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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시가 있으면 벽화분.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은 왕릉, 귀족묘, 벽화묘 등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고구려왕릉 문서를 참고. ※ 각 고분군 구분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문서를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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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
영어 |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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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 |
프랑스어 |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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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치 | 중국 지린성 지안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04년 | |
등재기준 | (i)[1], (ii)[2], (iii)[3], (iv)[4], (v)[5] | |
지정번호 | 1135 |
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 마선향의 북쪽 홍성촌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의 4세기 후반 무렵의 왕릉급 적석총. 마선구 2100호(JMM 2100)로 편호되었다. 2004년에 고구려 왕릉으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장군총, 태왕릉 등의 무덤과 함께 등재되었다. 무덤의 묘주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봉상왕 또는 소수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2. 무덤의 구조
한변 약 30m 가량의 대형 적석총으로 다른 왕릉급의 초대형 적석총에 비해서는 규모가 다소 작다.[6] 적석총의 형태 상으로는 완성형의 바로 직전 형태 정도에 비견될 수 있다. 기단부의 석재는 우산하 992호정도로 정연하지는 않지만 산성의 성벽쌓기 방법 중 허튼층쌓기처럼 층과 와꾸(...)를 맞추어 쌓아 올렸다.
가장 위의 사진처럼 마선구 2100호분은 기단의 아래까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일반적인 봉토분이 무덤을 만들기 전에 정지(整地) 작업을 거쳐 땅을 고르게하면서 다지는데 적석총의 경우엔 정지작업을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단의 각 모서리 석재의 아래에 큰 돌을 괴어 지지력을 보완한 것이 보고되었다. 이는 즉 장군총이나 태왕릉처럼 기단의 아래에 정연한 석재로 기초를 둔 형태에 선행하고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매장 주체부는 태왕릉, 천추총 이전 단계가 다 그렇듯이 광실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만 제시되어있을 뿐 구체적이지 않다. 수혈식(竪穴式)의 석곽으로 보기에는 장막걸이쇠라는 횡혈식(橫穴式) 석실에 사용되는 장구(裝具)가 확인되고 반대로 보자니 적석 상부 구덩이가 얕아서 쉽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선구 2100호분은 우산하 992호, 서대총, 칠성산 211호보다는 늦은 적석총으로 보고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유물이 태왕릉 다음으로 많이 출토되었는데 연대가 대부분 4세기의 늦은 편에 해당한다. 와당의 편년 상으로도 권운문 와당이 나오지만 권운문 와당 가운데서 완성된 형태, 즉 늦은 시기에 해당하며, 국형운주[7]의 형태도 비교적 긴 것으로 상술한 3개의 적석총보다는 늦은 형태이다. 따라서 보통은 천추총보다는 빠르고 우산하 992호보다는 늦은 적석총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다른 고분에 비해서 확실친 않다. 다만 확실히 4세기 중엽에서 후반에는 걸쳐있다고 의견이 모아져 있다.
3. 여담
4세기 이후의 왕릉치고는 매우 작은 편이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아예 왕릉에서 제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금동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보니 결정하기가 쉽지않다. 단독입지하는 점이나 작다하더라도 분명히 큰 고분이라는 점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가 어렵다. 신라로 치면 금관총이 마립간의 무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도라고 보는 것과 유사하다.4.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6]
물론
장군총도 한변 30m 정도지만 높이나 완성도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7]
국화모양의 말 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