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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吳[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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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 기원전 7세기 이전 ~ 기원전 473년 | |
이칭 | 구오(句吳), 공오(工吳) | |
위치 | 중국 장쑤 | |
수도 | 오 | |
국성 | 희(姬) | |
씨 | 고발씨(姑發氏) | |
국가원수 | 후작 → 왕 | |
주요 군주 | 합려, 부차 | |
언어 | 고대 오어[2], 상고 중국어(?) | |
문자 | 금문 | |
종족 | 오족 | |
멸망 후 | 월나라 | |
현재 국가 | 중국 |
[clearfix]
1. 개요
춘추시대에 장강 하류에 존재했던 국가. 초반에는 공오(工吳), 구오(句吳)와 같은 명칭으로 불렸다. 수도는 오.2. 역사
《 사기》권30 오태백세가에 의하면, 주의 국군이였던 고공단보의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 중옹이 삼남 계력(季歷: 주문왕의 아버지)에게 제후의 자리를 양보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국가이다. 태백이 죽고 그에게 자식이 없어 중옹이 뒤를 이었고,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었다고 한다. 무왕(주)은 큰할아버지 태백과 작은할아버지 중옹의 자손을 찾다가 마침내 중옹의 자손인 주장(周章)을 찾아내 그를 오에 정식으로 봉하고 주장의 아우 우중(虞仲)은 우나라(虞)에 봉했다고 한다.하지만 이는 본래 주 왕실과 같은 희성의 제후였던 우(虞)의 시조 태백에 가탁한 것으로 실제로는 중원 지역의 거주민과는 이질적인 민족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오월 지방의 토착민들은 중원 사람들과 풍속이 상이하여 단발 머리[3]를 하고 문신을 했다고 하며, 피부색이 검고 키가 작은 민족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황하 중류의 화하인과 월인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월인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전신인 구오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국가 명칭이 중원 국가와는 달리 1음절이 아닌 2음절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4].
다만 절강성에서 발견된 오나라의 유물에는 오나라 왕의 성씨가 희성 고발씨(姬姓姑發氏)라고 적혀 있어서, 일단은 오나라 왕실이 주나라 왕실과 같은 집안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도 웬만큼 확실하지 않고서야 생면부지의 족속을 같은 일족, 그것도 윗대 큰어른의 자손으로 인정할 리가 없다[5] 한 예시로 기원전 482년, 오왕 부차와 진정공이 위나라의 황지에서 회맹하여 패자 자리를 다투었는데 이 때 진정공은 자신이 희성 제후들 중 가장 작위가 높다는 이유로[6], 부차는 자신이 희성 중에서 서열이 높다는 이유[7]로 패자임을 주장했다. 즉 왕실은 중원계인게 백성들은 토착민인 이중구조였다는 것이다.
제19대 군주 수몽 때부터 중원국과는 달리 초나라처럼 왕호를 사용하였다. 초의 견제 세력을 후방에 두기 위해서 진(晉)나라에서 여러 인재와 중원에서 쓰이던 전차를 도입했다. 그 결과 기원전 6세기경부터 나라가 크게 흥성하기 시작했고 오왕 수몽 사후에 오왕 제번 때에 이르러 수도를 오로 천도하였으며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대에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한다.[8]
쿠데타로 집권한 합려는 선진적인 중원의 문물이나 인적 자원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제나라 사람으로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 또한 합려에 의해 초빙되어 중용되었다. 합려는 초나라로부터의 망명객인 오자서를 등용하여 초나라를 멸망 직전으로까지 몰아넣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초나라 신하인 신포서의 간곡한 부탁으로 지원하러 온 진(秦)나라의 지원군과 국가가 빈 틈을 노린 월나라 왕 윤상의 기습 및 동생 부개가 일으킨 봉기에 의해 후퇴해야 했다. 합려는 이를 설욕하기 위해 윤상의 아들 구천과 전쟁을 벌였으나 전사하였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월왕 구천을 물리치고 위에 붙어있던 대국 제를 물리치고 큰 회맹을 열어 패자의 칭호를 받기까지에 이르렀으나, 그 틈을 노린 구천의 공격으로 인해 부차는 자결하고, 오나라는 기원전 473년에 멸망하고 만다. 즉 전성기와 멸망 시기가 같다.
