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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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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1e1e1d,#2d2f34>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초대 국왕
카를로스 1세 Carlos I |
|||
|
|||
출생 | 1500년 2월 24일 |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겐트 | |||
사망 | 1558년 9월 21일 (향년 58세) | ||
스페인 유스테 수도원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황제[1] | ||
1519년 6월 28일 ~ 1556년 8월 27일 | |||
카스티야 & 아라곤 국왕 | |||
1516년 1월 23일 ~ 1556년 1월 16일 | |||
오스트리아 대공 | |||
1519년 1월 12일 ~ 1521년 4월 28일 |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군주[2] |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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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1e1e1d,#2d2f34> 가문 | 합스부르크 가문 | |
이름 |
독일어: 카를 폰 합스부르크 (Karl von Habsburg) |
||
스페인어: 카를로스 데 아우스트리아 이 트라스타마라 (Carlos de Austria y Trastámara) |
|||
아버지 | 펠리페 1세 | ||
어머니 | 후아나 1세 | ||
형제자매 | 레오노르, 이사벨,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탈리나 | ||
배우자 | 포르투갈의 이자벨 (1526년 결혼 / 1539년 사망) | ||
자녀 | 이사벨(사생아), 마르가레테(사생아), 타데아(사생아), 펠리페 2세, 마리아, 후아나, 후안(사생아)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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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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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스페인의 국왕,[3] 이탈리아의 군주 등 국경을 초월한 여러 직함을 갖고 있는, 중근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왕관을 쓴 인물이다.
군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부모와 조상의 덕을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이 받은 대단한 상속자로 기록되는 인물. 친가와 외가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상속받아 카롤루스 대제(신성로마제국의 카를 1세) 이후 나폴레옹의 부상 이전까지 약 1,000년 동안의 기간 중에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어머니는 스페인 왕국의 후아나 공주,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후계자[4]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이던 필리프[5]이다. 이처럼 화려한 친외조부모님 덕분에 카를 5세는 유럽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상속받는 행운아가 되었다. 훗날 대영제국이 표방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원조인 셈이다.[6]
약 40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유럽 패권국 수장으로써 재위에 있었던 카를 5세는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그의 치세는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역사적 변곡점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유럽 곳곳에 산재한 워낙 방대한 면적의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16세기 전반기의 유럽사를 이야기할 때 그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종교개혁,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신대륙 정복,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등 굵직한 역사적 흐름의 한 복판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영지에 따라서 칭호는 카럴 1세(플란더런, 네덜란드), 카를로스 1세(카스티야-레온), 카를레스 1세(아라곤-시칠리아),[7] 카를로 4세(나폴리), 카를 1세(오스트리아), 샤를 2세( 부르고뉴), 샤를 3세(룩셈부르크) 등등 저마다 제각각이다.
오늘날에는 통상적으로 그의 대표작위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로 불린다. 과거 다른 명칭으로 불렸던 현지에서도 최근에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카를의 현지 표현 + 5세'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5세(Carlos V)'[8][9]라 표기하는 식이다. 스페인의 관광지에서 외국인들을 위해 카를로스 5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본 항목에서도 카를 5세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다만 영어 위키백과의 명칭은 찰스 5세 신성로마황제(Charles V)이다. 카를 5세라 하면 연결 이 항목으로 연결한다. 범용성을 따라 그렇게 정하였으나 카를 5세라고 부르는 경우도 없지는 않기에 리다이렉트한 모양이다. 참고로 영국 국왕 중 찰스 5세는 나오지 않았다. 현 영국 국왕이 찰스 3세이다.
2. 그의 타이틀
카를 5세가 보유했던 공식 타이틀 |
Wir, Karl der Fünfte, von Gottes Gnaden erwählter Römischer Kaiser, immer Augustus, zu allen Zeiten Mehrer des Reiches, in Germanien, zu Kastilien, Aragon, León, beider Sizilien, Jerusalem, Ungarn, Dalmatien, Kroatien, Navarra, Granada, Toledo, Valencia, Galicien, Mallorca, Sevilla, Sardinien, Córdoba, Korsika, Murcia, Jaén, Algarve, Algeciras, Gibraltar, der Kanarischen und Indianischen Inseln und des Festlandes, des Ozeanischen Meers &c. König, Erzherzog zu Österreich, Herzog zu Burgund, zu Lothringen, zu Brabant, zu Steyr, zu Kärnten, zu Krain, zu Limburg, zu Luxemburg, zu Geldern, zu Kalabrien, zu Athen, zu Neopatria und zu Württemberg &c. Graf zu Habsburg, zu Flandern, zu Tirol, zu Görz, zu Barcelona, zu Artois und zu Burgund &c. Pfalzgraf zu Hennegau, zu Holland, zu Seeland, zu Pfirt, zu Kyburg, zu Namur, zu Roussillon, zu Cerdagne und zu Zutphen &c. Landgraf im Elsass, Markgraf zu Burgau, zu Oristan, zu Goziani und des Heiligen Römischen Reiches, Fürst zu Schwaben, zu Katalonien, zu Asturien &c. Herr zu Friesland und der Windischen Mark, zu Pordenone, zu Biscaya, zu Monia, zu Salins, zu Tripolis und zu Mecheln &c. 카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임명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독일왕, 이탈리아의 왕,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10], 시칠리아 열도, 예루살렘[11], 나바라, 그라나다, 톨레도[12], 발렌시아[13], 갈리시아, 마요르카[14], 세비야[15], 사르데냐[16], 코르도바[17], 코르시카, 무르시아[18], 하엔[19], 알가르베[20], 알헤시라스[21], 지브롤터[22], 카나리아[이상], 서인도와 동인도, 섬들과 대양의 메인랜드의 왕, 기타 등등등. 오스트리아의 대공, 부르고뉴, 브라반트, 로트링겐[24],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림부르크, 룩셈부르크, 헬러, 아테네, 네오파트리아,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슈바벤, 아스투리아와 카탈루니아의 공[25], 알자스의 영주[26] 플란데런, 합스부르크, 티롤, 고리치아, 바르셀로나, 아르투아, 부르고뉴[27],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페레테, 키부르크[28], 나뮈르, 루시용, 세르다뉴, 쥣펀의 백작, 부르가우, 오르시타노와 고르치아노의 신성 로마 제국의 후작, 프리지아, 빈디시 마르크, 포르데노네, 바스크, 몰린, 살랭, 트리폴리, 메헬렌의 군주, 기타 등[29]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문장과 타이틀 목록 | |||
