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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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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246><colcolor=#fff>
Sicilia 시칠리아 | Regione Sicil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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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 |||
국가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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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남부 | ||
중심 도시 | 팔레르모 | ||
시간대 | UTC+1 | ||
주지사 |
레나토 시파니(Renato Schifani) |
||
인문 환경 | |||
인구 | 5,030,000명 | ||
인구밀도 | 201명/㎢ | ||
면적 | 25,711㎢ | ||
HDI | 0.836 |
[clearfix]
1. 개요
|
시칠리아 소개 영상 |
- 이탈리아어/ 시칠리아어: Sicilia (시칠리아)
- 라틴어: Sicilia (시킬리아)
- 영어: Sicily (시실리)
- 아랍어: صِقِلِّيَة (시킬리야)
- 그리스어: Σικελία (시켈리아)
이탈리아의 섬이자 레조네로 지중해 최대의 섬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장화라고 생각하면, 발 끝 부분에 위치한 섬이다.[1] 지중해 최대의 섬이다. 인구는 503만 명, 면적은 2만 5711 ㎢로 남한의 약 4분의 1이며 중심 도시는 팔레르모이다. 이탈리아 본토로부터 불과 3.2 km밖에 떨어지지 않아서 다리를 건설할 법도 하지만 추진은 지지부진하다. 해협의 폭은 좁지만 수심이 100~200 m 가량으로 깊어서 다리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주탑 간 간격이 해협의 폭과 맞먹는 현수교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2] 게다가 해당 지역에 지진활동이 빈번해 내진설계를 잘 해야 하기 때문에 건설비용이 아주 많이 들고, 해역의 조류가 빠르고 복잡하다는 어려움이 있어 건설이 쉽지 않다.
실제로 2006년 건설비까지 책정되었던 '메시나해협대교'가 지어질 뻔했으나, 위와 같은 문제들로 인해 두 차례나 취소되어 2013년 이후부터 쭉 무산된 상태였다가 2023년에 이르러서야 건설 법안이 통과되면서 다시 착공을 추진 중이다. 당초 설계안에 따르면 주경간 거리만 무려 3.3km에 주탑높이가 382m에 이르는 거대한 현수교였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중앙부에 위치한데다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있어서 예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손꼽혔고, 지배세력이 숱하게 바뀌어온 지역이다. 이런 연유로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시칠리아만의 특색이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시칠리아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고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산인 에트나 화산이 있다. 에트나 화산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한때 엄청난 유황을 생산하며 이를 노린 영국이 전쟁을 일으킨 적도 있다.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영화, 요리,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들, 관광지 및 휴양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농업과 관광업을 제외한 나머지 산업의 발달이 미약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에서는 경제적으로는 낙후된 곳이다. 2018년 기준 1인당 GDP 1만 7800유로인데, 3만 9700유로나 되는 롬바르디아의 절반, 한국의 2/3일 정도이다.
다만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가져 연중 온난하고 강수량은 고른데다 화산 지형 덕분에 땅까지 비옥한 시칠리아는 농사가 매우 잘 되어 시칠리아의 농산물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편이다. 고대부터 지중해 세계를 먹여살려온 밀은 물론, 속이 빨간 블러드오렌지(Blood Orange), 피스타치오, 레몬, 올리브, 토마토, 아몬드, 포도 등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웬만한 식재료는 모두 잘 난다. 이런 덕분에 시칠리아 요리가 이탈리아 요리의 뿌리이자 정수로 꼽힌다.
남쪽에는 몰타 섬이 있으며, 시칠리아 제2의 도시 카타니아에서 배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몰타와 함께 난민들이 리비아나 튀니지 등지에서 배를 타고 오는 관문으로 알려졌다.
2. 역사
문화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역사를 자랑한다. 청동기 시대에 시크리인, 시카니인, 엘리미인이 거주, 주석(錫)무역의 중계지로 그리스의 미케네 문화와도 접촉하며 고유의 문명을 지녔다. 심지어 에트루리아나 로마 제국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시칠리아인들은 자부심이 강하다.