3. 전략과 전술
타국의 군주가 사망시 상중(喪中)을 틈타 공격하는 게(...) 오나라의 상투적인 전략이었다. 한 나라의 정권이 교체된 틈을 타 공격하는 것은 비겁해보이고 실제 장기적으론 명성을 깎아먹는 일이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하나의 전략이기도 하다. 합려는 초평왕이 죽자 그 틈을 타 초나라를 공격했고, 월나라 윤상이 죽자 그 틈을 타 월나라를 공격했다. 그의 아들 부차 역시 제나라 포목이 군주 도공을 시해한 틈을 타 제나라를 공격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계승법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서 군주가 죽었을때 확실히 공인된 후계자가 존재하는 경우보다 실력있는 왕족들끼리 서로 계승을 주장하면서 상당한 혼란이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에, 꼭 오나라가 아니더라도 군주 사망 직후에 외침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오나라는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나라인데, 기존의 춘추시대에서 전쟁의 주역은 전차를 몰 줄 아는 소수의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오나라는 다른 중원의 국가들과는 달리 영토가 평지보다는 늪, 숲 등의 지형이 많았고 따라서 다수의 평민 보병들이 전쟁의 주역이었다. 이것은 대규모 보병 전술을 강조하는 손무의 군사 전략과 잘 맞아 떨어져 이 시기 오나라는 패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후 전국시대 중국의 전쟁 패러다임 자체가 보병 위주로 완전히 변화하는데에도 영향을 미쳤다.[9]
4. 언어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오나라의 언어가 중원의 언어와 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래서 주류 언어학계에서는 오나라에서 쓰이던 언어인 고대 오어[10]를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나 크라다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고있다. 물론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쓰이던 언어는 중국어[11]였으므로, 중국어도 널리 쓰였다. 오나라의 왕성이 희성(姬) 고발씨(姑發氏)로 성이 주나라 왕성인 희성이었으므로, 오나라의 지배층은 한족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때문에 오나라 사회는 언어학적으로 양층 언어 사회였다고 추정된다.최근 남중국~동남아시아 지역 유전체를 분석한 연구[12]에 따르면 오나라가 세워진 양쯔강 하류 지방의 사람들은 초나라로 대표되는 양쯔강 중류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들로서 크라다이어족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오나라를 구성한 이들과 동계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연구에 따르면 윗 문단 중 크라다이어족이 오족이 사용한 언어에 가까울 것이다. 아니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일수도 있고. 몽몐어족 계통[13]이라는 추정도 있는데, 앞서 말했듯 복건성-양쯔강 하류 유역의 월나라 및 오나라의 주민들과 양쯔강 중류 유역의 초나라 주민들의 유전체가 다르기에 가능성은 낮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생전, 오나라에서 쓰이던 언어 중 일본어족의 조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가설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일본을 비하하는 용어인 왜도 국명인 오와 어원상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보빈에 의하면, 오나라에서 쓰이던 일본조어는 잘 쳐줘봤자, 소수 지역 언어 신세를 벗지 못했으리라고 추정했다. 그래서 한반도 중남부 지역이나, 일본 본토로 간 이들을 제외하면, 중국 내의 일본조어 화자는 기원전을 못 넘기고 빠르게 소멸했다고 추정했다. 오와 왜 모두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가 그 어원이라고 보는데, 실제로 문화인류학계에서는 외부인과 처음으로 조우하는 미접촉부족에게 민족명을 물으면 대부분이 1인칭 대명사로 대답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고, 12세기 일본의 역사가인 우라베노 카나카타가 저술한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에서도 왜라는 명칭의 기원을 고대 일본어의 1인칭 대명사인 wa라고 기술하므로, 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보빈 본인을 포함하여, 주류 언어학계는 이에 대한 물증이 전혀 없어서, 이 가설을 그렇게 신빙성이 높은 가설로는 여기지 않고 있다. 게다가 보빈 본인이 사망해서 이후에나 다른 학자들이 연구해볼 과제로 남았다.
