답이 더 많이 돌아온다.[15][16] 때문에 한국인에게 구한말 침략의 원흉이라고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다.

이러한 대중적인 악명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이토 성씨를 지닌 일본인들을 "이토 히로부미와 혈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선입견일 뿐이며 자제해야 할 태도다. 이토 씨(氏)는 일본에서 인구로 따지면 5위~6위에 해당하는 성씨이며, 같은 한자를 쓴다고 해서 한국처럼 한 집안에서 대대적으로 갈라져 나온 자손들이 아니라 완전히 남남인 경우도 비일비재한 일본의 성씨의 특성을 미루어 보면 정말 널리고 널린 흔한 성씨다. 사실 일본인은 성씨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흐릿한 편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한국에 비해 성씨를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인데 대한민국에서는 성본변경이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금지되어 있지만[17] 일본의 경우는 결혼만 해도 무조건 성이 바뀐다. 심지어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처가 쪽으로 바꾸기도 한다.[18] 또 전과자가 성씨까지 개명해서 살아가는 경우나 도무지 발음하기 힘든 괴상한 성씨를 가지고 있어 일부러 읽기 편한 성씨로 바꾸는 경우 또한 의외로 흔하다. 그러니 성씨에 대한 관념이 뚜렷할 수가 없다. 일본의 다른 역사적 유명인들은 명문 사무라이나 귀족 출신으로 성씨가 워낙 독특하기에 성이 같은 사람이면 후손일 확률이 그나마 높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평민 출신이기에 아주 흔하디 흔한 평민 성씨라서 일반인의 이름과 별로 분간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덴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주장했던 양심적 정치인인 이토 잇쵸 나가사키시 시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같이 거물급 성씨나 되어야 그나마 애착을 갖는 편이고, 그렇지 않은 성씨들은 자기 성이 어떻거나 말거나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 국회의사당 정문 쪽 메인 홀에는 방의 4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있다.[19]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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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일합병 반대론자?

일각의 저서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근대화에는 동의했으나 합병에는 반대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합병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합병에 기술적이라고 표현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구상은 조선을 (훗날의 만주국처럼) 일본의 보호 하에 두며 조선인 스스로 자국의 정부와 의회를 구성하도록 하여 지배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자국의 근대화에 노력을 쏟고 있던 일본이 조선 합병에 따른 병참기지를 비롯한 병원, 철도 등의 기초 시설의 건설 부담을 지기에는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며[20], 또한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병합을 추진할 경우 조선인들의 반발도 생길 수 있고, 합병 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서구 열강들로부터 간섭과 마찰이 생길 것을 예상했던 측면도 있다.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의 염려는 일본이 1930년대에 만주사변, 열하사변 등을 잇따라 일으키면서 현실화되었다.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의 이권을 독차지할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자 영국,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 열강들과 국제연맹은 반발했고 이에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로 응수하면서 군국주의로의 경도가 심화된다.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 한일합병을 반대한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함으로써 한일 강제 병합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21] 실제 강경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가 살아있을 때에는 조선 정책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였으나, 이토가 사살당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조선 정책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조선을 병합하여 직접적으로 지배하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당시 한국통감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를 사임시키고 자신의 뜻과 일치하였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통감으로 올렸으며[22], 결국 이토가 사망한지 1년도 안 돼서 대한제국은 합병되었다.[23]

다음은 월간조선 1984년 10월호에 실린 내용으로 조갑제 기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 이토 도시오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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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반박

일청전쟁의 결과, 우리나라는 마침내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조선을 구하여 완전히 독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우리나라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러시아에 의지하고, (중략) 이에 이토는 또 조선, 만주, 러시아 영토 사이에 땅을 획정하여 완충지대를 만들어 이를 양국의 공동 보호하에 두기를 원한다고 러시아에 제안하려 하였으나, 어느 날 러시아 무관이 오이소 저택의 이토를 방문하여 조선은 단연 일본이 이를 취해야 하며(朝鮮は断然日本之を取るべし), 러시아는 마산포만 얻으면 충분하다는 희망을 털어놓자, 이토는 그 진의를 알고는 경악하여 전율하며, 이토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언젠가 조선을 합병하지 않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입국의 대체(立国の大体)> 14장 '일본은 침략국이 아니니(日本は侵略国にあらず)' 중.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급진적인 한일병합을 반대했던 것이지, 한일병합 자체를 반대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이토는 조선을 괴뢰국으로 삼고 근대화를 시키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동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기에 급진적인 합병을 꺼린 것이다.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이토는 스스로 한복을 입기도 하고 1909년 순종의 전국 순행에 동참하기도 했다.[25] 그리고 이토는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군 해산 등 식민지화의 사전작업에 활발히 참가해 왔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꾸준히 논의되고 있었고(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 "조선 병합"을 가결하는 등, 가쓰라 다로 총리를 필두로 병합을 이미 추진 중이었다.

