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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徐太志[훈음] | SEOTAIJI|ソ・テ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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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정현철(鄭鉉哲 / 鄭賢哲 #[3], Jeong Hyun-cheol #) |
출생 | 1972년 2월 21일 ([age(1972-02-21)]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온양 정씨 |
소속사 | 서태지컴퍼니[4] |
학력 |
서울재동국민학교 (졸업) 대동중학교 (졸업) 서울북공업고등학교 (중퇴) |
신체 | 173cm[5], 60kg[6], O형 |
직업 | 가수,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
데뷔 |
1989년
시나위 4집
Farewell to Love 1992년 3월 23일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난 알아요[7] |
장르 | 록 음악, 메탈, 팝 음악, 힙합, 댄스, 일렉트로닉 |
병역 | 전시근로역[8] |
가족 | |
친척 | |
별명 | |
MBTI | INTJ[25] |
서명 | [26] |
링크 |
파일:서태지 로고 화이트.png
서태지 아카이브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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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19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이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 가요의 판도를 바꾼 가수로, 덕분에 오늘날 K-POP의 시초격 가수이자 대한민국의 문화대통령이라 불리운다. 당시 새로운 문화를 갈망하던 10~2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이들을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이 영향력을 토대로 후술된 내용처럼 당시 가요계에 산재해 있던 부조리한 관습들에 저항해 이를 타파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2집 이후부터는 통일, 교육, 가출청소년 문제 등 사회적 메시지도 꽤 가사에 담으면서 당대 큰 화두를 남기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했지만, 서태지는 다시 컴백해 솔로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28]
2022년 3월 23일,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한지 30주년이 되었다.
2. 창법
뮤지션으로서는 한국대중음악계 역사를 통틀어서 역대급 반열로 꼽히는데 비해 보컬리스트 창법은 의외로 대중성과 거리가 있는 편이고,[29] 실제로 당대 출중한 보컬리스트였던 임재범, 이승철, 유현상, 신승훈, 김건모, 변진섭, 이승환, 김경호, 김종서, 박완규 등과 같은 창법을 선보이는 가수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태지의 노래에는 스크리밍, 샤우팅, 랩, 잔잔한 미성의 발라드 창법을 사용했으며, 가창적 기술력으로 귀를 사로잡는 비브라토가 극히 적거나 아예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보컬의 역량을 최대한 잘 살리고 표현해내는 노래를 좋아하고, 높게 평가하는 한국 대중의 기호와는 사실 거리가 먼 스타일이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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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93 마지막 축제) | 슬픈 아픔 (2000-2001 태지의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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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전쟁 (2009 ETPFEST) | Watch Out (2014-2015 Quiet Night Tour) |
하지만 서태지는 본인이 가진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기 위해 가사 한절 한절에 발음을 어떻게 할지 등을 깊게 연구했다. 그래서 서태지 음악에 빠지면 그 목소리에 질리지 않게 된다. 본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등을 잘 알고, 이를 잘 활용한다.
서태지의 곡을 들으면 보컬인 서태지의 목소리 이상으로 세션의 연주가 전면에 부각되는 동시에 보컬과 연주가 절묘한 밸런스로 어우러져 서로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보컬을 살리기 위해 연주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컬의 목소리도 악기의 하나'로서 다루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TAKE 시리즈린 서태지의 5집 Seo Tai Ji 앨범에서 '보컬이 악기의 하나'인 편곡 컨셉이 잘 드러난다.
또한, "이 밤이 깊어가지만", "영원", "너에게" 등의 곡에서 보여주는 부드러운 미성, " Come Back Home", "슬픈 아픔" 등의 곡에서 보여주는 반항하는 듯한 보컬, "탱크" 등의 곡에서 보여주는 거칠게 목을 긁는 보컬, "필승", " 울트라맨이야", " 인터넷 전쟁", "Feel the Soul(대경성)", "Live Wire" 등의 곡에서 보여주는 절규하는 듯한 스크리밍, 샤우팅, 랩 등 여러 창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이러한 다양한 스타일의 서태지의 보컬은 노래를 더욱 다채롭고 개성있게 만들어 준다.
더불어 순수하게 보컬리스트로서 서태지의 매력이라면 바로 유니크한 음색의 미성. 특히 "이 밤이 깊어가지만", "내 모든 것", "영원", "너에게" 같은 서정적인 곡에서 그 위력이 크게 발휘된다. 또한,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기고도 20대 초반 시절에 가까운 미성을 유지하면서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공연하면서도 쌩쌩하게 노래할 만큼 관리를 잘해온 것도 높게 평가받을 만한 점이다.
위의 내용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서태지의 발성은 4집에서부터 완성되었다. 3집까지의 곡들을 들어보면 발성이랄 것이 따로 없이 원래 목소리 그대로 고음이든 저음이든 불렀지만, 4집부터 특유의 콧소리를 섞어서 내는 발성을 기반으로 여러가지 창법을 내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서태지보다 대중적인 가창력을 지닌 가수도 막상 서태지 곡을 부르면 느낌이 안 산다는 평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들에 있다.[31] 이 때문에 보컬리스트로서의 서태지가 과소평가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리하자면 분명 대중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유형의 보컬은 아니지만, 서태지 자신의 노래에 있어서는 최적의 보컬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장 과정
1집 활동 당시 출연한 인간시대.
그의 성장 과정과 데뷔 당시 일상, 활동 모습이 담겨있다.
3.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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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에서 아버지 정상규씨와 어머니 강명숙씨 사이의 1남 1녀 중 둘째이자 막내로 탄생. 누나로 정혜원씨가 있다. 청와대 근처의 소격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32] 청와대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라 민방위 훈련 때는 군인과 탱크까지 쫙 깔리는 살벌한 동네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탱크를 따라다니면서 놀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RC카나 인형을 좋아했는데, 문구점에서 상습적으로 인형을 40개나 훔쳤다가 너무 대놓고 훔치는 서태지의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던 문구점 주인이 참다 못해 서태지의 어머니께 그 사실을 알리게 되면서, 집에서 된통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서태지의 '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에 묘사되었다.
3.2. 학창시절과 스쿨밴드 '하늘벽'
재동초등학교 재학 시절 음악보다는 과학을 좋아했고, 발명대회나 과학경시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여서,[33] 주변에서 발명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본인 말로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빠지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34] 또한 학창시절 땐 동네에서 알아주는 노는 애였다고도 한다.대동중학교[35] 재학 시절 처음 음악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음악 그 자체가 흥미로워서라기보다는 길을 걷던 중 악기점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폼을 재고 싶고, 그룹사운드라는 이름이 뭔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음악에 심취하면서부터 학교 교사들의 체벌과[36] 음악하는 것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학교 내 시선 때문에 점점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학업과 학교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가다 결국 몰래 담배 피우고, 땡땡이나 치는 학생이 되었다.[37] 이 시절의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인터뷰에 나와 있다. 중학교 3학년 시절에는 담임 선생님의 단체 기합에 반항하여 교실을 뛰쳐나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담임 선생님은 체벌을 없애고, 졸업할 때까지 서태지에게 관심을 가지며 이끌어 주셨다고 한다. 서태지가 인생에서 가장 고마웠던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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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을 꼬드겨 5인조 스쿨 밴드 '하늘벽'을 결성하면서 최초의 밴드 사운드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결성 당시 제대로 된 악기를 가진 멤버는 악기를 산 본인뿐이라 나머지 멤버는 통기타, 피아노, 집에 있던 의자와 선풍기 날로 급조한 드럼을 악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멤버들의 연주 경력도 그 나이 꼬마들답게 리더이자 리드 기타를 맡은 안준범 씨가 친형에게 기타를 배운 것과 건반을 맡은 멤버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것이 전부였던, 소꿉장난에 가깝게 시작한 밴드였다.
다만 서태지가 베이시스트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이 밴드였다는 점에서 이 치기 어린 밴드가 언급될 의의를 갖는다. 어린 서태지는 당시 통기타로 음을 짚어내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음을 짚어내는 것이 베이스 연주자'라는 친구의 말에 베이스 연주자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39] 또한 당시 작사, 작곡, 편곡, 베이스, 보컬을 서태지가 모두 전담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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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벽 멤버들과 찍은 사진 |
많은 시간이 흘러 서태지 15주년 기념관에 처음 공개된 '하늘벽' 사진에 따르면 활동 중 어느 시기엔가는 악기를 모두 구해서 그럴싸한 밴드 구성을 갖춘 듯.
하늘벽 데모 테이프에 들국화의 음악이 실려있던 것으로 봐서 들국화 카피 밴드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지는 데뷔 당시 국내 밴드로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어린 시절 전인권을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40] 이 외에도 학창시절 당시 인기 있던 머틀리 크루, 신데렐라, 본 조비 같은 메탈 밴드를 좋아했다고 한다.[41]
학생들이 만든 밴드다 보니 당연히 연습실이 없어 집에서 줄곧 연습했는데, 계속 음악하고 노래 부르며 말 그대로 동네를 시끄럽게 했다고 한다. < 유희열의 스케치북> 출연 당시 서태지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동네 사람들이 서태지 집을 가리키며 "저 집 아들 분명 중학생이랬는데, 저 집은 망했다(...)"며 수군거려 부모님이 엄청 창피해 했다고 한다. 현재 서태지의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인생은 모르는 일이다.
참고로 위에 언급한 머틀리 크루는 서태지가 최근까지도 언급하는 밴드이다. 네이버 뮤직에 서태지가 추천한 5장의 앨범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으며, 2019년에는 머틀리 크루의 뮤비를 보며 동경하던 바이크를 타기 위해 바이크 면허를 땄다고 밝히기도 했다. 링크
2004년, 이티피 페스트에서는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였던 타미 리를 초청하여 성덕이 되었다.
3.3. 고등학교 자퇴
서울북공업고등학교 진학 후, 스쿨밴드 하늘벽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음악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음악을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다.중학교 시절보다 늘어난 학업량[42] 때문에 도저히 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서태지는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장장 2개월 동안의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43]
이로써 서태지의 최종 학력은 군대도 못 가는 중졸이고 고등학교 중퇴다.[44] 사족으로 꽤 그럴싸한 명문으로 출처가 없이 회자된 '서태지의 자퇴서'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고 밝혔다. #
4. 음악 활동
4.1. 시나위
17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잠깐 머물렀지만, 멤버의 군입대로 별 활약없이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기타리스트 이중산의 소개로 한국 락의 대부 신중현이 운영하던 클럽 '우드스탁'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신중현의 아들이자 시나위의 리더인 신대철의 눈에 띄어 픽업되면서 마침내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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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당시 시나위 |
한 아이가 매일 우드스탁으로 와선 몇 시간씩 제가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곤 했죠. 처음엔 의식하지 않았죠. 내심 눈에 띌 만큼 머리가 긴 소년이 뚫어져라 공연에 몰두하는 걸 보고 헤비메틀 지망생이거나 팬이려니 했어요. 그렇게 1달 정도 계속되고, 말수가 적은 저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말을 걸어보자는 심산으로 기타를 칠 줄 아느냐고 물었죠.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타를 잡았어요. 거침없이 연주하는 모습은 요즘말로 '장난'이 아니었죠. 그 자리에서 바로 '시나위'에서 활동을 해보자고 제의했고 그는 무척 기뻐했어요. - 당시를 회상하며, 신대철
서태지 본인의 말대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던 신대철에게 돈과 함께 픽업 제의를 받았지만 돈을 마다하고 함께 활동하게만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기뻐했고, 시나위의 멤버가 된 후 우드스톡에서 매일 하루 반나절을 함께 연주 연습만 하며 살면서 바로 4집 앨범 작업에 착수해 베이스와 드럼 편곡을 담당했다.[46]
그러나 활동 기간 동안 신대철, 김종서, 서태지 3명의 음악적 견해 차이[47][48]로 서서히 멤버 간의 팀워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팀 해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제작자에게 공연 사기를 당했는데, 88체육관에서 예정된 공연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던 시나위 멤버들이 막상 공연장에 도착하니 공연 2시간 전까지 허름하게 무대 짜는 망치 소리가 들리는 등 말도 안 되는 무대가 서있었다고 한다. 크게 화가 난 신대철은 공연 주최 측과 거하게 싸운 뒤 술을 마시고 뛰쳐나가고, 미처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공연장에서 줄이 안 보일 정도로 기다리는 팬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김종서와 서태지는 결국 단 둘이 엉성한 공연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시나위는 해체되고 서태지는 실직하게 된다.[49]
이후 김종서와 함께 '캔기획'에 찾아갔으나, 김종서만 영입되고 본인은 불발되었다고 한다.[50]
그 후로도 계속 밴드를 알아보거나 직접 멤버를 모집해 밴드 결성을 시도하기도 했고, 한국에 비해 음악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51]
그러던 중 시나위 시절부터 쭈욱 들어오던 랩 음악에 심취해, 새롭게 뭔가 획기적인 그룹을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 매니저 최진열이 서태지 부모님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한때 어머니가 차려 방에 넣어주는 밥만 먹으면서 6개월간 방 밖에 나오지 않고 랩 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곡 공부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무궁화 밴드'라는 팀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용돈을 벌었고[52], '마이하우스'라는 클럽에서 일하다가 양현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양현석과 팀을 꾸리기로 하고[53] 제3의 멤버를 물색하며 이리저리 멤버를 갈아치워보다가 마지막으로 이주노를 선택하며 1991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사족으로 서태지라는 이름은 자신이 좋아하는 한자인 '태' 자와 '지' 자로 이름을 짓고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성씨인 '서' 씨를 합해 '서태지'로 지었다고 한다. 2009년 서태지 본인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서태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공연장이라는 뜻의 영어 'STAGE'를 줄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동안은 일본의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였던 ' TAIJI(타이지)'에서 따왔다는 설(서쪽의 TAIJI - 서TAIJI)이 주류였는데, 이에 대해 세간의 질문이 있어서인지 시간이 흘러 서태지 본인은 별생각 없이 그냥 글자가 멋져서 지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2014년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이 낸 자서전 '뛰는 개가 행복하다'를 보면 타이지에서 따온 게 맞다고 적혀있다고 한다. 헌데 이 버전에도 2가지 내용이 있는데, 본인이 타이지처럼 실력 좋은 베이시스트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쪽의 타이지를 줄여 서태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과 시나위 가입 후 서태지라는 예명으로 바꾸겠다고 하길래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서태지 본인이 서태후의 '서태'와 타이지의 '지'를 합친 거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54] 두 설의 내용부터가 다르니 일단 뭐가 확실한 내용인지 책 출처를 확인해서 인용하는 게 맞아보인다.
1995년에 공개된 공식적인 인터뷰를 보면 어느 설이든 신대철의 주장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상기된 캔기획 설만 봐도 알 수 있듯, 서태지가 탑스타가 된 이후 그와 관련된 썰을 주변인들이 자기 홍보 목적도 겸해 풀다보니 과장이나 오해 등도 좀 섞이면서 결과적으로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크로스체킹이 필요한 것. 일각에서는 일본대중음악이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서태지가 일본 가수 안다고 하면 괜히 안티들 먹잇감만 주는 분쟁거리 생길까봐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고 보기도 하지만, 뭐가 됐든 이름에 관한 주장은 이름을 지은 본인의 주장이 공식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출간된 이동연의 저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에서 저자 이동연이 서태지에게 예명 작명에 관한 질문을 했었다.
이동연: 말 나온 김에 예명에 대해 질문드리겠는데, 당신의 예명인 '서태지'가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추측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영어 '스테이지'의 음차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일본 그룹인 ' X'의 전직 베이스 연주자였던 Taiji의 예명을 본떴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서태지: 제가 일단 이름을 과격하게 짓고 싶었어요.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상적인 이름을 짓고 싶었고, 거꾸로 이름 같지 않은 이름을 짓고도 싶었어요. 아까 말한 것은 관계가 없고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글자가 태자와 지자인데, 그렇잖아요. 보통 남의 이름 중에서 좋은 글자 있으면, 한 번 써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태자와 지자를 합성해서 이름을 지었고요, 성은 여러 개를 붙여 봤는데, 그중에서 서자가 제일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래서 아무 뜻 없이 서태지라고 지었죠.
어떤 이는 영어 '스테이지'의 음차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일본 그룹인 ' X'의 전직 베이스 연주자였던 Taiji의 예명을 본떴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서태지: 제가 일단 이름을 과격하게 짓고 싶었어요.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상적인 이름을 짓고 싶었고, 거꾸로 이름 같지 않은 이름을 짓고도 싶었어요. 아까 말한 것은 관계가 없고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글자가 태자와 지자인데, 그렇잖아요. 보통 남의 이름 중에서 좋은 글자 있으면, 한 번 써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태자와 지자를 합성해서 이름을 지었고요, 성은 여러 개를 붙여 봤는데, 그중에서 서자가 제일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래서 아무 뜻 없이 서태지라고 지었죠.
2001년 6집 활동을 마치고, 음향 전문 잡지 사운드 온 에어와 인터뷰를 가졌을 때도 예명에 관한 질문을 받았고 이에 대해 해명했다. 현재는 없어진 웹진이라 웹 아카이브 링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SOA: 예전 X-JAPAN 의 베이시스트 TAIJI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태지씨의 이름도 거기에서 모티브를 얻는 건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서태지: 전에도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X-JAPAN의 TAIJI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엑스저팬은 즐겨 들었지만 베이시스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시나위 들어갈 때 그냥 본명보다는 멋있는 이름을 만들려고 해서 만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태자를 좋아서 썼고. 다음에는 지를 붙이고 이름에 어울리는 서자를 사용해서 이름을 만들었죠.
서태지: 전에도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X-JAPAN의 TAIJI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엑스저팬은 즐겨 들었지만 베이시스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시나위 들어갈 때 그냥 본명보다는 멋있는 이름을 만들려고 해서 만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태자를 좋아서 썼고. 다음에는 지를 붙이고 이름에 어울리는 서자를 사용해서 이름을 만들었죠.
4.2. 서태지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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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후 방송, 라디오 등 각종 매체 활동을 하다가 92년도 MBC 쇼 프로그램 <특종 TV연예>에 출연하며 전국의 청소년층에게 폭발적인 충격을 안겼다.[56]
작곡·작사가들이 신인 가수들을 평가하는 짧은 코너에 출연해 난 알아요를 불렀는데[57][58] 그 당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이러했다. 박한 평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참신하지만 리듬은 좋으나 멜로디 라인이 약한 것 같다.(8점) - 밴드 '다섯손가락' 멤버 겸 작곡가 하광훈[59]
음악은 새로운데 가사의 내용이 진부하다.(7점) - 작사가 양인자[60]
노래는 섬세한데 과격한 댄스동작에 묻힌 아쉬움이 있다.(8점) - 방송인 이상벽[61]
결국 평균 7.8점으로 신인무대 첫 회 출연자이자 최저점 득점자라는 불명예를 기록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출연한 신인가수 중에 평균 8점 이하의 가수는 한 팀도 없었기 때문이다.[63][64] 하지만 당시 평가는 위에 언급된 심사위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랩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기에[65] 당시 매니저를 맡고 있던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방송국에 홍보용으로 CD를 줘도 들어보고는 "그런 판데기는 이태원 클럽에나 걸어라"라며 집어던지기도 했고, 주변 선배 매니저들도 망할 것이 뻔하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특종 TV연예> 출연을 계기로 당시 세계 음악 트렌드와 한참 격리된 트롯트, 발라드 위주의 대중가요에 염증을 느끼던 당시 청소년, 대학생 층에게 이 곡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난 알아요를 필두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큰 폭풍이 시작되고 한국 가요계의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66] 유튜브 관련 영상 댓글에 적힌 저 방송을 직접 봤다는 사람들이 증언을 보면 "주말이 끝나고 학교를 가니 서태지 이야기밖에 없었다", "다음날 학교 앞에 복사테입장사가 판을 깔았는데 금방 동이 났다", "방송 이후 최고가 되는데 단 하루가 걸렸음" 등으로 당시의 해일같은 반응을 알게 해준다. 그 뒤로 시대의 변화를 자각한 <특종 TV연예>는 신인에 대해서 관대한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특종 TV연예> 최저점 득점자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로서 활동한 2집, 3집, 4집에 대해서는 디스코그래피를 참고.
4.3. 솔로(서태지 밴드)
은퇴 기자회견을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미리 마련된 헬기를 타고 김포국제공항으로 이동해 출국 절차를 밟았다. 경유지인 괌에서 세 멤버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 후 양현석과 이주노는 한국으로 귀국해 제작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그러나 그룹의 리더였던 서태지는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만 나돌 뿐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렸다. '미국 유학설', '결혼설', '컴백설' 등이 나돌았고, 신문과 잡지도 이를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심지어 역술가 오재학이 낸 예언서 <국운>에서 서태지가 1997년 컴백한다고 예언까지 했는데, 이마저도 틀렸다.[67]
은퇴 2년 뒤인 1998년 7월 7일, 갑작스레 5집을 발표하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던 얼터너티브 록을 기반으로 한 원맨밴드 앨범으로, 서태지가 보컬을 포함해 모든 악기연주까지 도맡았다. 앨범 발매 후 기자회견 및 쇼케이스조차 하지 않으며 철저히 모습을 감추었고, 언론 기자들과의 이메일 문답으로만 앨범에 대한 설명을 대신했다. 당연히 국내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미네뜨의 CF에서만 서태지의 목소리가 나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5집 앨범은 발매 일주일 만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식지 않은 그의 인기를 확인시켜 주었다.
2년 뒤인 2000년, 6집 정규앨범을 발표하면서 그는 4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입국 당시 김포공항이 팬들로 마비될 정도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6집의 타이틀 곡 <울트라맨이야>, 후속곡 <인터넷 전쟁> 등이 큰 히트를 쳤으며 앨범 쇼케이스와 몇 개의 음악방송 출연, 콘서트 외에는 대중메체에 일절 노출하지 않았음에도 앨범은 다시 한번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6집 앨범 활동을 마친 뒤 일본으로 출국한 그는 일본에서의 싱글 앨범 발매와 더불어, 2002년 데뷔 10주년을 맞아 귀국해 자신의 10주년 기념 콘서트를 겸한 <ETPFEST 2002>에서 공연을 하고 6집 앨범의 리레코딩과 자신의 이전 히트곡을 편곡해 수록한 10주년 기념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의 10주년 앨범도 20만장 가까이 팔렸다. 한밤의 TV연예와의 단독 인터뷰, KTF의 광고에 출연한 것 외 다른 방송활동은 하지 않았다.
2004년 국내로 귀국한 서태지는 7집 앨범 활동을 시작했으며 <로보트>, <Live Wire>가 크게 히트를 치며 2004년 앨범판매량 1위를 기록하였다. 이전 활동들과 달리 음악방송과 콘서트 외에도 예능 프로그램과 라디오에 얼굴을 비추면서 오랜만에 대중적인 방향으로의 활동을 했으며 러시아에서 단독콘서트를 갖기도 하였다. 7집 활동을 마친 뒤 해외로 떠나면서 다시 모습을 감추었으며 10주년 콘서트를 국내에서 했던 것과 달리 15주년 콘서트 때는 참석하지 않았다.
2008년 귀국해 8집 활동을 시작했으며 쟁쟁한 아이돌들 사이에서도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하며 뮤직뱅크에서 1위를 차지했다. 8집 활동을 마친 뒤 다시 모습을 감추었는데, 6년여의 공백기 동안 이지아와의 비밀결혼과 이혼 및 이은성과의 재혼 등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한국 사회를 떠들석하게 했다.
2014년 9집 활동을 시작하며 한국에는 완전히 정착했고 후배 가수인 아이유와 함께 소격동을 발표해 다시 한번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다.
