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 영어: Kalinkovichi-Mozyr offensive 러시아어: Калинковичско-Мозырская операци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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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지도 우측 하단, 칼린코비치를 거쳐 이파강으로 향하는 65군과 61군[1] | ||
시기 | ||
1944년 1월 8일 ~ 1월 30일 | ||
장소 | ||
소련 모지리와 프리피야트 강-드네프르 강 근방의 삼각주 지대 | ||
원인 | ||
소련군이 프리피야트 강 건너 교두보 확보 시도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제65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세르게이 루덴코| ]] (제16항공군 사령관) |
]][[틀:깃발| ]][[파벨 바토프| ]]
[[틀:깃발| (제2군 사령관) |
]][[틀:깃발| ]][[틀:깃발| ]] 발터 바이스
결과 | ||
소련군의 승리 | ||
영향 | ||
독일 중부집단군의 전선 안정화 성공 독일 남부집단군의 붕괴로 인해 2군과 9군이 서쪽으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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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틀:깃발| 병력 232,600명 |
]][[틀:깃발| ]][[틀:깃발| ]] 61군, 65군, 16항공군[[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2군
피해 규모 |
전사/실종 12,350명 부상 43,807명 |
전사 720명 실종/포로 259명 부상 3,061명 |
[clearfix]
1. 개요
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는 소련의 벨로루시 전선군의 좌익이 독일 제2군을 상대로 진행한 공세이다. 공세의 목적은 전술적으로는 프리피야트 강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여 보브루이스크와 민스크로 공세를 이어나가는 것이었으며 전략적으로는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 사이의 틈을 벌려 독일군 남부 집단군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공세 결과, 소련 61군과 65군은 전술적인 목적은 거의 달성하지 못했으나 남부 전선에서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를 진행중이던 4개 전선군의 성공 덕분에 독일 2군과 9군이 두 집단군의 틈을 메우기 위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칼린코비치와 모지리를 탈환하고 프리피야트 강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2. 1944년 1월의 동부 전선
1944년 겨울,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밀리고 있었다. 제일 북쪽에서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볼호프 전선군이 독일 18군을 상대로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를 진행하면서 마침내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풀어내는데 성공했고 이보다 조금 남쪽에서는 제2 발트 전선군이 16군을 상대로 노보소콜니키 공세를 진행하며 네벨 회랑을 위협하던 북쪽의 독일군을 밀어내면서 독일군은 네벨 돌출부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양 측의 수뇌부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곳은 남쪽이었다. 1943년 12월까지 드네프르 강 전투를 거쳐 드네프르 강 건너 교두보를 계속 확보하던 소련군은 이어서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를 진행했다. 4개 전선군이 키예프와 드네프로페트롭스크에서 두 개의 전략적 공세를 진행중이었고 독일군의 엄청난 저항에도 불구하고 공세는 순조롭게 진행됐다.문제는 중앙이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소련군은 중부 전선에도 엄청난 전력을 투입했다. 1942년 겨울에 진행한 화성 작전이 천왕성 작전의 양동 작전이 아니라 비슷한 규모의 대공세였던 것처럼 1943년 겨울에 중부 전선에서 진행한 10차례가 넘는 공세들 역시 드네프르 강에서 진행한 수많은 공세들과 비슷하면 비슷했지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살짝의 차이가 있다면 1943년 겨울의 공세에서 대부분의 기갑전력은 남부 전선에 있다는 것이었으나 기갑 전력의 집중은 남부집단군에 몰빵한 독일군이 더 심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남부집단군과 달리 중부집단군은 소련군의 공세를 굉장히 잘 막고 있었다. 특히 반년 후의 바그라티온 작전 때보다도 더 큰 전력 격차가 있던 비텝스크 전선에서 3기갑군은 1발트 전선군에게 거의 밀려나지 않았으며 타지역으로 전력의 절반 이상이 이동한 4군 역시 서부 전선군을 상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에 벨로루스 전선군 사령관 로코솝스키는 남부 전선의 성공을 바탕으로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을 연결하고 있던 2군을 밀어내고 두 집단군의 연결을 끊으려 2개의 공세 작전[2]을 준비했다. 이를 통해 프리퍄트 강 북쪽과 드네프르 강 서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벨로루시를 향해 공세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3. 전투 서열[3]
3.1. 소련군
-