문장 | 타이틀 | 즉위 | 퇴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
1519년 6월 28일 | 1558년 2월 24일 | |
카스티야,레온의 왕 카를로스 1세 |
1516년 3월 24일 | 1556년 1월 16일 | |
아라곤,시칠리아의 왕 카를레스 1세[30] |
1516년 3월 24일 | 1556년 1월 16일 | |
나폴리 왕 카를로 4세 |
1516년 3월 24일 | 1554년 7월 25일 | |
독일왕 카를 5세 |
1519년 6월 28일 | 1530년 2월 24일 | |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1세 |
1519년 1월 12일 | 1521년 1월 12일[31] | |
브라반트 공작 카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림부르크 공작 카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로트링엔 공작 카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헬러 공작 카를 3세 |
1543년 9월 12일 | 1555년 10월 25일 | |
룩셈부르크 공작 카를 3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부르고뉴 공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6년 1월 16일 | |
나무르 후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세르다뉴 백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8년 10월 25일 | |
아르투아 백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에노 백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제일란트 백작 카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홀란드 백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플란데런 백작 샤를 3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저트펀 백작 카를 2세 |
1543년 9월 12일 | 1555년 10월 25일 | |
바르셀로나 백작 카를레스 1세 |
1516년 3월 24일 | 1556년 1월 16일 | |
부르고뉴 궁중백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6년 2월 5일 |
그의 이름은 다양하게 발음되었다. 이 중 가장 대중적인 명칭이 카를 5세와 카를로스 1세인데, 스페인 이외의 지역에서는 주로 황제로서의 직함인 카를 5세(Karl V)라 부른다. 심지어 스페인에서도 외국인 관광객 등을 위해 카를로스 5세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카를 5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1. 참여한 전쟁/전투 목록
- 콩키스타도르의 아메리카 정복
- 코무네로스 반란(1520~1521)
- 독일 농민전쟁(1524~1526)
- 제4차 이탈리아 전쟁(1521~1526)
- 파비아 전투(1525)
- 필리핀 정복(1529~1565)
- 제5차 이탈리아 전쟁(코냑 동맹 전쟁)(1526~1530)
- 사코 디 로마(1527)
- 합스부르크- 오스만 전쟁
- 제6차 이탈리아 전쟁(1536~1538)
- 제7차 이탈리아 전쟁(1542~1546)
- 슈말칼덴 전쟁(1546~1548)
- 제2차 슈말칼덴 전쟁(제후전쟁)(1552)
- 제8차 이탈리아 전쟁(1551~1559)
- 제2차 변경백 전쟁 (1552~1555)
4. 평가
4.1. 종교적 측면
카를 5세는 9년 동안의 부재를 끝내고 독일로 돌아왔으며 교회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있었다. 종교적인 대립은 평화적인 토의에서 논의되고, 개혁들에 대해서도 협의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새 신앙인들을 위하여
마르틴 루터의 동료이며 친구인
필리프 멜란히톤은 신앙고백서를 완성하였다. 그것은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위하여 세계사적 의미를 획득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1530년 6월 25일 제국의회에서 낭독되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인문주의자인 멜란히톤은 항상 타협적인 경향이었고 또한 그 점에서 인문주의자인 프라이부르크의 에라스뮈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새 교리를 실제로는 기존 교회의 교리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사람들은 아직 공통의 기초 관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교회와 신앙의 일치는 누구로부터도 근본적으로 의문이 제기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멜란히톤은 신앙고백서 끝에 이렇게 쓸 수가 있었다.
"이것은 가톨릭 교리의 총체 안에 들어 있다. 보는 바와 같이 거기에는 저자로부터 알려진 한에서 성서나 가톨릭 내지는 로마 교회와 어긋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논쟁은 신앙이 아니고 단지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 허용, 미사 예물과 사제 홀로 드리는 미사의 폐지, 고해성사 강요, 단식 규정, 수도서원, 주교 재치권 등의 폐지 같은 몇 가지 개혁 요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체재하는 교황 사절 캄페조에게 6월 26일 이러한 편지를 썼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황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 교회와 하등의 다른 신앙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예식에서의 완전히 사소한 차이만이 일치를 방해하고 있을지라도, 교회가 우리를 단죄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스도와 로마 교회에 충실하게 머무를 것입니다."
이렇게 화해적인 자세는 재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다. 황제 자신도 비타협적인 교황주의자는 아니고, 그의 마음의 밑바탕에는 에라스뮈스적인 뜻에서의 개방적인 인문주의자였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학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로 2개의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의 대변인은 멜란히톤과 에크였다. 가톨릭에서는 에크·파베르·코흘레우스에 의하여 완성되고, 8월 3일에 낭독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반박서」가 심의의 기초로 결정되었다. 협의에서 양측은 서로 양보하였다. 에라스뮈스의 정신이 모든 참가자들에게서 생동하고 있었다. 즉, 누구보다도 황제가 변호하고 있던 표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일치를, 타협하겠다는 최대한의 각오, 자신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결국 5가지만이 논점으로 남았는데, 그것은 평신도의 양형성체 허용, 사제의 결혼, 수도서원, 그동안 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부터 약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 미사의 제사성 ― 미사 전문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이었다.