2.1. 고대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인이 도래한 뒤, 카르타고인의 모튜에 건설에 따라 그리스화했다. 낙소스, 쉬라쿠사이(현재 시라쿠사: Siracusa), 게라(현재 젤라: Gela), 메가라 히부라이아 등 그리스 식민도시의 건설에 따라 선주 민족은 내륙으로 밀리고 해안 지역은 완전히 그리스화했다.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군을 마그나 그라키아(Magna Graecia)라 부른다.[3]기원전 6세기부터는 세리누스(현재 세리눈테: Selinunte), 아크라가스(현재 아그리젠토: Agrigento), 세게스타(현재 세제스타: Segesta) 등이 건설되어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일부가 되었다. 미술도 그리스 본토와 이오니아 지방과는 달리 부드러운 요소를 지니게 되어 기원전 4세기 후반 이후 첸투리베 등에서 독특한 도기도 만들었다. 시칠리아 서부는 카르타고, 동부는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할거한 상태로 이들 사이에 근 200년에 걸쳐 시칠리아 전쟁이 7차례 벌어졌으며, 이는 피로스 전쟁을 거쳐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2)로 이어진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고대 로마의 속주가 되어 이후 로마의 곡창으로 번영했다. 고대 말기에는 피아차 알메리나메(Piazza Armerina)에 대규모 모자이크 장식의 별장 등이 건설되었다. 또한 대규모 농장이 건설되어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되어 공화정과 제정 시대에는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함께 로마의 빵바구니(Breadbasket of Rome)으로 불리며 막대한 식량을 공급했다. 당시에는 시켈리아로 불렸고, 시라쿠사, 메사나 등 폴리스가 있었다.
2.2. 중세
[4]중세로 들어서며 시칠리아에는 크게 4개 민족이 거쳐간다. (아랍, 그리스, 게르만, 라틴)
로마가 동서로 갈라지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군이 반달 왕국을 멸망시킨 데에 이어 이탈리아까지 병탄하면서 다시 로마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도 사산조와의 전쟁, 페스트, 그리고 갑자기 출현한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쇠퇴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차차 물러나게 되는데 시칠리아도 잃게 되어 이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과 이탈리아의 기독교 세력 사이에서 수시로 점령 세력이 바뀌는 혼란스러운 역사를 겪게 되었다. (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9세기에 걸쳐 시칠리아에는 아글라브 왕조에 의한 시칠리아 토후국이란 이슬람 국가가 세워졌고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중흥기를 맞은 동로마 제국이 11세기 초에 시칠리아를 다시 정복하려 하였는데, 이때 북방에서 니타난 신흥 세력이 바로 노르만족. 로베르 기스카르와 루지에로 1세의 지휘아래, 이들은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서 패권을 놓고 싸우던 동로마, 이슬람, 독일, 교황 세력 모두를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 ~ 시칠리아에 노르만계 왕조인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 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노르만인들은 교황과 동맹하였기에 시칠리아 역시 기존의 동방 정교나 이슬람 대신 가톨릭이 주요 종교가 되었다. 시칠리아 왕위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우 로제 드 오트빌이 이어받았다.
이후 시칠리아 왕국은 남이탈리아를 정복해 세력을 넓혀 근대까지 왕국이 존속하게 되었다. 이른바 양 시칠리아 왕국. 중세왕국의 특징에 따라 단일혈통 왕국이 아닌 결혼과 상속을 통해 계속해서 바뀌게 되었다. 왕국을 성립시키고 발전시킨건 노르만계( 오트빌 왕조)지만 이후 이 계통이 단절되면서 쿠스탄차의 사위였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물려받았다.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치세 동안 시칠리아에서는 “길게 기른 수염에 옷자락을 휘날리는 바그다드 출신의 천문학자들과 아랍어 저술을 번역하며 후한 급료를 받는 유대인들, 사라센의 무용수와 무희들, 축제 때면 은나팔을 불던 무어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 자신과 그의 아들 만프레디는 열렬한 아랍 문화 애호가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슬람 철학과 학문에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많은 중상을 받았다. 비난에 아랑곳 않던 이들의 후원 하에 아랍의 학문은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들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원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결국 교황과 반목했고[5] 교황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원했던 프랑스와 결탁해 당시 카페 왕조의 왕인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을 초빙해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물리치고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하였다. 앙주의 샤를은 카를루 1세로 칭한 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고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본인이 로마 황제가 되려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원정과 원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시칠리아에 물렸고 이는 많은 반감을 사게 되어, 결국 시칠리아의 만종(1282)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카페앙주 왕조는 시칠리아에서 쫒겨났고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마지막 왕인 만프레드의 사위인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반란군의 환영을 받고 시칠리아 국왕이 되어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를 통치하는 시칠리아 왕국과 이탈리아반도 남부를 통치하는 카페앙주 왕조의 나폴리 왕국으로 갈라졌다. 이에 반대한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에 성무금지 조치를 내리고, 페드로 3세를 파문했다.
