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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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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춘추오패(春秋五覇)
초(楚)나라 6대 왕
장왕
莊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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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羋)
웅(熊)
려(侶), 여(旅)
아버지 초목왕(楚穆王) 웅상신(熊商臣)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91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1. 개요2. 재위 초기3. 패자를 자처하다4. 투월초의 난5. 춘추 시대 최대 스캔들6. 이후7. 일화8. 어록: 지과위무(止戈爲武)9.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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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22대 군주, 6대 왕. 초나라의 군주 중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며 춘추오패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재위 초기

출생연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기원전 614년 부친인 초 목왕이 급사하여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왕 때부터 불안정한 왕권과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어린 나이 때문에 그의 재위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거기에 재위 초반에 일어난 홍수, 냉해로 인한 기근까지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이를 진정시키려 측근 반숭과 영윤(재상) 자공이 동정을 나간 사이 약오(초나라 제14대 군주) 씨족(대대로 재상을 배출해온 유력 귀족 가문이었다)인 투극이 반란을 일으켜 공자 섭을 내세우고 수도를 장악한 다음, 장왕을 납치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상밀로 향했다. 그러나 여 땅에서 즙리와 습윤 등의 유인에 빠져 사망하고 장왕은 간신히 풀려난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국이 조금 진정되자 장왕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조회를 폐지한 채로 매일 사냥과 주연을 벌였다. 몇몇 대신들이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장왕은 "간언을 하는 자는 대부(大夫)와 상오(常晤)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생활이 3년이나 지속되면서 정계에는 간신들이 들끓게 되었고, 국력은 나날이 쇠락해졌다.

초 장왕 3년(기원전 611년), 이렇게 매일 같은 방탕의 끝에, 참다 못한 오거[1][2]라는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렸다.
오거: 언덕의 새 한 마리가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삼년불비불명(三年不蜚不鳴)[3]}
이 새는 어떤 새입니까?(有鳥在於阜,三年不蜚不鳴,是何鳥也?)
장왕: 3년 동안 날지 않았다니 날았다 하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三年不蜚,蜚將沖天), 3년 동안 울지 않았다니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오(三年不鳴,鳴將驚人). 경의 뜻은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시오.(舉退矣,吾知之矣)

그 뒤로 몇 달이 지나도록 장왕은 여전히 향락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거의 친구이자 또 다른 충신인 대부 소종(蘇從)이 찾아와서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리자[4], 장왕은 비로소 잔치상을 치우고 소종과 마주 앉아 국정을 논하고는, 다음날 그동안 아부하던 간신들을 숙청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3년에 걸친 사치와 향락은, 나라가 너무나도 혼탁해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수 없자, 일부러 사치와 향락을 즐겨 옥석을 가리고자 했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간신들을 처단한 장왕은 오거와 소종에게 국정을 맡기고 이후 신분이 미천하고 촌 사람이었던  손숙오 영윤(재상)으로 삼고, 토지 개간 및 화폐 개혁을 실시해 국력을 크게 키우며 패업을 시작했다.[5]

이것이 유명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이다. 그야말로 간지 폭풍의 일화. 조상들도 저 일화에서 간지 폭풍을 느꼈는지, 이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가 상당히 많다.

3. 패자를 자처하다

초 장왕 3년(기원전 611년), 용(庸)나라를 정벌하였다.

초 장왕 6년(기원전 608년),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차 200승(대)을 얻었다.

초 장왕 8년(기원전 606년), 장왕은 육혼(陸渾)의 융(戎)을 정벌하고, 낙하(洛河)에 이르자, 주나라의 국경 부근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한편 위기를 느낀 주나라는 권력은 없었지만, 종주국이라는 명목은 있는 나라였는데[6], 주정왕(周定王)은 왕손 만(王孫 滿)[7]을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주나라의 사신인 왕손 만이 오자, 초 장왕은 구정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냐고 물었는데(問鼎輕重), 왕손 만은 "천자의 자리는 정(鼎)이 아니라 덕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어찌 정에 대해 물으십니까?"라고 대답했다. 이는 초장왕의 말은 "중원의 패자가 되어 천자의 권위를 내가 가지겠다"라고 떠 본 것이고 사신인 왕손 만은 "아직 덕과 명분이 주나라에 있으니 천자의 권위를 넘보지 말아라"라는 뜻이다.

