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원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이토 히로부미 | 구로다 기요타카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노우에 가오루 | 사이고 주도 | |
오야마 이와오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
1. 개요
메이지 시대의 원로(元老, げんろう, 겐로, Elder statesman)에 대한 항목이다.2. 상세
원로란 일본 제국에서 정부의 최고 수뇌에 있었던 중신들을 가리킨다. 일본 제국 헌법에서는 원로에 대한 규정을 명기하지 않았으며 하세가와 마사야스의 《쇼와 헌법사》에서도 원로를 헌법 바깥의 기관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법적으로는 불분명한 지위였지만 그 대신 천황의 칙명 또는 칙어에 의해 권한과 정당성을 부여받았다.이들은 천황의 자문에 답하여 내각의 경질이나 후임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천거, 개전·강화·동맹 체결 등에 관한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에 참여했는데, 많은 경우 이들이 정한 것이 최종 결론이 되곤 했다. 어찌 보면 당시 일본 정계의 독재적 흑막.
원로에게는 황실의제령 (1926년 황실령 제7호) 제29조에 따라 궁중석차 제1계 제4위( 추밀원 의장 다음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기도 했다.
3. 명단
이름 | 출신 | 생몰 년도 | 원로 호칭 수여일 | 비고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조슈 | 1841~1909 | 1889년 11월 1일 |
최초의 원로 2인 초대, 5대, 7대, 10대 총리 역임 |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 | 사쓰마 | 1840~1900 | 1889년 11월 1일 |
최초의 원로 2인 2대 총리 역임 |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 조슈 | 1838~1922 | 1891년 5월 6일 | 3대, 9대 총리 역임 |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 사쓰마 | 1835~1924 | 1898년 1월 12일 | 4대, 6대 총리 역임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 | 조슈 | 1836~1915 | 1904년 2월 18일 |
총리 역임 경력 없음(11대 총리 후보) 을미사변 주모자 |
사이고 주도(西郷 従道) | 사쓰마 | 1843~1902 | 1892년(추정) |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정식 수속을 거치지 않음 총리 역임 경력 없음 |
오야마 이와오(大山 巌) | 사쓰마 | 1842~1916 | 1912년 8월 13일 |
사이고 주도와는 사촌지간 총리 역임 경력 없음 |
가쓰라 다로(桂太郎) | 죠슈 | 1848~1913 | 1912년 8월 13일 | 11대, 13대, 15대 총리 역임 |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 공가 | 1849~1940 | 1912년 12월 21일 |
마지막 원로[1] 12대, 14대 총리 역임 |
이들 중 총리 역임 경력이 있는 6명에다 오쿠마 시게노부까지 해서 7명이 1대부터 15대까지의 총리직을 돌려먹기 했다. 추밀원 의장에 군 원수도 모두 이들이 차지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탄생년도가 모두 조선 헌종의 재위시기이다.
4. 역사
4.1. 1890년대
처음에는 '원훈(元勲)' 이라고 불렸다. 그 시작은 이토 히로부미가 추밀원 의장직을 사임하자(1889년 10월) 메이지 천황이 "추밀원 의장 자리를 사임하더라도 짐의 곁을 떠나지 말 것이며 국가 유사시에는 짐의 자문에 응답하여 국가의 대사를 도와야 할지니라"고 당부한 데서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구로다 기요타카가 총리직을 사임하자 둘을 동시에 불러 원훈 대우의 조칙을 내렸다. 이것이 원로의 시작이다.그러나 출신에서 알 수 있듯 초기 일본 정부를 주름잡던 사쓰마, 조슈의 두 번벌에서 서로 세력균형을 잡기 위해 부득이하게 충원된 인물들이 많아 제각기 능력은 있을지언정 정치가로써의 역량은 부족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 두 사람이 원로를 주도했다. 이토 사후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그 세력을 이어받아 원로를 주도한다.
초대부터 3대 내각까지는 이들 원로가 고위 관료직을 직접 맡아 중심이 되어 일을 처리했다. 즉 이때까지는 내각 안에서 원로들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때를 1차 원훈내각 시기라 한다. 하지만 4대 마쓰카타부터는 원훈회의가 내각 위에서 국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상급기관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들은 후임 총리대신 인선에 관행적으로 참여하여 천황이 자문하면 이들 원훈이 합의하여 총리대신을 천거하고, 궁극적으로 천황이 인준하는 사실상의 일본 내각총리대신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마쓰카타 내각이 총사퇴했을 당시 일본 정계에서는 정부와 야당인 민당이 예산안을 둘러싸고 막 결성된 의회 내에서 충돌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1차 마쓰카타 내각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사퇴를 했었다. 거기다 청일전쟁까지 눈 앞에 다가오자 당시 원훈들을 주도하던 이토 히로부미는 원훈 및 원훈급 거물들의 힘으로 의회 저것들을 눌러버리자는 결심을 하고 불러낼 수 있는 인물들은 싹 다 불러내서 2차 원훈내각을 조직한다.(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 말 그대로 번벌관료들의 세력 과시를 한 것이다. 이후 청일전쟁을 승리하고, 을미사변을 일으키는 등 대외 침략행위를 진두지휘한 후 1896년 다시 사퇴, 2차 마쓰카타 내각을 성립시킨다. 이후 미쓰가타 내각이 사퇴하자 다시 3차 이토 내각이 나타나는 등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원훈들끼리 내각을 돌려먹기를 한다.
