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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10:09:08

고구려 왕릉

1. 개요2. 홀본 도읍기 왕릉3. 국내성 도읍기 왕릉
3.1. 3세기 대의 왕릉
3.1.1. 3세기 후반 이전3.1.2. 3세기 후반
3.2. 4세기 대의 왕릉
3.2.1. 4세기 초반3.2.2. 4세기 전•중반
3.3. 4세기 후반 ~ 5세기 대의 왕릉3.4. 6세기 이후의 왕릉3.5. 소결
4. 평양성 도읍기 왕릉5. 그 외의 고구려 왕릉6. 한국사 다른 왕조의 왕릉7. 같이보기



1. 개요

고구려의 수도였던 졸본성, 국내성, 평양 각지에 소재하는 고구려의 왕릉.

현재까지 무덤 주인이 밝혀진 왕릉은 없다. 추정만 있을 뿐, 명확히 밝혀진 건 단 1개도 존재하지 않으며, 신하나 왕족들까지 범위를 넓혀도 모두루 진(고구려) 2명만 제대로 알려져 있는 상황.

이 외에는 당나라로 끌려가서 생을 마감한 뒤 낙양 북망산에 묻힌 연남생, 연남산과 그 후손들 정도만 구체적으로 어디 묻혔는지 알 수 있는 정도다.[1]

2. 홀본 도읍기 왕릉

역사적으로는 당연히 홀본에도 왕릉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오녀산성 인근에 실물자료로 삼을 이렇다 할 구체적인 무덤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고구려의 왕릉만이 아니라 백제왕릉,[2] 신라왕릉[3] 또한 고고학적으로는 어떠한 고분이라고 특정할 수 없다.[4] 다만 역사적인 기록상으로는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민간전승 등으로 각 국가의 초창기의 왕릉이라 지칭하는 것이 많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3년(서기 167) 가을 9월, 임금이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 지냈다.
겨울 10월,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삼국사기 제16권 고구려본기 제4 신대왕조
특히 신대왕대의 기록에 따르면 시조묘(廟)에 다녀왔다고 하는데, 비록 명확한 무덤은 아닐지라도 졸본 도읍기에 선대 왕들에 관련한 시설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서 졸본기 왕릉이라고 추정하는 고분군은 크게 3곳이다. 이들 모두 오녀산성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들도 백제의 석촌동 3호분이나 신라의 황남대총처럼 무덤의 규모, 부장품의 질과 양 등을 통해 추정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전제적 왕권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왕들도 귀족들의 대표자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무덤이 그렇게까지 특출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명백한 왕릉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상위계층의 고분군 속에 왕의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5] 왕릉이 있다고 추정하는 고분군은 다음과 같다.

망강루 고분군
파일:망강루 4호분 및 6호분 출토 금제 귀걸이.jpg 파일:유수노하심 귀걸이 사본.jpg
▲ 망강루 4호분 도면(왼쪽) 및 망강루 6호분 출토 금제 귀걸이(오른쪽) [출처] ▲ 유수 노하심 출토 금제 귀걸이
망강루 고분군(望江樓 古墳群)은 무덤 총 6기로 이루어졌으며, 구릉의 상부에 위치하여 혼강(渾江)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1970년대에 이미 훼손되어있었으며 2000년대 초 도굴이 발각되자 2004년 랴오닝성고고문물연구소와 본계시립박물관에서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무덤은 불규칙한 타원형이며 6호분(M6)에서는 금제 귀걸이가 출토되어 주목받았다. 이 금제 귀걸이는 현재 부여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지린성 유수현의 노하심(老河深) 고분군 출토품과 동일하여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긴다. 하지만 고분군이 만들어진 시기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로 비정되어 고구려의 졸본 도읍기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시기적인 문제 역시 단편적인 자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추후에 자료가 축적되면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

상고성자 고분군
상고성자 고분군(上古城子 古墳群)은 1960년대 조사에서 무덤 약 200여 기가 존재했으나 1980년대 조사에서는 27기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무덤 주변을 경작하느라 무덤의 상당수가 사라져버린 것이다.[7] 현재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고분군 일대가 정비되었다. 무덤은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력묘자 고분군
고력묘자 고분군(高力墓子 古墳群)은 과거 고려묘자(高麗墓子)로도 불렸던 곳이다. 실제로 고구려가 위치했던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대에는 '고려'라는 이름이 들어간 지명들이 종종 확인된다. 고력묘자 고분군은 무덤 약 200여기 이상이 있는데, 1950년대에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특히 201호분(M201)에서는 금동제품, 은제품이 출토되었고 19호분(M19)에서도 은제품이 출토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환인댐이 건설되어 수몰되었다. 1950년대에 이루어진 조사도 댐 건설에 따른 수몰이 예상되어 일부 무덤들을 발굴조사한 것이다. 현재에는 갈수기에만 무덤 일부가 드러날 뿐이다.

3. 국내성 도읍기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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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1e1f,#fff> 성곽 <colbgcolor=#666> 환런현 <colbgcolor=#fff,#191919><colcolor=#373a3c,#ddd> 오녀산성
지안시 국내성 | 환도산성
왕릉 우산하 고분군 장군총 장군총 1호 배총 | 태왕릉 광개토대왕릉비 | 임강총 | 우산하 992호 | 우산하 2110호
마선구 고분군 천추총 | 서대총 | 마선구 626호 | 마선구 2100호 | 마선구 2378호
산성하 고분군 산성하 전창 36호
칠성산 고분군 칠성산 211호 | 칠성산 871호
귀족묘 및
벽화분
우산하 고분군 우산하 3319호 | 산연화총 | 마조총 | 오회분 1호 | 오회분 2호 | 오회분 3호 | 오회분 4호 | 오회분 5호 | 사회분 1호 | 사회분 2호 | 사회분 3호 | 사회분 4호 | 우산하 2112호 | 사신총 | 각저총 | 무용총
산성하 고분군 절천정총 | 귀갑총 | 형총 | 제총 | 왕자묘
하해방 고분군 환문총 | 모두루
장천 고분군 장천 1호 | 장천 2호 | 장천 4호
* 표시가 있으면 벽화분.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은 왕릉, 귀족묘, 벽화묘 등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고구려왕릉 문서를 참고.
※ 각 고분군 구분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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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지안 고구려 유적 분포도_조무용.jpg 파일:고구려 왕릉 움짤(ezgif.com).gif
통구 고분군에 소재하는 고구려 왕릉과 형성 순서
고구려의 고분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적석총(積石塚) 축조가 본격화되어 가장 많은 적석총이 남은 고분군이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하는 통구 고분군[8]이다. 통구 고분군 개요(영상)

