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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04:34:28

스탈린그라드 전투

독일 제6군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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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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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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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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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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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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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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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스탈린그라드 전투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
Die Schlacht von Stalingrad
Battle of Stalingrad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파일:Battle-Stalingrad.gif
▲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소련군[1]
파일:스탈린그라드 전투 지도.jpg
스탈린그라드와 그 주변 지역의 지도
날짜
1942년 8월 21일 ~ 1943년 2월 2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틀:깃발|]][[틀:깃발|]][[루마니아 왕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니키타 흐루쇼프|]]
[[틀:깃발|]][[틀:깃발|]][[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틀:깃발|]][[틀:깃발|]][[게오르기 주코프|]]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하지 아슬라노프
[[틀:깃발|]][[틀:깃발|]][[바실리 추이코프|]]
[[틀:깃발|]][[틀:깃발|]][[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틀:깃발|]][[틀:깃발|]][[안드레이 예료멘코|
안드레이 예료멘코
]]
[[틀:깃발|]][[틀:깃발|]][[세묜 티모셴코|]]
[[틀:깃발|]][[틀:깃발|]][[로디온 말리놉스키|
로디온 말리놉스키
]]
[[틀:깃발|]][[틀:깃발|]][[파벨 바토프|]]
[[틀:깃발|]][[틀:깃발|]][[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
[[틀:깃발|]][[틀:깃발|]][[헤르만 호트|]]
[[틀:깃발|]][[틀:깃발|]][[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
[[틀:깃발|]][[틀:깃발|]][[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
[[틀:깃발|]][[틀:깃발|]][[페트레 두미트레스쿠|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콘스탄틴 콘스탄티네스쿠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구스타브 제니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이탈로 가리볼디
결과
소련의 결정적 역전승
영향
동부전선 전세의 전환점, 나치 독일 소련 정복 계획 사실상 포기
전력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약 170만 명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 남서 전선군
- 돈 전선군
약 50만 명+지원군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제6군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제4기갑군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제3군
- [[틀:깃발|]][[틀:깃발|]][[틀:깃발|]]제4군
-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제2군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제8군
피해 규모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총 사상자 1,129,619명
- 전사 및 실종 478,741명
- 부상 650,878명
- 민간인 피해 미상
총 사상자 85만 명 (포로 91,000명 포함)
- [[틀:깃발|]][[틀:깃발|]][[독일 국방군|]] 40만 명
- [[틀:깃발|]][[틀:깃발|]][[루마니아군|]] 20만 명
-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12만 명
- [[틀:깃발|]][[틀:깃발|]][[이탈리아 왕국군|]] 13만 명
1. 개요2. 서론3. 1942년의 동부전선4. 최초 전개5. 추축군의 공격
5.1. 시 외곽의 전투5.2. 지옥의 혈전5.3. 생쥐 전쟁(Rattenkrieg)
6. 소련군의 반격
6.1. 천왕성(우라누스) 작전6.2. 독일군의 대응6.3. 작전 발동6.4. 항공보급의 처참한 실패, 도달한 공세종말점
7. 후반 전개
7.1. 겨울폭풍 작전7.2. 독일군의 항복7.3. 결과
8. 기타
8.1. 폰 파울루스? 파울루스?8.2. 만약 독일군이 승리했다면?8.3. 만약 독일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했다면?
9. 말말말
9.1. 이후 독일 육군에 끼친 영향9.2. 이후 소련 육군에 끼친 영향9.3. 참전한 한국계 인물?
10. 양측의 편제
10.1. 소련군
10.1.1. 소련군 총사령부10.1.2. 스탈린그라드 전선군10.1.3. 돈 전선군10.1.4. 남서 전선군
10.2. 추축군
11. 매체에서
11.1. 영화11.2. 게임11.3. 소설, 만화

[clearfix]

1. 개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1분 전개[2]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련 스탈린그라드[3]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 독일 국방군 간의 전투이다.

독소전쟁에서 가장 거대했던 전투 중 하나로, 쿠르스크 전투가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의 전투라면[4]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추축국은 85만 명, 그 중 독일군은 40만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하였는데, 이는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잃은 모든 군인들의 수와 비슷하다. 소련군 측 사상자는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2. 서론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기 독소전쟁의 전개[5]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본래 이 전투가 일어났던 스탈린그라드는 차리친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으며, 러시아 내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이 백군의 공세를 결정적으로 막아내고 집권 이후 산업화를 집중적으로 추진하며 자신의 이름까지 붙인 그야말로 스탈린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도시였다.

한편 나치 독일 모스크바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바르바로사 작전이 중단되었으며 중부 집단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독일은 모스크바에 대한 재공격을 회의적으로 보게 되었고 모스크바로 진군한다는 본래 계획을 뒤엎는다. 그 대신에 캅카스의 유전지대를 점령하여 독일의 고질적인 연료 문제를 해결하고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킨다는 청색 작전을 구상하였으며 겨울이 끝나고 1942년 여름이 되어 작전을 실행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이 도시는 볼가강의 주된 산업 도시였고, 점령한다면 캅카스로 진군하는 독일군 좌익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스탈린도 이 점을 알고 있었고, 총을 들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청색작전이 실행되고 독일군이 캅카스로 진군하자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독일군의 측면 포위로 인해 제대로된 방어선의 구축은 실패하였다. 그나마 바르바로사 작전 때와는 달리 전력의 결정적인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진입해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했으나,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무려 3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엄청난 피해를 내며 도시 점령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이렇게 벌어준 시간 동안 소련군은 점점 독일군에게 수적 우위를 점하게 되고 마침내 11월 19일, 천왕성 작전을 통해 독일군의 측면을 보호해주던 루마니아군을 분쇄하고 도시에 있던 독일군 33만여명을 포위하는데에 성공한다. 독일은 공중보급을 통해 포위된 병력을 살릴 방법을 구상했으나 곧 포기하고 최대한 소련군에게 저항해 그들을 묶어두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최종적으로 소련에게 항복하게 된다.[6]

이 전투는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을 완전히 좌절시키고 전세를 뒤바꿨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독일군의 병력과 자원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더는 소련군을 압도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초기의 패배를 딛고 이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3. 1942년의 동부전선

1941년 6월 22일 독일 국방군과 추축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한 뒤, 1941년 가을까지 소련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패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맹렬하게 저항하던 소련군과 러시아의 지독한 날씨로 인해 독일군의 모스크바 점령(태풍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이에 당초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독일 국방군의 목표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1년 12월부터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1942년 새해 1월까지의 공세로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모스크바 일대에서 150km~250km 가까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전히 모스크바가 점령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고 초기 반격에서 축출하는 데 실패한 르제프 돌출부에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으나 르제프 전투에서 소련군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독일군의 전술에 말려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을 뿐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연이어 데미얀스크에서 포위된 독일군이 방어에 성공하며 독일 중부집단군은 대타격을 받긴 했지만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전선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4. 최초 전개

4.1. 청색 작전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파일:FallBlau.png
<rowcolor=white> 청색 작전의 전개도
<rowcolor=white> 독일군의 전체적인 소련 각개격파 계획.
여기서 캅카스를 점령하는 것이 바로 청색 작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1942년 봄 독일 국방군 장성들은 모스크바 재공격을 건의했지만 모스크바 공격을 담당하던 중부집단군이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아돌프 히틀러 또한 모스크바를 또 공격하는 것은 적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 제국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참전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히틀러는 미국이 유럽전에 참전하기 전에 동부 전선을 마무리지으려고 했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아돌프 히틀러는 남부집단군을 주공으로 삼아 캅카스의 마이코프와 그로즈니 유전 지대를 점령하고 돈강과 볼가강 교통망을 차단하여 소련의 수운을 마비시킴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인 연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42년 하계 공세의 방향을 잡고 이를 청색 작전이라 명명했다. 이를 통해 1943년 경에 소련의 경제를 붕괴시키려 하였다.

독일이 계획한 청색 작전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보로네시에서 저항하는 소련군을 격파하여 진격로 측면의 안전을 확보한다.

2. 돈강 넘은 독일군은 점점 전선을 밀어버리며 볼가강까지 진격한다. 스탈린그라드로의 진격은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3. 위 과정으로 캅카스를 소련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이어 독일군은 캅카스 유전 지대와 주요 산업 기반을 탈취하는 최종적인 목표를 달성한다.

이때 히틀러는 작전이 진행되던 1942년 7월 23일, 공세를 가하던 남부집단군을 A와 B로 나눠버려 A집단군[7]은 캅카스로, B집단군[8]은 스탈린그라드로 동시에 공세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9]

히틀러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한계를 넘어선 보급 상황과 심각한 추축국의 석유 부족 문제 때문이었다. 실제로 B집단군은 1942년 내내 극심한 보급부족에 시달렸는데 여기에 단순히 병력을 더 쏟아붓는 건 안 그래도 힘든 보급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만약 A, B 집단군이 한꺼번에 스탈린그라드와 아스트라한으로 진격했다가는 모조리 보급문제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추축국의 석유 갈증은 너무나 심각했는데, 루마니아의 유전 지대를 제외하고는 공급처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마이코프와 그로즈니 점령은 매우 시급했다.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철도 라인 2개 중 하나가 캅카스를 지나고 있던 점도 주목되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이유로 집단군을 둘로 나눠서 먼저 빨리 캅카스로 내려보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시 독일 국방군에게 있어 불가피했던 도박수였고, 때문에 OKH에서도 총통명령 45호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결국 스탈린그라드 주위에 형성되는 엄청나게 넓은 방어 구역을 루마니아 이탈리아 같은 한 수 아래의 전력을 보유한 동맹국이 담당해야 한다는 뜻이 되었고 이는 이후 벌어진 소련군의 반격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파일:Battle-SecondKharkov.gif
<rowcolor=white> 하르코프를 향한 소련군의 공세와 독일군의 성공적인 반격[10]
청색 작전이 시작되기 전, 비슷한 곳에서 스탈린이 직접 감독한 소련군의 춘계 공세가 먼저 시작되었고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중심으로한 75만 명의 병력이 5월 공세를 시작했다.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초반에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등 선전했으나, 마침 청색 작전 투입이 예정되어 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독일군이 기동 방어를 실시하여 소련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27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패주한 병력은 볼가강 서안으로 도주했다.[11]

독일군은 이 여세를 몰아서 6월 말에 청색 작전을 시작했고 이는 대성공이었다. 스텝 초원을 관통하는 독일군을 소련군은 거의 저지하지 못했고 저지선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독일군의 측면 포위로 인해 번번히 실패했다. 제대로 된 저지선을 형성하지도 못한 채 하르코프 로스토프에서 포위된 소련군은 궤멸당했고 7월 말이 되자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포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와중에 섬멸당하거나 포로로 잡힌 소련군만 '수십만'에 달해 소련군은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4.2. 소련군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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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이 직접 붙은 도시[12]인지라 그 상징성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또한 도시 자체가 상당히 큰 산업 도시인 데다[13] 독일군 입장에선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캅카스로 진격 중인 A집단군의 안전을 도저히 확보할 수 없어서 사실상 분단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절대 사수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패퇴하던 부대를 수습하여 62군으로 재편성하고 근처 64군과 합류하여 스탈린그라드 방면군을 편성, 독일군의 공세에 대비하도록 했다.

또한 스탈린그라드는 현재의 명칭인 볼고그라드에서 알 수 있듯이 볼가강에 위치해 있는데, 이 볼가강은 모스크바 북서쪽에서 시작해서 남동쪽으로 흘러 카스피해로 들어가는 강으로서 캅카스 지방의 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비롯한 소련 남방의 자원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공업 지대로 운반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독일은 작전 계획에서부터 스탈린그라드를 '무력화'하여 볼가강의 운반 통로를 차단해 소련의 전시 경제를 지탱하고 전선의 소련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자가 운반되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소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일의 계획을 막기 위해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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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시가전의 주역인 62군, 64군을 예하부대로 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고위 지휘관들[14]
1942년 8월,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에 티모셴코 대신 안드레이 예료멘코 상장을 임명했다. 티모셴코가 무능한 건 아니었지만 독소전쟁 이래 패배가 따라다니던 그에게 스탈린그라드의 방어를 맡긴다는 것은 왠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예료멘코는 독소전쟁 이후 부상을 두 번이나 당했으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스탈린은 그를 전선군 사령관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그리고 예료멘코의 정치장교는 당중앙위원회 서기 겸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스탈린 사후 당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대권을 잡게 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전선군의 예하 부대로서 스탈린그라드 시내에는 62군과 64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흐루쇼프와 추이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62군의 사령관 안톤 로파틴 중장은 예료멘코와의 면담에서 매우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언동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패배주의자를 데리고는 도저히 스탈린그라드를 수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예료멘코는 64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를 62군으로 옮기고 21군 사령관이었던 미하일 슈밀로프 중장[15]을 64군으로 전임시켰다.
한편 62군 사령관이 스탈린그라드 전선사령관을 기만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당시 전선사령관은 예료멘코 장군이었다. 따라서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하라고 했더니 달아나기만 한 62군의 사령관으로 새로운 사람을 임명해야 했다. 그 시점에 나는 추이코프 장군에 대해서 매우 좋은 인상을 구축한 상태였다. 우린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가 물었다. "62군 사령관으로 누구를 추천하겠나? 누가 도시를 지키는데 알맞겠는가?" 내가 대답했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입니다."
흐루쇼프 회고록 1권.
로파틴 장군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가 자신감있는 마음가짐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는 부지노프카의 적 군세를 물리치는 것에 대한 희망을 전혀 갖지 못했다. 그는 우측면에서 반쯤 포위된 그의 병력들이 버틸지에 대해서 의심했다. (...) 62군 사령관 로파틴 장군은 그의 군대가 도시를 사수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사생결단으로 싸우기보단, 적을 볼가강에 접근하지 못하게 죽기살기로 싸우기보단, 그는 그저 병력을 계속 철수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 때문에 그는 직무에서 해임되었으며 62군은 임시로 참모장 니콜라이 크릴로프 장군이 지휘하게 되었다.
바실리 추이코프, The Battle For Stalingrad

반면 게오르기 주코프는 로파틴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기록을 회고록에 남겼다. 주코프와 추이코프가 사이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추이코프의 공적을 깎아 내리기 위해 주코프가 이렇게 써 놨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참고로 로파틴에 대해서 주코프는 정확히 이렇게 적었다.
8월 30일에 이르러 남동전선의 병력들은 적군의 압도적인 숫자에 밀려 외곽 방어선으로, 그 다음에는 내부 방어선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시점에 62군은 A.I. 로파틴 중장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62군이 적군에 압도적인 중과부적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군인으로서 해야 할 모든 의무를, 그리고 그 이상을 수행하였다. 1942년 9월 10일부터 62군은 추이코프 중장이 지휘했다.
Georgy Zhukov, Marshal of Victory: The Autobiography of General Georgy Zhukov.

