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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경제 전반에 대해 서술한 문서.2. 경제사
2.1. 초기: 약탈 경제
고구려의 초기 경제는 약탈 중심의 경제 체제였다. 고구려가 처음 도읍한 오녀산성 지역은 농경에 불리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인구 역시 많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고구려는 현재 흔히 생각하는 중유목[1]국가가 아니었고, 그 적은 인구에서는 대규모 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동원할 능력 또한 없었으며, 부여나 옥저와 같이 당시 이미 국가로서의 형성이 끝난 강대 세력을 공격해 이길 능력도 없었다.이 때문에 초기의 고구려가 했던 약탈은 대규모로 쳐들어가서 노략질을 하는 식이 아니라, 부여 같은 강대한 집단의 변방으로 군소집단이 들어가서 말이나 소 같은 가축을 훔쳐서 달아나는 좀도둑질에 가까웠다. 위의 그림이 사실을 매우 잘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커뮤에서 이야기하는 "그림을 재밌게 그린 거지, 사실은 군대로 쳐들어가서 대규모로 노략질한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부여의 말을 훔친 흔적은 확인되지만, 부여에 공세를 가한 역사적 흔적은 많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사에서 수백 단위의 병력을 동원해서 노략질을 하면 임금께서 정벌했다는 식으로 기록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행적 과장법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대규모 노략질보다는 소규모 좀도둑질이 흔했음을 시사한다.
시간이 흐르고 고구려에 말이 충분해지자[2], 고구려는 적극적인 약탈 전쟁에 나섰다. 대무신왕의 시기에 이런 약탈이 두드러졌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기마민족형 약탈이 시작되었다. 부여, 낙랑, 대방을 비롯한 주변의 국가 다수에게 고구려는 침략과 약탈을 감행했고, 전쟁터에서 화살촉, 갑옷, 병장기를 회수하는 것은 고구려 약탈경제의 기본이었다.
고구려가 만주 최강의 세력으로 부상하는 시기까지도 약탈경제는 고구려 경제의 중핵을 이뤘다. 위서 동이전(東夷傳)에서는 고구려의 3만 호 가운데 1만 호가 좌식자(坐食者)라 기술하였다. "앉아서 먹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전투가 없을 때에는 전쟁에서 약탈해온 물건과 고구려의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먹고사는 일종의 상비군이었으며, 전쟁이 터지거나 약탈물이 필요하면 전장의 최선두에 서는 세력으로 추정된다. 전쟁에서 약탈물을 공출해오는 집단이 지배계급으로 세금을 걷고 그것으로 생활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세금을 군대을 유지하는데 사용해도 될 정도로 군대가 적극적인 약탈과 노략질에 동원되었음을 암시한다.
옥저, 동예, 읍루 등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던 고구려의 노략질은 2세기 말엽으로 접어들면서 천천히 그 규모와 방식이 온건하고 작아졌다. 이미 그동안 행한 노략질로 성장한 고구려군은 태조대왕 시절에 약탈 중심의 군대가 아닌 정복전쟁을 위한 군대로 변모했고, 주변국들을 무너뜨리고 복속시키면서 영토를 넓히고 가축과 특산품의 산지를 확보했다.
2.2. 중기: 농경 체제로의 변화
태조대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고구려의 인구 대부분은 농경으로 경제 체제를 전환하였으며 거대하던 약탈집단 좌식자는 기록에서 사라진다[3]. 그러나 고구려가 자리잡은 북부 지역이 농사짓기에 좋지 않은 장소[4]라는 것은 당시에도 그랬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치세에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국가 주도 복지정책이자 환곡의 원조 격인 진대법을 시행한다.
진대법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고국천왕의 시기에 고구려의 경제 체제가 중심을 약탈에서 농경으로 전환했고, 고구려군은 약탈군이 아닌 정복군이자 국방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사회상을 시사한다. 이전의 고구려가 시행하던 축제는 대부분 약탈지의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으나, 이후 고구려의 축제들은 대부분 추수감사절과 유사한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는 수운 체제 역시 확보되었으며, 동천왕의 시기에는 서안평을 공격하여 바닷길을 뚫으려고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 체제의 혁신을 시도하는 것이 확인된다.
