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8:51:19

박지원/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박지원
{{{#!wiki style="margin:-10px" <tablebordercolor=#152484><tablebgcolor=#152484> 파일:박지원투명.svg 박지원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color=#152484,#008ccd> 생애 <colbgcolor=#fff,#1f2023> 생애
지역구 해남군·완도군·진도군
가족 아버지 박종식
비판 및 논란 비판 및 논란
불법 대북송금 사건 · 광주 욕설 발언 · 윤석열 검찰 고발사주 제보자와의 논란
기타 박지원계 · 천정박 · 민생당 · 동교동계 · 호남계
}}}}}}}}} ||

1. 정계 투신 이전2. 정계 활동
2.1. 김대중의 오른팔2.2. 대북송금 특검2.3. 4선 국회의원2.4. 문재인 정부 시기2.5. 낙선 후 정치평론2.6. 국가정보원장2.7. 국정원장 퇴임 후2.8. 더불어민주당 복당2.9. 5선 국회의원
2.9.1.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clearfix]

1. 정계 투신 이전

19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립유공자 박종식(朴鍾殖 1910년 ~ 1948년) 선생으로 199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고향 진도군에서 오산초등학교와 진도중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시로 이주해서 문태고등학교,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했다. 당시의 교육대학은 전문학사 학위가 나오는 2년제 전문대학 과정에 상응했다. 교육대학이 4년제로 승격된 건 1981년이다. 초중등 교원 호봉 일원화도 이 무렵부터 시행되었고 그전에는 학제상의 차이로 인해 초등교사가 중등교사보다 호봉 체계도 낮게 잡혀 있었다. 이후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상학과에 편입학하였다. 1965년 4월 15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31보병사단에서 행정병(일반행정 특기)으로 복무했고, 1967년 9월 23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파일:2019030901000970300075473.webp
<colcolor=#fff> 젊은 시절 박지원과 부인 이선자
1970년 단국대학교 졸업 후 럭키금성상사(현 LX인터내셔널), 동서양행 등 기업에서 근무했다. 그래서 스스로 가끔 금성( LG전자의 전신)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피혁과 가발 수출 사업을 운영했다. 당시 뉴욕 한인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게 됐다. 15대 뉴욕 한인회장에 출마했지만 낙마했고 2년 뒤 역대 최연소 회장이 됐다. 그 뒤 교민사회에서 뉴욕 한인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1981년 8월 미주 한인 총연합회에서 98개 한인회장의 만장일치로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에 당선됐다.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맨해튼에 투자를 해서 건물 5채를 매입할 정도의 자산가였고, 이 재산이 이후의 정치 생활 밑천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박지원은 20대 때부터 정계 진출에 꿈이 있었다. 막내라 친형들이 많은데 그 중 큰형님[1]처럼 정치를 하신 적이 있었던 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만났던 사람이 놀랍게도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었다. 박지원은 전경환과 가깝게 지냈고, 전두환의 미국 방문 환영위원장을 맡았고 그 일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수많은 양심적인 인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또 박지원은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전경환의 도움으로 민주정의당에 입당해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으려고 했었으나 해외교포라는 결격 사유로 인해 좌절되었다. 미안했던 전경환은 엄청난 이권이 있는 사업을 제의했지만 바로 거절했다고 한다. #

그러던 중 1983년,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 김경재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박지원은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전해들은 뒤, 통렬하게 반성했다.[2] 김대중 앞에서 절을 올리고, "선생님, 제가 잘못 산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그 후 김대중의 후원자로 활동하였으며, DJ가 하던 인권문제연구소 일을 재정적으로 돕고 국내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DJ의 메시지를 전하는 ‘밀사’역 등을 맡았다.[3] 이후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김대중이 사면되자, 박지원 역시 미국에서의 사업을 모두 정리한 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2. 정계 활동

2.1. 김대중의 오른팔

박지원 대변인의 꿈은 귀국해서 정계에 입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 나는 85년 귀국한 후 다시 정치를 시작했으나 그는 88년 총선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등원하지 못했다. 92년에 그는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감히 그를 대변인으로 기용했다. 전국구에다 초선 의원에게 어떻게 대변인을 맡기느냐는 주위의 만류도 있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를 알기 때문이다. 일종의 도박을 한 셈인데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두었다. 재치와 논리정연함으로 그는 다른 당의 대변인을 쉽사리 따돌렸다. 박대변인은 나의 하루 일과 중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다. 새벽 6시30분, 그는 정적에 잠긴 우리 집을 깨운다. 그로부터 온갖 보고를 다 듣는다. 내가 일일이 살펴보지 못한 모든 정치현안을 그로부터 알게 된다.…그의 하루는 어느 날이건 자정까지 이어진다. 석간을 챙기고, 식사는 거의 업무적으로 이뤄진다.…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는 나를 찾아서 알릴 것을 알려준다.
김대중 #
그가 처음 동교동에 드나들며 원외 부대변인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김대중 총재의 신임이 그리 두터웠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후 무슨 일을 맡기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차츰 김대중 총재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지원 씨는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답게 머리가 영민하고 순발력이 뛰어나며 또한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말을 조리 있게 잘하며 인상이 밝은 점이 큰 장점이었다. 김대중 총재는 이런 타입의 인물을 선호한다. 차츰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박지원 씨는 1992년 14대 총선 때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고, 이후 발군의 솜씨로 상당히 오랫동안 당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중략) 내가 대통령의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곁에 두었을 만큼 유능하고 부지런한 박지원 의원은 이후 장관으로,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권노갑 #

1987년 국내로 돌아온 후 평화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고향인 전남 진도위원장을 맡았다. 1992년에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등원하였다.[4] 1987년 1992년 대선에서 DJ의 지근거리에서 선거운동을 도왔으며, 특히 1992년 대선에서 4월부터 12월까지 매일 오전 6시 10분이면 동교동에 도착해서 DJ와 함께 하루종일 선거운동을 했다. 1996년에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부천시 소사구(현 부천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는데, 그 당시 상대가 다름아닌 김문수였다.[5] 이후 한나라당 이신행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의원직이 상실되면서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구로구 을 선거구 유력 후보군이었으나, 고사하였다.[6] 참고로 해당 지역구는 같은 동교동계였던 한광옥이 공천되었다.

하지만,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민주당과 국민회의 시절 내리 4년 1개월[7]동안 대변인으로 대언론 소통창구를 맡았으며, 최장수 야당 대변인 기록을 수립했다. 당시 '야당의 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유의 말솜씨와 재치, 촌철살인의 논평으로 당내에서 명대변인 소리[8]를 들었고, DJ의 의중을 언론에 정확히 전달하고, 탁월한 정치감각으로 1급 정치참모 역할도 했다. # 대변인 시절 박지원에게 가장 많이 비판을 받은 인물은 김영삼 대통령이었다.[9] 김종필, 김윤환, 김덕룡, 이회창, 박찬종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비유에 능한 박지원의 주요 표적이 됐다. 이후 기획조정실장, 총재특보를 역임했고, 1997년 대선에서도 김대중 캠프의 선거 전략 전반[10]에서 활약했다. #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구성되자 인수위 대변인으로 발표됐으며[11], 다음 해에는 당선자 대변인에 임명됐다.

국민의 정부 출범 후에는 공보수석, 문화관광부장관, 정책기획수석,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중용됐다. 기존의 동교동계 가신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한광옥, 김경재, 김상현 등이 관여하기 어려운 부분에 뛰어들어 틈을 메꾸는 역할을 맡았다. 친분관계에 있어서는 DJ가 젊었을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호형호제까지 하는 권노갑, 김상현보다 못하지만 일하는 수완이 뛰어나, 한광옥을 제외한 권노갑, 김상현, 한화갑(언변을 인정받은 측근), 김옥두(민주화 투쟁 시절, 징역과 고문을 견딘 사람) 등이 대통령이 된 DJ에게 부담지우지 않고자 당무에만 전념할 때, 대통령이 믿고 일을 맡기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DJ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하는 실세였고, DJ를 보호하는 방패역을 자임하기도 했다. # 현재까지도 역대 대통령비서실장 중 가장 권력이 강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代통령으로 까지 불린 사람이다.
<nopad>파일:dangk_215161_1[289905].jpg 파일:l_2020070501000604800043812.jpg
<colcolor=#fff>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김대중 대통령 <colcolor=#fff> 청와대 회의장으로 이동하는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
2009년 DJ의 장례식 때는 북한 측이 조의화환과 함께 공개적으로 보내온 편지의[12] 수신자 두 사람( 임동원[13], 박지원) 중 1인이었을 만큼 DJ의 최측근으로 간주되었다. DJ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 역할도 주무부서가 아닌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대북밀사'(대북특사)를 맡길 정도였다. 2000년 4월 남한 측 밀사로서 중국에서 북한 측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과 비밀협상을 벌여 역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이끌어냈다.[14] # 이러한 성과 때문에 북한에서 가장 거부감이 덜한, 즉 가장 믿을 만한 남측 인사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 DJ는 박지원에게 비밀 협상을 맡긴 이유를 “북한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와 대화하길 원했다. 박 장관은 나의 최측근으로 일을 잘하기 때문에 특사 업무도 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육성 회고록에서 밝혔다. #