적석총이 많이 남아있는 관계로 적석총 관련 발굴자료가 가장 많이 누적된 유적이며, 왕성(王城)이자 도읍의 배후를 형성한다. 왕릉으로 직접 거론될 각변이 30~40m, 경우에 따라서는 70m에 달하는 통구 고분군 내의 초대형 적석총[9]의 적석총들은 왕릉으로 추정하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량적으로도 만 여기에 달하는 고분군 중에서 10여기 정도 밖에 없으며, 장지(葬地)형 왕호를 갖는 고구려 왕의 기록 또한 국내도읍기 기간 동안 9대 고국천왕부터 19대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 11명이며, 적석총의 자체발전, 출토된 유물의 연대 등에 의지하여 각 왕릉들이 어느 왕의 것인지 일일이 비정되기도 한다.

통구 고분군에 소재하고 있는 왕릉급 적석총들에 대해서는 평양에 소재한 왕릉급 고분들에 비해서 왕릉 비정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편이다. 고분문화의 측면에서 왕릉이라는 자료는 많은 함의를 내포한다. 단순히 역사적 인물의 무덤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일본의 경우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고분시대라고 부른다. 바로 왕릉이라는 정치적 함의의 거대기념물을 세움으로써 나타내고자 한 왕권의 위상, 고분군 형성과정에서 왕릉의 함의 등이 왕권의 변화과정이나 당시의 사회제도 등의 일면을 드러내므로, 왕릉의 묘주(墓主)를 특정하지 못하더라도 왕릉 그 자체의 변천만으로도 역사·고고학적인 의미가 크다.

다만 개별 왕릉마다의 왕의 특정한 비정이 논자마다의 견해차이가 있다 뿐이지 4~5세기의 고구려 왕들의 무덤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안악 3호분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으로 비정하는 주장이 그렇게 인정되지 않는 편이며 왕릉이라고 한다면 왜 4~5세기의 왕릉 축조의 질서가 형성된 국내지역의 통구 고분군이 아닌 황해도에 만들게되었는지에 대한 특수성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3.1. 3세기 대의 왕릉

3세기의 왕릉급 고구려 적석총
왕릉급 적석총의 등장
산성하 전창 36호 · 마선구 2378호 계장식 적석총
열상배치
석곽
마선구 626호 · 칠성산 871호 계장식 적석총
배타적 공간
석곽

3.1.1. 3세기 후반 이전

파일:마선구 2378 전경.jpg
마선구 2378호분의 전경. 경사면에 축조되어 있고 고분의 높이 자체가 허물어짐을 감안하더라도 높지않다. 정비 당시의 촬영사진.
파일:산성하 전창 36호분 도면.jpg
산성하 전창 36호분 도면
3세기 고구려의 고분문화는 기단이라 말할 만한 시설을 따로 두지 않고, 그야말로 돌무지무덤처럼 만드는 무기단식 적석총과 거기에서 진전된 기단식 적석총, 계장식 적석총 등이 있다.

계장식 적석총은 밀림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담장을 켜켜이 쌓은 형태이다. 이러한 켜켜이 쌓은 담장의 밖에는 담장을 쌓는데 쓴 돌보다는 큰 크기의 판석(板石)을 두었다[10]. 장식 또는 측압을 보완하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계장식으로 축조하는 방법은 넓게가 아니라 높게 쌓기 위함이다. 계장식 적석총 축조 시점에는 석곽(石槨)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무덤의 정상에 위치한다. 무덤의 축조 순서를 고려하면 적석총을 쌓고 난 뒤 무덤 정상에 석곽을 설치하고 시신을 안치한 뒤, 묘 정상부에서 각종 제사의례를 행하면 기타 참석자들은다 못 올라 갈테니깐 밑에서 제사의 현장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즉 적석총의 수직적인 규모 확장은 피장자와 계승자의 위엄을 뽐내는 무대장치로 기능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왕릉의 등장이라고는 하지만 무기단식 적석총이 축조되던 시절부터 무덤이 줄을 지어 형성되는 열상(列像) 배치되는 혈연적, 가족적, 집단적 성격이 강조된 전통에 여전히 얽혀있었다. 왕릉급이라고는 하지만 약간의 입지적 우월성, 규모적 차이가 있었을 뿐 바로 옆에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의 크기만큼이나 큰 고분들이 바로 옆에 같이 축조됨이 특징이다.

위에 서술한 두 적석총은 상대적인 순서상으로 통구 고분군 왕릉들 가운데서 가장 빠른 편이라는 점만이 구체적 근거가 있을 뿐, 상세한 연대의 상한에 대해서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보통은 막연히 3세기 정도로 표현하며, 일부 연구자들은 모든 왕릉급 고분을 1:1로 왕을 정하다보니 위의 두 고분을 2세기까지도 올려보기도 한다. 다만 그 근거는 기와가 한(漢)의 풍격을 띈다(...)라는 다소 막연한 이유가 전부이다.

그 밖에도 같은 시기에 축조되는 비슷한 양상의 대형 적석총은 마선구 2378호분의 근지거리에 위치하는 마선구 707호, 705호 등이 있으며, 통구 고분군과 입지가 같지만 지안시의 조금 북쪽에 호자구에 있는 호자구 1호분 또한 이 시기의 왕릉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모두 축조 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

3.1.2. 3세기 후반

파일:마선구 626 일제강점기 전경.jpg
▲ 1918년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유리 건판사진. 천추총 위에 올라가서 마선구 626호를 비롯한 마선구 고분군 권역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에서 보이듯 중소형의 적석총들은 대부분 배후 산지의 아래인 평지에 열상으로 축조되지만 마선구 626호분은 단독으로 넓은 배타적 공간을 갖는다. 이 시점부터 위의 마선구 2378호와는 달리 비좁은 공간에서 벗어나 왕릉이 축조된다.

이 이후부터는 적석총의 기단의 한 쪽의 길이가 최소 40m가 될 정도로 무덤이 크게 축조되기 시작한다. 특히 적석총 자체를 높게 쌓으면서 앞의 전창 36호나 마선구 2378호분에 비하면 평면규모는 약간 더 커진 셈이지만 높이 때문에 서술할 두 고분이 훨씬 크게 느껴진다.

