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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氏夫人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부여 출신 고구려의 왕후. 동명성왕의 왕후이자 유리명왕의 어머니다.2. 생애
주몽이 부여에 머무를 때 예씨(禮氏)의 딸과 혼인하였다. 기원전 38년,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예씨부인을 유리왕을 임신하고 있었다. 부여에 머무르면서 아들인 유리왕을 키웠다.아들 유리왕은 기원전 19년 음력 4월, 어머니와 함께 고구려에 도망쳤고 동명성왕으로부터 친자임을 인정받게 된다. 이후 고구려에 거주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
구삼국사 동명왕편에서도 등장하지만 유리왕의 어머니로만 등장하고 예씨부인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드라마 주몽에서는 예소야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1]
4. 기록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이 이를 기뻐하고 [그를]태자로 세웠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9년 기사-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9년 기사-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유리(類利)인데 유류(孺留)라고도 한다. 주몽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 여인이]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나온 뒤 태어났으니 그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가] 어릴 때 길가에 나가 놀다가 참새를 쏘려다 잘못하여 물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는 까닭에 이처럼 미련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묻기를, “저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여 남쪽 땅으로 달아나서 나라를 열고 왕을 칭하였다. 떠날 때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라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유리는 그 말을 듣고 곧 산골짜기로 가서 그것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다. 하루는 아침에 마루 위에 있는데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가 있었다. 이에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명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러 부왕(父王)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이를 합치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이 이를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세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즉위기사-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 여인이]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나온 뒤 태어났으니 그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가] 어릴 때 길가에 나가 놀다가 참새를 쏘려다 잘못하여 물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는 까닭에 이처럼 미련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묻기를, “저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여 남쪽 땅으로 달아나서 나라를 열고 왕을 칭하였다. 떠날 때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라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유리는 그 말을 듣고 곧 산골짜기로 가서 그것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다. 하루는 아침에 마루 위에 있는데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가 있었다. 이에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명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러 부왕(父王)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이를 합치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이 이를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세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즉위기사-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B.C.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의 위업을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주석-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B.C.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의 위업을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주석-
[1]
'소야'는 해당 드라마의 창작명이며, 역사 속 예씨부인의 본명은 성씨말고는 전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