DJ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당시 정가에선 박 장관을 두고 “대통령을 가장 먼저 만나고 가장 오래 얘기하는 사람”, "명실상부한 권력 제2인자”, "왕수석", "영원한 오른팔"이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15] 언론 관계·대북 관계 등 국정 운영의 막전 막후에서 전천후로 활약했다. # 노무현에게 문재인이 있었다면, 김대중에게는 박지원이 있다고 할 만큼 DJ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근거리에 있었던 최측근이었다.[16] 또한 "DJ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핵심”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본인 스스로도 “나는 모든 사고를 DJ 중심으로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다만, DJ에 대한 일관된 충성심으로 최측근이 됐지만 이로 인한 비판과 질타도 끊이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 당시, 개각을 비롯한 인사철마다 그의 개입의혹이 불거졌고 당쪽에선 박지원이 반대하면 되는 일이 없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

DJ가 박지원을 전폭적으로 신임한 이유에 대해 국민의 정부 청와대 관계자들은 '성실함'을 꼽았다. 박지원은 야당시절부터 아무리 술을 많이 먹어도 다음날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동교동 자택으로 출근해 그날의 신문 보도상황 등을 브리핑할 만큼 부지런한 것으로 유명했다. 또 민주당 인사들은 여야를 넘나들 만큼 능수능란한 박지원 특유의 처세술, 보스의 심기를 꿰뚫고 윗사람의 ‘입안의 혀’처럼 움직이는 그의 탁월한 보좌능력을 꼽았다. # 여권의 한 인사는 “박지원 수석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가장 큰 이유 역시 당당함이다. 대통령이 아니라 누구 앞이라도 자기 생각을 또렷하게 밝히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일단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었고 김대통령도 그 점을 높이 산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또 동교동계 한 중진의원은 “대통령이 박수석을 찾는 이유는 편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보다는 대통령의 집안문제 등 일상사나 개인적 고민거리, 이런 것을 터놓고 논의할 상대가 필요했고 박수석은 그런 문제를 잘 해결해줬던 것으로 압니다. 특히 신문보도와 관련해서는 무조건 박수석에게 의견을 구합니다”라고 말했다. #

2009년 7월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원한 뒤 하루에도 몇 번씩 국회와 병원을 오가며 병상을 지켰고 그가 눈을 감는 순간도 함께했다. DJ 서거 후 의료진과 함께 공식 브리핑을 한 데 이어 DJ측 대표 자격으로 장례형식 등 후속절차에 대한 정부측과의 조율 창구를 맡는 등 진두지휘하며 DJ 사후에도 비서실장 역할을 계속했다. # 또 2019년 서거 전까지 이희호 여사의 병세를 가장 먼저 관심갖고 지켜보는 입장일 정도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가 모두 서거한지 시간이 꽤 지난 현재 시점에도 여전히 중요한 발언을 할 때마다 김 전 대통령을 언급하는 것을 보아 자타공인 DJ의 심복이다.

2.2. 대북송금 특검

파일:karma50_126911_1[1].jpg
<colcolor=#fff> 구속 수감 당시의 박지원
2006년 5월 25일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서 현대로부터의 150억 원 수뢰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SK그룹에서 7,000만 원, 금호그룹에서 3,0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인해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알선수재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외국환거래법 위반,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3년과 추징금 1억 원을 선고받았다. 대북송금 과정의 직권남용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죄는 모두 유죄. 결국 마음대로 북한에게 돈을 직접 준 것에 대해 유죄 판결한 것. 대북송금사건 당시 구속되어있는 동안 지병인 녹내장이 악화되어 왼쪽 눈에 이어 오른쪽 눈을 실명할 뻔했다.[17] 박지원 본인도 재판 당시 '남은 한쪽 눈마저 실명될 위기다'라며 선처를 호소하며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했고 받아들여졌다. #

이후 집행정지와 재구속을 끊임없이 반복하다가, 2007년 2월 사면을 받아 징역 3년 중 1년 5개월 정도를 채우고 출소하게 된다. #
무려 구속집행정지 6회(10개월)에 형집행정지 1회(3개월)를 받았으며, 보석으로 1년 2개월 이상을 나와 있었기에 총 2년 3개월을 넘게 쉬었고, 이 기간의 대부분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거나 통원치료를 했다. 파기환송심 당시 언론이 구속집행 정지 기간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보도한 탓에 2년 정도 감옥에 있던 걸로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1년 반도 안 된다.

박지원이 대북송금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녹내장 치료를 위해 일시석방 됐을 때, DJ가 직접 병문안을 오기도 했었다. # 또 DJ는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모함과 고통을 당하는 것을 억울해하지 말고 이겨내라"며 박지원을 위로했다. #

어쨌든 4~5년에 걸친 재판과 수감생활 때문에 참여정부 기간동안 어떠한 공직이나 선출직을 맡지 못했다.

박지원은 특별사면 조치를 받은 뒤 "이제 저는 스스로에게 약속한 대로 동교동으로 돌아간다. 김대중 대통령님 내외분을 곁에서 모시는 것으로 제 소명을 다하려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2007년 3월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

참여정부 시절 징역을 산 이후로는 친노 및 그 후신이라 볼 수 있는 친문 계열 정치인들과 일정 거리를 두는 모습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술된 대로 박지원을 사면해 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기에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대통령 사면이 아니었다면 그 다음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도 징역을 살다가 풀려날 뻔했다.[19] 근데 이미 당시 형집행정지 상태여서 사면 결정이 나기 전에 더 연장신청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사면을 안 했다면 언제 다시 감옥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2.3. 4선 국회의원

파일:IE001194591_STD.jpg
<colcolor=#fff> 제3대 민주당 원내대표 당선 직후의 박지원 의원(가운데)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20]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장장 12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였다. 이후 통합민주당에 복당했다. 그리고 복당 인사에 당시 고작 재선에 불과했음에도 2010년 5월, 원내대표에 당선되었다. 박 의원 개인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에서 ‘정치인 박지원’으로 자립했다는 의미를 지녔다. # 이후 2010년 7월 28일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당시 대표였던 정세균 의원이 사퇴를 했고, 결국 임시로 다음 전당 대회까지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파일:2012050401000372600040121.jpg
<colcolor=#fff> 제2대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당선 직후의 박지원 의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1] 2012년 5월 민주통합당 19대 국회 첫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는데, 이때 초대 지도부가 총선 패배로 인해 모두 사퇴한 상황이었기에 임시로 다음 전당 대회까지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또) 역임하게 되었다. 2012년 여름에는 여당이 주도하여 박지원에 대한 정치자금법 혐의 등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무대응 원칙을 지키고 있던 박지원은 7월 마지막 날 , 체포영장이 나오자마자 서울중앙지검에 자진 출두하였는데 검찰이 소환조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진땀을 뺐다.[22] 그리고 전당 대회를 통해 새롭게 당선된 이해찬 대표와의 담합 의혹이 있기도 했었다. 2012년 겨울 대선 패배 이후 원내대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참패하자 김한길,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사임하고 뒤를 이었던 박영선 전 원내대표 겸 국민공감혁신위원장마저도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은 문희상 전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2015년 2월 8일에 열린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상임고문과 맞서 2위로 석패했다.