처음 4가지 논점은 교회의 규율과 관련된 것이었고, 마지막 논점만이 신앙과 관계된 것이었다. 가톨릭에서 양보의 용의가 얼마나 컸는지는, 황제가 1530년 9월 14일 캄페조 교황 사절에게 위에서 지적한 마지막 논점들도 프로테스탄트에게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는 청원과 함께 대리를 파견한 사실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교황 사절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고를 보낸 로마에서는 기대를 걸었다. 교황 클레멘스는 당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가예티노 추기경에게 조언을 청하였다. 추기경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만 규율의 문제이고 신앙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결정은 앞으로의 공의회에서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두 문제는 그때부터 공개토론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멜란히톤은 만약 적어도 이 두 논점에서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 2가지의 양보를 로마로부터 얻어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에 가서야 그것들을 다룰 시간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적어도 평신도의 성혈 배령은 허용되었으나 때는 이미 30년이 늦은 후였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일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때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정신은 멜란히톤과 에라스뮈스의 정신이었고, 루터의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파문된 자로서 제국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코부르크 요새로부터 토의 과정을 대단히 정확하게 지켜보았고, 계속된 서신교환으로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하여 그는 신랄한 비난만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떠한 대화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8월 26일 아우크스부르크로 작센 선제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2001. 《Kleine Kirchengeschichte》(국내 번역명:《세계 교회사》) 한국어판 311-313쪽.
"이것은 가톨릭 교리의 총체 안에 들어 있다. 보는 바와 같이 거기에는 저자로부터 알려진 한에서 성서나 가톨릭 내지는 로마 교회와 어긋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논쟁은 신앙이 아니고 단지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 허용, 미사 예물과 사제 홀로 드리는 미사의 폐지, 고해성사 강요, 단식 규정, 수도서원, 주교 재치권 등의 폐지 같은 몇 가지 개혁 요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체재하는 교황 사절 캄페조에게 6월 26일 이러한 편지를 썼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황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 교회와 하등의 다른 신앙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예식에서의 완전히 사소한 차이만이 일치를 방해하고 있을지라도, 교회가 우리를 단죄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스도와 로마 교회에 충실하게 머무를 것입니다."
이렇게 화해적인 자세는 재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다. 황제 자신도 비타협적인 교황주의자는 아니고, 그의 마음의 밑바탕에는 에라스뮈스적인 뜻에서의 개방적인 인문주의자였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학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로 2개의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의 대변인은 멜란히톤과 에크였다. 가톨릭에서는 에크·파베르·코흘레우스에 의하여 완성되고, 8월 3일에 낭독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반박서」가 심의의 기초로 결정되었다. 협의에서 양측은 서로 양보하였다. 에라스뮈스의 정신이 모든 참가자들에게서 생동하고 있었다. 즉, 누구보다도 황제가 변호하고 있던 표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일치를, 타협하겠다는 최대한의 각오, 자신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결국 5가지만이 논점으로 남았는데, 그것은 평신도의 양형성체 허용, 사제의 결혼, 수도서원, 그동안 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부터 약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 미사의 제사성 ― 미사 전문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이었다.
처음 4가지 논점은 교회의 규율과 관련된 것이었고, 마지막 논점만이 신앙과 관계된 것이었다. 가톨릭에서 양보의 용의가 얼마나 컸는지는, 황제가 1530년 9월 14일 캄페조 교황 사절에게 위에서 지적한 마지막 논점들도 프로테스탄트에게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는 청원과 함께 대리를 파견한 사실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교황 사절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고를 보낸 로마에서는 기대를 걸었다. 교황 클레멘스는 당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가예티노 추기경에게 조언을 청하였다. 추기경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만 규율의 문제이고 신앙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결정은 앞으로의 공의회에서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두 문제는 그때부터 공개토론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멜란히톤은 만약 적어도 이 두 논점에서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 2가지의 양보를 로마로부터 얻어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에 가서야 그것들을 다룰 시간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적어도 평신도의 성혈 배령은 허용되었으나 때는 이미 30년이 늦은 후였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일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때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정신은 멜란히톤과 에라스뮈스의 정신이었고, 루터의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파문된 자로서 제국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코부르크 요새로부터 토의 과정을 대단히 정확하게 지켜보았고, 계속된 서신교환으로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하여 그는 신랄한 비난만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떠한 대화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8월 26일 아우크스부르크로 작센 선제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2001. 《Kleine Kirchengeschichte》(국내 번역명:《세계 교회사》) 한국어판 311-313쪽.
그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사건은 개신교의 출현과 종교개혁이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지금도 루터교의 기본 교의이며, 가톨릭의 트리엔트 공의회의 중요성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카를은 일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거의 재위 기간 내내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 노력했다. 만약 그가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유럽과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훨씬 빠른 속도로 개신교가 확산되었을 것이다. 다만 카를은 제국의 종교적 통합[32]을 위해 진심전력으로 노력했다. 물론 카를은 분명하게 가톨릭 신자였으며[33] 카를이 원한 '통합'은 분명히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 편에서의 통합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카를을 광신도였다거나, 비타협적 황제였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면 카를은 에라스뮈스나 가예티노처럼 가톨릭 진영의 온건파였으며, 이런 면에서는 개신교 진영의 온건파 멜란히톤과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었다.[34]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멜란히톤이 언명한 두 가지 문제를, 카를은 로마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걸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카를은 가톨릭-개신교 양측의 강경파와 달리 제국의 종교적 평화를 구현할 비전이 분명하게 있었다. 비록 이 비전은 루터와 로마의 찬물로 저지되었으나, 이후 역사의 진행[35]을 본다면 카를과 멜린히톤의 자세가 정답에 더 근접하였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카를의 종교적 비전은 현대적 의미의 관용이 아니며 정치적/군사적 권위를 동반한 것이었으나, 근대 초의 유럽 군주로서 특별히 비타협적이라 볼 이유는 없으며,[36] 동시대 가톨릭-개신교 양측의 강경파와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충분히 온건하고 대화에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2. 군사적 측면
또한 그는 제위 기간동안 종교 전쟁을 비롯해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수많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위 기간 중 유럽 본토에서 딱히 영토를 늘리지 못했다. 콩키스타도르들의 신대륙 정벌이 그의 치세 중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제국의 영토는 역사상 유래없을 정도로 확장을 거쳤지만, 정작 유럽 본토에서 그가 치른 전쟁의 성격은 그런 화려한 영토 확장과는 거리가 있었다.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전쟁은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물려받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수비전이었고, 두 번째는 개신교와의 종교 전쟁이었다. 이 중에서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주변국들의 견제나 오스만의 침략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촉발한 종교 전쟁 및 그로 인해 심각한 재정 소모와 통치 지역에 부과된 가혹한 세금은 실익이 없었기 때문에 변명할 도리조차 없다.
