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국가의 중심 지역이자 명칭의 유래가 된\에 대한 내용은 야마토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시대 | ||||||
{{{#!wiki style="" | }}} | ||||||
{{{#!wiki style="" |
|||||||
}}} | |||||||
{{{#!wiki style="" | }}} | ||||||
가마쿠라 시대 | {{{#!wiki style="" | }}} | |||||
무로마치 시대 | {{{#!wiki style="" | ||||||
}}} | |||||||
{{{#!wiki style="" | }}} | ||||||
}}}}}}}}} |
야마토 ヤマト政権 大和 | 倭 |
||
■ 신화상의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의 동정(東征)에 따른 야마토 정권의 세력 범위. | ||
■
고훈 시대 이후 야마토 정권의 세력 범위. 마키무쿠(纏向)식 전방후원분의 확장은 지방 토착세력의 복속을 나타낸다. |
||
3세기 이후 ~ 701년 | ||
성립 이전 | 다이호 율령 이후 | |
야요이 시대 |
일본 율령국가 |
|
국호 | 야마토(大和, 倭) | |
수도 | 나라 분지 일대[1] ( 일본의 어소 문서 참고) | |
정치체제 | 씨족 연합 | |
군주 | 오오키미(大君, 大王), 천황(天皇) | |
종족 | 야마토 민족, 하야토, 구마소, 에미시 | |
언어 | 고대 일본어 | |
종교 | 신토, 불교 | |
주요 군주 |
제15대
오진 천황 제26대 게이타이 천황 제33대 스이코 천황 제38대 덴지 천황 |
[clearfix]
1. 개요
야마토 정권[2]은 율령제의 정착 이전 일본 열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현 일본의 직계 전신인 국가이다. 이름인 '야마토'는 현재 나라현 일대를 가리키던 지명 야마토에서 유래했고, 이후 일본 국가 자체의 별칭으로도 쓰이게 된다.2. 역사
그 기원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많으나 대개 야요이 시대 후기인 2세기경에서 고훈 시대인 3세기 중반으로 잡는다.[3] 비슷한 시기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사기》 등에는 여왕 히미코(? - 247?)가 다스리는 야마타이국이라는 지명이 나오며, 이는 기록상 교차검증이 가능한 일본 최초의 국가이다.이 ' 야마타이국'과 ' 야마토 정권'의 지배 세력이 동계(同系)였는가에 대해선 지금도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적어도 고훈 시대 이후 야요이계의 어느 세력이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래서 현대 일본 역사책에서는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합쳐서 '야마토 시대'(ヤマト時代, 250~ 710년) 혹은 '야마토 정권 확립 시대'로 분류하기도 한다.
야마토는 건국 초기에는 연맹국가였지만 백제, 가야와 뱃길을 통해 교류하여 정치적으로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자, 철기, 건축, 농사법 등 각종 선진문물들을 신속하게 도입해나가면서 타 부족국가들과 연맹 국가들이 넘볼 수 없을 만큼 강성해졌다. 이를 토대로 시코쿠, 산인 등 다른 지역에 존재했던 부족국가와 연맹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나가며 규슈 서북부와 간사이 지역에 이르는 영역을 통합시킬 수 있었다. 또한 백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여러 번 공격했지만, 신라를 구원하러 온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에게 패배했다. 4년 뒤 백제, 가야와 함께 고구려의 대방과 평양을 공격했으나 이 때도 패퇴했다.
