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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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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탄생 설화3. 건국4. 비류국 병합5. 소국 토벌6. 태자 책봉7. 죽음과 승천

1. 개요

고구려 창업군주 동명성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탄생 설화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에 의하면 동명성왕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이며, 어머니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라 전하고 있다. 아마도 국가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추정된다. 나라의 시조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하는 일은 고대 국가에서 상당히 흔했기 때문. 또한 해모수의 '하늘'과 유화의 '물'이라는 상징으로 볼 때, 고구려의 뿌리는 농경 사회라는 설이 있다.

사족으로, 《삼국유사》 〈왕력〉 '동명왕' 부분에서는 주몽이 '단군(壇君)의 아들이다'라는 기록도 있다.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멸칭으로 박적(狛賊)이라고 칭했는데, 외관에서 알 수 있듯이, '박(狛)=맥(貊)'에서 유래했으며, ''이라는 뜻이다. 고구려도 곰을 숭상했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인데, 이는 단군 설화에 나오는 곰과 연관지으면[1] 고조선과의 친연성으로 볼 여지도 있다.[2]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고구려 = 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이다. '狛'의 경우에도 일본어 훈독은 'koma'라고 한다. 후에 안장왕의 후손이 도일하는데, 그들은 '狛'으로 개칭했으며, 'koma'라고 읽힌다고 한다. 고대 한국어가 일본어로 정착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 웅진은 《일본서기》에서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느 날 해모수가 동생들과 함께 놀고 있던 유화를 보고는 꾀어내서 함께 하룻밤을 지냈으나 다음 날에 혼자서 승천해 버렸다고 한다.[3] 유화부인은 중매도 없이 다른 남자와 잤다는 이유로, 부친인 하백에게서 쫓겨나 떠돌다가 태백산 우발수까지 밀려났다가 당시 부여의 왕이었던 금와왕과 만나게 되었는데, 유화의 사연을 알게 된 금와가 유화를 거두어서는 궁 안으로 데려와 방안에 두었다. 이후에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유화의 몸을 내리 쬐었는데, 유화가 아무리 이를 피하려 해도 햇빛은 계속 유화의 몸을 비추었다. 그 이후에 유화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괴상하게도 을 낳았다. 알의 크기는 5되였다. 금와왕이 알을 돼지나 짐승에게 주거나 들판에 내버려도 짐승들이 알을 해치지 않고 보호하려고 하였고, 껍질이 단단해서 깨뜨릴 수가 없어 결국 도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윽고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명성왕, 즉 주몽 혹은 추모였다.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 편에 따르면,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걸으며 말을 깨우쳤고 자라서는 힘도 굉장했는데, 어느 날 왕자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다른 왕자들이 하나도 못 잡아 쩔쩔매고 있을 때 혼자 노루를 무더기로 잡고 있었다. 이에 샘이 난 왕자들이 노루를 모두 빼앗고 주몽을 나무에다 묶어놓고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 주몽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는 묶여서 나무를 등에 진 채 그대로 걸어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시기한 대소를 비롯한 부여의 왕자들의 간계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내 예씨부인과 모친 유화, 그리고 예씨의 배 속의 아이 유리를 남긴 채 주몽은 떠난다. 이때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할 부러진 칼 조각을 남기는데, 관련된 내용이 그리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대한 설화와 거의 같다. 위에 소나무(기둥)가 있는 칠각형 돌(주춧돌) 아래에 부러진 칼의 일부를 묻어뒀으니 찾을 나이가 되거든 그 칼 조각을 가지고 오라는 것. 동명성왕은 떠날 때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친구들과 자신을 따르는 여러 무리를 이끌고 도망쳤고, 강에 가로막히자[4] 자신이 하백의 손자이자 하늘의 자식임을 이용해 자라와 물고기로 다리를 만들어 큰 강을 건너 부여를 탈출했다.

