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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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여성) | ||||||
GBE | |||||||
찰스 스콧 셰링턴 (1922) |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1946) |
리들리 스콧(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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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E | |||||||
프레더릭 벤팅 (1934) |
에드먼드 힐러리 (1953) |
게오르그 솔티 (1971) |
시드니 푸아티에이 (1974) |
찰리 채플린 (1975) |
앨프리드 히치콕 (1980) |
밥 호프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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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와일스 (2000) |
로저 무어 (2003) |
팀 버너스리 (2004) |
조너선 아이브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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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ight Bachelor | |||||||
아이작 뉴턴 (1705) |
찰스 라이엘 (1848) |
찰스 휘트스톤 (1868) |
조지프 리스터 (1883) |
아서 코난 도일 (1902) |
W. S. 길버트 (1907) |
프랜시스 골턴 (1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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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퍼드 매킨더 (1920) |
프레더릭 G. 홉킨스 (1925) |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1935) |
오언 리처드슨 (1939) |
알렉산더 플레밍 (1944) |
랠프 리처드슨 (1947) |
로런스 올리비에 (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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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길구드 (1953) |
칼 포퍼 (1965) |
알프 램지 (1967) |
쉬리다스 람팔 (1970) |
제임스 블랙 (1981) |
마이클 아티야 (1983) |
클라이브 싱클레어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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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 해리슨 (1989) |
V. S. 나이폴 (1990) |
더크 보가드 (1992) |
로저 펜로즈 (1994) |
팀 라이스 (1994) |
캐머런 매킨토시 (1996) |
마이클 스타우트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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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너스 (1999) |
리처드 브랜슨 (2000) |
숀 코너리 (2000) |
톰 커트니 (2001) |
믹 재거 (2002) |
벤 킹슬리 (2002) |
리들리 스콧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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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색스 (2005) |
헨리 세실 (2011) |
케네스 브래너 (2012) |
안드레 가임 (2012) |
다니엘 데이 루이스 (2014) |
패트릭 헤드 (2015) |
마크 라일랜스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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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래트클리프 (2018) |
톰 무어 (2020) |
마이클 호턴 (2021) |
마틴 에이미스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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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E + Knight Bachelor | |||||||
데이비드 린 (1953) |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1959) |
알렉 기네스 (1959) |
스탠리 매튜스 (1965) |
맷 버스비 (1968) |
알렉 이시고니스 (1969) |
에른스트 곰브리치 (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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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애튼버러 (1976) |
존 밀스 (1976) |
월터 윈터보텀 (1978) |
데이비드 애튼버러 (1985) |
윌리엄 골딩 (1988) |
피터 유스티노프 (1990) |
이안 맥켈런 (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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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홉킨스 (1993) |
데릭 제이코비 (1994) |
바비 찰튼 (1994) |
사이먼 래틀 (1994) |
조지 마틴 (1996) |
마이클 갬본 (1998) |
아서 C. 클라크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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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1998) |
이안 홈 (1998) |
존 엘리엇 가디너 (1998) |
톰 피니 (1998) |
나이젤 호손 (1999) |
알렉스 퍼거슨 (1999) |
프랭크 윌리엄스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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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케인 (2000) |
폴 스미스 (2000) |
바비 롭슨 (2002) |
앨런 파커 (2002) |
앨런 베이츠 (2003) |
그레고리 윈터 (2004) |
트레버 브루킹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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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다이슨 (2007) |
크리스토퍼 리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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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코놀리 (2017) |
배리 깁 (2018) |
마이클 페일린 (2019) |
데이비드 수셰이 (2020) |
샘 멘데스 (2020) |
스티브 맥퀸 (2020) |
로저 디킨스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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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프라이스 (2021) |
존 부어만 (2022) |
브라이언 메이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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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 + Knight Bachelor | |||||||
어니스트 섀클턴 (1909) |
윌리엄 브래그 (1941) |
리처드 돌 (1971) |
잭 브라밤 (1978) |
지미 새빌 (1990) |
클리프 리처드 (1995) |
트레버 맥도날드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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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 모스 (2000) |
재키 스튜어트 (2001) |
톰 존스 (2006) |
테리 프래쳇 (2009) |
패트릭 스튜어트 (2010) |
밴 모리슨 (2015) |
앤디 머리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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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2018) |
마이클 모퍼고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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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E + Knight Bachelor | |||||||
폴 매카트니 (1997) |
제프 허스트 (1998) |
나이젤 쇼트 (1999) |
니콜라스 윈턴 (2003) |
닉 팔도 (2009) |
링고 스타 (2018) |
케니 달글리시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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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해밀턴 (2021) |
케니 달글리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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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13대, 20대 |
30대 |
23대 |
대행 |
블랙번 로버스 FC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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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맥케이 (1987~1991) |
