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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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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관련 연구3. 계통
3.1. 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의 계통 문제3.2. 현대 한국어와의 관계3.3. 일본어와의 관계3.4. 기타 언어들과의 관계
4. 고구려어 어휘
4.1. 임병준의 고구려말 어휘 일람(2000)4.2. 그 외 고구려어 어휘 모음
5. 외부 링크

1. 개요

고구려어(高句麗語)는 한반도 중부와 북부, 만주 남부 일대를 거점으로 했던 고대 국가 고구려에서 쓰였던 언어를 일컫는다.

2. 관련 연구

고구려의 정체성을 다룰 때 자주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옛 한국어 자체가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언어 자료는 많이 빈약하지만, 그나마 신라어 향가나 기타 금석문이라도 좀 남아 있어서 비교적 여러가지를 유추할 수 있는 반면 고구려어는 그 자체로 쓰인 문장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 삼국사기》 지리지 지명과 관련한 자료, 중국 사료, 《 일본서기》에 기록된 인명과 지명 자료가 거의 전부이며, 천여 년이 지난 뒤인 《 세종실록지리지》나 《 택리지》 등에서 지명의 역사를 밝히는 대목을 참고해야 하는데 이것 마저도 빈약한 상황이다.

그래도 일단 광개토대왕과 관련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충주고구려비 등에서 간간이 보이는 이두식 표기를 통해 기본 어순 등은 중국티베트어족이나 퉁구스어족과는 전혀 다르고 한국어를 포함한 한국어족으로 속한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긴 했지만, 그밖에는 단어를 비교하는 정도뿐이라 규명 작업이 가로막히고 있다. 그만큼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언어를 분석하는 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

현대 한국어의 근원이 된 언어가 고구려어인가 신라어인가에 관하여 논쟁이 있다. 국내 국문학계와 사학계에서는 예전부터 신라어가 삼국통일 이후 중세 한국어로 이어져 현재 한국어의 근간이라는 설이 정설이었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도 기본적으로는 이쪽에 무게가 실리는 중이다. # 그러다 최근 들어 크게 두 가지 형태의 반론이 등장하였다. 첫째는 고구려어 계통이 근간이 되었다는 주장이고, 둘째는 애당초부터 고대 삼국의 언어는 그 차이가 적었을 것이므로 어디가 근간인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른바 일축적 주장이다. 신라어 근간설을 비판하는 국내 주류 진영에서는 급진적 입장인 전자보단 신라어 근간설을 완전히 부정하진 않고 유보적으로 보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는 후자에 가깝다.[1] 해외에서는 동아시아 여러 언어들의 연구자로 저명한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 교수 같은 언어학자들은 고구려어(부여어계)를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된 언어로 보기도 한다. 대체로 신라어를 현대 한국어의 근간으로 보는 편이지만 신라는 지방 통제력이 고려 조선 만큼의 중앙집권 국가 수준으로는 도달하지 못했던 탓에 실질적으로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삼국시대 이후인 고려시대로 보는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2][3]

실제로 현대 한국어의 표준어가 된 서울어는 14세기 조선의 한양 천도로 인해 개성어가 그대로 이식된 결과이며, 고려 왕조의 개성어는 애초에 고구려 계승 의지를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던 패서, 즉 오늘날 황해도 평안남도 남부의 고구려 호족들의 언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 부여어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반도 일본어족(Peninsular Japonic)[4]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국내의 국문학계와 사학계에서도 일부 급진적 학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최초 중앙어는 고려가 수도로 정하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5] 중앙어가 지방으로까지 완전히 퍼진 시점은 고려 건국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전히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보다는 신라어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 또한 일각을 차지하고 있다. 위의 가설대로라면 통일신라와 고려 사이의 교체기에 언어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고 봐야 하는데 엄연히 신라 왕실 및 신라계 호족들도 고려 지배층으로 골고루 편입된 데다, 고구려어보다 훨씬 대량으로 자료가 남아있는 향가, 금석문들을 통해 신라어가 고려, 조선의 중세 한국어와 같은 계통임과, 고려시대 향가인 보현십원가 정과정 등 통일신라의 언어 전통이 고려에서도 큰 변화 없이 이어지는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6]

요약하자면 기존까지 국내 학계에서는 ' 신라어 직계설'이 통설이었지만,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구체적인 논증으로 인하여 최근에는 ' 고구려어 직계설' 역시 주목받는 상황이다.

여담으로 고구려의 중심 지역은 지금의 황해도· 평안도, 특히 3경이 있는 재령군이나 평양시가 중시되었다. 다만 탈북민이 평양말, 황해도말이 서울말 같다는 것은 이들이 90%는 성조가 있는 동북 방언권 출신이기에 억양이 부드러운 한반도 서부 말투를 다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 크다. 원래 평양 사투리는 전라북도 전주 정도의 차이가 있고 황해도는 서울말과는 충청도 수준의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된다. 서북 방언 문서 참조. 다만 서북 방언과 경기 방언 사용 지역 사이에는 후술하지만 큰 지리적 장애물이 없어 삼국시대에도 방언연속체적 성격을 띤다는 말은 있다.

그런데 현대 국가적 특성을 고대 국가에 투영한 신라어, 고구려어, 백제어라는 개념이 과연 적절한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여러 사서와 제한적으로 남은 사서와 목간 등을 통해 혹시 잔존했을지 모르는 반도 일본어를 제한 삼국의 언어가 매우 동질적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또한 삼국시대 내내 수시로 발생하던 국경 변화에 맞추어 그 지역의 언어가 격변했을리도 만무하기에 삼국의 언어를 삼분법적으로 나누기는 다소 어렵다. 어쩌면 삼국의 언어라는 분절적인 용례보다는 윗 문단에서 짧게 언급한  방언연속체가 삼국시대의 언어상을 설명하는데 더욱 적합할 지 모른다.

