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카르파티아 공세 러시아어: Восточно-Карпатская операция 독일어: Ostkarpatische Operation 영어: East Carpathian strategic offensive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두클라 산길 근처의 체코슬로바키아군 | ||
날짜 | ||
1944년 9월 8일 ~ 10월 28일 | ||
장소 | ||
슬로바키아 동부, 카르파티아 산맥 | ||
교전국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 |
]][[틀:깃발| ]][[소련| ]]
헝가리 왕국 |
지휘관 |
[[틀:깃발| (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안드레이 그레치코| ]] (제1근위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키릴 모스칼렌코| ]] (제38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이반 페트로프| ]] ( 제4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
]][[틀:깃발| ]][[이반 코네프| ]]
[[틀:깃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 (하인리치 군집단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프리드리히 슐츠 (제17군 사령관) |
]][[틀:깃발| ]][[틀:깃발| ]] 요제프 하르페
결과 | ||
소련의 승리 | ||
영향 | ||
소련군이 동부 카르파티아 산맥 돌파 소련군이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왕국에 진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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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포 5,140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전차/자주포 약 1,000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항공기 1,165기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군인 16,700명 |
]][[틀:깃발| ]][[틀:깃발| ]] 군인 378,000명
[[틀:깃발|[1]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포 약 3,000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전차/자주포 약 150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항공기 약 450기 |
]][[틀:깃발| ]][[틀:깃발| ]]
군인 약 200,000명~300,000명
피해 규모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부상 103,437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포 962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전차 및 자주포 478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항공기 192기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전사 및 실종 1,600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부상 4,000명 |
]][[틀:깃발| ]][[틀:깃발| ]] 전사/실종 28,473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실종 2,944명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부상 32,712명 |
]][[틀:깃발| ]][[틀:깃발| ]] 전사 5,86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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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부 카르파티아 공세 혹은 두클라 산길 전투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기 위해 소련군이 북쪽에서 슬로바키아 동부에 있는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가한 공세이다. 지형과 보급 때문에 진격이 어려워 2달동안 공세를 펼쳤음에도 투입한 병력의 1/3을 손실하고서야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공세 결과, 소련군은 슬로바키아에 진입했으며 헝가리 영내로 진격하는데 성공했다.[2]2. 1944년 가을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
카르파티아 북쪽에서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남쪽에서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를 통해 전선의 형태는 카르파티아를 중심으로 추축국이 소련군에게 깊숙히 파고든 형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산맥을 직접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동시기, 북쪽에서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이 산도미에시에 형성한 교두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며 산맥으로 단절된 남쪽에서는 9월에 루마니아 작전으로 루마니아를 장악하고 10월부터 유고슬라비아 방면으로 베오그라드 공세와 헝가리 동부 방면으로 데브레첸 공세를 진행하고 있었다.2.2. 독일군
독일군과 헝가리군은 아르파드 라인(Árpád Line)이라는 요새 라인을 동부 카르파티아 산맥 전체에 걸쳐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헝가리와 우크라이나의 국경인[3] 카르파티아 산맥은 헝가리의 유전을 지킬 마지막 자연방어선이었기에 독일군은 산맥 방어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대전차포를 비롯해 중장비가 부족했으며 서부 전선에 우선권이 부여되어 자재 조달이 쉽지 않았음에도 소대 혹은 중대급이 방어할 수많은 벙커와 방어라인을 구축했으며 이는 이후 전투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3. 전투 서열
3.1. 소련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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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5] ( 사령관 :
이반 코네프 소연방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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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개
4.1. 공세 준비
소련군의 진짜 목적은 슬로바키아 민족봉기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소련군은 산맥을 직접 넘을 생각이 딱히 없었다. 아무리 전력이 압도적이라 해도 산맥을 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쪽 발칸반도에서의 작전도 보급 문제 때문에 전선군 규모의 작전이 아니라 연속된 야전군 규모의 작전이 한계였다. 그렇지만 이것도 거대한 산맥을 넘는 작전에 비하면 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로가 슬로바키아에 진입하는 최단 경로였기 때문에 슬로바키아의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의 좌익에서 조공을 담당했던 3개 제병협동군이 공세에 참여하게 되었다. 38군은 북쪽에서, 1근위군과 18군은 동쪽에서 각각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소련군의 전력은 378,000명의 병력, 5,140문의 포, 322대의 전차 및 자주포, 1,165기의 항공기였다.이 지역의 방어는 원래 헝가리 1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의 여파로 1기갑군이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산맥에 대한 방어가 오히려 강해지게 되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증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독일군은 산맥 방어에 사활을 걸었다. 독일군과 헝가리군의 전력은 20개 사단, 300,000명의 병력과 3,250문의 포, 150대의 전차와 450기의 항공기였다.[15]
소련군은 일주일 이면 산맥을 넘어 프레쇼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공세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했던 슬로바키아군은 독일군에게 막혔고 산맥 전체가 독일군에 의해 요새화되어 있었다. 소련군은 산악전에 익숙지 않았으며 산악 장비도 부실했다. 더군다나 방금 공세를 마친 부대를 그대로 공세에 다시 투입했고 산이라는 특성상 진격로가 몇 군데로 특정된다는 것 또한 공격자에게는 큰 페널티였다.