2016년 1월 22일에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3월 2일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입당키로…18번째 현역
파일:20160427150931383708.jpg
<colcolor=#fff> 제2대 국민의당 원내대표 수락 연설을 하는 박지원 의원
국민의당 합류 이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당선되어 4선의 중진이 되었다. 2016년 4월 27일, 경기도 양평군에서 열린 국민의당 20대 국회의원 당선인 워크숍에서 러닝메이트인 정책위의장에 추대된 김성식 당선인과 함께 원내대표로 만장일치 합의추대되었다. 이로써 박 의원은 2010년 민주당(18대 국회), 2012년 민주통합당(19대 국회)에 이어 2016년 국민의당(20대 국회)까지 이례적으로 3번이나 원내대표를 맡는 진기록을 세웠다. # 2016년 6월 29일 천정배, 안철수 공동대표가 사퇴하였고, 박지원은 만장일치로 원내대표를 겸하면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6년 12월 5일 부로 김동철에게 비상대책위원장을 이임하였다. 곧바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출마하기 위해 원내대표직도 사임하였다.
파일:20170115010004779_1.jpg
<colcolor=#fff> 제2대 국민의당 대표 당선 직후의 박지원 의원
그리고 2017년 1월 15일, 국민의당 전국당원대표자회의에서 1인 2표제, 당원 전체 투표로 200% 중 61.58%의 득표율, 국민의당의 2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인생 중 처음으로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정식당 대표가 된 것이기도 했다. 과거 당 대표 직함은 비상대책위원장직이 전부였으니, 비록 국민의당이 원내 3당이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청년 시절 목표('야당 대표')를 이룬 원로의 정치인이 되었다.

2017년 5월 10일, 19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2기 지도부가 총사퇴를 결의하면서 박지원 본인 역시 당대표에서 물러났다.

2.4. 문재인 정부 시기

2017년 9월 12일, 대정부질문에서는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다른 야당 의원들과 달리,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와 제대로 된 질의응답을 주고받아 그나마 좀 낫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이낙연 당시 총리는 박지원 전 원장의 후임 대변인으로 같이 한솥밥을 먹었고, 이 전 총리가 동교동 출입기자였을 때는 박지원 전 대변인이 자리를 종종 마련해 기자들과 만나곤 했기[23]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박지원이 민주당을 탈당한 후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날 박지원 전 의원은 거창하고 강한 어조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실제 질의응답은 상식선에서 세간이 정말 궁금해할만한 내용으로 채워졌으며, 이낙연 총리가 답변 괜찮게 한다 싶은 대목에서는 박지원이 살짝 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의 비판을 받은 백악관 발언 신뢰 관련 발언 역시 자세히 보면, 미국에서 사업을 하며 그쪽 사람들의 생리를 경험한 박지원이 후배 정치인에게 충고하는 내용에 더 가까운 대목.

그러나 전날인 11일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로 인해 국민의당과 안철수 대표가 여론의 비판을 자초하고 있고, 박지원 본인도 언론 인터뷰에서 사태의 책임을 청와대와 여당에게 전가하는 발언[24]해서 그나마 훈훈한 이런 장면도 묻히고 있다.

2017년 추석 연휴 동안 전남 곳곳을 돌아보며 민생 행보를 펼쳤기 때문에 전남도지사 출마에 대한 마음을 굳힌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는데, 10월 10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국민의당이 지방선거에 승리하지 않으면 존폐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기왕에 말씀드린 대로 안철수, 손학규, 천정배, 정동영, 박지원. 이런 당대표급 인사들이 이번에는 전면에서 뛰는 것이 좋다. 그래서 한번 이끌고 가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다"며 강하게 출마 의사를 보였다. 그래서 민주평화당 정의당의 공동교섭단체에도 부정적인 의사를 표출했는데, 교섭단체를 만들려면 자신이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 그러나 이후 입장을 선회해서 지사직에는 불출마하였다.

2018년 2월 민주평화당 창당 이후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문모닝을 보여주고 있는데, SNS나 인터뷰를 통해 문재인 정부의 정책, 특히 대북 정책에 든든하게 뒷받침 해주고 있다. 가끔가다 보면 남들 모르게 복당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자 ”저래서 문재인이 대통령됐구나, 역시 나보다 낫다고 인정한다“고 누가보면 더불어민주당 논평이 아닌가 싶은 정도로 극찬했다. 물론, 박 전 원장이 대북 송금 사건으로 처벌 까지 받았는데도 지금도 자신의 정치 목표는 햇볕정책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고 하는 사람이지만, 외부적으로 봤을 때는 차기 전남지사 출마를 위한 포석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압도적이다. 아무래도 호남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낮아도 80%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라...

실제로 문 전 대통령의 복심이자 최측근으로 알려진 양정철 전 비서관의 북콘서트 게스트로 등장해서 대놓고 더불어민주당과의 연대를 말하며 민주당에 구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 의원의 이러한 행보에 넷상의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응은 " 응 안돼"로 종합 할 수 있겠다. 민주당 역시 내부적으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합쳐서 재적 과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과 당 지지율이 압도적인데 굳이... 하는 분위기로 알려졌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진행하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TV조선의 시사프로그램인 강적들에 자주 게스트로 초빙되고 있다.

2019년 7월, 대안정치연대 소속 비당권파들과 민주평화당을 탈당하기로 했다. 2020년 1월 대안신당 창당일을 결정한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서는 대안신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이 합당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흩어져있는 옛 국민의당 세력들의 통합을 주장한 것이다.

2020년 1월 9일 추미애 법무부장관 윤석열 라인을 겨냥한 검찰인사에 대해서 "역시 추미애답게 통쾌[25]하게 했더라."면서 후속 인사는 차장, 부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제 (정권을 겨냥한) 수사 라인 차장, 부장들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 다음날인 10일에는 추 장관의 "(윤 총장이) 내 명을 거역했다"라는 발언에 대해 "왕조시대도 아니고 지나친 표현이다."며 비판했고, "수사라인을 좌천성 승진이나 좌천시킨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니었나"라고 평가했으며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버텨야 되고, 버티리라 본다"고 전망했다. # 앞선 2019년 12월에는 유재수·김기현 의혹 수사, 검찰 수사관 사망과 관련해 "마치 '제2의 국정원 댓글 사건'이 되는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특히 청와대 사정 기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아니냐, 쉽게 간과될 일은 아니다", "감찰 무마 의혹은 조국 사태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갈 것"[26]이라며 "현재 검찰이 수사중이니까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 또한 자신도 많은 의혹을 받았지만 무죄로 밝혀진 경험이 있다며, 실체가 있는 의혹인지 검증이 필요하다고도 하였다. #

2020년 1월, 안철수가 귀국해서 신당 창당을 선언하자 "안철수는 새로운 인물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생당 후보로 다시 목포에 출마했으나 더불어민주당 김원이 후보에게 패하며 결국 낙선했다. 아직도 화제성도 뛰어나고 인지도도 높긴 하지만, 나이도 너무 많고 민생당 후보들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은퇴 수순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2.5. 낙선 후 정치평론

팔순이 다 된 상당한 고령인지라 2024년 다음 총선 출마도 불투명하고 민생당도 원외정당으로 전락했기에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이라는 추측이 돌았으나 일단 박지원은 '영원한 현역'을 선언하며 정계에 간접적으로나마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 워낙 언변이 좋고 유머가 뛰어나서 의원 시절에도 방송 출연이 잦았던 터라 방송 출연과 SNS 활동을 계속 진행할 것으로 보이고, 상황에 따라서 유튜브를 개설하여 원로 정치인으로서 할 말은 하고 살겠다고 한다.

실제로 낙선 후 지상파와 종편을 가리지 않고 정치 및 시사프로그램에 계속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민주당 윤미향 당선인과 관련하여 발생한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에서는 윤미향 당선자와 민주당을 비판하기도 했다.[27]

2020년 6월 1일 자로, 모교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다. 대북관계, 국제정세, 국내정치문제를 강의한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 6월 17일 꽉 막힌 남북관계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문정인 특보, 고유환 통일연구원장, 임동원· 박재규· 정세현·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박지원 교수 등 원로들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오찬을 가졌다고 한다. #

이후, 일각에선 사의를 표명한 김연철 장관의 후임 통일부장관으로 임명하라는 목소리가 나왔고 총선 직후부터 입각설이 제기되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처럼 국회의원 선수나 그동안의 경력을 보았을 때, 진짜 남북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최후의 카드로 쓸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2.6. 국가정보원장

2020년 7월 3일, 국가안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서훈 국정원장의 후임으로 차기 국정원장에 지명되었다.[28] 청와대 브리핑에서는 18-20대 국회 정보위원회 활동 시 보여준 뛰어난 정보력과[29] 국정원 기관에 대한 깊은 이해, 남북관계 조정에 대한 능력을 인정해 내정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또 비슷한 시기 동교동계 출신인 김한정 의원도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원에서 이종찬 국장의 대외협력보좌 역으로 근무했던지라, 일부 여당 의원들과의 원만한 관계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해 박지원 전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파일:박지원_국정원장.jpg

박지원 전 의원이 국정원장에 내정된 것 자체도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평이다. 어느 정도로 파격적이냐면, 박근혜 정부 말기에서 유승민 경제부총리로 내정하는 급의 파격 인사다.[30][31]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당적 보유자가 아니라 야권인 민생당 당적 보유자를 입각시킨 탕평인사라는 점도 그렇고, 과거 참여정부 시절 진행된 대북송금 특검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32]

다만 국회 정보위원장을 선출하기 위해서는 두 국회부의장의 협의 후 본회의 의결이 필요한데, 현재 미래통합당 몫 국회부의장 내정자인 정진석 의원이 부의장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위원장을 선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래통합당이 국회 복귀를 선언함에 따라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청문회가 준비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인 북한통이기도 하다. 정치권에서 북한 사정을 잘 아는 북한통으로는 하태경, 태영호 정도가 언급되는데, 현재 그들은 미래통합당 소속이라 현역 의원직을 내려놓고 문재인 정부에 합류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태영호는 탈북자 출신인 데다 국정원에서도 자문위원 정도만 전담했고, 신변 위협의 가능성과 판단력에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여야 의원들 사이에서는 맡을 만한 사람이 맡았다고 본다고 언급한 듯.