로파틴은 사령관에서 보직해임된 후에도 한동안 스탈린그라드 근처에 머물렀는데, 흐루쇼프는 이것이 군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해 그를 후방으로 전속시켰다는 이야기도 회고록에 써놨다.

5. 추축군의 공격

5.1. 시 외곽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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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노획한 PPSh-41 [16] 기관단총을 든 독일 육군 중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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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로 비행중인 Ju 87 폭격기
독일군은 공격에 앞서 루프트바페에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 것을 요청했고 스탈린그라드는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18] 그러나 스탈린은 피난 행렬이 방위 부대의 소통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시민들이 피난하는 것을 금지해 버렸고 남녀노소를 불문한 민간인이 방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다. 8월 23일부터 48시간 동안 독일 공군은 1,000톤 이상의 폭탄을 도시에 투하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프트바페는 도심 전역을 활활 타오르는 불지옥을 만들었다.[19]

독일군은 쾌조의 진격을 계속해 선도 부대인 16기갑사단이 볼가강 북서쪽에 성공적으로 진출했고 마침내 완전히 불바다가 된 스탈린그라드에 16기갑사단을 선두로 진입을 시작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여군 지원병[20]으로만 이루어진 제1077대공포연대였으나, 이들은 육상 목표에 대한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멸할 때까지 싸웠으며, 이들을 섬멸한 독일 육군 제16기갑사단 병사들이 앳된 소련 여군들의 시체를 발견하자 불길한 예감이 뇌리에 스치기 시작했다.[21]

2016년에 올라온 실제 참전용사 할머니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이 전투에서 1077연대의 생존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22] 부대 자체는 스탈린그라드 이후에도 있다가 1945년 종전에 해체되었으며, 생존한 참전용사들은 전후 훈장까지 받고 지금까지 잘 살아있다고 한다. 기사엔 참전용사들의 자세한 증언이 실려있는데 처음엔 겨우 75명 정도가 투입되었지만 나중엔 지원이 와서 전차와 장갑차의 지원도 받아가며 싸웠고, 한 할머니에 따르면 본인이 있던 중대엔 20명의 소녀 포병들이 있었는데 모두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웠다고 한다.

또한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23] 앞 대로까지 진격하자 새로운 반격에 직면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T-34 전차들이 시가지 내에서 끊임없이 출현한 것이다. 정찰 부대가 스탈린그라드 내부의 소련군의 대규모 전차부대에 대해선 통보한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 전차들의 등장은 미스터리였다. 이들은 도색과 기관총 장착도 못한 미흡한 상태로 그대로 나온 미완성 전차들이었으며, 공장의 작업자들은 공장 안까지 총탄이 날아드는 상황에서도 전차를 조립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후방의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만든 전차에 스스로 전차 승무원이 되어 전차를 몰고 독일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후 노동자들은 T-34를 생산할 강철과 조립부품이 다 떨어지자 소총을 들고 교전했다. #

이때부터 소련군은 독일 공군이 파괴한 건물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격렬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16기갑사단은 오히려 역습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 강력한 저항에 진입하는 데 실패한 독일군은 서쪽에서도 진입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도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성공하지 못했다. 남쪽에서 4기갑군이 진격을 시도했지만 이조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지리에 익숙해진 독일 4기갑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남쪽에서 소련 64군의 좌익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때를 틈타 독일 6군이 진격을 개시해 스탈린그라드 북쪽을 방어하던 소련 62군의 방어선을 삽시간에 무너트리고 스탈린그라드 외곽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제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같이 보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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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의 '서막'이 오른 것에 불과했다.

5.2. 지옥의 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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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Командный_пункт_62-й_армии_начальник_штаба_Н.И._Крылов,_В.И._Чуйков,_К.А._Гуров,_А.И._Родимцев._Декабрь_1942_г.jpg
<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상징하는 바르말레이 분수(Barmaley fountain)[24] 시가전의 주역인 62군 지휘부. 오른쪽부터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중장[25],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26], 참모장 니콜라이 크릴로프 소장
<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2013)에서 묘사된 전투 당시의 시가전
방어의 중핵인 62군과 64군을 중심으로 한[27] 총 50만 이상의 병력이 집결된 상태였는데 이들은 외곽 방어선이 붕괴되자 시내에 집결하여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위에서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은 무너진 집과 공장을 이용하여 방어 거점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잔혹했다.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소련군 신병들은 평균 생존 시간 24시간이란 끔찍한 기록을 남겨야만 했다.

1942년 7월 27일, 볼가강을 건너 퇴각하는 장병은 즉결 처분하라는 스탈린의 명령[28]이 하달된 상태였다. 수많은 소련군 후퇴병과 탈주병이 이런 비윤리적인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었다. 소련군은 위와 같은 사유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수천 킬로미터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도 했고, 해군 육전대도 대거 동원했다.

독일군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가전에서는 자신들의 장기인 제병 협동[29] 전술 같은 유연한 기동전을 전혀 구사하지 못하고, 그저 소규모 보병들의 근접 전투를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30] 그 결과 수많은 독일군 부대가 투입된 후 며칠 안에 전멸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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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는 소련 병사
어떤 희생이 있던지 도시는 사수되어야만 했고, 당시의 소련군은 여러 면에서 독일군보다 열세였다. 특히 소련군은 제병협동 면에서 독일군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미숙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제병협동이 가능한 공간을 내주는 것은 목을 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추이코프는 그런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자신에게 남은 소련군 소부대들을 독일군 전선에 바짝 붙여서 배치했다. 게다가 소련군은 병력 개개인의 근접전 화력은 PPSh-41 덕분에 독일군보다 뛰어나서 중화기를 활용하기 어렵게 만들면 흐루쇼프의 생각대로 숙련도는 떨어지더라도 독일군에게도 무시못할 손실을 안길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추이코프는 이렇게 소련군 부대를 독일군과 가까이 붙여놓아 독일군의 장점인 우세한 화력을 함부로 투사하지 못하게 하고[31] 건물마다 하나하나 병력을 배치해 강제로 백병전을 일으키는 시가전 전술을 제안하여 독일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효과를 보았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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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한 아시아계 소련 육군 병사
소련은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에서도 대대적인 징집[33]을 행하였고, 그 덕에 소련군에는 아시아계 장병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공산당 정부가 공식적으로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며 인종차별에 반대했지만 인민 대중의 인식을 전부 바꾸진 못해서 백인 장병들이 황인 장병들을 보고 몽골 놈이라고 인종차별을 하거나 보직에 불이익을 주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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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노획한 Kar98k MG34들을 들고 있는 소년병들[34]
동방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소련군 피해는 상당했으며, 소년병들이 활동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대개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가족을 잃은 전쟁 고아들이었으며, 고아원 등 아동을 맡을 시설들도 파괴되어 차라리 도망치듯 군대를 따라다니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아 많은 고아들이 소년병으로 자원했다.

당시 소련의 병역법 상에서는 만 16세 ~ 만 28세의 남성 시민들에게 병역 의무가 있었음으로 그보다 나이가 적은 소년병들은 당연히 정상적인 입대가 허용되지 않았고 대부분 그저 자원해서 잡역을 도왔으며, 그마저도 못하는 대여섯 살 꼬맹이들은 정신이 피폐해진 군인들의 힐링을 책임지는 마스코트처럼 군인들을 따라다녔고, 상황에 따라서는 스스로 자기 몸을 지켜야 했다. 이렇게 전쟁으로 집을 잃어 갈 곳 없어 군대를 따라다닌 꼬마들은 '연대의 아들(сын полка)'이라고 불렸으며, 꼬마들을 키우듯이 데리고 다닌 소련군 부대에 대한 기록들이 몇몇 남아있다.

물론 소련군에서도 소년병들이 있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소련은 자체적으로 소년병을 대대적으로 운용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헌병이 붙잡아다가 그냥 집으로 가라고 내보냈으며, 독소전쟁 시기 활동했던 소년병들은 전황이 급박했던 일부 현지에서의 자원자로만 구성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소년병들은 전투가 끝나고 소련의 전황과 인력 상황이 개선되고 난 뒤에 사라졌다. 일부 너무 어린 소년들은 조기 전역시켜 집으로 보냈다.

5.3. 생쥐 전쟁(Rattenkri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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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독일군과 20m 앞까지 대치한 적도 있었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죠. 여기에는 제가 있고 저기에는 독일군이 있고... 먼저 수류탄을 던지는 쪽이 이기는 거였죠.[35]
-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의 잊혀진 증거 - 스탈린그라드 전투' 편

독일군은 시내 점령이 비교적 간단하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막상 시가전에 들어가자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병, 공병, 기갑, 공군의 완벽한 제병협동이 장기이던 독일군도 폐허가 된 시내의 잔해로 인해 전차기동도 어려웠으며 당시에는 정찰헬기나 공격헬기도 없었기에 중파나 소파된 건물 위에서 매복 후 공격하거나 잔해속에 숨어있다가 공격하는 등 곳곳에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보병 위주의 시가전에선 맥을 못추린 것이다. 어디로 진격하던 폐허 속에서 튀어나와 집요하게 공격하는 소련군을 일일이 제압하다 보니 단기간에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이런 시가전을 농담 삼아 '생쥐 전쟁(Rattenkrieg)'이라고 불렀다.

결국 스탈린그라드를 맡고 있던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무리해서 단기간에 중심지를 점령하는 것보다 천천히 오랜 시간과 병력의 소모를 감수하더라도 건물 하나하나 소련군이 없는 것을 전제로 다 때려잡아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결국 양측이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병기들을 군인들에게 쥐어주고, 전장의 모든 것이 동원된 지독한 소모전으로 흘러갔다. [36]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소련군의 피해는 극심해 방어전의 중핵이었던 62군이 단기간에 많은 병력을 잃고 다시 보충되는 상태가 반복되어 정원보다 사상자가 더 많은 끔찍한 상황에 달할 정도였다. 훈련도 채 완벽히 받지 못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선에 속속 도착하여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볼가강과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아무리 막강한 동원력을 자랑한 소련이라도 이런 인명 피해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여서, 62군은 갈가리 찢겨나간 사단의 잔해들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다.

추이코프는 이런 부대들을 긁어모아 전투를 수행했으며, 강 건너편에서 예료멘코는 사상자를 보충하기 위해 취사병까지 전방으로 내보냈다. 후방에서는 소련군의 포격 지원이 가세했다. 독일군이 특히 싫어한 것은 카츄샤 다연장로켓으로, 12,000평 정도의 면적에 4톤 정도의 폭약을 쏟아낼 수 있었다.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은 이런 소련군의 포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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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마마이 언덕 전투에서 맹활약한 소련 육군 제13근위사단장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장군[37]과 부하 장병들[38]
위 사진 속의 로딤체프 장군도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지 2시간 만에 참모 두 명은 독일군 총에 맞아 전사하고 자신도 죽을 위기를 넘겼다. 한 번은 한 변이 수백 미터 밖에 안 되는 삼각형 진지 안에 볼가강을 등진 채 자신의 사단과 함께 완전히 포위되었고, 교전 중에 불이 붙은 휘발유가 사단 지휘소까지 흘러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는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스탈린그라드 중앙역 벽에 '로딤체프의 친위부대원들이 여기서 조국을 위해 싸웠고 잠들다.'라고 갈겨썼다.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볼가강 교두보를 유지하기 위해 소련군은 군대에 처음 들어온 신병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을 겪어본 노병과 취사병 같은 지원 병과까지 여유가 있는 인력이라면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아 동원했으며, 정예 병력 또한 상당수 투입됐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동원된 사단들과 흑해 함대에서 급조된 해군 보병대[39]나 앞서 언급된 제13근위사단은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독일군 폭격기가 도시를 폐허로 만든 덕에 저격수들에게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어, 독소 양군 저격수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장 유명한 저격수는 소련군 제1122 보병연대의 이반 시도렌코인데,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500명을 사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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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포격을 가하는 독일 포병대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마이 언덕[40]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수도 없이 바뀌었으며, 어떤 때는 소련군이 하루에 1개 사단을 잃기도 했다. 강 아래쪽의 곡물 창고에서는 전투가 너무 근접전으로 벌어져 소련군과 독일군이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거대한 사일로로 만들어진 곡물 창고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지어진 요새 수준의 구조를 자랑했다. 높기도 높아서 하나의 성이나 다름없었는데, 독일군은 이 건물을 점령하기 위해서 탱크, 포격, 폭격까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소련군의 저항은 무너지지 않았다.

전투는 몇 주간 계속되었는데 독일군 장교가 항복 권유를 위해 곡물 창고를 찾아왔지만 퇴짜를 맞았고, 곡물 창고의 소련군 부대가 정찰기와 전차까지 동원된 10번의 공격을 격퇴하는 등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했다. 이들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물도 부족하여 항시 갈증에 시달렸지만, 싸움을 지속하다가 종국에는 보급품 부족으로 탈출하게 된다.

독일군이 최후로 곡물 창고의 적을 소탕했을 때 겨우 40구의 소련군 시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저항의 규모로 볼 때 더 많은 소련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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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파블로프의 집(Дом Павлова) 벽돌기둥만 남아있는 현재 모습
도시 내 다른 곳에서는 야코프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소련군 부대가 한 아파트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이 아파트는 시의 중앙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본래는 독일군이 보병대를 이끌고 이 건물을 공격해오자 파블로프가 부상당한 선임병을 대신하여 지휘해 고작 13명을 이 건물에 배치하여 독일군을 막았던 것으로 시작했다.