4.3. 경제적 측면
그의 화려한 군공은 유럽 역사상 전무후무한 넓이를 자랑했던 그의 영토, 다시 말해 세금에서 온 것이었다. 카를 5세는 쉴레이만 1세를 제외한 다른 정적들 전원보다 유리한 경제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정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낸 부실 군주였다. 왜냐면 생전에 그가 일으킨 수많은 전쟁은 그의 넓은 영토에서 나오는 세금으로도 힘에 부쳤으며, 신대륙에서 창출돼서 대량으로 유입되는 금은보화들도 제대로 된 제련법 따위나 당시의 사회 인프라로 인해 곧장 융통하기가 어려웠다.[37]
카를 5세가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세금 착취와 식민지 착취 뿐만 아니었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금융업에 힘쓰던 푸거 가문이나 벨져 가문 등에서 엄청난 양의 돈을 빌렸다. 물론 이러한 자금 융자는 그 자체로는 나쁜 일은 아니다. 향후 갚을 능력만 있었다면 오히려 그 능력과 신용, 나아가서는 그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자신의 이름으로 빌릴 수 있다는 실적까지 내세울 수 있게 된다. 융자해주는 측 또한 황제에게 돈을 대어줬다는 뒷배경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금 융자를 잘 이용해서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곤 했으며, 그의 고모 마르카레테는 어린 카를에게 가문의 전통적인 자금 융자 비결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카를 5세가 그의 상환 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자금을 빌렸다는 것이었다. 이러다보니 그의 치세 하의 스페인 왕국은 엄청난 빚을 졌는데 그 규모가 무려 3,900만 두카트 가량이나 되었다. 나중에 이 빚은 스페인 재정에 엄청난 부담으로 되돌아왔으며, 이로부터 말미암아 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결국 몇 번이나 파산하고야 만다. 펠리페 2세의 첫 파산은 왕위를 물려받은지 불과 1년 후인 1557년이었으므로 사실상 카를 5세의 실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후 이베리아 연합의 큰 짐이 되는 막대한 빚은 사실상 카를 5세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을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을 막는다고 더욱 키운 셈.
더 최악인 것은 카를 5세가 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지는 카드 돌려막기 기술을 시전했다는 점이다. 카를 5세는 푸거 가문에서 빌린 빚을 갚기 위해 스페인에서 '후로'라는 공채를 발행했는데, 그 이자가 무려 10%였다. 당연히 이 공채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매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몰았고, 나중에 후로의 이자율을 7%로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후로에서 나오는 연금에 의존한 채 스페인 내의 권리를 외국인에게 야금야금 빼앗기고 만다.
4.4. 종합적 평가
카를 5세는 그 생의 마지막에서 공연히 싸우다가 그의 최대의 목표를 놓쳤다는 괴로운 의식 밑에 서 있지 않으면 안되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세계사에서 "대치될 수 없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트리엔트 공의회라는 세계사적인 사건은 카를 없이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후베르트 예딘((Hubert Jedin)[38]
역사상 카를 5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를 단순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근대 초 유럽의 정치사, 종교사, 경제사, 군사사 등 온갖 분야에 카를 개인은 굵직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치세는 40여년이나 된다. 또한 이 시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로, 종교전쟁,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 신대륙 정복 등 굵직한 역사적 흐름들이 있었고 이러한 흐름의 한 복판에 카를 5세가 있었다.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적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카를 5세는 근대 초 가장 거대한 역사적 족적을 남긴 군주이며 이후의 서양사는 카를 5세 치하의 스페인 제국과 결코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39] 후베르트 예딘((Hubert Jedin)[38]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는 카를 5세의 일대기 묘사에 거의 한 챕터[40]를 할애[41]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면서 재위 39년간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하고 포토시[42]가격혁명을 일으키는 등 유럽의 경제를 뒤흔든 거대 광산이다. 현재는 은보다는 텅스텐 등 다른 금속을 주로 채굴하고 있다.]를 발견하였으며 루터파, 칼뱅파, 예수회가 발호하고 지동설이 대두한 데다 오스만 제국이 빈을 2번이나 포위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라 평하였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 설명조차도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카를 5세 (Kaiser Karl 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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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1세 (Rey Felipe I de Castil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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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Kaiser Maximilian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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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3세 (Kaiser Friedrich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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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레오노르[43] (Leonor de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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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의 마리 (Marie de Bourgog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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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작 샤를[44] (Charles, Duc de Bourgog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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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의 이자벨 (Isabelle de Bourb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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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나 1세 (Reina Juana I de Castil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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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란도 2세 (Rey Fernando II de Aragó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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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안 2세 (Rey Juan II de Aragó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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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나 엔리케스 (Juana Enrique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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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 (Reina Isabel I de Castil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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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2세 (Rey Juan II de Castil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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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이자벨[45] (Isabel de Portugal) |
5.2. 아내
프랑수아 1세의 장녀 루이즈와 차녀 샤를로트와 차례대로 약혼했지만 둘 다 결혼 전에 사망해서 무산되었다. 물론 둘 다 한꺼번에 약혼한 건 아니고 처음엔 루이즈와 약혼했으나 3살에 요절하고 그 다음에 샤를로트를 결혼 상대로 물색했지만 그녀마저 9살 때 요절했다.결혼 전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후처, 즉 의붓외할머니인 제르멘 드 푸아와 사통하는 관계였다는 말이 있다. 논란이 있으나 두 사람 사이에서 이사벨이라는 사생아 딸이 태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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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colcolor=black> 포르투갈의 이자벨 |
부인은 포르투갈의 이자벨.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와 아라곤의 마리아[46]의 장녀로 카를 5세와는 이종사촌이었다. 어머니 아라곤의 마리아는 이자벨이 14살이 되던 해 사망했고 훗날 시누이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47]가 아버지 마누엘 1세와 재혼해서 새어머니가 된다.[48] 이 결혼을 계기로 스페인이 포르투갈과 합병하게 된다.