5. 개인사
5.1. 비밀 결혼과 이혼
1996년 11월 20일, 일간지 < 스포츠서울>은 '은퇴한 서태지가 미국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1996년 12월 24일 재미동포 여대생 김모 양[68]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특종기사를 냈으나 서태지 측이 적극 부인하고 명예훼손 소송 등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세간의 흔한 오보인 것처럼 흐지부지되었다.[69]
그러나 그런 강경 대응이 무색하게 1997년 전격 비밀 결혼을 한 후 1998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결혼설의 사실 여부를 묻자 "낭설이다" 라며 거짓말로 딱 잡아뗀다. 기사 원문 이를 두고 부인(이지아)과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란 의견도 있고, 어차피 결혼 사실을 밝혔어도 생활적으로는 바뀔 게 없었기 때문에[70] 팬들을 기만한 비겁한 변명일 뿐이란 의견도 있다.[71]
2000년 6집으로 다시 얼굴을 드러낸 기자회견 당시에도 결혼 계획에 대한 질문에 본인이 "여자 친구가 없다"고 말해 미혼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때에는 이미 2년 반 정도의 짧은 결혼 생활 끝에 별거에 들어간, 사실상 이혼을 앞둔 상태였다. 따라서 여자친구가 없다는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훗날 상당수의 팬들이 이 당시의 발언에 대해서 서태지가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여기고 등을 돌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 없다, 서류에 도장 찍는 관계가 싫으며,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냥 동거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당시 파경에 이른 상황을 반영한 발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2008년에 방영된 서태지 컴백 특집 프로그램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는 (여자 친구가)설령 있더라도 밝힐 수 없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2011년 4월 21일 <스포츠서울>의 보도에 의해 서태지가 최근 인기배우 정우성과 열애중인 이지아와 이혼했으며, 이미 이지아가 제청한 위자료 및 재산분할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것으로 연예가 전반에 핵폭탄급 파동을 일으켰다.[72] 서태지의 이야기라는 특성상 정보가 극도로 제한된 만큼 수를 세거나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루머가 트럭 단위로 대한민국 인터넷을 휩쓸고 다녔다. 당시 '감금설'에 대한 반박 이후 서태지는 본인이 설립한 소속사를 통해 이혼 사건에 관련된 일반 대중에의 아래와 같은 해명 자료를 발표했다. 해명 자료가 실린 기사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전략)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태지 씨는 1993년 미국에서 지인의 소개로 상대방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 후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 편지와 전화 등으로 연락을 하며 서로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96년 서태지 씨의 은퇴 이후 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 10. 12. 미국에서 둘만의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성격과 미래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약 2년 7개월 만인 2000. 06 경 양측은 별거를 시작했으며 결국 헤어지는 수순을 밟고 다시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별거 초반에 서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바 있으나 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서로 완전히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략)
이 소송은 이지아가 소취하를 신청하고 서태지가 취하에 부동의하여[73] 계속되었다가 결국 쌍방이 합의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이지아가 무려 먼저 시작한 소송이었고, 폭로가 목적이었다면 무리한 소송인 줄 알지만 알리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가능한 줄 알았다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하며 소송 목적마저 바뀌며 변론준비 기간만 계속 길어지다가 소송을 취하했다.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 주장이 바뀌는 사기 소송이었다. 그에 대한 소송취하 부동의였고 서태지측은 진실여부의 확인도 필요함을 주장했다. 거짓 소송에 대한 개략적인 과정은 이 글에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2년이 약간 지난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결혼한다는 발표가 언론을 탔는데, # 다음 해인 2014년 8월 11일 이지아가 SBS 힐링캠프에 전격 출연하며 지난 결혼생활에 대해 서태지를 언급하며 디스를 날렸다. 그런데 이혼합의서에 따르면 지나간 결혼 생활에 대한 상호 공개적 비방 등이 있을 경우 일일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서태지가 소송 취하에 동의해 주지 않을 정도로 강경하게 나가려 했음을 되짚어보면 이지아의 발언 수위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 방송 직후 디스패치에서는 발 빠르게 관련 기사를 내보냈는데, 오히려 이지아에게 불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뒷조사는 디스패치를 설립한 기자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직후부터 끈질리게 매달려 온 일이었기에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디스패치의 정보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후 서태지가 대중의 온갖 비난으로 점철된 십자포화를 감내하고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이지아에게도, 일반 대중에게도, 팬에게도 모두 미안하다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면서 사실상 장장 14년에 걸친 이슈는 종결되었다.
이은성과 결혼하고 딸을 얻게 된 후 9집 활동기를 보면 이전 앨범과 달리 확실히 대중친화적이면서도 서태지 본인 자체도 많이 풀어진 모습이다. 서태지 본인도 해피투게더 출연 당시 예전 폐쇄적인 마인드가 많이 달라졌다며 "아내와 딸을 위해서라면 다 할 수 있다" #고 발언해 큰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이은성과 잘 맞는 듯.
5.2. 은둔하던 슈퍼스타
결론부터 말하면 활동이 뜸하고 주변인들도 서태지의 얼굴을 보기 힘든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 신비주의'로 이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과장이 많이 섞여있다.요약하면 8집까지의 서태지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었다. 사실, 1990년대~2000년대를 비롯해서 현재까지 활동했던 가수들을 포함한 연예인들은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 팬 출신이 정말 많다. #
활동기에는 이런저런 소식이 나오지만, 비활동기가 되면 공적인 일과 개인사를 구분하는 웬만한 해외 아티스트도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려울 만큼, 철저하게 세상에서 증발해왔다. 얼굴 보기 어렵기로 이야기가 나오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던 인물. 서태지와 아이들의 다른 멤버인 양현석은 YG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하고 그 뒤에도 꾸준히 방송에 출연해왔으나[74] 서태지는 아예 대중매체 노출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은퇴 직전까지는 국내에 살아서 그나마 조금씩 정보가 있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로 8집까지는 지구에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진짜 살아 있기는 한 건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본인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 '서태지닷컴'에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본인의 여행 사진이나 RC카 등의 사물을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며 근황을 전하는 것이 팬덤에 전하는 유일한 생존 신고나 다름 없었다.[75]
심지어 과거 서태지컴퍼니[76] 소속이었던 밴드 넬도 서태지와의 관계를 "친하기는 한데 얼굴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들 정도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양현석과 이주노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 시절 당시 레코딩 작업에 들어갈 때도 지금이랑 별 다를 바 없이 잠수하면 대책이 없었다고 하니 서태지의 타고난 성격인 듯. 실제 양현석이 앨범 녹음을 마치고 서태지만 마무리 작업을 위해 미국에 남아있고, 자기는 한국에 왔는데 몇 달이 지나고 서태지 사망설이 나오자 실제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77]
그래도 다행히 재혼과 9집 활동을 기점으로 국내에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78] 그간 본인조차 의도하지 않아왔고 수시로 부정했던 '신비주의'의 오명을 이제나마 벗어던질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김종서도 2014년 서태지와 함께 출연한 해피투게더에서 "아버지가 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장 해제가 되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서갤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태지가 아내, 딸과 함께 잘 돌아다닌다는 목격담이 몇 개 올라왔었다.
그런데 사실 아티스트나 예술가들 중에는, 외부 환경으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만의 작업 공간을 만들어 활동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특히 서태지와 같은 원맨 밴드 레코딩을 지향하는 뮤지션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즉, 다시 말해서 팬들의 오버 및 안티들의 루머로 서태지 혼자서만 신비주의니 뭐니 하는 이미지가 생긴 것뿐이지, 서태지의 성격은 이런 아티스트들의 여러 스타일 중 하나로 봐도 그냥 무방하다.
후에 매 앨범 발매 때마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비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는 곤혹을 치르는데, 그에 대해 서태지는 매번 "신비주의라는 것은 마법, 주술 등의 이미지와 같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을 뜻하며, 일과 사생활을 조금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답변을 했다. 예를 들어 자타공인 신비주의 뮤지션인 Sopor Aeternus와 같은 경우엔 서태지와는 달리 생년월일은 물론 본명까지 숨기고 다닌다. 평소 자신의 취미 생활과 더불어 딸 얼굴까지 공개한[79] 서태지가 과연 신비주의의 발끝에라도 다다를지 의문이다. 거기다가 연예인/유명인에 대한 사생활 존중에 시끄러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자신의 사생활 공개에 대한 권리를 지킬 대로 지키고 있는 서태지가 신비주의로 오해 받은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심지어 나얼의 사례를 고려하면 서태지보다 더 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TV 출연 횟수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으며, 또 TV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활동 자체를 거의 안 한다.[80] 오죽하면 집 앞 커피숍에서 더 보기 쉽다고 하겠는가. 가끔 TV에 나온다해도 노래 요청에서는 '콘서트 가서 들으라'는 식으로 대응하니 그래도 새 앨범 발매하면 TV에 몇 번 출연해 노래도 부르고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제때 못 온 팬들을 위해 지상파에 종종 송출까지 해주는 서태지는 이에 비하면 굉장히 개방적인 사람이다.[81]
그리고 서태지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공개를 꺼린 것 또한 새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각 앨범에 대한 이미지 컨셉을 자신의 타이밍에 맞춰서 알아서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는데[82], 이게 또 신비주의라고 언론에 뭇매를 맞은 셈이다.
엄밀히 말해 서태지는 자신의 권리를 지킨 것이고, 물론 팬들과의 커뮤니티를 위해 공개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타이밍에 맞춰 공개한 셈이니 자신을 완벽하게 숨긴 적은 없다. 한마디로 서태지 본인이 공개하기 싫어서 또는 공개할 타이밍이 아니라서 안 한 건데[83] 그걸 못 참고 난리친 언론이 문제다. 연예인이 모든 걸 다 드러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당연히 서태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일본의 뮤지션 GACKT 역시 한 TV 방송에서 자택공개를 했는데, 유독 녹음실만 공개 거부를 하였다. 때마침 신곡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작업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 방송 스탭이 이 경고를 어기고 몰래 촬영하려다가 각트에게 들키자 각트는 그 자리에서 스탭에게 화를 내며 방송 스탭들을 전원 내쫓아버렸다.[84]
몇몇 지인들이 예능에서 서태지와의 친분 관계를 알리기도 하지만 다소 과장된 발언인 측면이 짙어, 활동하면서 마주치는 것을 넘어 실제 인간적 친분이라기엔 신빙성은 없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도 다른 멤버들과 거의 개인적으로 어울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며, 친구 1명을 만나기 위해 매니저에게 부탁한 것을 제외하고는 활동 내내 아무도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유재석도 서태지와 말까지 놓는 사이지만 왠지 아직은 그렇게 친하지 않아보인다. 10년을 넘게 함께 한 서태지 세션들 역시 기타리스트 탑[85]을 제외하고는 사적 교류는 많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
그나마 가장 친한 관계로 알려진 사람이 이종 육촌 지간인 신해철[86]과 시나위 시절 친분을 맺은 가수 김종서인데 이 둘은 2006년 겨울쯤에 같이 스키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알려질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2002년 일본에서 열린 신해철의 비공개 결혼식 때도 서태지가 참석했다.[87]
김종서의 경우는 서태지가 시나위에 있었을 때 인연을 맺었다고 하며,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당시 록 밴드들이 마약에 탐닉하는 등 비뚤어진 길로 쉽게 틀어지던 때였는데 자신이 그런 잘못된 길로 안 갈 수 있었던 건 김종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서태지의 취미 중 하나인 캠핑카 여행을 둘이서 자주 떠났다고도 하며 서태지와 아내 이은성과 함께 스키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
2014년 9월 15일 디스패치가 김종서, 박신혜와 빵집에 있는 서태지의 사진을 공개하는 등 김종서와는 꾸준히 교류 중인 듯 하다. (박신혜는 아내 이은성의 절친이라고 한다.)[88] 9집 공개 전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서로가 발언한 멘션을 보면 자주 만나 음악 얘기 외적인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등 아주 친밀한 교류가 있는듯하다.
2014년 9월에는 라디오 스타에 신해철이 출연, 서태지와 비슷한 시기에 음반을 내놓으며 누가 흥하냐 내기를 걸었다는 발언 중 서태지를 '몇 달에 한 번씩은 꾸준히 본다'고 언급해 친척 관계는 원만한 걸로 보이며 또한 유희열의 스케치북 녹화에서 밝히기로는 며칠 전에 이승환, 윤상과 함께 이자까야에서 만나기도 했다고 밝혔다. 방송에선 편집되었다. 한때 서태지의 상업주의 루머와 더불어 음악 스타일이 바뀌는 부분에 대해서도 안티들이 다른 아티스트와 서태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루머를 퍼뜨리곤 하는데, 대부분이 믿을 것 없는 헛소리들이다.[89]
대표적으로 서태지와 크래시의 안흥찬이 중간에 서태지의 행보로 인해 서로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느니 하는 루머가 생기기도 했는데, 정작 본인들은 "좋은 뮤지션으로서 좋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서태지)"라거나 "쿨한 관계(안흥찬)"라고 하며 서태지의 컴백 공연에 안흥찬이 다시 게스트 뮤지션으로 나오는 등 루머를 일축시키기도 했다.
참고로 후에는 이 루머의 바톤을 NELL이 그대로 받기도 했다.
6. 평가
6.1. 위상
서태지는 90년대를 뒤흔든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한국 힙합과 댄스 음악의[90] 선구자로서 "문화 대통령"이라 불리는, 여러모로 한국 음악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지금도 예술인 앞에 대통령이라는 칭호가 붙는 연예인은 서태지가 유일하다. 당대에 일으킨 어마어마한 신드롬과 후대에 끼친 영향력으로 인해, 한국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에 랩을 정착시킨 선구자이자, 당시 중장년층들 위주였던 대중문화의 향유층을 청년, 청소년, 어린이들한테도 내려오게 만든 인물이다.[91] 그만큼 당시 모든 젊은이들의 감각을 폭발적으로 요동치게 만들만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장르의 음악이었다.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을 TV에서 보고 음악을 듣고 자란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미래에 서태지처럼 멋있는 가수가 되어서 꼭 TV에도 나가고 무대에 서고 싶다" 처럼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준 인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영향력은 2020년대 현재에도 유효하다.댄스 음악의 경우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인 1980년대에도 나미,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등의 댄스 가수들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노래들이 현재 한국에서의 댄스음악과는 다르게 트로트와 같은 성인가요풍(소위 뽕삘)의 리듬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고전 유로비트를 섞은 리듬, 당시 일본에서 많이 쓰였던 시티팝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서태지의 등장 이후로 팝뮤직과 힙합을 기반으로 한 리듬의 댄스 뮤직 즉 현 시대의 한국 대중음악 스타일을 완벽히 정의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힙합의 경우 서태지가 힙합크루를 만들고 활동한 정통 힙합래퍼는 아니지만 서태지의 랩으로 인해 '한국어로도 랩을 만들 수 있다'[92], '한국에서도 흑인 음악 장르가 성공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전 국민적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뮤직이 전 국민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후 랩과 힙합을 전문적으로 다룬 가수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 후반 경부터 PC통신 유저들이나 교포출신들 사이에서 힙합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 현재 한국 힙합계의 시작이다. 타블로도 하여가 노래를 듣고 영향을 받았음을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즉, 한국 힙합계에선 서태지가 일종의 뿌리이자 자양분이 되어준 셈이다. 비유하면 비틀즈가 하드록이나 메탈 밴드는 아니지만 그들이 남긴 헬터 스켈터라는 명곡이 1970~80년대 하드록, 메탈 장르의 프로토타입을 개척한 것과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다.[93] 대표곡은 ' 난 알아요', ' 하여가', ' 교실 이데아', ' 컴백홈' 외 다수다.
1990년대 초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 활동을 통해 한반도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청소년 팬덤을 거느렸으며, 이 힘을 밑거름으로 삼아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던 당대 권위적인 한국 사회에 음악적, 비음악적으로 전방위적인 영향을 끼치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대중매체에서 이 아티스트를 소개할 때 들어가는 수식어 중 첫머리에 오는 머릿말은 단연 문화 대통령이다.[94] 시대에 파란을 몰고 온 서태지와 아이들이 공식 은퇴를 선언한 1996년 이후 2013년 평창동에 정착하기까지 18년 동안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 기자들을 피해 해외에 거주해 왔다. 하나의 활동기가 끝나면 잠시 휴식하며 영감을 얻고, 음악작업을 하고, 귀국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솔로 활동을 했다. 앨범 간의 텀이 수년씩 되는 것은 매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 때문에 습득하고 체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맘에 드는 소리를 찾기 위해 하루종일 베이스 앰프만 만지거나, 드럼 한 소절을 1달 동안 녹음하는 등 음악작업에 있어서 지독한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9년 80년대 메탈키드의 롤모델이었던 록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아티스트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1992년 3인조 랩 댄스 트리오 서태지와 아이들로 오버그라운드에 데뷔하였다. 당시 이태원 클럽 음악으로 천대받던 댄스 뮤직을 대중에게 알리며 1집 타이틀곡 '난 알아요'로 17주 동안 가요 차트 1위를 수성한 전설적인 뮤지션. 이후 3인조 활동을 통해 힙합, 발라드, 일렉트로니카, 스래시 메탈, 갱스터 뮤직 등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장르를 소화하며 음반을 발표하는 족족 사회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1998년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얼터너티브 락, 하드코어 펑크, 뉴 메탈, 이모코어 등 본인의 전공인 록 위주의 밴드 사운드 활동에 매진해왔다. 이후 2008년부터는 고난도의 작법과 자신의 뿌리인 두 장르(록, 일렉트로니카)를 접목시키는 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발표하고 있다.
작곡, 편곡 및 작사의 완성도와 음향 퀄리티, 공연장 사운드와 콘서트 무대 구성 등 음악적인 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깐깐한 완벽주의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음악쪽을 보면 녹음을 마친 음반의 마무리 믹싱을 위해 6개월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로 쌩고생을 하는가 하면 이미 발매한 음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앨범 활동이 끝나자마자 새로 녹음해 버리지를 않나, 또 아토모스 싱글 땐 자연의 소리를 잡겠다고 장비를 바리바리 싣고 산골 흉가를 찾아가 녹음 작업을 하질 않나, 또 그게 믹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정규음반 발매의 기회를 노리고 미국 스튜디오로 날아가 버리기도 하는 등 음악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국내 아티스트 중에 손에 꼽힌다.
앞서 짚은 대로 여러 장르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만들어진 독특한 음악적 색채와 올라운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또한 '가수 서태지'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태지는 음향 엔지니어링에도 조예가 깊다. 갓 20살 나이에 데뷔할 때 세션을 부르기엔 가난해서 1집의 엔지니어링과 프로그래밍을 도맡아 했는데,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 습관이 되어서 후엔 한국에 있는 자기 회사와 저택 안에 본인이 작업할 전용 스튜디오를 차리고 음악에 관한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95] 현재는 자신의 일은 A부터 Z까지 모든 과정이 자기 손에서 이루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되었으며, 콜라보레이션도 특별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외부 인물을 섭외하지 않는 한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편이다.
또한 초상권 등을 포함한 가수들의 권리 안정과 수입 배분을 이끌어내는데 앞장섰던 가수인데, 서태지 이전에는 가수들의 음반이 아무리 많이 팔리고 TV에 많이 나와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자신의 수익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음반회사 및 기획사가 주는 대로 만족해야 했다. 연예인인데 차가 없어? 한 대 뽑아줘라, 수고했으니까 집 좀 좋은 데로 사줘라 이런 식이었다. 가왕 조용필과 마왕 신해철조차 이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지만, 생 초짜 신인 서태지가 이런 고일 대로 고여있던 기획사들의 횡포를 깨트리고 정당한 자신의 몫을 챙겼고 그 후 너도 나도 그런 행보를 따라가며 가수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이를 두고 신해철은 스스로를 '고뇌하는 비겁자[96]', 서태지를 '거침없는 낙오자'라고 칭하며 '그렇기 때문에 서태지는 당당히 승리를 거둘 자격이 있고 나는 그를 이길 수 없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신해철 사후 서태지가 말하길 서태지가 방송국 PD등 업계의 관계자들과 싸우고 충돌하고 하는 것들은 당시 혈기 넘치던 20대의 신해철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신비주의를 언급하면 반자동적으로 따라나오는 이름의 주인이 바로 이 사람. 데뷔 초에는 여러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말도 안 되는 몸개그를 선보이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해 간단한 토크를 하는 등 여느 가수들과 다를 바 없는 활동을 했지만 커리어 초반인 20살의 어린 나이부터 사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며 자택을 24시간 포위하는 수백 명의 소녀 팬과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기자들, 음악 밖에 모르는 청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방송국 관계자들의 등쌀에 나가떨어져 점차적으로 신변잡기에 대한 입을 아예 닫아버리고 만다. 이것이 악순환의 단초가 되어 팬과 기자, 방송국 관계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슈퍼스타 서태지의 뒤를 캐거나 어떻게든 연락해 출연을 닥달하고 결과적으로 서태지는 더 꽁꽁 숨어야만 하는 무한루프를 만들어버렸다.[97] 이 문제는 결국 그가 겨우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눈물의 은퇴를 선언하며 돌연 출국하고 세상에서 아예 증발해버리는 잔혹동화로 끝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내성적인 아티스트가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인기를 떠안았을 때 개인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고통을 겪을 대로 다 겪은 백전노장이다.[98] 결혼 이후 주변인들로부터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지만 지금도 서태지는 비활동기에는 공연을 포함한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과거 겪은 언론과의 갈등, 사생팬들[99]로 인한 고통이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6.2. 한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6.2.1. K-POP의 뿌리가 되다
서태지는 세대의식을 이끈 혁명적 존재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지금 발매중인 K-POP 음악 중 상당수의 모태가 서태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2024년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서태지가 닦아놓은 형식을 깰 수 있을 만한 새로운 형식이나 제도, 음악적인 시도가 한류열풍을 통해 국제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100] 그리고 후술된 바와 같이 아티스트 서태지의 삶은 기존 음악계와 방송계, 심지어 정치권과 언론계 등 사회 기득권에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불합리한 부분이 있으면 이를 주장하고 타파하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이었으며, 덕분에 3집 이후부턴 본격적인 안티도 얻었지만 그 결과물은 심의 제도 개혁 등 오늘날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보다 나은 음악적 환경을 물려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01]
본인은 그저 랩 뮤직을 비롯해 그냥 하고 싶은 걸 했다고 비교적 겸허하게 말하고 있지만,[102] 후술되어있듯 1집 이후부턴 스스로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의식적으로 여러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자신이 판단했을 때 아닌건 아님을 확실하게 주장하는 등 서태지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최고의 성공을 거머쥐고자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 한국 가요계는 80년대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가수왕 먹거나[103] 90년대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 등 발라드 전성기가 무르익던 시절이었는데, 불나방처럼 오버그라운드에 뛰어든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국내 가요판은 10대가 강력히 지지하는 댄스, 랩, 힙합 음악이 점령하게 된다.[104]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다양한 연령대의 음악들이 순위 프로에 나왔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할 무렵인 1996년도에 이르러서는 온갖 기획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모티브로 삼은 청소년 가수들을 양산해내면서 X세대[105]를 기수로 삼은 젊은 세대가 가요계의 주 소비층이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이를 참고해 기획사에서 훈련한 그룹형 아이돌(H.O.T., 젝스키스, 신화, god 등)을 통칭 1세대 아이돌이라고 묶어 부르기도 한다.[106]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댄스가수들은 있었으나, 서태지급의 팬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성장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국내 댄스 뮤직의 태동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107] 당장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댄스 가수들 출현 빈도는 차원이 다를 정도이다.
또한 이러한 흐름은 단지 대중음악에 그치지 않고 당시 대중문화의 거의 전 부문에 걸쳐서 10~20대가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108]
물론, 그 모든 게 서태지 한 명의 존재로 인한 것은 아니고 따져보면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어난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해야겠지만 서태지는 분명 그 흐름을 중심에서 주도한 인물 중 한명인 것은 분명하다. 당시 많은 부분적 흐름들이 서태지로부터 파급, 파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괜히 그 시대의 아이콘이 아닌 것. 문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21세기 들어선 K-POP이 글로벌한 인기를 얻으면서 서태지 역시 K-POP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반드시 거론된다. 해외에서는 그를 K-POP의 아버지 혹은 현대 K-POP의 시조로 보기도 한다.[109]
6.2.2. 방송사-기획사-아티스트 관계 재정립
기획사-소속가수 간의 노예계약 문제를 행동으로 격파해낸 첫 스타이기도 하다. 사실 서태지가 단지 그 시대에 가장 인기있었던 가수의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변혁을 가져왔다고 일컬어지며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 음악이나 인기 이상으로 파격적인 행보에 있었다.1집 활동의 거대한 수입 대다수가 기획사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서태지는 이러한 불공평 계약을 깨뜨린 후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설립하고 매니저를 기용해 활동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진 일이었지만[110][111] 서태지에게는 1집 활동에서 얻은 엄청난 인기와 음악적인 작업은 물론 안무와 컨셉까지도 그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큰 모험이었지만 보기좋게 대히트를 기록하며 전무후무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물론 판매량으로 보면 동시대의 김건모, 신승훈만 해도 서태지와 비등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경우도 있었지만 조금 속되게 말하자면, 똑같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해도 자신들이 작사 작곡 안무 짜고 기획사 사장까지 다 해먹는 서태지(와 아이들) 쪽이 훨씬 많이 벌 수밖에 없었다.
