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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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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사건 직전 상황4. 만찬 전 궁정동 안가 상황5. 최후의 만찬6. 총격7. 후속조치8. 취조9. 결과10. 재심

1. 개요

10.26 사건의 경과를 정리한 문서.

2. 배경

1972년에 개막한 유신 체제 1차 오일 쇼크를 노동자와 기업들의 대규모 중동 진출로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극복했다. 중동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 자금을 통해 대한민국은 타 국가들은 애를 먹던[1] 중공업 육성을 하는데 어려움을 덜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연간 제조업 성장률과 설비투자 증가율이 20%를 넘었고 경제성장률은 10%대 정도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2] 이러한 경이적인 고도 성장을 뒷받침한 기업들의 왕성한 설비 투자는 곧 과잉 투자로 번졌고, 이는 경기 과열 현상으로 이어져 물가 상승률도 연 10%를 넘겼고 부실기업 및 재고정리 문제도 발생하였으며 1978년을 기점으로 경제성장률이 하락하는 시점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2차 오일 쇼크까지 터지면서 경제 성장률은 급속히 하강하고 물가 상승률은 급속히 치솟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과의 불화가 심해지고 있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이라는 기치 아래 한국을 포함한 모든 독재 국가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표방하는 인권 외교를 내걸었고, 이에 박정희 정부는 로비스트 박동선을 이용해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는 코리아게이트를 일으켰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 시사라는 초강수로 한국을 압박했고, 한국 역시 핵무장을 계획하면서 군사 관련 문제에 있어서도 한미 양국간에 균열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대내, 대외적인 악재가 겹치며 박정희 정부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재규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제3공화국 시절이나 1970년대 초와 같은 정치력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면 김재규는 본인의 불만을 함부로 표출할 수 없었으나,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 1979년 박정희의 판단력은 과거와 같은 상태가 아니었고 결국 최측근에 의한 대통령의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김재규가 국가의 운명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고, 그런 내심에 기대어 해당 사건을 분석하는 것은 타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김영삼의 인터뷰로부터 분석할 수 있다.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박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
김영삼, 1979년 9월 12일 뉴욕 타임스
김영삼의 이 발언을 빌미로 10월 4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10월 13일 야당 신민당 민주통일당 의원 전원은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며, 10월 16일 "유신철폐", "김영삼 의원 제명 철회"의 기치를 내건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 정부는 큰 위기와 맞닥뜨리게 됐다. 그리고 이 부마민주항쟁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방식을 놓고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더욱 커지던 와중에,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을 PPK 권총으로 저격하였는데 그 과정과 원인에 대해서는 이하 문단에서 후술한다.

3. 사건 직전 상황

파일:박정희 삽교천.jpg
1979년 10월 26일 오전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3]
1979년 10월 26일 아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충청남도 당진군[4]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이 중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던 보안 시설[5]이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의 수장인 김재규 자신도 박정희와 함께 두 시설의 준공식에 참석하려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정보부장까지 서울을 비우면 어쩌란 말입니까? 김 부장은 참석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세요."라고 면박을 주며 전화를 끊었다. 이전부터 차지철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김재규는 차지철의 이러한 면박과 오만한 태도에 분명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당시 박정희는 김영삼 국회 제명 부마민주항쟁 등 일련의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이날 아침에는 평소 즐기던 농촌 시찰을 앞둬서인지 옷을 갈아입으면서 어깨를 들썩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고 한다. 정장을 챙겨입은 박정희는 청와대 본관 2층 침실 옆의 식당에서 두 딸 박근혜, 박근령과 아침 식사를 한 뒤[6] 1층 집무실로 내려가면서 "나 오늘 삽교천에...(갔다 올 거야)"[7]라는 말을 남겼고, 박근혜와 박근령은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것이 아버지와 두 딸의 생전 마지막 대화였다.

오전 8시,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후 민정수석비서관 박승규를 따로 불러 "내일 각하께 부마 사건 보고 시에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간의 불화에 대해 보고하고, 차 실장의 월권 행위도 말씀드리시오."라고 지시했다. 김계원은 며칠 전 박정희에게 차지철의 월권이 심하다고 건의했지만 박정희는 "차 실장이 국회의원도 해봐서 정치를 잘 안다."라고 말하며 김계원의 건의를 묵살해 버렸다. 그래서 김계원은 자신이 같은 내용을 다시 박정희에게 보고하기 뭐해서 박승규가 대신 한 번 더 말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이 무렵 김계원은 김재규와 차지철 두 사람의 불협화음을 해결하려고 김재규를 경호실장, 차지철을 중정부장으로 보직을 맞바꾸자는 안을 박정희에게 건의하려고 했다.

삽교천으로 출발하기 직전 김계원은 청와대 복도에서 차지철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차지철은 마치 그가 들으라는 듯 "비서실장도 자리를 비우는데 중정부장이란 자도 행사에 참석하겠다니... 이런 상황일수록 자리를 지켜야지"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김계원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전 10시 30분 경 김계원, 차지철과 함께 헬리콥터에 탑승하여 청와대를 출발한 박정희는 이동 도중 헬기에서 공업단지 건설과 농촌 개량 상황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고, 김계원에게 "(비서)실장 모친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내일(10월 27일, 토요일)은 찾지 않을 테니 어머니를 뵙고 오라"라고 이야기했다.[8] 이후 오전 11시 경 박정희는 삽교천 행사에 도착하여 약 8분 분량의 방조제 완공에 대한 경축사를 낭독했는데, 이때 주변에 있던 일부 장관과 경호원들은 "오늘따라 각하 목소리에 힘이 없다"며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경축사를 마친 후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니 이 동네 최고령 어르신을 모시고 오라."라고 지시했고, 경호원의 손에 이끌려 온 83세의 이길순 노인[9]과 같이 테이프를 커팅하고 방조제 갑문 개방 버튼을 누른 후 "올해 농사는 잘 지으셨는지. 건강하시길."이라며 이 노인을 격려했다.

그 다음 KBS 당진송신소로 이동하여 완공식 치사를 한 박정희는 송신소 응접실 의자에 털썩 앉더니 퀭한 얼굴로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김 장관, 나 물 한 잔만 줘"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고 김성진이 가져온 물컵을 단숨에 들이킨 후 축 늘어졌다. 이를 본 김성진은 겨우 몇 시간 남짓한 행사에 박정희가 이렇게 지치는 걸 보고 안쓰러워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도고 파라다이스 호텔[10]에서 부처 장관, 지역 유지들과 점심을 같이 한 후 오후 2시 반 경에 청와대로 돌아왔다. 이날 헬기는 청와대로 바로 가지 않고 박정희의 지시로 충청남도 아산군 현충사를 거쳐 서울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한 후 착륙했다.

한편 이날 마치 박정희의 운명을 암시라도 하듯 삽교천과 당진송신소 행사 도중 몇 가지 크고 작은 불길한 조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삽교천 완공 기념 담수비를 제막할 때는 강한 바람에 천이 비석을 휘감아버려 박정희가 아무리 줄을 당겨도 벗겨지지 않는 통에 결국 경호원들이 올라가 직접 천을 벗겨내야 했고, 당진송신소에서 점심 식사 장소인 도고호텔로 이동할 때는 박정희 일행을 태운 헬리콥터 1호기는 이상 없이 이륙했지만 2호기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 긴급 정비로 30분 정도 주저앉아야 했다. 게다가 1호기가 도고호텔에 착륙할 때 호텔 사육장에서 키우던 사슴들이 헬기의 소음과 강풍에 놀라 이리저리 날뛰다가 새끼를 밴 암사슴 한 마리가 축사 기둥을 들이받고 머리가 깨져 즉사하는 괴변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고들은 박정희에게 일일이 보고되지 않았다.

행사를 마친 후 청와대로 돌아와 경호실장실에서 경호실 차장 이재전 육군 중장과 삽교천 준공식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차지철은 오후 4시 경 박정희로부터 이날 저녁 안가 행사를 준비하라는 인터폰을 받았다. 무슨 일이냐는 이재전의 말에 차지철은 "별 일 아닙니다. 오늘 특별한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이 장군은 먼저 퇴근하시오."라고 답했는데, 이때 차지철은 "오늘은 좀 쉬시지..."라면서 약간 짜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11]

궁정동 안전가옥은 담장이 드높은 청와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담장 밖에 별도로 위치한 집이었으며, 주로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의 식사 모임이나 작은 연회가 열렸을 때 사용되었다. 안가는 박정희와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중앙정보부의 관계자 일부만 아는 극비 보안 시설이라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나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도 사건 수사를 개시하고서야 그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특히 전두환은 10.26 사건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76년에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도 안전가옥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안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12]

4. 만찬 전 궁정동 안가 상황

아무튼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말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오늘 오후에 큰 잔치가 벌어질 테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궁정동으로 이동하여 안가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정승화에게 전화로 "오늘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면서 조용히 시국 얘기 좀 나눕시다."라며 그를 초대한 뒤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국내담당) 김정섭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정승화는 이날 저녁에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13]를 대었기에 대신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과 저녁을 같이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14]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한편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라고 말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에야 나타났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계원이 차지철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야.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김재규가 내심을 털어놓았다.
그 친구 해치워 버릴까요?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여 이에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여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니 김계원이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다.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는데,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

5. 최후의 만찬

오후 6시경 박정희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 김재규가 그들을 맞아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됐다.

