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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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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圭哲, Han, Giu-cheol
1951년[1] 4월 3일 ~ ([age(1951-04-03)]세)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본관은 청주(淸州)[2], 종교는 개신교이다. 경성대학교 인문문화학부 역사문화학전공 명예교수이다.

트위터, 네이버 블로그,[3] 개인 홈페이지[4]

2. 생애

1951년 4월 3일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산 아래에서 아버지 한병섭(韓秉燮, 1888 ~ 1956.3.30.)[5]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나무(姜羅武, 1906.2.29. ~ 2006.)[6] 사이에서 5남 6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와 누나들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니며 여러 학교를 다녔다. 처음 목포유달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경기도 안성시 소재 백성초등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고, 안법중학교에 진학했다가 논산대건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한양공업고등학교 기계과 야간부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현역으로 입대하여 33개월 군생활을 마쳤는데, 바로 복학하지 않고 금성사에 고졸 사원으로 입사하여 엘리베이터 기술영업사원으로 1년간 근무하였다. 그 뒤 5년 만에 고려대학교에 복학하여 3학년 때부터는 양영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하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고, 1980년 서울세종고등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하여 2년간 국사 세계사 교과를 전담하였다. 이후 졸업정원제의 시행과 더불어 변인석 교수의 배려로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82년 2월 『 10~12세기 발해유민 연구 : 거란·여진의 고려 내투·내왕을 중심으로』라는 석사 학위 논문으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1년 8월에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 발해의 대외 관계 연구 : 신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라는 학위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발해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역사학자가 되었다. 이후 한국에서 발해사 연구의 권위자로[7][8][9] 꼽힌다. 한규철의 해당 논문은 1994년 《발해의 대외관계사》라는 제목으로 신서원에서 출간되었고, 이후로도 2016년까지 발해 관련 연구에 힘써 관련 자료집이나 논문, 저서를 발간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1997년 한국고대사학회장(~1999.2), 2003년 부산경남사학회장(~2004.12)을 지냈고,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10] 설립추진위원회 위원과 설립 이후 연구위원(~2006.6), 자문위원(2006.11~2009.10)을 맡았다. 이밖에 2006년 고구려연구회장(~2007.12), 2008년 사단법인 고구려발해학회장(~2013.12)과 이사장(~2011.3)[11]을 지냈으며, 2012년 국사편찬위원회 제17대 위원을 맡기도 했다. 부산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2014년부터 재단법인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도 맡고 있다고. 그 밖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러시아 사회과학원 극동역사고고연구소 초빙교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소재 중국사회과학원 헤이룽장성 역사연구소 초빙교수를 각각 3개월씩 맡은 바 있고,
2002년 4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일본 도쿄도 고쿠가쿠인대학 대학원 객원연구교수로도 1년간 근무한 바 있다.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시대라는 분류명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고구려 멸망( 668년) 이후 발해 건국( 698년)까지 30년에 걸치는 시간 속에서 (영토 확보 및 주권 문제 등을 차치하고서라도)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었던 유일한 왕조는 신라 뿐이었다는 점도 가볍게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백제 땅을 차지하고 고구려 유민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신라가 (정치적 구호로써나마) 내걸었던 '삼한일가(三韓一家)'의 한국사적 의의를 존중하는 의미로써의 ' 통일신라'라는 호칭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기도 하다.[12] 한국사의 일부임이 틀림이 없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력하게 표방하고 나섰던 점부터가 신라와 더불어 존재했던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라 불리기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으며,그럼 그 발해를 이은 정안국이나 대발해국, 흥료국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발해 건국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가 아닌 '대(大)신라'라고 구별해서 부를 것을 제안한 것도 한규철.

'소수의 고구려 유민 + 다수의 말갈인'이라는 발해 건국 세력 구도에 대한 기존 학계의 해석에 대해서도 '말갈'이 변방 민족에 대한 비칭(卑稱)이라는 설을 지지하고, 관련 기록인 류취국사의 "그 나라(발해)에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은 적다"라는 기록에 대해서도 토인(土人)을 사인(士人) 즉 상류층을 가리키는 '사인'이라는 단어의 오기로 주장하며 해당 기록을 "상류층이 적고 하류층은 대부분"이라고 해석, 발해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민족적인 이질성이 적었다(즉 말갈은 고구려 유민과 전혀 별개의 종족이 아니라 변방 주민에 대한 중앙의 입장에서의 비하하는 칭호)는 주장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3년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주최로 인촌박물관에서 열린 발해사 한중공동학술회의에서 중국측 학자인 손진기와[13] 논문으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내놓기도.

1998년 한겨레를 까는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내용은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자와의 인터뷰인 '국민과의 대화'를 한겨레가 현장 취재가 아니라 사전 취재에 근거한 예측기사로 보도했으면서 현장취재로 기사를 쓴 것처럼 국민들을 우롱했다며 비판하는 내용.[14] 물론 그 뒤로 발해사 관련 기고도 똑같이 한겨레에서 다 했다.

아무래도 발해사 분야에서는 전문가로 꼽히다 보니 발해 관련 기사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신다. 2007년 사극 대조영의 역사 왜곡 요소를 지적하기도 했으며, 발해 고왕의 표준영정 자문을 맡기도 했다.