4.2. 두클라 전투 : 소련군의 슬로바키아 진입
북쪽에서 카르파티아-두클라 공세(Карпатско-Дуклин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를 진행할 부대는 키릴 모스칼렌코의 38군이었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38군은 99,000명의 병력과 약 300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보유중이었고 전선군 직할 부대와 1근위군의 우익까지 합쳐 150,000명의 병력과 1,517문의 야포, 1,724문의 박격포와 1,000대에 달하는 전차 및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근방의 독일군과 헝가리군은 100,000명의 병력과 2,000문의 포, 35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9월 8일, 38군은 프셰미실 근처에서 공세를 시작했고 9월 11일, 카르파티아 요새 지역의 핵심 중 하나인 크로스노를 점령했다. 그러나 초입 거점인 크로스노를 점령하는데 3일이나 걸린 것부터 소련군의 계획이 꼬이고 있었다. 이 때부터 두클라 산길을 두고 엄청난 격전이 벌어졌다.[16] 이 부근을 지키던 것은 11군단이었고 하인리치는 곧바로 1기갑사단과 75보병사단을 투입했다. 코네프는 25전차군단, 1근위기병군단, 1체코슬로바키아군단을 투입했다. 독일군은 오히려 역으로 1근위기병군단을 포위했고 357보병사단은 일주일 넘게 소련군을 막아냈다. 기병군단은 포위망을 벗어났으나 중장비를 대부분 상실했다. 코네프는 어떻게든 통로를 뚫기 위해 4근위전차군단과 35전차군단을 추가로 투입했다. 하인리치도 8기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다. 두클라 북서쪽의 534고지가 격전지가 됐는데 여기를 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은 안간힘을 썼으나 75보병사단과 1기갑사단, 1스키사단의 방어로 번번히 막혔다.
9월 20일, 드디어 4근위전차군단과 체코슬로바키아 3여단이 포병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통로를 지키던 독일군의 거점인 두클라를 점령했다. 같은 날, 38군의 좌익에서 1근위군은 96보병사단을 밀어내고 슬로바키아로 진입했고 21일, 살짝 남쪽에서 소련군은 처음으로 슬로바키아 영내에 있는 마을인 칼리노프을 점령했다. 독일군은 두번째 방어선인 694고지로 물러났다. 짧은 재편성 이후 소련군과 체코슬로비키아군은 27일부터 산의 방어 거점을 하나하나 장악해나갔다. 공군의 지원과과 기갑 전력 투입이 힘든 탓에 양측 모두 힘든 싸움을 해야했다.
10월 4일이 되자 체코슬로바키아군단 좌익에서 67소총군단이 독일군을 밀어내고 국경을 넘어 마을을 점령했다. 이어서 10월 6일, 제1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두클라 고개를 넘어 조국 슬로바키아의 영내로 진입했다. 마침내 두클라 고개를 넘자 독일군은 서쪽의 532고지로 물러났고 소련군은 공세가 끝날 때까지 방어선을 넘지 못했다.
4.3. 산을 넘어 헝가리로
남동쪽에서는 9월 9일부터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카르파티아-우주고로드 공세(Карпатско-Ужгород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가 시작됐다.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264,000명의 병력과 전차 및 자주포 100대 정도를 보유중이었다. 이 공세에서 소련군의 목표는 산맥 너머 우주고로드와 무카체보였다. 이 근방의 독일군과 헝가리군은 약 100,000명의 병력을 보유중이었다. 여기서도 지형의 특성상 진격은 더디기만 했다.9일부터 1근위군과 18군도 동쪽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약한 공세로 인해 5개 보병사단이 북쪽으로 이동하자 18일부터 18군은 17근위소총군단을 지원받아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섰다. 그럼에도 진군은 매우 느렸다. 답답한 상황을 타개한 건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 좌익에서 데브레첸 공세를 개시한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진격이었다. 측면이 우회당할 위기에 처하자 하인리치는 1기갑군과 헝가리 1군을 서쪽으로 후퇴시켰다. 이 덕에 소련군은 26일에 무카체보, 27일에 우주호로드, 29일에 초프를 점령하며 간신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이제 티자 강(Tisza River)에 도달했다. 그러나 28일, 슬로바키아 반군과 연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군이 봉기를 진압하자 동부 카르파티아 공세의 목적 자체가 사라져버렸고 소련군은 공세를 중단했다.