당시 안가 요리사였던 이정오는 이날 식사로 비빔밥, 떡만둣국, 칼국수를, 술안주 잡곡무침, 전복무침, 송이버섯구이, 장어구이, 불갈비 등을 준비했다. 그 밖에도 에 재운 인삼 도라지나물, , 생채, 편육 등으로 한 상에 30접시 정도가 놓인 호화 상차림[17]이 준비됐다고 한다. 요리 재료는 당일 오후 5시경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방석상, 이광철이 동대문시장 등을 돌며 약 6만 원(2024년 기준 약 41만 7,000원)어치를 샀다고 한다.

한편 당시 현장을 검증했던 장경삼 당시 검찰관은 박정희는 국산 양주[18]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는데, 사건 현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던 기자들이 병 모양의 모습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시바스 리갈로 착각해 그대로 보도해 잘못된 사실로 굳어졌다고 주장하였지만, 이후 그의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안가 요리사였던 김일선은 "(박정희는) 콩나물밥을 좋아했고, 참기름으로 볶은 대가리 뗀 멸치를 술안주로 즐겨먹었다"고 회상했다.[19] 당시 언론에서 말했던 사치스러웠던 연회장은 아직 개장을 하지 못했던 연회장으로, 실제 연회와 암살이 벌어진 나동의 시설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을 대는 시늉만 했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던 와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 신민당 공작[20]은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재규는 " 공화당에서 신민당 의원들이 제출한 사표를 일괄 반려하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21] 당직에서 사표를 내겠다던 (신민당) 의원들이 전부 강경하게 돌아서면서 다 틀렸습니다. 아무래도 신민당 주류들이 강하게 나와서 당분간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차지철은 "신민당 놈들 중에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어요.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그까짓 놈들 전부 탱크로 싹 깔아 뭉개야 합니다."라는 말을 뱉었고, 박정희는 "오늘 삽교천은 공해도 없고 공기도 깨끗하던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인가?"라며 혀를 찼다. 이어서 김재규는 "신민당은 주류 중심으로 강경하게 전환되었고, 정운갑은 비주류가 밀고 있는데 국민들이 신민당 비주류를 사쿠라로 보고 있어서 힘이 없습니다. 주류의 협조 없이는 정운갑 대행 체제 출범은 불가능합니다."라고 설명했지만 차지철은 또 다시 "그깟 새끼들 싹 밀어버리겠다."라며 과격한 소리만 되풀이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비아냥거리면서 김재규의 화를 계속 부추겼다. 김계원은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평소 칵테일을 잘 만들던 김재규에게 "김 부장이 칵테일을 잘 합니다. 어떻게 만드는 거요?"라며 위스키로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하고[22], 오늘 삽교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등의 말을 하며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차지철이 수시로 김재규에게 시비를 걸어대고 정치 현안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내는 바람에 무소용이었다.

오후 6시 30분쯤 차지철은 "깔아 뭉개버리겠다"라는 말을 던져놓고 옆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대생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을 연회장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박정희 오른쪽에는 신재순이, 왼쪽에는 심수봉이 앉았다.

취기가 오른 박정희는 김계원을 도승지, 김재규를 포도대장이라 부르면서 술을 따라주었고, 신재순과 심수봉에게 "김(재규) 부장은 술이 아주 세니까 많이 권해주게."라며 농담을 던지는 등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술잔이 돌고 잡담이 오가는 등 술자리 분위기는 익어갔지만, 김재규는 차지철 때문에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만찬을 시작한 지 1시간 정도 지난 후 7시 뉴스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자 만찬장을 빠져나와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50m 가량 떨어진 본관(김재규의 집무실) 1층 식당을 방문했다. 정승화는 오후 6시 35분 경 안가에 도착해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23]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 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 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24]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어 아래와 같이 지시했다.
김재규: (호주머니의 권총을 보이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일이 잘못되면 자네들이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오늘 저녁, 내가 (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해라. 지금 본관에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2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되어있지?
박선호: 부장님,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그래.
박선호: 오늘은 경호원이 7명[25]이나 와 있고 날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날을 고르시죠.
김재규: 안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26] 똑똑한 녀석 세 놈만 골라 나를 지원해라. 다 해치워 버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장님,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재규: 30분은 너무 길다.
박선호: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김재규: 알았다.
그리고 김재규는 "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며 중얼거리고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치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27]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28]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29]을 차출해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

현장에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식당 앞에 세워둔 의전과장 차량인 제미니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30]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한편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처치할 준비를 했지만,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려볼 속셈이었다. 정인형은 박선호의 해병대 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안가 나동 주방에서는 정인형과 안재송 외에 청와대 경호실 소속 수행원으로 안가에 온 김용태 특수차량 운행계장[31],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이 평소의 관례대로 박정희의 경호는 중정 경비원들에게 맡긴 채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32] 정인형과 안재송은 경호원 대기실에서 별도로 저녁식사를 하던 중[33] 방에 들어온 박선호에게 정인형이 "밥 먹었어? 같이 먹자"고 권유하자 박선호는 "아까 먼저 먹었어"라며 사양했다. 식사를 마친 정인형과 안재송은 땅콩 등 안주거리를 까먹으며 대기실의 컬러 TV로 AFKN 방송[34]을 시청하였다.[35]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박정희는 자주 시계를 보았고, 그 모습을 본 차지철은 "각하, 시간이 되면 TV를 켜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박정희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7시가 되자 차지철이 자동 스위치로 TV를 켜서 KBS 뉴스를 시청했다. TV에서는 삽교천 제방 준공식 장면이 나온 후 김영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회담을 한다는 뉴스가 나왔는데, 박정희는 심기가 상한 듯 " 총재도 아닌 사람하고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거야?!"라며 불쾌해했다. 뉴스를 보면서 박정희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차기 대선에 대한 언급을 하고, "헬기를 타고 오면서 보니까 한강에 다리가 많더라."라는 이야기도 꺼냈다. 이후 바지 주머니에 권총을 숨긴 김재규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박정희가 TV를 끄라고 해 차지철이 TV를 껐고,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거 깡패, 똘마니들만 찍은 사진 말고 제대로 된 부마사태 사진을 하나 만들어 보라."는 지시에 김재규는 짧게 "예." 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김영삼 얘기를 꺼내면서 "( 미국 국방부) 브라운 장관이 오기 전에 김영삼이를 구속하라고 했는데 류혁인( 정무수석)이 말려서 취소시켰더니 안 되겠다.[37] 국방장관 회의고 뭐고 우리나라에서 우리 법대로 처리한다는데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미국에선 범법자들은 처벌 안하는가?"라며 짜증을 감추지 않았고, 김재규는 "각하, 김영삼은 비록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국회에서 제명당한 것으로 국민들은 이미 처벌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속한다면 김영삼을 두 번 죽인다는 인상을 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38]

이후 김재규는 계속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고, 박정희가 "노래나 한 곡 들어볼까?"라고 말하자 심수봉이 기타를 연주하며 그때 그 사람[39]을 불렀고, 앙코르를 요청하자 추가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후 다음 노래를 부를 사람으로 차지철을 지명했다.[40] 차지철은 " 도라지 타령"과 "나그네 설움"을 부르고 신재순을 지명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김재규) 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 달라"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 준비 되었는가?
박선호: 네, 완료했습니다.

6. 총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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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상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묘사된 당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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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원이 그린 사건 발발 당시의 약도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신재순은 심수봉의 기타 반주로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고, 박정희는 간간이 흥얼거리며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41] 바로 이때 김재규가 권총을 하의 주머니에 넣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신재순이 중간에 한 번 틀려서 다시 부르던 중[42] 김재규는 신재순이 1절 후렴(예-예-예-)을 막 시작하려는 차인 오후 7시 40분 경,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어 차지철에게 욕설과 함께 첫 발을 쐈다.
차지철 이 새끼! 넌 너무 건방져!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43]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 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라고 소리치자 김재규는 " 야, 너도 죽어봐!"[44]라고 받아치며 마주 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허파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쐈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제3발을 쏘려고 했으나 권총이 격발 불량을 일으켜[45]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그 틈을 타 연회장 안의 화장실로 도망갔다.[46] 그리고 김계원은 연회장을 박차고 복도로 뛰쳐나와 취기와 공포심에 벽을 붙든 채 벌벌 떨고 있었다.[47]

한편 대기 중이었던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 일행은 총성이 나자 주방으로 달려가 식사 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고[48] 그 과정에서 안가 요리사 이정오는 허리에,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은 어깨에 총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 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계장 박상범은 총 4발을 맞았는데 두 발은 옷만 뚫었고 한 발은 허리띠에 차고 있던 예비 실탄에 맞고 튕겨나갔으며 나머지 한 발에 허리 관통상을 당했다. 그런데 박상범은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총상도 뼈나 내장은 상하지 않은 채 살만 관통하여 자연 지혈되면서 출혈도 적었으며 나중에 안가 경비원인 김태원의 확인 사살 시 박상범 옆에 안가 직원 김용남이 총상을 입고 쪼그려 앉아 있어서 잘못 맞을까 봐 사격을 포기한 행운도 따르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정승화 총장의 수행부관인 이재천 소령도 부속실 건물에서 대기중이다가 총소리를 듣고서 밖으로 나갔는데, 이때 박흥주 대령이 나타나서 들어가 있으라고 지시하자 다시 들어갔다고 한다. #