5. 역대 군주
오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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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군 태백 |
2대 국군 중옹 |
3대 국군 계간 |
4대 국군 숙달 |
5대 국군 주장 |
6대 국군 웅수 |
7대 국군 가상 |
8대 국군 강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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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국군 여교의오 |
10대 국군 가로 |
11대 국군 주요 |
12대 국군 굴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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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국군 이오 |
14대 국군 금처 |
15대 국군 전 |
16대 국군 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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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군 구비 |
18대 국군 거제 |
초대 왕 수몽 |
2대 왕 제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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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왕 여제 |
4대 왕 여매 |
5대 왕 료 |
6대 왕 합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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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왕 부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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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권30 오태백세가에 따르면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대수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1대 | 태백(太伯) | ||
2대 | 중옹(仲雍) | 태백의 동생 | |
3대 | 계간(季簡) | ||
4대 | 숙달(叔達) | ||
5대 | 주장(周章) | 오나라 제후 임명 | |
6대 | 웅수(熊遂) | ||
7대 | 가상(柯相) | ||
8대 | 강구이(彊鳩夷) | ||
9대 | 여교의오(余橋疑吾) | ||
10대 | 가로(柯盧) | ||
11대 | 주요(周繇) | ||
12대 | 굴우(屈羽) | ||
13대 | 이오(夷吾) | ||
14대 | 금처(禽處) | ||
15대 | 전(轉) | ||
16대 | 파고(頗高) | ||
17대 | 구비(句卑) |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2년 | [14] |
18대 | 거제(去齊) | 기원전 621년 ~ 기원전 586년 | |
19대 | 수몽(壽夢) |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61년 | 칭왕 |
20대 | 제번(諸樊) | 기원전 560년 ~ 기원전 548년 | 수몽의 장자 |
21대 | 여제(余祭) | 기원전 547년 ~ 기원전 544년 | 수몽의 차자, 제번의 동생 |
22대 | 여매(余眛) |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27년 | 수몽의 삼자, 여제의 동생 |
23대 | 료(僚) | 기원전 526년 ~ 기원전 515년 | 여매의 아들 |
24대 | 합려(闔閭) | 기원전 514년 ~ 기원전 496년 | 제번의 아들[15] |
25대 | 부차(夫差) | 기원전 495년 ~ 기원전 473년 | 합려의 아들, 멸망 |
6. 기타
이 오나라의 이름으로부터 장쑤성 일대를 오(吳)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겼으며, 후일 등장한 오나라들과 성씨 오씨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나라가 망한 이후 주 천자가 부차의 후손에게 오성을 하사했기 때문. 다만 본래 국성인 희성이 아닌 오성을 내린 것은 주나라 왕족으로서의 신분을 박탈했다는 의미도 있다.오월 지방에 철광산이 있었는지 당시 우수한 철기 무기를 가진 것으로 이름났다. 간장, 막야의 원산지이기도 하다.[16]
일본 히로시마 현에 있는 구레(吳)라는 도시도 이 한자를 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밀고 험악한 문신을 많이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수전(水戰)을 위해서는 머리가 짧은편이 무척 유리하고, 교룡을 쫓기 위해 문신을 했다고 한다. 이는 오왕 합려가 왕자 시절 초나라와 싸울때 계략을 위해 초나라처럼 머리가 긴 사람을 굳이 찾았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17][18]
과거에는 풍습이나 묘사 등이 일본과 비슷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소중화 사상을 가졌던 몇몇 일본인들이 이를 인용해 일본의 시조인 진무가 오나라 출신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19] 이외에도 몇몇 일본 우익들은 야요이인 들은 중국 장강 유역 출신이고 한반도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유전적인 검사결과에 의하면 일본과는 관계가 없지는 않고 일본 서부지역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것은 분명한 사실인듯하다. 물론 이 당시에는 일본으로 직행하기보다는 한반도를 거쳐 가는것이 더 많았고, 애초에 야요이 시대보다 후기인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에도 한반도 출신 이주민들이 일본으로 많이 흘러들어간 사실이 일본서기에서도 나타나고있는지라 일본 극우들이 주장하는 한반도와 관련이 없다는 썰 자체는 자국의 기록도 무시한 멍청한 소리이다.
바로 위 내용과 관련해 몇몇은 일본어족의 기원이 이 오나라가 아니냐는 추정도 내놓는다. 실제로 '吳'의 상고한어 발음이 일본어 1인칭의 어근과 유사하다. 일본 왜의 어원이 1인칭 대명사임을 생각하면 오나라의 국명도 같을 수 있다고 보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비록 추정에 불과하다고 밝혔지만 일본어족의 최초 기원지가 중국 남부 어디쯤으로, 근처의 타이카다이어족 등과 상호작용을 하며 서로 언어가 비슷해졌다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일본어족의 기원을 논하는 논문에서도 종종 오나라와의 관계, 특히 오태백과의 관계를 다룬 사서의 내용을 다룰 뿐 아니라, 양쯔강 하류에서 시작된 벼농사의 전파를 같이 고려해 일본어족의 원향(sprachbund)을 중국 남동부로 보는 때가 많기 때문에 비록 오나라의 공용어가 전적으로 고대 일본어는 아니었을지언정 오나라 각 지역의 언어 중 하나가 일본어족에 속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자세히 파고들면 오나라 일본어족설에서 해명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세한 것은 반도 일본어설 참조.