이들은 13명의 소수의 인원임에도 맹렬하게 싸웠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 때문에 수면부족에 시달렸고, 가끔씩 독일군의 3호 전차가 공격해오면 지붕에서부터 지하실까지 활용하여 집중사격을 가하여 쫒아냈다. 건물 자체는 적들에게 포위되었지만 얼어붙은 강이 확보되어 있어 이를 통해 보급품이 넘어왔기 때문에 보급 문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병사들은 이런 투지로 버텨갔고, 결국 이후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기관총, 대전차 소총 및 박격포 등으로 이 건물 전체를 무장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아파트를 지뢰밭으로 둘러싸고 창문에 기관총을 배치하였고, 지하실의 벽에 틈을 내어 통신을 용이하게 했다. 이 아파트는 나중에 '파블로프의 집(Дом Павлова)' 이라고 불린다.
파블로프의 집은 무려 58일[41] 동안이나 방어에 성공하며 11월 25일에 독일군을 후퇴시킴으로써 이 방어전의 승리자가 된다. 파블로프의 집은 나중에 소련의 선전용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독일군은 파리 함락보다 이 건물 하나 앞에서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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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붉은 10월 제철소, 기차역[42] 등을 비롯한 공장 지대에선 처절한 사투가 연일 계속됐고 수 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이곳에서 사라질 정도로 양군의 전투는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공장 단지를 사수하란 명령을 받고 들어간 소련군 제187 보병사단은 불과 3일 만에 사단 병력의 90%가 부상 당하거나 전사했다.[43] 특히 로딤체프 장군의 13근위소총사단을 비롯한 소련군의 저항은 매우 완강했고 독일군의 피해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격전지로는 소연방 영웅 광장 옆에 있는 백화점이 있었다. 백화점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백화점이었고, 소련군 병사들은 지하실에서 저항하다 전멸한다. 이곳은 파울루스의 지휘소가 된다.

격전이 이어지며 독일군은 비록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전투경험이 있고 무기도 충실한 육군과 공군으로 장악한 제공권 덕에 압도적인 화력에 힘입어 10월에는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90% 이상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소련 62군은 10월 말엔 양단되어 볼가강 서쪽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독일군 전투기들이 병력수송함을 공격해서 피해를 입더라도 계속해서 볼가강을 통해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며 교두보를 사수하였다. 1942년 11월, 독일군은 교두보를 끝장내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를 확정짓기 위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이 순간이 소련군 최악의 위기였지만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 끝에 62군은 결국 교두보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종래의 수많은 접전처럼 엄청난 수의 양군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이 처절한 사투가 계속되는 동안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길고 긴 전투를 끝장내고 남부 러시아에 진출한 독일 2개 집단군을 섬멸하기 위한 반격 작전인 천왕성 작전을 입안했고,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게 되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6. 소련군의 반격

6.1. 천왕성(우라누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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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천왕성 작전의 전개도
1942년 가을의 어느날,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크렘린에서 열린 스타프카 회의에서 축차적인 병력 투입만으로는 독일군을 격퇴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뿐이고 오히려 시간 버는 효과만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탈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럼 무슨 다른 좋은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되물었고, 두 장군들은 며칠 안에 다른 방안을 찾아오겠다고 스탈린에게 대답했다.

며칠 후 소련군 총참모부에서 여러 참모들이 세부 논의 끝에 확정한 작전안은 그동안의 소극적인 수비를 떠나 대규모의 공세를 통해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독일 국방군 B집단군에게 타격을 가하고 남부 러시아 전선의 전세를 뒤집는다는 계획이었다.[44] 바실렙스키는 독일 6군의 좌익과 우익이 독일군에 비해 제대로 훈련되지 못하고 변변찮은 장비와 무기도 부족한데다 사기도 엉망인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주코프와 작전을 의논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겨우 거점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병력을 지원하여 독일 국방군 제6군을 붙잡아두고 양 측면으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돈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의 협격을 통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골자의 '천왕성 작전[45]을 입안했다.[46]

이에 따라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던 볼가강 교두보에는 최소한의 방어만 가능한 수준의 병력 보충을 했고 스탈린그라드 북서쪽과 서남쪽에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든 명령은 구두로 전달되었으며, 무선이나 문서를 사용한 명령은 금지되었다. 기밀 유지를 위해서 작전 개시 직전까지 당시 스탈린그라드의 예료멘코와 추이코프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무조건 사수하라는 명령만 내렸다.

당시 시점에서는 소련군 또한 스탈린그라드에 추가적인 병력 및 물자 보충을 하기 곤란해진 상황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볼가강에 얼음이 얼기 시작한 것이다. 강이 완전히 얼어서 얼음이 단단해지면 간편하게 육상 보급로를 운용할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얼음이 떠다나면서 오히려 선박을 이용한 수송을 방해한다. 즉 당시 볼가강 교두보의 소련군은 얼음이 완전히 얼고 천왕성 작전이 진행될 때까지 부족한 병력과 물자로 버티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당시 보급난이 심해졌을 땐 장병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주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랜드리스로 들여온 미국산 허쉬 초콜릿은 넉넉해서 장병들에게 지급이 가능했고 이 외에도 미국으로부터 지원 온 스팸도 소련군에게 보급되기도 했다. 당시 이 전투의 정치장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당시 소련군들이 스팸에 대해서 온갖 저속한 농담을 만들면서 낄낄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팸은 대단히 맛있었으며 농담과 별개로 다들 잘 먹었다고 회고했는데,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의 농경지를 잃은 상태에서 스팸이 없었다면 굶어죽었을 것이라고 회상하였다.[47]

이후 11월 10일, 소련군은 5개 야전군 규모의 대병력의 집결을 완료했다. 이렇게 집결한 병력은 90만[48]에 가까운 대병력이었다.

6.2. 독일군의 대응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수비는 루마니아군 3군과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의 방어선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49] 루마니아군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꾸준한 정찰을 통해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 대규모의 소련군 부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전력으로 집결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마니아 3군은 즉각적인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50]

그러나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정보 분석을 통해 루마니아 3군이 보고한 북부에 집결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들어가는 철도선을 차단하기 위한 제한된 공세를 위한 병력이라고 판단하였고, 루마니아 3군의 요청을 거절했다. 독일군이 이런 전략적 실수를 범한 것은 소련군의 현란한 기만책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가을 내내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에게 소소한 공세를 꾸준히 가했고, 더하여 소련군 사령부는 겨울부터는 방어에만 집중하라는 장문의 가짜 명령을 연일 무선 통신으로 뿌려댔다. 마지막으로 전략 예비대는 모스크바 주변에 꽁꽁 숨겨서 독일군의 정찰을 회피했다.

그렇지만 결국 각종 정찰과 포로 심문을 통해 독일 육군총사령부 동부정보국 측에서도 이를 알고는 있었다. 문제는 소련군의 전략 예비대 규모[51]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였으나, 앞서 언급한 소련군 사령부의 기만책에 휘말려 이들이 동계 반격 작전에는 투입되지 않고, 방어에 전념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도 측면의 취약성을 지적하며 히틀러의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집착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히틀러는 소련군의 병력 증강에 대한 정보를 허무맹랑한 일로 일축하면서, 10월 중순 총참모장을 할더에서 쿠르트 차이츨러로 교체하였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 있던 독일 국방군 B집단군 북방 200km에 이르는 전선은 매우 취약한 상태로 적에게 노출됐고 1~2킬로미터의 전선을 일개 소대가 맡는 꼴이 되어버렸다. 방어를 담당한 루마니아군은 B집단군 사령부에 계속적으로 병력 증원과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사령부는 48기갑군단을 파견했지만 이 정도 전력으로 소련군의 작정하고 준비한 공세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측면 구역을 독일군이 방어해야 했으나, 소련군을 얕잡아 본 독일 육군총사령부의 오판으로 인해 작전 규모가 지나치게 확대됐고[52] 결론적으로 캅카스와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동시에 유지한다는 것은 당시 독일군의 역량으로는 무리였던 것이다.

6.3. 작전 발동

파일:Battle-Stalingrad.gif
<rowcolor=white> 천왕성 작전의 전개와 포위되는 독일군
파일:스탈린그라드 소련군 진격.jpg
<rowcolor=white> 폐허가 된 시가지를 넘어 진격하는 소련 육군 보병대
1942년 11월 19일, 소련 남서 방면군이 포병의 격렬한 지원 사격을 업고 진군했다. 총 24개 사단, 11개 여단으로 구성된 소련군의 대병력 앞에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던 루마니아 3군은 소련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탓에 재빨리 붕괴되기 시작했다.

겨우 5개 군단으로 구성되었던 루마니아 3군 중 일부만이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고 예상을 웃도는 소련군의 대공세에 놀란 독일군은 48기갑군단에게 루마니아 3군을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동계 장비 부족과 고장, 그리고 동장군으로 인한 트러블[53]로 인해 기동 가능한 전차들은 얼마 되지 않아 구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루마니아 3군은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

다음날 11월 20일에는 돈 방면군이 스탈린그라드 남동쪽에서 진군하여 독일 국방군 제6군의 우익을 담당하던 독일 국방군 제4기갑군과 루마니아 4군을 몰아붙이며 진격을 개시했다. 곧바로 루마니아 4군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독일 4기갑군은 양단되었다. 그리고 11월 22일, 스탈린그라드 서쪽에서 소련군 남서 방면군의 선도 부대와 돈 방면군의 선도 부대가 스탈린그라드 서쪽 카라치에서 조우하여 독일 제6군을 둘러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했다.[54] 소련에서는 이 만남을 기록 영화로 찍어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나중에 만들어진 연출이었다. 작전 당시 현지에는 사용 가능한 카메라가 없었다.

작전 개시 3일 만에 천왕성 작전을 대성공시킨 소련군은 작전 중에도 자신들의 장기인 기만술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표적으로 독소 양측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길목인 칼라차 교량을 공격할 때, 대담하게도 5대의 T-34를 밀집대형으로 배치한 뒤 한밤 중에 모든 전조등을 환하게 밝히고 교량으로 접근시켰다. 공교롭게도 독일군의 노획 T-34 부대가 항상 이 다리를 지나쳤기 때문에 보초는 소련군의 T-34가 다리를 건널 때까지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나중에 T-34가 다리를 전부 건넌 다음에야 독일군 보초는 이 부대가 아군이 아닌 소련군 부대인 줄 알아챘다. 소련군은 가장 힘든 전투가 되리라고 예상했던 다리를 피해 없이 확보를 했다.

소련군은 약 10만 명 정도의 추축군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소수를 제외한 독일 국방군 제6군 대부분과 양단된 독일 국방군 제4기갑군의 상당수 병력, 약간의 루마니아군 등 총 33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 포위망 안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이는 사실상 B집단군 전체 병력이 포위망에 갇혀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4. 항공보급의 처참한 실패, 도달한 공세종말점

"원수 각하,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군대의 보급을 위해 매일 몇 대의 비행기가 나가야 하는지 아십니까?"

"내 개인적으로는 모른다."
육군 참모총장 쿠르트 자이츨러와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대화
소련군이 북부에서 진군하기 시작한 다음날인 11월 20일, 파울루스는 참모들과 함께 후퇴 방어선의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스탈린그라드에 가까운 굼라크 비행장의 제6군 사령부로 돌아가 거기서 방어전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무선으로 하달했다. 파울루스는 이에 따라 스탈린그라드 남부에 있는 병력을 빼내어 고슴도치 진지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 전술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서부에서 포위되었을 때 크게 위력을 발휘한 독일군의 전형적인 방어법이었다.

11월 23일 소련군의 포위로 25만여 명의 독일과 루마니아군 그리고 약간의 크로아티아 의용병 부대가 갇혀버렸다.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완전히 포위되자 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OKH 혹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행동의 자유'를 요청했다. 다시 말해 고슴도치 진지를 지킬 수 없을 시 스탈린그라드를 버리고 소련군 포위망을 돌파하는 허가를 요청했던 것이다.[55] B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는 철군을 주장했으나 이에 호응하거나 동쪽으로 진군할 B집단군의 잔여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둘의 의견을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미 6군이 포위된 상황에서 히틀러는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공중 보급으로 방어에 성공한 기억을 떠올리며 공군참모총장 한스 예쇼네크에게 성공적인 공중 보급 가능성에 대해 질문했다. 예쇼네크는 매우 단기간이라면 하루에 300톤 정도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데미얀스크 포켓과 비교해서 스탈린그라드는 비행장과의 거리도 더 가까웠고 포위시기도 비슷했다. 그랬기에 실제로 300톤이 배달되었다면 상황이 실제처럼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데미얀스크에서 공군은 300톤이 넘는 물자를 수송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데미얀스크에 포위된 것 보다 적은 1개 군단을 보급하는데 충분한 규모였다. 반면 스탈린그라드에서 300톤은 6군이 버티기 위한 최소한이었고 루프트바페가 이를 달성해내는데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괴링에게 루프트바페가 해내지 못하면 6군은 끝장이라고 소리쳤다.

물론 직접 보급 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4항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56]도 현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전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무시당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미 6군은 포위된 상황이고 공중보급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뭐라도 보급하지 않는다면 그 외의 대안은 그들이 한겨울에 소련군 포위망 속에서 죽어가게 내비러 두는 것 뿐이었다.

후일 겨울폭풍 작전을 이끌게 될 만슈타인은 여전히 레닌그라드에서 열차를 타고 오는 길이었고 당장 포위를 뚫을 외부 병력은 전무했다. 6군이 초기에 자력으로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는 주장은 망상으로, 6군은 이미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으로 만신창이나 다름없었고 중화기를 끌고 갈 말조차도 거의 다 도살된 상태였으며 대다수의 병력이 북, 서, 동쪽에서 적군과 맞서고 있어 남측방에 배치할 병력을 구하는 것 자체가 난망한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우라누스 작전 일주일만에 돈 만곡부에서 독일 제 6군이 3개월간 간신히 전진한 영토를 순식간에 탈환하였다. 반면 독일 제6군은 시가전 뿐만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강한 소련군과도 지속적으로 교전하고 있었다. 이런 독일군이 우라누스 작전 개시와 동시에 기동 전력을 포위망 돌파에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판국에 돌파 시도는 엄밀히 말하자면 무질서한 패주에 불과했다. 모든 중화기와 전차를 버려둔 채 병력의 일부만을 데리고 간신히 빠져나오는 식의 탈주를 이 시점에 명령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데미얀스크의 사례에 비추어 최소한이나마 보급을 받으며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리는 편이 당시 독일군 사령부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파일:attachment/2ep3t6t.jpg
<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에 나타난 Ju 290 Fw 200[57]
6군이 매일 필요로 하는 물자는 300~750톤에 달하는 데 반해 수송기, 활주로 등 모든 조건이 열악했던 독일 공군이 수송할 수 있는 물자는 최대 300톤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최상의 조건이 갖춰 졌을 때나 300톤의 수송이 가능했다.수송 작전에 동원된 Ju 52의 적재량은 1.5t~2t이었으므로 제6군을 유지하려면 일일 150번의 소티를 요했다. 통상적인 30~35%의 준비율을 감안하면 6군이 요하는 최대보급량인 750t를 수송하려면 1000대가 넘는 Ju 52가 필요했다.