→ |
케니 달글리시 (1991~1995) |
→ |
레이 하포드 (1995~1996) |
셀틱 FC 역대 주장 | ||||
빌리 맥닐 (1963~1975) |
→ |
케니 달글리시 (1975~1977) |
→ |
대니 맥그레인 (1977~1987) |
케니 달글리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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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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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79 · 1982-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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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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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79 · 1979-80 · 1980-81 · 1982-83 · 1983-84 |
1983 Ballond'or | ||
수상 미셸 플라티니 |
2위 케니 달글리시 |
3위 알란 시몬센 |
케니 달글리시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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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비상임 이사 | |||||
Liverpool Football Club Non-Executive Directo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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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니 달글리시 경 Sir Kenny Dalgli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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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케네스 매시슨 달글리시 Sir[1] Kenneth Mathieson Dalglish, MBE[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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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1년 3월 4일 ([age(1951-03-04)]세) | ||||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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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3cm / 체중 73kg | ||||
주발 | 오른발 (양발) | ||||
직업 |
축구 선수 (
중앙 공격수[3]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
||||
소속 | <colbgcolor=#d00027> 선수 |
셀틱 FC (1968~1969 / 유스) 셀틱 FC (1969~1977) 리버풀 FC (1977~1990) |
|||
감독 |
리버풀 FC (1985~1991 / 선수 겸 감독) 블랙번 로버스 FC (1991~199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7~1998) 셀틱 FC (2000 / 감독대행) 리버풀 FC (2011~2012) |
||||
경영 |
블랙번 로버스 FC (1995~1997 / 풋볼 디렉터) 셀틱 FC (1999~2000 / 풋볼 디렉터) 리버풀 FC (2013~ / 비상임 이사) |
||||
국가대표 | 102경기 30골[4] ( 스코틀랜드 / 1971~1986) | ||||
SNS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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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027> 역대 등번호 |
스코틀랜드 대표팀 - 7, 8, 9 셀틱 FC - 8, 9 리버풀 FC - 7[5] |
|||
별명 | 킹 케니 (King Kenny) | ||||
가족 | 아들 폴 달글리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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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의 前 축구 선수, 축구 감독. 현재는 리버풀 FC의 비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다.2. 상세
이견이 없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로 평가 받는 인물로 20년간의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셀틱과 리버풀 두 팀에서만 뛰었으며, 리버풀 팬들에게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로 두 팀 모두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다. 셀틱 팬들로부터는 '킹 케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9년에 셀틱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으며, 1977년에 리버풀로 이적한 뒤 1985년부터 리버풀의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으며, 1990년에야 선수 생활을 은퇴하게 된다.[8] 힐스버러 참사의 여파로 리버풀 감독직에서 사임했으며, 1991년 당시 2부리그에 있던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으로 취임한 뒤 1995년에 블랙번 로버스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룬다. 1997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취임하였으며, 1998년에 사임. 이후 2000년 셀틱의 임시 감독을 맡았으며 2011년 로이 호지슨의 뒤를 이어 리버풀의 임시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2011년 5월 12일, 정식 감독이 되었지만, 한 시즌만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이후 리버풀의 비상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3. 클럽 경력
케니 달글리시의 선수시절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1986, ITV)3.1. 셀틱 FC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엔지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레인저스의 서포터로서 자랐다. 밀튼 뱅크 초등학교에서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했으며, 이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와 리버풀 FC에서 트라이얼을 받았으나 입단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본인이 응원하던 레인저스에 입단하기 위해 몇번이나 입단을 신청했으나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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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1967년에 다름아닌 레인저스의 최대 라이벌 셀틱 FC와 임시 계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축구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첫 시즌을 컴버널드 유나이티드에서 임대생활로 보내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한 시즌동안 37골을 넣으며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당시 셀틱의 감독 조크 스타인은 달글리시에게 한 시즌 더 임대를 떠나 실력을 갈고 닦을 것을 제안했으나, 달글리시가 프로 계약을 정식으로 맺기를 원했고 결국 다음해 셀틱과 정식 계약을 맺어 프로 선수가 된 달글리시는 1968년 스코티시 리그컵 8강전 해밀튼 아카데미컬과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1군 데뷔전을 치른다. 하지만 1968-69 시즌, 그는 아직 무르익지 못한 실력에 의해 리저브에서 주로 출장하면서 17경기 4골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그 다음 시즌에는 약간 더 처진 위치로 포지션을 변경해 31경기에서 19골을 기록, 리저브 팀의 리그와 컵 더블을 견인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셀틱의 리저브 팀은 달글리시 외에도 대니 맥그레인, 조지 코넬리, 루 마카리, 데이비드 헤이 등 대단한 잠재력을 일찍이 평가받은 걸출한 유망주들이 즐비해 '퀄리티 스트리트 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리저브 팀에서의 활약에 의해 1969-70 시즌 1군 경기에 종종 얼굴을 비췄으며, 1971-72 시즌에는 리저브 팀에서 시즌 23골을 넣으며 라이벌 레인저스와의 리저브 컵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대단한 활약을 이어갔다.
리저브 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후 1971-72 시즌에는 마침내 셀틱의 1군 팀에 자리잡게 되었다. 1971년 8월 4일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드펌 더비에서 패널티킥으로 득점을 올리며 화려한 데뷔골을 기록한 후, 해당 시즌 53경기에 출장하여 29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셀틱은 달글리시의 등장에 힘입어 리그 7연패를 달성했으며 스코틀랜드컵도 들어올렸다. 그 다음 시즌에는 모든 대회에서 39골을 기록하며 셀틱 최다 득점자에 올랐고, 셀틱은 리그 8연패를 달성했다. 1973-74 시즌에는 팀과 함께 리그 9연패와 컵 더블, 유러피언컵에서는 4강까지 올라서며 절륜한 활약을 이어갔다. 1974-75 시즌에는 리그 연패에 실패했으나 컵 대회에서 우승을 챙길 수 있었다. 이후 1975-76 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해당 시즌 셀틱은 감독 조크 스타인이 자동차 사고로 팀에서 이탈하여 12년 만에 무관의 시즌을 보냈다. 1976-77 시즌에는 리그와 컵 더블을 다시 이뤄냈는데 이 시즌에도 날카로운 공격력을 과시해 모든 대회에서 27골을 집어넣었다.