그리고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 안주를 먹으며 TV 방송을 보고 있던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같이 있었는데, 총성을 듣고 정인형과 안재송이 뛰어나가려 하는 것을 박선호가 S&W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49]를 먼저 뽑아들어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라고 애원하며 막아섰다. 그러나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쐈고,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쏘고 말았다.[50] 박선호가 권총을 겨누자 안재송은 반격하기 위해서 일어서면서 권총을 뽑았지만 이미 총을 빼 겨누고 있었던 박선호의 선제 사격에 흉부 관통상을 입고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나중에 시체 검안 결과에 따르면 안재송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상황에서 총탄을 맞았다고 한다.[51] 대한민국 제일의 속사권총 명인도 상대방이 먼저 총을 겨눈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52] 게다가 박선호 역시 해병대 장교로 20여년간 군복무를 한 군인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그런데 박선호가 안재송, 정인형을 사살하던 시점에서 느닷없이 안전가옥 나동 전체의 조명이 나갔는데 이는 지하 보일러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안가 영선[53] 담당 강무홍이 총성을 전기 합선으로 착각하고[54] 차단기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계속 이어지는 총소리와 고함 소리에 합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강무홍은 다시 차단기를 올린 후 보일러실 문을 잠근 채 몸을 숨겼다고 한다. 만약 불이 조금 일찍 꺼졌더라면 박선호는 오히려 정인형과 안재송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조명이 나갔다가 다시 불이 들어오는 것은 박정희 암살 사건이라는 중대한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어서 10.26을 다루는 매체에선 이 사건도 넣는 편.

한편 김재규는 총상을 입은 차지철과 박정희를 확인사살하려고 했지만 권총이 기능 고장으로 인하여 끝내 발포가 되지 않자 다른 총으로 일을 끝내려고 연회장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로부터 S&W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때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렸고 차지철은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지만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완전히 거꾸러뜨린 후 김재규는 여성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던[55] 박정희에게 다가가 우측 관자놀이를 향하여 마지막 탄환을 발사했다. # 당시 심수봉과 신재순은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했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마지막 탄을 발사하러 들어오는 순간 박정희의 등 뒤에서 나오는 피를 막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 # 김재규가 들어오자 신재순은 화장실로, 심수봉은 부속실로 몸을 피했다. 이 마지막 탄은 박정희의 오른쪽 귀 바로 윗부분을 뚫고 들어가 지주막을 뚫고 뇌를 관통한 뒤 왼쪽 광대뼈에서 멈췄다.[56] 이로써 결국 박정희는 자신의 62번째 생일 19일 전에 향년 61세로 생을 마감했다.

[ 펼치기 · 접기 (시신 사진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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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직후 아직 시신 수습도 되지 않은 사건 현장 사진. 첫 번째 사진 우상단 부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차지철 경호실장이며,[57] 두 번째 사진은 식당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진 청와대 경호관들이다.


박정희의 최후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은 끝까지 옆에 있었던 신재순과 심수봉이었는데, 신재순은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 사람의 눈과 마주쳤을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그가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대통령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 하고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그리고 심수봉은 그 순간을 이렇게 진술했다.
가슴에 총을 맞은[58] 각하를 보니 호흡이 이상하여 ‘각하 괜찮으십니까’하고 묻자 ‘응, 괜찮아’하셨지만 등에서는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상체를 부축하고 있었고, 신재순 양은 손으로 피를 막고 있었다. 내가 무릎 가까이 각하를 부축하고 있을 때 김재규 부장이 각하 뒤로 와서 총을 더 쏘고 나갔다. 공포에 질린 두 사람은 무서워서 마루로 나와 관리인 사무실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그동안 밖에서는 총 소리가 5-6발 정도 더 났다.

7. 후속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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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되는 김재규

만찬장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마루에 서 있는 김계원과 아주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김재규: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유지하십시오.
김계원: 뭐라고 하지?
김재규: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
김계원: 하여튼 알았소.

이 대화에서 김재규가 자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김계원에게 확고한 결의를 보여주고 믿음을 주기 위해 했던 말인 것으로 짐작된다. 김계원으로부터 협조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김재규는 현장수습을 김계원에 맡기고 맨발로 정승화에게 달려갔다. 불과 50m의 거리를 달려가는 데는 불과 몇 초 정도만 걸렸을 것이다. 그의 와이셔츠 자락은 밖으로 나와 있었고, 와이셔츠의 허리와 목 부분 여기저기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허리에 찔러진 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김재규는 본관 1층의 식당으로 뛰어들자마자 비서에게 "물, 물!"을 외쳤고, 비서가 컵과 물주전자를 가져오자 주전자 채로 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고는“차량 차량, 손님 나오라고 해” 이렇게 외쳤다.

이 순간을 정승화는 1979년 12월 15일에 이렇게 묘사했다.
19시 45분경 김정섭과 본인은 총소리를 듣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김재규의 비서가 급히 식당 안으로 들어와 그 옆에 있는 주방에서 물을 가지고 나가서 김정섭도 따라 나가므로 본인도 궁금하여 따라 나가니 식당 문 앞에 있는 복도에 김재규가 숨을 헐떡이며 물을 마시고 당황한 표정으로 본인을 보고 본인의 팔을 붙들고 '총장 큰일 났습니다.' 라고 3회 가량 되풀이 하므로 본인은 무슨 일입니까? 라고 수차 물었으나 김재규는 거기에는 답변치 않고 빨리 차에 타고 차안에서 이야기 합시다 라고 하여 본인은 만찬회 장소에서 무슨 긴박한 사태가 발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우선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하고 19시 50분경 현관 앞에 대기한 김재규 차에 타자 우측에 있는 김정섭에게 김재규가 차에 타라고 하여 김정섭이가 좌측으로 탐으로서 우측에는 김재규 중간에 본인이, 앞 운전석 옆에는 김재규의 비서인 박흥주 대령이 타고 차가 출발하였다. 그리고 차안에서 김재규는 남산 중정으로 갈지 용산 육군본부[59]로 갈지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이 때 정승화는 병력동원 차원에서 육본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이 의견에 박흥주도 찬성했고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육본으로 차를 돌렸다.[60]

김재규가 궁정동을 떠난 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재규가 시킨 대로 뒤처리를 했다. 19시 55분 경 박정희는 김계원에 의해 만찬장 근처의 미국인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우선 옮겨졌다. 비서실장은 심폐소생술을 실시하였으나 박정희는 소생하지 않았고 병원 도착 5분전인 19시 50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비밀해제된 미국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이후 김계원은 차에서 내려 박정희의 시신을 등에 업고 국군보안사령부 영내에 있는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옮겼다. 박정희가 타고 온 크라운 슈퍼 살롱을 운전한 경호실 운전기사 김용태는 총격으로 숨진 상태라 유성옥이 대신 운전대를 잡았고 박정희의 시신을 차로 옮긴 안가 경비원 서영준도 같이 병원으로 이동했다.

오후 8시, 비서실장이 얼굴이 피범벅인 누군가를 업고 오더니 얼른 살려내라고 윽박지르는 통에 병원 당직사령이었던 송계용 육군 군의 소령은 그가 죽은 것이 확인된 후 총상 환자가 발생하여 후송되었는데 D.O.A(Death on Arrival, 도착 시 이미 사망한 상태)라는 요지의 긴급 연락을 당시 국군 서울지구병원장이자 박정희의 주치의인 김병수 공군 군의 준장에게 한다.

김병수 장군은 응급환자가 박정희인 줄 모르고 "이 친구들아, D.O.A면 왜 나한테 연락을 하느냐. 수도병원 영안실에 연락을 해서 준비를 하지"라며 오후 8시 20분 급히 출근하여 검안을 위해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출입을 저지당했고 결국 병원장실로 올라가 공군 준장 약복으로 환복한 뒤 신원이 확실해지니 출입을 막지 않아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환자를 대통령 입원실에 정중하게 모시라"는 연락을 받아 더욱 의구심은 증폭되었다.[61]

김병수는 들어갈 당시에도 단순한 응급환자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니 환자 얼굴 위에 흰 타월이 덮여져 있었다. 경호원들에게 누구인지 물어보았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하였고 누구인지는 알아야겠다고 하여[62] 결국 경호원이 타월을 반쯤 내려 박정희 대통령임을 보여주었지만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경호원이 타월을 오른쪽 반만 보여주었고, 나중엔 왼쪽 반만 보여주어 김병수는 얼굴 반쪽만 봐서 박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김병수는 일단 총상을 확인하기 위해 환자의 와이셔츠를 풀어보니 복부에 흰 반점이 있는 걸 보았고 그제서야 실려온 사람이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충격을 받고 병원장실로 올라간 김병수는 때마침 걸려온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의 전화를 받고 박정희 대통령 (암호명 : 코드원)의 사망 사실을 알렸고 이 소식은 곧바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에게 보고되었다. 이때 코드원 내용 관련은 하단 참고. 이윽고 박정희에 대한 사망선고가 내려졌고 시신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보안을 강조하면서 철통 같이 지켰다.