이자벨이 카를 5세와 혼인하고 이자벨의 오빠인 주앙 3세는 카를 5세의 여동생 카탈리나와 결혼하여 겹사돈이 된다. 이자벨은 아름다운 외모에 지적이고 영리해서 남편이 대제국을 다스리느라 부재 중일 때는 정치를 잘 꾸려나갔다. 부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총 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자벨은 35세의 나이에 6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다. 이자벨을 많이 사랑했던 카를 5세는 이후 늘 검은색 상복을 입고 후처 없이 독신으로 지냈다. 유명한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도 칙칙한 검은 옷만 입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생아가 있기는 했지만, 결혼 전에 3명, 이자벨과 사별한 후에 1명의 사생아를 낳았으므로 불륜관계에서 낳은 것은 아니었다.
5.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포르투갈의 이자벨 (Isabel de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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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펠리페 2세 (Rey Felipe II de España) |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 슬하 1남[49] |
메리 1세 | ||||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슬하 2녀[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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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안나 슬하 3남[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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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녀 |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Maria von Spanien, Kaiserin des Heiligen Römischen Reiches) |
1528년 6월 21일 | 1603년 2월 26일 |
막시밀리안 2세 슬하 6남 3녀[52] |
2녀 |
포르투갈 왕세자비 주아나 (Joana de Áustria, Princesa de Portugal) |
1535년 6월 26일 | 1573년 9월 7일 |
포르투갈 왕세자 주앙 마누엘[53] 슬하 1남[54] |
요하나 반 데어 가인스트 (Johanna van der Gheyn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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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녀 |
파르마 공작 부인 마르가리타 (Margarethe von Parma, Duchessa consorte di Parma) |
1522년 12월 28일 | 1586년 1월 18일 | 피렌체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세 슬하 2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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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블룸베르크 (Barbara Blo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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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후안 (Don Juan de Austria) |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
- 펠리페 2세: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마리아:
1528년
6월 21일 ~
1603년
2월 26일
카를 5세의 장녀. 오빠인 펠리페 2세와 여러 모로 성향과 정치적인 관점이 비슷하고 사이도 가까웠던 마리아는 사촌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막시밀리안 2세와 결혼했다. 남편과 28년간의 결혼생활을 하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55] 마리아의 딸 안나는 오빠인 펠리페 2세의 4번째 부인이고 이 안나의 아들이 펠리페 3세로, 재혼을 거듭하면서도 오랫동안 남자후계자를 얻지 못했던 펠리페 2세의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였다. 딸 안나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어린 아이들을 남겨놓고 사망했기 때문에 마리아는 남편이 사망한 이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스페인 궁정에서 외손자들을 돌보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리아는 펠리페 2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 2번이나 스페인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 - 페르난도: 1529년 11월 22일 ~ 1530년 7월 13일
-
후아나:
1535년
6월 26일 ~
1573년
9월 7일
이중으로 사촌인 포르투갈의 후계자 주앙 마누엘과 결혼을 한다.[56][57] 남편은 1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몇 주 뒤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세바스티앙이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를 물려받는다.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오빠 펠리페 2세는 영국의 메리 1세와 결혼하기 위해서 영국으로 떠나기 전 요한나를 불러들여서 섭정을 맡기기도 했다. 후아나는 이후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았고 아들 세바스티앙도 이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연락과 초상화를 주고 받아 아들이 자라는 것과 소식을 들을 수는 있었다. 아들 세바스티앙은 3살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 주앙 3세에 이어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고, 마리아의 시어머니이자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58]가 섭정직을 맡는다. 후아나의 아들 세바스티앙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는 세바스티앙의 할아버지인 주앙 3세의 남동생으로 당시 66세였던 헨리케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헨리케도 추기경 출신으로 자녀 없이 고령으로 사망했기에 포르투갈 왕위는 다시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간다. - 후안: 1537년 10월 19일 ~ 1538년 3월 20일
- 사산아: 1539년 4월 21일
사생아
* 마르가레테: 1522년 12월 28일 ~ 1586년 1월 18일
카를 5세가 22살 때 얻은 사생아 딸. 카를 5세에게 인정을 받은 딸로, 파르마 공작 부인이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섭정직을 맡는다. 평범한 출신이었던 친모는 친척들의 강요로 억지로 그녀를 낳은 후 수녀원에 틀어박혀서 고모 할머니인 네덜란드의 섭정 마르가레테[59]와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60]가 마르가레테가 키웠고 마르가레테는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잘 받으며 자랐다. 마르가레테는 2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역시나 사생아 출신인 피렌체의 공작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61]이고 두 번째 남편은 파르마의 공작인 오타비오 파르네세로 남편과의 사이에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 마르가레테: 1522년 12월 28일 ~ 1586년 1월 18일
카를 5세가 22살 때 얻은 사생아 딸. 카를 5세에게 인정을 받은 딸로, 파르마 공작 부인이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섭정직을 맡는다. 평범한 출신이었던 친모는 친척들의 강요로 억지로 그녀를 낳은 후 수녀원에 틀어박혀서 고모 할머니인 네덜란드의 섭정 마르가레테[59]와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60]가 마르가레테가 키웠고 마르가레테는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잘 받으며 자랐다. 마르가레테는 2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역시나 사생아 출신인 피렌체의 공작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61]이고 두 번째 남편은 파르마의 공작인 오타비오 파르네세로 남편과의 사이에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6. 여담
-
그의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군을
매치락으로 박살낸
파비아 전투는 유럽사에서 최초로 화기인
총이 전면에서 활약해 대승한 전투로 평가된다. 그 놀라운 위력을 실감한
유럽 각국은 재빨리 총의 제식화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그의 재위 말년에 이르면 총기가 이미 유럽은 물론
일본까지도 전파된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는
창
검 같은
냉병기가 몰락하고 본격적으로 총의 시대가 열린 급변기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아이러니컬하게도, 파비아 전투에서 활약한 스페인 테르시오는 마지막까지 백병전을 염두에 둔 테르시오 전술을 유지했다. 이들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유럽 전술의 대세는 총기의 화력을 극대화하는 선형진으로 넘어가게 된다. 역으로 생각하면 파비아 전투와 무려 120년의 격차가 있는 로크루아 전투까지 테르시오가 줄창 써먹힐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전술이었다는 얘기도 되겠다.