3. 계통

3.1. 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의 계통 문제

중국 사서에서 일관되게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의 언어가 비슷하고 말갈, 읍루 등의 언어와는 뚜렷하게 다르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만주어 등이 포함된 퉁구스어족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拜曳一脚, 行步皆走.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한 쪽 다리를 끌고, 걸을 때는 모두 뛰어다닌다.
후한서》 〈동이열전〉 中 고구려조
言語·食飮·居處·衣服有似句驪.
(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와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열전〉 中 동옥저조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 동예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 및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열전〉 中 예조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 백제는) 지금의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거의 같은데,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고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은 다르다.
양서》 〈동이열전〉 中 백제조
言語服章略與高麗同
백제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
남사》 <동이열전> 中 백제조

도수희 충남대 교수에 의하면, 고구려 제 3대 왕인 대무신왕 이전까지 고구려 왕족의 국성은 ' 해씨(解氏)'이며, 현대 한국어 순우리말인 ' 해(태양)'의 어원이라고 한다.[7]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해(解)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8] 즉, 백제어와 고구려어는 언어적으로 그 연원이 같다는 것이다.

삼국의 언어가 같은 계통이라는 대표적인 근거로는 각국의 관등 및 인명에서 관찰되는 존칭 접미사의 유사성이 있다. 일례로 고구려의 설지(薛支), 어지지(於只支) 등 인명[9] 막리지(莫離支)[10], 힐지(纈支), 실지(失支), 처려근지(處閭近支) 등 관직명에 나타나는 접미사 지(支: *ke)는 백제 인명 곤지(昆支), 가야 인명 집지(戢支)· 솔지(率支)와 신라·가야의 관직명 간지(干支)/간기(干岐)/한기(旱岐)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고구려의 선도해(先道解), 백제의 막고해(莫古解)· 훈해(訓解)· 막이해(莫爾解)· 고이해(古爾解), 신라의 남해(南解)· 탈해(脫解)· 나해(奈解)· 흘해(訖解)· 온군해(溫君解) 등에 보이는 접미사 해(解: *ke)와도 동일한 어휘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알지(閼智), 세리지(世里智), 모즉지(牟卽智) 등 신라 인명 자료에서 자주 발견되는 접미사 지(知/智: *te)[11]는 원삼국시대 시절 삼한의 지배자 칭호 신지(臣智)[12]까지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으며, 고구려의 옥지(屋智)· 을두지(乙豆智),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귀지(貴智), 가야의 좌지(坐知)· 겸지(鉗知)· 탈지(脫知)·흘건지(訖乾智)· 도설지(導設智)·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13]처럼 타국의 인명에도 사용되었다. 신라의 문득지(汶得至)와 가야의 백구지(百久至)·아수지(阿首至)·이문지(爾汶至)·기전지(旣殿至)·죽문지(竹汶至)에 보이는 접미사 지(至: *te) 역시 같은 단어로 여겨진다.

한편 부(夫)라는 접미사도 삼국의 인명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고구려의 명림답부(明臨答夫)· 상부(相夫)· 구부(丘夫), 백제의 사비복부(四比福夫), 신라의 이사부(異斯夫)· 사부(徙夫)· 거칠부(居柒夫)· 노리부(弩里夫)· 심맥부(深麥夫)가 대표적이다. 이 부(夫)는 벌판을 뜻하는 지명 접미사 부리(夫里)·벌(伐)과 같은 단어를 축약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상부는 삽부루(歃夫婁), 이사부는 이질부례(伊叱夫禮), 거칠부는 구지포례(久遲布禮)로 표기되기도 했으며, 미질부(彌秩夫)처럼 지명에 부(夫) 자가 쓰이기도 했다.
十二年春正月戊子朔 天皇御大極殿受朝賀 渤海郡使新羅學語等同亦在列 但奉翳美人更着袍袴
12년(740) 봄 정월 무자년 초하루, 천황이 대극전(大極殿)에서 신년 축하 조회를 받았다. 발해(渤海)의 사신과 신라학어(新羅學語)[14] 등이 행렬에 함께 서 있었다. 다만 깃일산을 받드는 미인은 다시 상의와 바지를 입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740년 1월 1일 기사
동북아역사재단 소속 사학자 고광의는 일본 사서 《 속일본기》의 위 대목을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한 증거로 보며, 신라학어를 함께 앉힌 이유는 일본 조정과 발해 사신 사이의 통역을 신라학어에게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어 발해어, 신라어는 서로 통한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양서(梁書) 등에는 고구려어와 백제어가 서로 통한다고 기록되었고[15], 또한 역시 양서에서 신라에 대해 설명할 때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16]라고 한 데에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과는 같은 언어를 쓰고, 따라서 고구려와도 소통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 다만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의 언어가 유사하다고 결론짓기에는 표상적 서술 외에 정확하게 어휘를 나타내는 기록이 너무 적어서,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삼국간의 기록에서 통역에 대한 기록이 일절 나타나지 않는 점과 일본측의 기록에서 통역이 필요한 한반도의 언어를 일괄적으로 한어(韓語)라고 지칭하는 등, 정황을 암시하는 내용은 있다.