그러자 장왕은 껄껄 웃으며 "우리 초나라는 도검과 갈고리에 붙어 있는 날 만을 꺾어 녹여도 구정을 여럿 주조할 수 있지요." 라고 하면서 허울 뿐인 권위 따위는 초나라의 무력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간접적으로 말했는데,[8] 이에 왕손 만은 "먼 옛날 순•우 임금의 치세가 성하자 정을 만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신령스러운 것과 간악한 것(神奸)'을 구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라의 걸이 덕을 어지럽히자 정은 은나라로 옮겨갔고, 은나라의 주가 포악하게 굴자 정은 주나라로 옮겨갔습니다. 덕이 있다면 구정은 작아도 무거운 법이고, 간사하고 사악하면 아무리 커도 가벼운 법입니다. 주나라의 덕이 쇠하긴 하였지만 천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의 경중을 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고, 장왕은 이를 듣고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버리게 되었다.

참고로 구정 하나라 때 만들어진 솥으로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9]하는 국보였는데, 그것의 무게를 물어봤다는 것은 자기가 그 솥의 주인이 되어 초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들겠다는 속마음의 선포나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장왕의 초나라가 패권국을 넘어서서,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종주국이 되려고 했던 야망을 표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 사신은 '아직 덕과 명분은 주나라에게 있다. 이는 초나라의 군사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부분이다.'라고 지적하였고, 초 장왕도 이를 인정하고 물러난 것.

이러한 발언은 초나라가 한족이 아닌 묘족의 나라였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오나라는 주나라의 중시조의 자손이 세운 나라이니만큼 주나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 나름의 명분이 있지만 초나라는 주나라에게서 정식으로 책봉받은 제후가 아니라 지역의 토착민들이 후대에 스스로 나라를 세운 것이기 때문에 주나라에 충성할 이유가 적었다. 다른 제후국들이 현실적인 힘이야 어찌됐든 명목상으로나마 주천자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오나라 역시 시조가 주나라 왕실의 혈통이라 봤기 때문에 일정 부분 주나라의 체면을 지켜준 반면[10] 초나라는 전혀 연관 관계도 없고, 신세진 것도 없었기에 주나라를 경시했다. 초나라가 주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였지만, 이는 초나라가 중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지 복속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이는 군주의 명칭을 주나라와 같은 왕을 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황제란 단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천자의 공식 작위는 왕이었고, 제후국들은 오등작 명칭을 사용했다. 장왕의 발언은 단순히 그의 야망이라기보다는 초나라의 야망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4. 투월초의 난

초 장왕 9년(기원전 605년), 투월초(鬬越椒)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어떤 이가 투월초를 모함했는데, 장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투월초는 반란을 일으켰다.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활 솜씨는 신궁에 가까워서 전쟁 중에 장왕을 두 번이나 활로 위태롭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선 장왕이 투월초의 화살에 맞아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장왕이 초나라에 보물로 내려오는 화살이 3발이 있는데[11], 그걸 투월초가 두 발을 훔쳐가서 이제 두 발을 다 썼으니 다시는 장왕의 목숨을 노릴 일이 없다며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이런 소문을 퍼트린 한편으로 장왕은 계략을 써서 투월초가 활을 쏘는 것을 못하게 막아내고,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이 없게 하여 투월초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 백발백중'(百發百中)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기도 했다. 이때 투월초와 대결한 사람은 양유기(養由基)였는데, 양유기는 버들잎을 100보 앞에서도 맞힐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장수였다. 이들은 활쏘기 시합을 하기로 했는데, 먼저 투월초가 3발을 쏘자 양유기는 활로 막고, 몸을 옆으로 기울이며, 화살을 이로 물어서 투월초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 다음에 한 발로 투월초를 쏴서 반란을 제압했다. 그 뒤에 초 공왕은 양유기가 재주만 믿고 함부로 날뛰니, 활을 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12]

초장왕 13년(기원전 601년), 서(舒)나라를 멸망시켰다.