결정적으로 사망 시점의 이토는 한일합방을 반대할 능력이 없었다. 본래 그는 관료계 파벌의 수장이었으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승리로 인해 완전히 권력을 잡은 가쓰라 다로 총리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군부계 파벌에게 밀려난 상황이었던 것이기 때문. 조선통감이 된 것 역시 이런 상황을 뒤집어보려는 책략이었으나, 막상 한국통감부의 통치기간 동안 조선인들의 반발은 극심했고, 결국 이토는 말년이라도 편하게 일본에서 은퇴하려면 가쓰라와 군부파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1909년 4월, 이토는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조선 병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한 뒤 1909년 6월 통감 자리에서 사임했으며, 애초에 4개월 뒤인 10월에 하얼빈으로 간 것 역시[26] 합병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과의 잡음이 없도록 조율하기 위해 간 것이었고, 이렇게 빈틈을 보인 덕에 하얼빈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다.

1909년 주한 프랑스 영사가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이토는 보호령을 경영하는 영국의 방식보단 식민지로 편입시키는 우리 프랑스의 방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적혀 있다.[27]

이렇듯 안중근 의사가 조선 편에 섰던 온건한 일본 정치인을 죽였기에 결과적으로는 조선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는 식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28].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급진적인 합병을 반대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이는 순전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급진적인 합병은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결코 조선을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다. 그나마도 나중에 가서는 강경파들의 합병론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기에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고 할 수도 없다.

모로코, 베트남, 인도의 사례와 같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직접 합병" 뿐만 아니라 여러 식민지배 방식이 있었다. 보호국, 제후국, 자치령, 번왕국, 부왕령, 심지어는 회사령 등 수많은 구조의 정치체들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체계로 도입되었다. 가령 영국의 인도 번왕국 중 하나였던 마이소르 왕국 또한 식민지로 간주되며,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던 응우옌 왕조 또한 마찬가지다. 외교권 박탈과 보호국화 역시 식민지로 간주된다. 그런 관점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진 시점에서 이미 조선은 일본의 영향권에 속한 사실상의 식민지였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토는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이 맞다.

4. 평가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 근대화를 이끈 점에서 일본 내에서의 역사적인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19세기 독일을 벤치마킹하여 일본 내지 및 조선, 대만에 제국대학을 설치하기도 하는 등 일본의 근대화에 다방면으로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

또한 일본 내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정치적으로 온건파 성향이 강했기에, 그가 사망한 상황에서 그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할 인물이 없어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토는 초대 일본 총리로서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큰 역할을 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 대해 모두 개전에 반대하는 등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일본 내에서 온건파였든 강경파였든, 결국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앞장서 주도한 인물이었던 건 변함없기에 한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나쁠 수 밖에 없다.

일본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에도 반론이 있는 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이루려고 했던 독일식 입헌군주제는 실상 헌법만 존재하지 천황의 권력을 제한하는 기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천황의 절대적 권위를 삿초 번벌 출신 원로들과 총리가 위임하여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으로 수립된 의회는 이런 행정부를 견제하지 못했다. 이런 모순적인 체제는 훗날 군부의 폭주와 의회정치의 붕괴를 가져왔다.

총평하자면 그는 메이지 유신의 한 축이었고 근대화와 입헌군주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으나 다른 유신지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정신적 근대화를 이륙하지 못했고 국내에선 민중의 이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지배층의 안위만을 위한 정치를 행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5. 어록