셀틱에서 통산 320경기 출장에 167골이라는 뚜렷한 활약을 올린 달글리시는 당대 유럽 강호들의 구애를 받기 시작했고, 1977년 당시 리버풀 감독인 밥 페이즐리에 의해 440,000파운드의 금액에 영국 내 이적료 기록을 갱신하며 리버풀 FC로 이적하게 되었다.[9][10]
3.2. 리버풀 FC
1977년, 리버풀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던 리그 최고의 공격수 케빈 키건을 함부르크 SV로 떠나보낸 밥 페이즐리와 리버풀은 팀의 새로운 간판이 되어줄 선수를 찾아나섰다. 이때 선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밥 페이즐리 감독의 눈에 띈 선수가 바로 당시 셀틱에서 에이스로 거듭나고 있던 케니 달글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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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페이즐리 감독은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 최고의 이적료였던 44만 파운드를 투자해 달글리시를 안필드로 데려왔고, 천문학적인 이적료와 더불어 팀의 간판선수였던 키건의 대체자라는 꼬리표 덕에 달글리시는 수 많은 관심과 기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달글리시는 곧 그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게 된다.
1977년 8월 1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채리티 실드에서 데뷔한 달글리시는, 일주일 후 8월 20일 미들즈브러 FC와의 리그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고, 데뷔시즌부터 리그 20골을 포함, 시즌 31골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단번에 거듭나게 되었다. 키건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활약을 펼친 그는 팬들과 구단의 기대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선수였고, 결정적으로 해당시즌 유러피언 컵[11] 결승전에서 그레이엄 수네스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집어넣으며 팀의 유러피언 컵 2연패를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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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즌에도 달글리시의 활약은 이어졌다. 1978-79 시즌에는 리그 21골을 포함 모든 대회에서 25골을 집어넣으며 팀 내 최다 득점자로 활약하여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 했고, 해당 시즌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잉글랜드 풋볼 리그를 폭격했다. 1982-83 시즌까지 달글리시는 1980-81 시즌을 제외하고 리그 전 경기에 출장했으며, 전 시즌 20골 이상을 기록하는 등 엄청난 경기력과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1980-81 시즌에는 약간 주춤하며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에 실패했지만 해당 시즌 팀을 유러피언 컵 결승으로 이끌어 결국 본인의 통산 두 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렸고, 리그 컵까지 우승해 더블을 달성했다. 1981-82 시즌부터는 다시금 득점포를 가동하여 이안 러쉬와 함께 공격진을 이끌었는데, 이 시기 최전방에서 팀의 득점을 책임지는 러쉬와 한 칸 아래에서 공간을 파고들어 수비진을 농락하는 달글리시의 투톱조합은 잉글랜드와 유럽 최고의 공격진으로 이름을 날렸고,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공격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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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유럽 축구 역사에 있어 최강의 언더독으로 불리는 노팅엄 포레스트가 유러피언 컵 2연패 등 대기록들을 세우며 리버풀을 압박했지만, 케니 달글리시- 그레이엄 수네스- 앨런 한센으로 이어지는 스코티시 코어 라인에 더해 신예 이안 러쉬의 활약, 구단 역사상 최고의 풀백 필 닐과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 등이 만든 강건한 수비라인을 보유하고 있던 리버풀은 1980년에서 1984년까지 유러피언 컵 2회, 리그 3연패, 리그컵 우승 3회 등을 기록하며 유럽 축구를 지배했다. 이 시기 달글리시는 1982-83 시즌 PFA 올해의 선수와 더불어 1983년 발롱도르 2위에 오르며 명실상부 붉은 제국의 왕으로 군림했고 1983-84 유러피언컵에서는 팀을 이끌어 AS 로마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본인의 세 번째 빅 이어이자 구단의 통산 네 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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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4-85 시즌에는 득점력의 감소와 함께 팀도 에버튼 FC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 약간의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유럽에서 여전히 강력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1985년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서 터진 헤이젤 참사[12]로 인해 구단의 운명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조 페이건 감독이 고령의 나이로 인해 사임했고, 참사로 인해 어수선해진 팀의 분위기를 잡아줄 적임자를 찾고 있던 구단에게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달글리시는 적임자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85-86 시즌부터 달글리시는 선수 겸 감독의 신분으로 리버풀을 이끌게 되었다.
1985-86 시즌 달글리시는 리그 21경기에 선발로 나섰고, 첼시 FC와의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팀의 통산 16번째 우승을 자축했다. 이후 에버튼 FC과의 FA컵 결승에도 선발로 출전하여 더블을 달성했다.그 다음 시즌에는 리그에 18경기 출전, 6골을 득점해 여전히 선수로서 경쟁력있는 모습을 보였으나 점차 젊은 선수들을 위해 출전을 양보했고, 감독직에 더 전념하게 되었다. 1987-88 시즌과 1988-89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경기씩 출전하는데에 그쳤으며, 1989-90 시즌에는 1990년 5월 5일에 더비 카운티 FC와의 리그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며 본인의 선수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였다. 마지막 득점은 1987년 4월 18일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 터트린 안필드에서의 리그 득점이었다. 1990-91 시즌부터는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감독직만을 맡게 되었다. 리버풀에서는 총 515경기에 출전하여 172골을 기록했다.