청문회를 위해 재산이 공개되었는데, 총 17억 원에 건물이 14억이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상당히 재산이 많은 게 맞지만, 박지원은 정계 입문 이전에는 뉴욕에 건물 5채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재력을 지닌 재미 사업가였던 걸 감안하면, 오히려 생각보다 적은 편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본인 말로는 그간 정치할 때 많이 썼다고 한다.

청문회의 주요 쟁점은 1965년 현역 사병으로 복무 중 부대장 배려로 단국대에 편입해 졸업한 과정, 2003년 대통령 비서실장 퇴임 당시 39억 9,000만 원이었던 재산신고액이 2008년 13억 9,000만 원으로 5년 만에 26억 원 급감한 경위 등이 될 전망이다. #

2020년 7월 27일, 정보위원회에서 인사청문회가 개최되었는데 개인 도덕성 검증에 초점을 맞춘 오전 청문회만 국민에게 공개되고, 본격적인 정책 및 현안 질의가 진행되는 오후 청문회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33] 이때 청문회를 시작하기 전 국정원의 임무를 수행하다 산화한 '이름없는 별'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묵념을 하고 시작했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34]가 북한을 주적으로 인식하냐고 반복적으로 질문하자 "주적이라니깐요? 100번 말할까요? 아니면 광화문 가서..."라고 답했다.

2020년 7월 28일, 미래통합당의 불참 속에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되었다. # 오전에는 통합당 하태경 의원, 주호영 원내대표 등이 단국대학교 졸업 및 남북간 이면합의서 존재 여부 # #를 가지고 일단 임명을 유보하고 국정조사를 진행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 # 여당 간사였던 김병기 의원[35]이 이를 거부하자 오후에는 상임위 전체회의에 불참하였다.
파일:l_2020072901020079100281001.jpg
<colcolor=#fff> 박지원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문재인 대통령
2020년 7월 28일, 청문경과보고서 채택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을 재가하여 29일부터 신임 국정원장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29일, 김창룡 경찰청장, 이인영 통일부 장관 등과 함께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았는데, 행사장에는 딸과 더불어 어린 외손자도 동행[36]해서 눈길을 끌었다.

2020년 11월 8일 스가 정권 출범 이후 대한민국 최고위급 인사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을 방문하여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을 9일에, 스가 요시히데 총리를 10일에 접견하였다. 스가 총리와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 문제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

2020년 12월 1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원장·법무부 장관·행정안전부 장관 합동 권력기관 개혁 관련 브리핑에서 박지원은 “역대 정부에서 추진했지만, 미완으로 남았던 국정원 개혁이 비로소 완성됐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 5·18, 세월호, 댓글 사건, 민간인 사찰 같은 국정원 관련 의혹이 두 번 다시 거론되지 않도록 진상 규명에도 끝까지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3일 국회를 통과한 국정원법 개정안에 대해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처음으로 국정원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규정했다”고 의미를 부여했고,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문제에 대해 “(기존 직무 범위에서) ‘국내 보안정보’를 없앴고, 정치 개입이 우려되는 조직은 해체했으며 원천적으로 설치할 수도 없게 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중대한 국가 안보 사안은 국정원이 국회에 보고함으로써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의해 민주적 통제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2021년 1월 20일, 국가정보원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구성원들에게 문서보안 과정을 거쳐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문건 64만 건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국정원, 세월호 64만건 ‘자료 전체’ 사참위에 열람 허용

2021년 3월 24일, 부마민주항쟁과 관련한 자료 총 132건(1447쪽)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심의위)'에 제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자료엔 중앙정보부 문건 42건(214쪽)과 경찰 생산 문건 75건(1212쪽), 군 생산 문건 15건(21쪽)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아울러 주요 내용으론 Δ당시 상황 분석 및 수사방향 Δ일부 대학 동향 Δ주요 관련자와 연행자 명단·평정·처리 판단 보고 Δ개인별 사건 이첩·송치자료 등이 담겼다. 특히 중앙정보부 생산 문건에는 "데모 연행자의 개인별 가담 사유를 파악하라"는 청와대 지시를 비롯해 Δ관계기관 회의 시 토의사항 Δ수사 방향 관련 수기 Δ포고령 위반자 처리 지침 등의 내용이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의 부마항쟁 관련 자료 제공은 지난 2017년 1차로 5건(51쪽)을 제공한 데 이어 두 번째다. 국정원, 부마항쟁 심의위에 관련 자료 132건 제공

2021년 4월 5일, 국가정보원 5.18 민주화운동 당시 '최초 발포 차륜형 장갑차' 증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진을 포함한 22건, 1242쪽의 기록물을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추가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번 자료 제공은 지난해 8월 11일과 11월 4일, 올해 2월 9일에 이어 네번째다. 국정원은 지금까지 총 101건의 문서(6888쪽)와 사진 257장, 영상자료 1건을 제공하며 5·18 진상조사 활동을 돕고있다. 5·18 당시 최초 발포 장갑차 증언 뒷받침 사진 나왔다

2021년 4월 중으로 사임이 예상되는 정세균 국무총리의 후임자로 김부겸 전 행안부 장관,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등과 함께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다. # 결국 김부겸 전 장관이 차기 총리로 지명되면서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기진 않게 됐다.

2021년 5월, 국정원에 최초의 여성 차장 임용에 이어 여성 간부를 대폭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2017년에 비해 여성 간부 비율은 4배 증가해, 여성계에서는 호응이 좋았다. #

2021년 6월, 국가정보원에서 원훈석 제막식을 열고 새 원훈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을 공개했는데, 국가보안법 위반자인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어깨동무체가 원훈 글씨체에 사용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에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한변)등 105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국보법 수호연대는 " 문재인 대통령과 박지원 국정원장이 간첩 글씨체로 국정원을 모욕했다"고 규탄했다. # # # 논란이 되자 국정원 측은 '신영복체'가 아니라 서예가 죽전 송홍범의 '송홍범체'라고 주장했지만 서체를 둘러싼 논란은 지속되었다. #

2021년 6월 23일 박지원 국정원장은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과 관련해 "폐지가 아닌 존치, 개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간첩이 있으면 잡는 것이 국정원이고, 누군가 이 일을 해야 우리 안보를 지킨다"면서, '간첩 조작'은 과거 사례라고 평가하면서 "창설 60주년을 맞은 국정원은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린다"고 설명했다. 다만 박 원장은 "과거 일이라고 해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 # 이 무렵 청주 간첩단 사건을 수사해 관련자들이 구속되었고 언론에는 7월말에 공개되었다. #

2021년 11월, '2021 산업보안 컨퍼런스'에서 축사를 맡은 박지원 원장은 “산업보안은 곧 국가안보 그 자체”라며 “우수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원장에 따르면 국정원은 지난 5년간 89건의 기술 유출 사건을 적발함으로써 약 19조원의 피해를 예방했다. 방첩 역량과 국내·외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첨단기술 유출 시도를 끈질기게 추적한 성과라는 설명이다. ##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22년 3월에 세균 감염으로 3주간이나 입원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

2022년 5월 11일,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권으로부터 국가정보원장직에서 사퇴하라고 통보받았다. # 통상 후임자에게 인수인계 후 물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감안하면 국회 정보위원들 사이에서도 이례적이라는 의견이다. 새 정부 입장에서는 기존과는 아예다른 새판을 짜고싶어 인수인계마저도 거부한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해 국회 정보위원회 관계자는 "남북관계, 북한 미사일 등 한반도가 위기의 상황"이라며 "아무리 교체기라 하더라도 정보와 안보 분야는 공백이 없도록 하는 게 맞다"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김규현 후보자를 지명했을 뿐만 아니라 국정원 1차장에 권춘택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사무총장을 내정했다. 통상 국정원장직이 공백일 경우 1차장이 직무를 대행하는데, 기존 박선원 1차장도 박지원 원장과 함께 국정원을 떠나 권 내정자가 직무를 대행하게 됐다.