그러나 공군이 보유한 Ju 52는 750대에 불과했고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튀니지[58]와 데미얀스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도합 500대의 수송기를 스탈린그라드에 동원할 수 있었고 이는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활약한 숫자와 엇비슷했다.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서 비행장과의 거리는 200~230km 정도였던 반면 데미얀스크 포켓에서는 250~260km였던 것을 감안하면 공군은 6군이 필요로 하는 최소치의 보급(300톤+@)을 실어 날랐어야 했다.

그런데도 독일 공군은 항공보급 기간 내내 보급량을 단 하루도 300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는, 100톤을 넘게 보급한 날의 비율이 간신히 40%를 넘는 수준이었다. 150~200톤을 보급한 날은 7일, 200톤을 넘긴 날은 4일에 불과했으며 목표치였던 300톤을 보급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데미얀스크에서 82일 동안 14,455소티, 24,303톤을 보급한 공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71일 동안 고작 4,406소티, 6,536톤을 나르는 데 그쳤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소련이 데미얀스크 때와 다르게 가만히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련 공군은 고사포를 밀집시켜 방공 구역을 치밀하게 구축했고, 지상에서 관제하는 요격기 부대를 운용했다. 더하여 야간 전투기 부대를 투입하고, 시간에 관계없이 투입할 수 있는 별동대까지 편성했다. 결국 포위 내내 독일 공군은 소련 대공포 부대와 소련 공군에게 사정없이 피해를 입었다.[59] 스탈린그라드는 독일 육군뿐만 아니라 독일 공군에게도 대참사였다.

Bf 109 전투기들은 느린 Ju 52 수송기들과 전혀 발을 맞추지 못했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기 위해 역풍에 맞거나 기동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에너지 손실과 연료 소모로 인해 소련 공군 요격기들 습격에는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독일 수송기들 입장에서는 답답한 상황이었다.[60] 그 결과 독일 공군은 데미얀스크에 비해 3~4배에 달하는 항공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었다.

물론 독일 공군도 바보는 아니라서 필사적으로 보급 작전을 성공시키려고 기를 썼다. Ju 52의 느린 속도와 부족한 수송량을 메꾸기 위해 Ju 86이나 He 111는 물론이고, 숫자도 많이 없던 Ju 290, Fw 200, 심지어는 He 177까지 싸그리 보급 임무에 동원되었다. 종국에는 He 111Z[61] Me 323 기간트[62] 역시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비행장의 수용능력 문제로 전부 무산되었다.

특히 12월 23일 소련군 제24전차군단이 방어 수단이라고는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인 타친스카야의 독일 공군 비행장을 공격함으로써 결정타를 날렸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맹렬한 포격까지 더해지면서 독일 공군은 무려 72기의 Ju 52를 지상파괴로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이로써 공중보급 역할을 해야할 공군 비행장이 모두 소련군에게 피해를 입음으로써 가뜩이나 부족한 보급이 더욱 줄어들었다.[63] 이 때문에 비행장 방어를 위해서 제6장갑사단이 구출 부대에서 빠지고 말았고 이 영향으로 이후 구출 부대의 작전 또한 실패한다.

한편 전체적인 작전 진행의 어려움에 비하면 사소하지만 행정/기술적 착오 또한 6군의 병사들을 추위와 배고픔으로 이끌었다. 헤르만 괴링이 다스리던 공군은 특권을 이용하여 육군의 보급장교가 수송 물자를 체크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로 인해 대규모 물자들을 급히 싣고 나르다보니 6군에게 꼭 필요한 식량, 연료, 방한 물자들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기껏 보급된 상자를 열어보면 신품 철모 치약이 나오는 경우, 심지어는 그 상황에서 전혀 필요 없는 훈장이나[64] 콘돔까지 튀어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물자를 떨궜더니 병사들이 받지도 못하고 상자가 그대로 부셔져 버리거나 소련군의 손에 떨어지는 경우까지 있었다. 설상가상 이렇게 보급되는 물자의 상당수는 식량이 아니라 포위 당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쓸모도 없던 연료였다.

11월 23일 시작된 첫 항공 수송으로 첫 주동안 350톤의 물자를 날랐는데[65] 그중 식량은 14톤이었고 둘째 주에는 512톤을 날랐지만 식량은 24톤이었다.[66] 포위된 인원이 29만 명에 가까웠다는 것[67]을 생각하면 항공 수송으로 받은 식량은 1인당 1주일에 100g밖에 안 되는 극소량이어서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했다.[68] 그러나 제6군에서 실제로 식량 대신 연료와 탄약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식량 보급의 부족을 무조건 탓할 수는 없다. 포위 초반기 6군에게 필요한 것은 포위를 뚫기 위한 연료와 탄약이었지 식량은 후순위였으며 만슈타인의 겨울폭풍 작전이 무위로 돌아간 뒤에야 식량이 수송 항목의 메인으로 바뀐다.

파울루스는 포위망에 걸리고 한 달 뒤인 병사들에 대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대가 보유한 수송용 말의 도살을 허가했다.[69] 그나마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기갑 부대들은 고기는 커녕 주변의 다른 부대에서 말뼈다귀나 얻어 와서 스프나 끓여 먹는 신세였다. 게다가 이것도 며칠 못 갔고 이후 독일군은 계속 쫄쫄 굶게 되었다. 한번은 비행장 사수 등의 공을 세워 파울루스에게 철십자 훈장과 함께 특식을 받은 부대가 있었는데, 그 특식이란 게 고작 빵 한 덩이와 토마토 소스 청어 통조림 몇 통 뿐일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결국 굶주리다 못해 시체를 파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보급상황이 열악해지면서 보로포노보와 굼라크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3,500명의 소련군 포로들도 끔찍한 비극을 맞았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식량도 제공되지 않았고 크리스마스전에는 하루 평균 20명이던 사망률이 폭증하여 결국 1월 말 소련군 병사들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생존자는 단 20명 뿐이었다.[70] 이들 포로들의 생존률은 고작 0.57%에 불과했다.

7. 후반 전개

7.1. 겨울폭풍 작전

독일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몽상 같았던 보급 작전은 당연히 실패했고 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보급이 필요하다며 여러 차례 보급을 요청했지만 독일군 상층부라 한들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B집단군과 협의하여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탈출할 수 있는 작전의 재량권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게다가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6군이 겨울 동안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할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이대로 스탈린그라드의 6군과 남서 방면군의 맹공에 밀려나고 있던 B집단군의 잔여 병력마저 섬멸한다면 이미 캅카스에 일부 진출한 A집단군도 고립될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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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인 3월 만슈타인의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71]
이에 히틀러는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돈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6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허나 이 돈 집단군이라는 것이 새로 투입된 몇몇 부대와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4기갑군의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사실상 패잔병 집단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편제는 거대했지만 실제 사용 가능한 병력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소련군의 포위망을 분쇄한다는 임무는 돈 집단군이 감당하기엔 불가능한 임무였다. 새로 편성한 호트 기갑집단과 홀리트 파견군, 루마니아 4군이 놀라운 투혼을 발휘한 끝에 호트 기갑집단의 선도 부대인 6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 50km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였다. 만슈타인은 파울루스에게 남서쪽으로 탈출하여 돈 집단군과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과거 역사가들은 이를 파울루스의 히틀러 맹신 때문으로 분석하고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이 시점 독일 제 6군은 공세 역량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었다. 많은 문서들이 겨울폭풍 작전이 포위 직후 빠르게 이루어진것처럼 서술하지만, 실제로는 포위망 돌파 시도가 3주 뒤에나 실행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포위망 완성 전에도 식량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던 6군이 이 시점에 더 강해져 있을 리는 없다. 만약 6군이 3주가 지난 시점에도 자력 돌파가 가능할정도로 전투력이 높았다면, 포위망 완성 초기에 치르강 방면으로 돌파를 해 버렸을 것이다. 이미 치르강 방면, 50km보다 가까운 거리에 홀리트 분견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겨울폭풍 작전은 6군에게 최단거리 돌파를 한 작전이 아니라, 소련군의 남쪽 허점을 찔러 빠르게 포위망을 돌파해보려는 작전이었다. 기습의 효과가 생각보다 부진하니, 포위망 돌파 부대가 되려 기존 전선 간격보다 먼 거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결국 만슈타인은 6군 입장에서 어떠한 상황 개선도 없음에도 6군에게 돌파해서 나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파울루스는 포위망 돌파를 위해 29차량화보병사단만은 최고 전투력을 유지시키며 아껴두었지만, 파울루스는 이 부대로도 최대 20km정도밖에 진격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구출 작전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만슈타인은 6군의 고난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 히틀러에게 6군의 항복을 허가해 줄 것을 탄원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한편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스타프카는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을 굳힐 작전인 '토성 작전' 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돈 집단군이 겨울폭풍 작전으로 밀고 들어오자 돈 집단군에 대한 반격 계획인 '소(小) 토성 작전'으로 작전을 변경해 돈 집단군을 밀어붙였다.

결국 소련군 51군을 상대로 분전하던 루마니아 4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소련군 2친위군과 5전차군의 공격에 돈 집단군마저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 예하 부대에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이제 6군이 탈출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겨울폭풍 작전은 6군을 구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나마 다행히 캅카스에 진출한 A집단군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 줬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 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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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하자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교들을 비행기로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독일군 수중의 마지막 비행장인 굼락(Gumrak)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광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장교들은 비행기에 올라타려고 뇌물을 주고 매수하려고 들기도 했다. 장교들만 빼온 것은 아니고, 부상병들, 열등한 슬라브인들에게 강간당하는 수모를 막는다며 히틀러가 직접 철수시킬 것을 명한 간호사 등 여성 보조원들, 도하 작전 지원을 위해 왔다 할 일이 없어진 크릭스마리네 하천함대 소속 해군 장병 등 일부도 운좋게 철수 행렬에 합류해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굼락 비행장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에 대해서 독일 내에서는 스탈린그라드같은 좌파 영화가 매도한 것이라는 반발도 있었으나 ZDF에서 제작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다큐멘터리 및 다수의 참전자 수기를 보면 굼락 비행장은 살기 위한 온갖 수가 동원되는 아비규환이었단 증언들이 많이 나온다. # 현재도 굼락 비행장과 피톰닉 비행장에서는 많은 독일군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고 있다. #

아예 사단 예하 부대는 남겨두고 사단장과 참모장교, 기타 중요 인물 몇몇만 탈출시킨 경우도 있었다. 기병사단에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복에 기갑 병과를 뜻하는 분홍색이 아닌 기병 병과의 금색 부착물을 단 것으로 유명한 24기갑사단이 대표적이다. 부대 자체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했으나, 참모진 등을 수송기편으로 빼와 후방에서 그들 및 구 24기갑사단 출신 타 부대 전출자나 회복된 부상병 등을 모아 재창설했다. 물론 대다수는 신병들이었다. 하지만 사단장인 아르노 폰 렌스키 소장은 다른 부하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종전 후 동독에 정착해서 동독군 창설 후 육군 소장으로 임관했고 퇴역 후 동독 의회 의원까지 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의 공중 봉쇄로 이렇게 어렵게 탄 비행기편마저 사실 안전하지 못했다. 전술된 바와 같은 소련군의 악착같은 공중공세와 대공포화로 인해,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역에서 수송기 488대, 승무원은 1천 명 이상을 상실했다. 천신만고 끝에 수송기에 탑승하고서 하늘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비행장이 수중에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독일군 6군의 수중에 있던 마지막 비행장인 굼라크 비행장에서는 1943년 1월 23일, 수송기들이 이륙을 준비하던 중 활주로에 소련군들이 난입하는 바람에 공포에 질린 탑승객들이 마구잡이로 비행기에 매달리다 떨어지고, 심지어 이륙하던 수송기가 소련군의 전차포에 맞아 격추되는 아비규환과 대혼란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날 굼라크 비행장은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그와 동시에 독일군 장병은 4성장군 파울루스부터 말단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라도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할 길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7.2. 독일군의 항복

파일:독일 제6군 항복 포로 병사들.jpg
<rowcolor=white> 항복 이후 포로로 끌려가는 독일 제6군 장병들
"1943년 2월 3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움이 끝났음을 알렸습니다. 파울루스 원수의 뛰어난 통솔 아래에 있던 충성스러운 제6군은 적의 우세와 나쁜 형세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 운명은 루프트바페의 대공사단, 두 개의 루마니아 사단, 그리고 크로아티아 연대 하나가 함께했습니다. 그들 또한 충성스러운 전우로서 육군과 할 수 있는 데까지 의무를 다했습니다. 마지막 싸움은 스바스티카 깃발 아래서 벌어졌는데, 스탈린그라드의 폐허 속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멀리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장군, 장교, 부사관과 병들 모두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함께 싸웠습니다. 제6군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죽어서, 그래서 독일은 살아간다!"
1943년 2월 3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알리는 독일 라디오 방송

제6군은 굶주림과 추위에 전투 의지를 빠르게 상실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들었고 실탄마저 떨어지기 시작했고, 겨울폭풍 작전마저 보급과 전력 차이로 실패하면서, 1943년 1월부터 소련군은 제6군에게 항복을 권고했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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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동계 위장복을 입고 철통 같은 포위망을 구성한 소련군 병사들[73]
소련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장과 레오니트 고보로프 대장의 공동 명의로 독일군에 공식적으로 항복 권유 문서를 전달하고, 수만 장 인쇄하여 전선에도 뿌렸다. 이 항복 권유서는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과 환자에 대한 의료 지원, 정규 식량 지급 등 소련군 입장에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했다.[74]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1월 12일 소련군은 고립된 독일군에 대해 대공세를 개시했다. 제6군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질병과 추위,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부상병들은 방치되었다. 1월 16일에는 제295보병사단의 1개 대대가 소련군에게 투항하는 등 개별적인 항복이 점차 늘어갔다. 1월 18일 파울루스는 연료와 탄약이 바닥났기 때문에 6군이 앞으로 며칠밖에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전문을 보냈으나 1월 22일 히틀러의 전문을 받았다.
항복은 있을 수 없다.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싸운다. 가능할 경우, 여전히 전투를 할 수 있는 병사들로 축소된 요새를 사수하라. 서방문명을 구하고 요새를 지킨 장병들의 용기와 끈기는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따라서 제6군은 독일의 역사에서 실로 커다란 족적을 남길 만한 역사적 공헌을 했다.