한편 백제어가 정말로 이중 언어 체계였을 가능성은 현재 매우 낮아지고 있다. '백제 지배층은 예맥계고 마한계는 예맥계가 아니다'라는 이상한 학설은 아예 예전부터 없었고, 최근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도 전면 부정되고 있기 때문. 애초에 한성백제 지배층 자체가 고구려인들과 침미다례의 주축인 서해안 토돈묘제인들로 이루어진 이상 백제 지배층의 언어가 고구려인들 및 침미다례인들과 달랐을 개연성은 0으로 수렴한다.

한편 소위 마한인들 같은 경우 경기 충청 전라 내륙부가 마한 주류인데 이들이야 말로 고조선에서 내려온 부류들이므로 그야말로 예맥계 언어를 썼을 것이고, 사로국은 적어도 3세기까지는 전원이 고조선에서 내려온 부류들이므로 역시 백제어 신라어가 통하지 않았을 개연성 또한 매우 크게 낮아지게 된다. 우석대 역사학과 조법종 교수의 ' 광개토대왕비 비문' 연구에 의하면 해당 기록에서 백제 지역의 한(韓)인과 예맥인들이 둘 다 고구려 언어가 통한다는 기록(정확히는 백제 지역의 '인'이 '고구려인'과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서술된 내용이 있다.)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17][18]

현재 대한민국 북한 학계에서는 대체로 현대 한국어의 조상 언어, 혹은 한국어의 생성에 강하게 영향을 준 언어라고 본다. 반면 일본 중국 측 연구자들은 퉁구스어족설을 주장하는 일이 많은데, 이러한 까닭은 순수하게 학문적이라기 보다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소수지만 한국 학자들 중에서도 남북 언어 이원설을 주장하는 학자[19]도 있다. 반면 북한 학계에서는 단일언어설을 주장하며 이를 강하게 비난하는 편이다.

이는 고구려의 시초라 볼 수 있는 주몽이 부여계통이었는데, 부여의 건국설화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부여 또한 북부 지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이 세운 나라로 여겨지고 있기에 부여 - 고구려 - 백제 - 왜(일본)으로 이어지는, 같은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 여기서 갑자기 일본이 들어가는 이유는 일본의 유물들의 양식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기, 즉 조몬 문화에서 야요이 문화로 넘어가는 시기가 부여가 멸망한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으로, 야마토 왕권의 시초가 부여 계통의 기마 민족이 나라를 잃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다 일본 열도에 닿아 세운 나라라는 주장의 근거로 쓰인다.[20] 그리고 또한 앞의 학설이 아니더라도 백제, 가야가 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야요이 문화권이 사실상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문화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기 때문이다.

한편, 현대에 비해 사료와 제례 의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었던 조선 초 세종 재위 15년(1433년) 기록에는 고대 한국의 삼국시대 언어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구절이 보인다.
세종 61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9월 12일(신묘)
예조에서 민속 노래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의 마련이 없음이 마땅치 않다고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악(聲樂)의 이치는 시대 정치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관습도감(慣習都監)의 향악(鄕樂) 50여 노래는 모두 신라·백제·고구려 때의 민간 속어[俚語]로서 오히려 그 당시의 정치의 잘잘못을 상상해 볼 수 있어서, 족히 권장할 것과 경계할 것이 되옵는데, 본조가 개국한 이래로 예악이 크게 시행되어 조정과 종묘에 아악(雅樂)과 송(頌)의 음악이 이미 갖추어졌사오나, 오직 민속 노래들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마련이 없사오니 실로 마땅하지 못하옵니다. 이제부터 고대의 노래 채집하는 법[採詩之法]에 의거하여, 각도와 각 고을에 명하여 노래로 된 악장이나 속어임을 막론하고 오륜(五倫)의 정칙에 합당하여 족히 권면할 만한 것과, 또는 간혹 짝 없는 사내나 한 많은 여자의 노래로서 정칙에 벗어난 것까지라도 모두 샅샅이 찾아 내어서 매년 세말에 채택(採擇)하여 올려보내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관습도감'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1475년 악학도감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존재한 음악의 실기를 담당하던 부서이다. '속어'는 말 그대로 일반사람들이 쓰는 속된 말을 뜻하고, '향악'의 원래 뜻은 "당악이 들어오기 이전 삼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음악을 말하며 대개 한국 고유의 음악"을 뜻하므로, 당시 즉 15세기 중반의 공식관청에 신라 통일 이전 삼국의 언어(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가 보존되고 있었음을 명확히 알려주는 구절임이 분명하다. 또한 15세기의 조선 학자들이 삼국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말인즉 삼국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으니 조선의 학자들이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를 같은 계통의 언어로 파악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당시에 전대되던 50여 곡 이외에 15세기에 전국에 존재하던 삼국의 노래를 포함하는 속요를 채집하는 방안을 내었고, 세종이 그대로 시행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이 50여 곡 외에 더 많은 자료를 채집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저 당시 '관습도감'에 존재하던 '향악 50여 곡'만 찾을 수 있어도 삼국의 언어(그것도 일반어)에 대한 작은 혹은 큰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어, 백제어의 계통 논란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료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어쩌면 삼국 간 언어 차이보다는 고구려 내의 언어 차가 더 컸을 수도 있다. 고구려 자체가 현대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포괄하는 상당히 넓은 국가였던만큼 고구려어에도 다양한 사투리가 있었을것이다. 또한 다양한 북방민족들을 직, 간접적으로 통치하였고, 중원과 서역으로부터 이민유입도 있었기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고구려인 외에도 다양한 종족들이 고구려 사회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에 따라 중고한어와 그 방언들, 튀르크어족 계통의 언어, 소그드어, 토하라어, 거란어, 퉁구스어족 계통의 언어들, 북시베리아어 계통의 언어 등 수십여개의 언어들이 같이 쓰였을것이다. 또한, 교통, 통신이 열악했던 당시 특성 상 지금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또 당나라 역사가 안사고는 삼한을 고구려 맥족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北貊燕人致梟騎助漢
북맥과 연인이 기병으로 한나라를 돕다.