물론 입지적 여건도 어느 정도 그런 경관에 일조한 인상을 준다. 경관이라는 것에는 사실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다. 보통의 무덤의 크기가 어떤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관광객일지라도 큰 무덤이나 기념물을 보면 그 크기와 규모에 놀라기 마련이다. 앞선 3세기 중반 이전의 빠른 적석총들은 보면 그다지 큰 감흥은 없다. 그러나 칠성산 871호나 마선구 626호는 굉장히 거대하다는 인상을 준다.

무기단식 적석총이 축조되는 무렵부터 고구려의 적석총은 열상(列像)의 배치로 혈연적, 집단적 관계를 표상하여 왔다. 이는 왕릉급 고분이라고 할지라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국내성 천도 이후, 왕권은 귀족의 대표자적 성격에서 점차 전제왕권으로 변화해 가는데, 그에 발맞추어 3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열상배치라는 혈연-집단의 제한이 아니라 단독으로 배치되어 주변을 압도하는 경관을 형성하는 무덤으로 변화한다. 소군집의 대표격의 무덤에서 고분군을 대표하는 무덤 즉 진정한 왕릉으로써의 구성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상술한 경관이라는 측면에 배타적 공간도 어느 정도 해당이 되는데, 멀리서도 이 배타적 공간이 딱 눈에 들어온다. 무덤을 더 크게 보이게 하는 역할도 있었던 듯.

이러한 이유로 앞서 언급한 전창 36호나 마선구 2378호분보다는 늦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칠성산 871호나 마선구 626호분 또한 자체적으로 출토된 유물로 특정한 왕을 뚜렷히 정할만큼 풍부하지 않다. 최근의 연구들은 대부분 4세기 이후의 왕릉들에 대해서 비정을 할 뿐 4세기 이전까지에 축조된 대형 적석총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으로 ○○왕이다! 라고 단언하지 않는다.[11]

3.2. 4세기 대의 왕릉

4세기의 왕릉급 고구려 적석총
계단식 석실 적석총의 등장
임강총 · 우산하 2110호 계단식 적석총
배타적 공간
석곽
칠성산 211호 · 서대총 · 우산하 992호
· 마선구 2100호
계단식 적석총 /
석재대형화
배타적 공간 / 능원 형성
석실

3.2.1. 4세기 초반

파일:임강총 전경.jpg

태왕릉에서 바라 본 임강총의 전경. 뒤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만포시이다. 앞선 계장식 적석총들과 양상은 차이가 없지만 계단식으로 축조되었다고 보고된 바 있다. 그 때문인지 무덤의 높이가 꽤나 높아졌다. 앞의 빨간 지붕은 광개토대왕비의 능각이다.

4세기 전반이 되면서는 계장식 적석총에서 약간 변화한 계단식 적석총으로 왕릉을 축조했다. 임강총의 경우 평면이 말각방형(抹角方形)으로 둥글게 모서리게 처리된 평면 형태인데 계장식 적석총의 성격이 나타나는 것이다. 아마도 적석총을 축조함에 있어 네모난 평면 형태를 추구했다고 추정하지만, 비교적 거대한 석재를 쓰더라도 그렇게 치석(治石)한 정도가 정교하지 않아 둥글게 모서리를 처리한 것 같다.

이뿐만 아니라 계단을 만들때 사용된 석재들의 치석된 정도가 그다지 변화가 없고 작은 석재여서 거의 계장식 적석총과 외관이 같다. 다단의 계단으로 구성되며 얼핏 보기에는 그냥 마냥 돌덩이들만 쌓인 듯한 인상이다.

사실 임강총과 우산하 2110호는 발굴결과에 따라서 계장식으로 밝혀질 가능성도 있다. 다만 임강총은 3세기 말~4세기 초라는 시간적인 근거를 일부 유물에서 찾을 수 있는데다 여기서 나온 차할과 거의 동일한 제품인 듯한 유물이 우산하 2110호에서 확인했기 때문에 이 두 왕릉은 추후에는 바뀔 수도 있지만...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상 발굴이나 그에 준하는 적극적인 조사를 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일단은 4세기대 고구려 왕릉으로 구분해 둔다.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싸웠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8년조
고고학적인 연대와는 그렇게 상관은 없지만 우산하 2110호분과 임강총의 형태적, 시간적 유사성으로 인해서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무덤으로 비정된 경우가 있었다. 위 삼국사기 동천왕 8년조 기록을 바탕으로 연접분인 우산하 2110호분이 산상왕의 무덤, 단독분인 임강총이 고국천왕의 무덤으로 본 사례가 있었다. 분명 왕과 왕비 둘 중 한명이 죽으면 추가장을 하긴 하지만 이렇게 연접분으로 축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산상이라는 명칭 때문에 임강총이 산상왕으로 추정된 경우가 더러 있다.

상술했던 마선구 705, 707호는 위의 두 고분과도 조금은 유사성이 있다.

3.2.2. 4세기 전•중반

파일:우산하 992호 전경.jpg

▲ 우산하 992호의 전경. 고분 양쪽으로 제대(察臺)가 있고 그 주변으로는 일정한 공간 내로는 적석총이 축조되지 않는다.[13]

칠성산 211호, 우산하 992호, 서대총이 축조되는 4세기 전반~중후반 이 무렵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전형적인 적석총의 형태로 자리잡는 시기이다. 석재의 가공도가 정연해지고 적석총의 기단에 대해 더 공을 들이고 대형의 석재로 기단부를 마련하는 것은 , 일반적으로 흙을 쌓아 만드는 봉토분을 생각할때 정지(整地)하는 것, 호석(護石)을 설치하는 것과 사실상 맥락이 같다. 넓고 높게 쌓은 무덤의 하중은 고스란히 중력의 영향으로 인해 가장 아래의 기단으로 전해지게 된다. 이때의 지지력은 마찰력이며 마찰력은 지지면적이 아닌 대상 재료의 무게와 관련이 높다. 이러한 형태의 적석총들은 계단부의 석재들은 대부분 무너지더라도 기단부의 형태는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따로 관리가 안된 적석총일지라도 평면이 사각형의 형태로 잘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소 불분명하긴 하지만 이 시기부터는 묘제가 석곽(石槨)이 아닌 석실 또는 광실로 변화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인 석곽[16]의 경우 무덤을 채우는 석재와 석곽을 구축하는 석재의 차이가 없다. 즉 그냥 돌 무지에서 시신을 안치할 자리를 파낸 것과 같은 양상이다. 그러나 석실(또는 광실)을 축조하는 경우에는 채움석 위로 또 석실을 구축할 석재들을 다시 쌓아야 하므로 채움석에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한다. 뿐만아니라 석실의 바닥면은 포석(布石)[17]하였는데, 좌우지간 석실의 형태는 사라지고 없다고 하더라도 채움석이 석실 자리에 다소 정연해지는 것을 통해서 최소한 기존의 석곽을 사용하던 것에서 변화하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석총의 외관과 묘제의 형태에서 앞서 언급한 적석총과는 차이점을 갖는 증거가 된다.