1월 27일에 이르러 상황은 심각하게 변해갔다. 휘하 장군들과 고급장교들이 개별적 항복을 요청하기 시작했고 파울루스는 이를 만류했지만 이미 부대 단위의 항복 릴레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참모장 슈미트는 항복을 협상하는 장교들을 군법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1월 30일에 이르러 그는 파울루스의 암묵적 허락 하에 소련군과의 협상을 허락했다. 1월 30일, 제6군은 히틀러 집권 10주년을 칭송하는 문서를 본국으로 보냈고 히틀러는 대단히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나의 파울루스 상급대장!
이미 오늘 모든 독일인들이 이 도시를 깊은 감정 속에서 우러러 보고 있소. 세계 역사상 늘 그러했듯이 이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오.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산이 마침내 완성되었소. 독일 민족은 이제 이 전투의 고난을 이해하고 가장 위대한 희생을 하게 될 것이오. 그대와 그대의 병사들에게 감사를!
그대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1월 30일[75]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켰다. 역대 독일 육군 원수 중 적에게 포로가 된 원수는 없었기에 파울루스를 육군 원수로 진급시킨 것은 자결하여 명예를 지키라는 암묵적인 명령인 셈이었다. 또한 같은 날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는 독일 제6군의 처절한 상황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스파르타 군대의 상황과 비유하는 라디오 연설을 방송했다.[76] 하지만 매 순간이 지옥과도 같던 제6군 장병들에게 그런 연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보고 죽으라는 거냐며 냉랭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한편 파울루스가 항복하려는 장병들을 설득하기 위해 일선 부대를 찾아갔을때 장교들은 성난 목소리로 "히틀러는 범죄자입니다!", "우리가 속은 것처럼 독일 국민들은 계속 속을 것이고 라디오와 뉴스는 우리가 여기서 겪은 재앙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괴벨스가 우리의 패배를 영광화할 것입니다!"라고 절규하는 사태에 치달았다.

1월 30일, 로스케 장군이 백화점 지척까지 소련군이 접근했으며 더 이상 휘하 병력이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파울루스는 로스케에게 그간의 분투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문서와 남은 훈장 등을 파기했다. 다음날인 1월 31일, 오전 7시부터 소련군이 백화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사령부는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백화점으로부터 맹렬한 총격이 날아오자 소련군은 독일군의 항복을 종용하기 위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독일 측에서 먼저 소련군 정치장교인 일첸코 중위에게 항복협상을 요청하면서 로코솝스키를 대신하여 협상할 수 있는 장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정치장교인 비노쿠르 대령과 예고로프 소령이 차를 타고 백화점에 도착, 독일군의 항복을 접수하였다. 독일군은 비노쿠르 대령이 정말로 로코솝스키 직속 정치장교인지 의심을 표했으나 비노쿠르가 강하게 나오자 곧 납득하였다. 비노쿠르 대령은 백화점에 들어서서 거대한 라디오와 발전기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독일군은 그에게 파울루스가 있는 깊은 지하실로 안내했고, 4명의 기관단총 사수와 일첸코 중위가 비노쿠르를 따라서 파울루스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작은 방에서 로스케 장군과 슈미트 장군이 비노쿠르 대령을 독일식으로 일어나서 맞이했고, 이들은 비노쿠르 대령이 입고 있던 양가죽 코트를 벗을 것을 제안했지만 비노쿠르 대령은 지하실이 그리 따뜻한 것 같지 않다고 이를 거절했다. 로스케 장군은 비노쿠르에게 사실 그들이 파울루스의 의사에 따라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바깥에서 이러한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라디오를 통해서 파울루스에게 원수 승진 메시지가 도착했다. 파울루스는 슈미트로부터 그 보고를 받고 씹어뱉었다.
이건 나보고 자살하라는 명령이군. 하지만 난 그 기쁨을 줄 생각이 없네.

그리고 슈미트 참모장이 덧붙였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러시아인들이 바깥에 있다고 보고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슈미트가 문을 열자 비노쿠르 대령이 통역사를 대동하고 들이닥쳐서 파울루스가 64군의 포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파울루스 이하 참모진들은 총기를 버렸고 소련군은 이들에게 떠날 준비를 하라고 통고했다. 비노쿠르 대령은 파울루스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파울루스의 방은 어두웠다. 오물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파울루스는 내가 들어서자 일어섰다. 그는 수주간 면도를 하지 않은 상태였고, 패배감에 차 보였다. "원수님이 몇살이신 것 같습니까?" 로스케가 묻자 내가 대답했다. "58세 정도로 보이는군요." "아닙니다. 53세이십니다." 나는 사과했다. 파울루스의 방은 더러웠다. 그는 내가 들어갔을때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서자 바로 일어섰는데 누워있을 때 코트와 모자를 그대로 입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는 그의 권총을 로스케에게 넘겨주었는데 이게 바로 내가 나중에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동지가 왔을때 넘겨준 그 총이었다.

협상은 로스케가 주도했고, 슈미트는 로스케와 파울루스 사이를 오가면서 협상 진행 상황을 알렸다. 파울루스는 자신은 항복한 것이 아니며, 우연히 소련군에 잡힌 것이라 주장했고, 남아있는 중부와 북부 방어선의 책임자가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병사들에게 항복 명령을 내리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협상이 끝난 후 비노쿠르는 슈미트와 로스케에게 모두 무기를 넘기라고 요구했고 로스케가 세 장군의 권총을 모두 비노쿠르에게 넘겨주었다. 여기서 웃긴 일도 벌어졌는데 협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총격전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파울루스는 소련군에게 공격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예하 부대들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를 전달하기 위해 정치장교 부하로프에게 독일 측이 차량을 제공하고 이동했으나, 소련군은 독일군이 자기네 정치장교를 포로로 잡은 줄 알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차를 집중공격하여 당황한 부하로프가 병사들을 멈추게 해야 했다.

이후 중부 방어선의 책임자였던 발터 하이츠 상급대장은 같은 날 오후에 항복했고, 북부 방어선 책임자였던 카를 슈트레커 대장은 이틀 뒤인 2월 2일에 항복했다. 그의 참모와 함께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는 통신을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휘하의 모든 방어선 책임자들이 항복하자 파울루스는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즉, 파울루스가 바로 항복한 것은 아니며, 파울루스 문서에도 나와 있는 유명한 '보헤미아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라는 말과 함께 항복한 장면은 2월 2일 이후 모든 독일군이 항복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한편 파울루스의 사령부에서는 여자들을 포함한 소련인 포로들도 여럿 나왔는데 이들은 즉시 NKVD가 반역자로 체포했다. 파울루스를 인수한 제38 차량화 소총여단장 이반 부르마코프 장군은 파울루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보였다. 그는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행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말랐고, 수염도 깎지 못했으며, 한심한 차람이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방은 더러웠다. 로스케의 방도 비슷한 꼴이었다. (...) 파울루스의 방을 포함해서 지하실은 오물 천지였다. 마당은 악몽 수준이었다. 우리는 그걸 다 치워야 했다. 나는 로스케가 그런 고위 사령부를 똥오줌 천지로 만든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왜 그렇게 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뭐라고 떠들었는데 우리 통역가가 다음과 같이 통역했다. "당신네 카츄사들과 야포들이 우리가 주중에 나갈 수 없게 만들었소. 우리는 '생리기능'을 지하실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소. 그걸 치우는 것은 밤에만 가능했는데, 밤에도 다들 나가는걸 두려워했소."
파일: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항복 후 포로.jpg
<rowcolor=white> 항복 후 포로가 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77]
이렇게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 남아있던 독일 제6군은 대부분 항복한다. 30만에 이르던 대병력은 이제 기력을 잃고 죽어가는 9만 1,000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포로 수용소로 후송되는 동안 1만 7천 명이 죽었고, 많은 수가 영양 실조로 인한 장기 손상 등으로 사망하였다. 1943년에는 장티푸스가 돌면서 많이 죽었다. 최종적으로는 파울루스를 포함하여 5%인 6천 명만이 10년 뒤 독일로 귀환할 수 있었다.[78]

천왕성 작전으로 제6군은 남과 북으로 완전히 부대가 단절되어 있었고 본부가 있던 남쪽은 먼저 항복하였으나, 북쪽에서는 전투를 이어 갔고 남쪽에서도 항전이 일부 계속되었다. 이들은 제6군 사령부가 항복한 뒤에도 무장 해제하지 않았으며, 파울루스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지속적으로 방송한 끝에 항복하였다. 하지만 최소 7,000명에서 11,000명 정도의 군사들은 끝까지 저항한 끝에 진압되었다.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이던 그들은 남부 집단군의 후퇴와 재정비를 도왔다.

그리고 독일 본토에서 이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제6군의 성스러운 저항이 단 하나의 겁쟁이 때문에 치욕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면서, 이후로 그 누구도 원수로 승진하지 못한다고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캅카스로 진격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로 포위망에 갇힐 뻔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A집단군 사령관은 포위망을 탈출한 공적으로 원수로 승진했다. 후퇴 작전의 성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다는 점에서 독일군에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최소한 일본군처럼 아예 참패를 감추지는 않았다. 독일에서는 3일 동안 극장과 식당 등의 문을 닫게 하고, 괴벨스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총력전 연설(스폴트팔라스트 연설)로서 도리어 국민들의 임전 의식을 고취시키고 독일을 차츰 전시경제 체제로 바꾸어 나가기에 이른다.

한편 수십만의 독일군 전사자 대부분은 전장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그렇듯이 한 곳에 모아 놓은 다음 화장한 뒤 잔해를 그대로 매장했다. 소련군이 적군과 아군 유해를 모두 챙겨줄 여력도 안 됐을 뿐더러, 당시에는 땅이 얼어 붙어서 시신을 일일이 매장도 하기 힘들었고 치명적인 티푸스[79]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처리해야 했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눈이 녹기 시작하면 식수마저 오염시켜 수인성 전염병까지 돌기 때문이다.[80] 그 광경을 목격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한번 가 봤지만 다시는 가 보고 싶지 않았다" 고 그 처참한 광경을 자신의 회고록에 남겼다.

7.3. 결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의 전황
파일:스탈린그라드 전투 병사 국기.jpg
<rowcolor=white> 스탈린그라드 중앙 광장에서 소련 국기를 흔드는 소련군
이 전투로 독일은 동부전선 전체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은 제6군이 삭제되며 1942년 이래 주전선이 된 남부집단군의 차후 공세 진행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포위-섬멸당한 최초의 전투로 일방적인 독일의 공세로 진행되던 독소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점에서 소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독일군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항복한 독일 6군은 독일군 정예 병력으로 동부전선에서 큰 활약을 하였던 부대였기 때문에 이후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그 공백의 크기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이로 인해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공세 역량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부전선에서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에 붙잡혀 있었고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극심한 손실을 입고 발터 모델의 지휘하 르제프 전역에서 방어전에 일관하고 있었다. 북부와 중부집단군이 공세능력을 상실한 동안 독일의 공세는 남부집단군이 주축이 되었고 그 선봉에는 6군이 있었다. 독일 제6군은 그냥 단일 군사령부가 아니었다. 블라우 작전이 진행되면서 육군사령부 예비 군단을 증원받고, 4기갑군의 기동전력까지 건네받은 거대 야전군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섬멸되며 독일은 전 전선에 걸쳐 공세 능력을 잃어버렸고 이후 물 오른 소련군의 역습을 돌려 막기 급급해졌다. 6군만의 피해가 아니었다. 우라누스 작전 직후 독일 4기갑군은 껍데기만 남아버렸고, 이탈리아 및 루마니아 군에서 십수만의 피해가 발생했다. B집단군 예하의 4개 군급 부대가 붕괴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기갑 장비의 손실도 막대해 최소 1,000대 이상의 전차를 손실해버렸고 또한 수송기 전력도 480대 이상이 파괴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어버렸다. 이는 독일의 생산능력으로는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한 피해였다.

우라누스 작전이 시작된 시점에 독일군의 운명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포위 전에도 제6군은 병사들이 '음식이 부족하다'는 수기를 남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6군은 말에게 먹일 먹이가 없어 겨울이 오자 제6군의 기동력을 책임지고 있던 말들을 후방으로 보내야만 했다. 여기에 포위망이 완성되니 더욱 상황은 심각해졌다. 겨울폭풍 작전 당시 1달 정도 포위되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하자 독일 6군은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식량 및 연료가 부족해 제대로 전투 행동을 취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6군이 공세역량이 있다고 판단한 사단은 29차량화보병사단 하나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탈출은 결국 제6군 전체의 전투서열이 붕괴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6군이 소련의 군대를 스탈린그라드에 묶어두고 있을 동안 캅카스에 진출했던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간발의 차이로 포위망을 탈출해 버렸다. 만약 6군이 일찍 항복했다든지 아니면 일찍 탈출해 버렸으면 A집단군은 소련군의 포위망에 걸려 6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더 칭송해야 될 판국이었다.