데뷔한 지 1년 된 젊은 가수가 거대한 자본의 벽이나 업계의 관행을 자신의 음악과 인기만으로 모두 타파하고 거대한 성공을 거머쥔 셈이고 당시 서태지 이전의 아티스트들이나 비슷한 시기의 가수들이 여전히 소속사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던 상황이었기에[112]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는 이후 가수들이 자신의 정당한 몫에 대한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게 하는 등, 소위 '딴따라'로 낙인찍혀있었던 연예인의 입지를 상승시키는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 사실상 가수가 공연이나 밤무대가 아닌 온전히 음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게 된 계기가 서태지였던 셈이다. 이런 일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같은 운동권 계열, 민중가요 가수들조차 손을 못 대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서태지를 혁명가라고 부르는 것.
문화 평론가 강헌은 당시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가 당시 유착관계였던 음반제작사, 방송사, 언론 모두에 밉보이게 되는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초로부터 2011년 이혼소송 때까지 진행형이었던 언론매체의 '서태지 죽이기'에 대해 강헌과 진중권은 한 팟캐스트 방송 #에서 꽤 긴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록은 이어지는 링크를 참조하자. # # #
또한, 서태지의 문화적 파급력은 10대 청소년이 향유하는 문화에서도 음악성과 예술성을 추구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대중가요의 중심이 된 아이돌 그룹 H.O.T.는 그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음악적 역량과 개별 멤버의 예술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받았고, 나름의 작곡 활동 등으로 어필하였지만, 계속해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교를 당하며 해체 이후 꽤 긴 시간동안 개별 멤버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후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강타가 당시의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도 했다.[113]
한 마디로, 당시 대한민국의 문화계에서는 서태지를 "질투"하거나 "존경"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이들 시절 뿐만 아니라 솔로로 전향해서도 방송사에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전녹화". 당시 음악방송은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는데, 음향 시스템이 음악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태지는 방송사 측에 생방송 무대 대신 별도의 스테이지를 만들어 녹화하는 방식을 요구한다. 당시 가요계에서는 "서태지만을 위한 특혜"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114]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켰으며 지금도 음악방송을 나올 때 사전녹화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 당시로서는 엄청난 비난과 방송사와의 대립각을 야기한 무모한 행동이었지만[115] 현재 여러 음악 프로그램에서 사전녹화는 높은 퀄리티의 무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포맷이 되었고 결국 관행으로 자리잡아 후배 아티스트들이 생방송의 부담감을 이겨내고 수준 높은 무대를 보이는 기회가 됐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정말 선구자적인 셈.
2022년 들어서 이승기 후크엔터테인먼트 계약 논란, 이달의 소녀 츄 퇴출 사건, 스파이어엔터테인먼트 OMEGA X 멤버 폭행 사건 등으로 기획사가 아이돌에게 갑질을 하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80, 90년대에나 발생할 법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서태지가 기획사에게 아티스트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 사실이 얼마나 파격적인 일이었는지가 다시 한번 조명되었다. 그와 동시에 서태지가 기획사의 횡포를 행동으로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그만큼의 부와 인기, 역량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116] 수십년 가까이 공고하게 축적된 기획사-방송사-언론사 유착관계가 이 아티스트 한 명으로 바뀐 것이 아님이 드러나 씁쓸함을 남긴다.[117]
6.2.3. 공연윤리위원회와 '시대유감'
서태지 2000~2001 Live Concert 태지의 화 - 시대유감 |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심의제도와의 맞다이에서 이긴 결정적 인물이기도 하다. 사전심의제도란 당시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제16조에 의거 새로운 노래가 나왔을 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는지 공윤에 사전 검열을 받는 제도인데 여기서 시대유감의 가사 중 일부가 지적을 당하자 이에 반발한 서태지가 수록곡 '시대유감'에서 가사를 아예 통째로 들어낸 상태로 앨범을 발매함으로써 사전심의제도에 항의를 한 것. 서태지가 후에 밝히길 시대유감 사건으로 인해 당국의 조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공윤과 트러블을 일으킨 곡은 <시대유감> 한 곡만이 아니었다. <컴백홈>, <필승>,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118]는 앨범 발매 후에 문제가 되었는데, 앨범에 실린 가사가 사전 심의 때 제출한 가사와 다르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 때문이 공윤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에 서태지는 <미디어오늘> 1995년 11월 15일자 백승권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가수들도 심의 뒤 수정을 하지만, 왜 유독 내 4집만 문제삼는 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면서도 "4집에 대한 공륜의 태도는 우리 때문에 자기 위상이 실추된다고 해서 보복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표했다. 백승권 기자도 "정태춘 씨도 사전심의 거부 중이라던데?"라고 묻자 그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해 정태춘 씨에겐 부끄럽지만, 그래도 팬들을 위해 대중적 토대를 버릴 순 없다"고 답했다.[119] 당시엔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자체에 제동이 걸릴지도 모르는 큰 사건이었으므로 팬들이 받은 충격은 컸으며, 이를 계기로 팬들 사이에서 사전심의 폐지 서명 운동이 벌어졌다. 동년 10월 17일 MBC 《PD수첩》 '시대유감 우리 사회의 노래(백종문 취재)' 편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다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본래 알던 사람들끼리 조용히 논의하던 사전심의제도의 부당함과 폐지안의 통과에 대한 당위성이 서태지 팬덤의 힘을 등에 업고 사회 전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던 사전심의제도 폐지 이야기는 당시 서태지를 좋게 보고 있던 김대중 야당 총재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수면 위로 급격히 끌어올려졌고 해당 법률은 공론화를 통해 힘을 얻어 초안대로 깔끔히 폐지되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정태춘 등 선배 가수들이 긴 시간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화제가 서태지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통해 사회 전반에 급격히 각인됨으로써 부당한 법률의 숨통을 끊는 결정적인 피니시 블로우가 된 셈이다.
물론 시대유감이 해당 사건에 공헌한 부분은 폐지에 관한 법률상 세부적, 실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사전심의의 부당함에 대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침투시키고 국회에 해당 법안 통과에 대한 지대한 압박을 주는 대형 선전의 성공에 그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률이란게 여당이 통과시키기로 의중을 모았다고 해서 쾌속으로 처리가 될지, 또는 당내 반대표로 인해 여러번의 칼질을 당하며 절름발이 폐지안으로 전락할지, 혹은 의지 부족으로 몇 년을 표류하게 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터에서 아군의 희생을 딛고 최후의 깃발을 꽂은 병사가 조명을 받는 것에 누가 함부로 어떤 비난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한 것 뿐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사전심의제를 주제로 SBS에서 토론 방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반대 측 패널로 출연한 한국 록 음악계 원로 신중현 씨는 창작자가 더 나은 표현을 쓰고 싶어서 바꿀 수도 있는데, 공윤 제출본이랑 다르다고 처벌하는 것은 지나치다라며 서태지를 옹호했다.
6.2.4. 초상권의 확립과 저작권 인식 증대
많은 연예인들이 자잘한 법적 분쟁에 시달리는 경우는 많다지만 이 양반만큼 아티스트 관련 굵직한 법적 분쟁에 시달린 사람도 드물다. 서태지의 수많은 법적 분쟁을 통해 현재 연예계에 맺어진 가장 큰 결실 중 하나는 초상권 확보와 저작권의 인식 증대다.1994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으로 브로마이드나 홍보 전단지를 만든 5개 회사를 상대로 초상권 침해 소송을 냈는데 이는 국내 첫 '초상권' 법적 분쟁 사례다. 지금이야 연예인들의 초상권은 재산권이라는 명제가 당연시되지만, 당시에는 연예인들의 사진을 이용해 문구류를 제작하거나 브로마이드 등을 판매, 또는 상품을 판촉하던 것이 관행이었는데 서태지가 이에 전면적인 도전을 한 셈. 이후에도 서태지는 자신의 초상권을 무단으로 침해하는 단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는 곧 연예인들의 초상권 개념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링크
서태지의 저작권 싸움은 보통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의 대립으로 많이 인식되지만, 원래 시작은 1992년인 그의 데뷔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 일본 공연 실황 비디오를 판매한 제작사를 상대로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는데 당시 콘텐츠 저작권의 개념이 모호하고 지상파에서는 연예인들의 공연 영상을 마구 찍어 방송하던 시절이라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링크
그로부터 약 10년 후, 국내 최대 저작권 분쟁의 서막이 오르는데, 이 사건은 2001년 서태지가 음치가수 이재수를 저작권 침해로 고소하면서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서태지 이재수 고소사건' 참고.
서태지가 이재수를 고소한 사건은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법적 공방이 아니라 음저협이 창작자의 권한을 위탁받아놓고 타인이 저작권을 이용할 때 아티스트의 권한을 무시하고 협회 단독 승인으로 진행하는, 이른바 사후 승인제가 문제라는 인식에 불을 지폈다.[120] 창작자의 저작권을 대놓고 무시하는 음저협의 행태는 그 전에도 음악인들의 많은 불만이 있었는데 서태지가 불씨를 제대로 당겨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결국 서태지는 음저협을 완전히 탈퇴했는데, 탈퇴 이후에도 음저협이 그의 음악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아 챙기자 폭발한 서태지가 협회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해 12년 간의 기나긴 법적 공방이 이어지게 된다.
2014년 대법원으로부터 원고와 피고측간 화해 권고가 내려진다. 협회가 서태지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반환' 소송과 관련 '협회가 청구한 금액 1억2천여 만원 중 서태지는 협회에 2,500여만원 가량을 반환하고 협회는 나머지 청구에 대해 모두 포기한다'는 내용이며, 양 측이 이를 받아들이며 12년 간의 기나긴 싸움이 마침내 종결됐다. 결과적으로 서태지가 음저협을 대상으로 완승을 거둔 것이다.
이 사건은 창작자의 저작권에 대해 업계는 물론, 대중과 사회의 인식을 바꾼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지금이야 창작자의 저작권은 중요하다는 인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 명백히 저작권을 침해당한 피해자인 서태지를 보고 '쪼잔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만큼 당시 저작권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까지 무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음악 관계자들이 자신의 저작권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으며,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음악저작권 신탁관리 복수화 정책으로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함저협)를 선택하면서 음저협의 50년 독점구조가 깨지게 되었다. 링크
이후 서태지의 저작권은 함저협에 신탁한 공연권[121] 외 전적으로 서태지컴퍼니 측이 관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태지는 저작권 관리에 대해 따로 수수료를 낼 필요가 없어 음저협 등록 창작자들과 달리 수익을 온전히 다 가질 수 있다. 서태지의 저작권료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2014년 방영된 tvn 명단공개에 '저작권료만 수백억! 의외의 싱어송라이터'에 저작권 부자 1위로 소개되었다 링크. 다만 이 방송 내용에는 약간 과장도 섞여있어 팬들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다.[122]
2014년 함저협과 음저협 모두 서태지에게 신탁업무 계약 제안을 했다고 한다. 링크 위의 사건 덕분에 서태지는 한국 음악의 저작권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두 협회 모두 서태지를 회원으로 가입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한다.[123]
그리고 2020년, 서태지가 함저협과 공연권 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노래방 등록에 관한 권리로, 이로써 서태지의 모든 노래를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링크
7. 비판
자세한 내용은 서태지/비판 문서 참고하십시오.7.1. 1라운드: 음악적 변신과 과열된 논란
1집, 2집까지는 청소년 팬들이 가볍게 좋아할 만한 사랑, 우정, 이별, 젊음에 대한 가사를 담으며 이렇다 할 사회적 잡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1994년 공개된 3집에 교육 제도를 비판하는 <교실 이데아>, 통일을 노래하는 <발해를 꿈꾸며>를 수록하며 성숙한 이미지로의 변신, 이전보다 자신이 담아두었던 이야기 등을 꺼내려는 등의 노력이 표면화되는데, 여기서부터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당시의 언론은 성숙하고 난해한 가사와 무거운 헤비메탈을 들고 나온 서태지를 온갖 논조로 사골처럼 달달 달여내서 서태지라는 인물상에 대한 거품을 엉망진창으로 부풀렸다. 수록곡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틀면 ' 피가 모자라'라는 악마의 절규가 들린다는 괴담이 언론지를 통해서 마치 사실처럼 유포되었고, 서태지가 그 보도를 접하고 "오, 그렇게 들려? 신기하네."라고 무신경한 웃음을 짓던 때[124] 이미 세상에서 그는 사탄 숭배자이면서 게이[125] 또는 심지어 남장여자라는 등 검증할 수도 없고, 검증되지도 못할 해괴한 루머에 기반한 괴물로 왜곡되어 있었다.
아마도 나름 메이저급 일간지를 임신설로 장식한 남자연예인은 서태지가 한국 역사상 유일할 것이다. 그래서 서태지도 이런 왜곡보도를 우습게 생각하면서 "아니? 무슨 내가 임신을 했대요 ㅋㅋㅋ 남을 임신시킨게 아니고 ㅋㅋㅋ" 라고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 이게 정말 황당한게 서태지가 여자를 임신시켰다는 게 아니라 서태지가 몸소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서태지가 남자가 아닌 남장여자이고 그가 활동 이후 휴식기를 갖는 것은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닌 애를 낳기 위함(...)이라는 말도 안되는 루머였다. 아마 서태지 본인이 곱상한 꽃미남인데다가 서태지와 아이들 당시 지금보다 더 중성적인 외모였던 것에 비해 다른 두 멤버가 너무 남성적으로 생겼던 탓도 있고, 거기에 당시로서는 아직 낯설었던 공백기라는 개념이 합쳐져 이런 소문이 난 듯하다. 그래서 2009년 뫼비우스 투어 당시 서태지는 "나는 임신도 가능한 남자" 라는 멘트까지 시전한 바 있다.
당시 언론의 황색언론으로서의 작태는 대중들에게 서태지라는 인물에 대해 금기를 넘는 혁명가나 사탄의 이미지, 또는 과도한 천재상을 부여할 만큼 지나쳤다. 확실히 대중의 호응으로 먹고 사는 스타로서는 이것 이상 없을 정도로 대성했다고 할 수 있지만, 대중음악 예술가 서태지의 담백한 부분은 이런 노이즈를 겪으며 대중에게서 잊혀지게 되었고 이 또한 오늘날 서태지 특유의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과도한 루머와 허위 악성댓글로 인해 이거 너무 과한데 서태지한테 왜 그러는 건지 의구심이 생긴 사람들이 서태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서 오히려 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여 이로인해 락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고 락문화의 파이가 깊고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7.2. 2라운드: 서태지 깎아내리기
그 다음 안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옐로 저널리즘이 극치를 달리던 2000년대 초반 솔로 2집 시점부터다. 사생활과 음악 활동을 철저히 분리하기로 한 서태지가 졸졸 따라다니며 꼬치꼬치 캐묻는 기자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자, 곧 무지막지한 수준의 원색적인 비난을 담은 보복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콘서트, 음악 방송 등등 활동시기에 세션으로 인디밴드의 연주자들을 규합해 공연을 다니자 인디 씬에서도 댄스가수 출신인 서태지가 돈을 벌려고 인디밴드 흉내를 낸다고 대거 반발 성명을 내고 안티 서태지 공연을 하는 등 다양한 악재가 겹치며 안티가 대거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언론이 만든 서태지에 대한 엄청난 거품을 그들 스스로가 남김없이 꺼뜨리고 오히려 쓰레기 아티스트로 매도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가짜 천재 서태지'에 대한 마녀사냥에 가까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때는 인터넷에서 서태지를 까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다고 할 수 있다.이 시대의 대표자로서는 서태지 인형 뱃속에 순대를 넣어뒀다가 배를 갈라 뽑아 먹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해 주목받았던 인디밴드 노브레인이 있다. 노브레인 이외의 안티 서태지 운동을 하던 인디밴드들은 서태지가 저항을 상품화 해 돈을 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내세우는 자신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노브레인이 차승우의 탈퇴 이후 사실상 상업적 펑크로 방향을 틀었고, 닥터코어 911은 이정현 무대 뒤에서 핸드싱크를 시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우스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노브레인은 멤버의 탈퇴와 교체로 밴드의 방향성이 달라진 경우에 속하고 닥터코어 911의 경우는 원 기타리스트 답십리안(탑)이 서태지 밴드의 기타리스트 멤버로 발탁된 것을 계기로 비슷한 처지(?)에 있던 크로우와 함께 서태지의 오프닝 공연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안티 서태지와는 상관없는 밴드다.
이런 시기에 서태지 팬들은 안티들이 말하는 대로 서태지가 사기꾼이자 비참한 음악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국수용인지, 아니면 한국을 벗어난 범주의 평론가에게도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 자비를 들여 어떠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바로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소포를 보내 해외웹진에 리뷰를 의뢰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런다고 서태지의 음악성을 객관화하고 서태지 음악의 수준을 부정하는 시각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이 소포에는 6집을 포함한 서태지의 모든 앨범과 가사번역본, 뮤직비디오, 연혁 및 소개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해외웹진에서 서태지 6집에 대한 리뷰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평가도 꽤나 다채롭게 나왔다.
단순히 좋은 앨범이라는 평가에서부터 보컬이 매우 인상깊다, 콘과 림프 비즈킷보다 뛰어나다는 극찬까지 있었지만 거의 모든 리뷰에서 Korn의 음악 스타일과 공통점이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
당시 리뷰들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1, 2, 3, 4, 5, 6, 7, 8
훗날 2004년 1월 29일에는 그 Korn을 Fear Factory와 함께 초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 공연상황
7.3. 3라운드: 떡밥 실종, 빠와 까의 대리전
2000년대 중반 7집 활동 즈음에는 서태지 팬 외의 음악팬들이 지나친 서태지 팬들의 서태지 신격화 내지는 후한 평가에 반발하여 소위 ' 빠가 까를 만든다'라는 식으로 안티가 된 경우도 있다. 악질 스토커들이 팬코스프레를 하며 서팬덤을 욕먹이는 현상으로 일어난 부정적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서태지가 팬덤을 위한다면 무려 20년이 지난 후에도 벌어지는 팬코스프레로 인한 팬덤 이미지 살인에 대한 확인이 꼭 필요하다.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유난히 극성스럽다, 자부심이 강하다는 지적 또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다. 이 인식이 때때로 강조되어 서태지 팬들이 광신도처럼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이는 특정 표본 등을 중심으로 설정된 과장된 인식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터넷 등에서의 민간 차원의 갈등 외에도 대형 언론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보도 등, 외부에서의 이런저런 형태의 지속적 공격을 받아온 서태지의 팬층이, 반대로 유독스러운 결속력과 방어심리를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까가 빠를 만드는 것이다. 팬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나 곡해된 해석에서 기인한 비판이 주어진다면, 매우 의견이 다른 팬의 입장에서는 항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사전심의제 폐기 운동, SBS '한밤의 TV연예'에 대한 광고철회운동, 황색언론반대연합, 대중음악판바꾸기위원회, 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 등의 활동에 서태지 팬들이 참여하게된 동력의 원천은 서태지와 관련되어 있는 불합리였다. 이로 인한 사회적 성과는 작지 않다.
7.4. 4라운드: 아주 뒤늦게 알려진 이혼
결혼조차 알려지지 않은[126] 슈퍼스타의 이혼과 재산 분할 소송 피소, 그리고 재혼 소식은 데뷔 연차에 비해 의외로 큰 출렁임 없이 일정 규모를 유지하던 팬덤에서 일부 팬들은 극심히 분노했다. 분노의 요점인즉 사생활에 대해 팬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재혼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팬사이트 별로 팬덤 규모는 두 토막 세 토막이 났으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서태지를 가장 좋아하고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가장 극렬한 안티로 돌아섰다. 이들은 각종 기사에 팬이었던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을 댓글로 달고 있다. 문제는 그 댓글 중에 사실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악의적인 시선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아이돌 팬덤이나 마찬가지지만, 안티로 돌아선 팬은 무섭다.
팬코스프레를 하면서 악성루머를 유포하는 인간도 많다. 팬덤 뒤에 숨으면 안심이 될 수밖에 없다. 먹고 살기 힘든 현실 속에서 무려 11년이 넘도록 무려 악질 댓글을 달고 다니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현재까지(2024년 6월 8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애초에 그런 조작까지 했던 인간들의 정체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서태지의 개인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팬들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저러고 있나, 몸은 늙고 머릿속은 아직도 학창시절 오빠부대인가' 한다며 이탈한 팬들을 극렬히 혐오한다. "아무리 팬들을 마누라라 불렀다지만 정말 그대로 믿었냐"는 것인데, 마누라 호칭은 애초에 남성까지 포함한 팬 서비스 발언이었다. 팬코스프레하며 이간질하는 인간으로인해 팬들간의 오해가 깊어지는 것도 우려가 되는 상황이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서태지갤러리에서 팬코스프레하는 인간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정황이기까지 하니까 확인이 꼭 필요하다.
이혼 문제는 서태지가 부부 사이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공개적으로 모두에게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십여년이 지났음에도 악질 루머를 유포하는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조직적인 댓글 조작(모든 글과 영상에 댓글조작은 불가능하므로 곳곳에서 악플이 비정상적인 %로 우글대면서 이미지 살인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고 범죄자들 스스로 알려주고 있기까지 하는 현상)이 무려 25년이상 이루어지고 있고 팬덤 이미지 살인도 같이 이뤄지고 있으므로 팬덤을 위한다면 확인을 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외에도 8집~9집 휴지기 동안 위 이슈뿐만 아니라 팬덤 내 자체갈등 여러 개까지 더해져 은근히 소동이 있었던 편이다. 9집에 실린 8번 트랙 '비록'은 이런 상처받은 팬들을 서태지의 입장에서 위로하는 곡. 가사를 곱씹어 보면 진심을 더하고 뺄 것 없이 꾹꾹 눌러 담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먼 훗날인 2024년, 일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나왔다. 마후마후-미케네코 이혼 사건 참고.
8. 2010년대 이후 행보
2010년대2012년 3월 23일에 데뷔 20주년을 맞이하여 서태지의 음악 역사를 되짚어보는 서태지 아카이브 홈페이지를 공개했다. #
2012년 12월 27일 청담동 클럽 엘루이에서 20주년 기념 파티를 개최했다. 본인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게임행사 및 공연, 그리고 깜짝 전화연결을 하기도 하였다. 클럽 안에 모인 2천여 명의 매니아들은 열광했다. #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재혼한다고 발표했다. #
2014년 6월 23일 한 사생팬이 서태지 자택에 침입을 했다가 체포됐다. 경찰은 이 사건을 불구속 기소 송치했다.
2014년 10월 22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여기서 9집 신곡을 설명하며 자신이 어릴 적 살았던 '소격동, 예쁜 동네의 무서웠던 시절'[127]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영상.
2015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토요일 헤드라이너로 확정 되었다. 당연히 팬들은 난리가 났지만 일부 락 커뮤니티에선 온갖 야유와 분노가 쏟아졌었는데, 공연 이후 분위기가 반전되고 역대급 라이브였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2014~2016년 3년 연속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인생에 큰 불행이 찾아왔다. 2014년 말에는 이종 6촌형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고 2015년 말에는 자신과 같이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한 오랜 친구인 이주노가 서태지의 이름을 빌려 최모 씨에게 1억 원을 빌렸다가 갚지 않아 소송당했다. #[128] 2016년 7월에는 이주노가 성추행 혐의로 입건되었다. 팬들은 이번엔 도저히 봐줄 수 없다는 반응. 본인은 혐의를 일체 부인했으나 결국 실형을 선고 받았다.