다만 실물 석실이 없는 관계로 석실의 등장과 전개 과정을 논의함에는 주로 우산하 3319호분이 주요한 논거가 되곤 한다. 그 이전의 적석총에 실물이 있는 석실로는 우산하 2891호, 3105호[18]와 같은 석상(石箱)이라 불리는 부장칸이 점차 이실(耳室)이 딸린 석실로 변화하는 과정의 중간 형태에 해당하는 과도기적 성격의 석실이 있다. 다만 장군총이나 태왕릉, 천추총을 통해서 추정한다면 왕릉급 적석총의 묘제는 다소 형태적 차이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19]

파일:우산하 992호 지도 사본.jpg

▲ 우산하 992호분의 위치. 우산하 992호분과 형태적으로나 시기적으로 유사한 우산하 901호[20]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다면 901호는 열상배치의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이고 992호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992호분의 배타적 공간의 남쪽 끝부터 다시 고분들이 축조되는 것과는 대비를 이룬다.

적석총 자체의 크기는 다소 작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40m 이상의 각 변 길이는 고정적인 요소이다. 무덤의 크기 자체는 앞선 시기에 비해서 작아졌을 지언정 되려 묘역의 크기는 늘어나며, 묘역의 크기 자체가 늘지 않더라도 그 밖의 배타적인 공간 자체가 늘어나기도 한다. 마선구 2100호분을 제외하면 일정한 단독적인 공간에 입지하면서도 그 공간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그에 딸린 배총군으로도 보여지는 고분군들이 축조되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 확인되는 유물은 마선구 2100호분을 제외하면 풍부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기와나 와당류의 유물은 매우 많이 출토되는 편인데 이 단계부터 와당이 주요한 편년의 근거로 활용되곤 한다.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면 복잡하지만 간단하게는 권운문의 와당에서 점차 연화문의 와당으로 변해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와당은 다시 쓸 수 있는 유물로 출토된 고분의 연대를 정확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나마 그러한 문제점을 보완하는 것이 채집된 와당의 비율이다. 칠성산 211호는 와당이 확인되지 않았고, 서대총과 우산하 992호분에서는 권운문 와당이 확인된 바 있다. 마선구 2100호분의 경우에는 권운문와당이 많았지만 일부 연화문 와당도 확인이 되었다.

또 출토되는 유물도 적지만 칠성산 211호와 서대총, 우산하 992호분은 매우 유사성을 많이 띄고 있다. 말의 엉덩이에 달아 장식용으로 쓰였던 보요부 운주(步搖附 雲珠)[21]의 편년에서 4세기 전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선구 2100호분은 보요의 장식이 더욱 화려해져서 십자형(十字形)의 보요부가 붙는데 이러한 보요주가 확인되는 고구려 무덤으로는 태왕릉과 만보정 1078호분이 있다. 이 작은 장식의 마구(馬具)가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말장식품이 고구려 적석총에서 확인될 뿐만 아니라 신라 황남대총 남분의 묘주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여하간 이렇게 얽힌 관계 속에서 십자형의 보요부 운주의 연대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까지도 늘어지기도 하는데, 마선구 2100호분의 경우 규모가 다소 작아서 왕릉으로 보는 논자와 출토유물의 상황[22]으로 왕릉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고, 그렇다손 치더라도 구체적인 왕의 비정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시기의 왕릉급에 준하는 적석총으로는 우산하 901호, 장천 5호가 해당한다.

3.3. 4세기 후반 ~ 5세기 대의 왕릉

4세기 후반 ~ 5세기의 왕릉급 고구려 적석총
왕릉급 계단식 적석총의 완성
천추총 · 태왕릉
장군총
계단식 석실 적석총
완성형의 대형 능원
밀림방지턱 / 호분석
치밀한 석재가공

파일:장군총 전경.jpg

▲ 장군총의 조감도[23]. 능원 자체는 작아졌지만 능원의 구성요소는 완비되었다. 입지 자체에서 규모와는 별개의 우월한 경관을 형성하였다.[24]

5세기 경부터는 축조되는 대부분의 대형 적석총들이 석실을 채용한다. 또 적석총뿐만아니라 석실봉토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 나타나 적석총들과 함께 축조된다. 석실봉토분의 영향 또는 석실 자체의 영향으로 석실의 수직적인 위치가 무덤의 정상부에서 무덤의 내부로 점차 내려오는 것이 특징이다. 석실은 내부에 일정한 공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내부로 들어와버린 적석총의 높이 자체도 비교적 높아지게 된다. 거의 장군총의 비율을 떠올리면 딱 맞다. 왕릉 이야기는 아니지만 장군총과 유사한 형태의 적석총들이 '환도산성과 그 아래의 우산하 고분군'이라는 사진에서 보이는 적석총들이다.

4세기 말부터 5세기의 적석총들은 석재들이 대형화되는 것이 특징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대형의 석재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단부를 조성함에 있어서는 대형화된 석재를 1매 사용하여 기단부를 조성하는 데에 사용되는 석재의 매 수는 줄어든다. 하지만 대형의 석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단의 높이가 평균적으로 1m 가량 또는 그 이상으로 높아지며 계단부에 사용되는 석재들도 비교적 커진다. 석재의 가공도 또한 대부분의 석재에 이루어져 면을 가다듬은 착흔(鑿痕)이 나타난다. 태왕릉과 천추총, 장군총과 같은 왕릉에는 이 착흔 마저도 더 다듬어서 지워버렸다.[25]

또한 고분의 하중으로 인한 측압으로 석재들이 이탈하여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밀림방지턱이 기단의 석재 상면에 나타난다. 아마 적석총의 유지력에 대해서도 건축적인 이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당시에 적석총의 자연 붕괴 등의 현상이 있었던 듯.[26]

특히 거대한 호분석(護墳石)이 둘러쳐지는데, 원래는 앞의 3~4세기의 적석총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마냥 크지 않고 약간의 인력으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을 크기여서 이탈된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이런 대형의 호분석을 둔 것은 왕릉이기 약간의 장엄성을 부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상술한 적석총의 측압 방지와도 충분히 관련이 있는 건축적 요소이다.