페드로 3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하이메 2세(1285~1295)는 발렌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아라곤 왕국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사르데냐-코르시카 왕국을 아라곤 연합 왕국에 추가시켰으나, 이는 1세기도 가지못했다. 프랑스와 또 다시 전쟁을 벌여 이번에는 승리해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프랑스, 나폴리, 교황은 서로 동맹을 맺고 아라곤 왕 페드로 3세를 파문한 뒤 맞서 싸웠지만 아라곤 왕국의 군대는 그들을 모조리 격파하면서 위엄을 떨쳤다.
이후 아라곤 왕국은 카탈루냐 용병들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까지 진출해 아테네 공국(1311) #과 네오파트라이 공국(1318) #을 접수했다. 한때는 몰타와 사르데냐 섬도 잠깐이나마 지배했고 1442년에는 앙주 가문을 몰아내고 남부 이탈리아를 모조리 관할하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까지 차지하면서 거대한 지중해 제국을 건설했다. 오늘날 스페인 국왕의 기나긴 공식 타이틀에 아테네 및 네오파트리아의 공작이 들어 있는데 이 때로부터의 흔적으로서, 당시의 아라곤 왕국이 현대 스페인으로 국가승계되면서 타이틀까지 덩달아 승계된 것이다. 물론 무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에 대한 영유권을 오늘날 진지하게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동로마 통치 시대인 827년에서 아랍 통치 시대의 요소는 다음 노르만 왕조 시대(1071~1266)의 미술에 계승되어 팔레르모의 궁정예배당(카펠라 팔라티나:Cappella Palatina), 몬레알레 대성당(Cattedrale di Monreale), 체팔루 대성당(Chiesa di Cefalù)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미술에는 동로마적 요소와 함께 이슬람 파티마 조의 미술 전통이 존속되었다. 견직물은 아랍인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제조가 시작되고 다시 유럽으로 퍼져갔다. 남이탈리아와 함께 상아 세공이 발달하여 일군의 채화장식으로 된 상아상자는 12~13세기의 시칠리아 제로 되어 있다. 13세기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는 동서문화의 융합을 꾀하여 시칠리아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시대로 문화적으로 활발하였으나 섬 내에서 당시의 미술 유물은 적다.
1442년부터 다시 나폴리 왕국과 함께 아라곤 왕국 국왕 관할 하로 넘어가면서 남이탈리아와 문화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15세기에 활약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는 시칠리아가 탄생시킨 가장 유명한 화가다. 바로크 시대의 미술은 스페인 문화의 영향이 강하고 바로크 도시로서의 노토(Noto)[6]는 당시의 양상을 가장 잘 전해주고 있다. 시칠리아의 미술은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항상 외래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스페인 식민 당국은 유럽 각 지역에서 끝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던 스페인 본국의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시칠리아 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높은 세금을 거두어 본국으로 보냈고, 그런 이유로 시칠리아 주민들은 스페인 식민 당국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1647년 8월 12일, 흉작이 발생하여 주민들의 주식인 빵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식민 당국이 주민들을 구휼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스페인 식민 당국에 맞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
2.3. 근현대
2.4. 제2차 세계 대전 시칠리아 전역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영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전투.당초 목적은 한참 소련과 혈전을 벌이고 있던 독일에게 이른바 '제2 전선'을 강요함으로써 독일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소련의 부담을 덜기 위한 전투였다. 연합군은 독일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마침내 시칠리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도 상륙하게 됨으로써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시칠리아 전투 문서 참조.