부여를 탈출할 때 깜빡하고 곡식을 놓고 왔는데 유화부인이 그걸 알고 비둘기 한 쌍에게 오곡을 전해주게 했다. 동명성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비둘기 한 쌍을 보고는 어머니가 보낸걸 알아채고 활로 쏴서 떨어뜨렸고, 오곡을 얻은 후 물을 뿜어 비둘기를 다시 살려서 날려보냈다.

이후에 동명성왕의 일행은 졸본 땅에 도착하였고, 훗날 이곳을 도읍으로 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파일:50_주몽신화.png
1854년 막부 말기 우키요에 작가이며 그림책 《조선정벌기》에서 사용한 필명은 '하시모토 교쿠란'(橋本玉蘭)인 우타가와 사다히데(歌川貞秀)의 그림책 《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도한 조선정벌과 관련된 내용들을 삽화와 함께 담고 있다. 특이하게 임진왜란뿐 아니라 기자조선의 전설이나 백강 전투 삼국시대의 일화들도 삽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繪本(에혼, 현대 신자체로 絵本)은 한자 뜻 그대로 그림책을 의미. 위의 그림의 내용은 주몽이 부여에서 달아나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했다.

3. 건국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22세 되던 해에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다. 《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졸본 땅은 말갈에게 자주 약탈을 당하고 있었는데, 주몽은 말갈족을 물리쳐서 그들이 다시는 홀본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 두 번째 부인 소서노를 맞이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재물이 많아 주몽의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애초에 《삼국사기》 온조왕 기록에 따르면, 북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을 당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왕이 귀하게 여겨 소서노로 추정되는 딸을 시집 보냈고, 본인이 죽을 때가 되자 주몽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주몽은 졸본부여왕으로 건국 기반을 처음 다진 것이고, 이후 여러 세력을 규합하면서 얼마 안가 고구려로 나라 이름을 고쳤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삼국유사》 〈고구려〉편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 동국통감》에서도 삼국사기 기록을 참고했는지 주몽이 졸본부여에 오자 그곳의 왕이 그를 큰 인물이라 여겨 자신의 둘째 딸을 주어 결혼하게 했다고 한다.

4. 비류국 병합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날에 궁실과 성을 수축했고 근처에 있던 비류국 송양을 굴복시킨 후, 비류국을 다물도로 삼았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참고로 이때 비류국왕인 송양과의 일화가 《 구삼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대종교 등의 민족 종교나 민족주의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단어인 '다물'의 출처가 바로 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5. 소국 토벌

한편 동명성왕은 비류국 이후 행인국 북옥저를 병합한다.
冬十月 王命烏伊 扶芬奴 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겨울 10월, 임금이 오이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으로 삼았다.

十年 秋九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猒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멸하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6. 태자 책봉

기원전 19년 4월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도망쳐 오자 태자로 삼았고, 동명성왕 사후 유리가 왕이 되자 소서노와 그 두 아들 비류, 온조는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7. 죽음과 승천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9년 9월, 40세 때 승하하여 용산(龍山)에 임금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 구삼국사》의 〈동명왕〉 편과 『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왕은 홀본 동쪽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추모왕이) 그러다 세위(世位)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昇天)하셨다(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광개토대왕릉비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편(玉鞭)[7]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제왕운기》에선 특이하게도 동명성왕이 재위 중에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정치[8]를 배워 내려왔고, 재위 19년 9월 하늘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아 거룩한 아들 유리(聖子 類利)가 보위를 이어 남은 옥편을 무덤에 묻었고 그것이 지금 용산(龍山)의 무덤[9]이라고 한다. ('《 제왕운기》 하권 〈고구려기〉' )