주석하길

東萊大事記曰 顔師古曰 貉在東北方 三韓之屬 皆貉類也 回曰 燕人臧荼之人也 韓信説下之者 燕與遼東接 遼東與三韓接 是時 三韓未有髙麗之名 其箕子朝鮮之國歟 亦秦滅燕 王賁得燕王喜 遼東而有遼東遼西郡 鄰於貉者歟 中國騎兵少灌嬰追項羽五千騎耳 項羽不得 此梟騎之助 而漢得之其亦㣲盧彭濮之類歟

동래대사기에서 안사고(당나라역사가)가 이르길 맥은 동북방에 있는데 삼한의 무리들은 모두 맥인(예맥)들이다. 연인은 "장차"의 사람으로 한신이 그것을 말한 것인데 연과 요동이 접하고 요동과 삼한이 접할때 이때(항우와 유방이 싸울 때) 삼한에는 고려의 이름이 아직 없었다. 그때는 기자조선의 나라였다. 또한 진나라가 멸하여 연왕이 땅을 크게 얻으니 연왕이 기뻐했던 때다. 요동과 요동요서군은 맥과 인접하였도다. 중앙(중국)기병이 적게 남아 항우의 오천 기를 느리게 쫒았으나 항우는 그 기병의 도움을 얻지못해 한나라가 오히려 그것(기병)을 얻으니 그것 역시 㣲盧彭濮의 종류이다.

여기서 알수있는 당나라인 안사고는 당나라때 三韓은 모두 맥류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말하며 한나라 때 아직 삼한중에서 고구려의 이름이 없었을 때라고 발언하고 있다.

발해사 전문가인 경성대학교 한규철 교수는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 말갈족들은 이민족이 아니라 모두 고구려의 지방민들을 가리키는 멸칭이라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사서에서 기록한 '고구려어'는 수도인 평양성과 그 부근에서 사용한 고구려의 '서울말'이고 나머지 방언들은 '말갈어'로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말갈어는 이후 여진어로, 만주어로 변모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삼국 간 언어보다는 오히려 고구려 내에서 방언 차이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3.2. 현대 한국어와의 관계

부여어족을 신라어와 분리하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학계, 특히 북한 학계에서는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로 보거나, 최소한 고구려어가 현대 한국어에 영향을 끼친 언어로 본다. 당장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어 포함 부여 계통의 언어들이 말갈 계통의 퉁구스어족과는 구분된다고 했고,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서로 통한다고까지 설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 부여계 언어가 과연 신라어와도 같은 계통의 언어인가에 관한 문제는 계속 추측밖에 나올 수 없다. 남아 있는 삼국시대 언어 자료가 너무 없다. 고구려어 어휘 약간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고구려어의 거의 전부. 수사라고 알려진 것들도 확실하진 않고 그저 그러리라는 추정일 뿐이다. 이렇게 자료가 없으니 다른 언어와 제대로 비교해볼 수가 없다.

그렇긴 해도 기존의 금석문이나 이후로 발굴되는 목간들을 통해 의미 있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일단 광개토대왕릉비 같은 금석문은 변체한문으로 적혀 확실히 한국어와 어순 구조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백제어 수사가 적혔는데, 이들의 한자음 재구가 일본어 수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신라어 및 현대 한국어와 비슷해서 백제어와 같았다는 고구려어가 신라어와도 같은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수사뿐만 아니라 왕을 의미하는 어휘에서도 부여어족과 한(韓)어가 비슷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한자 鞬吉支/於羅瑕 居西干
발음 건길지 / 어라하 거서간
왕(王) 가이 긔 / 가
존칭 접미사 支(ki)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은 여러가지 연구를 통해 고구려의 관직명, 지명 등에서 한국어와 연관된 단어들이 보이며[21] 고대 한국어는 만주 지역의 민족들이 쓰던 언어가 점차 한반도로 남하하여 형성된 언어라는 가설을 내세웠다. '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그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들이 일본어와 유사한 면이 보인 점에서 원래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계 언어 사용자들이 있었는데, 점차 고구려어가 남하하여 퍼지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일본어를 밀어내고 한국어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원래 제주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탐라 일본어인 타(田)+무라(村) 혹은 타미(民)+무라(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어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건 오히려 초기 신라어이며 이마저도 삼국시대 중후기를 거치며 삼국의 언어 모두가 유사한 모습으로 수렴하였다고 한다. 탐라라는 국명은 신라가 하사한 것으로, 본래 '탁라'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하지만 탐라국은 신라에 입조하기 전부터 이미 탐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백제 문주왕 2년(476년)이다. 탐라라는 이름 자체의 기원은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특히 보빈은 당대 실제로 사용되었던 고구려어를 더 정확하게 실증하기 위해 고구려어와 긴밀했던 말갈어- 여진어- 만주어(이하 만주어 라인)를 비롯한 퉁구스어족의 각종 언어들[22][23] 및 당대 중국어 등에 남은 고구려어의 흔적 등을 심도있게 연구하였는데[24][25], 그의 가설에 따르면 만주어 라인은 퉁구스 제어와 같은 계통이면서 고구려어의 영향도 짙게 받았으므로 퉁구스 제어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만주어 라인에서만 발견되는 단어를 비교분석하면 고구려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주어 라인에서는 퉁구스 제어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면서 한국어의 영향으로 보이는 각종 언어적 특징이 다수 발견되었으므로 고구려어는 한국어와 관계가 긴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26] 따라서 그는 고구려어, 일본어 동계 어족 설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며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들이 있다. 하지만 보빈의 전공과 연구 실적상 벡위드의 주장보다 훨씬 공신력이 있기 때문에 결국 벡위드도 보빈의 연구 결과를 일부 수용해 삼국시대 전기는 몰라도 후기에는 삼국의 언어가 서로 유사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27]