이명박 정부 원세훈 국정원장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인 2013년 3월 21일까지 직을 유지했다. (다음날 남재준 원장 취임). 박근혜 정부 이병호 국정원장 역시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인 2017년 6월 1일 퇴임했다. (다음날 서훈 원장 취임).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넘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건에서 고영구로 교체될 때도 노무현 당시 대통령 취임 이후인 2003년 4월 공백 없었음). 다만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국정원장 자리에 공백이 발생했는데, 이는 대선 직후 '김만복·김양건 대화록' 유출 사건이 있었고,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이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기 때문이다.

2.7. 국정원장 퇴임 후

퇴임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 통상 국정원장에서 퇴임하게 되면 조용한 삶을 살았던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가 해당 인물의 나이 쯤 되면 정계 은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였던만큼 이 또한 이례적인 행보이다. 민생당에 복당할 의사는 없는 것이 확실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할 가능성이 남아있다.[37]

이미 여든이 넘은 고령이다 보니,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다고 해도 당 상임고문 이외의 다른 직책을 맡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거기에 국정원장이라는 직책의 특성상 아는게 너무 많아져[38] 과거와 달리 방송에 나와 정치 평론 활동을 하는 것에도 어느정도 제약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정치인 시절 보여준 처세술 등을 감안하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본인이 알고있는 정보들을 풀 가능성도 높다.

제42주년 5·18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하루 전인 본인의 SNS를 통해 "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국민의힘 소속 의원 전원이 5·18 기념식에 참석해 '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다고 한다. 잘한 결정이다"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 42주기! 다함께 기념하고, 가해자는 진정으로 사과하고, 진실 규명에 협조해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는 용서하고 국민은 통합할 수 있다"며 " 윤석열 정부 집권여당이 기념식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을 다짐하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국민통합은 더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정보원장 재직 때 총 4회에 걸쳐 101건(6888쪽)의 문서, 사진 257건을 5·18 진상규명위원회에 제공했다"며 "국정원이 제공한 자료 중에는 중앙정보부 생산 중요 문건 17건, 광주고 앞길 최초의 발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차륜형 장갑차 사진도 있다"고 설명했다. "진실 규명은 계속돼야 하며 개인, 기관, 국가든 누구든 진실 규명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면서 "피해자와 국민이 만족할 때까지 사과와 반성을 하고 생존해 있는 당시 신군부 책임자와 핵심인물들은 이제라도 사죄의 증언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자신의 SNS에 “野 내부총질하니 尹 권력기관 인사도 강건너 불구경…인사가 만사”라면서 박지현 비대위원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신청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 이미 제20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수많은 국민의당 출신 인사들이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의 요청으로 복당에 성공한 만큼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장까지 지낸 박 전 원장의 복당 역시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6월 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참패를 예측한 출구조사를 보고 "자생당사(自生黨死). 자기는 살고 당은 죽는다는 말이 당내에 유행한다더니 국민의 판단은 항상 정확하다." 라며 이재명 상임고문을 비판했다. #

다만 이후 JTBC 인터뷰에서는 지역연고와 과거 인연으로 인하여 명낙대전을 치른 이낙연 전 대표에 더 호의적이지 않냐는 질문[39]에 " 이재명 성남시장을요 제가 얼마나 노력해 당선시킨 지 아세요. 성남 모란시장 같은 데 가면요 호남보다 호남 사람이 더 많아요. 그 사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라며 친분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재명의 당권도전에 대해서도 " 이재명 의원도 민심을 파악하고 있다는 거 아니에요. 그분이 결정할 문제예요."라며 전에 햇던 비판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 다만 이것은 박지원 전 원장의 과거 발언 등을 고려했을 때 정치적인 수사라고 봐야 한다.

뒤이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내부총질 하고 싸워야 한다. 그래야 반성한다"라고 조언한 뒤 그렇게 피터지게 싸운 후 전열을 정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동시에 "그러나 오래 싸우진 말라. 진짜 싸움은 밖에 있다. 민생, 경제에 있다"라며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

6월 24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원 1급 인사 27명을 전부 대기발령했다는 한겨레 보도에 일거에 전원을 해버리면 물론 단장들이 직무대행을 맡는다고 하지만 혹시라도 안보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원장과 차장, 기조실장들이 잘 챙겨주기를 바랄 뿐이다.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



7월 6일, 국가정보원에 의해 2020년 9월 발생한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된 첩보 관련 보고서 등을 무단 삭제했다는 혐의로 전임 국정원장이었던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고발되었다.

이에 대해 즉각 고발 사유인 '국정원장이 자료 원본을 삭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반론을 펼쳤다. # 국정원장이 삭제를 했다고 하더라도 메인 서버에는 남으며, 애초에 국정원은 첩보를 생산하는 기관이 아니므로 국정원이 첩보를 삭제해도 첩보를 만든 기관에 원 자료가 남아있어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군도 첩보 원본이 삭제되지 않았다며 박지원 전 원장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 # 또한, 국정원이 삭제되었다고 주장한 첩보는 국정원이 아닌 군 소관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

이에 국정원은 삭제 의혹이 나온 것은 첩보 보고서로 군 소관이 아니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란 입장문을 밝혔다. #


7월 14일, 검찰에 의해 출국금지 조치되었다. # 낙상사고로 입원 후 박지원 전 원장은 " 오늘이라도 검찰이 부르면 달려가겠다"라며 강하게 결백함을 호소했다.

7월 19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대통령실 사적 채용 논란 관련 발언에 대해 "어떻게 말을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하느냐. 그러니까 지지도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8월 2일 김규현 국가정보원장은 국정원이 박지원, 서훈 전 국정원장을 국정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한 것과 관련, "고발과 관련된 사실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대통령께서 승인하셨다"고 답변해 논란이 일었다. #, #, 대통령실은 "보도자료 보고 알아"…국정원은 "서훈·박지원 고발 방침 尹에 보고", 국정원 "원장 2명 고발 尹에 보고"…대통령실은 몰랐다는데?, 국정원 "박지원·서훈 고발 건 尹대통령에 사전 보고"

10월 6일, 이달 내로 더불어민주당 복당 승인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재명 대표와 전화를 통해 복당을 검토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복당이 곧 될 것 같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여 안철수 신당( 국민의당)으로 갔던 것이 정치 여정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말하면서 정치 일선에 복귀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은 제가 잘할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보다 훨씬 잘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

11월 15일, 최근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에 복당을 신청하고 중앙당 당원 자격 심사위원회가 전남도당과 목포지역위원회에 의견을 묻는 공문을 보냈음이 밝혀졌다. # 11월 17일, 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했고 그 혼이 박힌 정당이며, 귀신이 씌어서 국민의당으로 간 것은 내 인생이나 정치의 가장 큰 실수라며 한 달 전과 동일한 입장을 고수했다. 복당이 되려면 당헌당규에 따라 탈당했던 전남도당, 목포시당의 의견을 묻고, 복당심사위원회와 최고회의 의결을 거친 후 당무위원회까지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

12월 3일 새벽,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으로 서훈 전 안보실장이 구속되면서 당시 외교안보라인 최고위급 인사로 수사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12월 14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았다. 박 전 원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어떠한 삭제 지시를 받지 않았다. 원장으로서 직원들에게 무엇도 삭제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12월 16일, 더불어민주당 입당이 보류되었다. 과거 탈당 및 국민의당 소속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 공격에 앞장서 활동한 전력을 들어 정청래 최고위원이 강력히 반대했다고 한다. 이재명계는 당 화합 차원에서 받아주자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

12월 19일, 이재명 대표가 강력하게 추진해 복당이 승인되었다. #

2.8. 더불어민주당 복당

2022년 12월 26일 당 고문에 위촉되었다. 통상적으로 고문에 위촉되면 일반고문이나 상임고문이 되는게 상례인데, 일반고문을 주자니 정치 커리어가 너무 넘사벽이고 상임고문을 주자니 국민의당 분당부터 해서 문재인 대통령 당선 막기의 최선봉이었던지라 당장 상임고문을 주기엔 또 그래서 당 일반고문으로 위촉한 것으로 보인다.[40]

복당 이후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노웅래 의원에게 정치적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자신의 경험을 상기시키며 “검찰이 소환통보를 하면 응하지 말라. 검찰과는 맞서 싸워야지 출석해서 ‘내가 돈 받은 게 아니다’고 부인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조언 이후 노웅래 의원은 여당의 권성동 의원을 찾아가 도와달라며 손을 잡는 등의 행보를 보였는데, 여기에도 박지원의 조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12월 29일,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이희동 부장검사)는 국가정보원법 위반·공용전자기록등손상 혐의로 박지원 전 원장과 노은채 전 국정원장 비서실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공용전자기록등손상·허위공문서작성·행사 혐의로 서욱 전 장관도 불구속 기소했다. 서훈 실장에 대해서는 계속해 수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23년 1월 20일, 박지원은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욱 전 국방부장관과 함께 재판절차에 들어갔다.

