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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7 23:31:29

알폰소 2세(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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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알폰소 2세(나폴리).jpg
Alfonso II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생 1448년 11월 4일
나폴리 왕국 나폴리
사망 1495년 12월 18일 (향년 47세)
시칠리아 왕국 마자라 델 발로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494년 ~ 1495년
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
어머니 클레르몽의 이자벨
형제자매 엘레오노라, 페데리코, 조반니 다라고나, 베아트리체, 프란체스코
배우자 이폴리타 마리아 스포르차
자녀 페르디난도 2세, 이사벨라, 피에로, 산치아( 사생아), 알폰소(사생아), 카를로(사생아), 프란체스코(사생아)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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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제13대 국왕.

2. 생애

1448년 11월 4일 나폴리 왕국의 수도 나폴리에서 페르디난도 1세와 클레르몽의 이자벨 사이에서 출생했다. 1458년 페르디난도 1세가 알폰소 5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에 의해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페르디난도 1세는 로렌 공작 장 2세의 침략과 이에 호응한 귀족들의 반란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러다가 1463년 반란군 지도자였던 타란토 대공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 델 발조가 사망하자, 페르디난도 1세는 즉시 타란토 대공의 영지를 확보한 뒤 일부 토지를 15세의 알폰소에게 물려줬다.

1465년 어머니 이자벨이 사망한 뒤 예루살렘 왕국 계승권을 비롯하여 아풀리아를 포함한 어머니의 소유물을 물려받았다. 그해 9월에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딸인 이폴리타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1467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적하는 피렌체를 돕고자 해군을 이끌고 출진해 상당한 활약을 하여 "훌륭한 제독"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478년 '파치 음모(Congiura dei Pazzi)'의 여파로 교황령과 나폴리 왕국이 피렌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아버지에 의해 나폴리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어 피렌체 및 반 교황 세력과 대적했다. 1479년 2월 20일 시에나 공략에 성공하는 등 연전연승했지만, 1480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파견한 오스만군이 오트란토를 기습 점령한 뒤 주민들을 학살하자 서둘러 나폴리로 돌아왔다.

이후 오스만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끝에 그들의 북상을 저지하고 오트란트에 가뒀고, 1481년 메흐메트 2세 사망 소식을 접한 오스만군이 콘스탄티니예로 철수하자 1481년 10월 25일 나폴리로 돌아와 승리를 선언했다.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와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맹을 맺고 페르디난도 1세의 사위인 페라리 공작 에스콜레 데스테를 상대로 전쟁을 단행하자, 알폰소는 이번에도 지휘관을 맡아 페라라를 지원했다. 그러나 1482년 8월 21일 캄포모르토 전투에서 식스토 4세를 도우러 온 베네치아군 사령관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에게 패배했다.

1482년 12월 식스토 4세가 마음을 바꿔 나폴리 왕국, 페라라 공국과 화해하기로 했지만, 베네치아는 전쟁을 중단하고 철수하라는 교황의 지시를 거부하고 전쟁을 강행했다. 이에 알폰소는 1483년 1월 베네치아를 응징하고자 하는 교황-나폴리-페라라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베네치아와 대적했다. 그의 군대는 베로나 성문까지 진군하는 등 한때 승승장구했지만, 베네치아군의 반격에 부딪쳐서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동생 페데리코가 이끄는 나폴리 함대가 베네치아 함대에게 패퇴했고, 1484년 봄 로렌 공작 르네 2세가 지휘하는 120명의 프랑스 기사와 베네치아 보병대로 이뤄진 군대가 바다를 통해 나폴리 왕국의 후방을 급습해 갈리폴리, 나르데, 모노폴리 등 오트란토 일대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공략했다. 페르디난도는 베네치아를 무력으로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1484년 8월 27일 베네치아에 평화를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나폴리 왕국이 빼앗아간 베네치아의 영토와 베네치아인들이 빼앗아간 오트란토 일대의 영토를 맞교환하며, 페라라는 일전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돌려받는 대신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1485년, 페르디난도 1세의 귀족 억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나폴리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귀족들의 음모를 포착한 알폰소는 놀라 백작령을 기습 공략해 놀라 백작의 아내와 두 자녀를 나폴리에 있는 카스텔 누오보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자, 다른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것을 두려워해 곧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페르디난도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협상하기 위해 차남 페데리코를 사절로 보냈다. 페데리코는 반란군의 본거지인 살레르노에 들어가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귀족들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알폰소를 몰아내고 왕위 후계자가 되라고 꼬드겼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모든 자연법과 아버지의 뜻, 그리고 동생으로서의 도리를 볼 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귀족들은 페데리코를 반란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감옥에 가둔 뒤 교황의 깃발을 성루에 내걸었다.