그 결과, 미천왕의 시기에는 외부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어서 그것을 내륙 지역에 가져다 파는 소금장수가 등장하고, 새경을 받으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근대적인 노동자의 사회상까지 확인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조선에서도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매우 고도로 발달한 경제적 편린이다. 소금장수가 있다는 것은 물건을 팔고 대가를 받는 체제가 있음을 이야기하는데, 경제 교역 체제가 확보되었다는 것은 곧 시장이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미천왕은 낙랑과 대방을 무너뜨리며 한반도 북부 최대의 농경지인 평안도 지역을 확보하였고, 이어서 서안평을 완전히 복속시키며 바닷길을 열어낸다.
광개토대왕의 시기에 고구려가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감행하며 삼베, 소금, 생선이 많이 나는 지역을 지속적으로 손에 넣었고, 대규모 군대를 운용하면서 곳곳으로 도로망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인구가 많아야 수백만이었을 고구려가 수만 단위의 군대를 쉬지 않고 외부에 투사하고 성 수십 개를 지속적으로 깨뜨리는 대규모 전쟁을 치르면서도 국가가 고사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고구려의 경제가 이미 본궤도에 올라 백제와 신라를 압도했고, 나아가 3~5만 정도의 상비군만을 끌고 전 국토의 동서남북 대외 지역들로 종횡무진 누빌 수 있을 정도로 도로망이 정비되었음을 확인하는 근거다.
장수왕 시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군사력뿐 아니라 경제력에서도 명백하게 중국의 왕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침투왕조의 전형을 보여주는 북위는 거대한 기병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남조의 유송은 말이 부족하여 그들에 맞설 수 없었는데, 송서(宋書)에 의하면 고련에게 말 800필을 받아 그제서야 맞설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초창기 말조차 부족하여 좀도둑질로 충당하던 고구려는 이제 중원왕조조차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강대한 경제력을 갖춘 것이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넓은 평야가 있는 지역에 국가의 중심을 이동시켰다. 금속 세공, 도제의 기술은 갈수록 발달하여 호우명 그릇 등 삼국시대 전방위적으로 고구려의 물건이 확인되며, 모피와 삼베 등을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2.3. 후기: 무역, 제철 등으로 확대
고구려의 압도적인 수군력은 백제와 유송의 연결을 차단하고 사신선을 돌려보낼 정도로 확대되었고, 당시 수군력이란 곧 무역로를 지키는 세력으로서 기능하였다. 한사군을 중심으로 한 무역망이 붕괴되며 가야가 쇠퇴한 이후 한반도 남부는 신라의 진흥왕이 가야멸망전으로 그 광산과 항구들을 접수하는 그 순간까지 고구려에게 제철량과 제철기술, 무역량과 해상력에서 압도당했다. 기록에서 고구려가 북위와 교역한 규모는 황금으로 200근, 은으로 400근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구려는 경무법(頃畝法)을 이용하여 땅의 비옥도에 따라 땅의 면적을 분류했고, 정복지의 땅을 국유화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인구에 따라 밭을 나누었다 하여 구분전(口分田)이라 한다. 고구려의 농업 생산량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비록 흑역사이기는 하지만 안원왕의 시기에 평양성에서 내전을 벌여 2,000여 명이 죽을 정도의 접전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물자가 생산되었다.
고구려에서 제작한 철은 질이 높았으며 후기에는 극히 미미하게나마 제철에 석탄을 사용한 흔적도 발견된다.[5] 이 철은 중국 왕조들이 공통적으로 두려워했던 고구려의 개마기병 등을 무장시키는 데에만 쓰이지 않고, 질 높은 농작기구와 식기 등에도 사용되었다. 가야가 멸망한 후 한반도 왕조 중 철을 주요 생산품으로서 수출한 흔적이 보이는 왕조는 고구려뿐이다.
이후 고구려의 마지막 끗발이었던 삼국통일전쟁 시기 요동성을 무너뜨린 당 태종은 그 안에서 곡량이 50만 석이나 나와 놀랐다고 하므로,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고구려의 경제력은 무너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고구려의 무역로 역시 유지되어, 거란도, 신라도, 일본도 등의 무역로는 발해 시기까지 이어진다.
3. 경제의 요소
3.1. 수레와 도로
벽화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의 수레는 그 수가 상당히 많고, 말과 소가 끌었다.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수레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구려 곳곳에 도로망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수레는 도로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기 때문.