한편 B집단군이 거의 전멸해 버린 독일군은 남부 러시아 전선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가 발터 모델과 만슈타인의 신들린 기동방어 전술로 르제프 전역에서의 소련군의 공세(화성작전)와 뒤이은 하르코프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생명 연장의 꿈을 꾸게 되지만, 1943년 히틀러가 공세능력을 상실했지만 방어능력은 건재했던 남부집단군을 쿠르스크 전투에서 날려먹으며 굳건한듯 했던 독일의 동부전선이 붕괴되어 독소전쟁에서 패배한다.

또한 소련군 저격 전설의 시작도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소련군 전설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 해군 하사와 독일 육군 저격학교 교장 에르빈 쾨니히 육군 산악 소령의 초인적인 저격수 대결을 묘사했다. 러시아에선 바실리의 회고록에서 나온 내용이니 진짜라고 하지만 서방 측은 물론 심지어 독일에서도 바실리가 거물급 저격수들을 해치운 것은 사실이나 에르빈 쾨니히나 하인츠란 이름의 저격학교 교장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 에르빈 쾨니히나 하인츠 토르발트 SS 대령이라는 이름은 전투가 끝난 후 독일 저격수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름들이고, 당시 격전에서 독일군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이체프가 사살한 독일 측의 특급저격수가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합군 반격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전환되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서구 전사학자들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작으로 나치 독일의 패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를 시점으로 나치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소련의 자체적 역량에 밀리기 시작한데다 소련 측이 무기대여법 효과까지 받는 것으로 전력에서 뒤쳐지게 되면서 점점 동부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서부전선에서도 결국 아르덴 대공세의 실패로 인해 소련군에게 베를린까지 점령당하는 결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독일군은 기동전과 포위섬멸을 반복하면서 소련군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교전비 1:20 수준의 참담한(나치에겐 찬란한) 결과의 원인이 바로 이것. 통상적인 전투는 양군이 서로 피터지게 싸우다가 진 쪽은 물러나며 병력의 20-50% 손실을 입고, 이긴 쪽도 그와 비슷하거나 더 적은 피해를 입는 병력 교환, 즉 소모전의 형태를 보인다. 1차대전기의 참호전이 그 전형적인 예시. 그러나 독일은 빠른 기동을 통해 소련군을 포위하고, 소련군은 스탈린의 후퇴 금지령 탓에 망기적거리다 포위망에 갇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부대 자체가 삭제되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불과 몇 달만에 모스크바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기습의 효과도 있었지만 기동전과 포위섬멸을 채택한 전과였다.

하지만 모스크바 전투부터 독일군은 포위기동 대신 단단하게 준비된 방어선에 들이박는 소모전을 강요당했고, 여기서도 독일군이 더 잘 싸웠지만 어쨌든 양측이 멱살잡고 싸우며 독일 측의 손실도 이전에 비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모전의 절정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독소전 초기 소련군 수백만을 잡을때 입은 피해보다 스탈린그라드의 빌딩 하나 점령하는 데 입은 피해가 크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처절한 격전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 하나에 군 전체가 묶여버리며 자신들의 장기인 기동전을 활용하지도 못했다. 역으로 소련군이 6군의 포위섬멸을 시도해 궁지에 몰아넣고 결국 승리하며, 미숙하게나마 기동전과 제병합동 부문에서 조금씩 독일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청색 작전 이후로 더이상 이전과 같은 돌파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성장해가는 소련군과 밀고밀리는 전선 싸움을 반복하게 된다.

소련은 전선군이 통째로 삭제되는 참사에서도 꾸역꾸역 새로운 부대를 편성했지만, 독일은 여기서 한번 삭제된 피해를 종전 때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8. 기타


전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소련에서는 거대한 동상 어머니 조국상을 세웠는데, 자유의 여신상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전쟁 기간 중 노획한 독일군 철모를 녹여 만든 고철들도 재료로 투입되었다. 전체 높이는 자유의 여신상보다 낮지만 인물상의 크기는 이쪽이 더 크다. 지금은 볼고그라드(구 스탈린그라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또 전투 패배 후 포로로 수감된 독일군 군의관 목사 쿠르트 로이버(Kurt Reuber, 1906-1944)가 전투 중 그린 스탈린그라드의 성모도 독일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상기시키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 당국의 프로파간다는 더욱 험악해지게 된다. 종전의 소련 프로파간다는 나치, 파시스트를 비롯한 이념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만 스탈린그라드를 시작으로 아예 특정 민족과 국가를 겨냥하여 독일놈을 죽여라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들이 등장한다. 이건 독일이 먼저 자초한 일이니 소련이 잘못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애초에 독일인들이 먼저 슬라브인들이 열등한 인종이기 때문에 박멸해야 한다고 선전했고, 실제로 그렇게 죽였으니... 이러한 기조는 1943년 소련의 유대계 언론인이자 시인인 일랴 에렌부르크(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Эренбург, 1891-1967)[81]가 '독일인은 인간이 아니다!' 나 '죽여라! 독일인 시체만큼 통쾌한 건 없다!' 등의 노골적인 반독일 선전 문구가 든 시를 발표하며 정점을 찍었다.[82] 하지만 전쟁 종결 직전인 1945년 4월 소련 공산당 당기관지 프라우다에서 에렌부르크의 반독 경향을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식의 증오에 기반한 선전은 수그러들었다. 소련 공산당과 정부에서는 2차 대전 승리 후 독일 점령 지구의 민심을 다독이며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큰 그림을 미리 그려놓았기 때문에, 승리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저런 식의 선전은 해롭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1943년 새해를 맞은 6군 사령부의 높으신 분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어느 간 큰 병사들이 사령부 벽에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 "히틀러는 지옥에나 가라"라는 낙서를 그렸기 때문이라고.[83][84]

2023년 2월 2일 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 80주년을 맞게 되었으며, 볼고그라드 과거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80주년 퍼레이드를 개최했다.

8.1. 폰 파울루스? 파울루스?

독일군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귀족 출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제법 많은 2차 대전 관련 서적에서(대표적으로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 그를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그는 귀족이 아니다. von 칭호 자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시민 명사들에게도 간혹 주어지곤 했지만 파울루스 가문은 그런 호칭을 받은 적도 없다. 그저 평범한 시민 계급, 정확하게는 교사의 아들이었다. 오히려 시민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히틀러 및 나치당 치하에서 더욱 진급이 유리했다.

영미권에서 나온 많은 책들이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하고 있고 이걸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데 이는 원저인 영미권 서적들의 오류로 추측된다. 실제로 독일에서 나온 관련 서적에는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되는 경우가 전혀 없다.

8.2. 만약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가능성히 상당히 있는 일이었다. 블라우 작전의 초기 성공 이후, 독일군은 작전 계획을 매우 크게 바꾸기 시작한다. 원래대로라면 크림반도 장악에 성공한 11군은 캅카스로 진격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군사령부를 해체하고 예하 부대를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에 나누어주게 된다. 이로 인해 남부집단군은 본래 캅카스로 보내려 했던 독일 보병사단을 루마니아 부대로 대체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 독일군은 남부집단군 예하의 2개의 기갑사단과 2개의 차량화보병사단을 중부집단군과 프랑스, 발칸 등으로 보내 블라우 작전의 기동부대 숫자를 줄여버리는 실책까지 범하게 된다. 이렇게 블라우 작전 총 병력이 줄고, 집단군을 두개로 쪼개 돈 만곡부 독일군 부대들의 전투력을 하락시키기까지 했음에도 독일군은 독일군인지라 6군은 스탈린그라드 2차 공세에서 추이코프를 멘붕 직전까지 몰아넣기까지 했다. 추이코프가 사령부를 볼가 강 반대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으니, 의외로 백척간두의 승부였다는 의미이다.

만약 시가지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리하고, 나아가 아스트라칸(실제로는 1개 차량화사단이 넓은 지역을 드문드문 감시할 계획)까지 점령하게 될 경우 독일군의 6개 기갑 및 기계화보병사단이 시가지에서 철수 가능해지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독일군은 일부 기동부대를 돈 만곡부 기동방어에 할당하고, 4기갑군 휘하의 병력들을 원래 계획했던대로 캅카스로 보낼 수 있게 되긴 할 것이다. 이들을 통해 A집단군이 조금 더 진격할 수는 있겠지만, 독일군은 캅카스 지역의 기존 A집단군(3개 군사령부로 구성)도 제대로 보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로즈니를 넘어 바쿠까지 진격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의 물자 생산량이 부족했다기보다는 폴란드에서 소련 깊숙한 지역까지 철도가 지속적으로 병목현상을 일으키는것이 문제였다.

이를 모두 고려해 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는 독일군에게 유전지대를 지킬 강력한 남부 방어선을 을 수 제공함을 알 수 있다. 그로즈니 유전이 가동되기 시작하면 독일은 석유 부족분의 상당부분을 회복하게 되고,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와 유사하게 기계화부대가 철도에서 더욱 떨어져 기동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추후 독일군이 전략적 공세, 기동방어를 취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또한, 6군이 붕괴되지 않으므로 다른 추축국 부대들이 유지됨은 물론, 스탈린그라드 공중보급에 투입될 항공기들이 튀니지 항공보급에 투입 가능해지고, 6기갑사단 등 겨울폭풍작전에 급히 투입한 부대들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낼 수 있게 되는 등 타 전역에 큰 여유를 가져다 주게 될 것이다. 그 상태를 유지한 채 1943년 중반이 되면 독일군은 쿠르스크같은 제한적 공세가 아닌, 다시금 주도권을 가진 공세를 시작했을 것이다.

이후 소련군이 다시 연합군과 힘을 합쳐 독일을 패퇘시키더라도, 소련군은 베를린 레이스까지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을 것이다.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 승리 이후로도 6개월 넘게 드네프르 강 근처에서 소모전을 치루고서야 독일군의 척추를 꺾을 수 있었다. 여기에 만약 스탈린그라드에서 손실했던 27만의 추가 독일군과, 20만이 넘는 추축동맹 부대가 추가된다면 전투는 더욱 힘들어졌을 것이다.

8.3. 만약 독일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했다면?

밀덕과 역사학자들이 많이 논의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블라우 작전에서 독일 B집단군은 A집단군의 측면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독일 6군은 B집단군의 독일 전력의 대다수와, 4기갑군의 기동부대까지 집중한 부대이다. 따라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지 못했더라도 6군 전력이 유지되는가 아닌가는 전선과 전쟁 전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독일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독일군이 우라누스 공세 일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포위 자체를 회피하고 중장비와 병력을 온존한 채 돈 만곡부쪽으로 퇴각에 성공하는 것이다. 이 경우 독일군은 A집단군을 코카서스 유전 지역에 유지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만슈타인은 동계 전역에서 분견군과 전투단 등 온갖 임시 전투제대 대신 마모가 심한 상태긴 하지만 6군 예하의 5개 추가 기갑, 차량화사단과 측면을 엄호할 독일 보병사단들을 추가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를 이용해 전선 축소를 최소화한 채 측면 방어를 시도해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은 6개월~1년 정도면 마이코프 유전을 가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B집단군이 붕괴하고 동계 전황이 악화되면서 마이코프에서 철수해야 했다. 6군의 전투력을 온존하고 나아가 돈 강 측면을 지켜낸다면, 독일이 석유부족을 상당부분 해결함으로써 전쟁수행역량이 향상되게 된다. 1942년 중반 이후 독일은 연료부족으로 기계화부대를 철도 중심지에서 먼 곳으로 전략적 기동을 시키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블라우 작전 초반, 파울루스 역시 연료부족이 너무 심각하여 부대를 1주일 가까이 정지시키거나, 사단이 모든 연료를 고작 1개 대대에게 몰아준채 위험한 진격을 계속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마이코프 유전이 정상화되면 추축동맹 석유 생산량의 1/3 가까운 추가 석유가 생겨나게 되니, 독일군의 큰 문제중 하나가 해결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바쿠를 점령하지 않는 이상 소련의 전쟁수행능력이 크게 감소하지는 않으므로, 독일 앞에는 여전히 험난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른 시나리오는 독일 6군이 장비를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채 전투서열이 붕괴한 채로 패주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실제 역사에서 스탈리그라드 포위망을 담당했던 돈 전선군 예하 부대가 쌩쌩한 상태로 풀려나오게 된다. 반면, 독일군은 동계 전역에서 무기도 보급도 부족한, 조직 와해 직전인 추가 부대만을 얻게 된다. 이런 부대들로 1943년 동계 전역을 버티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실제 역사에서 포위되었던 독일 6군이 돈 전선군을 붙잡아 둘 수 있었던 이유는 스탈린그라드 주변에 고슴도치 진지를 건설하고, 스탈린그라드 북쪽에 수개월간 축성한 요새진지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군이 중장비 없이 병력만 온존한채 패퇴한다면 이런 강점이 전부 퇴색되게 된다. 반면 소련은 돈 전선군에 배치되어있던 장비와 병력이 쌩쌩한 상태로 풀려나오게 되므로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취약한 동맹군의 측면을 실제 역사보다 강력한 공격으로 돌파하여 독일 남부전선 전체를 위기로 빠뜨렸을 것이다.

위 시나리오들을 현대인들은 일종의 대체역사로서 상상해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독일 6군의 운명은 우라누스 작전 개시일에 이미 결정되었다. 6군 사령관이었던 파울루스는 우라누스 작전 아침에도 자이틀리츠와 함께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어떤 '건물'을 점령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독일 6군은 돈좌상태였기 때문에, 군사령관과 군단장이 모여앉아 이런 사소한 의사결정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파울루스는 제대로 된 전투부대가 없어서 6군 예하 부대 공병들을 모아 여단급 부대를 편성해 따로 훈련시킨 뒤, 시가전에 투입해보는 등 인력부족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지자 독일군 기동력의 주축인 말들은 후방으로 보내야 했다. 당시 6군은 전투병력, 기동력 모든게 부족한 앉음뱅이 부대였다.