이렇듯 총이 뜨면서 자연히 기사 계급은 몰락을 걷고 경보병이 승패를 가르는 시대가 열린다. 이에 따라 기사가 중핵을 이루는 봉건제도 또한 구조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가톨릭의 퇴조 크리와 맞물려 드디어 중세가 완결된다.
- 예수회가 가톨릭을 명나라에 처음 포교하고, 일본이 처음으로 스페인 출신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가톨릭과 접한 시기도 바로 그의 재위 기간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스며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후 꾸준히 민중에게 파고들어 훗날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일본의 시마바라의 난으로 이어진다.
- 그의 재위 중에 그 유명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훗날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까지 경탄할 이 사건은 당시 유럽 사회 전체를 일대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이야말로 중세적 사고가 근세로 넘어가는 분기점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카를 5세는 중년에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고자 수학 공부를 시작했는데[62][63] 그때 수학을 잘하던 사제들이 이 책을 그에게 추천해 주기도 했다.
나는 하느님에게는 에스파냐어로 말한다. 왜냐하면 에스파냐인들의 언어는 진중함과 장엄함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는 이탈리아어로 말한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인들의 말은 친근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유혹하자면 프랑스어로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언어도 이보다 매혹적으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꾸짖을 때에는 독일어로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 전체가 위협적이고, 거칠며 단호하기 때문이다.
- 그는 위와 같은 엄친아스런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64] 지금의 벨기에에 있는 겐트에서 출생하여 자랐기 때문에 카를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 그 밖에도 네덜란드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에 이르기까지 5개 국어를 익혀 구사했지만 실제로는 능숙하게 구사한 것도 아니었다. 모국어인 프랑스어와 그나마 비슷한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그럭저럭 했지만 독일어[65]와 네덜란드어[66] 실력은 처참했다. 그래도 결국 언어 천재인 할아버지를 둔 덕인지 처참했던 카를 5세의 언어 습득력은 17살 이후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카를 5세의 언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맞물려 그가 인생의 중년기에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상술한 5개 국어에 포르투갈어와 라틴어도 제법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동생들과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대화하는 것을 들은 대사들이 감탄하며 남긴 기록이 많다. 이는 그의 뛰어난 운동 신경과 함께 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말년에 은퇴하여 유스테의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로지 프랑스어만 사용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평생 다언어 때문에 씨름하느라 머리 아팠던 모양이다. 그가 다스렸던 영지인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과 저지대가 아닌 평생의 적국 프랑스어가 모어였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당시의 군주로서는 치명적이게도 라틴어를 지지리도 못했다.[67]
7. 대중매체에서
- 대항해시대 시리즈 중에서 1, 2, 3이 바로 그의 치세가 배경이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로만 나오는지라 이토록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가뜩이나 생김새도 여러 왕들 중 평범하게 생긴 편이다.
- 대항해시대 3에선 1517년경에 에스파니아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부왕 펠리페는 미구현이라 그 전까지는 이사벨 여왕이 세빌리아 왕궁을 지킨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에스파니아 국가 이벤트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주걱턱 국왕이 그로 추정되다가[68], 세컨드 에이지 업데이트 후 신성로마 컨텐츠가 추가되면서 서버의 월드 클락이 16세기 초반이라면 프랑크 프루트 교회에서 만날 수 있다. 아틀란티스 선행퀘에서는 모후 후아나가 아틀란티스 얘기를 들으면 그 때만은 맨정신으로 돌아오는 걸 알고 아틀란티스의 단서를 여러 경로를 통해 추적하던 중, 에스파니아를 견제하려고 프랑스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게 납치되어 루안다까지 끌려가나 플레이어에게 구출된다.
- 문명 3에서 오스트리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할 예정이었으나, 최종 발매 이전에 잘려나가서 더미 데이터로 흔적만 남아 있다.
- 베르디의 오페라 < 돈 카를로스>에서는 카를 5세의 혼령이 자신의 손자인 돈 카를로스(주인공)의 조력자 역할로 등장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혼령인 그는 손자를 위해 자신의 유해가 이장된 엘 에스코리알 궁전 성당으로 인도한다. 베르디의 또 다른 오페라이자 빅토르 위고의 운문 사극을 바탕으로 작곡된 에르나니에서는 늙은이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 (그것도 정략결혼) 한 여자를 꼬시려다 에르나니와 실바한테 발각되어 사각관계(…)까지 일으켜 버린다. 막판에서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확실하게 단념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연적 에르나니와 엘비라의 사랑을 축복하는 것으로 마무리. 물론, 비극 오페라답게 에르나니와 엘비라가 죽는 것이 진짜 엔딩이지만(…).
- 헨리 8세를 다룬 캐나다 드라마 튜더스에서도 당연히(?) 잠깐이나마 등장했다. 주걱턱을 보면 캐스팅 배역의 싱크로가 쩐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영국에서도 합스부르크 하면 주걱턱은 상식 수준인지라 오히려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했을 것이다. 이건 한국인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하면 바로 원숭이가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 스페인 방송국 rtve는 카를 5세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 드라마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Carlos, rey emperador)를 방영했는데 여기선 반대로 카를 5세가 미남으로, 헨리 8세가 싱크로율 가까운 뚱보로 묘사된다.
- Paradox Interactive의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능력치 4/5/5의 나름 명군으로 등장하며, 재위기에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1]
독일왕,
이탈리아 국왕 겸임.
[2]
부르고뉴 공작 겸임(명목상).
[3]
통일 스페인의 1대 국왕은 공식적으로는
이사벨 1세 부부이지만, 스페인이 완벽하게
동군연합된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첫 군주는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이다. 카를의 모친
후아나 여왕도 형식상 공동 통치자였지만 그녀는 왕조 개창자로 볼 수 없는 데다 그녀가 유폐된 상태에서도 실권은 전적으로 카를이 갖고 있었기에 대체로 카를 본인만을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첫 국왕으로 취급한다.
[4]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선출직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라는 신분은 없다. 다만 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 사실상 선출되어서 부친 필리프의 급사 후 그의 아들이자 황제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선출되었다.
