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楚)의 영윤(令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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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왕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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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자서 子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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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직위 | 영윤(令尹) | |
성 | 미(羋) | |
씨 | 경(景) | |
명 | 신(申) | |
자 | 자서(子西) | |
아버지 | 초평왕(楚平王) 웅거(熊居)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기원전 4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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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왕족. 평왕의 서장자이자 소왕의 서형이다. 초나라 관직 중 가장 높은 영윤까지 올랐다. 이 사람의 후손들은 경평왕(景平王)의 후손이란 뜻으로 경景을 씨로 썼고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세 가문인 굴, 소, 경 중 경씨가 바로 이들이다.2. 생애
오나라의 합려가 손무와 오자서를 앞세워 쳐들어 왔을때 국외로 피신한 초소왕을 대신해 초나라 국내에서 일종의 분조를 이끌며 저항세력의 실질적인 구심점이 되었다.평소에 탐오하였던데다 오초전쟁에서는 앞장서 도망쳤던 전 영윤 자낭(子囊)의 후임으로 취임하면서 신포서, 동생인 사마 자기(子忌) 등과 합심하여 멸망할 뻔했던 초나라의 재건에 진력을 다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자서와 함께 오나라로 망명하였던 왕손 웅승[1]의 복귀를 도와주는데, 섭공 심제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베풀었고 백읍의 공작으로 봉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소왕의 뒤를 이은 왕 때에도 영윤을 유지하였고, 혜왕 6년에는 백공이 아버지의 원수국인 정나라를 정벌하도록 권했지만 자서는 반대하였고 이에 백공은 앙심을 품게 되는데 결국 혜왕 10년에 백공 승은 반란을 일으켜 혜왕을 유폐하고 이때 동생인 사마 자기와 함께 살해당한다. 섭공 심제량은 국가에 헌신했던 자서의 충성을 기리며 거병하여 백공의 난을 평정하였고, 1년간 섭정을 행사하다가 자서의 아들인 자국(子國)에게 영윤을 넘겨주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