원훈들끼리 다해먹느라 의회가 형식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자, 제국의회 내의 양대 정당이었던 자유당과 진보당은 원훈들에 대항하여 오쿠마 시게노부 아래에서 합당, 단일 야당인 헌정당을 성립시켰고 이토 히로부미는 이에 원훈 내의 반대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장을 무시하고 오쿠마를 차기 수상으로 추천, 1차 오쿠마 내각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결국 반 년도 못 가 붕괴하였다.
최초의 정당내각 시도였던 오쿠마 내각이 붕괴하자 당시 일본 신문들은 <원로와 고문관> 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어 그 실상을 공개하였다. 이때부터 원훈과 원로라는 호칭이 병용되기 시작하고, 후에는 원로로 굳어진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외무성 기밀문서의 복사물이 원로들에게 송달되는 관행 등이 나타났고, 중요 국책의 수립에 공식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4.2. 1900년대
그러나 원로들 내부에서도 문관인 이토계와 무관인 야마가타계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2] 또한 원로들 자신도 노쇠하고 있었기에 1세대 원로라 할 수 있는 초기의 원로는 갈수록 세력이 쇠퇴해 갔다. 이에 정치상의 경력을 쌓아가면서 세력을 신장시킨 2세대 정치인들이 부상하자, 가쓰라 다로와 사이온지 긴모치와 같은, 정당과 번벌 관료집단 사이에서 잘 조정할 수 있는 인물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1901년 1차 가쓰라 내각의 성립 과정은 이토파에 대한 야마가타파의 우위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즉 야마가타 야리토모는 원로회의 내에서 수상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친구이자 머리 굵은 이노우에 가오루 대신 같은 군인이었던 가쓰라 다로를 밀었고, 성공한 것이다. 물론 문관인 이토가 반대한 인물이었기에 1차 내각은 영 허술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수상이다. 1차 가쓰라 내각은 원로회의에서 모든 걸 결정하다시피 하는 판이라 어쩌면 그 허술해빠진 내각은 별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1차 가쓰라 내각은 말 그대로 내각 위에 원로회의가 현실화되었다. 1차 영일동맹? 원로회의에서 먼저 정하고, 이후 내각과 함께 심의해 결정한다. 러시아와의 협상? 원로들이 지지해서 수행한다. 러일전쟁 준비? 사실상 원로들이 주도해서 준비한다. 러일전쟁 개전? 원로들이 주체가 된 각료회의에서 결정했다. 러일전쟁 지휘? 현지 최고사령관도, 후방 군 지휘본부도 모두 원로가 맡는 판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러일전쟁 지도는 말 그대로 원로회의가 전담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 의장으로서 천황을 보필했고, 현지에서 군을 총지휘한 것도 원로인 오야마 이와오였다. 야마가타 야리토모는 만주군 총사령관직을 노렸다가 같은 원로인 오야마 이와오에게 밀린 다음에는 참모총장이 돼서 후방에서 군을 지휘했다. 이노우에 마쓰가타는 전문이던 재정 관리에 전념한다. 즉 자기가 전문인 분야에 달려가서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리고 포츠머스 회담에서 배상금 못받아도 되니까 협상을 타결지으라 한 것도 원로들의 결정이었다. 정부와 군부, 의회간 통합 조정 역할도 맡았다. 실제로 근대 일본이 수행한 전쟁 중 러일전쟁만큼 원활하게 수행된 전쟁은 없다. 물론 현장에서는 거한 삽질이 종종 나왔지만.
그러나 러일전쟁 직후 가쓰라 다로는 원로회의 없이 사이온지 긴모치를 차기 총리로 추천한다. 물론 이것도 원로들의 동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체 회의 없이 이를 결정한 일은 원로들의 세력이 후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때도 아직 원로들의 권력은 강한 편이라, 러일전쟁 직후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 관동총독부를 신설해 만주 침략을 시도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5월 22일 소집된 협의회에서 " 군부는 만주에서 일본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만주는 결코 우리 일본의 영토가 아닌 순수한 청나라의 일부이다. 영토 아닌 장소에서 우리나라의 주권 행사가 이루어질 도리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군정 기관인 관동총독부를 관동도독부로 격하시키기도 했다.