2015년 10월 25일 발매된 신해철의 유작 앨범 Welcome To The Real World의 타이틀곡인 Welcome To The Real World의 마무리 작업을 담당하였다. 본래 신해철이 2014년 당시 수능을 준비하던 조카를 위해 제작하던 곡이었으나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본인의 손으로 완성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성지훈 엔지니어와 서태지, 그리고 나머지 N.EX.T 멤버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9집 활동 종료 후 가족과 함께 떠난 미국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이용한 다이어리를 출시해 생존신고를 했다. 가격은 25,000원.
2016년, 자신의 곡으로 만든 알베르 카뮈 원작의 쥬크박스 뮤지컬 페스트의 공연장에 약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은 VIP DAY로 서태지 이외에도 god, 로이킴 등 다양한 가수들이 참석했다.
뮤지컬은 음악적인 면에서는 호평을 받았으나, 원작 소설 페스트의 주제 의식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기엔 부족했다는 평을 받았다. 기사
2021년 5월 21일, 음악감독 김성수의 인터뷰를 통해 페스트가 2023년 재연 예정이며, 서태지는 최근 미국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현재 김성수 감독이 각본을 쓰고 있는데, 미국에 있는 서태지에게 직접 확인 작업을 거쳤다고.
2017년 9월 2일, 방탄소년단을 게스트로 초청해 데뷔 25주년 기념 공연을 했다. 2007년 15주년 당시 본인은 콘서트에 참여 하지 않고 짧은 영상으로만 출연했던 것과는 대조적. 그리고 후배들과 같이 음원 리메이크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자세한 내용은 음반 목록을 참조할 것.
2017년 8월 14일,무려 V앱 생방송을 진행했다. 진행은 하현우가 맡았다.
2018년 10월 22일 25주년 콘서트 SEOTAIJI 25:TIME TRAVELER를 기존과 동일하게 블루레이와 DVD 합본으로 발매한다. 잠실주경기장에서 공연한 본 공연만 수록되며 앵콜공연은 풀 공연이 수록되지 않는 듯. BTS와 함께 꾸민 무대들은 전곡이 수록된다. 발매 전날인 2018년 10월 21일 전야제 겸 상영회를 개최하며 400여석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입장료는 단돈 천원이며 티켓 소지자에 한해 블루레이를 하루 일찍 구매할 수 있다.
2019년 12월 24일 오후 8시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9집 Quiet Night 공연 실황 풀 버전 및 평창동 원정대 팬미팅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2020년대
2020년 3월 23일부터 서태지의 음저협 탈퇴로 인해 노래방에 수록되지 못했던 8집과 9집, 데뷔 25주년 기념 리메이크 곡들, 8집 이후 콘서트의 라이브 버전들이 금영노래방과 TJ미디어에서 서비스된다. # 저작권 복수 단체로 인정받은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함저협)가 도입한 신탁범위선택제를 통해 공연권 징수가 가능해졌다고. 금영과 태진 모두 곡이 꾸준히 추가되고 있다. 2020년 4월 7일 기준 노래방 업데이트 목록
2020년 9월 27일 유튜브 주노가중개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JXtZCIthCNk 무한도전 이후로 서태지의 평창동 집을 최초로 공개하였다. 물론 서태지는 집이 너무 많이 알려진 탓에 2019년 하반기에 다른 곳으로 이사했지만, 아직까지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2020년 10월 27일 오후 3시, 텀블러+투명 포토카드 굿즈를 발매하며 생존신고를 했다. 가격은 25,000원. 이는 2017년 12월에 출시한 2018년 다이어리 이후 무려 3년 만의 굿즈. 때문에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그동안 말라비틀어져 있던 매니아들이 순식간에 몰려들며[129] 약 6분 만에 품절되는 기염을 토했다. 워낙 빠르게 매진되었으며, 공지도 전날 밤에서야 etpshop과 인스타그램에만 올라와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데다 모바일로 etpshop에 접속한 경우에는 공지와 상품이 뜨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매니아들은 텀블러를 사지 못하고 원통해했다. 이후 서태지컴퍼니에서 이 사실을 인지했는지 10월 30일부터 4일간 예약판매를 진행했는데, 1차와 2차로 배송을 나눠서 해야 할 정도로 주문량이 폭주했다. 긴 공백기 도중 하도 오랜만에 나온 떡밥인지라 매니아들은 신이 나서 10집 컴백과 관련된 다양한 궁예질을 하고 있다.
2021년 3월 15일 밤 10시 40분, MBC 집콕콘서트를 통해 9집 Quiet Night 콘서트 실황 영상을 송출했다. 시간 관계상 블루레이 및 유튜브로 공개된 풀 버전에서 일부 곡들을 잘라내거나 곡 순서를 바꾸는 등의 편집이 이루어졌다. 참고로 가사에 'Fuck'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방송금지를 당했던 F.M. Business는 그대로 나왔다! 다만 가운뎃손가락을 드는 제스처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방송 후 팬들은 '20210315 에펨이 첫 공중파 진출 기념일' 드립을 쳤다.
서태지컴퍼니는 그 다음날 공식 트위터에서 해당 영상을 라이브로 다시 내보냈고, 약 300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에는 외국인 시청자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Hashflag와[130] 트위터에 새로 도입된 Fleet 기능까지[131] 사용하면서 집콕콘서트를 홍보했는데, 서컴이 다음 활동을 위해 트위터의 여러 가지 기능을 시험해 보고 트위터를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팬들의 추측이 있었다. 이 시기에 맞추어 트위터 아이디 역시 @SEO_TAIJI로 변경된 것도 근거를 싣는 데 한몫했다.[132]
2021년 4월 28일 오전 11시에 여름 티셔츠+투명 포토카드 굿즈를 발매했다. 4집 수록곡 Free Style의 가사와 뮤직비디오의 스노보드를 따왔으며, 블랙과 화이트 두 버전이 있고 버전별로 포토카드도 다르다. 서컴 티셔츠는 워낙 작게 나오기로 유명한 탓에 중간 사이즈가 아닌 2XL이 가장 먼저 품절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133] 머지않아 전 사이즈가 품절되었으며, 이에 5월 14일부터 21일까지 예약판매를 진행했다.
2021년 5월 14일, Come Back Home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삼성 비스포크홈 광고가 유튜브에 업로드되었다. 가사와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장면들이 많아[134] 연출 면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TV와 유튜브 광고로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올랐는데, 6월 5일 기준 조회수 1,000만 회를 돌파했다.[135] 2022년 5월 16일, 해당 영상은 2,200만회 조회수를 기록하고 비공개 동영상으로 전환되었다.
2021년 12월 24일 오후 8시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서태지 25주년 기념 공연 실황 with BTS 풀 버전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2022년 11월 15일, 자녀 교육 문제[136] 때문에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루머성 기사가 보도되었다. '측근', '관계자'라는 단어가 그렇듯 크게 신빙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21년 미국에 있던 그에게 페스트 대본을 보냈다는 김성수 감독의 인터뷰와 서태지컴퍼니 사옥이 있던 논현동 건물 매각 등 국내 재산 처분 정황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
2022년 12월 24일 1년만에 근황을 전했다. 딸 담이가 홈 스쿨을 마치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으며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겨 앨범은 당분간 요원할 것 같다고 밝혔다. # 다만 나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의 나는 변화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마음가짐도 필요한 어떤 분기점에 서있는 것 같아요라고만 밝혔다.
2023년 크리스마스에 1년만의 생존 신고를 했다.
2024년 3월 28일 과거 뮤직비디오와 라이브 영상에 대한 업스케일링 및 화질 개선을 해 매주 목요일에 업로드하겠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9. 기타
9.1. 사회 참여
"제가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음악이 록 음악인데요. 록 음악에는 항상 저항 정신이 들어 있잖아요. 잘못된 게 있으면 음악이나 예술을 통해서 고칠 수 있는. 그런데
1집 낼 때는 사실 경황이 없었어요. 그냥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댄스팀을 만들어서 음악적인 관심을 많이 보인 반면에, 가사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사회적 비판이라든지 사회 참여를 별로 못 했어요. 그런데 저희가 이제 나이가 좀 들면서 여유로워지기도 하고요, 그런 영향이 있기 때문에, 꼭 사회 비판적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1995년 12월 17일 방영된 추적 60분에서의 인터뷰 내용
1995년 12월 17일 방영된 추적 60분에서의 인터뷰 내용
- 딱히 소셜테이너, 폴리테이너로 분류되지는 않지만[137], 소소하게나마 사회 현안에 대해 메시지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2003년에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문화연대를 비롯한 30여 개 시민 단체에서 반대 운동을 벌였는데, 당시 7집 앨범을 구상 중이던 서태지도 동참한 것. 서태지는 공식 홈페이지에는 덕수궁터 내 미대사관 신축 반대 배너를 띄워 서명 운동에 협조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 광화문 사거리에 열린 공연에는 당시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피아가 노개런티로 출연했는데, 여기에 서태지 컴퍼니는 회사 차원에서 거리 공연에 필요한 장비 등을 지원했다고 한다. 링크 결국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
2003년 3월에는 이라크전과 파병을 반대하는 서명 운동에 동참하고 성명서도 냈다.
기사 다만 활동 기간이 아니었으므로, 성명서는
원타임의 송백경이 대신 나와서 읽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명분 없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이미 6.25전쟁을 통해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과 살아도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수백만의 이산가족의 비극과 슬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상 유례 없는 전 세계적인 반전여론 앞에서도 평화 및 외교적 해결을 버리고 행해진,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는 이라크 전쟁은 전 인류에게 인간다움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명분도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미국 행정부에게 죄 없는 이라크의 많은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부시 미국 행정부는 즉시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단하여 이라크 국민들이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전 세계 60억 인구에게 정의에 대한 믿음과 세계평화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는 부시 미국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며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전 세계인들의 행렬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부끄러운 전장 앞에 대한민국 젊은이의 파병을 반대합니다.
특정국가의 자국이기주의가 빚어낸 침략전쟁에서 대다수 국민의 여론과는 반대되는 한국정부의 파병계획에 반대합니다.
대한민국은 침략전쟁을 부인한다고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여 정부는 더 이상 국익을 명분으로 이라크전에 대한 굴종적인 지지를 통해 후손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단 한 사람의 대한민국 젊은이도 당당하지 못한 외교의 희생물로 내몰아서는 안 될 것이며 2002년 월드컵 당시 세계에 널리 보여준 우리 민족의 저력이 강대국의 침략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라는 부끄러운 현실로 가려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지지 및 이라크 전쟁파병 계획을 즉시 철회하기를 촉구합니다.
저는 한국대중음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라크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며, 반전평화운동을 펼치는 문화인의 대열에 서서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2003년 3월 25일 서태지
- 이러한 행적 때문에 당시엔 뜬금없이 일각에서 반미 가수로 인식되어[138], 2004년에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것을 그런 의도로 해석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영주권을 갱신하지 않은 것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어서 굳이 미국 영주권을 갱신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 기사.
- 한편, 당시 정치권에서는 서태지가 어떤 정당을 반대하는지를 밝힐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이재오 의원은 연예인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경고하면서 문화 전략을 잘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사.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태지의 팬을 자처했다.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도 그가 붙여 준 것이며,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콘서트 당시엔 화환을 보냈다. 또한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까지 했으나 서태지는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139] 이처럼 여러 번 만남을 거절해 오다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인 2004년에야 처음으로 만났다. 대통령 당선 전과 재임 시기에 만나는 것은 아무래도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
- 이 때문인지 서태지는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발언도 홍보에 이용될 수 있다며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만 2010년대 이후 들어서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감명 깊게 보았고 이를 계기로 원작 소설도 읽었다며 소설 파이 이야기를 추천하기도 했다.
- 1996년에 개원한 한국 최초의 장애인 전문 치과 병원에 기부한 사실이 20년 만에 알려졌다. 기사.
- 2014년 겨울을 목표로 신해철, 이승환 등과 함께 사회 참여를 논하는 합동공연을 실제로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주도하던 신해철이 의료과실로 사망하며 이 공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만약 성사되었으면 세기의 무대라고 할 만한 라인업이 되었을 것인데, 언급된 사람 모두 공연에 일가견이 있는 뮤지션들인지라,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다.
9.2. 오타쿠
오타쿠다. 그것도 빼도박도 못하게 아이들 시절부터 자기 기타에 닥터 슬럼프 코믹스 1컷을 붙여놓았고, 7집 당시 다큐에서 화장실에 원피스 만화책이 쌓여있었다. 심지어 이나중 탁구부와 괴짜가족을 좋아한다고.[140] 그외에도 시간나면 이것저것 보긴 하는 듯. 7집 당시 영상물을 보면 강 장관 절교해라면서 20세기 소년 대사를 패러디하는 모습도 나온다. 8집 수록곡 <틱탁> 프로모션 때는 마침 20세기 소년이 영화화되어 한국에 개봉할 시기여서 공동 프로모션을 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에 20세기 소년 관련 이미지를 사용하였고, 영화 상영관에선 상영 전 뮤직비디오를 먼저 틀어주는 방식으로 협력했다.평소부터 RC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아낌없이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상물을 보면 꼭 나오는 장면이 RC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라 해도 될 정도.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즐겨온 취미생활이며, 2004년 블라디보스톡 때는 배에서 원격 조종으로 RC를 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은 육아 때문에 잠시 휴업 중이라고.
UFO, 미스터리, 특촬물 덕후이기도 하다. 사실 80~90년대에 어린이용으로 많이 나왔던 책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는 음악의 소재가 되거나 프로모션에 활용되기도 했다. 5집 수록곡 <테이크 1>은 외계유입설[141]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곡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고, 장장 30분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까지 나왔다. 또한 6집 수록곡 <울트라맨이야>는 특촬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오타쿠를 위한 응원가이기도 하다. 서태지컴퍼니 내의 레이블인 괴수대백과사전 또한 1980~90년대에 각종 괴수물에 대한 내용이 적혀 발매된 책자의 이름 괴수대백과에서 따온 이름[142]. 특히 8집은 모아이,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유명한 미스터리 떡밥을 집대성한 앨범이었다.
만화 말고도 RC, 자동차[143], 오토바이, 음향장비, 장난감[144] 등 재력과 덕력을 고루 갖추고 골고루 다 소화하는 능덕이다. 한번 손을 대면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기질이 강한 데다 손재주도 좋은 편이라 타고난 훌륭한 오타쿠다.
7집 다큐에서 서태지의 일본 내 자택 촬영을 했는데, 서태지가 만든 프라모델들을 보고 촬영 스태프가 "만드는 걸 좋아하시나봐요?"라는 질문에 서태지는 "음악도 만드는 건데요, 뭘. 다를 거 없죠."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음악도 그렇고 창작 활동 자체에 흥미가 많은 걸로 보인다.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중 가장 친했던 양현석 또한 이런 성향에 어느 정도 물든 걸로 보인다. 힐링캠프 양현석 편에서 자신의 사무실을 공개했는데, 각종 로봇과 히어로물 피규어에 둘러싸여 있어 MC들이 당황하기도 했다. 사실 서태지 주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타쿠거나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9.3. 팬 사랑과 역조공
1993년부터 경호업체 'TRI인터내셔널'이 서태지를 경호하고 있다. 이 업체의 김성태 대표는 서태지를 경호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기사그런데 이 책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도 경호와 관련된 각종 에피소드들이 인터넷에서 회자되었다.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경호업체와 계약할 때 팬 경호 조항을 넣었다고 한다. 절대로 팬을 폭행해서는 안 되며,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내용이라 한다. 콘서트 전날에 팬들이 밤을 새고 있는 것을 알고 경호 업체를 보내 지켜주기도 했다고. 이를 갈무리한 블로그 글
재산 목록 1호는 팬들이 보낸 종이학이라고 한다. 2015년 3월 1일에 열린 앙코르 콘서트에서 언급했다. 이미 2007년에 데뷔 15주년을 맞아 팬들이 보낸 종이학을 전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찍이 과도한 조공은 받지 않았다.
1995년도 3월, 잡지 인터뷰에서 20년 후에 팬을 만난다면 커피를 사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링크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데뷔 20주년이 되는 해에 커피 역조공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2년 12월에 영등포 CGV THX관에서 <서태지 특별 상영주간> 동안 서태지 공연 실황을 상영했는데 이 시기에 맞춰 6층 카페 건물을 빌려 서태지 카페를 운영한 것. 음반이나 티켓 등 서태지 팬이라는 증표를 보이기만 하면 아메리카노를 무료로 제공했다. 종이컵은 서태지 팬덤의 상징인 노란색이었는데, 서태지가 직접 그린 그림이 들어갔다. 카페 내부 인테리어에도 서태지의 일러스트가 들어갔다고 한다. #
이 이벤트는 서울을 비롯해, 대구광역시, 부산, 광주, 제주까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12월 3일엔 대구시민운동장 주변, 5일엔 광주무등경기장 주변, 7일엔 부산사직종합운동장 주변, 제주도는 3일부터 7일까진 제주도 조안스튜디오에서 커피 버스를 운영했다.
2014년 12월 24일에는 평창동 자택으로 팬 300명을 초대하는 평창동 원정대 이벤트를 열었다. 기사 팬들에게 손수 포장한 선물 주머니를 나눠 주었는데, 기본 아이템은 여러 종류의 과자와 홍삼액, 핫팩이며, 여기에 서태지 브릭, 케토톱, 기타 피크 등이 랜덤으로 들어갔다.
이 이벤트는 2016년 2월에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능력자들에 서태지 능력자로 출연한 김홍기 씨가 방송에서 언급했다. 해당 방송 동영상
방송에는 안 나왔지만, 팬들이 쓴 후기 들을 보면, 집 앞에 푸드트럭을 세워 두고 율무차, 커피 등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인원이 많은 관계로 집 마당에서 팬들을 맞았기 때문에 마당 곳곳엔 난로를 설치했다. 즉, 자택 마당에서 진행한 팬미팅인 셈.
그런데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팬들을 추운 데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꽁꽁 언 초코파이만 던져 주었다는 내용으로 둔갑했다. 사실, 당시에도 그리 화제가 되지 않은 일이었으나, 일부 어그로꾼이 뒤늦게 거론하기도 하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자기 블로그에 퍼 가 조회수를 올리려 하는 블로거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일설에 따르면, 서태지의 팬이었지만 그가 결혼한 뒤 안티로 돌변한 일명 뭉클이 이벤트 당첨자 중에 포함되어 악의적인 왜곡 글을 인터넷에 퍼뜨렸다고 한다. 이 자는 나중에 익명제 사이트로 옮겨가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한다. 팬덤 뒤에 숨으려고 팬코스프레하며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 다니는 인간들이 있는 정황이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팬코스프레를 하니까 당연히 들키는 경우가 많다. 디시인사이드 서태지갤러리에서도 들통나서 글 삭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짜 팬이 아닌 팬코의 정황이 있으므로 이것은 팬덤을 비롯해 서태지를 이미지 살인하는 사기 행위이므로 확인을 꼭 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9년 12월 25일에 서태지 컴퍼니에서 5년 만에 평창동 원정대 현장 동영상을 공개했다.
2008년 무렵 메이크어위시 재단에서 백혈병에 걸린 남자 고등학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서태지에게 연락을 취했고, 서태지가 이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기사 서태지를 만난 고등학생은 백혈병이 완치되고 기타리스트가 되는 꿈을 이뤘는데, 그 소년이 오랜 기간 할로우 잰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서한필이다.[145] 링크
9.4. 스타의 스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어마어마한 파급력으로 문화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라서, 현재 활동하는 연예인들 중에서도 서태지의 팬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리고,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유명인, 셀럽, 공인들도 포함하는데 어린 시절에 서태지를 TV에서 보고 자란 아이들의 영원한 우상이기도 했다. 자타공인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아성 : '바닷길 선발대'에 나와 서태지의 노래를 틀어 김남길과 함께 부르면서 팬심을 드러냈다.
- 검정치마 : 미국에서 활동을 하던 조휴일은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왔던 서태지의 족적을 따라 한국에서의 활동을 계획했고, 2008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서태지를 가장 좋아하는 국내 가수로 꼽았다. 2017년 음감회에서는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아티스트로 서태지를 꼽았다.
- 김남길 : 2014년 인터뷰에서 지금도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2020년 10월, tvN 채널에서 방영중인 '바닷길 선발대' 2화에서 고아성과 마찬가지로 'Heffy End'가 최애곡임을 밝히고 'MOAI'나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를 들으며 가사 하나 놓치지 않고 부르는 등 팬심을 꾸준히 보여주었다. 이후 2023년 6월 10일 자신의 팬 콘서트에서 'Heffy End'를 커버하며 여전한 팬심을 보여주었다. 직캠
- 김생민 : 연예가 중계에서 20년 동안 리포터로 근속하며 서태지와의 인터뷰를 전담했다. 스스로 밝히길 변치않는 팬이라고 한다. 서태지도 김생민과의 인터뷰를 선호하며, 김생글씨 라고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김생민이 과거 성추행 미투로 인해 연예계 생활을 불명예로 마감했기 때문에 차후 서태지 리포터가 누가 될 지 의문이다.
- 김대중 : 서태지를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메신저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서태지 역시 그의 통일관을 지지하여서 교류가 있었다. 서태지가 주장하던 음반사전심의제 철폐 노력도 기울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당시에는 팬들이 김대중에게 청원들을 보내자 이를 달래는 글도 썼다. 2004년 서태지의 7집 앨범 활동기에는 김대중 도서관에서 만남을 가지고 서태지는 자신의 싸인 CD를 선물했다. 현재도 김대중 도서관에 가면 서태지의 싸인CD를 볼 수 있다. 김대중이 사망했을 때에는 음악인 서태지의 이름으로 조화 화환을 보냈다.
- 김재중 : 컬투쇼에 출연했을 때 유튜브에 가장 섭외하고 싶은 게스트로 서태지를 꼽았다. 16:10부터
- 김현중(1986):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서태지의 ' 울트라맨이야'를 듣고 '저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성당 밴드부에서 베이시스트를 했다고 한다. 링크 [146]
- 김혜리(평론가) : 서태지 팬클럽에서 활동할 정도로 팬이었다. 또한 자신이 진행하는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가끔 서태지 얘기를 꺼내곤 한다.
- 김희철 : 1990~2000년 음악을 소개하는 프로 "이십세기 힛트송" 중 서태지 노래가 나오면 서태지 코스프레를 할 정도로 팬이며, 한때 드라마를 같이 했던 이은성에게 대놓고 형수님이라고 칭한다.
- 권상우 : 서태지가 공연했던 2014 MAMA에 참가했었는데,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서태지 선배님 무대 보러왔다고 밝힘.
- 낢 :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시절 출연한 인간시대를 보고 팬이 되었다고 밝혔으며, 자신의 만화인 낢이 사는 이야기에서 열성팬임을 여러 차례 인증[147] 했다.
- 데니 안 : 자신의 팬이 서태지를 욕하자 정색하며 화냈다는 얘기가 유명.
- 디핵 : 엑스재팬의 히데와 함께 서태지의 노래에서 많은 걸 느꼈다고 밝혔다. # 그리고 인스타에서 서태지를 팔로우하고 있다.
- 문근영 :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팬이라 밝혔다.
- 산다라박 : 필리핀 떠나기전 한국생활 할 때 '서태지'보고 부러워서 가수데뷔를 꿈꿔왔다. 자신의 꿈은 "여자 서태지가 되고 싶다." 발언하였다.
- 박찬우(축구해설가) : 과거 음악 평론가 경력이 있던 만큼 서태지에 대해 많은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히든풋볼에서는 아예 서태지 특집을 다루기도 했다.
- 박형철(법조인) : 서태지 팬클럽 부회장 출신으로 ' 하여가'를 잘 부른다고 하며 팬클럽 가입 약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 배성재 : 본인이 진행하는 배성재의 텐에서 수 차례 팬심을 과시한 바 있다. 이종범 작가와 같이 서태지 노래 월드컵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곡은 ' 환상 속의 그대'.