한편, 사건을 일으킨 후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청사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향했는데, 이 판단은 김재규에겐 일생일대의 실책이자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순간으로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자신의 거점인 중정으로 가서 사건 수습과 뒷공작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고 없는 시점에서,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최강의 권력 기관 중 하나였던 중정의 우두머리였다. 그에게 대놓고 맞설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시점에선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간첩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명분을 내세워서[63] 대공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정보부가 조사를 전담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우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차지철이 박정희를 쐈기 때문에 내가 차지철을 사살했다'고 둘러대는 것도 가능했다. 사건을 목격한 생존자라고 해봐야 김재규 자신과 암살 공범인 정보부 요원들을 제외하면 연회장의 김계원과 신재순, 심수봉 그리고 안전가옥에 있던 일부 청와대 경호원과 안전가옥 직원들이 고작이었다.

김계원은 영향력에 있어서 김재규에게 한참 밀린 데다, 김재규와 마찬가지로 차지철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며, 신재순과 심수봉은 일개 대학생과 가수였고 나머지 직원과 경호원들도 이미 부상을 입거나 제압당한 상황에서 김재규와 중정이 이들을 입막음하는 것 정도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차지철은 김재규가 박정희 시해범으로 몰았다 해도 이를 의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거란 말이 나올 만큼 평소 행실에 문제가 많았다.[64][65][66] 차지철은 월권 행위에 박정희를 제외한 고위층, 심지어 김계원이나 김재규를 비롯한 장성 출신들에 대해 오만불손한 태도를 일삼았고, 권력 문제에도 마구 개입하는 바람에 차지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례로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가 방한하여 박정희와 일부 고위 인사들과 함께 골프를 치러 갔는데, 라운딩이 끝난 후 백두진 유신정우회 의장이 먼저 클럽 하우스의 샤워실로 들어간 뒤 시간이 지체되자 차지철이 샤워실 문을 두들기며 "왜 이렇게 늦는 거요? 각하 기다리시는데 빨리 나오시오! 이 늙은이가 뭘 이리 우물대는가.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라며 전직 국무총리한테도 극언을 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다. 사실 이것도 차지철 자기도 샤워를 하고 싶은데 샤워부스가 부족하자 백두진에게 행패를 부린 것이며, 백두진은 "미안하외다"라고 사과까지 해야 했다.

실제로 박정희 암살 직후에도 고위층 대부분은 차지철을 의심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에게 박정희가 죽었다는 얘기를 접하자 처음에는 차지철이 저지른 짓으로 넘겨 짚고 그가 대통령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까지 시도한다고 생각하여 당시 수경사령관인 전성각 육군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수경사 병력을 장악하고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출처 :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67] 그리고 이날 긴급 소집령을 받고 육군본부로 온 김치열 법무장관의 경우, 박정희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차지철) 그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라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 법무장관과 같은 인식을 가질 정도였다. 정부 고위 인사들의 차지철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즉, 김재규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차지철에게 박정희 암살 혐의를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충분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김재규는 사건을 조작할 만한 능력도, 명분도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의 본거지인 중앙정보부도, 간첩 사건 등으로 인맥이 있었을 법한 검찰청 또는 치안본부도 아닌 자신과 그다지 연관성이 없는 육군본부로 향했다.

정승화는 훗날 "육본으로 가자"라는 자신의 말에 김재규의 부관인 박흥주 대령이 찬성한 이유를 이렇게 추정했다.
'나중에 추측건대, 그 부관(박흥주)은 남산으로 갔다가 충성심 강한 경호실 요원들이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을 죽인 걸 알고 몰려 들어오면 고스란히 앉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군 병력이 있는 육군본부로 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을 터이고 게다가 내가 김재규와 함께 사건 현장 가까이에서 저녁 약속을 하고 함께 있었으니 모든 일을 나와 공모한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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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김재규와 정승화가 육군본부 정문에 도착했을 때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정승화 장군이 자신이 (육군참모)총장이라고 밝히자 육본 위병소의 헌병이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당시 정승화는 옷차림이 군복이 아닌 베이지색 상의와 감색(紺色, 남색)[68] 하의의 사복이었고 타고 온 차도 자신의 관용 차량이 아니라 김재규의 차였다. 이후 다른 장교가 정승화의 신분을 알아채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박정희 암살 사건이라는 중대한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긴 하지만 후술하듯이 갑자기 흐름이 끊길 수도 있어 10.26을 다루는 매체에선 코미디 영화인 그때 그 사람들 정도를 빼고는 이 사건은 잘 넣지 않는 편. 이 에피소드는 1987년에 출판된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정승화, 조갑제 공저)의 46~47p에도 나오는 실제 이야기다.

박정희 사망을 확인한 김계원은 곧바로 청와대에 돌아와 비상소집을 했다. 최규하 국무총리, 장관들, 경호실이 그 대상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각하께서 유고[69]이십니다. 속히 청와대로 와 주십시오”

김계원 비서실장의 비상소집에 따라 고관들이 속속 도착했다. 오후 8시 25분부터 8시 40분 사이에 최광수, 고건, 류혁인 등이 나왔고 이어서 다른 수석비서관들이 줄을 이었다. 8시40분, 최규하 국무총리가 나오자 김계원은 다른 사람들을 부속실로 내보낸 후 총리에게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에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최규하를 물렁하게 보고 하는 말이었다. 행여 최규하의 입에서 조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봐 미리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며 입막음을 한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최규하 총리는 박정희와 차지철이 함께 김재규의 총에 사살됐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국무총리는 대통령 유고시에 자동적으로 권한을 대행한다. 그런데도 최규하는 김계원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고, 조사를 시키지도 않았다. 박정희와 경호실장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살해되고, 이를 김계원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김계원과 김재규가 한 통속이 되어 새 세상을 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를 직감했기에 최규하는 입을 닫은 것이다.

같은 시각인 오후 8시 40분경 일찍 퇴근하여 집에서 책을 읽고 있던 경호실 차장 이재전 육군 중장이 연락을 받고 비서실장실로 달려 왔다. 김계원이 이재전 차장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각하가 지금 유고입니다. 지구병원에 모셔놓고 오는 길이오. 차지철 실장은 지금 경호실을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 장군이 경호실장 직무 대행으로 경호실을 장악하시오. 이 사실을 외부에 절대 알리지 말고 경거망동 하지 마시오. 경호실 병력 출동은 절대 금하시오.

박정희와 차지철이 사고를 당했다면 이재전 장군은 당연히 청와대 경호비상 제1호인 “호랑이1호”를 발령하여 경호실 병력을 사고현장으로 출동시켜 박정희와 차지철의 신원을 확보해야 했다. 이런 입장에 있었던 그가 김계원으로부터 “경거망동하지 말고 병력출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는 '나도 관련돼 있으니 너는 더 이상 알려하지 말고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이었다.

이재전은 8시 40분 제22특경대에게 안가 접근을 금지시켰고 이에 따라 안가로 출동하던 태양요원들이 즉시 발길을 돌려 되돌아 왔다. 여기까지의 행위로 인해 김계원은 10월 29일 구속됐고 12월 20일 계엄보통 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날 재판장은 사형 선고를 일곱 번이나 내렸다.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 종사 미수죄였다. 그러나 며칠 뒤 김계원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경호실 병력의 출동을 금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경호실 병력이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것을 방해하고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또 계엄을 선포한다는 것은 쿠데타 또는 혁명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초비상조치였다.

한편 이재전 경호실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출동금지”를 지시한 것은 김계원만 취한 조치가 아니었다. 8시 5분경에 육군 B-2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 역시 거의 같은 시각에 이재전에게 전화를 걸어 경호 병력 출동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때 정승화는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제거한 줄은 모르고 오히려 차지철이 (계획적이던 우발적이던) 사고를 일으켰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따라서 경호실 병력이 차지철에 의해 동원되지 않도록 장악을 지시한 것이다.

이재전 경호실 차장은 경호실 직제에서는 차지철의 아랫사람이었지만 민간인이 아닌 현역 육군 장군 신분이었으며 6.25 전쟁에도 참전한 차지철의 까마득한 군 선배였다. 차지철의 오만한 행위가 이미 도를 넘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승화가 이쯤 명령을 내렸다면 차지철이 나타났더라도 그의 뜻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후 9시 5분 구자춘 내무장관, 김치열 법무장관이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각하가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김계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김계원은 “간신배를 제거한다는 것이 각하가 다치셨다”라고만 말했다.