대형의 호분석이 새로운 요소라면 기존의 판석 형태의 지대석 또한 이 시기에도 나타나기도 한다. 도굴과 파괴, 자연붕괴 등의 현상 속에서도 몇몇 개가 원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천추총이다. 천추총에는 일부 판석이 원위치 그대로 확인되었는데 이는 마선구 2100호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거의 같은 형태의 적석총인 태왕릉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천추총→태왕릉의 순서를 거론하는 근거로 활용되곤 한다.

입지적으로도 이 세 왕릉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능원의 규모는 고분의 규모만큼이나 넓어졌으며 주요한 교통로 상에서 압도적인 경관을 자랑한다. 지안시를 중심으로 상정되는 주요한 교통로는 지금의 마선향의 북쪽으로 난 대판석령, 소판석령이 있는 방면과 현재 지안-통화 고속도로가 나있는 두 방면이 있다. 대·소판석령 방면은 과거에도 주로 지안으로 들어오는 교통로로써 마선구 고분군이 형성되는 데에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환인 방면에서 지안으로 육로를 통해 올 때 마선구를 지나쳐야하는데 천추총은 마선구에서 국내성 쪽으로 이동할때 무조건 지나쳐야 한다. 장군총과 태왕릉 역시 지안-통화 고속로도를 지나올 때 가장 뚜렷하게[27] 보인다. 꼭 육로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압록강도 과거엔 주요한 교통로 였을 수 있다.[28] 압록강에서 지안을 바라보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 아래에 무수한 무덤들과 그 무덤들 사이로 왕릉들이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앞의 먼저 축조된 적석총들이 묘역, 배타적 공간을 비교적 암묵적으로 활용하였다면 5세기 경부터는 능원을 명시적으로 표시하였다. 능원이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구성요소들을 갖고 있다. 능비(陵碑)를 비롯하여 능원을 표시하는 담장, 능원의 출입구, 추정 제사 시설, 배총, 배수시설, 능원 내의 포석(布石) 등이 그러한 것으로 이 또한 고구려 적석총 및 왕릉의 발전과정 중의 근거 중의 하나이다.

같은 시기의 왕릉급 적석총으로는 산성하 대천 23호, 황니강대묘 등이 있다.

3.3.1. 태왕릉 장군총의 묘주

태왕릉 장군총의 묘주에 대한 논의는 다소 길어질 여지가 있어 따로 서술한다.

태왕릉에서는 마구류들의 일체가 트렌치 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다. 태왕릉의 도굴품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태왕릉의 묘주 비정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에서도 살짝 언급되는 것 처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동일하거나 관련이 높은 유물들이 있어 중요하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신라의 유물들의 편년을 위시한 신라 고고학에 있어서 태왕릉의 묘주가 고국양왕(故國壤王, 384년 ~ 391년)이냐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년 ~ 413년)이냐 장수왕(長壽王, 413년 ~ 491년)이냐에 따라서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도 결부되므로 학계에서 다소 첨예하게 대립했던 바가 있다.

태왕릉의 본문에도 나와있듯이 태왕릉에서는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문이 있는 동탁(銅鐸)이 수습된 바 있다.[29] 이로 인해 호태왕이라는 명문으로 일찍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을 상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태왕이라는 표현은 광개토대왕 뿐만아니라 다른 고구려 왕들을 지칭함에 있어 모종의 존칭의 표현으로써 주로 활용되던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 가카!였다는 것이 확인되어 단순히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태왕릉의 서쪽으로 수백여미터에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어왔는데 광개토왕릉의 훈적이 기록된 훈적비이자 수묘지침이 각자된 수묘비이다. 즉, 태왕릉 아니면 장군총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는 것인데, 이 능비의 방향과 태왕릉과 장군총의 방향이 각각 어디인가를 두고 말이 많았다. 능원이 두 고분 다 확인되었다고는 하지만 출입구가 모두 확인된 것이 아니므로 여러 추정이 입론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왕릉의 조영논리를 벗어나서라도 제단이 있는 방향이 무덤 전체가 지향하는 방향이라는 견해는 거의 완전히 틀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산하 992호처럼 양쪽에 모두 제대가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묘실의 입구 방향이 사실상 무덤이 지향하고자하는 방향으로 보는게 적절할 것 같다. 환도산성 아래의 산성하 고분군의 일군(一群)을 보면 대부분의 묘향의 방향은 거의 대부분 동에서 서를 향하고 있다. 즉, 환도산성의 입구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또 국내성에서 환도산성으로 이동하는 지금의 산성로(山城路) 양옆의 고분들은 대부분 방향이 하천쪽을 향하고 있다. 역시 같은 맥락으로 교통로를 바라보는 셈. 쉽게말하자면 태왕릉이 국내성 방향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태왕릉의 방향은 인근의 우산하 0541호분과 마찬가지로 서쪽의 국내성을 바라보는 것으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물론 장군총도 서쪽의 국내성을 바라보고 있다.

한편 방향의 맥락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를 신도비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방향의 차원이고 거리의 측면에서는 되려 태왕릉이 가까우므로 태왕릉을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말하는 연구도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태왕릉과 장군총의 묘주에 대해서 논의가 많이 이루어졌다. 다만 궁극적 목표는 왕릉의 비정보다는 왕릉의 존재로 인하여 특정한 유물이나 유적, 유구가 해당 왕의 생존기간에 결부되게 되고, 이 논리가 안정적이고 신뢰도가 높다면 유물 및 유적 연구에 있어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따라서 출토유물이 많은 태왕릉은 동북아시아 고고학의 광역 편년에 있어 4~5세기 요동지역과 남한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여러 유적, 고분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대상이 되었던 유물들은 마구류와 와당류가 대표적이며 그 이외의 유물들은 대체로 마구류와 와당류에 귀속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두 유물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요약된 설명을 위해서 주요 근거만 인용했지만 사실은 공반유물과 무덤 자체의 변화, 동아시아 광역편년 체계가 얽힌 문제기 때문에 더 많은 내용과 근거들이 있다. 태왕릉의 묘주, 황남대총 남분의 묘주, 고구려 고고학, 신라 고고학과 관련된 논문과 단행본에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태왕릉만 놓고 보면 양자의 설 모두 각자의 설득력이 있지만 동아시아 고고학 편년은 상당히 여러 곳에서 맞물려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역사고고학의 범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국양왕설은 신라토기의 태왕릉인 "황남대총 남분의 묘주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고국양왕설을 주장한 논지의 연구가 황남대총 남분의 묘주가 내물왕임에 대한 보충근거로써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신라고고학에 있어 연대론은 황남대총 남분의 묘주가 내물왕이 아닌 눌지왕으로 보는 것이 조금 더 보편적이다.[41] 또한 그런 신라와 관련하여 고구려 또한 굵직한 사건들이 있어왔고 유물 상으로도 고구려와의 연관성이 많다. 따라서 신라고고학의 대세론적 경향에 따라서 태왕릉의 묘주 또한 고국양왕이 아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적이다. [42]