2023년 1월 16일, UAE를 방문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아크부대를 방문하였다. 동행한 김건희가 군복을 입은 것을 두고 17일에 '영부인이 군복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평했다. 하지만 김정숙도 군복을 입은 적이 있어 무안하게 되었다. #

또 17일 대통령은 독한 사람이고 나경원을 내친 것이다 , 대통령이 당무개입을 부인했다고 해서 대통령 영향력이 없다고 믿으면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은 대통령 쪽에 줄을 설 것이고 국민의힘은 대통령 뜻대로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개딸들이 이낙연 전 대표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더니 자신도 비난한다며 지금은 계파가 있어도 다툴 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2023년 1월 30일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국민의힘 여성의원들과 만나 대통령실에서 식사를 한 것을 비판했다. 8개월동안 국회 다수당인 야당과는 공식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 자기 사람들을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 이것은 당무개입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2월 13일 페이스북에 국민의 힘 전당대회는 윤석열 대 이준석의 대결이라고 적은 것에 대해 천아용인이 컷오프를 통과했기에 이준석의 약진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상민 탄핵안 가결에 대해서는 이상민 장관 탄핵이 윤석열에 대한 의지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들의 난상토론에 대해 , 역대 여당 당대표 되겠다는 인물들이 당선을 위해 대통령의 태도를 문제삼은 적도 없었고 , 이런 윤심 논쟁에 대해 대통령이 선을 긋지 않고 있다며 비판했다. 대통령이 당비 300만원 낸다고 당무개입이 용인된다면 세금 많이 내는 재벌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해도 된다는 말인가 하고 분개했다. # #

이재명 대표에 대해 아직 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며 당대표를 사임한다면 민주당을 약화시키는 것이며 사임할 시기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지지자와 민주당과 가까운 중도층이 이재명이 난도질당하는 것에 대해 동정론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국 딸이 받은 600만원은 유죄이고 곽상도 아들이 받은 50억은 무죄라면 이것이 정의고 공정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건희 , 곽상도같은 이가 민주당이었다면 이렇게 검찰 수사가 흘러갈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

2023년 2월 23일 , 이재명 대장동 논란을 김건희 도이치모터스로 덮는다는 사람들에 대해 이재명 김건희는 양편 다 특검을 차려서 조사했어야 하고 , 천공스승이 국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으면 당사자인 천공스승을 불러다가 조사해야 밝혀지는 것이지 용의자가 아니라고 한다고 조사를 안하는가 , 검찰 권력이 사람 따라 다르게 적용되고 있으니 국민들이 뭐라고 생각할 것이냐고 일갈했다. # 대통령실 쪽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김건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을 물고 늘어지는 김의겸을 용감하다고 추켜세웠다.

2023년 3월에는 이재명만한 대선후보가 없는 상황인데 민주당으로서 사람들이 이재명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해서 보수 언론들의 십자포화를 받기도 했다. 3월 24일에 국정원장 시절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는데 박지원 전 국정원장 측에서는 서훈 전 국정원장 측 대리인과 함께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3월 한일정상회담에 대해서 우리가 이득본 게 없다. 일본 총리와 여당의 지방선거 , 의회선거 지지율을 올려주는 역할만 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2023년 4월에는 민주당 돈봉투 의혹에 대해 용의자들은 따로 있지만 대국민 사과를 한 이재명 당대표와 탈당 후 재판을 받기로 한 송영길 전 당대표는 인간의 그릇이 크다며 감쌌다. 그리고 송영길 당대표에 대해서 자신이 죽어도 당을 살릴 각오로 행동한다면 2024년 총선 정국에서 민주당에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응원했다.

2023년 4월 윤석열 일본 사죄 관련 외신 인터뷰 논란에 관하여는 사견이면 사견으로 끝나겠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해서는 안될 말이다. 대한민국 대표가 일본 앞에서 과거사를 말하지 말자는 말은 독립투사들에 대한 모욕이고 그들이 만든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왜 대통령이 국민들 마음을 이렇게 줴지르는가 하며 비판했다.

4월 한미정상회담에 대하여 속 빈 핵우산 약속 하나 얻고 새 미국 전략자원을 수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경제사절단에 포함된 대기업들에만 고만고만한 이득이 돌아갈 것이며 커다란 이익과 외교적 성과는 미국에게 퍼주고 이번에도 미국 민주당 정권 연장용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크게 우려했다.

5월 10일 김남국 가상화폐 보유 논란에 대해 김남국 의원에게 사과를 먼저 하고 성실히 조사받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선출직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돈도 벌려고 하면 도둑이라며 확실히 비판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에 대해서도 이전처럼 먼저 탈당한 사람들은 추켜세우지만 숨어있는 10명 내외의 관계자들도 색출해서 탈당하던지 출당시키고 일벌백계하지 않으면 정당으로서 면을 세우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국민의힘 김재원 , 태영호 의원 징계에 대해 대통령실이 공천에 개입하려고 할 것이며 당 차원 징계는 대통령실 흔적을 지우고 태영호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한 것이라고 보고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는 시찰단은 눈으로만 확인할 뿐 확인하거나 조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사능이 남아있을 수 있는 해산물을 괜찮다며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미국 쇠고기를 처음 수입할 때 이명박 대통령이 반대시위를 보고 결단해서 수입육 기준을 미국인 기준과 똑같이 만들었듯이 윤석열 대통령도 국익을 위해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대통령실 , 검찰 , 경찰과 법무부가 노조와 파업에 강경대응 일변도로 대응하는 기조에 대해 파업과 시위를 하는 시위자들의 행동에 민주시민답지 못한 부분이 다소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고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자유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집회와 시위의 자유만을 이렇게 크게 제한한다면 자유의 기준이 어그러지는것이라고 주장했다.

2023년 5월 24일 검찰이 불구속 수사중인 국가정보원장 시절 직권남용 혐의에 대하여 서훈 전 국정원장과 함께 박지원 전 국정원장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5월 25일 오마이뉴스 유튜브 채널, MBC 2시 뉴스외전 등에서 출연하여 제22대 총선 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 이에 2019년 1월 본인의 부동산 투기 논란 당시 박지원이 태도를 바꿔 공격했기에 타도 박지원으로 돌아선 손혜원 전 의원이 추잡한 핑계로 노욕을 부린다며 박지원의 대항마를 돕겠다고 밝혔다.

6월 6일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하여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회 이래경 임명 논란에 대해서 이재명 당대표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적절한 인물을 인선하여 이재명 인사참사론을 적극적으로 잠재워야 한다고 말했다.

2023년 8월 4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고향인 진도군이 포함된 해남군·완도군·진도군 지역구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 그 전에는 차기 총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보여 목포시 선거구에 돌아올것이라는 여론이 일었는데 직접 출마를 희망하는 지역구를 거론한 건 처음이다. 만약 22대 총선에서 당선된다면 만 81세에 당선되는 만큼[41] 만 76세에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지역에서 당선됐던 이용희 전 의원을 제치고 역대 최고령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42] 기록을 세우게 된다.

9월 7일 해남군 해남읍으로 주소를 이전하고 구교주공아파트를 임대 계약했다.

