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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6:07:13

페르디난도 2세(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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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o II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생 1467년 8월 26일
나폴리 왕국 나폴리
사망 1496년 9월 7일 (향년 29세)
나폴리 왕국 소마 베수비아나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495년 ~ 1496년
아버지 알폰소 2세
어머니 이폴리타 마리아 스포르차
형제자매 이사벨라, 피에로
배우자 조반나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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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제14대 국왕.

2. 생애

1467년 6월 26일 나폴리 왕국의 수도 나폴리의 카스텔 카푸아노에서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장남이자 칼라브리아 공작인 알폰소와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이사벨라, 피에로가 있었다. 그는 조부의 이름을 따라 페르디난도라는 이름이 지어졌고, '작은 페르디난도(diminutivo Ferrandino)'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이 시기에 이폴리타가 친정에 보낸 편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아들을 가리켜 "진주처럼 아름답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즐거워한다"며 건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변덕스러운 아기라고 밝혔다.

14살 때인 1482년경 조부 페르디난도 1세의 부관이 되어 아브루초로 향하는 원정대를 지휘해 베네치아 함대로부터 해안을 방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85년에서 1486년 사이에 나폴리 귀족들이 페르디난도 1세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 알폰소와 함께 반란 진압에 힘썼다. 1491년 로사노 공작이자 동생인 피에로가 사망한 뒤, 왕위 후계자인 알폰소의 마지막으로 남은 적법한 아들이 되었다. 1494년 1월 25일 페르디난도 1세가 사망한 뒤 아버지가 알폰소 2세로서 왕위에 올랐을 때 칼라브리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알폰소 2세는 즉위 직후 여동생 이사벨라의 남편이자 밀라노 공작인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에 맞서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루도비코의 영지인 바리 시를 공략했다. 이에 루도비코는 샤를 8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샤를 8세는 1494년 9월 프랑스군 25,000명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프랑스군은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로마를 지나친 뒤 나폴리 왕국을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495년 초, 샤를 8세는 포르투 베네레에서 알폰소 2세의 동생 페데리코가 이끄는 피렌체-나폴리 연합 함대를 격파한 뒤 나폴리로 접근했다. 이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알폰소 2세는 1495년 1월 23일 아들 페르디난도에게 양위한뒤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졸지에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2세가 된 그는 샤를 8세에게 누가 나폴리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판가름하자며 결투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나폴리 귀족들이 앞다퉈 프랑스군에 귀순하면서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나폴리 시민들을 불러모아 곧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올 테니 프랑스인들의 압제를 조금만 참고 있으라고 당부한 뒤 일가족과 4,000명의 스위스 용병, 14척의 겔리선을 이끌고 이스키야 섬으로 피신했다.

이스키야 섬에 도착한 페르디난도 2세는 그 곳에 수비대장 유스토 델라 칸디다(Justo della Candida)가 성채를 굳게 닫아서 먼저 도착한 가족들을 연금하고 자신의 입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내 약혼자 조반나만이라도 데리고 나올 수 있도록 나 혼자 성채에 들어가게 해달라"라고 요청했다. 유스토는 그가 혼자서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원하는 대로 해줬다. 페르디난도 2세는 성안에 들어가서 유스토와 마주치자마자 단검을 뽑고 달려들어 유스토를 찔러 죽인 뒤 수급을 베고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 이리하여 가족과 성채, 수비대를 되찾은 그는 이스키야 요새 수비를 굳건히 했다.

한편, 샤를 8세는 1495년 2월 22일 나폴리에 입성한 뒤 '카를로 4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페르디난도 2세의 삼촌인 페데리코를 불러서 섬에서 농성중인 조카를 설득해 나폴리 왕국의 계승권을 포기하게 한다면 프랑스에 있는 많은 영지와 보물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그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왕으로서 살고 죽기를 서원했다"라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샤를 8세는 설득을 포기하고 이스키야 섬을 공격했지만, 페르디난도 2세가 굳건히 버텨서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폴리 귀족들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프랑스 귀족들을 고위 관직에 선임했으며, 나폴리를 약탈했다. 이에 프랑스군의 기세가 두려워서 항복했던 나폴리 귀족과 백성들은 점차 프랑스 국왕에게 불만을 품었다.

1495년 3월,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군이 나폴리까지 밀고 내려와 약탈을 자행한 것에 깊은 경계심을 품고 '베네치아 동맹'을 결성했다. 여기에 샤를 8세가 밀라노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루도비코 스포르차 역시 가담했다. 1495년 5월 초, 제노바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라팔로 해전에서 궤멸시켰다. 이로 인해 섬 공략에 필요한 중포와 전쟁 물자 등을 가득실은 수송선들이 모조리 침몰해버렸고, 수송로는 모조리 끊겨버렸다. 이에 샤를 8세는 길베르 드 몽펜시에, 버나드 스튜어트 등이 인솔하는 주둔군을 나폴리에 남긴 채 프랑스로 돌아가고자 북상했고, 귀국로를 가로막는 동맹군을 1495년 포르노보 전투에서 가까스로 격파한 뒤 프랑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매독이 창궐해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악재를 겪었다.

한편, 페르디난도 2세는 이스키야에서 메시나로 향한 뒤 시칠리아와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스페인 장군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600명의 창기병과 1,500명의 보병대가 스페인에서 메시나로 이동했다. 페르디난도 2세는 1495년 5월 24일 곤살로와 합세한 뒤 칼라브리아로 무혈 입성한 후 레지오로 진출했다. 이후 1495년 6월 28일 세미나라에서 샤를 8세가 남겨둔 프랑스군과 격돌했다. 이때 곤살로는 적의 기세가 예상보다 드높은 걸 보고 전투를 미루려 했지만, 페르디난도 2세는 "저놈들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을 백성들을 한시바삐 구해야 한다"라며 전투를 속행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어진 전투에서 히네테, 로델레로 등 경장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스페인군 장다르메 스위스 용병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군에게 대패했고, 페르디난도 2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프랑스의 압제에 분노한 민중들이 몰려든 덕분에 군세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곤살로와 함께 프랑스 주둔군의 보급로를 틀어막고 유격전을 전개한 결과 칼라브리아를 조금씩 탈환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에 복무하던 많은 용병들은 급료를 받지 못하자 무단 이탈했고, 나머지 병사들은 적의 유격 전술에 시달린 끝에 하나둘씩 귀순했다. 1495년 7월 7일, 프랑스군을 나폴리에서 축출한 페르디난도 2세는 나폴리에 입성해 백성들의 진심어린 환영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군을 나폴리 왕국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공세를 이어가다가 1496년 8월 말에 소마 베수비아나에서 조부 페르디난도 1세와 아라곤의 후아나 사이의 딸이자 자신의 나이 어린 이모인 조반나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당시 왕국에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1496년 9월 7일 소마 베수비아나에서 병사했다. 생전에 조반나 외에도 여러 여인과 관계를 맺었지만 자식을 한 명도 낳지 못했기에, 알폰소 2세의 동생이자 페르디난도 2세의 삼촌인 페데리코가 나폴리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