법무장관이 “차지철이 그 새끼 무엇을 했어” 하고 흥분하자 김계원은 “죽었을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여기까지 김계원이 한 발언들을 통해 그 자리에 있었던 국무총리, 장관들 그리고 청와대 수석들은 박정희와 차지철이 동시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70]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누군가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쏘았고, 그 사실을 김계원이 알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한 것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직감적으로 김재규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지철은 이들 누구나 싫어했고, 김계원도 싫어했으며, 특히 김재규와 차지철과는 앙숙관계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김계원이 사고에 관련되지 않았다면 김계원은 누구보다도 흥분하며 진상을 밝히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계원은 사건의 공론화를 막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에서 나오는 무성의 언어는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했을 것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동시에 암살됐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각료들이라면 김계원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하게도 이들 중에 이를 채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각료들이 침묵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김계원이 박정희 암살 사건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김계원은 김재규가 요청한 바와 같이 비밀을 지키며, 박정희 시신을 수도병원에 옮겨 사망했음을 확인한 후 비서실장실로 돌아와 계엄선포를 위한 비상국무회의를 준비하고, 국무총리에게는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경호실 차장에게는 경호실 병력이 암살 현장으로 출동하지 못하도록 지시하는 등 뒷일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이 정도의 뒷일은 김계원이 충분히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마지막 실탄을 발사하자마자 대기 중이던 정승화에게로 달려갔을 것이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8시 5분에 B-2 벙커에 도착한 이후 체포될 때까지 ‘살해사실을 숨긴 상태에서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국무위원들은 국방장관실에 모여 국무회의를 하자면서도 회의의 목적을 “계엄선포”를 위한 것으로 했다. 그 많은 장관들 중에 “사건의 진상부터 따지고 조사해야 한다” “누가 살해했느냐”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살아있는 박정희 앞에서는 충성을 보였을 장관들일 테지만, 일단 사망하고 보니 진상을 캐기보다는 권력이 누구에게 가는가에 대한 눈치부터 살핀 것이다. 최규하 총리부터 이러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 눈치를 보았겠는가?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차기권력이 어찌될지에만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이다. 권력의 태양은 서서히 저문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셔터처럼 한순간에 낙하한 것이다.

선술했듯이 김계원 김재규가 요청한 바와 같이 비밀을 지키며 박정희의 시신을 국군수도병원에 옮겨 사망했음을 확인한 후 비서실장실로 돌아와 계엄선포를 위한 비상국무회의를 준비했다. 또 국무총리에게는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경호실 차장에게는 경호실 병력이 암살 현장으로 출동하지 못하도록 지시하는 등 뒷일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선술했듯이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다. 당직 군의관이던 송계용 육군 군의소령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박정희 주치의인 병원장 김병수 공군 준장이 시체를 검안하는 과정에서 하복부의 피부병 자국에 의해 시체가 바로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서영준이 총으로 위협하는 와중에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육군 준장의 전화를 받은 김병수 장군은 아래와 같이 박정희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71]
김병수: 예 병원장입니다.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입니다. 지금 그쪽 상황이 많이 곤란하지요?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으니 제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답하시오.
김병수: 예.
우국일: 죽었습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경호)실장입니까?
김병수: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72]
우국일: 코드 원(대통령)입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하겠소.
그렇게 박정희의 죽음을 전두환이 가장 먼저 알게 되었다.

오후 8시께 육본 벙커에 도착한 김재규는 청와대에 있던 김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최규하 총리를 데리고 오라고 요청했다. 최규하 총리와 김계원을 필두로 신현확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구자춘 내무부 장관, 김치열 법무부 장관, 유혁인 정무 1 수석 비서관 등이 속속 벙커에 도착했다. 심야 임시국무회의는 10월 17일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문제로도 소집된 적이 있어 그 자체로는 새로운 일이 아니었으나 중앙청이 아니라 국방부에서 임시국무회의가 소집됐다는 사실에 국무위원들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안보에 관계된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국방부 복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무장하게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이는 유고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였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각 군 참모총장들까지 모이면서 장소가 비좁아지자 이들은 밤 11시께 국방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최 총리는 노 장관에게서 대통령 서거 사실을 보고 받은 뒤 김재규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그는 "대통령 유고다. 보안을 유지하고 각의를 열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어 김재규는 10시 25분 김계원을 화장실로 데리고 가 계엄령을 선포해 계엄사 간판을 군사혁명위원회로 바꿔 달자며 국무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이에 김계원은 최 총리에게 계엄령 선포를 위한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했고 최 총리가 수락했다. 아래는 당시 김재규와 김계원이 최규하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김계원: (최규하에게)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면 국무회의를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규하: 물론이지요. 계엄 사유를 무엇으로 할까요, 유고로 할까요, 서거로 할까요?
김계원: 대통령 각하 유고로 인하여 27일 00:00부로 계엄을 선포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최규하: 유고만 가지고 납득하겠습니까? 무언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무위원들도 내용을 알아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지요.
김재규: 유고는 안 됩니다. 국내치안이 좋지 않아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최규하: 국내에 데모가 난 것도 아니고, 계엄이 선포돼 있는 부산도 조용한데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대통령 유고를 어떻게 국민에 안 알리겠습니까? 계속 보안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우선은 국무위원들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김재규: 왜 안 됩니까? 소련은 1주일 이상이나 브레즈네프의 행적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는데 2-3일 동안 왜 보안유지가 안 됩니까?
최규하: 그러면 김 부장이 국무회의에서 사유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김재규: 예, 하지요.
김치열: 비상계엄과 국장문제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김재규: 지금 보안을 지켜야지 국장 문제를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김성진: 비상계엄의 사유를 명백히 해야 합니다.
김재규: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1주일간이나 그 행적[73] 보안유지 했는데 우리는 왜 며칠간 보안유지를 못합니까?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계엄선포 한다 하면 되지 사유를 자세히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후 국방장관실에는 사건 관련자인 김재규(중앙정보부장), 김계원(대통령비서실장), 정승화(육군참모총장) 이외에도 최규하(국무총리), 신현확(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노재현(국방부장관), 구자춘(내무부장관), 박동진(외무부장관), 김치열(법무부장관), 김성진(문화공보부장관), 김종환(합동참모의장), 서종철(안보특별보좌관), 류혁인(정무1수석) 등이 있었다.

육본 대회의실에서 열린 긴급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숨기고 "각하가 지금 유고 상태이다. 이 사실을 최소 48시간 동안 보안에 부치고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난다"고 길길이 뛰었다.

그러나 김재규의 예상과 달리 이 자리에서 신현확 부총리를 포함한 국무위원들이 반발을 했다. 김치열이 "이런 중대한 사태를 이유 없이 48시간이나 보안으로 숨길 수 없다. 미국에도 이 사실은 알려야 한다"라며 반박했고 뒤늦게 육본에 신현확이 도착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신현확 부총리가 도착하자 최규하 총리가 신현확과 독대를 요청하면서 국방장관실 옆의 작은 방으로 신현확을 데리고 들어갔다. 이에 김재규가 따라 들어와 대통령 유고가 발생했다면서 비상계엄을 요구했다. 이에 신현확이 탁자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계엄이라니요! 국무위원이 대통령 유고의 내용도 모르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74]

이에 궁지에 몰린 김재규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신현확이 유고 내용을 밝히라고 다시 요구하자 "거 다 알만한 분이 왜 이렇게 따지고 듭니까?"라고 덤벼들었다. 평소에 김재규는 신현확을 고향 선배로 매우 공손히 모셨는데 딴 사람같이 구는 김재규를 보고 신현확은 속으로 놀랐고, "김 부장!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안위는 국가의 안위와도 직결되는 문제요. 여기 총리가 계시고 나는 부총리요. 대통령의 신상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우리는 알아야겠소! 그러니 말해보시오. 사고가 나서 다치셨소? 위중한 상태요? 혹시 돌아가셨소?"라고 다그쳐 물었다. 대통령이 죽었냐는 신현확의 질문에 김재규가 눈에 띠게 당황하자 신현확은 박정희의 죽음을 직감하고 어찌된 일이지를 캐물었는데 김재규는 끝까지 보안을 이유로 답변을 거부했다. 이에 격노한 신현확이 대통령 서거 이유를 밝히라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놀란 장관실에 있던 국무위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김재규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재규는 급기야 권총을 보여주면서 신현확을 위협하기까지 했으나 신현확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신현확에 가세하는 장관의 수도 늘어났다. 이후 11시 30분에 최규하의 제의에 따라 상황실로 자리를 옮겨 정식 국무회의를 열고 늦게 온 국무위원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신현확은 아예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김재규가 수상하니 헌병대를 동원해서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국무회의가 소집되고 국무위원이 아닌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이규현 총리 비서실장, 서병기 총무처 총무국장 등이 퇴실했다. 최규하는 비상계엄 선포 문제에 대해서 의결을 제의했으나 신현확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부서(副署)할 수 있냐고 항의했다.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대통령이 유고라고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데, 우리 국무위원 중에 시신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이래 가지고 어떻게 계엄령을 선포하자는 말입니까? 시신을 확인하기 전에는 나는 부서할 수 없습니다!