4.3. 1910년대
어쨌든 이후 가쓰라 다로와 사이온지 긴모치가 총리직을 돌려먹기하는 케이엔(桂園) 시대(1901년 ~ 1913년)가 들어섰고, 타협 조정에 능숙한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사망하면서 야마가타의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전체 원로진을 주도하자 원로들의 세력은 갈수록 감소하였다. 특히 원로들이 가쓰라 다로를 두 번이나 더 추천하자 아니, 저 원로란 작자들은 왜 가쓰라만 추천함? 이거 순 파벌 정치 아니냐?! 하는 불만이 폭발,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작을 알린다. 거기다 당시 원로회의를 주도하던 야마가타는 자기 파벌세력을 가쓰라에게 홀라당 다 빼앗기는 일까지 당해 원로의 세력은 급격히 약해진다. 그런 가쓰라 다로도 3차 내각 붕괴 후 원로의 일원으로 임명되지만 몇개월 만에 사망해 버리기도 했고...제1차 세계 대전(1914년 ~ 1918년)은 이러한 약해져 가는 원로들에겐 세력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러일전쟁과는 달리 내각과 원로들은 몇번이나 충돌했고, 결국 야마가타는 분노를 폭발시켜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1914년 ~ 1916년)을 박살내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1916년 ~ 1918년)을 세운다.
4.4. 1920년대 이후
데라우치 내각 성립 후 야마가타는 더더욱 노쇠해졌고 그가 주도하는 원로들의 힘도 약해졌다. 거기다 1922년 그런 야마가타마저 죽고 나니 남은 원로라고는 마쓰카타 마사요시와 사이온지 긴모치 정도였고, 1924년 마쓰카타 마사요시도 죽자 원로는 사이온지 긴모치 혼자 남게 된다. 이에 원로를 충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르내리게 된다. 그러나 사이온지 긴모치는 이제 원로라는 건 필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후임 원로 추천을 거부한다.다만 이때까지는 그나마 깨인 인물이라는 사이온지도 정당정치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헌정 순리론이니 헌정 정도론이니 하지만 어느 책에 쓰여 있는지 가까운 시일 안에 학자를 불러 물어봐야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때문에 하라 다카시와 다카하시 고레키요 이후 3대에 걸처 '초연내각', 즉 정당에서 초연한 내각을 추천하다가 2차 호헌운동에 직면해 다시 한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사이온지 긴모치는 정당정치를 인정하고 선거로 다수당이 된 정당의 총재를 총리로 추천하는 등 헌정의 상도(憲政の常道)라 일컬어지는 이 시기 일본 정치의 후견인적 역할을 톡톡히 한다. 또한 황고둔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일본 총리인 다나카 기이치를 압박, 책임자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요구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나카가 일본 제국 육군의 압박에 못이겨 허위보고를 올리자 히로히토 천황에게 이를 알려 다나카 총리의 사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다음 내각인 하마구치 오사치 시절에도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참여해 해군 강경파의 주장을 억누르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하마구치 총리가 런던 조약에 불만을 품은 자들에 의해 재임 중 피격당하고 1년간 끙끙 앓다가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제25대 총리를 지낸 와카쓰키 레이지로를 다시 내세웠고, 와카쓰키의 후임자에는 그동안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이누카이 쓰요시를 총리로 세웠다. 특히 이누카이 쓰요시는 그 직전까지 원로 폐지론의 선봉장이었는데도 그를 세웠고, 군부를 억누르는 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결국 이누카이 총리마저 1932년 5.15 사건으로 해군 장교들에 의해 저택에서 피습, 암살당하자 사이온지 긴모치는 더 이상 총리를 혼자 추천하는 건 안되겠구나 생각하고 내대신, 중신들과 협의하여 총리를 추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군부는 이미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사이온지 혼자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이온지 긴모치는 당시의 정세에 대해 "오늘날 문관이 폭력단을 두려워하고 무관이 돈벌이에 급급한 세상이 되었다"는 탄식을 남겼다고 한다. 거기다 그에게 쏟아지는 군부 파시즘의 중압이 갈수록 격해지자 그는 차라리 원로를 때려치고 다시 정치에 뛰어들어 직접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였다고 한다. 그가 참여해 창설하는데 일익을 보탰던 국제연맹에서 일본이 사퇴하는 것을 포함해 갈수록 폭주하는 일본의 모습에 개탄을 금치 못하던 그는 히라누마 기이치로가 추밀원 의장이 되는 건 절대 안된다는 입장을 표방하여 하다못해 천황 근처만이라도 파시즘 사상의 유입을 억제하려 시도했고, 이에 일본 군부 강경파에서는 원로인 사이온지마저도 암살 대상에 올려 1936년 2.26 사건 때 피습을 시도하기도 했다. 해군 장교들에 의해 현직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가 암살당한 1932년의 5.15 사건과 달리 1936년의 2.26 사건 때는 육군 장교들에 의해 전직 총리들인 대장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가 암살당했다.