4. 국가대표 경력
1971년 11월 10일, UEFA 유로 1972 예선전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교체 출전하여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1년 뒤인 1972년 11월 15일, 덴마크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는 데뷔골을 기록했다. 이후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 승선하여 에선 3경기에 모두 출장하였고 팀을 이끌어 1승 2무로 선전했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1975년 이후로는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주포로 자리잡아 팬들에게 기억될만한 플레이를 남겼다. 1976년 잉글랜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한 햄든 파크에서의 경기와, 1977년 잉글랜드를 웸블리에서 만나 득점하여 2-1 승리를 견인한 경기가 손에 꼽힌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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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전성기를 선봉에서 이끌었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동점골을 기록하여 3-2 역전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후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는 모두 본선 진출에 실패하여 아쉬움을 남겼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는 22인 최종 명단에 합류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1986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 기록인 102경기를 소화했으며, 30골을 기록하여 데니스 로와 함께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 15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1986년 11월 12일 햄든 파크에서 열린 룩셈부르크와의 UEFA 유로 1988 예선전에서 3-0으로 승리를 이끌며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마지막 득점은 1984년 11월 14일, 스페인을 상대로 월드컵 예선전에서 3-1로 승리한 경기에서 나왔다.
5. 플레이 스타일
최전방에서부터 측면과 2선 전역을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의 포워드였으나, 리버풀에서 활약할 당시 스트라이커인 이안 러쉬의 아래 처진 위치에서 세컨드 스트라이커 롤을 맡았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최전방 공격수가 수비진을 끌고 들어갔을 때 생기는 박스 근처의 공간에서 당대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로 명성이 높았다.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첨예한 슈팅력에서 나오는 결정력. 감아차는 기술적인 슈팅에서 발등에 얹혀서 때리는 슈팅에 이르기까지 왼발과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상당한 완성도를 보였다. 이에 선수 커리어 초창기 셀틱에서부터 리버풀 커리어 초반부에 이르기까지는 팀 내 주 득점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리버풀에서 러쉬가 등장하여 투톱으로 가동되기 이전에는 포워드진 중앙과 측면에서 모두 활약하며 위치를 가리지 않고 박스를 타격하여 훌륭한 생산력을 선보였다. 특히 측면에서 공을 몰고 들어가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고 감아차기로 골을 기록하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그러나 처진 위치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였던만큼 선수로서의 최대 장점은 기술적인 온 더 볼 능력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굉장히 빠른 스피드를 보유하는 동시에 정교한 드리블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상대 수비진 사이로 직접 볼을 운반하며 박스 안으로 돌파하는 플레이를 즐겼다. 당대 최고의 드리블러였던 맨유의 레전드 조지 베스트는 달글리시의 능력이 레알 마드리드 최고 레전드인 디 스테파노와 비슷하다고 평했을 정도. 이에 이안 러쉬라는 걸출한 주포가 팀에 가담하자 포워드 전역에서 자유도를 부여받고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세컨드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할 수 있었다. 1선의 플레이 메이커로서 달글리시는 팀의 결정적인 찬스를 만드는 찬스 메이커였으며, 달글리시가 직접 공을 가지고 박스 근처에서 보여주는 재기넘치는 퍼포먼스는 리버풀이 공격 과정에서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는 이유였다. 특히 당대 이안 러쉬와 더불어 순간적으로 공격진에 가담하는 그레이엄 수네스와 펼치는 연계플레이는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는데, 그 중심에 있던 달글리시의 활약으로 리버풀은 '붉은 제국'이라고 불리는 잉글랜드 클럽 역대 최고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활동량이 많고 근면성실한 멘탈을 가지고 있어 수비 가담 또한 훌륭한 편이었으며, 175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점프력이 상당해 헤더가 위협적이었고, 꽤 많은 헤더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리버풀로 이적하여 33세까지 한 시즌을 제외하면 리그 전 경기에 출장해 지속적으로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을 유지하는 등, 경기 소화력과 내구성, 꾸준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다재다능함과 날카로운 득점력, 절륜한 기술력으로 인해 당대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플레이 스타일로 따지자면 리버풀에서의 전임자인 케빈 키건과 상당히 유사하나, 리버풀에서 퍼포먼스의 완성도는 더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6. 지도자 경력
6.1. 리버풀 FC 1기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1기) 문서 참고하십시오.6.2. 블랙번 로버스 FC
이후 셰필드 웬즈데이 FC에서 감독직 제의가 오지만 이를 거절한 케니 달글리시는 축구팬들을 놀라게 하며 2부 리그의 블랙번 로버스 감독으로 취임한다. 취임한 바로 그 해 블랙번 로버스를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킨 후 달글리시는 잭 워커 회장이 다져놓은 탄탄한 자금을 바탕으로 1992년, 사우스햄프턴 소속의 앨런 시어러를 영입했고 승격 첫 해를 리그 4위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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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셔우드와 함께 |
바로 다음해를 맨유에 이어 2위라는 성적으로 마쳤으며, 1995년에는 극적인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는 블랙번의 81년만의 리그 우승이었다. 이후 케니 달글리시는 블랙번의 고문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1996년 상호 합의하에 블랙번을 떠나게 된다.
