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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관나부인(貫那夫人) | |
부군 | 중천왕 | |
부족 | 관노부(추정) | |
이름 | 미상 | |
성씨 | 미상 | |
신체 특징 | 9척(약 2m)[1] | |
생몰연도 | ? ~ 251년 |
1. 개요
고구려 중천왕의 소실. 이름의 한자를 읽기에 따라서 '관내부인'이라고 읽기도 한다. 본명은 전해지지 않으며 다만 '관나부인'이라는 호칭으로 전해질 뿐이다. 이로 추측해 보건대, 아마 고구려 5부 중 하나인 관노부(灌奴部) 출신의 인물이었을 것이다.2. 생애
기록에 따르면 관나부인은 길이가 9자나 되는 장발을 지니고 있었으며,[2] 얼굴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중천왕이 관나부인을 무척 총애하여 장차 소후(왕의 둘째 정실)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하니,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이다.이에 왕후 연씨가 투기를 하다가 중천왕에게 " 서위(西魏)[3]가 긴 장발의 여인을 구하고 있다고 하니, 장발미인을 보냅시다."라고 고하였다.[4] 그러나 중천왕은 왕후가 관나부인을 질투하고 있는 속뜻을 알고는 이를 무시하였다. 그런데 관나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는, 왕후가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먼저
관나부인은 왕을 찾아가서 "왕후가 저의 면전에서 '궁에서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말을 하며 협박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왕께서 궁궐을 비우시면 그 틈을 타서 저를 죽이려 할 것"이라고 고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중천왕이 사냥을 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가죽 주머니를 준비해 두었다가, 왕이 돌아오자 "왕후가 이 가죽 주머니에 저를 담아 바다에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이대로는 무서워서 왕을 섬길 수 없습니다."라고 고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자, 열이 뻗친 중천왕은 관나부인을 잡아와서는 "네가 바다 속에 들어가기를 원하느냐?"라고 말하고는 관나부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대로 가죽 주머니에 담아서 '서해 바다에 던져 죽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