5. 춘추 시대 최대 스캔들

초 장왕 16년(기원전 598년), 진(陳)나라에 하어숙(夏御叔)이라는 대신이 있었다. 하어숙의 부인인 정나라 출신 하희(夏姬)는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하어숙이 죽고 난 이후 하희가 정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정분이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진(陳)나라의 군주였던 영공(靈公)까지 하희와 스캔들이 나서 하희의 아들이었던 하징서(夏征舒)가 영공을 살해해버렸다.[13]

당시 맹주였던 초 장왕은 신하가 군주를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진(陳)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은 진나라는 성벽이 높고 양식이 많으며 무기가 많아 작은 나라일지라도 쉽게 정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장왕은 그 말을 듣고서 진(陳)나라가 그 정도로 성벽이 높으며 양식이 많고 무기가 많다는 것은 백성들을 고달프게 해서 성벽을 높게 하고 양식을 빼앗으며, 무기를 만들게 해 그 원망이 얼마나 클 것이냐라고 하며 진(陳)나라를 쉽게 정벌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진(陳)나라를 공격했다.

장왕은 진(陳)군을 공격하여 하징서를 죽여버리고[14] 하희를 초나라로 데려왔다. 하지만 하희가 워낙 미인이라 장왕이 탐을 내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신하인 신공 무신(申公 巫臣)[15]이 하희는 남자를 망치는 여자라 하면서 장왕이 후궁으로 삼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자 장왕은 그 말을 들어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신하에게 하희를 시집보냈다. 하지만 그도 전쟁에서 죽게 되자 하희를 고향인 정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5년 후, 제나라로 가는 사신으로 무신이 자청해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무신이 제나라로 가던 도중 정나라에 있던 하희를 데리고 진(晉)나라로 도망가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16] 이 사실을 알게 된 초 성왕은 무신의 가족을 몰살시켜버렸다.[17] 신공 무신은 초의 재상인 영윤 자중과 사이가 나빴는데, 영윤 자중이 송나라를 정벌한 공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지를 하사해달라고 했지만 무신이 반대하여 영지를 받지 못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무신의 아들은 죽고 그 재산은 대부들이 나누어 가졌다.

잘한 것 하나 없는 무신은 이에 극도로 분노해양심은 있냐? 진나라 군주에게 본인을 오나라로 보내주면, 오나라를 크게 일으켜 두고두고 초나라의 근심거리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듣보잡 나라였던 오나라는 무신에 의해 중원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합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오자서 손무를 장군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하고 종묘를 불태우기까지 이른다. 고작 몇 사람의 성욕 때문에(...) 여러 가문과 여러 나라가 쑥대밭이 된 나비 효과인 셈이다. 어이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근대에는 나라의 정책결정이 극소수의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기에 개인적 원한으로 전쟁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예를 들어, 국익에 별로 도움될 것도 없는데 그냥 순수하게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릉대전을 일으킨 유비라거나.

6. 이후

초 장왕 17년(기원전 597년) 봄, 장왕은 정나라를 공격하여 포위를 하고, 세 달 만에 함락시켰다. 그해 여름에는 필 전투에서 진나라(晉)를 물리치고,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초 장왕 23년(기원전 591년), 장왕이 죽으니, 그의 아들 웅심이 초 공왕이 되었다.

7. 일화

어전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에 신하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기뻐하기는커녕 자신보다 더 나은 신하가 없으니 어찌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겠냐며 안타까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신하를 아껴 대인배로 불리는 한 사람으로서 절영지연이라는 고사를 만들어냈다.

또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가 아끼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을 너무나 아끼는 나머지 말에게 풀이 아닌 사람이 먹는 야채를 먹이고 비단 옷을 입히며 침대에서 잠을 자게 했다. 그 뒤 말이 죽게 되자 슬퍼하면서 말에게 관을 만들어 주려고 하였다. 신하들은 말에게 관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에 대거 반대했지만 이 말을 듣지 않고 말의 관을 준비했는데, 이때 우맹이라는 악공이 나타나서 이왕 하는 거 최고로 비싼 관에 넣어주고 무덤엔 비단으로 치장하며 국외의 국빈들까지 말의 장례식에 초청하자고 건의했다. 반어법[18] 그러자 장왕은 우맹의 말에 뉘우치고 말의 관을 만드는 걸 취소했다. 그리고 장왕이 죽은 말을 어찌해야겠냐고 묻자 우맹은 은유적으로[19] 먹을 것을 권했다. 그렇게 장왕은 그 말로 고깃국을 만들어 신하들과 나눠먹었다.[20]

그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먼 훗날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항우는 패왕이라는 칭호를 만들어 냈는데 이는 초장왕을 포함해 춘추시대의 강한 군주들이 가졌던 패자에서 따온 것이다.[21] 그런데 유명한 패자들의 말년이 대부분 안 좋았던 관계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던 모양이나 항우는 패자이면서도 끝이 좋았던 초장왕의 예시를 들며 결국 패왕이라 칭했다. 확실히 패자들 중에서는 드물게도 그럭저럭 길게 재위하면서도 끝은 좋은데다가 초나라 출신인 점이 감안되었을 수도 있겠다. 정작 항우는 초장왕의 후손을 죽여버렸지만...