"영국, 미국, 프랑스의 자유과격론자의 저술만을 금과옥조로 과신하고, 국가를 기울게 만드는 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얻어 마음 편히 죽을 곳을 찾은 기분입니다."
1882년 8월 11일, 이와쿠라 우대신에게 보내는 편지
"사람은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성실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친절한 것이다."
"학문은 읽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듣는 학문도 필요하다. 인간은 살아있는 책이기 때문에 서양에 가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 식견을 넓혀라."
"나는 욕심이 많지 않다. 저축 같은 것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 나는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고 축재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사를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여자를 상대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본의 인구는 4천만을 넘지만, 참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약 40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직접 국세 5엔을 기준으로 하여 170만 명에게 선거권을 주는 것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길입니다."
1899년 3월 9일 국회 연설
"귀국은 독립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실로 허명뿐인 독립에 불과하다. 제군은 최근 10년간 나라의 생존 유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1905년 11월 16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일본 정부와 이토 히로부미 한국특파대사의 고압적 태도에 다소 불만을 드러내자 남긴 말
"제군은 동맹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릇 동맹이라는 것은 그들과 우리의 실력이 일치하는 경우에 비로소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귀국(대한제국)과 동맹을 맺는 나라는 절름발이를 동반하고 걷는 것과 같아서 자유로운 보행을 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의 외교는 유치한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에 호소하는 것도 불사하는 바이다. 따라서 제군이 다른 세력을 믿고 이 조약의 결정을 지연시키려 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완전히 헛된 의뢰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국에 하등 이익될 바 없음이 명백하다."
1905년 11월 16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게 한 말

6. 여담

파일:¥1000 front-2.jpg * 1963년부터 1984년도까지 일본 1000엔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됐는데, 1984년 이후 한국 및 중국과 경제 교류가 늘어나면서 이 두 나라를 의식해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되었다.
메이지 호색 일대 남자, 식도락, 대훈위 이토 후작 ||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하여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한 만화. 그중에는 여승(女僧)도 보인다.《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36] 中에서.
" 남자의 배꼽 밑에는 인격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 여성 편력으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로, 이토의 여색 밝힘은 유명했다.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댔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는데, 그 중의 1명이 이와쿠라 토모미의 딸이었다. 다행인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한다.[37] 살아생전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38]라는 한시를 남긴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대중들에게는 총리보다는 천하에 둘도 없는 호색한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평가도 대체로 부정적이다.

7. 대중매체에서

7.1. 영상물

7.2. 만화

7.3. 대체역사물

7.4. 기타

8. 사건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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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