이상의 마구류를 중심으로한 고고학적 관점에서는 천추총-태왕릉-장군총의 순서 속에서 태왕릉에서만 마구류들이 비교적 풍부히 나왔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태왕릉의 묘주를 정하고 이를 지지하는 고구려 고고학 전공의 연구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설정하는 견해가 많다.
또 주요한 묘주 비정의 근거로는 와당류의 변천이 있다. 본문에서도 계속 나오지만 권운문 와당에서 연화문 와당으로 발전하는 양상인데, 와당은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모두 다 나왔다. 따라서 천추총과 태왕릉, 장군총 모두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하며 나아가 평양의 석실봉토분에서 확인되는 와당까지도 고려하여 장수왕이 지안에 묻혔는지 평양에 묻혔는지 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와당 하나만으로 이야기하기엔 폐기의 동시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와당의 변화, 묘실의 변화, 역사적 맥락 등을 모두 고려하여야 하며, 꼭 장군총의 묘주 문제만이 아니더라도 서대총, 우산하 992호분[43]을 논할때도 언급한 것과 같이 모두 고려된다. 특히 장군총 이전의 적석총에서는 수량도 적고 미비하지만 유물이 그런데로 있어서 와당이 고작 몇 점안되는 유물의 상관관계만으로 설명할 때의 수량적 부족함을 매워주는 요소로 와당이 반드시 거론되기도 한다.

3.4. 6세기 이후의 왕릉

공식적으로는 6세기 대의 왕릉은 국내성 지역에는 축조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우산하 귀족묘구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구역 일대와 그 인근에 축조되는 사회분과 오회분들이 적석총 단계의 석실봉토분들이 왕릉만큼이나 크다. 다만 이런 고분들이 왕릉은 아니며, 왕족의 일원이나 고위 귀족층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국내성 지역이 평양 천도 이후에도 부도(副都)로 기능하였던 것[44]도 있을 것이며 또 부도로 격하된 만큼 평양과는 달리 엄격한 규제가 없어서일 가능성도 있다.

3.5. 소결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하는 통구 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왕릉에 대하여 그나마 확실한 것은 왕릉급 고분의 상대적인 순서이다. 이 항목의 본문과 개별 항목에서도 나와있는 것 처럼 고구려의 물질자료는 도굴, 자연붕괴, 폐기의 동시성 미확보, 층위 발굴에의 난점 등의 요인으로 질서정연하게 나누기 어렵다. 그나마 확인된 자료, 고분의 형태 등을 통해서 볼 때

마선구 2378호 · 산성하 전창 36호 칠성산 871호 · 마선구 626호 임강총 · 우산하 2110호 칠성산 211호 서대총 우산하 992호 마선구 2100호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의 순서가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동아시아 전반에서 나타나는 유물의 변화적석총 자체의 구조와 능원제도의 발전, 장법의 변화 과정을 바탕으로 모아진 견해이다. 이 순서 자체만큼은 논자에 따라 일부 왕릉의 순서가 다를 수 있으나 한·중·일 연구자들이 대부분 견해가 일치되어 있다.

여기서 구체적인 왕의 비정은 중국의 일부학자를 제외하고는 서대총 이후부터 장군총에 이르는 왕릉만을 주로 대상으로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을 중심으로 거론하며 우산하 992호 서대총은 상대순서로 결정하거나 간단히 언급만 하는 정도이다. 마선구 2100호는 아에 왕릉 자체에서 제외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와 대세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 학계에서는 천추총 고국양왕, 태왕릉 광개토대왕, 장군총 장수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45]이나 일본[46]에서도 태왕릉 장군총을 각각 광개토대왕 장수왕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이와는 별개로 서대총 미천왕의 무덤으로 견해가 많이 모아져 있다.

사실 모든 왕릉을 비정한 사례가 있는데 중국에서도 딱 한명의 연구자이다. 장복유(張福有)라는 연구자인데 동명성왕부터 보장왕에 이르는 모든 왕들에 대응하는 고분을 지정한 바 있다. 하지만 작은 근거[47]를 바탕으로 과대해석한 경향이 있어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학계에서도 그렇게 인정되지는 않는다.[48]

비단 연구자의 문제라기보단 역사적 맥락, 고고학적 맥락을 모두 고려하여 왕릉을 비정하는 건 당장 신라왕릉[49]이나 백제왕릉만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4. 평양성 도읍기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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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1e1f,#fff> <colbgcolor=#fff,#1c1d1f><colcolor=#373a3c,#ddd> 동명왕릉과 진파리 고분군 | 호남리 사신총
덕화리 1호분 | 덕화리 2호분 | 덕화리 3호분
강서삼묘 | 덕흥리 벽화분 | 약수리 벽화분 | 수산리 벽화분 | 용강대총 | 쌍영총
안악 1호분 | 안악 2호분 | 안악 3호분
}}}}}}}}}

6세기의 왕릉급 고구려 석실봉토분
석실봉토분 왕릉의 등장
평성 한왕묘 고분군 한왕묘
평양 진파리 고분군 전 동명왕릉
평양 토포리 고분군 토포리대총
평양 호남리 고분군 호남리 사신총
남포 강서삼묘 강서대묘
강서중묘
강서소묘