8. 어록: 지과위무(止戈爲武)

초 장왕 17년(기원전 597년), 초나라가 정(鄭)나라를 쳐 굴복시키자, 진문공(晉文公) 이후 중원의 패자를 자처하던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필(邲) 땅에서의 전투에서 초나라에 크게 패배하였다.

초장왕이 정나라 땅 형옹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 신하 반당이 말했다.
“임금께서는 어찌 병장기들을 끌어모아 쌓고 진나라 군의 시신을 거두어서 경관(京觀)[22]을 만들지 않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승전을 하면 반드시 자손이 그 무공을 보고 잊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이에 초장왕이 말했다.
잘 모르는 소리다. 글자를 봐라. '武(무)'자는 '止(멈출 지)'와 '戈(창 과)'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무릇 武(무)의 7덕은 금폭(禁暴),[23] 집병(戢兵),[24] 보대(保大),[25] 정공(定功),[26] 안민(安民),[27] 화중(和衆),[28] 풍재(豊財)[29]이다. 그래서 자손이 그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두 나라 병사들의 뼈가 들판에 흩어지게 하였으니, 이것은 폭력[暴]이다. 무력을 과시하여 제후들을 위협하였으니, 이것은 병기를 거두지 못한 것[兵不戢]이다. 폭(暴)하고 불집(不戢)하니, 어찌 보대(保大)를 할 수 있겠는가. 진나라가 여전히 존재하니, 어찌 정공(定功)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백성들이 바라는 것에 거스른 것이 이미 많거늘, 어찌 안민(安民)했다 할 수 있겠는가. 덕이 없으면서 제후들과 강함을 다투었으니, 무엇으로 화중(和衆)할 수 있겠는가. 남의 위태로움을 나의 이익으로 여기고, 남의 환난을 나의 평안으로 삼아 영화를 누리고자 하니, 어찌 풍재(豊財)를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무(武)의 7덕 중 나는 한 가지도 가진 게 없는데 무엇을 자손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저 선대 왕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전쟁에 이겼음을 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무(武)는 나의 공적이 아니다. 옛날의 밝은 왕들은 불경한 자들을 토벌하여 그 우두머리를 죽여 땅에 묻고 흙을 쌓아올려 큰 치욕을 받게 하였다. 그런 일로 경관(京觀)이 만들어져, 불의하고 부정한 무리들을 징계한 것이다. 지금 진나라는 죄로 삼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모두 충성을 다해 그 군주의 명에 따라 죽었으니, 내가 어찌 그들을 경관(京觀)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춘추좌씨전
초장왕은 황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선군의 사당을 지어 전승을 고한 후 초나라로 돌아갔다.

9.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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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 이유로부터 절영지연의 일화로 언급이 된다. 이유의 이야기를 듣고 동탁은 일시적으로나마 여포와 화해할 마음이 생기게 된다.