이에 다른 국무위원들이 동의, 급기야 김성진 문공부 장관 등이 반발하며 정회를 요구했고 국무회의는 중단됐다. 전두환 회고록은 이 시점을 "김재규에게 치명적인 순간"으로 묘사했다.
김재규와 김계원은 계엄령 선포 의결을 앞둔 시점에서 상황이 그렇게 반전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중략)...김계원 실장이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을 정한 것은 이때였다. 비상 국무회의가 좌초되자 김재규의 쿠데타 기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 시해 사실을 숨긴 채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던 김재규의 의도가 좌절됐다. 한편 김계원은 국무위원들이 반발하는 것을 보면서 김재규 배후에 아무것도 없고, 예비해둔 특별한 계획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한 후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11시 40분 김계원은 회의가 중단되자 슬며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옆방으로 가 국방부 장관 보좌관에게 노재현 장관과 정승화 총장을 급히 불러오라고 요청했고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동조 세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을 내놓으면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그에게 권총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75]

이에 신현확의 언질도 받은 상태였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했다. 노재현은 정승화와 체포 계획을 논의했고 수사는 보안사가 해야 된다고 결정했다.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를 벙커로 불러 상당히 구체적으로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지만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는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76][77] 이에 전두환은 보안사 군사정보과장 겸 육군본부 보안대장 오일랑 중령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두환: 자네 김재규 얼굴 아나?
오일랑: 압니다.
전두환: 김재규는 자네 얼굴 아나?
오일랑: 모를 겁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전두환: 김재규가 각하를 살해했다. 지금 빨리 헌병복으로 갈아입고 헌병대장인 척 하고, 장관실에 가서 총장이 벙커에서 부른다고 유인해서 곧장 체포해. 그리고 정중하게 모셔라.

오일랑은 당시 당직을 서러 나왔을뿐인데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막강한 인물을 체포하란 지시를 받고 오늘로서 군생활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국방부 장관실에서 최 총리와 국무위원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김재규를 밖으로 유인하는 일은 정 총장의 비서실장으로 위장한 김진기 헌병감과 오일랑이 맡았다. 김진기 헌병감은 그에 앞서 헌병 기동타격대 1개 소대를 후문에 배치시킨 상태였다. 그가 평소 친분이 있던 조약래 국방부 장관 보좌관을 보내 정 총장이 만나고자 한다는 전갈을 하자 김재규는 순순히 따라 나왔다.

김재규가 나오자, 김진기는 자기를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이라 경례를 하고, 오일랑은 육군본부 헌병 대장이라고 경례하니 김재규는 순순히 믿고 안내를 받았다.

김진기와 오일랑이 국방부 뒷문으로 연결되어있는 별실 지하 계단 쪽으로 김재규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다 김재규가 "박 대령!"이라 소리치며 박흥주를 찾자, 오일랑은 "박 대령 뒤에 따라옵니다."라고 둘러댔다. 실제로 박흥주가 따라붙었으나 헌병들에게 제지됐다.

그렇게 몇 계단을 더 내려가다 평소와 다른 계단으로 가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김재규가 "왜 이 길로 가느냐?"라 물었다. 그때 동행한 헌병대위가 김재규를 덮칠 태세를 취하자 오일랑은 즉각 대위의 행동을 저지하며 "부장님, 이 길은 오늘 저녁 국무회의 때 썼던 비밀통로입니다."라고 둘러대서 위기를 넘겼다. 그리하여 계단을 다 내려가고 대기하던 차량 앞에 온 오일랑은 뒷좌석 문을 열고 "부장님 타시죠"하고 김재규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뒷좌석 안에는 헌병이 한 명 대기 중인 상태였다.

김재규가 체념한 듯 저항하지 않자 뒷좌석 왼쪽에 밀착해 앉아 "무장 해제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김재규는 "무장?"하며 당황한다. 그렇게 오일랑은 김재규의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빼앗은 뒤 김진기 준장에게 자동차 창문을 통해 넘겨준다. 권총을 받아 든 김진기 준장이 "압송해!"라며 명령을 내렸다. 27일 0시 30분의 일이다. 압송 중 김재규는 "세상이 바뀌었다. 대통령이 죽으셨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오일랑은 무시했다고 한다.

압송이 시작된 시간은 이미 통금시간이어서 바리케이드에서 두 번이나 검문을 받았다. 오일랑이 "중요 인물 압송 중이다." 라고 설명하자 별 탈 없이 통과시켜 주었는데 문제는 두 번째 바리케이드를 출발하려는 순간 차가 고장이 나버렸다. 다행히 김진기 헌병감이 탄 차를 포함한 2대의 차가 뒤쪽에서 같이 이동 중이어서 다른 차로 갈아타서 압송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큰 철문이 있는 곳이었고 운전병이 크락션을 두 번 누르자, 장발의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M16으로 무장한 채로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오일랑은 그들을 보고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고, 김재규가 "우리 분실에 왔구먼"이라고 말했다. 정동 보안사 분실을 가야 하는 것을 너무 긴장한 운전병의 실수로 중정 분실에 와버린 것이었다. 오일랑은 운전병에게 "야, 뒤로 빠꾸해라"라고 말해서 무사히 빠쟈나간다. 호송대가 남대문쪽에 이르렀을때 오일랑은 하얀소복을 입은 여자를 발견한다. 순간 귀신일지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호송대는 다른쪽으로 우회하여 가게된다. 오일랑의 증언

그렇게 체포되어 정동 보안사 분실로 연행된 김재규는 허화평 대령의 안내로 2층 응접실로 가더니 "전 사령관 좀 오라고 해. 지시하거나 상의할 일도 있다"라고 했고 "(내가) 여기 잡혀 있는 사실을 알면 부하들이 쳐들어올 거야"라고 말하거나 누가 묻지 않았는데도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협력하라.”, “내가 박정희를 살해했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뀐다”는 발언을 일삼자 수사관들은 김재규의 언행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 살해범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는 즉시 전두환에게 보고됐다.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대통령 살해범은 김재규입니다. 구속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자 정승화는 전두환의 말에 동의해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전두환이 새벽 1시 30분에 김재규를 체포시키고 동행자였던 박흥주 대령까지 도주하면서 쿠데타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내막을 알아챈 김정섭 차장보가 자신의 부하들로 안가를 습격해 이기주 등 안가의 중정 요원들을 습격, 체포했으며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도 그 다음 날 전부 체포되어 김재규와 함께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었다.

한편 문공부 장관 건의로 10분간 정회한 비상 국무회의는 이튿날 새벽 두 시에 다시 열렸다. 김계원의 실토로 대통령 서거 사실을 알게 된 최 총리와 신 부총리 등 국무위원들은 대통령 시신이 안치된 사실 확인을 위해 국군서울지구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27일 새벽 3시 국무회의를 마쳤고 4시 10분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사령관에는 정승화 육참총장이 임명됐으나 국무위원 중 누구도 그가 김재규의 요청으로 사건 현장 인근에 있었던 사실은 알지 못했다.

8. 취조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김재규를 호송하던 마이크로 버스가 잠수교에서 전복 사고를 일으켰는데 차가 뒤집어질 때 기절한 보안사 수사관 신동기 육군 준위가 정신을 차려 보니 김재규가 엉덩이로 신동기의 머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김재규가 "아이고 내가 신 선생을 깔고 앉았구먼. 미안하오." 라며 비켜주자 수갑이나 포승줄이 없어서 김재규가 도주하지 못하게 바지춤을 잡고 있던 신동기는 "부장님 어디 도망가시면 안돼요" 라며 손을 놓았고 김재규도 "내가 어딜 도망가나. 빨리 (전복된) 차나 세우시오" 라면서 조용히 호송에 응했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를 태운 버스가 전복사고를 수습한 뒤 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 30분 쯤이었고 김재규는 피의자 복장으로 갈아입었다.[78]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각하를 살해했다. 이제 세상은 다 끝났다. 수사관 자네들도 살 궁리를 찾아야 돼.

김재규는 또 정승화도 사건현장에 있었고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왔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니 수사관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으며 내일 아침이면 우리가 반혁명분자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온 김재규를 처음엔 군과의 밀약을 통한 쿠데타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수사관들이 쉽사리 심문하지 못했다. 보안사는 방첩기관이지 전문 전투부대, 방어부대가 아니라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상황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전투부대라도 들이닥친다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79] 애초에 보안사가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이송한 것도 대장이 끌려간 것을 알면 중앙정보부가 기습을 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80]

이때 이학봉 수사과장이 나서서 수사관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이학봉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손에 지금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다. 목숨을 걸고 수사를 철저히 하여 빨리 김재규의 공모자를 색출해야 한다.

그러나 김재규는 과거 보안사령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서 다들 전관예우로 쩔쩔맸다고 한다. 심지어 취조실로 들어와서는 "부장님, 부장님" 이라면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수사관도 있었다. 그러자 이학봉은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로 호송해 온 신동기 준위를 불러 "(김재규를)당신이 데려왔으니 책임지고 조사하시오" 라고 지시하였다.

키는 작지만 온갖 무술에 능하고 간이 큰 신동기 준위는 이왕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보아야 할 상황이라서 취조를 무식하게 밀어붙였다. 김재규를 호송해 온 신동기 준위는 한 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에서 6개월 과정 정보교육 수료 시 성적 우수자로 부장인 김재규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고 김재규를 정동 분실[81]에서 서빙고 분실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정도 들었는지라 김재규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김재규와 공모한 반란 부대를 알아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수사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자백을 빨리 받아내는 방법은 고문이었다. 신동기는 안면을 몰수하고 이때부터 한 30분간 김재규를 거칠게 다루었다.
신동기: 야 김재규, 솔직히 이야기하자. 어느 군부대를 몰고올 거야. 우리도 알아야 손들고 항복할 것 아닌가. 어느 부대랑 결탁했어?
김재규: 없습니다. 단독으로 시해했습니다.
신동기: 미국과 손잡은 거야?
김재규: 아닙니다.