[1] いとう ひろぶみ. 이름인 博文은 히로미(ひろふみ)라고 읽기도 한다. 인명에 들어가는 문(文)은 '후미(ふみ)'라고 읽는 경우가 더 흔하며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히로부미'와 '히로후미' 두 발음 모두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히로부미'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일본 교육 과정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라고 가르치는데 일본 사람들(특히 학생들)도 이 사람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다. # # #(세 링크 모두 "伊藤博文"은 ' 이토 히로부미'라고 읽나요? '이토 히로후미'라고 읽나요?"라는 내용의 질문이다)도 적지 않은 듯하다. 허나 아래의 손자와의 인터뷰를 보면 훈독 '히로부미'로 읽지 않고 '하쿠분'이라고 독음으로 부르는 사례도 나온다. [2]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로 사망했다. [3] 읽는 법만 음독에서 훈독으로 달라졌다. [4] UCL 최초의 유학생이다. [5] 조슈 정벌 소식을 접하면서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함께 유학 중이던 이노우에 가오루과 긴급 귀국하였다. [6] Evolution of the Japanese, Social and Psychic. BiblioBazaar. p. 198. [7] 156cm는 추측한 키이고 일본에서는 그의 키가 154cm라고 알려져있다. [8] 암살 후 양자인 이토 히로쿠니가 습작하고 귀족원 공작 의원에 취임하였다. [9] 1868년에 태정관 제도의 부활과 함께 설립 되었으며,1885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에 의해 태정관 제도가 폐지되면서 함께 없어진 직책. 오늘날 국무대신에 해당되는 경(卿)보다 상위에 있는 우대신, 좌대신, 태정대신을 대신하여 각료들을 지도하는 과두제식 정부수반이었다. 우대신, 좌대신, 태정대신은 실질적 권한이 없었고 공경 출신이 독점 했지만, 참의는 삿초도비(사쓰마, 초슈, 도사, 히젠) 출신이 대부분 임명되었다. 여담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정한론으로 인해 잘 알려진 메이지 6년 정변도 바로 참의들 사이에서 벌어진 알력 다툼이었다. [10] 현(現) 히카리시 [11] 공식적으로는 암살이라고 많이 쓰나 문헌에 따라서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암살보다 '사살', '척살'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12] 박문사가 헐리고부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빈관이 들어섰다가 현재는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다. [13] 단 국회를 만든 남자(国会を創った男)라는 타이틀로 알려진 것은 이타가키 다이스케. [14] 그래도 이 중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 총독을 지냈던지라 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교과서로 많이 언급된 사람이다. 도조 히데키는 안경 대머리 아돌프 히틀러 콧수염이라는 전형적인 일본군 외모로 유명한데다 일본군 생김새를 묘사할 때, 자신의 외모로 고착시켜 버린 장본인이어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 8권인 일본의 역사에도 나오므로 읽었다면 잘 기억할 수도 있다. 이시이 시로와 기무라 헤이타로는 나무위키 등의 수단을 통해 각종 전쟁범죄에 대해 열독해보지 않았거나 나무위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혀 모를 수 있다. [15] 무단 통치를 펼친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유사한 이유로 일본 제국의 제18대 내각총리대신보다 초대 조선 총독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16] 이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례로는 조명하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보다 더 높은 거물인 일본 황족을 척살하려 했다. 그것도 다른 황족이 아니라 일본의 국구(= 천황의 장인)를 말이다. 끝판왕은 바로 쇼와 덴노를 노린 이봉창 의사이지만 그는 알려졌다시피 실패했다. [17] 양육자의 재혼, 부모 중 다른 한 명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다. [18] 대표적인 사례가 김전일이다. [19] 다른 귀퉁이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동상이 있으며 나머지 한 자리는 의원 해당 자리에 올라가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 [20] 실제로 직할 통치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의 재정은 만성 적자였다. [21]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란 논지로 서술된 바 있다. 하지만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재판본에서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또한 이토가 한일합병에 반대했는지, 온건했는지를 떠나서 조선 침략의 원흉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의 의로움을 담은 내용도 있다. [22] 나중에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직을 그대로 유임 승계한다. [23] 그리고 강경파가 득세하였으므로 일제시대 초기에는 정책이 강압적이어서 조선인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3.1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24] 인터뷰에서 손자는 이토를 "히로부미"라는 훈독이 아닌 하쿠분이라는 음독으로 읽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이름 자를 마치 한자 음독으로 읽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근대 일본어에서는 상당히 흔한 방식이었다. 이를 '유쇼쿠요미'라고 부른다. [25] 조선일보에서도 이토의 이러한 음모를 기사로 싣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26] 이 때 하얼빈은 러시아 땅이었다. [27] 민유기 著 <프랑스의 1910년 한일병합과 그 결과에 대한 인식> [28] 주로 일본의 혐한 넷우익이나 그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 극우들이 이런 식의 입장을 드러낸다. [29] 반환도서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반출한 책 외에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책들도 포함되었다. [30] 이홍장도 놀라운 게 마흔이 넘은 나이에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는데도 영어에 매우 능통했다고 한다. [31] 이완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는 거의 못했다. [32] 참고로 메이지 덴노는 독일어를 배웠다. [33] 야마구치 출신의 시타오 미우가 여기에 간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프로듀스 48 출전 도중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 여파로 시타오 미우는 최종 데뷔조 입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34] 러시아에서는 태평양 연안의 항구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선을 탐냈고 일본에서는 에서 대륙으로 나가는 하나의 통로로써의 조선을 탐냈다. [35] 곳케이 신문(滑稽新聞), 1903. 09. 05. [36] 저자: 한상일, 한정선 / 출판사: 일조각 / 출판년도: 2006년. [37] 반대로 야마가타는 여자 문제는 없었으나 돈 문제가 깨끗하지 못 했다. 돈과 여자 둘 다 더러운 놈은 이노우에 가오루로 이토 히로부미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 스캔들 메이커였다. [38] 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 [39] 이런 케이스는 또 있는것이 게키단 히토리보다도 더 친한 연예인으로 유명한 초난강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의 정서하고도 너무 다른 히데요시라 이질감이 심하다. [40] 당연하지만 켄신 일행은 굉장히 어이없어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엇보다 경례받는 일행 중에 진짜 사무라이 출신은 한명도 없다. [41] 이 단체 경례 장면은 군국주의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띄고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폭주할 일본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원작 교토편의 마지막에 메이지 정부가 아이러니하게도 시시오의 말처럼 군국주의 행보를 걸었다는 내레이션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42] 원래 역사에서도 서양 눈치를 많이본 것을 고증한 듯. [43] 우익 정치인이라서 좌익에게는 원래부터 평가가 나빴고 러일전쟁을 막으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우익에게 러시아 스파이로 찍혔고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지지로 영미권에 일본을 팔아먹으려는 친미파로 낙인 찍힌다. 특히 이토 본인의 막후 정치 때문에 실제로는 별 실권없는 원로임에도 급진파들은 일본정부를 이토가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44] 실존인물로 원 역사에선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에게 앙심을 품고 암살한 뒤 체포당하기 전 자살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