4.4. 죽음의 계곡
▲ 소련군의 진격로[17] |
그 사이 북쪽에서 두클라 고개를 넘은 소련군과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시비드닉에 도달하기 위해 10월 초부터 공세를 펼쳤으나 9월 초에 3개의 보병사단 뿐이었던 독일군은 남쪽 우주호로드 방면에서 차출한 5개 사단을 포함해 6개 보병사단과 3개 기갑사단으로 증강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비가 계속 내리면서 소련군은 더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다. 코네프는 비가 그치고 25일부터 시비드닉을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공세를 펼쳤다.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에서 산악 지형에서 이례적인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졌다.
모스칼렌코의 38군은 좌익부터 제1 체코슬로바키아군단, 67소총군단, 4근위전차군단을 배치했고 하인리치는 좌익부터 96, 68, 357, 168보병사단을 배치했다. 포격과 폭격 후에 12근위전차여단과 305소총사단이 진격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3근위차량화소총여단도 따라 진격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끝내 시비드닉을 점령하지는 못했고 전차와 자주포는 포격으로 인해 거의 다 파괴됐다. 더군다나 두클라 고개와 시비드닉을 잇는 통로도 차단하는데 실패하면서 결과적으로 10월 내내 북쪽에서의 공세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로 마무리됐다.
5. 결과
1944년 10월 초와 말의 동부전선 |
소련군이 약간 진군하기는 했으나 여기에 2달이나 묶여있었으니 독일군이 잘 막아낸 공세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정면으로 공격할 생각이 없던 지역을 공격한 이유였던 슬로바키아 반군과의 연결도 실패했으므로 공세 목적 달성에도 실패했다. 결국 공세를 멈추고 보니 이 조그만 영역을 차지하자고 상당한 전력과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원하는 만큼 진격하지도 못했으며 공격할 이유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공세가 없었어도 북쪽과 남쪽에서의 공세때문에 적은 포위를 피하기 위해 산맥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산맥을 일부 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진군은 남서쪽에서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데브레첸 공세 덕분에 독일군이 포위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빠져나간 덕분이었다. 투입한 병력의 1/3을 손실했음에도 실질적으로 점령한 지역은 매우 적었다. 심지어 북쪽 공세에서는 프레쇼브는 커녕 시비드닉조차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말 그대로 슬로바키아에 발만 걸친 것이다.
이 시간동안 남쪽에서는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루마니아를 장악하고 헝가리 서부에 진입했으며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불가리아를 장악하고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상태였다. 북쪽에서는 발트해 공세로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제2,3 발트 전선군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되찾고 제1 발트 전선군이 리투아니아에 북부 집단군을 가뒀으며 제3 벨라루스 전선군은 동프로이센까지 진격했다.
하인리치는 방어전의 대가답게 훨씬 강력한 적을 지형의 이점을 살려 긴 시간 묶어두는데 성공했고 남쪽에서는 측면이 위험해 물러났지만 북동쪽의 38군 전선에서는 산맥을 넘은 적을 슬로바키아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냈다. 또한, 이맘때부터 판처파우스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의 전력에 관한 자료가 없기에 이 근방 독일군과 헝가리군의 수치를 모두 합한 전력을 기입함
[2]
1944년 당시 헝가리 영토 기준이다. 현대 기준으로는 우크라이나 영토다.
[3]
1944년 기준
[4]
아래 편제는 9월 1일 기준이다. 사단과 군단의 배속이 계속 변경되었기 때문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소속이 바뀐 경우가 많다.
[5]
참여한 좌익 일부만 작성
[6]
10월 26일에 대장으로 진급
[7]
9월 16일 기준
[8]
9월 23일부터 A 집단군으로 개칭
[9]
전투에 관련된 우익 일부만 작성
[10]
10월에 서쪽으로 이동해서 뵐러의 8군에 배속된다.
[11]
일부만 참여
[12]
9월 27일부터 오토 데슬로 상급대장
[13]
9월까지
[14]
10월부터
[15]
다만 이는 주변 독일군과 헝가리군을 모두 합친 수치로 전투에 참여한 전력이 어느정도인지에 관한 자료는 없다. 소련군은 대체로 2:1~3:1 정도의 우세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6]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는지 38군은 공세 개시 시점에서 99,100명을 보유중이었는데 전투 중에 13,264명의 전사 및 실종을 포함해 62,014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17]
우측 상단 비슈니 코마르닉(Vyšný Komárnik)에서 좌측 하단 시비드닉(Sividnik)으로 이어지는 길이 두클라 고개의 마지막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