2015년 8월 31일 경성대학교에서 65세로 정년퇴임하였고[15], 현재는 경성대학교 인문문화학부 역사문화학전공 명예교수로 있다.

2016년 대한민국 한국사 국정교과서 문제에 관련해 다시금 이름이 등장하였다.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해당 시기인 7세기에서 9세기 사이 한국사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기존의 남북국시대가 아닌 통일신라시대로 용어가 수정기술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국정교과서 편찬 위원 선정 과정에서 한규철이 발해사 관련자로써 청탁되었다가 2016년 3월에 누락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원래 한규철은 고려대 은사이기도 한 김정배 위원장의 제의로 국정교과서 집필진 참가를 수락해 집필진으로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이후 탈락되는데, 한규철 본인이 1987년 호헌철폐 시국선언에 교수로써 서명했던[16] 전력이 문제가 되어서였다는 것.[17] 애초에 국정교과서 편찬 위원인 이기동 교수와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신라사 전공자이고[18] 보니 국정교과서에서 남북국 시대가 아닌 통일신라와 발해로 서술된 것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설적으로 한규철이 한국에서 발해사 연구자로써 지니는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한국에서 발해사가 얼마나 마이너한 위치에 있는지를 새삼 보여주고 있다.

3. 여담


[1] 인터넷에서 한규철 교수를 검색하면 나오는 1950년생이라는 생년은 호적상의 생년이라고 본인이 블로그에서 밝혔다. # [2] 양혜공파(襄惠公派) 33세 규(圭) 재(在) 항렬. [3] 한규철 교수 본인이 어떻게 발해사를 공부하게 되었는지 발해사 및 남북국시대라는 역사적 호칭에 대한 한규철 본인의 생각에 대해서 볼 수 있다. [4] 저자의 약력 및 발표 논문 및 저서와 발해사 관련 자료들이 올라와 있으니 참고 바람. 해당항목도 본 홈페이지에서 일부 채용하였다. 다만 약력 중에 '국사편찬위원회 제17대 위원(2012.10.25~현재 2015.10.24)'라고 되어있는 부분을 보면 2015년 10월 이후 홈페이지가 관리되고 있지 않은 모양. [5]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3권 2172쪽에는 1952년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자는 성률(聖律).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5년에 광무학교(鑛務學校)에서 측량을 배워 공직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전교사(傳敎師)로 활동했으나 어느 일본인과 싸워 충청북도 청주군으로 피신하였고, 이때 광산업에 관여하였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서당 교사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6] 강영숙(姜永淑)의 딸이다.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3권 2172쪽에는 1907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7] 한규철 이전에 발해 연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발해사 연구에 관한 한 독보적인 연구자임에는 틀림없다. 1990년대까지 대한민국 학계에서 발해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3명에 불과하다. 1995년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가 『 발해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국가 위상』이라는 학위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이전인 1984년에 『 발해의 '다인장(多人葬, 공동매장 풍속)'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바 있었다. 송기호 교수의 경우 한국에서 발해사 연구로는 대선배격인 유득공 발해고를 번역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임상선으로, 199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역사학과 한국사일반전공에서 『 발해의 지배세력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8] 애초에 발해사는 고고학적으로 훨씬 조건이 유리하기도 했고 아울러 남한에 맞서 정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프로파간다 목적상으로도 필요했던 북한에서 더 많이 연구된 주제였다.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3년과 1964년에 저우언라이의 안배로 중국 둥베이 지역의 옛 상경용천부 유적을 중국 학자들과 공동 답사하고 유일하게 발굴 보고서를 낸 곳이 북한이었다는 점만 봐도...(중국은 이후 문화대혁명이 터져서 보고서를 내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북한에서만 보고서가 나온 셈) 1970년대까지 발해사 연구는 남한보다 북한이 더 앞섰다고 한규철 교수 스스로 시인하고 있을 정도. [9] 참고로 한규철에 따르면 북한의 학술지에서는 첫머리에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 어쩌고 하는 부분이 반드시 들어감은 물론(본인도 그 부분 읽기가 굉장히 껄끄러우셨다고누군들 안 그럴까) 자국사와 관련해 외국 학자들(심지어 한국 학자들조차도)의 연구 성과를 전혀 소개(또는 반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발해 유적에 관한 고고학 연구 논문들에조차 지나치게 발해 문화의 고구려 계승성(및 유사성)만을 강조하고 당나라 말갈로부터도 일정하게 받았음이 틀림없는 부분에 대해서조차 간략하게 넘어가거나 아예 부정하기도 한다는 점도 북한 발해사 연구의 한계로 지적하고 있다.망할 주체사상의 폐해 [10] 2007년에 동북아역사재단으로 개편된다. [11] 고구려발해학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해당 학회 이사 직함은 2017년 현재도 유지하고 있으신 모양. 해당 홈페이지 자체가 2016년 이후로 리뉴얼을 안 했다. [12] 다만 발해 수립 이후에 '통일신라'라는 호칭을 쓰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하게 반대한다. [13] 1993년 당시에는 심양동북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었으며, 이후 동북공정의 핵심인물이 된다. [14] 1998년 1월 27일자 한겨레(뉴스라이브러리) [15] # [16] 1987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부산산업대(현 경성대 전신) 한규철 교수의 이름이 첫머리에 보인다. [17] KBS 보도, 한국일보, 한겨레 [18] 한국일보 기사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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