- 봉태규 : 과거 서태지의 <시대유감>이 심의에 걸려 방송이 금지되자 방송사 심의실에 전화해 "서태지 노래를 아느냐"며 따졌다고 한다. 서태지가 은퇴했을 때 펑펑 울었다고 한다. #
- 성시경 : 매우 열렬한 팬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성시경 특유의 직설적이고 소신있는 성격을 보면 당연할지도. 이 인연으로 2013년 그의 명곡 < 너에게>를 리메이크했다. 서태지 곡 중 최초의 케이스.[148]
- 성유리 : 서태지가 던지는 껌을 받기 위해 몸을 던진 적이 있다고 섹션TV 연예통신에서 밝혔다.
- 손호영 : 위에 소개된 데니 안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팬이다. 카뮈의 <페스트>를 원작으로 한 스토리에 서태지의 음악을 사용한 뮤지컬 <페스트>에 주연으로 나와 성공한 덕후가 되었다.
- 슈가( 방탄소년단) : 방탄소년단 멤버들 중 가장 서태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 피셜로 인증했다. 2017년 9월 21일에 방송된 두시탈출 컬투쇼에서 언급했다. 해당 방송 20분 무렵부터 나온다. 신보 기자회견에서 최근 참여했던 서태지 25주년 콘서트에 대한 질문에 함게 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영광이었다고 밝히기도. 방탄소년단은 서태지의 데뷔 25주년 기념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곡인 'Come Back Home'을 커버하기도 했다. 멤버들 모두가 서태지 25주년 공연에 출연해 Come Back Home을 불렀고, 멤버 중 뷔와 정국은 서태지와 같이 하여가를 부르기도 할 정도.
- 신화 멤버들 : 신혜성은 2001년에 SBS 도전천곡에서 난 알아요를 불렀으며, 김동완은 자신이 텐텐클럽 MC를 맡았을 때 신화 멤버들과 아카펠라로 이 밤이 깊어가지만 리믹스 도입부를 재현하기도 했다. 이민우는 최근까지도 2014년 9집 컴백 콘서트, 25주년 기념 콘서트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진도 "이십세기 히트송"에 출연해 <난 알아요> 춤을 췄고, 지금도 서태지 노래를 간간히 듣는다고 한다.
- 심은경 : 서태지의 SHOW 광고에 함께 출연하였고 8집 활동 총정리 DVD인 398에서는 덕심이 가득한 내레이션을 맡았다. 최근에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서태지 노래를 업로드한 바 있다.
- 안톤 숄츠 : 현 독일 공영방송 ARD 소속 기자. 90년대에 한국에 왔었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을 알고 좋아했다고 한다. 링크 2019년 6월에 모 언론사에서 열린 외신 기자 포럼에서는 지속가능한 한류를 위해 <교실이데아> 같은 사회적 현상을 다룬 콘텐츠가 많이 나와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링크
- 요시키(X-Japan) : 2009년 내한공연 전에 섹션TV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좋아하는 가수는 서태지라고 답하며 '훌륭한 뮤지션이고 기회가 된다면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기사 #
- 양동근 :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가수와 노래로 서태지의 컴백홈을 꼽았다. 해당 기사 본인 노래인 '흔들어'에도 컴백홈의 가사를 오마주했고, 복면가왕에 출연했을 때도 '컴백홈'을 불렀다. 해당 무대
- 유아인 : 꽤 오래된 팬이다. 전국투어 때도 목격된 바가 있다.
- 윤진서 : 서태지의 7집 활동 뮤직비디오들에 출연했다(로보트, Heffy End, Live Wire). 뮤직비디오 비하인드를 보면 7집 앨범에 싸인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7년 15주년 기념 공연에서는 MC를 맡았다.
- 윤하 : 미니홈피에 8집 컴백스페셜 본방을 놓쳤다고 슬퍼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으며, 데뷔 초 녹음 일정 때문에 2008 ETPFEST 관람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 티켓을 코팅해서 책갈피로 썼을 정도로 아쉬워했다. 이후 2009 ETPFEST때 섭외 제안이 오면서 서태지로부터 '기특하다'는 칭찬을 받자 자신의 존재를 선배님께 각인시킨 것 같아 뿌듯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윤하의 4집 수록곡 ' No Limit'은 서태지를 좋아해서 나온 곡이다. 25주년 기념 리메이크 앨범에도 참여하였는데, 본인이 직접 Take Five를 선택하여 커버하였다.[149]
- 이무진 :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을 때 서태지의 팬이라고 밝혔고 ' 모아이'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서 불렀다. 또한 리무진서비스 100회 특집에서 가장 섭외하고 싶은 게스트로 서태지를 꼽았다.
- 이은결 : MBC의 능력자들에 출연하여 팬심을 인증했다. 서태지 능력자로 나온 일반인도 기억을 못 하는 예전 TV방송에서의 율동도 기억하고 있었고,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수록곡 '너에게'의 엔딩 연호까지 알고 있었다.
- 이적 : 이적의 텐텐클럽을 진행할 때 서태지의 신보가 임박하자 공개 출연 요청 게시판까지 개설하며 팬들에게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으며, 결국 서태지가 출연하자 신이 나서 진행했었다. 정말 만나뵙고 싶었다고 기쁨에 겨워서 진행.
- 이정현 : 연예계로 데뷔한 이유가 서태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 이준기 : 서태지의 8집 컴백때 특별 프로그램에서 인터뷰어로 나와 팬심을 과시했다. 미니 콘서트와 ETP에 초대해달라는 말에 서태지는 그래도 줄을 서야 하며 표를 사서 오라고 화답했다.
- 종현: 크리스말로윈 음원 공개 전 자신의 트위터에 노래 가사인 '긴장해 다들'을 올려 홍보하기도 했다 링크. 생전 샤이니 아시아투어에서는 팀 동료 태민과 함께 <인터넷 전쟁>을 커버해 공연한 바 있다.
- 임형주 : 소격동에 대해 트윗을 올렸다. 링크
- 지코 : 롤 모델이었던 서태지와 한 무대에 섰다. 2014년 MAMA 때 서태지와 함께 <컴백홈>을 공연했고, 이때 일은 자신의 솔로 앨범 수록곡 가사에도 언급했다.
- 젝스키스 : 멤버 전원. 심지어 이재진은 양현석이 매제임에도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서태지를 제일 좋아했다고 밝혔다.
- 창모 : 인스타 라이브에서 가장 콜라보하고 싶은 아티스트로 서태지를 꼽았으며 널 지우려 해, 라이브와이어, 너에게 등 서태지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팬심을 과시했다. 이 후에서 인스타 스토리에 서태지컴퍼니를 태그하는 등 정성을 보이기도. 결국 서태지의 샘플링 허락을 받아 정규 2집 타이틀곡 '태지'에서 'Come Back home'을 샘플링했다.
- 최강희 : 싸이월드 미니홈피 한켠에 서태지의 사진만 따로 올려놓는 게시판이 있었다.
- 최송현 : 자신의 SNS에 팬심을 과시해왔으며, 2008년 ETPFEST 기자회견에서는 사회를 맡아 '16년 만에 서태지를 만나게 돼서 꿈을 이루었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 2012년에 팬들을 대상으로 서태지컴퍼니에서 주최한 클럽행사 '마지막 축제'에도 팬의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 최태성 : 트위터를 통해 팬임을 인증했다. 후에 인스타그램에도 서태지와 관련된 내용을 올리기도
- 타블로 : 자신의 라디오에서도 서태지의 노래를 선곡하기도 했고, 미국 생활 당시 하여가를 듣고 다녔으며, 박명수의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는 "사전 심의제도가 아직도 있었다면 에픽하이는 앨범을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본인 라디오에서 서태지의 팬이 보낸 ETPFEST 섭외 축하 꽃다발을 자랑하기도 했다.
- 하현우 : 서태지가 최초로 방송한 V Live에 진행을 맡아 함께 출연했는데 방송이 아닌 개인 팬미팅을 하고 갔다. 스스로도 팬심으로 진행해서 팬들의 말들을 잘 전해드리지 못한 거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2017년 9월 2일 진행되는 서태지 25주년 공연에 오프닝 게스트로 참가하기도 한다.
- G-DRAGON : 21세기 대중음악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그도 서태지의 광팬이다. 이 인터뷰를 포함해 여러 매체에서 서태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으며, 빅뱅의 2집 미니앨범에 수록된 <Crazy Dog>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속의 그대>를 샘플링한 곡이다. 2019년 나이키와의 콜라보레이션 신발 런칭 인터뷰에서 어릴 적 TV에서 본 서태지가 신은 신발을 보고 언젠간 나도 내가 신발을 직접 디자인 하고 싶다고 밝힌 바 사실상 성덕의 마지노선을 걷고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 H.O.T. : 멤버 전원. 특히 문희준은 서태지 콘서트에서 여러 차례 목격담이 존재하며, H.O.T. 해체 이후 록 음악을 시도한 솔로 초기 행보가 서태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이다.
- NELL : 멤버 전원. 이 때문에 서태지가 본인들을 서태지컴퍼니에 영입했을 때 서태지가 본인들의 우상이라 기뻤다고 밝혔다.
- 김도형( 잔나비) : 친척 누나들 영향으로 어린 시절 서태지에 입문. 어릴때 부터 서태지 팬임을 라디오와 기사를 통해 밝혔다 브이라이브를 통해 팬들에게 10월4일을 연주하기도 했으며,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를 들으며 스키를 타다 사고난 이야기는 잔나비 팬들에게 유명하다.
9.5. 여담
외가가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한다. MBC 인간시대에서 다룬 서태지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서태지의 외증조부가 조선시대 말기 고종 황제를 보필했던 육군 대장이었다고 한다. 링크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로는 독립 운동을 했다는데, 전처였던 이지아가 친일파의 후손이었던 탓에 어떤 언론에서는 두 사람의 결별을 ' 독립 투사의 후예와 친일파 후예의 이별'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다뤘다고도 한다. #- 반면 친가 선조에 친일파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서태지의 셋째 할아버지인 정희석이 해방 전에 소속되었던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이라는 이유로 그런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2008년에 친일인명사전 명단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검색해 보면 이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이는 친일의 기준이 지속성, 반복성, 자발성인데, 정희석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희석은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냈으며 국내에서 오케스트라를 맨 처음 만든 음악가로, 1944년에 재편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의 이사장 현제명(玄濟明) 아래 김원복·윤기선·이흥렬·이규용·나운영·정영재·김영애·이종태 이상의 단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만약 자발성이 있는 친일이었다면, 비밀리에 항일 운동을 펼쳤던 절친 김순남을 일제에 고발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오히려 해방 이후에 김순남과 함께 활동하였다. 당시, 정희석은 20대였는데, 저 당시에 20대였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발적으로 이러한 단체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의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일각에서는 있지만, 인터넷상에 나도는 친일파 명단의 신뢰성은 그보다 더 심각하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분이 김수환 추기경. 이분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제징집이었고, 단순히 일본과 관련된 기관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면 대한민국에 남아나실 어르신들이 없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작성한 명단은 무려 수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올라 있어, 일각에서는 친일의 기준을 너무 넓게 잡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명단을 확대했으면 확대했지, 좀처럼 축소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서태지가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최연소 운전면허 취득자라고 한다. 서태지는 '빨리 면허 따고 싶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긴머리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긴머리를 하고 대중교통을 타면 사람들의 시선이나 어른들의 한마디가 불편해서 빨리 자동차를 몰고 싶었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당시 서태지는 필기와 실기를 먼저 통과한 후 도로주행 시험을 1990년 자신의 생일, 즉 2월 21일 아침 첫 시험자로 미리 예약했다. 그리고 한 번에 통과해서 서태지는 만 18세가 되는 생일 아침에 운전면허에 최종합격하였다.[150]
영화 가필드에 출연하였다. #
몽골의 힙합 그룹 루미노가 서태지 아이들의 컴백홈과 원타임의 쾌지나 칭칭나네를 섞어 요상한 곡을 만들어 냈다. 듣기 서태지는 이후 사후 승인을 해줬다 관련기사
2008년 GM대우 토스카광고를 찍어 컴백 전에 소소한 이슈를 끌고 다녔다. 그런데 2015년 초에 있었던 9집 마무리공연에 람보르기니 디아블로[151]를 끌고와 토스카는 그새 팔아 치운 거냐는 의견이 많았으나, 아직까지 잘 타고 다닌다고 한다.[152][153]
1980년대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 중 한 에피소드에 '서태지'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연기한 사람은 박영규이며, 겁탈을 당한 부인의 원수를 갚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가수 원미연의 3집 수록곡인 ' 그대 내 곁으로'는 서태지에게 받은 노래다. 2014년에 소격동을 부른 아이유와 더불어 서태지가 곡을 준 단 둘뿐인 여자가수. 다만 아이유는 일종의 콜라보레이션이었으니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다. 다만 원미연은 생각만큼 그 노래가 히트하지 못해 서태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데 반 농담삼아서 자기가 무리하게 랩까지 소화해서 잘 안 된 것 같다고 언급했다. 당시에는 방송여건상 랩도 본인이 직접 전부 불러야 했었다고 한다.
가수 허니의 'X라는 아이'라는 곡이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전 극비리에 작곡한 곡이란 이야기가 있으나, 전혀 아니다. 원래 따로 작곡된 노래에 서태지가 약간의 조언과 가이드용 랩 데모 8마디만 만든 것.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서태지의 음성이 실린 버젼은 이 데모 테이프에서 유출된 것이다. # 허니의 기획사 직원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매니저였던 최진열을 비롯해 전부 서태지와 연관된 사람들이어서 극비리에 도와줬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활동할 때, 그의 매니저가 이동 중인 차 안에서 당시로서는 일반인은 홍콩 영화에서나 보던 수백만 원대의 비싼 초창기 휴대폰을 직업상 사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된 서태지가 호기심에 그게 얼마냐고 물었다. 특별히 자신에게 말을 먼저 걸거나, 뭔가 일 외적으로 다른 일에 호기심을 보이지 않던 서태지의 이례적인 행동에 장난기가 발동한 매니저는 서태지에게 "야, 이거 만 원도 넘어. 살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말없이 웃던 서태지는 일주일 뒤 그 다음 번 매니저와 함께 차에 타게 되자 매니저에게 진짜로 만 원을 주면서, "그거는 나 주고 형은 이걸로 새 거 하나 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2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물정에 어둡고 악기 구매할 때 물건 값 흥정도 못 해서 항상 다른 사람이 나서서 해야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시의 수익을 분배할 때에도 액수를 묻지도 않은 채 항상 "부모님에게 보내 달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돈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아 별명이 서크루지였다.
- KBS의 토크쇼인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가장 친한 지인으로 알려진 락커 김종서도 함께 출연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치약을 쓸 때 치약을 돌돌 말아 쓰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치약의 속을 열어서 잔여 분량까지 모조리 쓸 정도로 검소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인들에게 쏠 때는 확실히 쏜다고 하며 김종서, 그리고 매니저와 함께 인도 여행을 갔을 때 일행들이 지갑을 아예 꺼내지 못하게 하면서 여행 경비를 일체 본인이 부담하였다고 한다. 또 서태지 본인이 말하길 40대에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세금은 어떻게 내는지, 계좌 이체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몰라서 재산에 관련된 일은 늘 아버지께 맡겼었다고 한다. 맡겨놓고 있다가 필요하면 카드 받아서 쓰는 식으로 경제 활동을 해왔다고. 근래에 들어와서야 인터넷 뱅킹 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컴백홈>을 패러디한 <컴배콤>이란 곡이 있었다. 음치가수 컨셉으로 데뷔한 개그맨 이재수의 작품이었는데, 서태지가 음악 저작권 협회를 탈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서태지는 이재수의 음반을 내 준 라인음향을 상대로 고소했다. 고소 사유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코믹한 컨셉으로 패러디한 것 때문이 아니라, 원작자의 동의 없는 발매. 즉 저작권 침해 문제 때문이지만 서태지에 대한 오마쥬라는 라인음향의 주장이 어그로를 끈 탓도 있다.[154]
서태지는 리메이크곡이 없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음악을 팬들과 자신만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혔다. 가끔 YG엔터테인먼트나 서태지컴퍼니 소속 가수들이 라이브나 방송에서 서태지의 곡을 리메이크하다가, 최초의 레코딩 버전 리메이크로 빅뱅이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의 '필승'을 빌렸다. 후에 응답하라 1994 OST에서 리메이크가 성사되어 성시경이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너에게를 불렀다. 발라드곡을 발라드 가수가 부른 격. 성시경은 내레이션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2016년 4월에 우리동네 음악대장이 복면가왕에서 하여가를 리메이크 해서 불렀는데 이 역시 정말 이례적으로 리메이크를 허락받았기에 성사되었다. 9집 이후에는 리메이크 앨범이 따로 나오거나 한 방송을 통째로 서태지 리메이크로 채우는 등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서태지가 그 동안 리메이크에 유독 엄격했던 것은 이런 이유도 있겠지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서태지는 상술했다시피 서태지 이재수 고소사건으로 자신의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무단으로 상업적 활동까지 한 저작권 피해를 겪었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창작물의 저작권은 제대로 지켜주지 않으면서도 돈은 돈대로 징수하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실망해 탈퇴까지 했다. 심지어 서태지가 음저협에서 탈퇴한 이후에도 음저협은 저작권료를 챙기는 양아치짓을 벌이다가 서태지측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결과는 12년간의 소송 끝에 서태지측의 승소로 끝났다. 이렇듯 한국에서 대중 문화의 2차 창작이나 그에 따른 상업적 활동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인 2000년대 초에 리메이크에 엮인 사건에 워낙 크게, 그것도 일찍 데였다 보니 자신의 노래를 리메이크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연히 개인이나 소규모 록밴드가 자신의 노래를 리메이크해 유튜브에 올리거나 소규모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것 등 작은 규모는 눈 감아준다.
스튜디오에서 보드 장갑에 보드복을 입고 노래를 하는 등으로 우리 나라에 생소하던 스노보더의 복장과 문화를 소개하여 스키장에서 마이너였던 보더들이 스키를 누르고 대세로 올라게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심지어 스노보드 종목인 프리스타일이란 이름의 곡도 있다. 세계적인 스노보드의 유행이 서태지가 등장한 때와 겹친 영향이 더 크지만, 서태지와 아이들도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실제로 서태지와 함께 시나위에 있던 김종서, 이주노[155]는 우리 나라 스노보드와 스케이트보드 쪽에서 거의 1세대다.
노래 가사에서 알 수 없는 가사[156]가 많이 나온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는 그래도 몬더그린 수준이었지만 솔로 데뷔 이후에는 음악 스타일 자체가 연주의 비중을 보컬과 비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자연스레 가사가 잘 안들리는 경향도 더 강해졌다. 가사를 외우거나 가사집을 보지 않고 그냥 노래만 들으면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 그래서 한때 팬들에겐 그런 구절들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해석하는 것도 유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좀 많은데, 2집의 죽음의 늪 후렴구 가사 중 '피하지 않겠어' 뒤에 나오는 가사나, 3집의 교실 이데아에서 '그걸로 족해 족해'이후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은 목소리[157], 마찬가지로 3집 수록곡 널 지우려 해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태지가 부르는 정체 불명의 노래, 6집 인터넷 전쟁에서의 후렴구의 코러스로 들어가는 스크리밍 등, 심지어는 5집의 Take 3처럼, 가사집을 보지 않으면 가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곡까지 있다. 게다가 Take 1의 경우 15년 일겅 남탕 콘서트에서 의미 불명 가사[158] 에 관한 팬의 질문에 서태지 본인이 직접 답을 했는데 원래 우리 말로 녹음을 하였으나 외계어로 바꿔서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의미는 자신만이 알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안 알려줄 거라고 한다.[159]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서태지는 트로트곡을 만들어 부른적이 있다. 전체 부분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1집 때 방송 프로그램이나 콘서트에서 한, 두 소절 부른적이 있으며 1.5집 에서도 Rock & Roll Dance 마지막 부분에서 서태지가 해당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이렇게 그는 트로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 4집 1번트랙 Yo! Taiji! 에서 뽕기 충만한 트로트락을 선보이기도 했다.
데뷔 초기부터 위천공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식이나 술자리에선 술은 그냥 혓바닥에 할짝거리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고. 공개적인 행사에서 샴페인을 마실 때도 샴페인 거품을 앞니로 깨물기만 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161] 너무 힘들 때는 한 끼 식사를 우유로 때워야 했다고 한다.
병역에 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은데, 1994년말 연예인 병역 비리를 내사한 경찰의 중간 발표에 따르면 '서태지는 성격장애로 면제, 이주노는 피부과이상(문신)과 정신장애로 면제, 양현석은 병명미상으로 의병제대'를 한 의혹이 링크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달 후에 무혐의로 내사를 종결했다. 링크
- 이 말은 후술할 모 국회의원이 정치인 자녀와 연예인의 군면제 비율이 높은 게 수상하다면서, 거짓 병명을 대고 병역을 기피한 게 아니냔 의혹을 제기하여 경찰이 부랴부랴 수사를 했으나 병역을 기피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무혐의로 내사 종결을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련의 보도의 핵심 내용은 성격이상이 확인됐다는 게 아니라, 고의로 병역을 기피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은 서태지와 아이들은 병역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 당시 서태지는 병역비리를 단정한 보도에 대해 불쾌감을 토로하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할 것까지 고려했으나 흐지부지되었다.[162]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수사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어겼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 다만, 무혐의란 것만 알려지고, 제시된 병명이 실제로 확인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어서 이를 두고 여러 말이 오가고 있다.
- 일단 서태지는 성격장애를 시인한 적이 없으며, 인터뷰나 소속사 보도 자료를 통해 고교 중퇴 학력과 위장병으로 면제되었다고 밝혔다. 2003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서태지컴퍼니측에서 단호하게 성격장애는 어불성설이라 말한 것이 확인된다. 링크 링크 2 실제로 90년대 초반 고등학교 중퇴자들이 대기를 타다가 보충역(5급) 판정을 받는 사례가 있었다.
- 이런 논란이 있으면 진단서가 공개되지만, 저 당시에는 병무청 자료 보관부터가 허접해서 수사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수사 상황을 보도한 기사만 봐도, 컴퓨터에 입력한 자료가 없어 병무청이 난색을 표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게다가 병무청에 보관된 징병 관련 서류의 보관연한이 겨우 3년이라 자료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경찰이 끈질기게 수사 협조를 요청하자 마지못해 협조를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도 경찰 수사가 변죽만 울리다 끝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탓에 같은 시기에 나온 보도라 하더라도 매체에 따라 면제 사유가 다르게 나온 경우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심지어 어느 연예인의 경우, 자신이 그런 이유로 면제되었는지 몰랐다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약 4년 후 수사 당시 상황을 회고한 1998년 6월 29일자 국민일보 이경희 기자에 따르면, "가수 서태지가 만성위염으로, 탤런트 배용준이 약시로, 영화배우 박상민이 교통사고에 의한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면제대상자로 인정됐다."라고 언급했으며, 1994년 당시 수사는 사전조사 불충분과 특혜와는 거리가 먼 대상자를 문제삼는 바람에 유야무야됐다고 설명했다. 기사 어느 기사가 맞는지는 각자 판단하도록 하자.
