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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4 17:42:43

초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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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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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8대 왕
강왕
康王
미(羋)
웅(熊)
소(昭)
아버지 초공왕(楚共王) 웅심(熊審)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45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1. 개요2.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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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24대 군주. 8대 . 초공왕의 장남. 영왕, 자오, 공자 흑굉, 평왕의 형. 겹오의 아버지. 초나라가 패권을 잃고 휘청이기 시작한다.

2. 치세

초 강왕 원년(기원전 559년), 강왕은 아버지 공왕이 죽은 뒤 초나라의 왕이 되었다. 초나라는 진(晉)나라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데 그 증거로 초 공왕 대에 정나라가 진나라를 따랐다. 그 이유는 바로 초나라가 북쪽의 진나라만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오나라와도 상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진(晉)나라는 제나라, 정나라, 송나라, 노나라와 합종해 진(秦)나라를 정벌했다. 진(晉)나라가 정나라와 회맹하자 진(秦)나라는 초나라와 손잡았기 때문에 당시 초나라는 자기와 화친한 진(秦)나라를 구했다. 이에 역 전투에서 승리했다. 진(晉)나라는 진(秦)나라 영토 깊이 들어가 경수를 건넜다. 진(秦)나라 사람들은 경수에 독을 퍼뜨리는 등 식수에 피해를 주었으나 진(晉)나라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하지만 진(晉)나라는 진(秦)나라를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가을 초 강왕은 출병해 진(秦)나라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동쪽 오나라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초 강왕은 자낭을 보내 오나라를 쳤는데, 오군이 나가 싸우지 않는 지구전을 펼쳤으므로 초군이 돌아가는 바람에 이기지 못했다. 자낭은 뒤쳐져서 진군했는데, 그 이유는 오나라 사람들이 무능하여 경계를 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군은 험요지에서 초군을 막았다. 초군은 서로를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초군은 오군에게 대패해 공자 의곡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초 강왕 2년(기원전 558년), 강왕은 공자 오를 영윤으로 임명했고, 공자 파융을 우윤으로 임명했으며, 위자빙을 대사마, 공자 낭사를 우사마, 공자 성을 좌사마, 굴도를 막오, 공자 추서를 잠윤, 굴탕을 연윤, 양유기를 궁구윤으로 삼아 나라를 안정시켰다.

초 강왕 3년(기원전 557년)은 진(晉) 평공 원년으로 진(晉)나라는 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쳤는데, 담판 전투에서 진군에게 패배해 초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만다.

초 강왕 5년(기원전 555년), 진(晉)나라는 정나라, 송나라, 노나라, 위나라와 연합해 제나라를 쳤다. 제후들은 제나라 경내에 진입했고, 도성인 임치를 포위했다. 초 강왕이 즉위한 이후에 진(晉)나라가 제후들과 연합하여, 자국에게 반대하는 제후들을 정벌할 때, 초나라의 동맹국인 진(秦)나라를 토벌했다. 진(晉)나라는 여러 제후와 연합해 강국인 제나라를 쳤는데, 제의 경계로 깊숙이 진입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보면서 진(秦)나라와 초나라를 건드릴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진(秦)나라와 초나라가 다시 결합했다. 거기다 초나라의 영윤인 공자 오는 아직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초 강왕은 제나라를 지원하는 겸, 진(晉)나라를 견제하고자 영윤인 공자 오에게 명해 정나라를 치게했다. 그리고 곧 정나라의 도성인 신정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정나라는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초 강왕 6년(기원전 554년), 진(晉)나라는 제나라와 강화를 맺었고, 초나라는 헛걸음만 치게 되었다.

초 강왕 8년(기원전 552년) 여름, 자경이 죽자 위자빙을 영윤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이 일을 두고 신숙예와 상의했다. 그때 신숙예가 말했다. "금상이 어리며, 또한 총애하는 신하들이 많아 국사가 어렵다고 봅니다." 이에 위자빙은 병이 들었다면서 그것을 사양했다. 그리하여 강왕은 자남을 영윤으로 임명했다.

초 강왕 9년(기원전 551년), 강왕은 다시 위자빙을 영윤으로 임명하고, 공자 의를 사마로 삼았으며, 굴건을 막오로 봉했다.

초 강왕 12년(기원전 548년), 위자빙이 죽자 굴건을 영윤으로 임명했고, 굴탕을 막오로 봉했다. 이해 가을에 오나라와 싸웠으나 오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초 강왕 13년(기원전 547년), 강왕이 대부 초거를 시기하자 그는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의 대부 채성자는 초나라로 돌아와 영윤 자목과 의논했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와 초나라 양국의 정사를 언급했는데, 채성자가 말했다. "지금 초나라는 음란한 형벌이 많으니, 그 대부가 사방으로 달아나 다 죽게 생겼소. 그런데, 그 군주를 도모하는 것은 나라를 되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이 일로 인해 '초재진용'(楚材晉用)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초 강왕 15년(기원전 545년) 겨울, 강왕이 죽고, 그 아들인 웅운(熊員)[1] 겹오로 즉위하였다.


[1] 員(인원 원)자는 사람 이름으로 쓸 때는 원이 아닌 운(더할 운)으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