삼국사기》 기록엔 아들 온조왕이 기원전 19년에, 손자 대무신왕이 서기 20년에 각자 동명왕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다.
[ruby(昨過永明寺, ruby=작 과 영 명 사)]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ruby(暫登浮碧樓, ruby=잠 등 부 벽 루)] 잠시 부벽루에 올랐는데
[ruby(城空月一片, ruby=성 공 월 일 편)] 성벽 하늘엔 달 한 조각 떠 있고
[ruby(石老雲千秋, ruby=석 로 운 천 추)] 오래된 조천석 위엔 천 년 세월의 구름이 흐르네.
[ruby(麟馬去不返, ruby=인 마 거 불 반)] 기린마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ruby(天孫何處遊, ruby=천 손 하 처 유)]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시는가?
[ruby(長嘯依風岉, ruby=장 소 의 풍 물)] 돌계단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ruby(山靑江自流, ruby=산 청 강 자 류)]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더라.
이색(李穡), 〈 부벽루〉(浮碧樓)
그가 승천했다는 설화가 굉장히 많다. 어느 날 도성에 구름이 잔뜩 끼더니 왕이 옥편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서 옥편을 모셔서 묘를 썼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옥편은 비류국왕 송양을 굴복시킬 때 사용한 홍수를 없앨 때 사용한 물건이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화로는 기린을 길들였으며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용을 타고 올라갔다는 내용의 전설이 전해지며 광개토대왕릉비와 문무왕릉비에서는 황룡을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는 구제궁 옆에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기린굴'이 남아 있었으며, 고려 말엽에는 민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또한 동명성왕이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조천석'이라는 유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기록상으로 동명성왕은 평양에 와 봤을 리가 없는데 왜 평양에 유물이 이렇게 많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기린굴은 몰라도, 조천석 정도는 평양에 있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 동명성왕은 살아 생전에 요동성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 성의 사당에서는 동명성왕의 갑주와 창을 모셔두고 있었다. 후대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봤을 때, 고구려가 장수왕 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뒤 시조 신으로 동명성왕을 모시고, 이후 고려가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지고 평양, 즉 서경을 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창이나 칼도 아니고, 국조가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어마어마한 성물을 옛 수도라고는 해도 수도가 아니게 된 곳에 계속 두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한편《고려비기》라는 책에서 조천석은 연개소문이 초청해서 중국에서 불러온 도사들이 깨버렸다고 쓰여 있는데, 《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멀쩡히 평양에 남아 있다는 말도 있다. 통일이 돼야 확인해 볼 수 있을 듯. 현실에도 있는 군주였으니 생명이 그리 길지많은 않았던 동명성왕은 40세경에 병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추정된다.

평양에는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동명왕릉이 있다. 북한 당국이 1974년에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1994년에는 크게 개건하였다. 단군릉 수준의 리모델링까지는 아니지만 남한의 천마총을 의식하여 상당히 큰 규모로 만든 편이다.


[1] 물론 단군 설화 자체는 기원전 고조선 시절부터 전해지던 기록은 아니다. [2] 이외에도 부여, 고구려, 고조선은 모두 소 뼈를 이용한 우제점을 사용했다. 기사에 따르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인용한 AD 2세기경에 작성된 《위략》에는 당초 알려져 있었던 '무천'이 동예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고조선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삼국지》가 편찬되었을 때 이 내용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우제점 또한 고조선의 풍습이었다고 한다. 또한 21세기 연구에 따르면, 윷놀이는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부여에서 유래한 놀이가 아닌 고조선에서 유래한 놀이라는 학설도 있는데, 두 국가 간의 친연성을 추측해 볼 수도 있는 사례이다. 거리상 제법 가까우니 사실 교류가 없는게 더 이상할지도. [3] 신화적 이야기 걷어내고 보면 걍 야반도주(...) 했다고 볼 수 있다. [4] 현재의 송화강 [5] “국가의 기업이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고각'은 뿔피리를 말하며, '위의'는 위엄 있는 몸가짐이나 차림새를 말한다. [6] 이전 문서에는 채찍이라고 적혀있었지만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몽둥이다. [7] 한자 사전을 뜻하는 옥편과는 다른 단어로, 옥 채찍을 의미한다. [8] 올바른 정치 [9] 삼국사기》의 무덤을 의미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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