보빈의 가설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에 일본계 고대 종족이 일부 존재했다. 김부식(고려시대)이 쓴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를 비교하여 신라어가 일본의 아스카~나라 시대 6모음체계와 같다고 보고, 고대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야요이인의 일본열도 이주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한다. 참고로 일본의 주류학계에서도 야요이인들이 대륙에서 한반도 전체를 거쳐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 남부만 거쳐 넘어갔는지[유력]에 대한 논쟁만 있을 뿐, 적어도 한반도 남부를 거쳐갔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대규모 인구가 기원전 수준의 항해술로 남중국에서 동중국해를 거쳐서 일본 열도로 갔다고 말하기는 억지고[29] 소규모의 인구가 한반도 남부에서 벼농사를 통해 숫자를 불려서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추론이 더 설득력 있다. 중국 기록에도 변한은 왜와 아예 붙어있다고 했다.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어의 고유어와 일본어의 고유어 모두 서로의 고대언어에서 차용한 것들이 있다. 한국어 내 일본어족 귀화어로는 '섬', '바다', '쌀' 등이 있다. 특히 양국 고유어 중에서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p-' 계열로 나타나면서 고대 일본어에서 'w-' 계열로 나타나는 것들은 거의 다 일본어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처럼 한국어 내의 일본계 귀화어의 수는 많지 않고, 반대로 중부~서부 일본어(특히 규슈 일대)에 들어간 한국계 귀화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다. 이는 고대 한반도에서 세형 동검 등의 문물과 기마술을 바탕으로 한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남부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힘에서 압도해 쫓아내거나 흡수하거나 지배했기 때문으로, 대개 지배-피지배 관계에서는 지배층의 언어가 피지배층의 언어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가야 이진아시왕 등 한반도 삼국 시대의 주요 지배층의 이름들은 실제로 고대 일본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이름들인 바, 한국어족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고 한다.[30] 얼핏 한반도 남부에 일본어족 화자들이 살았다는 가설을 보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떠올리기 쉬우나, 정작 보빈의 주장 및 역사적 연도를 따져 보면 임나일본부설보다 몇백 년 이상 앞서며, 그마저도 한국어족 화자들이 일본어족 화자들을 압도한 정황들만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는 백만 광년쯤 멀어진다. 즉, 행여나 보빈의 주장을 어설프게 이용하며 임나일본부설을 들이미는 일빠 넷우익이 있다면 친히 보빈의 주장을 인용해서 역관광시킬 수 있다.

근대에 와서 명확하게 민족이 형성되기 전에는 여러 종족이 거부감 없이 뒤섞여 사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흔하게 있던 일이다. 특히 삼한과 일본열도 사이에는 곡옥, 청동거울, 세형동검, 고인돌 등 고고학적 교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애초에 빙하기 이후, 항해기술이 발달하기 전인 고대시대에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대규모로 건너가기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은 연안항해인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한반도를 거쳐갈 수밖에 없다.

여러 국가 형성 초기단계의 제민족 이동과정에서 (민족적인 의미의 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고대 종족이 일부 한반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반대로 (민족적 의미의 한국인이 아닌) 한국계 고대 종족 또한 충분히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살았을 수 있다.[31]

언어학은 아니지만 형질인류학을 통한 분석으로는 중국 학회의 부여인들의 유골에 대한 분석이 있다. 모용선비의 침략 때 부여인들이 대규모로 포로로 끌려가서(무려 1만여 명)[32] 선비족 땅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위의 링크는 바로 그 부여인들의 유골에 대한 중국 학회의 연구 성과에 대한 게시물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유골에서 추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자료를 모아서 통계분석하면 부여인들의 인골은 현대 한국인들과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비족, 거란족과 같은 몽골계 종족의 인골과 여진족, 만주족과 같은 퉁구스계 종족의 인골의 자료는 여타 종족들의 인골의 자료와 비교하면 충분히 구별할 만큼 편차가 있다. 중국 학계의 형질인류학은 오랜 연구로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상당히 높다. 다만 형질인류학적 연구는 표본이 부족하여 한계가 있다.[33]

3.3. 일본어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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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어와 일본어와의 관계성에 관한 연구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시기에 시작되어 신무라 이즈루(新村出)가 고구려어의 지명에 관한 어휘와 일본어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했다고 처음 주장하였으며, 오늘날에는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보빈 등의 학자로 인해 연구되고 있다. 반도 일본어설 문서 참고. 다만 반도 일본어설은 고구려어와 일본어족의 계통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또한 2024년 현재 주류 언어학계의 입장은 일본어와 고구려어는 친연 관계가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3.4. 기타 언어들과의 관계

고구려어가 기층언어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언어들로 몽골어족의 일파인 거란어 및 그 후손격으로 추정되는 다우르어, 퉁구스어족 여진어 및 그 후손격 언어인 만주어가 있다. 중국티베트어족 라후어도 여기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라후어의 경우에는 앞서 말한 다른 언어들과 달리, 학계에서도 고구려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낮게 보는 편이고, 주로 라후족이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사이비 역사학을 믿는 일부 사람들만이 해당 가설을 지지한다.