[1] 단, 이 인물에 대해선 기록이 저마다 다르다. 《 사기》 <초세가>에는 오거, 《 한비자》에는 그냥 벼슬인 우사마라고 나오며, 《 여씨춘추》에는 '성공 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덤으로 소설인 《 열국지》에서는 신무외(申無畏)라고 쓰고 있다. 다른 기록에는 오거의 아버지인 오삼이라는 기록도 있다. 또 《사기》 <골계열전>에는 이 일화가 제위왕의 일로, 간언을 올린 신하는 순우곤으로 되어 있다. [2] 다만 오거는 장왕의 손자 초영왕 대에 활동하기에 오자서의 할아버지인 오거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동명이인이거나 오거가 아닌 다른 인물일 것이다. [3]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蜚又不鳴)(《사기》 <골계열전>), 삼년불시불비불명(三年不翅不飛不鳴)(《한비자》 <유노>), 혹은 삼년부동불비불명(三年不動不飛不鳴)(《여씨춘추》 <중언>편)이라고 쓰기도 한다. [4] 오거가 불비불명의 문답을 친우인 소종에게 전하지 않았을리 없으니, 이때의 간언은 장왕이 오거에게 보낸 정치적 신호에 대한 답으로 볼 수 있다. 즉, 장왕은 오거에게 '내가 아무 생각없이 놀기만 하는게 아니라 (누가 간신이고 누가 충신인지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밝힌 것이고, 이후 소종이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간언한 셈이다. [5] 《사기》 <골계열전>에도 이 일화가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제위왕 순우곤의 일화로 나온다. [6] 초나라가 이 명목상의 군주에게 충성을 안 한다는 이유로 다른 제후국들의 어그로를 끌었다. [7] 주 양왕의 손자로, 주 정왕과는 사촌 간이다. [8] 두 가지 의미로 협박했다고 할 수도 있다. '구정 따윈 창끝만 부러뜨려 모은 금속으로도 만들수 있을 정도로 창(군사력)이 많다. 혹은 '초나라는 창끝이 부러진 창으로도 구정을 유지할 수 있다.' 식으로. 어쨌든 병사들이 사용하는 창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결국 초나라의 강한 힘으로 주나라를 대신할 수 있다는 자신이다. [9] 천자가 신(왕의 조상)과 접할 때 쓰는 제사용 기구이기도 했고, 이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청동 주조술이 하나라 또는 상나라의 왕실에 의해 철통 보안을 받아온, 당시 개념으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물론 초 장왕의 시대에 와서는 그저 권위의 상징물이라는 가치만 남았을 뿐이지만. [10] 월나라의 경우에는 초나라와 비슷했지만 힘이 없었다. [11] 물론 군심 동요를 막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참고로 이 3발의 화살은 천자의 질서에서 꽤 의미있는 아이템인데, 주나라 무왕이 은(상)나라 주왕 제신을 패퇴시키고 달기를 처단한 후 그 시신에 벌할 목적으로 3발의 화살을 쏘았다. [12] 그 뒤에 양유기가 전쟁터에서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는 내용은 소설 열국지에 나온 것이며 양유기의 행적은 이후 기록이 되지 않았다. [13] 구멍 동서(...)들끼리 모여 시시덕거리며 하징서의 어디가 널 닮았네 어디는 너를 안 닮았네 하며 놀고 있던 걸 듣게 된 하징서가 듣다듣다 못해 군주를 죽여버리고 만 것이다. [14] 그것도 오체분시형으로! [15] 성은 미(羋), 씨는 굴(屈). 자는 자령(子靈). 굴무(屈巫)라고 부르기도 한다. [16] 이때쯤 하희의 나이가 40대 중반 이상으로 추정된다. [17] 현대인의 시점에서 보면 좀 과하단 생각도 들 수 있으나, 초 장왕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거니와, 고대 시대 때 국왕을 능멸한 사람과 그 가족, 가문에 대한 형벌이 어땠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18] 반어법이 맞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러면 왕께선 인간을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게 들통날 거라고 디스했다. [19] 불꽃 옷을 입히고 가마솥 관에 넣어 창자 속에 장사지내자고 했다. [20] 관까지 짜주려 할만큼 아끼던 말을 갑자기 고깃국으로 만들어 다같이 돌려먹은 것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애마를 무리하게 장사지내려한 것에 대해 신하들에게 사과하는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우맹의 국빈 초청 운운도 '안 그래도 한족 국가들이 묘족인 초나라를 야만국가라고 무시하는데 이런 이상한 짓을 강행하면 (당시 그들의 국제사회인) 중원의 다른 국가들이 퍽이나 좋게 보겠다'라고 외교적인 손해를 지적한 것이다. [21] 물론 이는 전국시대부터 있던 칭호라 황제처럼 없던걸 만든건 아니다. [22] 승전 기념의 큰 무덤 [23] 폭력을 금함 [24] 무기를 거두어 보관함 [25] 큰 나라를 유지함 [26] 세상을 평정하는 공을 세움 [27] 백성을 편안히 함 [28] 세상 사람들을 화합시킴 [29] 재물을 풍성하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