[5]
부르고뉴는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이자 카를 5세의 할머니가 되는
마리 드 부르고뉴가 계승권을 갖고 있었고, 마리가 사망한 후 장남 필리프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덧붙여서 이 때의 부르고뉴는 그 전대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혼인합병으로 지금의
베네룩스 3국을 꿀꺽한 상태였다. 필리프는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후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1세로 즉위하였고 나중에 카를에게 스페인을 물려주었다.
[6]
원조 정도가 아니라, "짐의 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도다"라는 말을 실제로 남겼다.
[7]
통일 스페인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카스티야-레온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여전히 다른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카를 5세를 한 사람의 군주로 섬기는
동군연합의 형태였다.
[8]
훗날 보르본 왕조의
이사벨 2세가 즉위할 때, 이에 반발해 카를로스 전쟁을 일으킨 카를로스 공도 자신을 카를로스 5세라 자칭하기도 했다.
[9]
다만 스페인은 카를 5세 이후로도 카를로스의 이름을 가진 군주들이 많이 즉위했기 때문에 오류가 있는 표기법이다. 굳이 따지자면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로스 5세겠지만.
[10]
이상이 카스티야 연합왕국을 계승한 스페인 왕으로써의 작위이다.
[11]
예루살렘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로마 황제로서의 명목상 작위
[12]
1085년 알폰소 6세의 톨레도 점령 이후 창설된 스페인의 구성국
[13]
1238년 창설된 아라곤 왕국의 하위 왕국
[14]
1231년 아라곤의 차이메 1세가 아들에게 분봉한 아라곤의 하위 왕국
[15]
1238년 설립된 스페인의 구성국
[16]
샤르데나 왕국 이전 교황에 의해 설립된 아라곤의 하위 왕국
[17]
1236년 설립된 스페인의 구성국
[18]
1266년 무르시아가 카스티야에 넘어간 이후 설립된 스페인의 구성국
[19]
1246년 설립된 안달루시아의 스페인 구성국
[20]
포르투갈-알가르브 왕국으로서 포르투갈의 구성 왕국
[21]
안달루시아 지역의 스페인 구성국
[22]
15세기까지 최후의 스페인 이슬람 왕조 시절 썼던 왕 칭호, 1462년 이사벨 1세에 의해 스페인으로 편입
[이상]
스페인의 구성 왕국 작위
[24]
실제로 로트링겐, 즉 로렌을 통치한 적은 없다. 이는 카를의 증조부인
용담공 샤를 치세에 부르고뉴 공국이 로트링겐 공국을 점령하였을 때 참칭한 일종의
명목상의 작위로 할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자신의 아버지,
미남왕 필리프를 거쳐 자신에게 이어진 것이다. 용담공 샤를이 로트링겐을 점령했을 당시에도 로트링겐 가문과 로트링겐 공작은 멀쩡히 존재했고 이후 낭시 전투에서 샤를이 스위스 용병단과 로트링겐 공작에게 패배하면서 없던 일이 된다.
[25]
Prince는 보통 왕자로 번역되지만
대공 등 다른 의미도 있다. 자세한 것은
프린스 항목 참조.
[26]
란트그라프는 보통
방백으로 번역된다.
궁정백이나
변경백보단 낮지만 일반적인 백작령으로 구분되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후 발전한 제국 백작과도 구분된다. (제국 백작은 제국의회에 투표권이 있는 직위)
[27]
참고로,
프랑슈콩테 지역은 백작령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28]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친사촌이 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함으로서 얻게 된 작위이다.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 키부르크 백작가의 대는 끊겼지만 이후로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키부르크 백작을 칭했다.
[29]
그의 지위 중
쿠바·
멕시코 등을 포함하는 광대한
아메리카, 포르투갈로부터 영유권을 넘겨받은
필리핀,
알제리·
튀니지 등을 포함하는
아프리카
식민지는 제외한 것이다.
[30]
단, 시칠리아에서는 카를로 2세였다.
[31]
황제가 된 직후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제국의 대리 통치를 맡기면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넘겨주었다. 물론 오스트리아의 Erzherzog 칭호는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차남 등도 사용할 수 있어 왕의 아들에게 내려지는 대공의 의미를 가진
Prinz가 아닌 왕자라는 의미를 지닌 Prinz가 내려지는 것처럼 사용될수도 있어 그 전부터 Erzherzog라고 불렸지만 1521년 1월 12일을 기점으로 페르디난트는 전과 다르게 왕자의 느낌으로 사용되는 대공이 아닌,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인 대공이 되었다.
[32]
21세기 사람 입장에선 '통합'이 순진무구하게 보일지 몰라도, 카를이 살던 시대엔 서방 그리스도교가 가톨릭-개신교로 분열되어 400년 넘게 이어질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다시피했다. 당대인들에게 이 분열은 과도기적 해프닝었고 (가톨릭 입장에서든 개신교 입장에서든) '올바른 정신으로 통합된 교회'를 위한 역사적 진통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가톨릭측의 카를이나 개신교측의 멜란히톤 등이 통합을 위한 총대를 매려 한 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다.
[33]
교황들과는 대립했지만, 카를은 교황 개인과 교황의 직무를 분리해서 볼 줄 알았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태도가 간단할지 몰라도, 교황들에게 배신당한 당사자가 카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멘탈이 아닐 수 없다.
[34]
카를이 가톨릭 편을 들었다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건, 당시의 사조(思潮)가 아니라 현대 정치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틀린 것이다.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경쟁자와 대화하여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비판할 순 없는 것이다.
[35]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교의 기본 교리가 되었고, 가톨릭 평신도의 성혈 배령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허용되었고, 사제 독신제의 경우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에서 '예법의 문제일 뿐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한다.
[36]
종교에 정치적 권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인식은 카를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제후들도 가지고 있었고, 애당초 "Cuius regio, eius religio"(자기 나라에, 자기 신앙을)이라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슬로건부터가 "정치적 권위를 종교에 쓸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 것이다. 카를만 콕 집어서 비타협적이라 할 순 없다는 것.