주류 언어학계는 이들 중에서 거란어 선비어, 말갈어가 고구려어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리라고 보고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선비어 어휘에 한국어와 관련된 어휘들이 많이 보이는 점에 착안하여, 선비족과 접촉한 한국계 왕조가 고구려 부여 밖에 없다는 점을 근거로, 이 어휘들이 고구려어와 부여어에서 차용한 어휘들이라고 보았다. 또 거란족은 민족 전체가 고구려에게 완전히 복속한 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고구려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리라고 보았다.

4. 고구려어 어휘

4.1. 임병준의 고구려말 어휘 일람(2000)

표기 발음 백제·신라어 고려어 중세국어 현대국어
tara 山, 高 珍阿, 梁, 等良 달-(附), ᄯᅡㅎ(地) 양달, 다락
kuru 忽, 屈, 骨 ○○○ 골ㅎ(洞, 州) 골, 고을
加尸 kara ○○○ 把敢大 갈-(耕), 가래 갈-, 가래
加支 kati 菁→茄 ○○○ ○○○ 가디(茄) 가지
押, 岬 kusi 嶽, 串 菅, 古尸, 岬, 串 古尸 곶(串), 골(菅) 곶, 봉곳
加火 kapɐrɐ 中(←唐) 嘉俳 戞噴 가ᄫᆞᆫ(中) 가운데
加兮阿 kakia ○○○ ○○○ (닛-(連)) (잇-)
甘彌 kamamɐi ○○○ ○○○ 거믄 매 검은 매
甲, 甲比 kapa ○○○ ○○○ 구무 구멍
皆(次) kəsi 居西, 居瑟, 吉支 ○○○ 긔자(王) ○○○
pa(ki) ○○○ 鋪- 보-(見) 보-
居尸 kasi ≠心音 가ᄉᆞᆷ 가슴
𢈴 kaŋ 𢈴 ○○○ ○○○ ○○○ 광(倉庫)
呑, 旦 tɐrɐ ○○○ ○○○ ○○○ ○○○
木根, 斬 pərəki ○○○ ○○○ 불휘(根) 뿌리
木根, 斬 pərəki ○○○ ○○○ 버히-(斬) 베-
古斯 kusi(ri) ○○○ 區戌 구슬(玉) 구슬
馬, 勿, 買 mərə/mɐrɐ/mɐi 水, 川 勿, 買 沒, 悶 믈(水)
骨尸 kurusi ○○○ ○○○ 곯-(膿) 곯-, 곪-
內, 奴, 惱 na/nu 奈羅, 弩里 ○○○ 나라(國), 누리(世) 나라, 누리
骨衣 kutə(rə) 居柒 ○○○ 거츨-(荒) 거칠-
功木 kumuku 固麻, 熊只, 甘蓋 ○○○ 고마(熊), 곰
滅烏 mɐraka ○○○ ○○○ 야지(駒) 망아지
aka 幼, 少 ○○○ ○○○ -아지 -아지
mɐrɐ ○○○ ᄆᆞᆯ(馬)
屈火 kupəre 屈阿火, 求佛 ○○○ 굽-(曲) 굽-
別, 平吏 pɐrɐ 平原 夫里, 火, 伐 ○○○ 벌(野) 벌, 벌판
nɐrɐsi ○○○ ○○○ ○○○ 나란히
今勿 kəmərə 今勿 軻門 검-(黑) 검-
乃勿 namərə ○○○ 那勿 납(鉛)
內米 numərə ○○○ ○○○ ○○○ ○○○
taka ○○○ 둑(堤), 언턱 둑, 언덕
豉鹽 sirama ○○○ ○○○ ○○○ 시리-
買尸 mɐiri ○○○ ○○○ 마ᄂᆞᆯ(蒜) 마늘
巴衣, 波兮 pakərə/paki ≠岩乎 ○○○ 바회(巖) 바위
斤尸 kərə ○○○ 乞, 根 글(文)
伐力 pɐrəkə ○○○ 파라하-(綠), 프르- 파랗-, 푸르-
夫斯, 扶蘇 pasi/pasu ○○○ 봇(樺)
於斯 nɐrɐsi ○○○ ○○○ ᄂᆞᆯㅎ(斤, 刃) 날, 칼날
nɐrɐ 위치자리토씨 ○○○ ○○○ 날/늘
沙伏, 沙非 sapə(rəkə) 所比 質背 싯븕-(赤), 새배(曉) 시뻘겋-, 새벽
沙熱 sanara ○○○ ○○○ 서늘-(凉) 서늘하-
i 맺음법씨끝 ≠是 ≠刂 -이 -이
密(三) miri 龍(←玄) 密, 推, 彌知, 三 米立 미르(龍) 미르(龍)
suru ○○○ 車衣 술위(車) 수레
sunərə ○○○ ○○○ 수리(端午) 수릿날
首泥, 述尒 sunərə ○○○ ○○○ 수늙(嶺) ○○○
¿安市, 安十 arasə ○○○ 安良, 阿乙 알ㅎ(丸, 卵)
鳥斯含 tusikəmə ○○○ 吐吉 톳기(兎) 토끼
於支 nɐrɐki ○○○ ○○○ 날개(翼) 날개
淵, 於乙 əri ○○○ 烏沒, 五悶 여흘, 우믈(井) 여울, 우물
肖巴 supa 酒(←豊) 述, 舒發, 舒弗 酥孛, 數本 수울(酒)
¡波旦, 波豊 patɐrɐ/patərə 波珍 把剌 바랄, 바다(海) 바다
於斯 əsi ○○○ ○○○ 엇-(橫) 엇-
金, 豉鹽 siru ○○○ ○○○ 쉬-(休) 쉬-
釗, 斯由 siru 金, 鐵 舍輪, 省良, 實於 歲, 遂 쇠(鐵) 쇠, 시루(熟鐵)