현재 평양 및 그 주변 소재의 5세기 후반 이후의 왕릉급 고분은 한왕묘, 전 동명왕릉, 토포리대총, 호남리 사신총, 강서삼묘가 해당한다.
파일:한왕묘.jpg
한왕묘 고분군은 지금의 평양의 북동쪽 강동군 경신리[51]에 위치하는 고구려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의 이름이자 1호분이 바로 한왕묘(漢王墓)이다. 석실봉토분으로 한변의 길이가 54m, 높이가 12m에 달하는 초대형분이다. 매장주체부는 석실로 평행고임과 그 위에 이중으로 삼각고임한 형태의 천장을 갖는 단일연도의 석실이다. 특이한 점은 석실의 위쪽에 와당을 깔아두었다.[52] 이는 적석총의 주변에서 와당이 발견되는 점을 고려하여 한왕묘가 평양 일대에서 비교적 빠른 무덤에 해당한다고 보는 근거가 된다. 와당의 편년에 따라서 장수왕의 무덤으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다.[53] 이외에도 문자명왕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파일:호남리 사신총.jpg
호남리 사신총의 전경.
토포리 고분군의 동쪽에 있으며 양상이 토포리 고분군과 많이 비슷하다. 하지만 호남리 사신총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사신총을 주제로하는 벽화분임을 알 수 있다. 호남리 사신총을 기점으로 벽화분의 제재가 사신도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며 석실의 구조적인 양상도 비슷해진다. 시대상으로 볼 때 안원왕으로 비정된다고 보았다. #
파일:강서삼묘.jpg
강서삼묘의 전경.