- 항간에는 머리를 기르고 신검을 받아 성격장애 판정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지만, 이는 1970년대에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의 면제율이 높은 것을 그 다음 세대들이 오해하여 나온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군 입대 정원은 청년 인구수와는 무관하게 60만 명으로 항상 정해져 있었고, 이들이 20대였던 1990년대 초에는 지금 기준대로라면 현역을 가야 할 사람들이 방위병으로 전출되거나 그것도 넘쳐나면 군면제 받는일도 흔했다.[163] 1990년대 초 방위 유머가 유행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서도 1972년 출생자가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다고 나와 있다. 소위 '평발이라 면제됐다.', '시력이 너무 안좋아서 방위됐다.'가 현실이었다. 여기에 더해 서태지 본인이 인터뷰 등을 통해 밝힌 5급 판정 사유는 그냥 위장질환 수준이 아니라 위천공이다. 즉, 위에 구멍이 난 것이다. 실제로도 집안의 가족력이며 6촌 형인 신해철 역시 이 질병을 앓다가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 2020년대에 들어서는 이해가 안 갈 일이지만, 1990년대까지는 청년인구의 비율이 높았던데다가 복무기간도 2020년대 비하면 길었던 시절이라 신체적, 정신적인 조건을 까다롭게 따져서 군대를 내보냈기에 2020년대 기준으로는 2급이나 3급 판정을 받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방위병이나 상근예비역, 공익근무요원으로 선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서류면제"라고 해서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면제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장애인이 아님에도 근시라서 면제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다 보니, 학력 미달이나 빈곤, 삼대 독자에 해당되는 사람이 면제가 되었다면 그려려니 하고 넘어갔고, 외아들이라도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6개월만 방위복무하는 경우도 엄연히 존재했기에 세부적인 면제 사유는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이유로 195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의 범 베이비붐 시대 출생자들은 병역 비리 여부를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5급 판정이라고 해서 신체나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저 당시 5급이면 지금은 3~4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청년 인구가 감소한 2020년대에도, 과거 방위에 해당되는 사회복무요원이 대기를 하다가 면제 판정을 받는 일이 간혹 있다. 2018년 12월에 나온 이 기사에 따르면, 병무청 신체검사 4급 보충역 등급을 받고 사회복무요원 소집을 기다리는 청년은 기사 작성 당시 시점으로 5만 8천 명인데, 지방자치단체, 소방서, 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내년에 소집할 사회복무요원은 3만 5천 명에 불과해 어쩔 수 없이 2만 3천 명은 2019년도에 소집되지 못하고 자동 면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역 가기엔 애매한 사람들을 예전에는 방위로 돌렸는데, 방위도 수요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남아도는 사람들이 면제가 되었던 것이다.
- 그래서 당시 기사[164]에도 저학력으로 보충역 판정을 받은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라며 병역 기피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 당시 병역 비리 수사는 당시 민주당 소속이었던 강창성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연예인과 정치인 자녀의 면제 비율이 너무 높다고 지적한 것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미 보관 연한을 넘겨 자료가 폐기된 상황에서 1980년대 자료까지 부랴부랴 찾는 소동이 빚어진 게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여러 연예인들이 마녀사냥을 당했다. 심지어 방위로 복무한 연예인이나 불우한 가정사로 면제된 연예인까지 싸잡혀서 소환되었다. 이 기사에서 강창성 의원이 언급한 탤런트 손 모씨는 누가 봐도 이 분이다. 이 분 문서에도 나오듯이, 당시 법으로 사생아는 자원입대조차 불가능했다. 군 출신이라는 강창성 의원이 사생아의 병역면제를 문제 삼은 것이다(...)
- 그런데, 정작 강창성 의원 본인의 아들도 저 당시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이는 김대업의 폭로로 불거진 이회창 아들 병역 비리 논란을 계기로 밝혀진 사실로, 강창성 의원 아들의 면제 사유 또한 이회창 아들과 동일하게 체중미달이었다. 게다가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김대업이 조작을 한 것으로 드러나 이회창 아들의 병역 비리는 무혐의로 결론이 났고, 자연히 다른 정치인들 아들의 병역 논란도 묻혔다.
주위 인물과 팬들의 성화로 지금은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한다. 중2 때 흡연을 시작했다가 고1 때 끊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컨텐츠에 대해 철저하게 관리하는 성격탓에 흡연장면이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8집 뮤직비디오의 촬영과정을 담은 다큐에서 자신의 테이블에 담배를 올려놓은 모습이 아주 잠깐 나오는 등 약간의 정황이 확인되었고, 이번 남탕, 여탕, 혼탕을 주제로 한 클럽공연(일겅) 때 전자담배를 피우는 퍼포먼스를 시전하여 팬들에게 충공깽과 심쿵을 선사하였으나 수년 전에 완전히 끊었으며 전자담배 연기는 단순 수증기라고 밝혔다. 최수종쇼에서도 담배 피우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보기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사실은 건강에 나빠서( 하희라의 질문)가 아니라 뻐끔거리기 때문이라고[165].
외 사촌동생 강현구는 강개토라는 예명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서태지의 영향인지 강개토 역시 본인 음악의 작사, 작곡, 편곡, 연주, 엔지니어링 등 모든 작업을 혼자서 소화한다. 본래는 서태지가 6집 발매 직전 강현구도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던 상태라 서태지가 귀국하면 베이시스트를 맡기로 했으나, 귀국 날짜가 달라진 탓에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당시 서태지에게서 베이스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166] 개토네이션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디지털 싱글을 중심으로 7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하는 중이다. 초창기에는 얼굴이 공개되면 괜히 서태지와 엮여 오해를 살까봐 가면을 쓰고 활동했으나[167] 현재는 가면을 벗은 상태. 결혼식 때는 서태지가 그에게 축하화환을 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매 하는 음악 대부분은 음원 순위 10위권에 랭크 되었으며, m.net 및 곰 tv 뮤직비디오 실시간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삼성, 웅진, 두산, 신한, 우리 등 다수의 기업체 음악작업을 진행했으며, '광고음악의 장르가 신세대들의 소비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는 여러 음악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활동은 물론 대학교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유머를 자주 구사한다. 그런데 그 유머들이 하나같이 썰렁하고 재미가 없다. 오죽하면 팬들조차 노잼이라고 까고 있는 중. 그런데 더 심각한 건 본인은 개그를 좀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얼굴은 속여도 유머감각은 못 속이는 50대 아재답다.
데뷔가 워낙 오래된지라 서태지와 가까이 있어보고 싶어서, 닮고 싶어서 등의 팬심으로 연예인이나 방송계 직종 등에 종사하는 서빠들이 꽤 존재한다. 덕분에 메이킹 영상 등을 보면 스텝들 중에 싸인을 받거나 실물을 봐서 헬렐레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연예인들에게도 "연예인들의 연예인'"소리를 들을 정도다.
우스갯소리로, 서태지가 컴백하면 음악 평론가들도 같이 컴백한다는 소리가 있다.
자신의 단독 공연에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여 매 공연마다 기록적인 수준의 물자가 투입된다. 공연 시장의 규모가 해외에 비해 많이 작은 편인 한국에서 전폭적인 투자 없이는 해보기 힘든 실험들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서태지가 컴백할 때마다 업계의 노하우가 새로 쌓인다고 할 정도. 비단 음향만이 아니라 연출에서도 황당한 요구를 해오는 클라이언트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어떻게든 만들어내는 경험이 공연 업계 전반으로 확산된다고 한다.[168]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이다. 구한말 시절인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에 살았다고 한다.[169] 그래서인지 다른 가수들과 다르게 특유의 단어인 서울사투리들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거 신해철, 기타리스트 탑과 스키장에 놀러갔는데 쉬고 싶다던 신해철을 부추겨 신해철이 상급자 코스에서 스키를 탔고, 결국 팔이 빠지는 부상을 입게 된 적이 있다. 당시 신해철이 응급실에 누워 괴로워하고 있을 때 서태지가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해철을 구경했고[170] 그를 발견한 신해철이 급분노해 " 저 XX가 서태지다!"라고 외칠 뻔 했다고 한다. 링크
굉장한 동안이다. 1972년생으로 2023년 기준으로 50대 초반으로 접어들었지만 양현석(1970년생)이나 이주노(1967년생)는 그 나이대에 비슷해[171] 보이는데 서태지만 아직까지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보인다. 물론 40대에 들어서는 표정에 따라서 살짝 나이 든 모습이 나오기는 한다. 그래도 40대로는 절대 안 보인다. 이승환, 이선희와 함께 대표적인 동안 뮤지션 중의 한 명이다.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환송식에서 ' 발해를 꿈꾸며'가 송출되었다.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가사말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 좋아하던 노래 중 하나인 것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자신이 살던 평창동 자택을 팔고 이사를 간 것으로 보인다.[172] 이후 서태지 본인이 2019년 크리스마스 안부글을 통해 이사한 것이 맞다고 이야기했다.
동(東)태지의 모아이가, 서(西)태지의 Human Dream를 꺾어 패배를 안긴 적이 있다.
양현석과 마찬가지로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고 '틀리다'로 얘기한다.
1995년 2월에 문화 평론가 이동연 교수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에 전위주의가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전위주의를 따른 전위음악은 기존의 음악적인 상식을 완전히 깨는, 화성이나 비트, 리듬 따위의 기본적인 음악의 구성요소들을 완전히 해체하는 형식이라 본다며,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자신의 음악을 포함한 우리 대중음악에 온전한 전위주의는 없는 것 같다고 밝혔다. 앞으로 그러한 전위주의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은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173]
2002 ETPFEST에 히데를 섭외하였고[174] 이에 생전 고인이 꿈꾸던 해외 진출의 꿈을 이뤄줬다며 유족들은 서태지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고인의 기타 옐로우하트를 선물했다.[175]
머틀리 크루의 성공한 덕후이다.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 토미 리는 서태지가 만든 록 페스티벌인 이티피 페스티벌을 통해 내한하기도 했다. 다만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내한한 것이다. 또한 2019년에는 머틀리 크루의 'girls girls girls' 뮤비를 보고 동경하던 바이크 면허를 땄다고 밝히기도 했다.
스매싱 펌킨스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여러 경로로 팬심을 밝혀 왔다. 링크 5집에서 스매싱 펌킨스 스타일의 얼터너티브 락인 Take Five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2001년 공식 홈페이지 서태지 닷컴을 오픈했을 때 ‘아이 앰 원’, ‘제로’, ‘서티-스리’ 등을 추천하기도 했으며, 2004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을 때는 “빌리 코건의 프로젝트 밴드 즈완의 ‘리릭’이라는 곡을 즐겨 듣는다”며 “스매싱 펌킨스는 나에게 꾸준하게 음악적인 자극을 주는 밴드”라고 말했다. 2010년 스매싱 펌킨스 내한 공연 때는 서태지컴퍼니가 후원사로 나서기도 했다.14년도에 9집 발매 전 업로드 된 잭 오랜턴 사진의 떡밥과 우연히 겹쳐져 '9집은 스매싱 펌킨스 풍의 얼터너티브 록 장르다. 스매싱 펌킨스와 콜라보다.' 등의 소문이 돌았던 것은 덤.[176]
기타 제작가 박민병은 어린 시절부터 서태지의 팬이었다. 서태지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12년 동안 건조한 목재로 제작한 기타는 서태지 라이브 공연에서 TAKE THREE를 연주하는 데 쓰였다. 박민병은 아픈 몸을 이끌고 공연에 참석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수익배분이 꽤 화제가 되었다. 서태지와 양현석이 공통적으로 말한 부분은 활동 수익이 4:3:3 이었고 음반 수익은 서태지 본인이 밝힌바로는 6:2:2였다. # 이주노 말에 의하면 전체 수익의 절반은 서태지가, 나머지 절반을 자신과 양현석이 나눠가졌다고 한다. #[177]
전 프로게이머 김대기가 그와 닮은꼴이어서 그런지 서태지 관련 합성이 많다. 해당 사진의 원본은 2000년 8월 29일, 서태지가 김포국제공항[179]을 통해 미국에서 귀국하는 모습이다.
또한 서태지의 노래인 모아이를 적절히 개사해서 부른 영상인 서대기 - 적절하니 MV는 2008년에 디시 힛갤에 올라갔다.
2020년대 기준 10대들에게는 교과서로 접한 인물이다. 비의 유튜브 채널 시즌비시즌에 언급되었다. 링크 관련 기사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서태지가 등장했다는 기사도 있다.
2022년 6월 13일, 강남 논현동의 9호선 언주역 인근 본인 소유 빌딩을 400억원에 매각했다. 이 빌딩은 2002년에 50억에 매입하여 2005년에 45억원을 들여 신축했는데, 20년만에 300억원 정도의 차익을 거둔 셈이다. 링크 부동산 업계에서는 서태지를 부동산 투자에 일찍 눈을 떠 성공한 몇 안되는 연예인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다만 이 건물이 서태지컴퍼니 사옥과 연습실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갑작스러운 건물 매각 소식에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사이트는 여전히 활성화 중이기에 건물을 이전한 것일 뿐 회사를 아예 처분한 것은 아니다. 현재 서태지컴퍼니 업무는 서태지컴퍼니의 김민석 이사가 차린 스포트라이트라는 회사에서 맡고 있는데, 이 회사의 사무실은 마포구에 있다.[180] 이후 서갤 등에서 종로 묘동 건물도 매각했다는 루머가 나왔다.
서태지가 타던 것으로 추정되는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차량이 매물로 올라왔다. 해당기사, 매물링크
과거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마약에 빠질뻔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부 가수들이 마약의 유혹에 빠졌을 때 서태지도 멋도 모른체 마약의 유혹에 빠질 위기에서 김종서가 "태지야! 안돼!! 그건 가짜음악이야!!!!" 라고 일침을 가하여 그때 정신을 차리면서 마약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김종서에게 지금도 늘 고마움을 느낀다고...
평창동 자택을 매각 후 서태지가 김포에 거주한다는 소문이 존재했으나 평창동 자택 등기부 등본을 조회해보면 서태지 부모님이 김포 아파트로 이사를 한 것이며 서태지가 부모님과 김포에 거주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태지를 잘 아는 한 연예 관계자는 "서태지 역시 한국에서 자녀교육이 힘들다고 판단했다. 서태지, 이은성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살아야 하는 딸의 미래를 위해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10. 어록
나는 단지 진정한 음악인이 되고 싶고, 또 그렇게 평가받고 싶다. 음악인은 좋은 음악을 발표하는 것이 가장 큰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98년 서면 인터뷰 中
98년 서면 인터뷰 中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음악, 또는 가장자리에 서 있는 음악이다. 열정 없이는 안되는 작업이다. 누구나 듣기 좋은 음악을 굳이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도하지 않아도 음악을 만들다보면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대중성에 대해 특별히 고민하지는 않지만 명곡은 대중성도 갖추고 있다고 늘 생각한다.
2000년 인터뷰 中
2000년 인터뷰 中
가끔씩 두려울 때도 있다. 나라고 왜 맨날 부딪히고 싸우고 싶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사실 더 겁이 난다. 흔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두려움과 용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뭔가를 하려고 확 깨뜨리는 게 아니라 그래, 한번 해보자! 하고 일어서는 순간, 이미 그 순간에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있을 것이다 굳이 의지와 열정이다… 그런걸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그냥 걸어나가는 것이다. 뒤돌아본들 얻을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앞으로 걸어나갈 수밖에.
2002.7.18 사서함 中
2002.7.18 사서함 中
좋은 음악, 나쁜 음악, 수준 높은 음악, 수준 낮은 음악 등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악은 음학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듣고 느낀 그대로가 그 음악의 정의이며 가치일 것이다. 나 스스로는 음악을 포함한 나의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한 가지에 고정돼있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음악과 사람의 감성은 계속 변화한다. 앞으로도 어떤 음악을 만들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나 진정으로 나의 감성이 끌리는 솔직한 나의 음악으로 완성해보고 싶을뿐이다.
2004년 3월 4일, 스포츠투데이, 〈서태지 인터뷰 50문 50답〉 中
2004년 3월 4일, 스포츠투데이, 〈서태지 인터뷰 50문 50답〉 中
불행할 때가 있어도 행복해야 해요. 정 불행하다 느껴지면 모든 것을 제로로 돌려버리고, 리셋버튼을 누르고 다시 시작하면 돼요.
2004 제로투어 익산 中
2004 제로투어 익산 中
11. 수상 내역
- 2000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락 부문 상
- 2004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락 부문 상
- 2008 MKMF 남자가수상
11.1. 가요 프로그램 1위
총 5회 1위 | ||||
<rowcolor=#fff> 날짜 | 방송사 | 방송명 | 곡명 | 비고 |
2000년 | ||||
10월 7일 |
울트라맨이야 (3회) |
첫 1위 | ||
10월 14일 | ||||
10월 21일 |
3주 연속 |
|||
2008년 | ||||
8월 29일 | Moai (1회) | |||
2014년 | ||||
10월 19일 | 소격동 (1회) | [181] |
12. 음반 목록
{{{#!wiki style="margin:-5px -10px;padding:10px 10px;background:#3e2c64;color:#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0;" DISCOGRAPHY {{{#!wiki style="display:inline-block;min-width:50%" {{{#!folding [ 정규 음반 ] {{{#!wiki style="margin:-5px -1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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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000;" [[서태지와 아이들 1집| Seotaiji and Boys ]]1992. 3. 23. |
{{{#!wiki style="background-color: #000000,#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929293;" [[서태지와 아이들 2집| Seotaiji and Boys II ]]1993. 6. 21. |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ffffff;" [[서태지와 아이들 3집| Seotaiji and Boys III ]]1994. 8. 10. |
||||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fff;" [[서태지와 아이들 4집| Seotaiji and Boys IV ]]1995. 10. 5. |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fff;" [[Seo Tai Ji| Seo Tai Ji ]]1998. 7.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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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8d7666;" [[7th Issue| Seotaiji 7th Issue ]]2004. 1.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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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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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8d7666;" [[Atomos Part Moai| Seotaiji 8th Atomos Part Moai ]]2008. 7.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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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세한 내용은 서태지/음반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여담으로, 서태지의 정규 음반들 중 트랙리스트가 10곡을 넘는 음반은 없다.[182] 그 때문인지 각 음반들의 러닝타임들도 생각만큼 길진 않다. 다만, 대중들과 평론가들의 평처럼 음반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12.1. 노래방 수록 목록
노래방에 수록된 곡에 대한 내용은 서태지/노래방 수록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13. 방송 출연
<rowcolor=#fff> 날짜 | 방송사 | 방송명 | 비고 |
1998년 | |||
7월 7일 | MBC 특집 - 서태지 | 인터뷰 출연 | |
2000년 | |||
9월 12일 | 컴백 스페셜 - 서태지 | 출연 | |
9월 16일 | 그것이 알고싶다 | 게스트 | |
9월 28일~10월 11일 | 섹션TV 연예통신 - 서태지의 셀프카메라 | ||
10월 19일 | KBS 세계평화음악축제 | ||
2001년 | |||
2월 7일 | 섹션TV 연예통신 | 게스트 | |
9월 1일 | 연예가 중계 | ||
2002년 | |||
4월 1일 | 서태지 10주년 스페셜 - 서태지 포에버 | 게스트 | |
10월 16일 | 특집 - 10월의 전설, 서태지 | ||
10월 17일 | 한밤의 TV연예 | ||
10월 30일 | ] | 섹션TV 연예통신 | |
2003년 | |||
2월 22일 | 연예가 중계 | 게스트 | |
2004년 | |||
1월 23일 | 섹션TV 연예통신 | 게스트 | |
1월 25일 | 서태지 Comeback 2004 | ||
1월 26일 | 여유만만 - 스타매거진 | ||
1월 28일 | MBC 특집 - 서태지 | ||
1월 29일 | 한밤의 TV연예 | ||
2월 5일 | |||
2월 8일 | Live Wire 컴백콘서트 | ||
2월 12일 | 한밤의 TV연예 | ||
2월 16일 | 이홍렬, 박주미의 여유만만 | ||
2월 21일 | Mnet 와이드 연예뉴스 | ||
2월 28일 | 연예가 중계 | ||
3월 5일 | KBS 교감 交感 서태지 | ||
3월 10일 | KM Special | ||
3월 14일 | 김승현, 조형기, 정은아의 좋은아침 | ||
한밤의 TV연예 | |||
3월 16일 | 최수종쇼 - 서태지 스페셜 | ||
3월 24일 | KM 생Q 뉴스 | ||
4월 2일 | ETN 연예스테이션 | ||
5월 13일 | 금요컬쳐클럽 | ||
한밤의 TV연예 | |||
5월 15일 | 연예가 중계 | ||
5월 23일 | 서태지 Live in 블라디보스토크 | ||
8월 6일 | ETN 인사이드 스토리 | ||
2007년 | |||
12월 25일 | 서태지 15주년 기념콘서트 | ||
2008년 | |||
8월 6일 |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 | ||
2014년 | |||
10월 9일 | 해피투게더 | 게스트 (with 김종서) | |
10월 24일 | 슈퍼스타K6 | 깜짝 게스트 | |
10월 25일 | 2014 서태지 컴백쇼 | 출연 | |
10월 31일 | 유희열의 스케치북 | ||
11월 8일 | 무한도전 | ||
2015년 | |||
3월 26일 | 명견만리 | ||
8월 1일 | 연예가 중계 | 게스트 |
14. 콘서트
자세한 내용은 서태지/콘서트 문서 참고하십시오.15. 미디어 믹스
15.1. 게임
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게임이 세 번이나 나온 적이 있었다.- 첫번째는 ' S=C+R 2795'라는 게임이였는데 4집 시절 크라운 베이커리의 홍보용으로 제작된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이다.
- 두번째는 ' 컴백 태지보이스'라는 제목의 국산게임인데,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 서태지의 컴백을 바라는 시대적 흐름을 타고 개발된 게임이다. 게임성 자체는 당시 매우 흔했던 횡스크롤 액션게임이고 출시 전 화제가 된것과 달리 금세 잊혀졌다. 지금보면 어설픈 3D 프리렌더링 그래픽이나 발상은 상당히 괴악해보인다.
- 세번째는 ' 서태지 스윙스윙'이라는 게임인데, 리듬 게임 '스윙스윙'의 개발사와 협력해 2011년 iOS용으로 출시된 게임이다. 게임의 내용은 서태지 8집의 모든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 평범한 리듬 게임이다.
- 한국의 리듬 게임인 펌프 잇 업 시리즈의 제작사 안다미로에서 서태지의 곡을 수록하려 했다. 난 알아요/필승/하여가/우리들 만의 추억/울트라맨 이야 등이 범주에 올라서 서태지컴퍼니 측에 연락을 넣었는데 자기 노래는 남이 손 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관계로 수록은 하되 게임에 수록되는 사운드 부분을 게임 사이즈로 서태지 본인이 직접 편집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펌프 잇 업에 수록된 서태지의 모든 노래는 모두 서태지가 직접 게임 사이즈로 편집을 한 뒤 BPM측정까지 마쳐서 안다미로에 보낸 것이다. 그 대신 자기 노래는 제대로 된 속도에 제대로 된 노래여야 한다며 러쉬 모드는 인정하지 않았다. 대단한 프로정신이다.단 BGA, 스텝까지 모두 다 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건 사실무근. 물론 협의 과정 중에 위의 정보를 참고하여 수정 한 것은 사실이다.
[훈음]
천천히 할 서, 클 태, 뜻 지. 실제로는 한자 이름이 아니며 중국에서 쓰이는 예명 표기다.
[2]
가운뎃점(・)을 빼고 ソテジ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3]
어느 쪽이 옳은 표기인지는 불명.
[4]
본래
Pia나
NELL 등 다른 밴드들도 소속되어 있었으나 각자 이적해서 서태지 혼자만 남았다.
[5]
프로필 상 키는 173cm이지만, 평소
자세가 구부정하다는 점을 감안해도,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프로필상 172cm인
이주노와 같이 선 걸 보면 서태지가 좀 더 작은 느낌이 난다. 사진에서 팀내 최장신인 양현석까지 셋 다 같은 신발을 신고 찍었지만, 이주노가 발을 꼬고 있어서 서태지와 같은 자세로 서면 서태지가 이주노보단 약간 작다는 걸 알 수 있다.
링크 이후 서태지가 방탄소년단과 대면했을 때도 프로필 상 174cm인 방탄소년단의
지민보다는 확실히 작았다. 처음엔 프로필대로 173cm였을지라도 2023년 기준으로 50세를 이미 넘겼기에 나이가 들면서 다소 키가 줄었을 수는 있다.
[6]
프로필상 55kg.
[7]
앨범 발매일 기준. '데뷔 몇 주년'하고 따질 때는 이쪽을 기준으로 한다. 실제로 15주년, 20주년, 25주년을 각각 2007년, 2012년, 2017년에 챙겼다.
[8]
실제로는 5급이고, 6급부터 면제라 부르지만, 전쟁이 나지 않는 한 소집될 일이 없으므로 언론에서는 5급과 6급을 같이 묶어서 면제로 퉁친다.