[37]
실제로 이 당시 스페인은 쏟아져 들어오는 신대륙의 금은보화들을 제대로 가공하거나 화폐화할 능력이 없어, 누군가 값을 부르면 현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현찰 박치기. 실제로 이때 당시 기록에는 어떠한 상단이 물품값으로 막대한 황금을 받은 탓에 스페인 사람들이 "타국 놈들이 우리를 서인도 놈처럼 여겨!"라고 말할 정도. 당연하지만 이런 형태로 풀려나오는 엄청난 금은보화들을 국가가 마땅히 환원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마련이며, 실제로 그리 되었다. 이러한 금은을 관리할 수 있을 만한 제도 및 제련법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의 치세 당시의 일.
[38]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2001.
《Kleine Kirchengeschichte》(국내 번역명:《세계 교회사》) 한국어판 320쪽에서 재인용.
[39]
한동안 카를 5세가 역덕후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토를 상속 받은 동군연합 끝판왕 황제"라는 포인트로 유명했기에, 소위 '금수저'일뿐이라고 폄하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카를 5세의 역사적 족적을 잘못된 포인트로 조명했기에 일어난 오해일 뿐 제대로 된 평가라 할 수 없다.
[40]
제22챕터 "선행?"
[41]
이것을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저 책에선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스케일이 방대한 이 작품에서 각각의 챕터는 보통 수세대 동안의 사건을 다루며 각각의 인물에는 매우 짤막짤막하게 초점을 맞췄다.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조차 등장이 채 한 페이지를 못 넘겼다. 그런 책에서 카를 5세의 기록이 자세한 건
종교개혁 등 당대의 이슈가 워낙 풍부했기 때문이다.
[42]
현재의
볼리비아에 있는 은광(銀鑛)으로, 19세기까지 매년 엄청난 양의 은이 산출되어서
[43]
두아르트 1세의 장녀이자
페란도 1세의 외손녀이다.
[44]
주앙 1세의 외손자이다. 용담공 샤를(Charles le Hardi)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45]
주앙 1세의 손녀이다.
[46]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의 3녀로 카를 5세의 이모다. 원래 자신의 언니 이사벨이
주앙 2세의 외아들인 아폰소 왕자와 혼인했지만 1년 후 아폰소 왕자가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이사벨은 아폰소의 사후 6년 뒤 마누엘 1세와 재혼했지만 1년 뒤 미겔 왕자를 낳자마자 28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미겔 왕자도 생후 1년만에 사망하자 마누엘 1세는 이사벨의 여동생 마리아와 재혼해 10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47]
남편 카를 5세의 누나.
[48]
주걱턱이 나왔던 레오노르는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고, 마누엘 1세가 사망한 이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재혼했다. 프랑수아는 레오노르를 너무 싫어해서 대놓고 무시했다.
[49]
돈 카를로스
[50]
부르고뉴 여공작 이사벨,
사보이아 공작부인 카탈리나 미카엘라
[51]
펠리페 3세 등
[52]
루돌프 2세,
마티아스,
스페인의 왕비 아나,
프랑스의 왕비 엘리자베트 등
[53]
주앙 3세의 아들이다.
[54]
세바스티앙 1세
[55]
많이 낳기는 했지만
유아사망률이 워낙 높은 시대여서 마리아가 사망하는 시점에 살아있던 아이는 겨우 5명이고, 마리아는 저 시대에 74세까지 사는 저력을 보여준다.
[56]
주앙 마누엘의 아버지
주앙 3세는 후아나의 외삼촌(어머니 이사벨라의 오빠)이며, 주앙 마누엘의 어머니 카탈리나는 후아나의 고모(아버지 카를 5세의 여동생)가 된다.
[57]
주앙 마누엘의 누나인 마리아 마누엘라는 펠리페 2세의 첫 번째 부인이자
돈 카를로스의 친어머니다.
[58]
카스티야의 공동왕인
펠리페 1세와
후아나의 막내딸로 후아나가 정신적 문제로 갇혀 있을 때
유복자로 태어나 직접 키운 유일한 딸.
[59]
펠리페 1세의 여동생이자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드 부르고뉴의 딸로 카를 5세의 고모다.
[60]
펠리페 1세와 후아나의 딸로 카를 5세의 여동생으로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국왕
러요시 2세와 결혼했다.
모하치 전투로 남편을 잃은 후 고모에 이어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섭정을 맡았지만 영 신통치는 않았다. 남편이 전사하는 바람에 자녀는 없었다.
[61]
일명 일 모로. 얼굴이 까매서 흑인 하인이 낳았다고 의심되었다고 전한다.
[62]
이 시절의 수학 공부라 하면 측량, 천문, 물리 등 수학이 응용되는 다양한 분야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63]
어린 시절 그의 제왕학 교육 과정에서는 접해 보지 못한 이과적 학문은 그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다. 훗날 은퇴해서도 취미로 시계를 만들며 여생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그는 이과형 인재였을지도 모른다.
[64]
다만 이 대사는 카를의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65]
그의 신민 중 과반수가 사용한 언어였던 독일어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카를 5세는 독일어로 오가는 대화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66]
그의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가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탓에 그곳의 언어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손자 카를 5세도 그의 고향인 부르고뉴의 정체성을 가졌으면 해서 네덜란드어를 배울 것을 권유하는 숱한 편지를 그가 어릴 적주터 숱하게 보냈다. 결국 카를 5세는 그의 바램대로 부르고뉴적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으로 자랐지만, 정작 네덜란드어는 지지리도 못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11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등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 반하여 카를은 7세가 될 때까지 프랑스어로 된 단어를 겨우 3단어밖에 못 쓸 정도로 언어적 재능이 부족하여 주변의 걱정을 샀었다.
[67]
그를 접대한 다른 나라의 사신들이 그가 라틴어를 못 알아들어 프랑스어로 통역을 받아야 했고 라틴어로 물었는데 프랑스어로 답한다고 불평하는 편지들이 다수 발견된다. 그 설움 탓인지, 그는 말년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라틴어만큼 널리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없다며 라틴어 공부를 무척이나 강조했다.
[68]
생긴 건 펠리페 2세와도 닯아서 카를이라고 확정하긴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