그제야 귀족들의 반란의 배후에 교황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페르디난도는 몹시 격분해 알폰소에게 대규모 병력을 주고 교황령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알폰소는 교황령과의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로마에 사절을 보내 "나는 교황과 사도의 순종적인 아들이므로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반역자들의 올가미에서 왕국을 해방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라며,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나폴리 왕국의 대주교, 주교, 성직자들에게 15일 이내에 나폴리로 와서 왕을 알현하고 담당 교구에 거주하라고 덧붙였다. 로마에 있던 살레르노 대주교와 밀레투스 주교, 테아노 주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수입을 박탈당했다. 페르디난도는 또다른 군대를 모아 조카이자 알폰소의 장남인 카푸아 공작 페르디난도에게 맡기고 알폰소를 돕게 했다.

인노첸시오 8세는 나폴리 왕국군이 금방이라도 교황령으로 쳐들어 오려 하자 겁에 질려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교황청을 돕기를 거부했고, 그 사이에 나폴리군이 교황령에 쳐들어가 교황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 뒤 로마를 포위했다. 인노첸시오 8세는 3개월간 로마에 꼼짝없이 틀어박혀 있다가 르노 2세는 올 기미가 없고 베네치아도 돕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나폴리 왕국과 화해하기로 하고 나폴리 귀족들에게 페르디난도와 화해하라고 지시했다. 이리하여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의 중재하에 나폴리 국왕과 교황-나폴리 귀족들간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페르디난도는 로마 교황을 인정하고 그에게 일정한 교회수입과 십일조를 지불하며, 귀족들을 괴롭히는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 대신 교황은 나폴리 왕국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귀족들은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귀족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페르디난도는 살레르노 백작의 아들인 마르코와 자신의 조카인 아말피 공작의 딸과의 결혼식 행사를 카스텔 누오보 성당에서 열게 한 뒤,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모조리 체포한 뒤 모든 명예와 직위를 박탈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 장남 알폰소의 주관하에 모든 시신을 자루에 담은 뒤 바다에 내던졌다. 이 사건이 나중에 유럽 각지에 알려지자, 왕이 약속을 위반한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페르디난도와 알폰소는 귀족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치를 내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노첸시오 8세는 샤를 8세에게 나폴리 왕국을 침략하라고 촉구했지만, 당시 샤를 8세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를 중심으로 뭉친 귀족들의 반란에 시달렸기 때문에 나폴리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한편, 페르난도 2세는 자기가 중재한 평화 협정을 위반한 것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이를 빌미삼아 나폴리 왕국을 집어삼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페르디난도는 조반니 나쿠클레리오를 바르셀로나에 보내 협약을 위반한 것에 사과하면서, 알폰소의 장남 페르디난도와 페르난도 2세의 딸들 중 한 명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양국간의 협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아라곤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토후국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나폴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나폴리 왕국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1493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밀라노 공작이 되기 위해 나폴리 왕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한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에 따라 나폴리 왕국을 향한 원정을 준비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페르디난도는 프랑스 왕국군이 이탈리아에 쳐들어오면 장차 나폴리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 여기고 이탈리아 각국의 군주들에게 하나로 뭉쳐서 프랑스 왕국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나폴리 왕국의 앞날을 근심하다가 1494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알폰소 2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오른 그는 1494년 5월 8일 교황 특사 후안 데 보르자 란졸 데 로마니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여동생 이사벨라의 남편이자 밀라노 공작인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에 맞서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루도비코의 영지인 바리 시를 공략했다. 이에 루도비코는 샤를 8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샤를 8세는 1494년 9월 프랑스군 25,000명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프랑스군은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로마를 지나친 뒤 나폴리 왕국을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495년 초, 샤를 8세는 포르투 베네레에서 알폰소 2세의 동생 페데리코가 이끄는 피렌체-나폴리 연합 함대를 격파한 뒤 나폴리로 접근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자신에게 죽은 희생자들이 꿈속에 나타나 저주를 퍼붓자 심한 두려움에 떨었고, 나폴리로 접근하는 프랑스군을 막을 의지가 없었다. 결국 1495년 1월 23일 아들 페르디난도 2세에게 양위한 뒤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1495년 2월 22일 시칠리아 마자라 델 발로의 한 수도원에 은거했고, 12월 18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