병역 5급에 대한 기사 1994년에 당시 연예인 병역 비리 수사를 벌인 경찰 측에서 서태지가 성격장애를 사유로 병역기피를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링크 한 달 후 무혐의로 내사 종결했다.
링크 사실 이게 아니었어도, 서태지는 가족력으로 추정되는 위천공과 고등학교 중퇴로 인한 중졸 저학력으로 면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9]
직장 때문에 한때
일본에 거주했지만 현재는
홍콩에 살고 있다. 여담이지만 2014년 MAMA 때 서태지가 누나네 집에 놀러 갔다고 한다.
[10]
흔히 담이라고 불리지만 외자 이름인지 끝 글자만 따온 애칭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1]
어머니 쪽으로 이종 6촌 관계다.
[12]
신해철의 딸과 아들
[13]
문화 대통령은 대중매체에서, 대장은 팬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호칭. 대장의 경우
2004년 밴드 멤버들이 했던 말을 팬들이 차용했다.
[14]
서태지컴퍼니의 대표이며, 2001년 태지의 화 앵콜공연에서 등장한
양현석을 서태지가 "양사장"이라고 부르자 양현석이 "왜 그러시나~ 서회장!" 하고 응답하기도 했다.
[15]
이은성이
임신 중일 때 준비 중이던
9집의 Chrismalo.win의 삑뽁삑뽁 소리에 아기가 격하게 반응해서 태명을 삑뽁이로 지었기 때문. 9집부터 아빠 이미지가 되면서 이 별명의 지분이 부쩍 늘어났고, 팬들도 이 기믹을 잘 써먹는다. 콘서트에서 서태지가 "늘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팬들이 "
육아에서 해방되세요"라고 대꾸할 정도. 가수도 팬도 나이가 들었다. 딸의 이름이 지어지고 나서는 담이 아빠라고도 불린다.
[16]
짠돌이 이미지로 인해 생긴 별명. 하지만 음악에 관한 일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소비하기 때문에 서크루지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17]
남이 부르는 것보다는 서태지 본인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 자주 쓴다.
[18]
2008년 이적의 텐텐클럽에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라고 밝혔다.
[19]
8집 활동 중 밴드 멤버 김석중에 의해 멤버들에게 직접 커피를 내려 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서리스타로 불리게 되었다.
[20]
딸,
아내, 부모님, 반려묘 쪼꼬까지 통틀어서 본인이 집안 서열 꼴찌라고 밝혔다.
[21]
3집 시절 '
발해를 꿈꾸며' 로 활동할 때 만들어진 별명.
[22]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시나위 시절 별명. 얼굴이 유독 예쁘다는 이유로 붙여졌다.
[23]
파워풀한 음악과 터프하고 과묵한 밴드의 분위기에서 나온 6집 시절의 별명. 서태지닷컴이 론칭하기 전 매니아들이 모이던 팬사이트 중 한곳의 이름도 태지존이었고 공연이나 음방에서 응원구호도 절대지존 서태지였다. 본인도 아는듯 당시 사서함에서 자칭하기도 했다.
[24]
6촌 형인 신해철이 그를 칭하는
호칭이다. 과거 신해철이 진행했던 라디오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과 또
MBC every1에서 진행했던 신해철의 스페셜 에디션에서 게스트인 서태지의 집을 방문하면서 그를 찾으면서 불렀었다. 사적으로 만날 때도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덤으로 신해철은 서태지닷컴이라 하지 않고 서태발닷컴 이라고도 부른다.
[25]
2023년 12월 24일에 인스타그램으로 근황을 전하면서 언급하였다.
#
[26]
2007년 데뷔 15주년을 맞아 삼성전자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MP3 플레이어인 P2 서태지 에디션이 발매되었는데, 후면에 새겨진 싸인이다. 8집 당시 발매된 서태지폰에도 비슷한 싸인이 쓰였다. 남에게 사인을 비싸게 파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yo! OO의 형식으로 받는 사람 이름을 넣는데, 그렇게 자기 이름이 떡하니 써 있어도 굳이 그걸 파는
되팔렘들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시절부터 줄곧 사용해 온 싸인인데 30여년이 지나 그 당시보다는 약간 정갈(?)해졌다. 일본 예능에 서태지를 찾아 한국까지 날아온 일본 팬이 출연한 적 있는데, 그 당시 싸인은 약간 더 낙서 같은 모양새로 퓩이 더 넓다.
[27]
실제 서태지가 직접 트윗하는 것은 아니고 서태지컴퍼니 관계자들이 대신 소식을 전해준다.
[28]
솔로지만, 실제 라이브를 할 때는 세션과 함께 공연하여 서태지 밴드라고 불리기에, 밴드 활동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29]
가창력은 있지만, 한국에서 흔히 들을 수 없던 창법을 사용했다. 생각보다 재주꾼으로, 솔로 이후부터는 제법
얼터너티브 락 스타일의 창법도 구사하고,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도 랩은 잘했다. 사족으로 당대 춤꾼
이주노,
양현석의 코치 덕분인지 댄스도 잘했다. 은근히 만능러.
[30]
이런 점은 서태지가 좋아했던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의 前 리더
로저 워터스와 비슷하다. 로저 워터스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지만, 적어도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에 잘 어울리는 보컬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굉장히 개성적인 샤우팅을 구사하는 보컬이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31]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이 서태지 노래를 들고 나올 때 유독 점수가 낮거나 반응이 좋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며, 특히 서태지 솔로곡으로 갈수록 그렇다.
[32]
서울특별시교육청정독도서관 옆,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앞마당 부지가 어린 시절 집이 있던 곳이라고 방송에서 밝혔다.
[33]
1992년 데뷔 후 스타탐구생활이라는 예능에서 10문 10답 코너가 있었는데 그 코너의 6번 질문에서 밝혔다.
[34]
뒤에서 1등 한 적도 있다고 한다.
[35]
특성화고인
대동세무고등학교와 같이 있었다. 1993년에 폐교되었다.
[36]
이동연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학교 교사들이 학생을 때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잘못을 했어도 절대로 교사한테 맞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교사가 자신을 구타하려고 하면 학교를 뛰쳐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37]
이 부분에서 살이 붙여져 서태지가
일진이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서태지가 흡연, 불성실한 학교생활 등과 같은 일탈행위를 일삼는 불량 학생이긴 했지만,
학교폭력 및
집단괴롭힘 등의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저질렀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전무하다.
[38]
학창시절 서태지가 컴퓨터로 그린 밴드 '하늘벽' 로고
[39]
서태지 기념 사업회가 1998년 진행한
태지의 1문 1답에 따르면 당시 6현 기타와 4현 기타의 개념 없이 그냥 전자 기타가 멋있어서 기타를 샀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베이스 기타였다고도 한다.
[40]
원문은 여기에 있다.
링크
복사본
[41]
참고로 이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이동연 교수의 저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에 실린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절판된 책이라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42]
공부만 한다면 어찌 해볼 수 있는데, 공고는 2학년 때부터 기업에 실습을 나간다. 말이 실습이지, 기업에서는 싸게 부려먹는 비정규직 일꾼인 셈이라 혹사당해서 딴 건 못 한다. 게다가 국가 공인 기능사 자격을 따기 위한 공부와 연습도 해야 한다.
[43]
회고하기로는 당시 중학교 중퇴를 못한 것이 인생에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한다.
[44]
병역 법이 바귀어 중졸도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그건 1985년생 이후이다. 단지 1960~70년대생들은 연 출생아수가 90~100만대를 기록했을 때 태어나던 세대들이고 1970년대 하반기에 들어서는 고졸자와 대졸자만으로도 병역 충원이 넉넉하게 되다보니 일시적으로 중졸도 군대를 안 가는 것으로 바뀌었을 때였다.
[45]
서태지와 김종서가 그렇게 짤없이 나가버리고는 신대철은 오경환과 함께 신대철과 자유를 결성하여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시나위 5집 멤버에 오경환은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뮤즈에로스, 라디오데이즈 등의 준수한 헤비매틀 밴드들에 그 이후에도 꾸준히 참여하였고, 드럼 교실도 여는 등 나름 락계에서 알아주는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5월 간경화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알려졌다.
[46]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김종서의 제안으로 실제 나이보다 2살 올려 20살로 속여서 활동했다.
[47]
헤비 메탈을 고집하던 리더 신대철과 달리 김종서는 대중적이고 듣기 편한 록을 주장했고(이후 김종서는
락발라드로 솔로 데뷔한다), 서태지는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신대철은 서태지에게 고전 록 밴드들의 음악도 들어보길 권유했으나, 서태지는 고전 록 밴드의 음악을 듣는 것을 고역처럼 여겼고, 새로운 장르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신해철 왈, 락 말고 다른 장르는 전부 쓰레기라고 선배들에게
세뇌를 받던 시절.
[48]
서태지 본인도 당시
랩 음악에 관심을 갖자
록 음악 선배들이 "삼표 음악을 왜 듣냐"며 타박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삼표는
연탄을 의미해서 흑인 음악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이었다. 현재도 친분을 유지하는 김종서조차도 당시 서태지가 댄스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록의 정신을 버리고 댄스를 한다니 얘가 미쳤나'라고 생각해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를 듣고 너무 좋아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다.
[49]
공연 사기는 서태지 본인이 이동연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해체 원인이고, 신대철은 이이제이에서의 인터뷰에서 신대철이 서태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데 대해 서태지가 좀 반발한 것이 직접적인 탈퇴의 계기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다만 심각하게 말한 건 아니고 웃으면서 농담조로 썰을 풀었다. 어찌됐든 당시 서태지는 명백히 미성년자인데 담배 심부름 시킨 건 신대철이 잘못한 것이다. 물론 신대철 왈 (꼰대 의식이 사라진) 지금 와선 자신이 직접 담배 사러 가지만, 당시엔 지금만큼 흡연을 범죄시하진 않던 시대였고 5살이나 차이가 나는 나이차 등으로 막내들이 으레 하는 일쯤으로 여긴 듯하다.
[50]
시간이 흐른 뒤 캔기획의 강승호 대표는 엠넷 비틀즈코드 2011년 6월 23일 방영분에 출연해서 "그 당시 악기 만지는 걸 좋아하던 서태지가 다른 회사에 갔다가, 그쪽 레코딩용 콘솔을 보곤 나와 계약을 못 하겠다고 통보해왔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서태지, 강승호 양쪽 다 친분이 있는 매니저 최진열이 쓴 책에도 보컬과 연주자 둘 다는 불필요하기 때문에 '강승호가 김종서만 영입하고 서태지는 거절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강승호의 증언은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상 팬들의 심기를 고려한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51]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에 따르면, 서태지와 아이들
일본 공연 당시 서태지의
일본어 실력이 꽤나 능숙해서 통역 없이 혼자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52]
무궁화 밴드 멤버의 서태지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일 끝나면 집에 가는 애".
[53]
처음엔 서태지가 댄스 가르쳐달라고 양현석에게 접근했는데, 양현석이 여차저차해서 서태지 노래를 들어보고는 삘이 와서 자기도 팀에 넣어달라고 했고 서태지가 고민하다 수락했다고 한다.
[54]
두 설 다 기존 설과는 차이가 있다. 일단 서쪽 타이지 설은 이름을 지은 주체가 서태지가 아닌 신대철이고, 서태후+타이지 설이면 최진열 증언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역시 주는 서태후지 타이지 부분은 좀 약하다.
[55]
특종 TV연예의 심사위원
전영록은 '메탈밴드의 서태지가 이렇게 앳되고 예쁜 얼굴인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56]
흔히 <특종 TV연예>가 최초 출연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이 방송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착오가 빚어진 것이다. 그 전에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및
젊음의 행진에도 출연했다.
기사
[57]
재미있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였는지 개그맨
지석진도 무명가수 시절 부른 '
난 알아요'라는 곡으로 거쳐가기도 했다.
[58]
흔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를 특종 TV연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 매니저를 맡았던 최진열 씨의 증언으로 그 이전에도 많은 매체에 출연했다고 한다.
[59]
바비킴,
변진섭,
조관우, 이루에게 곡을 줬던 작곡가. 현재 예당엔터테인먼트 음악본부장으로
임재범의 빈잔을 편곡했다. 그리고 하광훈은 무려 20년이 지난 2011년까지도
악플에 시달렸다.
#
[60]
한국 록계의 초기 거장
김희갑의 부인이자
조용필의 '
킬리만자로의 표범' 작사, 드라마 작가 출신으로
김수현 작가의 동기.
[61]
아침마당의 전 수장. 공교롭게도 11년 경력의 아침마당을 첫시작한 게 고작 이 프로그램 나온 지 5일 전이었다. 지금은 불교TV에서 프로그램 진행 중이다. 당시 특종 TV연예에서는 연예평론가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그에 대한 칼럼을 많이 썼다. 덧붙이자면
세시봉 멤버의 일원이었으며 직접 노래한 것은 아니고 당시 세시봉에서 사회를 봤다고 한다. 연예 및 음악 평론은 그 당시부터 시작했다.
[62]
황해 &
백설희라는 1950~60년대의 전설적인 배우 & 가수 부부의 아들이다. 딸인 전보람은
티아라의 멤버다. 본인도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아이콘 중 한 명이자 원조 멀티 엔터테이너였다.
2008년 17집 발매. 영상을 보면 진행자 임백천이 별도의 수식어 없이 바로 "전영록 씨 안녕하세요!"(방청객 와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63]
정확하게는 '8점 셋, 7점 하나'로 평균 7.75이며 여기선 끝의 5를
반올림해서 7.8로 발표했다. 그 당시 매니저 최진열이 방송 끝난 후 방송국에서 "기껏 출연하라고 해놓고 엿먹인다"라고 흥분할 정도로 이례적인 일인 데다가
서태지는 이 프로그램의 음악 담당이었다(
스태프롤에도 이름이 나왔다).
[64]
2014년 김구라의 인터뷰에서 서태지는 '원래 당시 프로그램 컨셉이 가수들에게 평론가들이 혹평을 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라며 당시 평론가들을 감싸주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65]
당장 위의 특종 TV연예에서도 노래에 가사 자막을 깔아 주는데 랩 부분은 자막이 나오질 않는다. 랩은 노래 사이에 나오는 추임새라고 보고 노래 취급도 안해줬다는 소리. 서태지 이후에도 한동안 랩을 위주로 하는 가수가 나오면 가락(멜로디)도 없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게 지껄이는 게 무슨 노래냐 라며 반감을 표하던 기성세대들이 대부분 이었다.
[66]
김종서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노래는 더 잘 나가는데 앨범이 갑자기 안 나가서 공황이 온건가 했더니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것이었다. 이후 기존 가수들의 앨범 역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지만 자신은 <환상 속의 그대> 피처링으로 묻어갔다고 한다.
#
[67]
이 외에도 오재학은 '서태지가 뉴웨이브와 트로트를 시도한다', '흑인 음악은 쇠퇴한다', '트로트가 98년 절정기를 맞는다', '덩샤오핑은 96년 7월 중 사망한다' 등 다양한 예언을 했는데 전부 빗나갔다. 유일하게 맞았던 말은 트로트가 북한의 정서와 잘 맞는다는 사실 뿐이었다.
[68]
이지아의 본명은 김지아이며, 당시의 본명은 김상은.
[69]
한인이 많은 지역에 살았다면서 서태지와아이들 해체 후 거의 1년이 되도록 아무도 몰랐다는 것 자체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주장하는 직업부터 허무맹랑하고 스토커의 루머소문만들기에 비롯한 정확한 취재없는 아니면 말고식의 뉴스가 아닌가 의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니까 대다수가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70]
당시 은둔 생활하는 서태지를 추적하는 TV프로그램이 있었을 정도로 결혼 사실과 관계 없이 서태지는 언론의 목표 대상 1순위였다. 여기에 결혼을 공개한다 해도 어차피 못찾을 서태지가 갑자기 찾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은둔 생활을 안 해도 될 걸 결혼 공개 때문에 은둔하게 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을 받는 상태에서 결혼 사실을 밝힌다면 부인에 대한 온갖 추측과 뜬소문이 퍼지면서 가족들이 간접적으로 많은 고통 받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71]
다만, 처음부터 아니다라고 강경하게 나오면, 언론이 사생활 관련 질문을 꺼내는 것을 어느 정도는 차단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의 대부분은 음악에 대한 것이어서 사생활에 관한 질문은 독자들의 뇌리에 남지 않았고,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은 음반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때 결혼 사실을 밝혔다면, 인터뷰의 내용은 주객이 전도되어 모든 매스컴에 부인에 대한 추측과 뜬소문이 도배되었을 것이다. 인터넷 초창기였던 당시에도 서태지의 부인과 자식을 등장시킨 팬픽들이 넘쳐났던 것은 서태지의 사생활에 대한 팬들의 호기심이 지대했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음악에만 집중하자는 팬들은 이런 팬픽 문화를 못 마땅하게 보았지만 말이다.
[72]
이런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이 사건은
연예가중계 같은 연예뉴스가 아닌 각종 케이블 및 지상파 뉴스에는 물론 KBS 9시 뉴스 메인엔 네 번째, SBS 8시 뉴스에는 1보로 떴다.
[73]
민사소송과 가사소송은 원고가 소를 취하하더라도 피고가 취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하면 계속된다.
[74]
2000년대 초반까지는 YG 패밀리로 가수활동도 했었다.
[75]
2012년
힐링캠프에 출연한 양현석이 서태지의 이런 업로드들을 보며 사람들과 좀 어울리며 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기도 했다. 스튜디오에 오기 전 서태지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아무도 없는 해외의 어느 산에서 혼자 스키를 타고 있는 사진을 보고 왔다는 듯.
[76]
2000년 10월
딴지일보 인터뷰에서 레이블 설립 계획을 밝힌 바 있었고, 이후 실제로 서태지컴퍼니를 설립하여
넬,
Pia,
디아블로,
코어 매거진을 발탁하였으며, 그중
넬과
Pia는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 다만 현재 이들은 계약 기간 만료로 이적했거나 밴드를 해산한 상태다.
[77]
해피투게더에서 출연했던 절친
김종서의 증언에 따르면, 바깥에 5분 다녀올 거리를 다녀오는 데에도 1시간 정도의 준비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78]
다만 2021년에는 10집 작업을 위해 미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79]
자식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연예인도 많으며 이들의 얼굴까지 공개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순전히 본인 자유다.
[80]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를 자주 하지만, 주계정은 사진 작업물, 부계정은 미술작업물뿐이고 유튜브도 하고 있으나 단 한마디도 없이 음악만 튼다.
[81]
굳이 나얼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서태지는 적어도 앨범 발매 시 만큼은 나름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하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모습을 자주 안 비친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이 외에도
전지현,
송강호 등의 배우들은 연차가 꽤 지난 2020년 현재에도 영화, 드라마 출연은 잦은 편이지만 이에 비해 예능과 같은 방송 출연은 거의 안 하는 반면 서태지는 예능에 출연하여 사는 집까지 대중들에게 다 공개한 것만 봐도 이 사람이
이지아와의 결혼 사실을 숨겼던 과거와 비교하면 대중에게 나름은 자기 자신을 꽤 개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82]
6집 발매 직전 이 서태지 죽이기가 가장 극도로 달했다. 서태지가 앨범이 나오기 전 모든 언론 및 미디어에 출연 거부 및 인터뷰 거부를 하였고,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 촬영조차도 엿보는 것조차 못하게끔 서포트 멤버도 비공개로 하고 있었다. 당시 연예가 중계나 한밤의 TV연예와 같은 연예뉴스에서 짤막하게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는 서태지의 모습이 찍히긴 했는데,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각 멤버 중 누가 누군지도 분간이 안 갔을 정도였다. 물론 서태지는 후에 자신의 이미지와 멤버 공개는 컴백콘서트에서 처음 밝히는 것으로 하겠다라고 전하고 인터뷰 및 출연 거부에 대한 입장을 밝혔으나, 이미 서태지 죽이기는 시작되어 있던 상태였다.
[83]
특히 6집 발매시기 자체가 2년 만의 신보에다가 4년 만의 공연활동 재개라는 서태지 본인에게도 팬들에게도 특별한 시기였다. 6집 컴백공연 자체가 활동재개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서태지가 팬들에게 전해주는 깜짝선물쇼였는데, 그걸 미쳤다고 시작 전에 다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서태지는 6집 컴백쇼를 성황리에 마친 후 인터뷰에서 언론 인터뷰를 거부했던 이유를 이런 거였다고 밝혔다. 서태지 성격상 과격한 표현만 안 썼을 뿐이지 말을 풀어보면 이런 거다.
[84]
각트 개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이러한 원칙에 철저하다. 드라마나 영화 출연진에 대한 인터뷰도 미리 스포일러가 안 되는 선 안에서 모든 인터뷰 준비를 영화/드라마 제작진들이 감수한다.
[85]
탑은 서태지와 사적으로 여행을 간 적도 있고 7집 제작 당시 둘이서 함께 동거동락하며 음악 작업을 했다. 서태지 역시 탑을 두고 "대안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86]
어머니끼리
사촌,
외할머니끼리
자매. 여담으로 둘이 처음으로 안면을 튼 게 서태지와 아이들 2집 당시였는데 그때까지도 정작 친척인 줄 서로 몰랐다고 한다.
[87]
원래는 서태지가 증인까지 설 예정이었지만, 언론에 이 사실이 유출되는 바람에 결국 증인은 결혼식에서 연주를 한 남자가 대신했다고 한다.
[88]
박신혜와도 친한 형부-처제 관계로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박신혜가 출연하던 드라마
피노키오 촬영장에
삼계탕 밥차를
보낸 적이 있으며, 영화
콜에 서태지의 음악이 사용된 것도 박신혜를 통해 허락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 해 서태지의 크리스마스 안부글에서 박신혜를 '신혜 처제' 로 부르며 콜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볼 수 있다.
[89]
아티스트가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할 지 바꿀지는 온전히 본인의 자유이며, 오히려 활동할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들고 나오거나 기존 장르를 획기적으로 비틀어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태도는 아티스트로서 장점으로 마땅히 칭찬받아야 하는 행동이다.
[90]
다만, 서태지 음악의 뿌리는 록 음악이다.
[91]
당시 대중 가요판은 트로트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 외에 발라드, 댄스 가수들이 있었지만 이제 막 떠오르는 중이었고 댄스 음악 역시 템포가 빠른 발라드나 트로트 수준이었다. 록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이너 장르였다. 이 때문에 대중음악의 소비는 대부분 30대 이상에서 이루어졌고 10~20대는 미국에서 수입되는 팝 음악에 더 관심을 가지던 시대였으며 대학생의 덕목중 하나가 빌보드 차트 외우기 였다. 경제가 성장하여 이제 젊은 층과 학생들도 어느 정도 소비력을 갖추기 시작한 90년대에 그 소비력을 국내 대중음악계에 폭발시킨 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들을 수는 있지만 보기는 힘든 태평양 건너 미국의 가수들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한국의 가수가 그들이 동경하던 미국의 가수들 처럼 화려한 음악과 퍼포먼스, 무대기획을 보여주니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92]
다만 한국어 랩 자체는 서태지가 최초는 아니고 그보다 훨씬 전 부터
홍서범이나
신해철등에 의해 시도되어왔다. 이를 완전히 정착시켜 한국 가요의 주류로 끌어올린 사람이 서태지인 것. 한국어에는 종성(받침)이 있어 랩 음악에 적절한 언어가 아니라는 게 당시의 주류 의견이었다.