참고로 7~8세기 들어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을 개칭했을 무렵의 야마토가 차지하고 있었던 영역은 현대의 일본보다 훨씬 좁았다. 야마토의 영향히 닫지 않는 규슈 남부는 하야토나 구마소 같은 야마토와 별개의 연맹국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도호쿠는 당시 에조, 에미시라고 칭해진 아이누계 종족들이 부족국가-연맹국가를 형성했다. 주부나 간토 지역도 상당기간 조몬계 세력이 차지하거나 혼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세력은 8~11세기경을 거쳐 정복하면서 전근대시기 일본의 강역을 완성했다.[4]
3. 시작 지역 가설
야마토 정권의 시작은 시기뿐만 아니라 장소도 논란이 된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도쿄대학과 규슈대학 및 규슈 소재 대학이 규슈설을 지지하고, 교토대학 및 나라 주변 소재 대학에서는 나라설을 지지한다. 도쿄대학과 교토대학 사학과들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하다. 야마타이국이랑 연계시키기도 한다.3.1. 규슈 가설
《 일본서기》에서 니니기가 ' 천손강림'한 곳은 규슈 지방이며, 그 후손인 진무가 규슈에서 진격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규슈 지방을 정권의 시발점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긴키 지방에서 성립한 정권이 굳이 규슈에서 왔다는 전설을 만들어가며 규슈를 '천손강림'한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 줄 필요는 없으니, 야마토 정권은 규슈 지방에서 시작된 것이 맞지 않느냐는 주장을 할 수 있다.3.2. 간사이 가설
옛 지명 '야마토'가 지금의 나라현을 가리키는 만큼, 야마토 정권은 긴키 지방에서 성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야마토 정권이 규슈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은 단순히 신화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접근이다. 초대 왕을 강력한 정복군주로 묘사하기 위해 규슈에서 야마토 지방에 이르는 '여정'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야마토 조정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판본을 보면, 천손이 강림한 곳을 "왕의 덕을 입지 못한 불모의 땅"이라고 깎아내린다. 규슈 지방이 정말 야마토 정권의 시발점이었다면 그렇게 그 지역을 깎아내렸을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땅이 나쁘다보니 진무 덴노가 동쪽의 좋은 땅을 찾아 정벌을 떠났으며, 정복전쟁 끝에 야마토 지방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규슈 지방을 깎아내리고 야마토 지방을 좋은 땅이라 치켜세우는 내용이 된다. 그렇다면 야마토 정권이 긴키 지방에서 성장했다고도 할 수 있다는 것.[5]
2020년대 들어 고고학적으로 규슈보다는 긴키 지방의 정치체 성장이 더 두드러지고 문화적 발전 속도가 빠른 것으로 보이기에 긴키 지방이 중심지였을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3.3. 이동설
두 개 설을 절충하여 원랜 규슈에 있었으나 나중에 긴키로 이동한 거 아니냔 설도 있다. 이는 진무 덴노의 동정(東征) 신화와도 연결된다. 규슈는 중국이나 한반도 국가에서 신문물을 전파받기에는 유리한 지역이지만 확장된 일본영토를 다스리기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지역이기에 확장 과정에서 중심지 이동이 일어났을 개연성은 있다.4. 기타
한국에서는 '천손강림'한 곳이 실제로는 가야의 구지봉이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고고학적·인류유전학적·언어학적으로 야마토의 뿌리( 야요이인)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세력이 주요 세력이였을 것이라는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신화인 천손강림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학자는 잘 없기에 소수 빼곤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구지봉설에 대한 내용은 타카마가하라 문서도 참조.중국 사서에서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일본에 사람들을 보냈고 그 사람이 일본의 왕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중국인들 중에서는 2000년대까지도 이 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오나라와 연관짓기도 한다. 물론 서귀포시[6] 설화처럼 전설일 뿐이니 진지하게 믿을 필요는 없다.
[1]
이 시대에는 천황이 붕어할 때마다 궁성을 옮겼다. 따라서 역대 중심지가 야마토 지방(나라 분지) 곳곳에 산재해있다.
[2]
야마토 조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야마토 정권, 야마토 왕권, 야마토 조정 등의 여러 표기가 혼재되어 있다.
[3]
황기, 즉 신화상으로는
진무 천황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일본의 건국년도로 표방하고 있으나, 이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전제로 계산하는 기년법인 '
단군기원'과 마찬가지로, 그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다.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660년은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 후기에 해당하는데, 이때 제대로 된 국가 체계가 들어섰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4]
류큐와
홋카이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령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5]
여담으로, 한국사에서도 이전에는 주몽 신화나 온조 신화가 외래인과 토착민의 결합 신화로 해석되었지만, 2020년대 기준 아직은 고고학적으로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부여계나 고구려계 등 외래 세력이 유의미하게 이주하여 유입, 결합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백제도 재지 토착세력으로부터 발전했다고 보는 경우가 늘었으며, 고구려 역시 고조선으로부터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로 발전했다고 보는 경우가 늘어났다. 물론 문헌 기록도 마냥 무시할 순 없기에, 후일 외래 세력의 대거 유입을 시사하는 증거가 나오면 바뀔수도 있기는 하다.
[6]
서복 일행이 불로초를 찾아 항해하던 중 서귀포 지역에 상륙했고, 다시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하여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 서귀포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