이에 마지막 수단으로 1937년 그는 자신이 애써 훈육한 고노에 후미마로를 총리로 추천한다. 총리 취임 전까지 고노에는 군부의 폭거를 견제할 수 있는 상식인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노에는 총리 자리에 오르자마자 2.26 사건의 주동자들을 석방하려는 시도를 시작으로 군부와 결탁하는 모습을 보여 사이온지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게 된다.
결국 마지막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가 일본 제국 군부의 폭주를 탄식하며 1940년 사망하는 것을 끝으로 원로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제 폭주를 막을 사람이 사라진 군부는 바로 다음 해인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5. 평가
일본의 '원로'는 매우 기이한 제도이다. 의회제가 아니라 천황제를 규정한 제국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비공식적인 조직이며, 이 때문에 두 번의 호헌운동에서 직접적인 폐지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국민의 선거와 법률에 의거하여 권한을 부여받은 의회나 정부 관료가 아닌 일개 개인들이 국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부터 의회제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행정부와 의회가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인사에게 자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견을 구하는 것일 뿐이며, 그들의 권고를 통해서 지나친 대립을 완화해 건설적인 토론을 이끌어내는 정도로 끝나는 게 정상이다. 사회 인사들의 조언이 법적인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로 정치는 당시 일본의 유사 입헌주의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어쨌든, 이들은 메이지 유신 당시 젊은 세대였던 유신의 주역들로 ' 구 체제를 타파하고 신 체제를 창조한 세대'라는 상징성과 권위를 통해[3] 태생적인 폭주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4] 일본 군부를 억제하는 고삐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번벌 막료들과 정치를 적절하게 조율하고 바람직한 길로 이끌어 나가는 집단지도체제를 취해 그럭저럭 일본을 잘 이끌어 나간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이들이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의 일본 군부는 그럭저럭 정부의 통제 하에서 머무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에 착안하여 쇼와 초기에는 사이온지가 '준원로'들을 모아 중신회의를 만들어 집단지도체제를 마련하여 군부 통제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마저 실패하게 되면서 군부는 완전히 통제받지 않는 폭주기관차가 되어 일본 제국을 패망의 길로 이끌게 된다.
여담으로, 1차, 2차 호헌운동이 이들을 타겟으로 삼아 일어났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당대에는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이온지 긴모치가 군부의 폭주를 억제하려고 노력한 덕에 현재의 평가는 제법 나쁘지 않은 편이다. 사이온지가 아니었으면 번벌 관료 흑막 집단 정도의 이미지로 남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화인민공화국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었다. 마오쩌둥 이후 덩샤오핑 시대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8인 원로의 위치가 일본의 원로와 비슷했다. 이들은 최고지도자 직함이 없으면서도 정치적 실세로서 중국을 사실상 지배했다. 특히 덩샤오핑은 평당원 상태에서도 남순강화를 추진해 중국을 뒤엎었다.
[1]
원로 중 가장 마지막으로 태어났고, 가장 마지막으로 원로 칭호를 수여받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죽었다. 여러 의미로 마지막 원로라고 할 수 있다.
[2]
문관과 무관이란 분류는 사실 정확하지 않고 두 사람 모두 조슈 번의
사무라이 출신이며 이토는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시스템을 중요시하는 반면 야마가타는
일본제국 육군의 창설자로서 비교적 강경 권위적인 느낌이 강해서 서로 성향이 다소 달랐다고 평가된다.
[3]
원로 중 가장 늦게 태어난 사이온지가 1849년생이었다. 즉,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19살의 청년이었던 셈이다.
[4]
제국 헌법 제11조는 '天皇ハ陸海軍ヲ統帥ス'(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는 조항이다.
제국 헌법이 규정하는 육군과 해군의 위치는 총리대신이나 제국의회의 아래가 아닌 천황 직속이었다. 즉, 처음부터 문민 통제의 명분이 없었던 군부는 헌법 제정 시기부터 폭주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일례로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서 정부 대표가 해군 삭감에 합의하자 군부가 통수권 위반이라고 항의하고 당시 총리 권한대행을 맡고 있었던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이 통수권 간범으로 비난받은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