[93]
사실 한국에서 힙합의 선각자는 서태지와 아이들 보다는
현진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미 2년 앞서 NEW DANCE 앨범으로 힙합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대중에 선보였으며, (랩이라는 요소를 아주 최초로 소개한 건 아니다.) 공전의 히트곡 "흐린 기억속의 그대"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와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흔히 말하는 힙합 패션을 유행 코드로 만들기 시작한 것도 현진영인 것은 맞다. 다만 서태지가 일으킨 신드롬적인 인기와 파급력에 있어서는 비교불허한 수준이었으며 본격적으로 한국 대중들에게 팝 느낌의 댄스뮤직, 랩뮤직, 프로토타입의 힙합문화를 제대로 퍼뜨리고 머릿속에 '각인'시켜 주류 문화장르로 개척한 건 서태지라고 봐야 함이 옳다. 그리고 댄스 요소가 있어서 힙합이라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하나 애초에 힙합이나 랩뮤직 장르의 시초가 1970년대 중후반 뉴욕의 클럽 등지에서 믹스되어 나온 '댄스뮤직'이 그 기원이며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와 같은 그룹들이 데뷔한 1990년대 극초반 시기는 미국에서조차 힙합이
붐뱁,
지펑크 등으로 이제 막 세분화되기 시작되었을 때이며 여전히 댄스 뮤직과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의 시대이다. 당시 본토에서도 여전히 힙합하면 힙합(HIPHOP, 엉덩이를 흔들다)이라는 어원 그대로 엉덩이를 들썩대며 춤추기 좋은 댄스뮤직의 한 갈래라는 인식이 강했고 지금와서 사람들이 힙합하면 생각하는 자전적인 메시지의 가사와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는 오히려 1990년대 중반부터
2Pac이나 이스트 코스트 붐뱁 래퍼들인
노토리어스 B.I.G.,
Nas와 같은 뮤지션 등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발전해가기 시작했다. 힙합 장르의 역사를 잘 몰라서 선후관계를 헷갈린 요즘 사람들에게 생긴 해프닝이라 볼 수 있는 셈.
[94]
2014년부터는 동년도 발매된 9집 수록곡 중 회고적 성격을 띠는 '90's Icon'의 영향으로 '90년대 문화대통령'으로 쓰이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서태지의 시대는 90년대에 끝났다"라고 못박은 바 있다.
[95]
다만 이 때문에 '하여가'에서 이태섭의 기타 파트 카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는 이태섭이 외국 민요를 그대로 따왔다고 뒤늦게 해명하여 저작권상 문제는 없으나, 서태지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를 떠나서 프로듀서는 앨범의 모든 것을 총괄할 책임이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하여가(서태지와 아이들) 문서를 참조할 것. 3집에서 외국계 세션을 대거 기용한 것은 이때의 일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96]
돈을 주지 않는 기획사 사장에게 따지러 갔을 때 사장의 말에 한마디도 제대로 반박 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 돌아서 방을 나왔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자신을 비겁자라고 칭한 것으로 보인다.
[97]
양현석은 4집 작업 당시 서태지가 5개월을 집 밖으로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그 역시 20대였음을 감안하면 당사자 입장에서 무척이나 힘들었을 일이다. 3집 당시 한 예능 방송에 출연하여 "가수생활 외에 해보고 싶은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답변이 놀이공원에서 사람들 눈치 안보고 편하게 놀아보는 것이었다고. 결국 방송과의 기획으로 놀이공원 전세를 내고 혼자서 소년처럼 각종 놀이기구들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98]
물론 8집 전후로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성북동에서 생활하긴 했는데, 이때의 생활상은 오직
김종서만 알고 있다. 시기상
이은성과 연애를 하고 있을 때라 연애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럽게 평창동 이사를 했고, (종적을 숨기고 있던 중에 하필 이사만 언론에 걸려서 또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 후는 우리가 보는 대로 결혼 후 육아의 무한루프. 9집 들어 그의 활동이 2015년 펜타포트 참가까지 장기간 이어진 데엔 '육아 스트레스를 벗어나고 싶어서' 라는 선경험을 겪어본 팬들의 의견이 넘쳐난다. 이후에도 2016년 뮤지컬 페스트 VIP 참여, 2017년 25주년 콘서트까지 공백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꽤 활발히 활동했다.
[99]
결혼 이후에도 평창동 자택에 스토커가 침입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스토커를 잡은 게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
이은성이었다.
[100]
음악성과는 다른 이야기로 이 포맷을 대체할 포맷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음악성이 더 높다는 건 아니다. 다만, 서태지라는 가수의 음악성은 평론가들과 대중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유의할 점은 현 시점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기획사에서 아이돌을 만들어 내는(육성시키는) '아이돌 산업'은 H.O.T. 등을 만든 기획사들이 맞다. 다만 그들이 모방 혹은 참고한 모범답안이 서태지와 아이들인 것. 차이라면 기업형 아이돌 시스템 특성상 개인 기획사나 다름없던 서태지와 아이들에 비해선 사회비판적 메시지가 많이 줄었다. 그나마 H.O.T.가 좀 시도한 편. 그래도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면 이때만큼의 비판은 안해도 될만큼 사회가 이전보단 진보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101]
물론 서태지 혼자만 그런건 아니었지만(예를 들어 박진영도 당시 보수적인 방송가 분위기를 깨기 위해 노력한 사람 중 한명이었다. 전설의 비닐 바지 사건도 일종의 저항 의식에서 발현된 것.), 당대 가장 영향력이 큰 아티스트였던만큼 사회적 주목도나 호소력도 가장 높았다.
[102]
데뷔 첫해 대상을 받고 소감이라고 했던 말이 '그냥 랩 음악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고요.'이다.
[103]
물론 그렇다고 80년대가 마냥 단순하고 고루한 음악만 판치던 시절은 아니었다. 80년대 양 방송사에서 가수왕을 탔던 10명의 가수 중 트로트 가수는 의외라면 의외로 주현미와 현철 둘뿐이고, 트로트 가수는 아니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처럼 트로트풍도 부른 조용필을 포함해도 3명 뿐이다. 그리고 그 외엔 조용필, 전영록, 들국화, 김완선 등을 필두로 록이나 댄스 등 다른 장르들도 제법 시도하면서 상당수 10대 청소년들은 80년대에 이미 가요계에 흡수시켰다. 물론 이에 만족하지 못한 상당수 젊은층은 마이클 잭슨 등 팝송에 더 열광하긴 했지만 말이다. 참고로 발라드의 경우는 80년대 후반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다.
[104]
트로트는 주류 음악에서 밀려나지만, 발라드는 이런 음악들과 함께 주류로 공존하게 된다.
[105]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10대~20대 초반 청소년이다.
[106]
애초에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인
양현석이 이때 번 돈으로 은퇴 이후 YG 엔터를 세우고 사업가로 변신하면서, 빅뱅 등 2세대 아이돌부턴 본인이 주도적으로 대형 아이돌 그룹을 키우기 시작한다. 양현석이 작사, 작곡, 프로듀싱 다 되는 서태지를 모델로 GD 등 아이돌들을 교육한건 널리 알려진 사실. 댄스야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본인 전문 분야였다.
[107]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과 같은 서태지 출현 이전의 댄스가수들 역시 당대 1등도 하는 인기 가수였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당대 가요계 원탑이나 업계 최고라고 부를수는 없었다. 기록으로 봐도 히트곡들은 많았으나 앨범판매량이 100만장에 못미치며, 가요대상 수상기록도 전무하여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에는 확실히 못미쳤다는 것이 정론이다. 엄연히 이들의 전성기 당시 가요계에선 여전히 가왕 조용필, 공식적인 가요계 최초의 밀리언셀러이자 발라드 왕자 소리 듣던 변진섭 등이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108]
물론 이게 지속된건
IMF 탓도 있다. IMF 외환위기로 돈 안되는 장르엔 투자가 줄어들면서(이때 피 본 대표적인 분야가 악기 등 돈 많이 드는 록밴드 분야였다), 너도나도 돈 되는 팬덤을 노린 아이돌 장르만 따라하기 시작한 것인데 사실 이는 정도 차이일 뿐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오죽하면 그 아이돌 대형 기획사의 수장 중 한명인
박진영이 밴드 음악도 부흥시키고 싶어 2010년대
DAY6같은 밴드 아이돌을 만들 지경.
[109]
가수, 싱어송라이터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초라는 게 정설이고, 기획자까지 포함하면 SM을 설립한
이수만도 함께 거론되는 편이다. 물론 이렇게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인데다 지금도 YG 엔터로 K팝 산업에 영향력이 있는
양현석도 일정부분 거론될 여지는 있겠다. 한편으론 K-발라드의 시조격인
유재하에서 내려오는
김형석-
박진영-
방시혁 라인도 평론가 입장에서 보면 흥미롭다.
[110]
사실 지난 일이니까 리스크가 있었다는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거지 당시 상황을 돌이켜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거의 광기에 가까운 배짱과 반골기질이다.
[111]
지금도 잊을만하면 기획사-연습생 or 가수 간 노예 계약 문제, 갑을관계로 인한 부당한 사건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으니 90년대는 말할 것도 없다.
[112]
가왕이라고 불렸던
조용필마저도 1집에서 12집까지 소속사에게 다 떼먹혀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면서도 수입이 없었다고 한다.
[113]
실제로 이 당시 대중들에게는 가수라면 자기 노래는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상당히 깊게 박혀있었고 특히 서태지 이후 등장한 아이돌들이 사회비판 요소를 넣은 곡을 발표하면 회사에서 만들어준 노래 부르면서 무슨 사회비판이냐고 안좋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114]
대표적인 예가 김광수 하에 있던 조성모가 서태지의 사전녹화를 특혜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었다. 때문에 서태지 팬들이 사전녹화 무대를 기다리며 목이 말라도 당시 그가 선전하던 매실 음료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15]
지금이야 무모한 행동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언론의 서태지 죽이기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고 본인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인 일이라 보통 광기와 멘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116]
거기에 웬만한 사람들은 두손 두발 다 들을 엄청난 반골기질까지 포함이다.
[117]
기획사가 아이돌의 A부터 Z까지 육성하는, 이른바 육성형 아이돌이 보편화되면서 사실상 사회초년생인 아이돌은 데뷔 전부터 투자라는 명목으로 빚이 생긴다. 그래서 기획사가 갑질을 할 때 서태지처럼 정면돌파를 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내어 나온다고 한들 업계간 커넥션이 강한 바닥에서 살아남는 것도 일이다. 게다가
버닝썬 게이트 같은 사건 등으로 미루어보면 공직 사회 유착까지 심해져 어떤 의미로는 90년대보다 더 복잡해졌다.
[118]
이 곡은 KBS에서도 방송금지되었다. 원래는 컴백홈의 후속곡이 이 노래였는데 공윤에 걸리고 방송사에서는 방송 금지를 당하자 급하게 필승으로 변경했다는 얘기도 있다.
[119]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권 p322~323 재인용.
[120]
음저협의 저작권 신탁 내용에는 실제로 창작자 본인이 이용자에게 직접 저작권 허락을 허용하는 등 권리행사를 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협회의 승인만 있다면 원작자의 의사 없이 마음대로 리메이크를 할 수 있다는 것. 대표적인 사건이 가수 이은미의 김동률, 양희은 노래 무단 리메이크 사건이었다.
[121]
이를 통해 서태지 8,9집 노래, 후배들의 리메이크작이 노래방에 서비스됐다.
[122]
8집 당시 출연한 방송에서 서태지도 자신의 재산이 1,000억까지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으며, 해피투게더에서도 빌딩 재벌설은 부인했다. 다만 확실히 돈은 많이 벌었다고는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음악방송의 사전녹화 시스템이 제대로 되지 않을 시기에는 사비를 들여 무대를 꾸미고 엄청난 음향 장비를 갖추었고, 공연을 할 때마다 천문학적 수준의 돈을 들여 기상천외한 연출(탱크, 외계인 캡슐 등)을 해댄다. 아직 공연계 쪽 투자가 미국에 비해 크지 않은 한국에서 서태지의 콘서트처럼 다양한 연출과 우수한 음향 장비가 동원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여느 가수든 공연을 열 때 투자가 필수인만큼 서태지 역시 일정 부분 투자를 받겠지만 상당한 액수의 사비 역시 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서태지의 재산 역시 적지 않은 규모인 것은 사실인걸로 보인다.
[123]
서태지와 분쟁을 벌인 음저협은 그 이후 협회 내부에서 대표를 교체하는 등 개혁 과정을 거쳤고, 다른 부분의 개선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태지가 음저협에 다시 돌아온다면 음저협이 개혁에 성공했다는 방증이 된다. 함저협의 경우, 음저협에 비해 힘이 약하지만 서태지가 함저협과 함께 한다면 저작권과 관련한 상징적 인물을 영입암으로써 음저협에 충분한 대항마가 될 수 있다는 큰 홍보점을 얻게 된다.
[124]
참고로 헤비메탈 밴드인
주다스 프리스트도 거꾸로 재생하면 '자살해'(do it)이 들린다며 주다스 프리스트 노래를 듣다가 자살한 학생의 부모 등에게서 소송을 당했다. 물론 주다스 프리스트 쪽은 우리가 앨범이나 더 사라고 넣으면 넣었지 왜 그딴걸 넣었겠느냐며 일축했다.
[125]
홍석천이
커밍아웃하고 매장 당했던 시기가
2000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90년대 당시 게이라는 단어는 인격 살해에 가까운 단어였다.
[126]
사실 알려졌는데 당시엔 원체 강력하게 부인하다 보니 오보 취급 당했다. 당시 기자는 좀 억울했을듯.
[127]
실제 예쁜 동네였지만 한편으론 조금만 가도
보안사같은 곳이 보이던 동네였다고 한다.
[128]
정작 이주노 건은 많은 팬들도 의아해 했다. 그냥 태지한테 빌리지 왜 이름을 빌려서 타인에게 돈을 빌렸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 이에 이주노는 동생에게 손을 벌릴 순 없었다고 말했다. 여담으로 이 빚을 갚아준 건
양현석이었다.
#
[129]
애초에 재고가 200~250개(추정) 정도밖에 없기도 했다. 왜 이렇게 적게 찍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오랜 공백으로 인해 이렇게 팬들이 많이 몰릴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다른 굿즈 발매를 염두에 두고 진행한 일종의 수요조사일 것이라는 등 여러 추측이 오가는 중.
[130]
일정 기간 동안 특정
해시태그를 입력하면 해시태그 옆에 아이콘이 뜨는 것. #서태지, #태지, #SEOTAIJI, #TAIJI, #StayHomewithTaiji 다섯 가지 해시태그에 적용되었고, 해당 해시태그를 입력하면 서태지 얼굴 사진이 같이 뜬다. 그런데 이 얼굴 사진이 7집 시절이다.
[131]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유사한 기능으로, 게시 후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다만 Fleet은 이로부터 얼마 못 가 트위터에서 없어졌다.
[132]
원래 아이디는 @master_0221이었다. 매냐들이 부르는 서컴 관리직원의 별명 '마수러'(마스터)+서태지의 생일인 2월 21일이었는데, 팬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언뜻 봐서는 서태지 공식 계정인 것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 때문에 본인의 활동명으로 아이디를 바꾼 듯.
[133]
대표적으로 직전에 나왔던 티셔츠는 목 부분이 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명 목 찅기는(?) 티셔츠. 때문에 이번 티셔츠 상품 설명에 다소 오버핏이라는 문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몇 번 당한 매냐들은 모두 이 말을 불신하고 무조건 큰 사이즈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티셔츠 사이즈는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다.
[134]
마지막 장면에서 '가전을 나답게' 라는 카피가 나오는데, 동시에 "나를 완성하겠어" 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외에도 가사와 장면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사실 'Come Back Home'이라는 테마 자체가 '비스포크홈 가전이 있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잘 전달한다.
[135]
5월 말에는 조회수가 거의 하루에 100만 회씩 늘어나는 추세였다.
[136]
서태지 딸 정담은 2014년생으로 만 8살이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는 지났다. 다만 입학 시기가 딱 코로나 팬데믹이여서 입학을 못하고 홈스쿨링으로 대체했으며, 이후에도 입학하려고 하니 학교가 사라져 입학이 늦어졌다고 밝힌바 있다.
[137]
오히려 이 분류는 서태지가 아니라 대놓고
노무현의 선거 유세에 참여까지 했었던 6촌 형
신해철에게 더 어울리는 분류이다.
[138]
애초에 서태지가 미국 랩을 한국 대중음악계에 가져왔던 이력을 생각해보면 반쪽짜리 논리다. 당시 미국인도 이라크 전쟁 반대하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139]
한편
마이클 잭슨이 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140]
재미있게도
괴짜가족 주인공
고테츠의 한국판 이름은 변태지.
[141]
외계유입설은
프랜시스 크릭의 가설에서 비롯됐다.
기사 왓슨과 함께 DNA 구조를 밝힌 노벨생리학상 수상자 그 사람 맞다.
[142]
괴수들 특유의
킹왕짱
먼치킨스런 이미지 때문인지 자신의 레이블 (괴수인디진)내의 뮤지션들 또한 그런 킹왕짱 먼치킨 뮤지션이 되길 바란다는 의미까지 포함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굇수들이 되었다.
[143]
본인 소유로
람보르기니를 가지고 있다
[144]
당시 일본 자택을 촬영한 다큐에서 고가의 에어소프트 전동 소총도 볼 수 있다.
[145]
2022년 연말까지 활동한 뒤 탈퇴했다.
[146]
서태지 역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시나위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147]
첫 장면에서 나오는 핸드폰이 서태지폰이다. 알람도 해당 기기에 수록된 서태지가 직접 녹음한 줄리엣 알람.
[148]
후에 해피투게더에 출연하며 밝힌 바로는 서태지 역시 성시경의 팬이라서 허락해줬다고
[149]
처음에는 워낙 좋아하는 트랙이기도 해서 편곡을 세게 가고 싶었지만, 선배님이 왜 자신에게 리메이크를 맡겼을까를 생각해보며 본인의 목소리에 맞게 말랑한 사운드로 바꾸었다고 밝혔다.
[150]
출처
서태지 아카이브
[151]
배우
박상민이 타는 차종과 동일한 모델이다.
[152]
참고로 2대 중 한 대는 서태지가 08년 ETPFEST에서 관객 경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153]
일단 나름 차덕후답게 다양한 차를 소유하고 알려져있지만, 많은 매니아들에게 익숙한 것은 6집과 7집 당시에 타고 다녔던 에쿠서라 불리는
현대 에쿠스다. 물론, 토서카로 알려진 토스카를 소유한 뒤에 에쿠서의 행방은 묘연하다. 평창동 자택 혹은 서태지컴퍼니 건물 주차장에 있겠으려니 하고 추측만 무성하다.
[154]
여담으로 라인음향은 10대 소년들로 구성된 밴드인
더 이스트라이트를 상대로
갑질을 한 그 기획사가 맞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동일 회사이다.
[155]
이주노의 소속가수 영턱스 클럽의 멤버 송진아는 심지어 이주노의 영향 때문에 스노우 보드에 빠져 나중에 가수 때려치고 스노우보드 선수가 되었음.
[156]
잘 안 들리든지, 아니면 분명히 가사는 가산데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다.
[157]
팬들과 방송, 그리고 음악 사이트에선 '내 사투로 내가 늘어 놓을래'로 단정지었다.
[158]
티라키소리모올라키솔졉이라 들린다.
[159]
다만 5집
Seo Tai Ji 앨범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개인적으로(특히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당시에 만든 앨범이었기 때문. 그 때문인지, Take 5를 자주 셋리스트에 올리기는 하나, 나머지 곡들을 셋리스트에 잘 안올리려고 하고 특히 Take 3는 Quiet night 투어에서야 첫 라이브가 나왔고, 방송 등에서도 5집에 관련된 이야기는 잘 안 하려고 한다. 게다가 실제 5집 전후 상황은
이지아와 관련된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야기 하기가 어려운 것이 맞다고 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내용을 암호같은 느낌으로 적절히 표현해 가사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아무리 매니아들이 Take 1에서 외계어로 바꾼 가사의 원 가사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160]
마지막 줄은 3집 <다른 하늘이 열리고> 콘서트에서 추가로 불렀다. "야으야으" 에 가깝게 바이브레이션을 넣으면서 끝낸다.
[161]
그러나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어려운 자리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 술잔을 입에 대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했는데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 것 보면 위가 안 좋아서라기보다 술에 취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걸로 보인다.
[162]
폐간된 음악잡지 <뮤직라이프> 1995년 2월 호 또는 3월호에서 담당 기자가 언급했다.
[163]
사실 이게 정상이다. 지금 한국의 청년 인구수는 대폭 줄었음에도 여전히 과거 병력 수준을 똑같이 유지하기 위해서 정말로 신체 및 정신적으로 문제있는 사람들까지 현역, 아무리 못해도 공익으로 전부 끌고가려는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징병제가 유지되는 국가중에서 한국만큼 기를 쓰고 전부 끌고가려는 혹독한 시스템을 유지하는 국가도 드물다.
[164]
기자 본인의 기사를 갈무리한 블로그이다.
[165]
담배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고 입안에 고인 것을 뱉어낸다는 뜻. 매니저였던 최진열 씨도 같은 말을 했다.
숨을 참은 채 입만 벌렸다 다물었다 하면 비슷한 모습이 나온다.
[166]
서태지가 이전부터 사용해오던 빨강색의 베이스 기타라고 언급했다. 아마도 잭슨인 듯 하다.
[167]
다른 개토네이션의 멤버들도 얼굴에 페인팅을 하였다.
[168]
대표적인 예시로 2008 ETP의 등장씬에 쓰인 캡슐에만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2009 ETP에는 2008에 쓰인 캡슐을 다시 쓰기 위해 보수하는데도 또 다시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고 한다.
[169]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 같은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손석희 앵커,
김태영 前 국방부장관, 성우 고
장세준 등이 있다.
[170]
본인 말에 의하면 신해철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해철을 보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반응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171]
양현석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엔 노안이라는 말이 많았다. 얼굴이 젊을 때보다 많이 안 늙어서 지금은 노안까지는 아니다. 반대로 서태지는 데뷔 당시에도
동안인 편이었지만 늙는 건 양현석처럼 굉장히 느리고 적게 늙었다.
[172]
무한도전에 나온 그 집 맞다
[173]
이 인터뷰는 같은 해에 출간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에 실려 있다. 기존 인터뷰에 없었던 내용이 본인 피셜로 언급되니, 관심이 있다면 대형 도서관을 통해 찾아보길 바란다.
[174]
파타와 히스도 Dope Headz라는 밴드의 멤버로 참석했다. 후기 영상을 보면 서태지와 대화를 나누는 파타를 볼 수 있다.
[175]
요시키가 LUNATIC FEST 무대에서 옐로우 하트를 들고 나오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다시 유족들에게 돌려준 것으로 보인다.
[176]
실제로 9집은 신스팝 스타일의 일렉트로니카 락이였으며 크리스말로윈의 후반부에 나오는 'Oh My Jack O lantern was fake' 라는 비밀가사를 통해 서태지가 해당 떡밥을 통해 낚시를 했었다는 걸 보여준다.
[177]
서태지와 아이들 음반 정보를 보면 알겠지만 거의 95%가 서태지가 혼자 다 했다. 그래서 양현석, 이주노 역시 이 부분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고 한다.
[178]
그나마 양현석은 '널 지우려 해'와 '이 밤이 깊어가지만' 작사에 참여했지만 이주노는 그마저도 없어서 서태지가 나눈 6:2:2가 얼마나 보살급 배분인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춤은 이주노가 만들지 않았나? 게다가 서태지는 편곡에다가 음반 매니지먼트, 마케팅까지 혼자 다 했다. 사실 초기 기획사와 수익 배분 때문에 갈라선 서태지였던만큼 이런 부분에선 꽤 통 큰 양보를 한 것으로 보인다.
[179]
첫 번째 사진의 '인천공항 국내선 2청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천국제공항은 2018년에 개장한 제2터미널은 있어도 인천국제공항에 따로 마련된 국내선 터미널은 없다. 애초에 저 짤의 원본이 되는 서태지의
6집 활동을 위한 귀국 당시에는 인천공항 자체가 없었다. 해당 사진의 배경 또한
김포국제공항 국제선
청사이다.
[180]
비활동기이므로 업무가 없어서 사무실 규모를 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81]
아이유가 부른 버전을 맨 처음 공개한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182]
4집,
7집과
8집은 10곡이 넘긴 하나, 인트로곡, 반주곡, 브릿지곡과 리믹스곡 등을 제외하면 각각 8곡, 7곡, 8곡뿐이다.
2집은 인트로곡과 '우리들만의 추억'의 반주 버전을 포함해서 총 8곡인데, 그 두 곡들을 제외하면 6곡(!)밖에 수록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