6.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그리고 1997년 1월에 갑자기 물러난 케빈 키건의 뒤를 이어 케니 달글리시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케니 달글리시 취임 당시 4위였던 뉴캐슬은 시즌을 2위로 마감하여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하였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바르셀로나전 3-2승리를 포함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13위라는 리그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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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취임 기자회견장에서 회장인 존 홀 경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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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시절 동료인 테리 맥더모트 코치와 함께 |
6.4. 셀틱 FC
이후 휴식을 취하던 케니 달글리시는 1999년부터 친정팀인 셀틱의 단장으로 일하다가 2000년 2월, 자신의 리버풀 시절 제자인 존 반스가 감독직에서 해임되자 자신이 임시 감독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 해 스코티쉬 리그컵에서 에버딘을 2-0으로 물리치며 우승을 달성하고, 셀틱이 2위로 그 해 시즌을 마감하면서 케니 달글리시의 임시 감독 생활은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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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리버풀 FC 2기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2기) 문서 참고하십시오.7. 기록
7.1. 선수
7.1.1. 대회 기록
- 셀틱 FC (1969~1977)
- 스코티시 프리미어십[14]: 1971-72, 1972-73, 1973-74, 1976-77
- 스코티시컵: 1971-72, 1973-74, 1974-75, 1976-77
- 스코티시 리그컵: 1974-75
- 드라이브러컵: 1974-75
- 글래스고컵: 1974-75
- 리버풀 FC (1977~1990)
-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73-74, 1975-76, 1976-77
7.1.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83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CF 10위)
- PFA 올해의 선수: 1982-83
- PFA 올해의 팀: 1978-79, 1979-80, 1980-81, 1982-83, 1983-84
- FWA 올해의 선수: 1978-79, 1982-83
- 스코티시 프리미어 디비전 득점왕: 1975-76
- BBC 올해의 골: 1982-83
- FIFA 100: 2004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4
-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공로자 명단: 1977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1998
- 옹즈 드 옹즈: 1981
- IFFHS 올타임 스코틀랜드 드림팀: 2022
7.1.3. 개인 기록
- 리버풀 FC 통산 최다 어시스트: 166개
- 리버풀 FC 단일 시즌 최다 어시스트: 24개
-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 30골
-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경기 출전: 102경기
-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초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7.2. 감독
7.2.1.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985~1991, 2011~2012)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85-86, 1987-88, 1989-90
- FA컵: 1985-86, 1988-89
- 풋볼 리그컵: 2011-12
- 풋볼 리그 슈퍼컵: 1985-86
- FA 채리티 실드: 1986, 1988, 1989, 1990
- 블랙번 로버스 FC (1991~1995)
- 프리미어 리그: 1994-95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플레이오프: 1991-92
- 셀틱 FC (2000)
- 스코티시 리그컵: 2000
7.2.2. 개인 수상
-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15]: 1985-86, 1987-88, 1989-90
-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감독: 1994-95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 1994년 1월, 1994년 11월
- FWA 공로상: 1987
7.3. 서훈
8. 여담
- 유럽 대륙 최악의 스포츠 경기 참사들로 꼽히는 1971 아이브록스 참사, 헤이젤 참사, 힐스보로 참사 현장에 모두 있었다. 아이브록스 참사 당시에는 셀틱의 리저브 팀 멤버로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고, 헤이젤 참사가 있던 1985년 유러피언 결승에서는 선수로 출전했다. 힐스보로 참사 당시에는 리버풀의 감독직을 맡고 있었다.
- 오래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감독직을 쉬고 있던 탓에 전술 감각이 떨어져 있을 거란 걱정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모자란 부분은 스티브 클락 코치를 위시한 코치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낙관하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걱정은 정확하게 맞았다. 그냥 뻥축만 하는 데다 위기 상황에서 번뜩이는 교체도 전혀 기대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나마 들만한 장점은 선수단 사기에 미치는 부분. 어린 선수들에게 농담을 섞어가며 긴장을 풀어주는 장면도 볼 수 있고,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말빨은 그야말로 팬들에게 닥치고 킹케니 찬양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만들었다. 다만 루이스 수아레스의 문제와 관련된 인터뷰나 대처로 인해 언론을 잘 다룬다는 말은 더 이상 하기 어려울 듯.[18] 게다가 팀의 성적도 나쁘고 경기력도 엉망인데 계속 초점을 빗나가는 인터뷰만 반복함으로써 팬들조차 뒷목을 잡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 인재 관리자 유형의 감독으로 동기부여에 뛰어난 유형이지 탁월한 전술가라거나 밀도있는 훈련으로 팀을 발전시키는 유형의 지략가는 아니었다. 현역 시절에 쌓아놓은 명성만으로도 선수를 수월하게 영입할 수 있었고, 선수가 스스로 경기를 풀어가게 하는 스타일이다. 리버풀 1기 시절엔 전임자로부터 이어받은 패스와 움직임을 기반한 축구를 한 반면 블랙번에서는 개인 기량이 제한적인 선수들로 최전방에 해결능력이 좋은 앨런 시어러와 크리스 서튼에게 공을 연결하는 스타일의 축구를 했다. 이러한 단순한 스타일로 블랙번에서는 우승할 수 있었으나 전술이 다양화된 2010년대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다시 성공을 가져올 수 없었다.
- 부인은 마리나 달글리시인데, 유방암을 앓고 완치된 이후 유방암 기금 마련을 위해 마리나 달글리시 재단을 세워 유방암 환자들의 치료 기금 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 부인 마리나는 이 노력을 인정받아 2009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해, 부부가 모두 MBE 수훈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안 러시의 회고에 의하면 한성격 하는 인물로 보인다. 언젠가 러시가 팀 페스티벌에서 마리나의 얼굴에 케이크를 문대는 장난을 쳤는데 마리나는 그 이후 러시를 볼 때마다 한동안 케이크를 던져댔다고 한다. 마리나의 복수는 그에 그치지 않아서 러시의 양복에 간지럼 가루를 뿌려놓은 적도 있었다. 이때문에 러시는 인터뷰 도중에 계속 몸을 긁적여야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마 인터뷰어가 자신을 덜 떨어진 놈으로 생각했을 거란 추측은 덤. 마리나에 관한 러시의 회고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누구든 마리나 달글리시를 건드리지 마세요"
- 이후 리버풀과 글래스고 지역에서는 케니를 Knight Bachelor[19] 즉 기사작위에 서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후 2018년 6월 서훈명단에 Knight Bachelor 대상자로 올라 'Sir' 칭호를 쓰게 되었다.