2.5. 정리
시칠리아는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게르만, 동로마, 아랍, 노르만, 스페인 등 다양한 외세의 영향을 받아 다채로운 역사와 풍요로운 인문자산을 가지게 되었다. 시칠리아의 역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 폴리스기 (B.C 8세기)
- 포에니 전쟁 (1~3차 B.C264~B.C146)
- 로마 제국 (기원전 242 ~ 280)
- 게르만 대이동 (3세기 ~ 6세기)
- 동로마 제국 (550 ~ 902)
- 이슬람의 시칠리아 정복 (827 ~ 902)
- 시칠리아 토후국 (831 ~ 1091)
- 동로마의 시칠리아 원정 (1038 ~ 1042)
- 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1061 ~ 1091)
- 시칠리아 백국 (1071 ~ 1130)
- 시칠리아 왕국 성립
- 노르만 왕조 (1130 ~ 1194)
- 호엔슈타우펜 왕조 (1194 ~ 1266)
- 앙주 왕조 (1266 ~ 1285)
- 시칠리아 만종 사건 (1282)
- 스페인 왕조
- 아라곤 왕국 (1282 ~ 1516)
- 압스부르고 왕조 (1516 ~ 1713)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사보이아 공국(1713 ~ 1720), 오스트리아(1720 ~1734)
- 보르본 왕조 (1713 ~ 1816)
-
양시칠리아 왕국 (1816 ~ 1860)
- 이탈리아 왕국 (1861 ~ 1946)
- 이탈리아 공화국 (1946 ~ )
3. 문화
시네마 천국, 말레나 등을 연출한 이탈리아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 속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상 시칠리아 올로케이션. < 말레나>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걸어가던 광장은 시라쿠사의 광장이고, < 시네마 천국>의 마을은 팔레르모 남쪽의 작은 시골마을 팔라조 아드리아노(Palazzo Adriano) 가 메인 촬영 장소이다. 또한 마을 중심에 작지만 "시네마천국 박물관"도 있다. 또 영화를 야외 상영하는 등의 바닷가 장면은 대부분 팔레르모 동쪽의 해안 마을 체팔루(Cefalu)라는 곳에서 촬영했다.시칠리아에서는 이탈리아어외에도 시칠리아어라는 독자적인 언어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시칠리아 아랍어라는 아랍어 방언이 쓰인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소멸되었다.
4. 건축
1693년의 대지진으로 시칠리아의 동쪽의 도시와 마을들이 파괴되자 당대의 유명 건축가들이 새로운 도시계획안을 들고 시칠리아를 재건하는데, 이를 "시칠리아 바로크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카타니아(Catania), 라구사(Ragusa), 노토(Noto), 모디카(Modica), 시클리(Scicli), 칼타지로네(Caltagirone) 등의 도시/마을들이 그 영향을 받아 재건되었고 그 특유의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하며 웅장한 건축양식으로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이 바로크 타운들은 대부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5. 마피아
현대에는 마피아 코사 노스트라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다. 외국인이 관광가서 마피아와 자주 마주칠수는 있어도 범죄에 휘말리거나,[7] 선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은 안심해도 된다. 이미 시칠리아에서 마피아는 합법적인 지위(혹은 그렇게 보이는 지위)에서 각종 행정과 이권 사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대놓고 강력범죄를 저지를 이유가 없다. 공권력을 집어삼켰으니 관광객 주머니 털기 같은 좀도둑질을 할 필요가 없는 셈. 정부보다 마피아를 더 믿는 경우도 있다지만, 팔레르모 공항은 마피아와 맞서 싸운 두 검사를 기리기 위해 개칭[8]한 것을 보면 무조건 마피아를 두둔하는 분위기는 아닌 셈이다. 시칠리아 출신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서 역시 마피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한때 굉장히 문제가 심각했으나 현재는 정부에서 단속에 나서면서 다소 잠잠한 편.6. 분리주의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지방들과 더불어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주세페 가리발디와 그가 이끄는 붉은 셔츠단에 의해 통일 이탈리아에 편입되었다. 이탈리아 본토와는 이질적인 지역이라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이탈리아 중앙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아서 다시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려는 분리주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으나 쥐트티롤 등에 비하면 크지는 않은 편이다.7. 주요도시 및 관광지