10월 인요한 혁신위원장에 대해서 " 김대중 대통령과 가까웠고 나와도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데 참 좋고 훌륭하고 소신있는 인사이지만 해야할 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대통령이 당무개입을 밥먹듯이 하는 국민의힘에는 어울리지 못할것이다. 전권을 준다고 하지만 국힘 혁신위가 2024년 총선 공천권을 받지는 못할 것이라 잘될 거라 말하기도 어렵다 " 라고 평했다. 그리고 한동훈 법무장관에 대해 "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될 가능성이 커서 탄핵심판 기간동안 직무정지로 장관직에 묶여 2024년 총선 출마하지 못할 것이다. " 라는 의견을 반복해서 제기하고 있다. 박지원은 한동훈이 국무총리감으로는 부족하지만 총선 이후 대통령비서실장이나 대통령실로 직을 옮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11월에 이탄희 의원 등 일부 국회의원들이 당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 2024년 총선 200석 가능하다 " 라는 주장을 원내로 끌어올리는 것에 대해 설레발이라고 크게 우려했다. 이재명 대표도 11월 6일 " 총선 200석 " 등 총선 결과를 크게 낙관하는 발언에 대해 주의를 당부했다고 한다.

12월 23일 신당 창당을 시사하는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작심 비판을 쏟아냈다. 박지원은 “이재명 대표께서 손을 내밀면 이낙연 전 대표도 손을 내밀어야지 발을 내밀면 대화가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또한 이낙연 전 대표가 이재명 대표의 사퇴를 요구한것에 대해서도 “누가 국민지지를 받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또한 “이낙연 전 대표도 검찰이 돌변하면 옵티머스 사태 관련 압수수색 등 수사만 하면 어떻게 하려느냐. 이낙연 전 대표 측근의 극단적 선택은 설명이 다 끝났느냐?”고 되물으면서 이낙연 전 대표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

2.9. 5선 국회의원

파일:SSC_20240410225908_O2.jpg
<colcolor=#fff> 5선에 성공한 박지원 의원
스마트 보이! 새순 박지원이 나왔습니다.
공천 확정 후 나오는 프로그램마다 외쳤던 박지원의 인사멘트
3월 13일, 현역 윤재갑 의원을 경선에서 꺾고 해남군·완도군·진도군 지역구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공천받는데 성공했다. 공천 이후 타 지역구에서 방문 요청이 쇄도하여 거리인사 일정도 잡았다고 한다. 4월 10일 있었던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홈그라운드 전라남도, 국민의힘과 1대1구도, 그간 정치활동으로 쌓은 높은 인지도, 수준 미달의 상대후보 등 버프란 버프는 모조리 받은 결과 92.35%라는 넘사벽스런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또한 박지원은 22대 총선 당선인 중 최고령(만 81세, 퇴임시 만 85세) 당선인[43]이자 제22대 국회 기준 유일한 1940년대 출신 국회의원이자 일제강점기 태생 현역 국회의원이 되었다.[44]

박지원 당선인이 현역 국회의원 최고령 당선자인데다 정치 경력이 노련한 만큼 추미애, 조정식과 더불어 22대 국회 대한민국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일단 본인이 5선으로 선수에서는 밀리는데다 큰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에서 보았을 때, 국회의장 후보로 직접 나설 확률은 높지 않아 보인다.[45] 하지만 조정식은 후반기 국회의장에 취임할지도 모르는 2026년 기준으로도 60대 초반으로, 6선 치고는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 6선과는 별개로 추미애와는 달리 지역구 외에는 전국적인 인지도가 별로라서 국회의장이 되면 이후 정계 은퇴를 해야 한다는 관행이 실로 부담스러울 가능성도 있다.[46] 이 때문에 헌정 사상 최고령 지역구 국회의원이 된 박지원에게 후반기 국회의장 자리가 갈 거라는 예상도 많다. 그러나 박지원은 선거 이후 출연한 매불쇼에서 2028년 23대 총선까지 출마의사를 보였다.[47]

총선 이후에도 한동안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영수회담을 제안하자 "늦었지만 정말 잘 하셨다, 민생문제를 꼭 해결해야 한다."며 윤 대통령이 큰 결단을 했다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48]

그리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처음으로 기호 1번을 달고 당선된 것이었다. 그동안 민주당 시절엔 기호 2번을 달았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때는 국민의당 그리고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때는 민생당 후보로 기호 3번을 달았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호7번 무소속을 달았던 적이 있었다.

2024년 9월 9일, 한덕수 국무총리를 상대로 2024년 의료정책 추진 반대 집단행동 2024년 응급실 대란에 대하여 날카롭고 논리정연하게 대정부질문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

2.9.1.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파일:20241204_155200.jpg
2024년 12월 3일~4일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국면에서는 여타 많은 의원들처럼 통제를 돌파해[49] 해제안 가결 등에 참여하였으며, 사태가 소강되자 밤 늦은 시간에 고령의 나이 탓인지 국회에서 지쳐 기절하듯 잠든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번 계엄령은 박지원 의원이 살면서 6번째로 겪은 주요 계엄령이며, 또한 역사적으로 있었던 17번의 모든 계엄령을 경험했다는 이력이 주목되기도 했다.

2024년 12월 18일, 국회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에 임명됐다. 당초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에는 정점식 국민의힘 의원이 내정돼있었으나 여당이 인사청문회를 거부하면서 전원 불참하자 야당 연장자인 박지원을 위원장 직무로 청문회 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국회법에 따르면 인사청문특위는 위원장 1명을 두되 위원장이 선임될 때까지 위원 중 가장 연장자가 위원장 직무를 대행할 수 있다. #