이때 김재규는 철제 의자에 앉아있다가 신동기의 주먹과 발길질로 바닥에 나뒹굴 때마다 스스로 의자를 바로 세운 뒤 자세를 딱 바로잡고 다시 앉아서 다음 타격을 기다리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학봉 중령은 김재규가 동원한 부대가 없다고 판단했던지 신동기에게 "그만하고 나오라"고 지시했다. 이후에는 정식 신문이 시작되었다. 심문 도중 김재규는 신동기의 주먹에 맞아 눈 밑에 피멍이 들기도 했는데 위 현장 검증 사진을 보면 김재규의 오른쪽 눈 밑에 거무스름한 상처가 눈에 띈다. 심하게 구타당한 김재규는 온 몸이 피하출혈로 시퍼렇게 되자 식겁한 신동기가 이 사실을 바로 전두환에게 보고하여 일단 고문을 중단시켰다. 이후 대통령 주치의 김병수 장군을 불러 김재규에게 응급치료를 하게 하였고, 김병수가 서빙고의 심문실에 들어가자 김재규는 반가워했다고 한다. 진찰 결과 목숨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고 간이 나쁜 사람들이 보이는 증상이어서 알부민 주사를 놓아 주었다. #

27일 새벽 1시 직전에 육군본부 벙커에 육군 헌병감 김진기 장군이 총장실로 오더니 김재규 체포완료 보고를 했다. 정승화는 국방부장관실에 있는 김계원 실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승화는 한참 있다가 국무회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국방부로 가던 중 복도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났다. 전두환은 쪽지에 쓴 메모를 보여주면서 '김재규가 압송차 안에서 횡설수설한 걸로 보아서 범인이 틀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세상에 중앙정보부장이 각하를 시해했다니...'라고 말하면서 어이없어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으로부터 수사계획을 보고받은 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갔다. “김계원 실장이 각하 시해장소에 김재규와 같이 있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연행을 해서 조사를 해야겠습니다”라고 하니 장관도 동의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연행지시를 했다. 그 직후 김계원 실장이 장관실로 들어왔다.

그러나 정승화는 미심쩍게도 그의 모습을 보니 도망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전두환에게 '연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82].

이학봉은 27일 아침 김재규에 대한 1차 심문결과를 수사관들로부터 보고받았다. 수사관들은 시해현장에는 김계원 실장뿐 아니라 정승화 총장도 있었다고 보고하면서 두 사람을 연행해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날 오전 11시 이학봉 수사과장은 오희명 과장과 함께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에게 수사보고를 했다. 이학봉 중령은 김계원, 정승화 두 사람을 구속하여 수사해야겠다고 건의했다.
"처음엔 (전두환 사령관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막 문쪽으로 걸어가는데 다시 부르더니 '김계원 실장은 구속 수사하라. 그러나 정승화는 어제 계엄사령관이 됐으니 함부로 할 수 없다. 지금부터 극비리에 내사를 더 해봐라'는 취지로 지시했지요." (5·18사건공판기록)

이학봉 중령이 전두환 소장에게 정승화 총장에 대한 수사필요성의 이유로 적시한 내용은 이러했다.
'육군총장이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시신수습과 범인색출을 한 흔적이 없다, 청와대를 포위시켰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5·18사건공판기록)

이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이렇게 생각했다.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육군참모총장이 공모한 조직적인 내란이다. 완전한 혁명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정 총장을 구속하면 배후세력에 의해서 또 다른 내란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5·18사건공판기록).

이때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시해 사건 현장 부근에 김재규의 초대로 와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김재규가 단독범인지 여부가 불투명한 시점에서 전두환 소장과 합수부 수사관들은 일단 정승화를 공범 용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불과 7시간이 흐른 시점에 전두환과 합동수사본부에 이런 의심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전두환이 정권탈취에 대한 야심을 가졌다고 보기 힘든 시점에서 그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권력자로 등장한 계엄사령관을 구속해야할 조사대상자로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12.12 사태로 가는 길은 이미 열리고 있었다.

9. 결과


10.26 사건 수사 경위를 발표하는 전두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KBS, MBC, TBC가 공동 생중계한 박정희 국장 영상.(1979년 11월 3일)


박정희 장례식 컬러 녹화.

이 사건의 전말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수사 보고에 의해 10월 28일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재판을 통해 주모자인 김재규, 그리고 암살에 참여한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83]까지 5명은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박흥주의 경우는 이보다 전인 1980년 3월 6일[84] 총살형이 집행되었고[85] 김계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86] 국내외에서 김재규의 구명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으나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또한 당시 대통령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 중장은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으나 직무유기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정승화 참모총장의 만류로 풀려나서 예편했다.
김재규의 말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은 철옹성 같던 유신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이가 바로 하나회라는 군부 사조직을 등에 업은 전두환이었다. 그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혐의로 체포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최규하를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육군본부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든 후 1980년 5월의 5.17 내란과 그 다음날부터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거치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의 꼭짓점에 서는 데 성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재규의 이러한 행위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라는 더욱 잔인한 독재 정권 수립에 일조한 것이다.

박정희의 장례식은 중앙청 앞마당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41개국 조문사절과 각계인사 등 3,0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정부 집계 9일간의 국장 기간 중 전국에서 약 1,769만 명[87]이 조문했으며, 영결식 당일에도 시민 약 200만 명이 운구 행렬이 지나는 길에 도열해 다수가 통곡하고 절규했다고 한다.

한편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생전에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던 많은 사업들이 거의 중단되었다. 대표적으로 수도권 집중을 크게 완화하는 국토이용의 효율성, 특히 물류의 편의를 극대화하는 국토개조가 핵심인 「가로림 프로젝트」[88]와 함께 20만톤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항만을 만들어 자유경제특구(FTS)를 건설해 제2의 싱가포르로 만들겠다는 가로림만 계획이 좌절되었다. 박정희는 충청 해안을 중심으로 대규모 중화학 공단과 무역항 사업을 현 공주시로의 수도 이전을 전제로 추진하였는데 10.26 사건 직전 고인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던 삽교천 행사도 이의 일환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수도이전 계획도 같이 영영 중단되었다. 다음은 박정희가 구상한 프로젝트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기사들이다. #, #, #, #, # 그러면서 수도 관련 계획과 해안 공단사업을 받기로 한 충청도, 특히 충남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모든 계획이 엎어지고 이후 수도권과 경상도에 편중된 집중개발로 가장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나마 세종특별자치시 계획 하나를 받았지만 정말 이거 하나가 끝이다. 한편 고고학적 성과를 민족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신라왕릉, 석굴암 등을 발굴, 정비하는 것도 박정희 생전에 그 쪽으로 관심이 많아 많은 예산이 투입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지원이 뚝 떨어졌다.[89]

반면에 10.26 이후 1979년 12월 7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12월 7일~8일 사이에 문익환 등 구속된 민주화 인사들이 석방되었고 김대중에 대한 연금이 풀리기도 하였다. 조갑제는 김재규의 총성이 가져온 변화는 불과 두 달 전에만 해도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였고 유신 체제를 해체시킨 것 이라고 평가하였다.

1979년 10월 27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한 마음으로 국민에게 애국심과 지혜와 단결을 호소합니다. 민족중흥의 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졸지에 서거하신데 대해 그 충격과 애통심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이 국가비상시국에 결연히 지혜로 극복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군은 이 비상시국에 국가수호의 막중한 책임을 다해 북괴 공산집단의 동향을 주시하며 철통같은 방위 태세에 임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모든 공무원도 소임을 위해 국가비상사태 극복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일사불란하게 책임을 완수하고 상호협력해 국가 안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맹방인 미국 정부는 이번 우리 정부에 대해 즉각 협조할 것을 명백히 했습니다. 대외에 있어 우방국과 우호 협력 관계도 아무 변동이 없다는 정부의 방침을 천명합니다. 국민들은 모두 다 같이 굳데 뭉쳐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겠습니다."
이어서 계엄포고 제1호가 발령됐다.
①일체의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하며 시위 등 단체활동을 금한다.
②언론·출판·보도는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한다.
③야간통행금지는 22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로 한다.
④정당한 사유없이 직장이탈 및 태업행위를 금한다.
⑤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행위를 금한다.
⑥항만 및 공항의 출입은 검열을 받아야 한다.
⑦전문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은 별명이 있을 때까지 휴교조치한다.
⑧일체의 집단적 난동·소요 및 기타 범법행위를 금한다.
⑨주한외국인의 활동은 이를 보장한다.