- 한편 헤이젤 참사에 대한 회고록에서 아래와 같은 옹호성 발언을 해 많은 욕을 먹었다.
"리버풀 팬들의 행동을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편이 계속 자신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을때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I can't condone the action of some Liverpool fans but it is difficult not to react when the opposing supporters are throwing missiles at you.)"
"만약 그들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지 알았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이탈리아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 모두 반드시 후회해야 합니다.(If they had foreseen the dreadful consequences, or thought what terrible things might unfold, I'm sure the stones would never have been thrown by the Italians and that the English retaliation would never have occurred. Every single one of them, both Italian and English, must have regretted it.)"
회고록 전문
한 마디로 자기들도 피해자란 소리. 이외에도 뜬금없이 헤이젤 참사와 1년 전
AS 로마와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을 연결지으며 이탈리아인들은 먼저 리버풀 팬들을 폭행한다고 하지를 않나
유벤투스 서포터들이 먼저 돌을 던지고 도발했다고 하지를 않나 경기장을 제공한
벨기에 측과
UEFA까지 걸고 넘어지는 등 축구팬들에겐 적반하장으로 밖에 안 보일 내용으로 가득하다."만약 그들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지 알았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이탈리아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 모두 반드시 후회해야 합니다.(If they had foreseen the dreadful consequences, or thought what terrible things might unfold, I'm sure the stones would never have been thrown by the Italians and that the English retaliation would never have occurred. Every single one of them, both Italian and English, must have regretted it.)"
회고록 전문
- FIFA 20에 신규 아이콘으로 추가되었다.
- 2020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4월 10일에 검사를 받아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확진 당시에는 무증상이었다고 한다. 검사 전부터 집에서 자가격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촉자는 없다고 한다. 리버풀 구단 공식 발표 다행히 4월 13일에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
- 2021년 현재는 잉글랜드 8부리그 팀인 머린 AFC의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 별명은 가수다. YNWA를 부른 게리 마스덴이란 가수와 닮았다는 이유로 그러한 별명이 붙여졌다.
9. 같이 보기
리버풀 FC 보드진 및 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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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G 보드진 | |||
오너진 | ||||
직책 | 국적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
구단주 | 존 헨리 | John William Henry ll | ||
회장[1] | 톰 워너 | Tom Werner | ||
사장[2] | 마이클 고든 | Michael Gordon | ||
축구 부문 경영진 | ||||
CEO[3] | 마이클 에드워즈 | Michael Edwards | ||
테크니컬 디렉터 | 줄리언 워드 | Julian Ward | ||
축구 개발 디렉터 | 페드로 마르케스 | Pedro Marques | ||
글로벌 골키퍼 총괄 | 한스 라이테르트 | Hans Leitert | ||
구단 보드진 | ||||
경영진 | ||||
직책 | 국적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
CEO[4][5] | 빌리 호건 | Billy Hogan | ||
전무이사[6] | 앤디 휴즈 | Andy Hughes | ||
CCO[7] | 벤 라티 | Ben Latty | ||
CFO[8] | 제니 비컴 | Jenny Beacham | ||
CLO[9] | 조나단 밤버 | Jonathan Bamber | ||
영업이사[10] | 케이트 프랫시어볼드 | Kate Pratt-Theobald | ||
홍보이사[11] | 수잔 블랙 | Susan Black | ||
이사 | 마이클 이건 | Michael Egan | ||
비상임이사 | 케니 달글리시 경 | Sir Kenny Dalglish | ||
사무총장 | 대니 스탠웨이 | Danny Stanway | ||
운영진 | ||||
스포팅 디렉터 | 리처드 휴즈 | Richard Hughes | ||
보조 스포팅 디렉터 | 데이비드 우드파인 | David Woodfine | ||
메디컬 및 퍼포먼스 디렉터 | 조나단 파워 | Jonathan Power | ||
리서치 디렉터 | 윌리엄 스피어맨 | William Spearman | ||
영입 및 스카우팅 디렉터 | 데이브 팔로우즈 | Dave Fallows | ||
임대관리 디렉터 | 맷 뉴베리 | Matt Newberry | ||
아카데미 디렉터 | 알렉스 잉글소프 | Alex Inglethorpe | ||
코칭 스태프 | ||||
코치진 | ||||
직책 | 국적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