이탈리아 본토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 팔레르모나 카타니아에 도착하게 된다. 기차를 타고 온다면 메시나에 도착하게 된다. 기차를 타고 올 때는 기차를 통째로 연락선에 싣고 메시나 해협을 건넌다. 매우 이색적인 경험이지만, 야간열차로 오는 길이 매우 길고 고된 반면, 비행기 값은 그리 비싸지 않으므로 가능하면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을 더 추천한다. #메시나는 1908년 대지진때 역사적 도시 중심지가 한번 작살나고, 2차대전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다시 한번 싸그리 부서진 이후 이탈리아 정부의 도시 계획 실험 정책에 따라 역사적 구시가지를 복원하는 대신 그대로 엎어버리고 이탈리아 기준에선 오히려 더 이상한 구 역사도시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고층빌딩 중심의 딱히 지역만의 유명한 문화유산이 없는 근대 도시로 재개발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이탈리아, 시칠리아 사람들 본인들도 메시나를 두고 '기억이 없는 도시'라 씁쓸하게 부르곤 하며, 외부 관광객들도 대중교통으로 거쳐가는 도시일 뿐이지 자체적으론 거의 관광하러 갈 일이 없다. 메시나의 도시개발사 자체도 사실 근세 스페인 통치기때 이미 토착 시칠리아 귀족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팔레르모를 피해 일부로 부왕령의 중심 행정 도시로 개발되었던 도시기 때문에 외세의 지배아래 성장했다는 껄끄러운 인식도 박살난 역사도시를 그냥 갈아 엎어버리는데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
팔레르모: 시칠리아의 중심 도시이자 최대도시. 시칠리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도시 중 하나. 유서 깊은 도시이고, 노르만 궁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들이 많으며, 구도심은 그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매우 매력적이다.
팔레르모 대성당
팔레르모 근처 휴양지 몬델로
팔레르모 구도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콰트로 칸티. 4거리의 각 코너를 모두 조각상으로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 몬레알레 대성당: 팔레르모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에 대주교가 있던 대성당이 있다. 노르만 양식과 아랍 양식이 뒤섞여 매우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트라파니: 시칠리아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이다. 휴양지이자 고대에서부터 이어지는 시칠리아식 염전으로 유명하다.
트라파니 구도심
트라파니의 염전
* 카타니아: 시칠리아 제2의 도시이다. 도시에서는 기차 혹은 자동차로 약 1-2시간 거리에 있는 에트나 화산이 어디서나 보이는데, 지형이 화산지형이라 도시 건물들이 대부분 어두운 잿빛에 가까운 회색으로 된 화산석으로 건설되어 매우 이색적이다. 또한 콜레세움 등 로마 시대 유물도 곳곳에 숨어있다. 매년 2월 5일[9]에는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녀 아가타(Santa Agatha)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는데 이 시기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린다. 오페라 작곡가 벨리니가 태어난 곳으로 벨리니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카타니아 대성당과 광장. 구도심의 중심이다.
* 에트나 화산: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화산. 현재도 매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활화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날씨가 안 좋으면 분화구를 볼 수 없어 운도 따라줘야 한다. 화산석만의 특성으로 인해 에트나 산에 올라 뛰어보면 점프가 훨씬 잘 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타오르미나: 메시나와 카타니아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때부터 겨울 휴양지로 알려진 곳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유적과 로마 시대의 극장, 저수지, 궁전 등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뷰로 세계적인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식 극장에서 '테아트로 그레코'가 가장 유명하다.