고구려의 언어에 대하여 (임병준)

위 표에 기재된 고구려어 어휘들은 《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구려 지명 자료에서 비롯한 것인데, 그 가운데 장수왕의 남하 정책 시기에 이르러서야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한반도 중남부 일대의 지명은 진정한 '고구려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실제로는 백제어, 신라어, 가야어 등 현지 거주민들의 언어가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논지다. 때문에 알렉산더 보빈을 비롯한 언어학계 일각에서는 이들 지명을 " pseudo-Goguryeo(가짜 고구려어)"라 일컫기도 한다.

4.2. 그 외 고구려어 어휘 모음

일본어 위키백과는 일본인들이 만선사관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어를 만주의 언어와 엮는 글이 올라온 경우가 많고, 중국어 위키백과는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에 입각한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다만 특이한 점으로는 여러 언어들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튀르크어, 몽골어, 상고 일본어, 중세 일본어, 현대 일본어, 백제어, 신라어, 중세 한국어, 현대 한국어, 만주어, 퉁구스어, 여진어, 어웡키어(에벤키어) 등이 올라와 있다.

5. 외부 링크


[1] 한국어의 계통과 형성에 관한 서술 내용의 통시적 검토 : 중등학교 '국어', '문법' 교과서를 중심으로, 2003. 청람어문교육 [2]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고려 조선 수준으로 이르지 못하였음은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만약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지방의 구 고구려, 백제권 지역들의 언어와 정체성까지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고려 후백제가 탄생한 후삼국시대는 아예 개막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신라의 중앙어인 경주쪽 언어가 다른 지방들의 언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경주만 벗어나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기록만이 확인 될 뿐이다. 심지어 그 고려 조차도 초기에는 주현에서나 겨우 현지 호족세력을 통제할 관원들을 보내는 수준이었다. [3] 하지만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조선만큼은 아니라도 고려 초중기보다는 짜임새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단순히 뒷 시대라고 더 중앙집권일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가령 삼국사기 직관지 외관조에는 통일신라가 전국 주군현에 파견한 관리 숫자가 하나하나 적혀 있는데, 지방에 파견한 지방관 숫자는 고려 대부분 기간보다 오히려 통일신라가 더 많았다. 통일신라나 조선이 모든 지방 행정단위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과 달리 고려는 고려 말 이전까지는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현지 지방세력이 자치하는 속현이 많았기도 하다.(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2002, p. 83) 즉 후삼국시대를 태조 왕건이 지방 호족의 대표로서 지방 호족 간 연합체를 꾸려서 타개한 탓에 고려 초의 지방 장악력은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서도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을 따른다 해도 로마사 일본사도 그렇듯, 역사라는 것이 시대가 흐를수록 중앙집권이 항상 꾸준히 강화되는 것만은 아니므로 특이한 일은 아니다. [4] 반도 일본어설 참고 [5] "중부방언은 기원적으로 고려가 왕도(王都)를 개성으로 정하면서 형성된 중심으로 하여 중앙어(中央語)에 소급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앙어는 조선이 왕도를 개성과 동일한 방언권에 있는 현 서울로 옮김으로써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중앙어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서울의 말은 곧 표준어의 중추를 이루므로 중부방언은 말을 바꾸면 표준어의 특징을 다른 방법보다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방언이라 할 수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6] 애초에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예맥계 나라인 고조선, 부여에서 나온 나라들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말이 통하고 백제와 신라가 말이 통했다는 기록도 있는 데다 현대 언어학 기준으로도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는 모두 한국어족으로 포함되는 언어들이니 서로가 비슷한 고대 한국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고, 그래서 통일신라의 언어 전통이 고려에서도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다. [7] 혹자는 일본에서 날 일(日)을 '히'로 훈독하는 것과 연관짓기도 하지만, 고대 일본어에서 ‘해’를 뜻하는 ひ는 순음 퇴화 이전인 pi(비)로 읽었기에 일본어와는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 [8]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귀족 세력으로 편입된 가문이다. [9]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가 존칭 접미사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10]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라고도 하는데,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라는 관직이 있는 점을 고려하면 막하라지(莫何羅支)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1] 바로 위의 지(支: *ke)와 현대 한국 한자음이 같아서 혼동하기 쉬우나, 삼국시대 당시 한자음으로는 명확히 구별되었다. [12] 여기서 臣의 원삼국시대 당시 음가는 /*gin/으로, 백제의 왕호 ' 건길지' 및 신라의 왕성 명칭 '건모라'의 '건(健)'과 마찬가지로 존칭 접두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신분고국, 신소도국, 신운신국 등 세력이 컸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 소국들의 명칭에서도 발견된다. [13] 여기서 질지(叱智)는 신라 인명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와 서부질지(西夫叱智)에도 보이는데, 속격 조사 叱(*si)와 존칭 접미사 知/智(*te)가 결합한 형태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때에도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다. # [14]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신라에서 파견된 유학생을 뜻한다. [15]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 