감독[H] | 아르네 슬롯 | Arne Slot | ||
수석 코치 | 시프케 헐쇼프 | Sipke Hulshoff | ||
욘 헤이팅아 | John Heitinga | |||
개인 개발 코치 | 애런 브릭스 | Aaron Briggs | ||
기술 코치 | 디오구 파이바 | Diogo Paiva | ||
수석 골키퍼 코치 | 파비안 오테 | Fabian Otte | ||
골키퍼 코치 | 클라우지우 타파레우 | Claudio Taffarel | ||
아카데미 코치진 | ||||
U-21 감독[H] | 배리 루터스 | Barry Lewtas | ||
U-18 감독[H] | 마크 브릿지윌킨슨 | Marc Bridge-Wilkinson | ||
메디컬 및 퍼포먼스 스태프 | ||||
메디컬 및 영양 부서 | ||||
직책 | 국적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
팀닥터 | 아밋 파누 | Amit Pannu | ||
헬스 케어 담당관 | 린지 아메드 | Lynsey Ahmed | ||
스포츠 심리학 고문 | 리 리차드슨 | Lee Richardson | ||
영양학 총괄 | 모나 네머 | Mona Nemmer | ||
수석 퍼포먼스 영양사 | 클레어 패럴 | Clare Farrell | ||
보조 영양사 | 로나 버틀러 | Lorna Butler | ||
퍼포먼스 및 피트니스 부서 | ||||
피지컬 퍼포먼스 총괄 | 코널 머터 | Conall Murtagh | ||
수석 피지컬 퍼포먼스 코치 | 루벤 피터스 | Ruben Peeters | ||
피지컬 퍼포먼스 코치 | 에드 하퍼 | Ed Harper | ||
조던 페어클러프 | Jordan Fairclough | |||
스트렝스 및 컨디셔닝 코치 | 크리스 블랙 | Chris Black | ||
PDP 피트니스 총괄 | 잭 에이드 | Jack Ade | ||
재활 피트니스 코치 | 데이비드 라이딩스 | David Rydings | ||
피트니스 분석관 | 니키 샌더스 | Nikki Sanders | ||
물리 치료 부서 | ||||
퍼포먼스 물리 치료 총괄 | 크리스 모건 | Chris Morgan | ||
재활 물리 치료 총괄 | 리 노브스 | Lee Nobes | ||
재활 물리 치료사 | 조 루이스 | Joe Lewis | ||
물리 치료사 | 스티브 릴리 | Steve Lilley | ||
물리 치료사 | 로빈 새들러 | Robin Sadler | ||
마사지 부서 | ||||
마사지 치료 총괄 | 폴 스몰 | Paul Small | ||
마사지사 | 미셸 허드슨 | Michelle Hudson | ||
마사지 및 스포츠 치료사 | 와타나베 모토노리 | Watanabe Motonori | ||
리서치 및 분석 스태프 | ||||
리서치 부서 | ||||
직책 | 국적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
데이터 과학 총괄 | 다피드 스틸 | Dafydd Steele | ||
리서치 개발 및 통계 연구원 | 팀 와스켓 | Tim Waskett | ||
리서치 엔지니어 | 마크 하울렛 | Mark Howlett | ||
마크 스티븐슨 | Mark Stevenson | |||
분석 부서 | ||||
상대 분석관 | 제임스 프렌치 | James French | ||
얀센 모레노 | Jansen Moreno | |||
경기 및 선수 분석관 | 대니얼 스피어릿 | Daniel Spearritt | ||
조엘 보너 | Joel Bonner | |||
전술 분석관 | 로데릭 반 데르 햄 | Roderick van der Ham | ||
영입 및 스카우팅 스태프 | ||||
스카우트 부서 | ||||
직책 | 국적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
수석 스카우트 | 배리 헌터 | Barry Hunter | ||
스카우팅 코디네이터 | 카일 월뱅크스 | Kyle Wallbanks | ||
스카우트 | 크레이그 맥키 | Craig McKee | ||
마크 버칠 | Mark Burchill | |||
시에나 오브라이언 | Sienna O'Brien | |||
존 도슨 | John Dawson | |||
마이크 크롬튼 | Mike Crompton | |||
마크 고워 | Mark Gower | |||
스콧 러셀 | Scott Russel | |||
크리스 윌킨슨 | Chris Wilkins | |||
앤디 세이어 | Andy Sayer | |||
앤드루 오브라이언 | Andrew O'Brien | |||
마즈 예르겐센 | Mads Jørgensen | |||
키코 에스피나르 | Kiko Espinar | |||
스벤 도라제크 | Sven Dworaczek | |||
라시드 클리피 | Rachid Khlifi | |||
다슬러 마르케스 | Dassler Marques | |||
페르난도 트로이아니 | Fernando Troiani | |||
라파엘 실렌토 | Raphael Cilento | |||
실뱅 은디아예 | Sylvain N'Diaye | |||
영입 분석 부서 | ||||
수석 영입 분석관 | 패트릭 몽고메리 | Patrick Montgomery | ||
영입 분석관 | 베심 알리 | Besim Ali | ||
보조 영입 분석관 | 앤서니 로스본 | Anthony Ross-Bone | ||
지원 스태프 | ||||
운영 부서 | ||||
직책 | 국적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
퍼스트팀 운영 총괄 | 루이스 돕슨 | Louise Dobson | ||
장비 운영 총괄 | 리 래드클리프 | Lee Radcliffe | ||
장비 관리 코디네이터 | 브렌던 매킬더프 | Brendan McIlduff | ||
보조 장비 관리관 | 잉카 아데무이와 | Yinka Ademuyiwa | ||
기타 스태프 | ||||
그라운드 관리관 | 데이브 맥컬록 | Dave McCulloch | ||
스타디움 운영 총괄 | 제드 포인튼 | Ged Poynton | ||
스타디움 아나운서 | 조지 세프턴 | George Sephton | ||
출처:
리버풀 FC 공식 웹사이트 / 최종 수정 일자:
2024년
10월 31일
[1]
Chairman
[2]
President
[3]
CEO of Football, 축구 부문 CEO
[4]
Chief Executive Officer, 최고 경영자
[5]
FSG international(FSG 해외법인) CEO와 겸직
[6]
Managing Director
[7]
Chief Commercial Officer, 최고 영업 관리자
[8]
Chief Financial Officer, 최고 재무 관리자
[9]
Chief Legal Officer, 최고 법무 관리자
[10]
Commercial Director
[11]
Communication Director