5. 그 외의 고구려 왕릉

6. 한국사 다른 왕조의 왕릉

7. 같이보기



[1] 낙양 북망산에서 묘지명이 발견되었기에 생애와 조상, 가족관계를 상세히 알 수 있다. [2] 백제의 왕릉도 석촌동 고분군의 일부 적석총만 특정한 왕을 비정하거나 하는 정도일 뿐. 이를 제외하면 초기 왕릉의 실물자료가 없다. 5세기 이후의 유적이지만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도 왕의 고분군으로 대부분 왕족 또는 왕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그 중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된 바 있다. 하지만 묘지명(墓誌銘)이 만약 출토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인(漢人)과 관련된 무덤으로 비정하거나 왕릉이라고 비정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무령왕릉 묘지명 발굴은 그야말로 천운. 그 외에는 익산의 쌍릉을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3] 경주시에는 신라 왕의 이름으로 정해진 왕릉이 대부분 존재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민간전승 및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지하였을 뿐 명확하지 않다. 특히 역사상 4세기 이전의 왕들의 무덤이라 하는 현재의 ○○왕릉들을 현대 학자들은 5세기대 이후 적석목곽묘로 추정한다. 학술적으로 어느 왕의 무덤이라 명확히 밝혀졌다고 할 만한 무덤은 단 8기다. [4] 이것을 초월한 사례가 북한의 단군릉. 5~6세기 석실봉토분을 청동기시대로 보내버렸다. [5] 통상 4세기를 기점으로 삼국시대의 독립적으로 형성된 왕릉 또는 왕릉 고분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출처] 고구려의 고분문화lll(4호분 도면), 직접 촬영(6호분 금제 귀걸이) [7] 고구려 무덤은 땅을 파서 시신을 안치하지 않고 땅 위에 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 가장 최근이었던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파괴되었었다. 이는 중국이 고구려 무덤임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이 아니다. 고분군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확보하기 위해 돌을 치운다거나, 건물을 짓거나 자기 집 담장을 보수하기 위해 돌을 가져간다거나 하는 등 유적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파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적임을 인지하지 못해 파괴하는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존재하며 우리나라 역시 최근까지도 이러한 사례가 많았다. [8] 여기서 거론되는 왕릉급 적석총은 모두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9] 표현이 좀 유치하지만 공식 보고서에서도 왕릉급 고분들은 규모 분류상 초대형으로 불린다. [10] 다만 이러한 시설이 고정되어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돌 한 장 기대어 놓는 것이므로 대부분 원위치를 이탈하였다. 따라서 모든 계장식 적석총이라고 다 이것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11] 전창 36호와 마선구 2378호분의 선후관계, 마선구 626호와 칠성산 871호분과의 선후관계는 아직도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즉 선후가 분명한 왕들을 일일이 비정하기는 무리가 따르는 셈. [12] 아직도 구글어스로 보면 무덤 가운데를 중심으로 X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13] 992호 뒤로 경사면에는 고분들이 조금 있긴 하다. [14] 다만 모두 잔편이다. 묘실이 파괴된 즉, 도굴된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그런 점을 감안하면 완형의 금공 유물이 많았을 가능성도 높다. [15] 왕릉으로 적극적으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고 왕릉이지만 왕을 비정하지 않는 경우가 가장 많으며 출토 유물의 내용을 보아 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6] 중국 측에서는 석광(石壙)이라고 표현한다. 일부 국내 연구자들도 중국측 연구를 존중해 석광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뜻은 거의 석곽과 같다. [17] 바닥에 돌을 깔아 정리하는 것을 뜻 한다. [18] 물론 유물 자체는 늦은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다만 석실 자체의 형태가 완전한 석실의 등장 이전 형태 이라는 견해가 있다. [19] 왕릉급 적석총의 전형적인 석실에는 이실(耳室)이라 불리는 시설이 없다. [20] 왕릉까진 아니더라도 왕족의 무덤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21] 딸랑이 장식이 달린 운주, 말의 등이나 엉덩이쪽에 장식용으로 쓰였다. [22] 금공품이 많이 확인되었다. [23] 2004년 유네스코 등재 이전의 모습이다. 그래서 유네스코 모양 관목 장식도 없고 매표소도 없다. 그리고 철제 계단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사진에 잘 찾아보면 계단부 중앙에 사람이 있다. 인간 스케일 [24] 현지의 관광객들 올 때 통화-지안을 다니는 노선의 기차를 주로 타고 온다. 통구 분지에 딱 들어오는 순간 우산하 고분군이 펼쳐지는데 대부분 태왕릉보다는 장군총을 바라본다. 와~ 정도는 아니고 그냥 오~ 정도... [25] 멀리서 보면 잘 안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확인된다. [26] 태왕릉과 천추총의 길상구가 찍혀진 벽돌이 마냥 길상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27] 물론 임강총도 엄청 잘보인다. [28] 그도 그럴 것이 지안을 중심으로 인근의 고구려 유적들은 대부분 압록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장천 고분군, 호자구 고분군도 그렇고 이 외에도 하해방 고분군, 하활룡, 상활룡 고분군, 북한 만포 문악동 고분군 등 대부분의 고구려 유적이 그러하다. 최소 동에서 서로 이동할때는 육로보다는 수운이 편리했을 듯. [29] 이 동탁의 명문이 흰색으로 너무 선명하다는 점에서 의심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흰색은 잘보이라고 한 것이다. [30] 발걸이 윗 부분의 봉이 짧은 것을 단병, 긴것을 장병이라 한다. [31] 풍소불은 북연의 왕 풍발(馮跋)의 아우인데 태평(太平) 7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무덤에서 풍소불을 지칭하는 명문이 확인되어 그 사망연대인 415년이라는 고정적인 하한연대를 갖는다. [32] 안양 효민둔 154호. 전연(前燕)과의 관련되어 있어 업성 천도부터 멸망까지(352~370)의 시간을 갖는다. [33] 조양 원대자 벽화묘. 벽화의 묵서명이 '永和十年二月己卯朔' 또는 '太和元年二月己巳朔'으로 판독되므로 영화 7년인 354년 또는 태화 원년인 366년의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34] 과거엔 칠성산 96호로 불렸다. [35] 발걸이 부분의 미끄럼 방지 스파이크 [36] 이 내용은 이희준(2006)의 요약이다. 상세한 내용은 논문과 이 논문의 참고논문을 찾아 보면 쉽다(?). [37] 반구형의 금동장식에 국화모양처럼 주름을 둔 형태의 운주이다. 영락이 달려 장식이 되어 있다. [38] 우산하 3319호분의 운주는 그냥 영락만 달려있지만 태왕릉의 국형운주에는 영락을 붙이는 부분이 길어져 대롱같은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다. 참고로 우산하 3319호분과 유사한 형태의 운주는 서대총, 우산하 992호분에서 확인된다. [39] 등자는 아니고 등자와 공반되는 운주의 편년에 따른 편년이다. [40] 이상의 도면과 내용은 동아시아 마구류를 편년, 정리한 이사하야 나오토(諫早直人)(2009)와 동아시아 유물의 광역편년을 시도한 김일규(2015)의 논문을 참고하였다. [41] 역사고고학에서는 말미에 역사적 해석이 일부 가미되곤 한다. 그럴 때에 역사적 사실과 고고학적 연대가 얼마나 부합하는가? 는 학설의 지지와 인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황남대총 남분의 묘주를 눌지마립간 즉, 5세기 중엽(5세기 3/4분기)으로 둘때 전반적인 신라고고학의 연대가 가장 해석에 용이하다. 따라서 황남대총의 묘주를 눌지마립간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적이다. [42] 그렇다고해서 황남대총 남분의 내물왕설이 폐기된건 아니다. 또 폐기되어야할 이유도 없다. 사실 신라고고학에서 황남대총 남분의 묘주는 중요하지만 유물 자체의 상대순서는 양 학설이 사실상 같다. 5세기 중엽만 다르지 4세기 중반부터 단각고배/인화문토기가 보편화되는 6세기 전반까지 자체의 연대는 같다. 또 내물왕설을 중심으로하는 연대관을 바탕으로 나온 연구는 신라고고학의 근간이되는 여러 이론을 만들어낸 바 있다. [43] 권운문 와당이 확인된다. [44]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로 넘어간 고구려인의 묘지명에서도 국내성 출신이라는 표기가 있는 경우가 있다. 과거를 일부 숨기거나하는 막연히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국내성을 그대로 썻다는 점에서 국내성의 평양 천도 이후의 위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45] 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보고서에서 왕릉을 비정한 바 있다. 왕릉으로 거론되는 모든 적석총을 조사했지만 왕릉의 비정은 서대총 이후의 적석총부터 장군총까지 했다. [46] 일본은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장군총과 태왕릉에 대해 왕을 비정하곤 했다.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은 장군총을 산상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전혀 맞지 않다. 물론 지금도 이렇진 않고 유물 뿐만아니라 고분 자체, 능원의 형성 등을 바탕으로 고구려 왕릉에 대한 연구가 많다. [47] 지명 하나로 자비원을 정한다던지, 고고학적 분석 이전에 기와 일부가 한나라의 것과 비슷하니깐 1세기, 2세기 고분이라 하는 것 등이 해당한다. 또 고구려가 수릉제를 실시했다는 근거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서는 대체로 인정되지 않는 편이다. 참고로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수릉제를 시행했다고 본다. [48] 논리적 허점이 많아서 그닥 학술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다만 기존에 보고된 자료들 이외에도 필드를 바탕으로 개인적 현지조사를 덧붙이는 등 열정은 있는 듯. [49] 조선시대 및 민간 기술로 정해진 신라왕릉은 조금씩 문제점을 갖고 있어 실제 왕과 무덤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50] 한왕묘 고분군은 소재지의 지명을 따라 경신리 고분군으로 불리고 있으며 한왕묘는 경신리 1호분으로도 불린다. 다만 한국고고학사전에 한왕묘 고분군으로 등록되어 있어 이를 따른다. [51] 이북 5도 행정구역상 강동군 봉진면 한왕리. 북한 치하에서 평성시에 속했다가 1999년 강동군으로 복귀되었다. [52] 다시말하자면 석실의 윗쪽이자 봉토의 아래에 와당이 깔려있는 상태이다. [53] 대신에 장군총은 수릉제에 의해 짓기는 했지만 실제로 사용되진 않은 허묘(墟墓)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54] 일제강점기의 조사가 이 고분군의 첫 조사였으며 그 당시의 지명이 진파리였다. 여기서 고구려의 삼족오 장식이 발견되었다. [55] 일제강점기의 조사에 각 고분에 대해 번호를 부여하였다. [56] 다만 이 역시 한국고고학사전의 정의에 따라 진파리 고분군을 사용한다. 그리고 학계에서도 동명왕릉 고분군이란 말은 잘 쓰지 않고 진파리 고분군이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다. [57] 북한에서 조사하고 난 뒤에 동명왕릉으로 부르게 되었고 따로 편호하지 않았다. [58] 이후에 이 일대를 정비하면서 원래의 봉토보다 크게 지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59] 사실 지안시의 유적, 동아시아의 유물의 연대관을 중심에 둔 연구들은 대체로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와당을 중심으로 한 연구 및 벽화고분의 연구에 중점을 둔 연구들은 평양에 장수왕릉이 있으리라 추정한다. 이런 보이지 않는 추세가 나뉘어져 있다. [60] 명칭이 복잡한데, 1974년 북한의 조사 때에는 4호분이라 불렸으며, 현재는 9호분이라 부른다. 따라서 진파리 9호(구 4호)라고 명기된 경우도 있다. 함안 도항리 고분군만큼 복잡하진 않군 [61] 일본인은 북한에 가서 직접 보고 올 수 있다. [62] 고구려의 왕릉에 비해서 한나라 황제릉의 연대가 당연히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