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16] 고구려와 소통하기 위해 백제 사람이 필요했다는게 아니라, 중국과 소통하기 위해 백제 사람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신라어 항목 참고. [17] 조법종, 2005, 「고구려 광개토왕 수묘제 개편 검토」,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Vol.6,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해당 논문 (기관회원에 한하여 무료) [18] 다음의 동영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19] 다만 남북언어 이원설 입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퉁구스어족설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현대 표준한국어와 제주어 수준의 차이였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한마디로 어족이 같아서 계통적으로는 가깝지만 서로 잘 통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라는 얘기다. [20]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간의 차이와 달리 왜(일본)어는 이 언어들보다 차이가 더 크다. [21]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왕비를 가리키던 어륙 및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어라하는 동일 계통의 단어이다. 일어서다는 한국어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2] 말갈족-여진족-만주족 라인을 비롯해 더 북쪽에서 쓰이던 퉁구스 계통 여러 종족이 사용한 언어가 포함된 어족. 위 라인에 대해 첨언하자면 보통 말갈어→여진어→만주어 순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본다. [23]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보빈의 주장은 환빠들이 " 고구려가 우리 역사니, 거란이나, 말갈족, 만주족 등도 전부 우리 민족이다!" 우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빈의 가설은 고구려어와 말갈어, 여진어 등은 잘해야 언어동조대 수준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분명히 한다. 다만, 언어동조대라는 점을 역이용해서 고구려어에서 차용한 듯한 어휘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이를 이용해서 고구려어의 기본적인 형태를 재구성했을 뿐이다. 굳이 근대식으로 비유를 하자면 식민지 주민들의 언어가 식민제국 언어의 영향을 받은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거란어와 만주어가 전자, 고구려어가 후자라고 볼 수 있다. [24] 보빈 교수는 이때 자신이 연구한 언어 중 거란어는 고대 고구려어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거란족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역사적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희와 담판을 벌인 소손녕의 주장이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다 민족은 다르지만 언어,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 해당연구 [25] 그러나 이는 거란측의 주장을 오도한 것으로 거란족 및 그들이 세운 요나라에서는 고구려의 계승을 주장한 적이 일절 없다. 서희와 담판을 벌일 때도 땅의 소유권에 대해 다소 억지를 동원해 논한 것이었지, 민족이나 종족집단 그 자체를 갖고 얘기한 건 아니었다. 사실 그럴 수도 없었던 게 당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라 당시 유명한 민족, 종족집단의 계통이나 기원에 대해 당대의 지식으로나 서적 등을 통한 기록으로나 너무 명백히 알려져 있던 판에 뻔한 거짓말을 해봤자 그저 비웃음을 살 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거란족의 경우 원래 고구려, 돌궐, 수나라/ 당나라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샌드위치 신세의 부족연맹이었는데, 고구려가 거란족 전체를 완전히 복속시킨 건 아니었지만 이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걸로 보인다. [26] 대표적인 예가 만주어로 부처를 가리키는 푸치키(puciki). ~기 혹은 ~지를 통해 무언가를 존칭하는 형태는 고대 한국어에서 흔하게 쓰였는데, 퉁구스 계통 언어에는 이러한 존칭접미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27] 위에도 적시했다시피 벡위드는 자음동화 무시나 무리한 한자음 재구 등을 통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저널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데 벡위드는 중국티베트어족 언어들을 전공으로 공부하다가 중앙아시아 제어로 연구 분야를 확장해나간 경우이고, 보빈은 일본어 전공으로 시작해서 동북아 제어들로 연구를 확장시켜 나간 경우이다. 적어도 일본어에 관련해선 보빈의 연구가 상대적으로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유력] 이쪽이 더 유력한 가설로 취급받고 있다. [29] 삼국시대 초기에도 항해술이 모자라 얕은 황해를 건너가는 것도 힘들었다. 낙랑군이 중국의 선진 문물의 매개지역으로서 삼한에 대해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또한 백제가 황해를 통과하는 직통 항로를 개척한 시기는 고구려한테 털려서 한성과 서해안쪽을 잃어버린 이후이다. 이쯤 되면 삼국시대가 중반기에 접어든 시점이기 때문에 항해술에 발전이 있었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30] 일본어에 비해 한국어가 역사언어학적으로 훨씬 따지기가 어려운데, 가장 큰 이유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언어 조사를 통해서 동질성이 나타나는 어휘들을 추리면 한반도 중심과 일본 열도 중심의 것들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추적해 확인할 수 있는 아이누어, 일본어 계열을 빼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이 한국어 계열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나 중국티베트어족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들 언어들은 한국어족보다도 역사언어학적으로 연구할 건덕지가 풍부해서 반박된다. 즉, 한반도~일본 열도의 옛 고유명사 중에서 일본어족으로로 보기 힘든 정체불명의 것들은 현재 전하지 않는 옛 한국어족 어휘이리라 잠정적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31] 보빈은 가야와 관계가 깊은 한국계 왕조가 일본 열도에 일정 기간 존재했을 것이라 추정했으며 여기에서 섬을 가리키는 일본어인 시마가 유래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32] 당시 의려왕도 자살했고 부여는 사실상 멸망했다고 여길 만큼 크나큰 타격이었다. 동부여가 이때 못 견디고 현 함경북도 지역으로 대피해 떨어져 나간 분파로 추정된다. [33] 한반도 토양은 산성도가 높은 편이라 유골이 부식되기 쉽다. [34] 국제음성기호에서 거센소리는(ㅋ, ㅌ, ㅍ 등)는 kʰ, tʰ, pʰ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