[H]
Head Coach, 헤드 코치
[H]
Head Coach, 헤드 코치
[H]
Head Coach, 헤드 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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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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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 ||||
초대 바클레이 ☆ |
2대 맥케나 ☆ |
3대 왓슨 ★★☆ |
4대 애시워스 ★ |
5대 맥퀸 ★ |
|
6대 패터슨 |
7대 케이 ★ |
8대 웰시 |
9대 테일러 |
10대 샹클리 ( 샹클리 체제) ★★★☆ ★★★ |
|
11대 페이즐리 ( 페이즐리 체제) ★★★★★★ ★★★★★★★★ |
12대 페이건 ( 페이건 체제) ★★★ |
13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1기)) ★★★ ★★ |
13대(대행) 모란 ( 모란 체제) |
14대 수네스 ( 수네스 체제) ★ |
|
15대 에반스 ( 에반스 체제) ★ |
15·16대 에반스· 울리에 ( 에반스·울리에 체제) |
16대 울리에 ( 울리에 체제) ★★★★★ |
17대 베니테스 ( 베니테스 체제) ★★★ |
18대 호지슨 ( 호지슨 체제) |
|
19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2기)) ★ |
20대 로저스 ( 로저스 체제) |
21대 클롭 ( 클롭 체제) ★★★★ ★★★ |
22대 슬롯 ( 슬롯 체제) |
||
★
프리미어 리그 / ★
FA컵 / ★
EFL컵 / ☆
EFL 챔피언십 ★ UEFA 챔피언스 리그 / ★ UEFA 유로파 리그 / ★ UEFA 슈퍼컵 / ★ FIFA 클럽 월드컵 |
[1]
1985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 받았고 2018년에 Knight Bachelor에 서임되며 ‘Sir(경)’ 칭호를 받게 되었다.
[2]
Member, 대영제국 훈장 5등급
[3]
오늘날로 따지면 전통적 스트라이커 바로 밑에 뛰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가까웠다.
[4]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 최다 득점자.
[5]
7번 외에 6, 12, 14번을 사용하기도 했다.
[6]
달글리시는 그가 영입되기 이전, 리버풀의 간판스타이자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케빈 키건의 대체자였다.
발롱도르를 2회 수상한 선수보다 뛰어난 선수라는 평을
라이벌 팀의 역대 최고의 감독에게 듣게 된 셈.
[7]
다만 달글리시는 키건과 달리
발롱도르를 수상(최고 순위 2위)하지 못했는데, 하필이면 본인의 최전성기가
미셸 플라티니와 겹친 것이 까닭이었다.
[8]
헤이젤 참사의 여파로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대회 진출이 좌절된 후라 감독으로서의 유럽 무대 데뷔는 2011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9]
당시 페이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전에 빨리 이 글래스고를 떠나는게 낫겠다."
[10]
당시 셀틱 팬들은 팀의 간판이자 에이스가 잉글랜드로 떠나는 것에 분개했고, 달글리시가 1978년 8월 셀틱 파크로 돌아와 조크 스타인 헌정 경기에 출전했을 때 관중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
[11]
現
UEFA 챔피언스 리그
[12]
이것때문에
UEFA는 모든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 출전을 5년간 금지시켰고, 리버풀은 7년이나 출전 금지시켰다. 그것때문에 리그 우승한 에버튼은 유러피언컵에 못 나가게 되었고,
머지사이드 더비는 더더욱 치열해졌다.
[13]
이 두 경기에서 득점한 상대 골키퍼가 리버풀 팀 동료
레이 클레멘스였다.
[14]
당시 명칭은 스코티시 풋볼 리그 디비전 원, 스코티시 프리미어 디비전.
[15]
Manager of the Year Award
[16]
1985년 신년 서훈명단(1985 New Year Honours)에서 선정됐다.
[17]
2018년 6월 서훈명단(2018 Birthday Honours)에서 선정됐다.
[18]
하지만 이 부분은 후에 인터뷰에서 수아레즈 지지 티셔츠를 입은 것은 선수단의 결정이었으며, 보드진에서 허가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었다면 더 적게 말했을 것이며, 다른 판단을 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19]
알렉스 퍼거슨,
알프 램지,
스탠리 매튜스,
보비 찰튼,
바비 롭슨 등 '경'으로 불리는 축구인들은 바로 이 Knight Bachelor를 받음으로써 기사가 된 것이다. Knight Bachelor는
대영제국 훈장 등의 '훈장'과는 다른 별개의 특전이며, 서열은 훈장으로 치면 2등급에는 살짝 못미치고 3등급보다는 높게 취급된다.
분류
- 1951년 출생
- 1969년 데뷔
- 1990년 은퇴
- 글래스고 출신 인물
- 스코틀랜드의 축구 선수
- 스코틀랜드의 축구 감독
- 셀틱 FC/은퇴, 이적
- 리버풀 FC/은퇴, 이적
- 리버풀 FC/역대 감독
- 블랙번 로버스 FC/역대 감독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역대 감독
- 셀틱 FC/역대 감독
- 감독 대행/축구
- 스코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74 FIFA 월드컵 서독 참가 선수
-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참가 선수
- UEFA 챔피언스 리그 다회 우승 선수
- P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FW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감독 수상자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 수상자
-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대영제국 훈장 5등급
- 영국의 기사
- 리버풀 엠버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