춘추전국시대에 이름 앞에 '성'을 쓰는 것은 여자이고 남자는 이름 앞에 '씨'를 썼으므로 역대 오나라 군주들과 남성 왕족들은 모두 이름 앞에 '희'가 아니라 '고발'이 와야 한다. 즉 '희계찰', '희료', '희합려', '희부차'가 아니라 '고발계찰', '고발료', '고발합려', '고발부차'가 맞다.
왕을 칭했음에도 중원의 국가들과는 달리 멸망할 때까지 끝내 시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오나라 군주들에게는 시호가 없다. 시호가 없어서 오나라 군주들은 그냥 본명 그대로 불린다. 이것은 옆의 월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오월동주의 두 나라 모두 멸망할 때까지 시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ŋʷˤa/. 현대 발음은 wú. 吳는 현대의 한자이며
금문 표기는 이렇다.
참조
[2]
춘추좌씨전에 오나라의 언어가 중원의 언어와 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
소설 열국지에서 오나라를 상대하는 중원 국가의 장군이 '오나라 사람들은 상투가 없다'는 언급을 하는게 나오는 등 중원 사람들에게는 이 풍속이 신기했던듯하다.
[4]
물론, 이는 국명이 실제로 2음절이어서라기보다는,
상고 중국어에 없는 발음을 이렇게
음차한 결과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오나라를 가리키는 한자인 吳는 당시의 상고 중국어로는 *ŋʷˤa라고 발음했고,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속하는 현대
베트남어로는 ngô라고 발음한다.
[5]
이처럼 비(非)
한족계가 대다수인 나라를
한족 왕실이 통치한 사례로는
전국시대 국가인
중산국(中山國)이 있는데, 이민족인 백적(白狄)이 세운 국가이지만, 오나라처럼 군주의 성씨가 희성(姬姓)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런 사례가 몇번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훨씬 후대인 서기 6,7세기 경에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투르판 일대에 존속한
고창국(高昌國)이었다. 고창국은 한족 왕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절대다수가
토하라인이었다.
[6]
진나라 군주의 작위는 후작이었으며 진문공 시절에는 주나라 천자로부터 구석의 원형이 되는 혜택을 받는 등 같은 제후국들 중에서도 격이 달랐다.
[7]
오나라의 시조가 고공단보의 장,차남이라면 진나라의 시조는 주무왕의 아들이자 주성왕의 동생인 당숙 우였으며 주무왕의 할아버지가 고공단보의 3남이다.
[8]
이 시기에 춘추 전국 시대 최강의 강대국 중 하나인 초나라와 나름 대국 중 하나인
제나라를 공격했으며, 특히 초나라는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물론 두 대국 이외에도 추나라, 노나라, 월나라 등 수많은 나라들이 오나라의 패권에 고개를 숙였다.
[9]
물론 이것만 영향을 줬다기보단, 보다 근본적으로는 왕권, 행정력 강화를 비롯한 국가 동원력의 증가로 인해 소규모 귀족 집단의 전쟁이 대규모 징집을 통한 국가 총력전에 가까운 형태로 점차 바뀐 영향 역시 크다. 그 결과 백성들만 죽어난다.
[10]
현대
오어와는 다르다. 현대 오어는
중국어의 방언으로 분류된다.
[11]
정확히는
중국어의 조상 언어인
상고한어다.
[12]
X huang et al. (2022) - Genomic Insights Into the Demographic History of the Southern Chinese, Front Ecol Evol, 10:853391
[13]
몽몐어족의
조어인 원시 몽몐어로 추정되는데, 이 언어는 이웃나라인
초나라의 공용어였다.
[14]
이 시기에
진헌공이
우나라와
괵을 쳤다.
[15]
《세본》과 《
춘추》에 따르면 여매의 아들, 《사기》에 따르면 제번의 아들이다.
[16]
이 철은 '초철'이라 불렸다. 초나라의 철이라는 뜻. 위에 언급되었듯이 오, 초 지역은 서로 가까이 있었다.
[17]
오왕 료 2년의 전쟁.
[18]
이 부분이 후대인들에게도 이채로웠는지 소설 동주열국지에서는 제나라와 오나라가 붙은 애릉 전투에 임하는 제나라 장군들이 전의를 고취시키기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오나라놈들의 머리는 짧아 목을 베어도 들고갈수가 없으니 각자 저놈들의 머리를 꿰 들고갈 줄을 준비해라." 다만 애릉전투에서는 제나라가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고 저 말을 한 장군도 죽는다.
[19]
소중화 사상은 조선만이 가졌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