벨로루시 전선군 ( 사령관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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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바토프 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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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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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집단군 ( 사령관 :
에른스트 부슈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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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개
공세를 진행할 소련군은 2개 제병협동군과 이를 지원하는 1개 항공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선군 제일 좌익의 61군은 6개의 소총사단과 1개 전차여단을 보유했으며 여기에 2개 근위기병군단을 추가로 배속받았다. 61군 우익의 65군은 10개 소총사단과 1개 근위전차군단[6]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로코솝스키는 전선군이 보유한 강력한 포병 화력을 집중시켜 1개 돌파포병군단, 2개 돌파포병사단, 1개 박격포 사단, 2개 포병 여단으로 구성된 충격포병집단을 지원했다. 공중에서는 16항공군이 지상군을 지원했다. 이에 맞선 독일 2군은 공중에서는 6항공함대, 후방에서는 파르티잔 진압 작전을 펼치던 헝가리 7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9개 보병사단, 2개 기갑사단, 3개 돌격포연대, 1개 기병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소련군의 공세는 1월 8일에 시작됐다. 이 지역은 거대한 습지대였기 때문에 독일군은 적은 전력으로도 어느정도 방어해낼 수 있었지만 전선에 구멍이 한 번 뚫리자 예비 전력이 전무한 독일군은 밀려들어오는 소련군 기병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지역 특성상 기계화 전력보다도 기병이 훨씬 효율적이었고 2개 근위기병군단은 독일군 보급로를 차단했다. 독일군은 2군을 지원할 전력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2군 우익[7]의 4기갑군이 제1 우크리이나 전선군의 공세로 더 밀려나면서 2군은 담당 전선이 오히려 길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1월 14일에 61군은 칼린코비치와 모지리를 탈환했고 20일에는 65군이 오자리치를 탈환했다.
부슈와 바이스는 2군을 철수시키는 것 말고는 전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중부 집단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3개 전선군을 상대하고 있었는데[8] 쿠르스크 전투 이후 전력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남부집단군으로 이동했는데도 불구하고 담당 구역은 오히려 1.5배 가까이 늘어난 상황이었다. 담당 전선은 늘어나는데 전력은 감소하는 상황에서 2군은 지원은 커녕 남부집단군의 제일 좌익을 담당한 4기갑군이 밀려나면서 생긴 공백을 고스란히 담당해야 했기에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으며 이제 동쪽이 아닌 남쪽에서 몰려오는 적을 상대해야했다. 이렇게 2군이 이동하면서 생긴 공백은 다시 9군이 담당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연결 지점이 거대한 프리피야트 습지대란 점으로 소련군 역시도 이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는 불가능했기에 두 집단군이 사실상 단절되었음에도 2군은 적은 전력으로 간신히 이 구역에서 전선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5. 결과
벨로루시 전선군 좌익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 덕분에 61군과 65군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는 43-44 동계 전역에서 중부 전선의 소련군이 어느정도의 성과를 달성한 몇 안 되는 공세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습지대라서 두 집단군 사이의 틈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실패하지만 이 때 확보한 교두보들이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보브루이스크 방면 공세에 큰 도움이 되어 9군을 괴멸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벨로루시 전선군은 전선군 사령부가 감당하기엔 보유 전력이 너무 많고 담당 전선이 너무 길어[9] 1,2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분할되었다. 전선군 우익과 중앙부분은 벨로루시 전선군에 그대로 남아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되었고 좌익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우익 일부를 받아 43년 11월에 해체된 북서전선군 사령부 휘하로 편성되어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이 되었다.
[1]
진격 과정에서 보이는 독일군의 반격은 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 시작 약 2주 전인 1943년 12월에 있었던 니콜라우스 작전이다.
[2]
나머지는 로가체프-즐로빈 공세
[3]
1월 1일 기준, 야전군 순서는 북쪽부터 남쪽으로
[4]
군단 순서는 북쪽부터 남쪽으로
[5]
1월 30일에 상급대장으로 진급
[6]
126대의 전차 및 자주포 보유
[7]
전선이 남북이 아닌 동서가 되면서 지도상으로는 2군의 좌측에 위치하게 된다.
[8]
제1 발트, 서부, 벨로루시 전선군
[9]
애초에 벨로루시 전선군 자체가 브랸스크 전선군과 중부 전선군을 합쳐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