-
시라쿠사: 고대 그리스 시대 항구도시이자 대학도시로 유명했던 곳이며, 말레나의 촬영지로도 알려져있다. 카타니아와 대비되는 새하얀 대리석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육지 쪽에는 그리스 시대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고고학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구도심인 오르티지아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눈물 흘리는
성모상이 이곳에서 발견되어 이를 기리는 성당이 건설되기도 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시라쿠사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미국
뉴욕주 업스테이트 지방의 중심 도시 중 하나인
시라큐스의 어원이 되는 도시이다.[10]
시라쿠사의 구도심인 오르티지아의 전경.
시라쿠사 대성당 광장. 영화 속에서 말레나가 지나다니던 광장.
- 노토: 사암으로 지어 노란 도시의 색채가 인상적이다. 구도심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라구사: 바로크타운의 정수. 언덕 위에 앉은 도시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아그리젠토: 그리스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아그리젠토 콘코르디아 신전
8. 하위 행정구역
Libero consorzio comunale
9. 요리
시칠리아 요리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방 세계에서는 시칠리아를 "하느님의 부엌"이라고 부를 정도다. 시칠리아는 그 복잡한 역사만큼이나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아랍, 노르만, 호엔슈타우펜, 스페인을 거쳐온 신세계 식재료 등의 다양한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특색있게 발전해왔고, 이를 다시 이탈리아반도에 전수하며 이탈리아 요리의 뿌리라고 불린다.파스타가 시작된 곳으로 특히 유명한데, 시칠리아인들은 한 해 평균 44kg의 파스타를 먹어 이탈리아인 평균의 1.5배, 미국인 평균의 9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파스타 사랑을 보여준다. 시칠리아 음식은 서민적인 느낌의 이탈리아 요리 중에서도 가장 서민적인 음식으로 유명한데, 싸고, 맛있기까지 하다.
그리스인들이 심은 올리브와 피스타치오는 물론, 중앙아시아에서 아랍을 거쳐 온 면이 시칠리아에서 파스타로 발전했고(10세기 경 추정), 아랍 세계에서 건너온 사프란과 신세계에서 건너온 토마토까지 이탈리아 요리를 상징하는 많은 식재료가 시칠리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오랜 세월 아랍 세력의 지배를 받아온 지라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쌀과 쿠스쿠스, 파넬레 등 아랍의 영향을 받은 식재료 또한 잘 사용하며 아랍을 기원으로 두는 마르지판과 젤라토의 원형인 샤베트도 유명하다.
게다가 시칠리아가 워낙 덥고 습한데다 고기를 먹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시칠리아 사람들은 동물성 단백질을 공급할 목적으로 치즈, 그것도 싸고 비교적 간편하게 구할 수 있는 리코타 치즈를 많이 먹어왔다. 그래서 웬만한 샐러드, 빵, 파스타에 리코타 치즈를 곁들이는 건 흔하고 카놀리와 카사타 같은 디저트에도 필수적으로 들어갈 정도이며 식사부터 디저트까지 다양한 음식에 사용되는 만큼 현지에서 먹는 리코타 치즈는 국내에서 먹는 것보다 더 진한 맛에 짜지 않다고 한다.
여기에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온난한데다 화산 지형으로 땅도 비옥하여 고대부터 지중해 세계를 먹여살려온 밀은 물론, 속이 빨간 블러드오렌지, 피스타치오, 레몬, 올리브, 토마토, 가지, 아몬드, 포도 등 농산물이 매우 풍부하고 그 질 또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칠리아 서부의 트라파니에서 생산된 소금은 유럽 최고 품질의 소금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한 섬이라 수산물 역시 풍부하여 정어리, 앤초비, 홍합, 지중해새치 등으로 만든 요리가 매우 유명하며 대부분 유럽에서 기피식품으로 통하는 문어와 오징어도 잘만 먹는다. 또한 카놀리와 시칠리아식 슬러시인 그라니타를 비롯한 달콤한 디저트류로도 아주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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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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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치니.