[1] 정치를 시작한 뒤의 훗날에도 정치적 선택의 고민이 있을때 첫째 형님과 상담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박지원 본인이 어릴때부터 첫째 형님을 아버지처럼 따랐고 존경했다고 한다. 그외 대학이나 취업 등 20대때 고민도 큰형님의 조언을 구했었다고 한다. 정치스승은 김대중 선생이었지만, 인생 스승은 큰형님이었다고 한다. [2] 그전 까지는 12.12와 5.16을 찬양하는 인물이었지만, 실상을 알고 반성한 것이다. 그만큼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김경재는 한화갑, 한광옥과 함께 18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며 보수진영으로 전향했다. [3] 박지원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밀사 역할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김 대통령은 편지가 다 검열되거든요. 저한테 써주면 제가 가지고 가서 한국에서 나눠드리고 답장 받아오고." # [4] 이 당시 명언 아닌 명언을 남겼는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여당 인사들이 '삼풍백화점은 군사정권 시절에 허가받고 지어졌는데 현 정부가 거의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억울하다'라는 발언을 하자,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이냐는 말로 되받아쳐 침묵하게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한 게 흥선대원군이기 때문. [5] 잘 알다시피 김문수는 15, 16, 17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되며 3선에 성공하고 이후 경기도지사 재선까지 했지만 그 유명한 자기소개 사건을 시작으로 정치 생명이 점점 끊어지기 시작한다. [6] 본인이 고사한 이후로 박병석, 이강래도 거론되었다. [7] 출처 [8] 권노갑은 회고록에서 "내 기억에 남는 명대변인은 두 사람인데, 홍사덕 의원과 박지원 의원이었다. 홍사덕 의원은 김대중 총재의 발언을 옮길 때 그 말을 자기 식으로 요약하여 옮기는 재능이 있었으나,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총재의 발언 내용을 정확히 메모해 이를 각색하지 않고 토씨까지 그대로 발표하는 특이한 재주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9] 대표적인 발언으로는 "머리 등 모든 것을 빌리기만하는 김영삼 후보는 재산을 공개한 것처럼 머리도 공개하라","원자로와 중거리핵이 어떻게 다른지 김영삼 후보는 설명해보라", "경제 사회 정치 분야에서 0점을 받은 03정권" 등이 있다. [10] DJ의 처조카 이영작 2000년 인터뷰에서 "박지원 장관이 ‘김대중 총재는 청년시절 사업가로 성공했고, 경제정책에도 밝고 이론에도 밝다’는 내용을 연설문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당의 연설기초위원회에서 그것을 빼버리는 일까지 있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난번 대선 승리의 수훈갑은 박장관입니다. 당시 당 안팎에서 ‘김대중 후보는 경제의 3박자를 모두 갖춘 경제전문가’라는 얘기를 가장 지속적으로 하고 다닌 사람이 바로 박지원 장관이었거든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1] 이에 박지원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찾아가 "제발 봐주십시오"하고 대변인직을 고사했고, 당선자 공보팀장으로 있던 김한길에게 인수위 대변인직이 넘어갔다 [12] 명목상 수신인은 이 두 사람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MB에게 뭔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으로 보고 언론에서 그 함의를 추정하기도 했다. [13] 원래 육사 출신으로서 군부 인사였으나 그의 외교 안목을 눈여겨본 DJ의 눈에 들어 군부 인사로서는 이례적으로 민주계 정부에 발탁되어 통일부장관으로서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만경대 생가 사건으로 야당에 의해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어 장관직을 사퇴했지만, DJ는 이듬해 외교안보특보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정권 말기에는 특사로 김정일을 만나러 방북했을 정도였다. [14] 당시 박지원과 함께 이 협상에 관여한 국정원의 대북라인은 '김보현 제3차장-서영교 대북전략국장- 서훈 대북전략조정단장'이었다. [15] 종종 언론에선 그를 대신할 대(代)를 써서 '代統領'이라는 칭호로 부르곤 했다. [16] 박지원과 문재인 모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했고(둘 다 각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다) 비서실장 시절 정부 내에서 파워가 막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재인은 훗날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17] 왼쪽 눈을 실명하고 의안을 착용하게 된 이유가 대북송금사건 구속 때문이라고 와전되기도 하는데, 왼쪽 눈은 이미 그전에 실명된 상태였다. [18] 법적으로는 2007년 2월 3일에 재구속되었다가 6일 만에 풀려났어야 되지만 실제로는 구속되지 않았는데, 사유에 대해 자세히 공개된 보도 정보가 없다. 아마 그 재구속될 시기에 이미 특사여부가 결정됐기 때문에 형집행정지 연장을 형식적으로라도 했는데 언론이 보도를 안 한 것으로 보인다. [19] 2007년 2월 사면 기준으로 2008년 9월 석방 예정. [20] 당시 통합민주당은 전과 기록이 있는 후보는 공천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었다. 이로 인해 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안희정 김민석 등이 출마를 포기하였고, 이인제는 반발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21] 부천시 소사구 지역구는 오래전에 포기한 상태였고, 대신 당시 비례대표 의원이였던 김상희에게 물려주게 된다. # [22] 이때 영장을 발부한 서울중앙지검 위현석 판사는 나중에 법복을 벗고 2017년 국정농단 사태 때 우병우의 변호사가 되었다. [23] 정치권에서는 이를 기름칠한다고 표현한다. 언론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는 한편, 실력이 괜찮은 언론인은 정계로 끌어들이는 경로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24] 요약하자면, 박성진 장관 내정자, 류영진 식약처장, 탁현민 전 비서관을 인사조치하는 조건부로 김이수 표결에 협조해주겠다고 제안했었다는 말. [25] 맥락을 보면 지지발언은 아니고 평소 소신이 뚜렷한 추미애답다는 의미. [26] TV조선 시사프로 강적들에서는 조 전 장관이 조국 일가의 비리인 '조국 사태' 보다도 '유재수 건'으로 더 곤혹스러워질 것으로 내다보면서 '권력형 비리 게이트'로 확산되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말했다. #. [27] 유시민의 스탠스와 비슷한데, 유시민의 알릴레오를 통해 현재 여당이 여론몰이를 했던 그 역할을 맡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튜브 채널보다는 종편이나 지상파의 출연이 잦은 편. [28] 참고로 지명 당일에 발표 직전 MBC 2시 뉴스외전에 출연하고 있었다. [29] 국회의원 활동 당시 국정원은 박지원 전 의원의 정보력 원천 중 하나로 꼽혔다.. [30] 왜냐면, 박지원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부터 문재인 전 대통령을 그렇게 비판했던 걸로 유명했고, 기어이 호남계를 이끌고 탈당해 국민의당을 창당했던 핵심인물 중 하나가 박지원이었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호남계에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박지원의 역할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시간이 좀 흐른 뒤로는 문재인에게 화해와 협력의 제스처를 가끔 취하기도 했다. [31] 국가정보원은 경찰청, 검찰청, 국세청, 감사원과 함께 5대 권력기관 중 하나로 꼽히고 대한민국 정보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기관인 만큼 대통령이 통제하기 쉬운 여당 정치인을 임명하는 경우가 대다수지 통제가 다소 어려운 야당 정치인을 임명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일이므로 박지원과 문재인의 관계 개선을 감안하더라도 파격인사인 건 맞다. 그리고 박지원의 정치 경력이 문재인보다 많이 앞서는 만큼 문재인 휘하의 기관장으로 일한다는 것을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 [32] #1 #2 [33] 이는 정보기관 특성상 국정원의 업무가 주로 기밀에 해당하는 업무이기 때문이다. [34]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박지원 후보자를 적과 내통하는 사람이라고 발언을 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35] 국정원 인사처장을 맡았던 만큼 국정원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커 여당 민주당의 정보위 간사로 선임되었다. [36] 문재인 정부 때는 관료들을 임명할 때 부인을 대동해 꽃다발을 받았는데, 박지원의 경우, 이미 부인이 세상을 떠난 바람에 딸과 외손자를 동행한 것이다. [37] 천정배, 정동영, 유성엽 민생당 출신 호남계 정치인들 대부분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했다 보니 박지원 전 원장 역시 복당할 가능성이 열려있는 상황이다. [38] 아무리 문재인 정부 시기 국내 정보 수집 분야를 폐지했다하더라도 국정원은 여전히 국내의 최고 정보기관이다. [39] 실제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는 호남 대통령을 만들어야한다며 당시 당적도 달랐던 이낙연 마케팅을 하기도 했다. [40] 권노갑, 정대철, 정동영도 상임고문직을 받았는데 박지원은 왜 안되냐고 할 수 있는데, 권노갑은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에 평생을 투신한 역사 그 자체고 정대철도 정일형 의원때부터 민주당의 역사를 이어오는 상징성이 있으며, 정동영은 박지원보다는 정치경력은 짧지만 그래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를 지냈고, 이재명 대표의 가까운 사람인 만큼 상임고문 위촉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반면 박지원은 위의 사례들에 더해 지금도 정계 최중심부에서 뛰는 현역 플레이어라는 점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41] 생일이 6월이므로 총선일 기준으로는 만 81세가 맞다. [42] 전국구/비례대표로 범위를 넓히면 무려 만 84세에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로 당선된 문창모 통일국민당 의원이 있다. [43] 다만, 당선자에 국한하지 않고 출마자까지 포함하면 최고령 출마자는 박지원 본인이 아니라 경북 경주시에 출마한 김일윤 후보자이다. 김 후보자는 1938년생으로 박지원보다 무려 4살 연상인 만 85세이며, 정계 입문도 12대 국회의원으로 제14대 국회에 첫 입성한 박지원보다 정치 선배이다. [44] 박지원 의원과 같은 1942년생 정치인 가운데 추윤구 광진구의원이 남아있지만 김관용 前 경상북도지사와 강길부 前 국회의원은 이미 정계를 은퇴한 지 오래고, 미군정기인 1940년대 후반 태생 정치인들로 넓혀봐도 김진표 21대 후반기 국회의장, 홍문표, 변재일 前 의원이 21대 국회에 남아있었지만 2024년 22대 총선 불출마, 컷오프 및 21대 국회 임기 만료에 따라 정계 은퇴하였으며, 1947년생인 심민 전북 임실군수 역시 3선 연임 제한으로 인해 2026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출마할 수 없게되면서 미군정 태생 현역 정치인들은 2026년 7월 1일 이후로는 은퇴할 것으로 보인다. [45] 다만 22대 국회의원 가운데 최고령이라는 점에서 국회의장 선출 과정에서의 임시 의장을 맡을 가능성은 있다. 일례로 제20대 국회에서도 최고령 의원이었던 서청원이 전/후반기 모두 의장 선출 과정에서 임시 의장을 맡았다지만 20대 당시에도 최고령자는 박지원이었다. 서청원은 박지원보다 1살 동생. 당시 서청원 의원은 제20대 국회의원 중 최다선(8선, 그러나 제18대 국회의원은 당선무효라서 엄밀히는 7선이다.)이었다. [46] 다만 정세균 20대 국회에서 전반기 국회의장을 맡은 후 국무총리로 입각해 관례를 깨긴했다. [47] 참고로 23대 국회의원 취임시 나이가 85세라 23대 국회의원 퇴임할 때면 89세다. [48] 민주당 주류에서는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겉으로만 변하는 척하는 거라고 평가절하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제법 긍정적인 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49] 담을 뛰어넘어가며 필사적으로 들어간 다른 의원과 달리 통제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뛰어들어가는 노련한 모습을 보였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611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611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