그리고 운명의 날, 우라누스 작전 개시일 소련군은 6군 부대들을 공격하는 대신, 측면의 동맹국 부대들이 공격하였다. 정보가 없던 6군 지휘부는 우라누스 공세 첫날 의사결정을 할 수 없었다. 작전 2일차에야 파울루스는 6군의 서측면이 위험에 처했음을 집단군을 통해 통보받았고, 독일군은 급히 병력과 연료를 박박 긁어 칼라치가 있는 서쪽 방향으로 전투단을 구성해 파견하였다. 하지만 남쪽 측면에서도 거대한 돌파구가 생겼고 독일군은 여기에 보낼 부대는 구할 수 없었고, 결국 3일만에 전 군이 포위되고 만다. 되려 포위망 남쪽의 전선 형성에 실패해 군 전체가 즉시 붕괴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파울루스는 포위 당한 직후 포위망 돌파 조직에 나흘이 걸린다고 보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소련군이 포위망 완성에 소요한 시간인 3일보다 긴 시간이다. 달리 말하면, 19일 아침 파울루스가 신내림을 받아 바로 부대 '퇴각'을 위해 재정비를 시작한다고 해도, 6군은 여유롭게 길 따라 장비를 챙겨 철군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후 만슈타인의 구원부대 선봉인 6기갑사단이 포위 완료 뒤 3주 뒤에나 도착하는 것을 고려한다면(6 기갑사단은 남유럽으로의 이동을 위해 열차를 타고 이동중이어서 그나마 빨리 배치된 것임에도 3주가 걸린 것이다), 포위 완료 직후 돌파 시도를 한다면 독일 6군은 기존에 만든 북쪽의 진지들을 포기하고, 부대 기동력의 핵심이었던 말 대부분이 없는 상태로, 포위 완료 전에도 때때로 급양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부대들을 긁어모아 단독으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해야 했을 것이다. 이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퇴각이 위에서 언급한 두 시나리오 중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6군은 포위망 돌파고 아니고, 포위망 축소를 위해 8군단을 돈강 만곡부에서 스탈린그라드 쪽 방어에 용이한 지역으로 옮기는 것 조차 어려워했다. 포위당하기 전에도 불구에 가깝던 6군 전체를 움직이는 것은 더욱 큰 모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2년뒤 카메네츠-포돌스크 포위전이 발생한다. 당시 포위되었던 1기갑군 사령관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군단장으로 경험했던 후베 장군이었다. 그는 부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포위망을 탈출하였고, 덕분에 이 전투는 포위망 탈출의 정석으로 불린다. '정석'적 탈출을 했음에도, 탈출한 독일 기갑사단들은 가용 전차가 1자리수로 떨어지는 비참한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1942년 말 기동력도 훨씬 떨어지고, 기계화율도 낮았으며, 대규모 포위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증원 부대가 3주 뒤에나 도착하게 되는 독일 6군이 정말 문제없이 스탈린그라드를 탈출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독일군은 중요한 군사정보를 무시했고, 공세가 시작된 시점에 6군은 돈좌상태였으며 육군사령부는 3주간 고작 2개의 기갑사단만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자원 소모가 극심했다. 독일 동방정보국이 우라누스 공세를 위해 집결하는 소련 병력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6군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9. 말말말

스탈린그라드에서는 7초에 한 명씩 독일군이 죽고 있습니다.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7초. 방금 또 한 명이 죽었습니다.[85]
당시 모스크바 라디오 선전 방송 중
어제 가 필사적으로 볼가강을 수영해서 건너는 걸 보았다. 가장 강인한 동물도, 가장 단단한 돌도 이 곳에선 버틸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버틸 뿐이다.
어느 신원 미상의 독일 국방군 병사의 일기 중

9.1. 이후 독일 육군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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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1943년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게 노획당한 독일의 전차들
독일 육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실전에서 강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2차 대전의 패배를 통해 교육 훈련이 실전에서 한계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간 육군이 확신했던 "실전과 같은 훈련"의 개념이 모호했다는 판단에 따라 2차 대전의 여러 전투들에서 원인과 교훈을 찾아내었고, 이를 토대로 육군 전투원-참모-지휘관의 교육 훈련 체계를 다시 정리하였다.[8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육군이 얻은 개념은 아래와 같다.

9.2. 이후 소련 육군에 끼친 영향

소련군의 경우에도 여러가지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다.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은 2개월이라는 긴 기간 동안 독일 6군을 포위하면서 기나긴 동계 작전 경험을 하게 되었고 소련군의 동계 전술은 이때를 기점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이 외에도 현대적인 시가전 교리를 확실하게 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실리 추이코프는 전투 초기에 화력이 우세한 독일군의 이점을 감소시키기 위해 아군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건물에 숨어 적이 올때까지 기다리다가 적이 가까이 오면 기습하는, 백병전에 가까운 근접전투를 벌이는 방식을 시도했다. 이는 당연히 소련군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전술이었지만, 강력한 독일 전차와 포병의 화력에 대응조차 못하고 병력을 손실하는 것 보단 보병 하나라도 교환하는게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기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전투 후기에 전선이 안정화되고 소련군에 물자와 인력이 보충되기 시작하자, 소련군은 수류탄과 기관단총, 화염병과 화염방사기 같은 근접전에서 아주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게 되었다. 단순히 적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때까지 버티다가 싸우는 것이 아닌, 먼저 적이 점거한 건물을 소탕하거나 적의 거점을 공략하는 보다 공세적인 전술을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인력을 보존하기 위해 적이 있는 건물(또는 있을법한 건물)에 무리하게 진입하기 보다는 수틀리면 폭약과 수류탄으로 방 째로 날려버리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현대전에서 인질이나 민간인이 없는것이 분명한 건물을 소탕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87]

또한, 기만 작전술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을 철저히 기만했고 그 덕에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소련군은 기만과 가짜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대표적으로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남부 전선에 대한 지속적인 공세를 통해 독일군의 관심이 남부에 쏠리게 만들었고 가짜 사단 편성 및 거짓 무선, 병력의 위장 배치를 통해 소련군의 주공이 남부인 것처럼 위장하게 만들었고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이 남부집단군으로 몰리게 되면서 중부집단군은 사실상 알보병만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전선 곳곳이 텅텅 비어버렸다. 결국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얻은 기만전의 경험을 토대로 독일 육군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중부집단군을 문자 그대로 분쇄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부대를 지휘하는 장교들의 경험도 점점 쌓이게 되었고 장성들의 종심 작전능력도 향상되었다. 대숙청의 병폐로 인해 불구가 되었던 소련군의 종심작전능력은 이때를 기점으로 향상된 셈이고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장병들은 경험이 많이 쌓인 베테랑이기에 이 생존장병들은 소련군의 큰 전력이 되었다.

9.3. 참전한 한국계 인물?

한때 6.25 전쟁 당시 북한측 휴전협상 대표였던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남일이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남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소련 변방에서 교육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독소전쟁 전체에 걸쳐 참전한 바가 없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독립군 홍범도 장군이 병력이 부족했던 소련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홍범도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한 것은 사실이고 소련이 당시 워낙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는지라 나이고 인종이고 가릴 것 없이 주먹구구로 징집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시 74세의 고령의 노인이던 홍범도 장군까지 징집한다는 것은 솔직히 무리였다. 아무튼 실제로는 징집되지 않았고,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카자흐스탄의 정착지에서 사망한다.

김일성이 소련군 소속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는 설도 해방 후 나돌았으나, 김일성은 관동군의 토벌작전 때문에 만주에 있는 것이 어려워지자 소련령으로 도피, 극동의 하바롭스크에서 88여단 소속으로 훈련받고 있었다.[88]

오히려 이런 명사들 이외에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인들 가운데 참전 용사들이 있다. 예컨대 황동국( ХВАН, Дон Гук, 1918년생)은 1942년 9월에 소련군에 자원입대하여 대전차포병으로 활약했는데, 정확히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및 포위에 투입된 것은 아니나 천왕성 작전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로스토프-나-도누 해방전에 참가하였다.

이밖에도 노르망디의 한국인이 참전했다는 설도 있으나, 노르망디의 한국인 자체가 신원이 불분명하므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10. 양측의 편제

10.1. 소련군

10.1.1. 소련군 총사령부

10.1.2.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10.1.3. 돈 전선군

10.1.4. 남서 전선군

10.2. 추축군

10.2.1. 독일 국방군 (제6군)

10.2.2. 독일 국방군 (제4기갑군)

10.2.3. 지원군

10.2.3.1. 루마니아 왕국군
10.2.3.2.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 (CSIR)
10.2.3.3. 크로아티아 의용군