주먹밥 튀김이라 할 수 있는 음식으로 개당 2~2.5유로 정도로 저렴하다. 한두개 먹어도 매우 배부르고 세계인 누구에게나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이다. 속은 다양한데,
라구 소스와
모차렐라 치즈를 넣은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팔레르모 등 서쪽 지방에서는 공 모양에 더 가깝고, 카타니아를 비롯한 동쪽 지방에서는 좀 더 고깔 모양으로 만드는데, 카타니아의 아란치니가 알아준다. 특히 카타니아의 <사비아>가 유명하다. 사비아가 문 닫아도 바로 옆에 있는 가게에서 아란치니를 사먹어도 무방, 크게 떨어지지 않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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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놀리(단수: 카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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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타. 디저트로 유명한 시칠리아가 자랑하는 케이크. 팔레르모와 메시나 지역에서 주로 먹는다. 리코타 치즈, 크림, 설탕에 절인 과일이 들어가며 겉을 다양하게 꾸민다. 매우 달고 반죽은
파운드 케이크와 비슷하다.
10. 여담
이탈리아계 미국인들 중에 상당수가 시칠리아 지방 사람들의 후손이다[11]. 대표적으로 마틴 스콜세지의 증조부가 시칠리아 이민자다. 2차대전 도중에 미군이 시칠리아 섬에 주둔할때 꽤 많은 이탈리아계 미군 병사들이 혹시나 자신들의 먼 친척이 있나 알아보려고 시칠리아 섬을 돌아다녀 봤고, 꽤 많은 이탈리아계 미군 병사들이 본인들도 존재하는지 몰랐던 먼 친척들을 만났다고 한다.대부의 출연배우들 중 상당수가 시칠리아 사람들이다. 일단 주인공 알 파치노의 조부모가 시칠리아 콜레오네 사람들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리얼리티를 위해 시칠리아계 미국인(Sicilian Americans)들을 많이 출연시켰다고 한다.
내륙의 조그만 마을 코를레오네(Corleone)는 별로 볼 것 없는 인구 11000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유명한 마피아 두목들이 대거 나와서 특히 유명한 동네다. 루치아노 레지오, 살바토레 리이나 등등이 유명하다. 코를레오네는 영화 대부의 주인공들의 출신지로 설정 되기도 했다.
시칠리아 북부 해안 마을 "칸네토"(Canneto)는 악마가 출몰하는 마을로 미스터리 매니아들에게 유명하다. 2004년을 기점으로 마을 전체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 때문에 엑소시즘을 해야 한다느니 마을 전체에서 전선을 뜯어내야 한다느니 말들이 많다고 한다. 일단 현재까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전기 화재" 정도밖에는 알아내지 못한 듯. 위키피디아(영어)
많은 축구팀이 있는데 주도 팔레르모를 연고로 하는 팔레르모 FC와 카타니아를 연고로 하는 칼초 카타니아가 유명하다. 한때는 두 팀 모두 세리에 A에서 활약했지만 현재 카타니아는 세리에 C, 팔레르모는 세리에 B에서 활약 중이다.
이탈리아 본토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를 잇는 메시나 해협 대교 건설을 추진중이지만 막대한 공사비용과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사업 재개와 중지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다리로 짓는다. #
이 지역에 황새치 잡는 어부들의 시력이 매우 좋은 걸로 유명하다. 어선의 높은 마스트위에서 수면을 관찰하며 황새치를 찾는데 사람으로서 최상급의 시력을 가졌고 한 어부 집안은 6.0정도 된다고 한다.
2021년 폭염으로 인해 시칠리아섬 남동부의 도시 시리쿠사가 48.8도를 기록하면서 유럽 대륙 사상 최고 기온을 경신했다.
미국의 한 여성이 지중해 최대의 섬이자 이탈리아의 유명 휴양지 시칠리아에 화재로 전소된 집을 저렴하게 구매하고 이를 복원해 지역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여성은 시칠리아섬에서 화재로 타버린 집 3채를 불과 3.3달러(약 4400원)에 구매했다고 한다. #
영화 타임 이즈 업2의 배경이 되었다. 영화에서 에트나 화산의 분화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청동기 시대 바다 민족의 일파인 세켈레시가 고대 시칠리아인들이라고 추정된다. 게임 토탈 워 파라오에서 해당 가설을 채택했다.
11. 깃발의 의미
2000년 1월 4일부터 쓰이기 시작한 시칠리아의 깃발이다.
