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申包胥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동시에 충신.
2. 생애
춘추시대의 사람으로, 초(楚)나라 소왕(昭王) 때 대부(大夫)를 지냈다. 초나라 임금 분모(蚡冒)의 후예라서 왕손포서(王孫包胥) 또는 분모발소(棼冒勃蘇)로도 불린다. 오자서(伍子胥)와 친했으며 오자서가 부친과 형이 평왕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도주극 중 오(吳)나라로 달아나면서 신포서에게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자 “그대(오자서)는 분명 멸망시키겠지만, 내가 다시 부활시키겠다.”고 대답했다.소왕 10년 오자서의 계략과 부국강병된 오나라가 초나라를 침략해 수도 영(郢)을 함락하는 등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그가 진(秦)나라에 들어가 진애공(哀公)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7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울면서 초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했다. 이에 애공이 그의 정성에 감동해서 구원병을 보내 초나라를 도왔다.[1]
귀국하자 소왕이 불러 포상하려고 했지만 신포서는 초나라에 있는 선조의 무덤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하여 거절했다. 『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자세히 나온다.
3. 기타
판본에 따라서는 초나라 국경을 담당하는 수비대장이라고 한다. 오자서와 같은 복수자인 태자 건[2]이 자신을 받아준 정나라를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들통나 사망하고 오자서는 건의 아들 승과 함께 정나라→초나라→오나라로 도주하려다가 초나라 국경에서 신포서에게 사정한 것으로 나온다.이후 오나라의 재상이 된 오자서가 초나라를 거의 반쯤 정복하고 수도 영까지 털어 초 평왕의 무덤까지 파헤쳐 시체를 꺼내 매질을 한 굴묘편시 이후 신포서는 경악하여 오자서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네의 복수는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라고 꾸짖는 신포서의 편지에 오자서는 "날은 저물고 길은 멀어서( 일모도원)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했다( 도행역시)."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후 초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그것도 초나라에 앙심[3]이 있는 진나라 애공에게 7일간 먹지도 않고 통곡하여 사정하여 군사를 빌려서 위기의 초나라를 구하는데 진 애공 왈 초나라는 의리가 없는데 신하(신포서)가 너무 충직해서 도와주겠다는 식이었다. 판본에 따라서는 애공이 신포서를 보고 이런 충직한 신하가 있는 한 초나라는 망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1]
이 과정에서 신포서의 구원군 뿐만 아니라 몰래 탈출한 초 소왕을 대신해
공자 신은 일종의 분조를 이끌며 지방에서 게릴라를 조직하여 오나라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본래 오자서는 함께 망명하였던 왕손 승(王孫勝)을 초나라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초나라의 재상에 취임하여 초를 오나라의 속국으로서 재건하려 했으나, 초나라의 부귀에 맛을 들인 오왕 합려는 초나라의 본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시간을 질질 끌다 신포서가 받아낸 진나라 구원군의 반격을 허용하게 되었고, 진(秦)·초 연합군과 오군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자서의 참모인 손무는 이에 오나라로 회군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백비는 이에 따르지 않았고, 같은 생각이었던 오왕 합려도 백비에게 만명의 군사를 주어 진·초 연합군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진나라 명장 화련에게 된통 당하고 손무가 파견한 전의 장군의 구조로 귀환하게 되는데, 이러한 만만치 않은 대패의 결과로 합려의 동생이었던 부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 등 몇몇 장수들을 남겨 지키게 하고 부개의 모반을 평정하러 가게 된다. 합려의 과욕으로 일을 말아먹고 끝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나라의 대승은 대승이라, 오는 결국 본토로 군사를 철수하는 대신 초가 막대한 재물을 오에게 매년 바치기로 한 조공의 약조와 왕손 승을 백공(白公)으로 세워 맞아들이는 것으로 화의를 맺게 되며 초·오나라 전쟁은 끝이 난다.
[2]
원래 혼인하기로 한 진나라 애공의 여동생은 부친 평왕이 몰래 측실로 삼았고 시녀 중 비슷한 사람을 태자 건에게 주어 속였다. 흑막의 배후인 비무기는 이로 인해 태자 건을 암살할 생각을 하였고 평왕에게 태자 건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부추기자 평왕은 태자 건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3]
진나라 애공 입장에서 초나라는 공실을 모욕한 원수였다. 진 애공이 각별히 아끼고 있다고 알려진 여동생을 태자비이자 미래의 왕후로 보낸 줄 알았는데 늙은 평왕의 측실이 되어 버렸다. 진 애공이 신포서에게 이 점을 지적했을 땐 신포서조차 부끄러워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초 소왕은 진 애공의 조카인데 아직 어린 소왕에게
죄를 묻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변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