11. 매체에서

11.1. 영화

11.2. 게임


파일:윙듀스탈린그라드.jpg

11.3. 소설, 만화



[1] 정확하게는 천왕성 작전을 나타낸 움짤로, 소련군의 공세로 측면의 루마니아군이 무너지면서 독일 제6군이 그대로 고립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 영상에 등장하는 2개의 강 중 오른편에 있는 강( 볼가강)에 붙어있는 도시가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이다. 자세히 보면 소련군이 볼가강 유역 시가지에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 러시아 연방 볼고그라드 [4] 이쪽은 양군 통틀어서 병력 200만 명 동원에 전차는 무려 10,000대, 대포는 3만 문 그리고 항공기는 6,000대가 동원되었다. [5] 청색 작전이 이미 어느정도 진행된 시기로, 소련군의 기존 방어선은 이미 무너졌고 독일군이 캅카스와 스탈린그라드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6]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은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푸스로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들은 채 5천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7]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8]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9] 최고사령부 명령 제45호 [10]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11] 이 전투의 패배로 티모셴코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두 번 다시 일선 지휘를 맡지 못했다. [12] 그 외에도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은 많았지만, 러시아 내전 시기 남부 지역에서 식량 조달 조직 책임 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스탈린이 식량 공급을 안전히 하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처음으로 유의미한 군사권을 행사한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차리친(제정 시절 명칭) 사령부에서 북캅카스 전선을 지휘하며 모스크바에서 레프 트로츠키가 귀찮은 간섭을 하는 것 이외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출처: 《스탈린:강철 권력》 14장 '내전 속으로', 로버트 서비스 [13] 소련군 군수 산업 생산량의 4분의 1을 담당했으며, 소련군 주력 전차 T-34의 주요 생산 기지 중 하나였다. [14] 맨 왼쪽이 니키타 흐루쇼프 중장(정치장교), 키르첸코 소장(정치장교), 추야노프 소장(정치장교), 맨 오른쪽이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 대장. 스탈린그라드에 있던 독일 국방군의 제6군을 포위한 직후인 1942년 12월 1일 촬영. [15] 이상하게도 슈밀로프는 시가전에서 추이코프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데도 서방 전사에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된다. 1996년 1월호 월간조선에서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전적지 탐방 기사를 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런 이유에 대해 슈밀로프가 손실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격전에서 언급이 잘 안 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6] PPSh-41은 많은 장탄수와 강력한 연사력, 소구경 고속탄에서 나오는 관통력(강철 재질의 공병 방편조끼나 병사들의 철모를 다른 권총탄으론 뚫기 어려운 먼 거리에서도 간단히 뚫어제낀다)으로 독일군에게 노획품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고질적인 생산량 부족에 골머리를 앓던 독일군 당국은 이를 MP717(r)로 명명하고 수리 키트를 제공해 제식 채용하기도 했다. 반대로 소련군 또한 독일군의 MP40에 대해 제법 호평하고 역시 노획도 많이 했다. 1993년 독일 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반영되어, 독일군들이 소련제 기관단총을 노획해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17] 사진 속 인물은 제305 정찰대대 소속 대대장 빌헬름 트라우프(Wilhelm Traub)로, 사진이 찍힐 당시 실 계급은 대위였으나 하필 오른쪽 견장의 핍이 하나 빠진 탓에 중위로 자주 오인된다.(다른 각도로 찍힌 사진을 보면 왼쪽 견장의 핍은 정상적으로 3개임을 알 수 있다) 트라우프는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인 1943년 1월 5일 작전 중 실종되었고(사실상 사망) 이후 1944년 사망처리됨과 동시에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8] 물론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서방 연합국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기 때문에 생각만큼 소련에서 충분히 공군을 활용하지는 못했다. [19] 기존에 알려진 4만명 사망설은 지극히 과장되었다. 1942년 7월부터 10월까지 소련 민방위 당국이 집계한 민간인 사망자가 3,931명인데 전투로 인한 행정력 마비를 감안해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은 맞다. 스탈린그라드에 배치된 독일 공군 세력은 비행기 600기이고 폭격기는 연합군이 보유한 전략 폭격기가 아니라 지상 지원용 중형 폭격기였으므로 저 비행기가 전량 폭격기라 하더라도 4만명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스탈린그라드 주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극심한 인명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볼고그라드 시당 문서고의 불완전한 기록에 따르면 4만 2,754명이 사망했고, 역사가 타티야나 파블로바의 추산에 따르면 스탈린그라드 주민 18만 5,232명이 전투와 폭격에 휘말려 살해되었다고 한다. 개중에는 소련군 전투부대 또는 보조인력으로 근무한 자가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20] 주로 고등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21] 현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여군 또한 전투병과에서 활동할 수 있게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만 이 당시 여군들은 모두 비전투병과 보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전투병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다. [22] 현대전에서 '전멸'이라는 말이 글자 뜻과는 달리 부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할 정도의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쓰인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전체 부대의 약 30% 이상 무력화되었을 경우 전멸이라고 본다. 현대의 군 편제상 육군은 일반적으로 실제 전투 인원은 30%고 나머지 70%는 보급 등을 담당하는 전투보조 인원이므로 전투 인원만 잃어도 더 이상의 유의미한 전투수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23] 볼가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 외곽 북동쪽에 위치한 공장으로, 독소전쟁이 터지자 군수공장으로 징발되어 T-34 전차를 가장 많이 생산한 공장들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소련군 기갑 전력의 든든한 반석이었다. [24] 여러 매체에서 나오는 유명한 동상으로, 1950년대에 철거되어 사라졌다가 2013년 8월에 다시 만들어졌다. 브이 포 벤데타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나오고, 소련군의 유명한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를 그린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초반부에 바실리가 총알 다섯 발로 독일군 다섯 명을 저격하는 장면에서 바실리가 숨어 저격한 분수도 바로 이곳이며, 이 장면을 오마주한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소련군 첫미션에서도 나온다. 게임 코만도스 3의 러시아 첫 임무에도 이 분수가 등장한다.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의 첫 번째 미션 이후에도 등장한다. [25] 1901-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인 1943년 9월 심장마비로 사망. 어쨌든 구로프는 지휘권에 간섭하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62군의 사기를 계속 유지시켜 정치장교로서 이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62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모두 원수로 승진했기 때문에, 전후까지 생존했으면 원수진급이 유력했을 듯. [26] 신경성 습진 때문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27] 그외에도 21군, 28군, 38군, 57군, 63군, 1전차군, 4전차군 등 많은 부대가 참전했다. [28] 227호 명령. Ни шагу назад! / Ni Shagu Nazad!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악명 높은 형벌 부대의 창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29] 이 군사용어에 대해서 여러 번역들이 있는데 국군은 제병협동을 쓴다. 연합은 나라 단위로 다른 경우(예: 한미연합)에 주로 쓰고 합동은 기관별로 다른 경우(예: 육해공 합동작전, 민관군 합동훈련)에 쓴다. 제병협동은 보통 같은 육군 소속 보병, 포병, 전차 등 여러 병과 부대의 전술행동에 대해 쓰는 말이기 때문에 협동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30] 독일군은 맹폭을 퍼부어 시가지를 박살냈는데 이는 시가전에서 건물의 잔해들로 인해 차량의 진입을 막는 장애물과, 방어하는 소련군에게 많은 엄폐물을 제공하는 등 악수로 작용했다. [31] 아군이 소련군과 가까이 있는 상태에서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아군 오사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32] 추이코프는 이러한 전술을 '적 껴안기(Hugging the enemy)'라고 불렀으며 독일군은 생쥐 전쟁(Rattenkrieg)이라고 불렀다. 부엌에서 쥐가 도망가면 또다시 거실에서 쥐잡기를 해야 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33]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도 원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군 태평양 함대 행정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흑해 함대, 그리고 해군육전대로 전속되는 서류상 절차를 거쳐 전선에 투입되었다. [34] 성인 병사들도 총 한 자루가 고픈 상황에서 주력 소총과 경기관총을 쉽게 다루지 못할 어린이들이 웃으면서 매달고 있는 점을 봤을 때, 실제로 소년병들이 이렇게 무장하고 싸운 것이 아니라 그냥 꼬마들을 데리고 기념샷 찍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35] 안토니 비버의 저서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에 의하면 레이어 케이크마냥 건물 한 층은 소련군, 위층은 독일군, 또 그 위층에는 소련군, 또또 그 위층은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36] 소련군은 콜 오브 듀티나 서방서 만든 영화등에서 인력을 끌어모은 뒤 한명에게 모신나강 소총을 한명에게는 5발 짜리 탄약 클립 2개를 쥐어주고 총을 가진자가 죽으면 탄약 클립은 쥔 사람이 이를 들어 싸우라며 전장에 투입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37] 가운데 철모를 쓰지 않은 사람. 당시 소장 [38] 이 사단은 시베리아에서 달려왔으며 그래서 아시아계로 보이는 병사도 보인다. [39] 정식 편제도 아니고 세바스토폴 공방전 크림 반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수병들과 극동의 태평양 함대 수병들을 동원해 세일러복 차림 그대로 혹은 육전복만 지급해 준 식이었다. 이렇게 동원된 태평양 함대 수병들 중에는 전투에서 유명한 저격수가 되는 바실리 자이체프도 있었다. 단, 자이체프는 육상 행정병 근무 중 차출되기 전 먼저 전출을 지원했다. [40] 몽골인들의 요새가 위치했던 스탈린그라드의 고지대. 이곳을 차지하는 쪽이 스탈린그라드를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41] 무려 프랑스보다 오랫동안 독일군을 막아냈다. [42] 하루에 주인이 12번 바뀐 적도 있다. [43] 이 공로로 187 보병사단은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출처: 독소전쟁사 [44]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니콜라이 바투틴 중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45] Operation Uranus,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Ура́н' [46] 동부전선의 분수령으로 꼽히는 천왕성 작전이 있는 것과 동시에 공교롭게도 서부전선의 분수령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정식 작전명 또한 다름아닌 해왕성 작전(Operation Neptune)이다. [47] 무엇보다도 스팸 자체가 "고기"로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보니 전장에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소련군의 사기도 올라간 것은 덤. [48] 일부 자료에서는 115만 이라고 한다. [49] 대체로 자국산 장비로 무장했으나 보급 한계로 독일군에게 추가 지원을 받았는데, 이때의 주 장비라는 게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에서 노획한 장비에다 그 수마저도 적었다. [50] 이외에도 이탈리아군, 헝가리군과 심지어 독일군까지 사령부에 계속 지원 요청을 하였다. [51] 73개 소총병사단, 86개 전차여단 및 기타 전투 지원 부대. [52] 집단군을 둘로 나눠 하나는 캅카스로 하나는 스탈린그라드로 보내버렸다. [53] 일화에 따르면 너무나 추운 나머지 휘발유가 얼어 작동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했단다. 그 전부터 냉각수와 배터리의 화학물질이 얼어버리면서 48기갑군단 내에 기동 가능한 장비도 적었다고 한다. [54] 이때 소련군 전차는 단 한 번도 발사하지 않고 손쉽게 독일군 방어선을 뚫었다. 독일군이 왜 적극적으로 반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나, 대부분 군사 전문가들은 이 곳을 방어하던 부대가 급조된 부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55] 파울루스가 철군을 요청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파울루스가 철군을 판단할 수 있던 가장 빠른 시점, 그러니깐 아무리 빨라도 23일 저녁에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 남쪽에 어떤 병력도 배치할 수 없었고, 그 시점에 이미 너덜너덜해진 6군을 전부 끌고 나오더라도 가장 빠른 시점인 25~26일에 이미 포위망은 닫힌 후이다. 결정적으로 파울루스는 철군을 요청한 바 없다. [56] 1차 대전 당시 독일군 최대 에이스인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동생이다. 독일군에서 항공 관련이라면 이 사람만큼 전문적인 인물은 없다시피 했다. [57] 원래 수송 작전에는 주로 Ju 52가 동원되었으나, 상황이 다급해지자 독일은 당시 공군의 유일한 4발 수송기인 Ju 290을 보급 작전에 투입하고,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까지 희생시켜 가며 훈련이 부족한 승무원을 무선 장비와 항법 장비조차 설치되지 않은 수송기에 탑승시켜 수송 작전에 투입시켰다. [58] 당시 횃불 작전으로 인한 롬멜 아프리카 군단 보급용. [59] 소련군은 676대의 Ju 52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했고, 전쟁 중후반기에 가서는 손실 보고에 대한 왜곡을 일삼던 독일 공군조차 266대의 손실을 인정했다. [60] 반대로 애초 태생이 군용기였던 He 111은 수송 작전도 어느정도 잘 소화했다고 한다. [61] He 111의 주익을 이어붙여서 만든 파생형 항공기. Me 323나 기타 글라이더들을 견인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62] 이쪽은 수송능력이 무려 Ju 52의 10배가 넘는 12t이었기에 투입되었다면 확실히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이미 전투기에게 터져나갔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막상 투입되었어도 별로 활약하지 못하고 전부 격추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63] 타친스카야 비행장은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Ju 52의 주요 거점이었는데 여기가 공격당하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더 멀리 있는 비행장을 이용해야 했다. 이로 인해 수송기가 날아가는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연료를 더 실어야 했으므로 가뜩이나 부족한 수송량이 더 감소해 버렸다. [64] 영화 스탈린그라드(1993)에서도 주인공 일행이 수송기에서 투하된 보급품을 열어보고서는 안에 있던 철십자 훈장은 죄다 옆으로 던져버리고 같이 들어간 전투식량 조금을 꺼내서 허겁지겁 취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65] 위에서 말했듯이 6군은 정상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하루에 약 300톤의 물자가 필요했다. 참고로 일주일 동안 350톤을 날랐다면 하루에는 대략 50톤쯤 보냈다는 게 되는데 이는 필요한 양의 1/6밖에 되지 않는다. [66]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412페이지 [67]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398페이지 [68] 여담으로 이러한 공중 보급의 한계는 연합군도 똑같이 겪었는데 마켓 가든 작전 당시 고립된 영국군을 지원하게 위해 공중 보급이 시행되었고 사상자까지 발생하면서까지 이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보급 상자에서 나온 것은 베레모였다. [69] 당시 독일군에게 있어서 말은 물자 운반 및 인원 수송용으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기계화보병/기갑부대에서 방한대책으로 연료를 빼다 태우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70]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2012), 491페이지 [71] 사진 오른편으로부터 제4항공군 사령관 리히트호펜 공군 원수, 총통 전용기 기장 한스 바우어 SS 중장, 만슈타인, 히틀러. [72] 이대영의 《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에선 소련군이 빵을 들고 찾아와 항복을 권했다는 서술이 있으나 도시전설이다. 공식 항복 이전에 개별적으로 항복한 병사는 매우 적었다. [73] 반대로 헐벗고 굶주린 6군의 병사들은 실탄은 커녕 움직일 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74] 결과적으로 지켜지진 않았다. 수용소에 집어넣고 일부러 죽일 목적으로 심하게 굴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게 소련식 안전 보장이었고, 의료지원과 식량배급은 애초에 줄 물자가 없었다. 어쩌다가 물자가 가더라도 경비병이나 민간인들이 빼앗아가는 일이 잦았다. [75] 히틀러가 총리가 된 날이다. [76]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한 6군을 '아시아의 위협'(나치나 히틀러의 망상에 의하면 유대교나 볼셰비즘을 아시아적 비문명으로 간주했다.)에 맞서 유럽 문명을 지키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스파르타 300명의 용사로 만들어 선전을 하는 것이었다. [77] 사병들과는 달리 포로가 된 장성급 포로 20여 명은 소련에서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 [78] 독소전 초반 소련군에 잡힌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30%에 달했으나, 이때를 기점으로 10% 이하로 떨어지며 전후 최종 독일군 포로의 생환율은 귀국 기준 85%이다. [79] 장티푸스보다 훨씬 무섭고 치사율이 훨씬 높다. [80] 독일군만 그런 것도 아니고 소련군 시신도 똑같이 처리됐다. [81] 반체제 인사로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나 전향하여 귀국, 스탈린에게 직접 사면받고 열렬히 활동했다. [82] 3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니 대독일사단 참전 용사였단 기 사예르의 회고에 따르면 한 소련군 전차가 독일군 참호를 깔아뭉겠는데 해당 전차의 전차장이 '죽어라 독일놈아'라고 외치며 전차에 깔아 뭉게진 독일군 시체를 여러 차례 뭉겠다고 한다. [83] 출처: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84] 흥미로운 점은 전쟁 중반으로 갈수록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국방군의 시선이 안 좋아지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었는 마당에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에도 소련을 무찌르고 나면 나치당원들을 혼내주겠다던 대화나 동부전선의 참혹함이 독일 내부로 들어가며 독일군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빽을 이용해 서부전선이나 덴마크, 노르웨이로 도망가려고 했던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거다. [85] 추축군 총 사상자 수를 85만 명으로 잡으면 16.8초에 한 명꼴로 사상자가 나왔다. 소련군 총 사상자를 113만 명으로 잡을 경우 12.6초에 한 명꼴로 사상자가 나왔으며, 양측 사상자를 도합 200만 명으로 잡을 경우 7.1초로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즉 라디오에서 7초마다 독일군이 1명 죽었다 했지만, 실상은 7초마다 양측이 번갈아가면서 죽거나 다쳤던 셈. 다만 이건 전투 기간 전체를 통틀어서 나온 수치인 거고, 중후반부 독일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던 시기에는 실제로 7초에 1명씩 죽었을 수도 있다. [86] 1960~70년대 대한민국 서독 간 군사 교류가 이뤄지면서 독일의 실용적인 교육 훈련 개념이 상당 부분 육군에 도입되게 된다. [87] 현대 미군 교리에도 민간인, 인질이 없는 적 점령 건물을 상대할 땐 보병을 진입시키지 말고 유탄이나 로켓, 장갑차 등의 화력을 동원하여 원거리에서 제압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고, 굳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수류탄과 섬광탄 등의 폭발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되어 있다. [88] 굽시니스트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홍범도와 김일성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만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89] 헝가리군의 당시 편제는 나오지 않는다. [90] 총사령관은 명목상 이오시프 스탈린이었지만, 청색 작전 이후로는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었고, 그 아래인 총사령관대리인 주코프가 실질적인 총지휘를 맡았다. [91] 비록 독소전쟁이 없었고 소련이 중화민국을 침공하는 1946년까지 큰 전쟁도 없었고(유럽전선은 1950년의 토룬 대학살로 개전되었다.) 프랑스 침공시기에 대숙청을 한번 더 했으며 미국이 극동지역에서 발목을 잡아줘도 순수 육군전력은 여전히 약했다. [92] 본작 진주만 공습도 우연히 같은 날에 일어나 미국이 독일과 일본이 짜고 미국을 공격했다고 오해하는 사건도 있었다. [93] 이 때문에 본작 1942년 미군은 일본 본토 공격 루트를 대만-한반도 노선으로 바꾸었다. 본작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 대신 <등애 작전>을 펼친 것도 원인이었다. [94]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에 상륙해 북상한다는 거짓 작전으로, 티토와의 협상이 잘 안 되면 약 팔려고 만든 거짓 작전이었지만 티토와 협상이 잘 되어서 찌라시로 남겨놓았다. [95] 시베리아 유전 개발은 1950년대라서 이때까지 시베리아는 진짜 블라디보스토크밖에 가치가 없던 곳이었다. [96] 다만 이후에 알렉산더 장군이 이탈리아 전선으로 부임된 걸 보면 완전히 발을 뺀 건 아닌 듯하다. [97] 본작에서는 미국의 랜드리스 보정을 원 역사보다 훨씬 많이 받았다. 중국 물자까지 대규모로 슈킹했다고. [98] 본작의 퍼싱은 1939년에 만들어졌지만 구동계와 엔진 문제 때문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쓰지 않았고 1940년에 문제를 해결해서 사정이 급한 소련군에 먼저 보내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데뷔했다. 따라서 말이 퍼싱이지 정황상 M46 패튼~ M47 패튼급의 성능일 가능성이 높다. [99] 한편 화성 작전은 발터 모델 때문에 고기분쇄기 엔딩을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황상 여기서도 <들소 작전> 엔딩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100]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완전히 종결되지는 않았지만, 승세를 확실히 굳힌 뒤에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