가운데 문양은 고대로부터 시칠리아가 써온 문양으로 그 자체로 시칠리아를 상징한다. 이 때문에 이 문양으로 만든 기념품을 시칠리아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양은 트리나크리아(Trinacria)라고 부르는데, 이는 시칠리아의 고대 명칭이기도 했다. 시칠리아의 삼각형 모양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가운데 세 개의 다리는 " 트리스켈리온 (Triskelion)"[12] 의 일종으로, 시칠리아 뿐만 아니라 독일 퓌센, 맨 섬등의 깃발에도 쓰이고 있다. 시칠리아 주기에서는 시칠리아의 삼각형 모양 을 뜻한다고도 하고, 혹은 중세 이슬람 지배기에 확립된 세 행정구역(Val di Manzara, Val di Noto, Val di Demone)을 나타낸다고 한다.이 행정구역은 시칠리아 섬이 다시 기독교국가들의 차지가 되고 나서도 유지되어 19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가운데 날개달린 얼굴은 메두사의 얼굴이고, 다리 사이로는 밀알이 배치되어 있다. 시칠리아의 풍족함을 의미한다.
배경의 붉은색과 노란색은 카페앙주 왕조에 대항해 처음으로 연합한 두 도시, 팔레르모와 코르레오네(Corleone)를 각각 상징한다.
시칠리아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시칠리아계 미국인 중에 선천적으로 다리 3개를 달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 이름은 프란체스코 렌티니(Francesco Frank Lentini, 1889-1966)로, 태어날 때 하반신에 두 다리 외에 다른 다리 한 짝이 오른쪽 엉덩이 측면에 나 있었다. 게다가 엉덩이에 난 다리의 무릎 부분에는 자라다 만 발이 조금 있었다.[13] 프란체스코는 언제나 주문제작한 전용 바지를 입어야 했다. 거동이 다소 불편했고 주위의 이상한 시선을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어느 서커스단이 눈여겨보고 영입하여 영입하여 각종 공연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1]
아이스 에이지 4 프롤로그 장면에서 스크랫이 내핵을 건드려 지구의 대륙이 분리되어서 현재의 대륙으로 될 때 유럽이 만들어지는 장면에서 이탈리아 반도가 시칠리아 섬을 차는 장면이 나왔다.
[2]
이렇게 만들면 현존 최장 현수교인
차나칼레 1915 대교의 경간인 2023 m를 한참 뛰어넘는 세계 최대 경간의 현수교가 된다. 현재의 기술로 불가능한 공사는 아니지만, 현대 토목공학에 있어서 엄청난 도전이고 당연히 막대한 건설비가 소요될 것이다.
[3]
그라이키아(Graecia), 그라이쿠스(Graecus)는 로마인들이 라틴어로 그리스와 그리스인을 부르는 명칭이었는데, 현재의 '그리스'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원래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라스라 일컬었다.
[4]
팔레르모 대성당 근처에 있는 포르타 누오바이다.
[5]
이탈리아가 통일되지 못하고 있던 큰 이유가 중부에
교황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6]
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이래로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이슬람 도시로 남아 저항했었다.
[7]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치안유지에 꽤나 노력하는 편이다. 관광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치안이 나쁘다는 소문이 돌면 관광객이 줄어들기 때문.
[8]
팔코네 보르셀리노 국제공항.
[9]
아가타 성녀의 축일이다.
[10]
풍요롭고 따뜻한 지중해의 비경으로 유명한 오리지널과는 대조적으로 신대륙의 카피 도시는 전형적인 업스테이트의 우중충하고 얼어 배는 추위에 미국에서 최악의 수질 오염으로 악명 높은 오논다가 호수가 바로 옆에 있는 등 전형적인 오염에 찌든, 쇠락한 공업 도시로 악명이 높다.
[11]
시칠리아가 이탈리아에서 가난한 지역인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부유한 나라인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탓이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에 가서도 한동안 자기네의 문화와 언어를 고집하여 미국 사회에서도 오랫동안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12]
나선형의 모양이 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상징을 뜻하며, 삼태극도 여기에 속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13]
의학적으로는 자라다 만 발까지 합쳐 다리가 총 네 개라고 인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