귀족들은 이와 같이 차고를 두어 수레를 여러 대씩 보관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군 문서에서도 서술된 내용이지만 고구려군은 병거를 사용하지 않았다. 개마기병이라는 충분한 충격력을 주는 병종이 있었고, 고구려 곳곳에 많은 산으로 인해 대규모의 병거를 운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성에 수만 석에서 수십만 석의 곡식을 쌓아두거나 수만 단위의 군대를 최전선에서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수레를 굴려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을 위해 고구려는 곳곳에 도로와 다리를 놓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용강대묘 벽화에서는 전돌을 이용하여 설비한 포장도로가 확인된다. 다만 로마 제국처럼 전국토에 포장도로를 놓았을 가능성은 낮고[6] 성 안에만 포장도로를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한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청암리토성 주변에서 고구려의 도로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작인지 사실인지는 불명.
3.2. 조세 제도
고구려의 조세 제도는 부의 규모와 재산의 크기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3.3. 특산품
고구려의 요동 지방은 철기로 유명했다. 위에서도 서술하였지만 고구려의 제철 기술은 단연 뛰어났고, 아차산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화살촉은 0.51%의 탄소 함유량과 10% 미만의 불순물 함유도로 당시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은 철제였다.
고구려 개마기병은 70kg에 육박하는 철 장구로 무장했는데, 고구려 개마기병이 1만 기였다고 가정한다면 다른 모든 병종의 무기와 갑옷을 무시하더라도 개마기병이 사용하는 철 장구의 무게만 다 합해도 700톤에 달한다. 현재 기준으로는 별것 아닌 수치이지만, 전근대에 단지 군비를 위해 700톤의 철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나라는 보기 드물다. 그만큼 고구려는 철 생산량이 풍부했고 철을 대량으로 사용했다.
구의동의 고구려 보루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철 보습은 농기구에도 철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최대의 철 산지인 요동 지역은 고구려에게 있어 거대한 규모의 철 산업을 보유하게 했을 것이며,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전 이후 동아시아 무역 체제에서 뒷전으로 밀려 버린 가야의 철 산지를 찍어 누르고 동아시아적 규모의 철제 도구 무역의 근간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편, 고구려가 오랜 기간의 약탈과 침략 끝에 자신의 것으로 만든 옥저와 동예, 낙랑과 대방 지역에서는 소금, 삼베, 생선이 많이 났다. 평안남도 일대에서는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시설이 발굴되었다.[7]
미천왕이 젊은 시절 소금장수의 일을 했다는 전승에 따른다면 고구려는 곳곳에 소금을 만드는 시설을 두고, 이것을 상인으로 내륙 지역까지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상술한 대로 도로와 수레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고구려에서 대규모의 시장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확실히 찾아보기 어렵다. 대량의 무역을 하고 상인집단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고구려에 시장이 있긴 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특산품을 전국으로 다시 재분배할 정도의 시장이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1]
경유목은 양, 염소 등을 키우는 시스템으로 대표적으로는 옛 헤브라이와 외몽골 북쪽 지역의 몽골인, 조선 중기 해서여진 등이 있다. 반면 중유목은 말, 소 등을 키우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중부 몽골 지역의 몽골인(=
몽골 제국을 세운 종족), 스키타이, 한나라 시기의 흉노, 조선 중기의 건주여진 등이 있다.
[2]
고구려가 위치한 남만주 지역이 근세에도 좋은 말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기후가 온화하던 고대에는 송화강 유역 북만주의 부여도 목축업으로 유명세를 떨쳤으나, 근세들어 기후가 한랭해지면서 옛말이 되었다.
[3]
논쟁의 여지가 다소 있는데, "기록에서 사라진 것"이 해체되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이후로도 다수 존재하여 고구려군의 한 축을 차지하였는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다.
[4]
다만, 고대에는 소빙기의 영향을 받은 근세~근대에 비해 전 지구적으로 기후가 온화하였다. 또한, 벼 농사 기술의 발전이 아직 미진했던 시대라 벼 농사 짓기 용이한 땅과 그렇지 않은 땅 사이의 생산성 격차가 비교적 작았다.
[5]
# 직접 채굴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고, 지표에 드러난 것을 혼용했을 것이다.
[6]
고구려가 강대했다고 하지만 당연히 로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나라는 물론 당나라도 포장도로를 전토에 놓지는 못했다.
[7]
북한에서 발굴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조작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재할 수 없으며, 문화재가 멀쩡하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