상기포고를 위반한자는 영장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처단한다. 戒嚴司令官(계엄사령관) 鄭陸參(정육참)총장 全國(전국)에 非常戒嚴(비상계엄) 선포

김재규는 10.26 사태 이후 전국으로 비상계엄령 확대를 서둘렀고( 출처) 1980년 신군부가 추진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5.18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던 것처럼 전국으로의 계엄령 확대는 전국적인 저항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당시 대법원은 김재규가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입법, 사법, 행정권을 총괄하는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강제로 정리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이었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출처 1, 출처 2)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유신 정권의 일원들은 물론 신민당과 민주화 세력들 또한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낮은 계획이긴 했다. 김재규 본인은 이에 대해서 사리사욕을 채울 생각 없이 유신의 잔재를 청소하기 위함이라고 부인하였다.

김종필은 10.26 직후 민주공화당의 총재로 추대되었고 당원으로부터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순간 유신 체제는 종말되었으니 나는 그러한 체제에서 대통령을 할 생각이 없으며, 헌법 개정 이후의 새로운 시대에서 대선에 출마하여 대통령이 되고 싶다"며 출마를 거부하였다. 사실 그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시절 김종필이 대권을 넘보고 있다며 김재규에 의해 청구동 가택수색까지 당한 터라 김재규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

그러면서도 김재규는 김종필을 항상 각하라고 불렀다. 김종필이 "이미 각하가 계신데 그런 호칭은 그만둬 달라"고 했지만 김재규는 "습관이니 양해하시라"라며 눙쳤다고 한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 기수는 김재규(2기)가 김종필(8기)보다 6기수나 선배인 데다가 나이도 호적상으로는 둘 다 1926년생 동갑이지만 김재규가 재판을 받을 때 자신은 1924년생이라고 밝힌 바 있다.

거기다 10.26 이후 김종필이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개헌과 민주 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갔던 행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김재규의 구상에 따랐을지도 의문이 존재한다. # #

파일:심수봉과신재순.jpg

합동수사본부는 처음에 대통령의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이 1979년 12월 16일 육본계엄군법회의에 출두할 때 언론에 두 여인의 사진을 뒷모습[90]만 게재하게 했고 손금자(孫錦子)( 심수봉)와 정혜선(鄭惠善)( 신재순)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는데 실명이 유비통신으로 돌아다녔고 결국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다.

10. 재심


JTBC의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10ㆍ26 재판 당시 김재규의 육성을 공개했다.(2020년 5월 21일 방영) 1심과 2심 재판의 육성에서 신군부가 재판정 바로 뒤에서 개입했다는 정황이 폭로되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유족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김재규 유족과 김재규 재심 변호인단은 26일 오전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다고 밝혔다. ‘박정희 암살’ 김재규 유족 40년 만에 재심 청구, 42번째의 10·26, 동생은 재심을 기다린다
김재규형사 재심신청 기자회견장에서 발표한 재심신청 유족 입장문<전문> -유족 대표 김성신 (김재규 셋째 여동생 김정숙의 장남)

김재규 장군 유족의 자격으로서, 우리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40년이 되는 올해, 10.26 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합니다. 하지만 유족이 10.26 재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바는, ‘판결’이기보다는 ‘역사’입니다. 10.26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꾼 역사적 사건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두고,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었는지, 아니면 ‘권력욕을 위한 행위’인지를 설왕설래하는 수준에서 우리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무려 40년을 허비했습니다.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보도는 철저히 통제되었고 재판 역시 당시 권력의 부당한 감시와 외압 속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 국민에겐 10.26의 진실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나 정보가 거의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0.26에 대해 어떤 입장이든 간에 그것은 모두 ‘짐작’의 수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란 짐작일 수 없습니다. 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과거를 비추어 지금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관’을 세우고, 그것으로 국가의 미래와 희망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역사는 후대의 끝없는 재해석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가 됩니다. 즉, 김재규라는 인물이 당시에 어떤 생각과 마음이었는지를 짐작하거나 단정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재심신청은 ‘10.26에 대한 짐작과 단정을 대한민국의 역사로 전환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유족들은 판단했습니다. 새로 발굴된 당시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10.26을 역사로서 해석해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옳다고 신념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가망이 없는 싸움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 그것을 ‘희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충성’이란, 국민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봉건 시대’에는 왕이라는 한 사람을 위한 희생이 곧 충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민이 곧 국가’인 ‘민주공화국’에서는 권력자 개인을 위한 희생은 충성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곧 국민과 국가에 대한 반역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0.26은 5천 년 역사의 이 나라에서 ‘충성의 전근대적 개념’을 붕괴시킨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10.26이라는 사건을 기점으로 ‘충성’의 개념은 '국민과 국가,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즉 10.26은 국민주권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달리하도록 만든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10.26은 바로 이런 면에서도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유족들은 생각합니다. 저희 유족은 이번 재심을 계기로 10.26이 다시한번 대한민국 국민의 기억 속에 소환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재심의 과정에서 10.26과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논의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깊이 생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5월 26일 재심신청유족대표 김성신>
영문은 이곳을 참조.


서울고등법원 2024년 4월 17일을 심문기일로 지정하고 재심 개시 여부를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2024년 6월 12일,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안동일 변호사가 재심 신문기일에 출석해 사건을 증언했다. 김재규 국선변호인 "재판 중 쪽지 오가, 고문 흔적도"..재심 여부 심리 계속

2024년 7월 12일, 서울고법 형사7부(이재권 부장판사)는 검찰 측 주신문을 진행하고 신문기일을 마무리했다. 김재규 재심 열릴까…변호인 "신군부 재판 아닌 '개판'", "'왜 열심히 해?' 불려갔다"…김재규 국선 안동일 변호사의 증언

2024년 7월 21일 안동일 변호사는 노컷뉴스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16일 만에 사형 선고한 '개판' 재판"…김재규 변호인 '증언'


[1] 실제로 루마니아는 1차 중동 중공업 투자를 급속히 늘려서 이익을 봤는데 막상 오일 쇼크 시기가 지난 후에는 죄다 빚이 되는 바람에 결국 극심한 긴축 모드에 들어서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데 영향을 주었으며, 브라질 알제리, 폴란드 중공업 투자에 열을 올렸다가 경제가 어려워진 나라들이 많았다. [2] 유신 체제 기간 동안 물가 상승을 감안한 1인당 실질 국민 총소득은 1.8배 가량 증가하여 뒤이은 전두환 정부와 비등하다. [3] 본 행사는 박정희가 생애 마지막으로 참석한 공식 행사가 됐다. 더불어 해당 사진이 박정희의 생애 마지막 사진이기도 하다. [4] 당시는 당진군이었으며 2012년 1월 1일에 당진시로 승격되었다. [5] 이 때문에 당진송신소 준공식은 민간에 공개되지 않고 치러져서 일반인들에게는 당진송신소가 아닌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이 박정희 생전의 마지막 공식 행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진송신소 행사 장면이 민간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99년 KBS 박정희 특집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 이후 2005년판 KBS 영상실록 1979년 편에서 당진송신소 행사 장면이 공개되었다.(1995년판 영상실록에서는 미공개) [6] 막내아들 박지만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청와대에 없었다. [7] 괄호는 말하지 않음. [8] 참고로 박정희는 주변 인물들이 부모님 관련으로 사정이 생기면 공무는 제쳐두어도 좋으니 갔다오라고 말했으며, 차지철 또한 자신을 키워준 홀어머니에게는 둘도 없는 효자였고 평소에 아무리 갈구고 질책하던 이들에게도 가족과 관련된 일, 특히 어머니에 관한 일이라면 항상 배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9] 상단 사진 맨 좌측의 새마을 모자를 쓴 흰 수염 노인이다. [10] 2011년 철거하였다. [11] 진짜로 박정희에게 짜증이 났다기보단 공식 행사로 지쳤음에도 쉬지 않고 안가 행사를 진행하려고 하는 모습에 걱정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12] 사실 특별히 보안이 철저했다기보다는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안가를 다른 기관이 알 수도 없고 굳이 알 필요도 없기는 하다. [13] 김재규는 "대행사를 준비하고 참여하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 정승화를 불렀고, 정승화에게는 약속을 잡고 나서 "급작스레 대통령이 불러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으니 행사가 끝나고 바로 오겠다"라고 둘러댔다. [14] 이 권총은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이던 1960년에 당시 총장이었던 이성가 장군에게 선물받은 것으로, 예편 후 주소 관할지의 성북경찰서에 예치시켰다가 중정부장 취임 후인 1977년 반환받아 집무실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15] 김계원이 중앙정보부장이 된 뒤 1970년 3월 발생한 정인숙 살해사건에 중앙정보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청와대를 포함한 고위층은 장안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오명을 썼다. 결정적으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 김대중이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급부상했을 때 박정희는 김계원에게 "노회한 이미지에 상대하기도 쉬운 유진산이 대선에 나오도록 뒷공작을 펼쳐 보라."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무위에 그치면서 김대중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결국 박정희의 신임을 잃은 김계원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내려왔고, 3선 개헌 후 중정부장 김형욱과 함께 청와대 비서실장직에서 경질되어 주일대사로 재직하던 이후락이 후임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6]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조차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과 상시 붙어있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사실상 청와대 No.2 내지 대통령의 그림자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자리이기에 업무량이나 강도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충성심은 물론이요 업무 능력과 조직장악력이 아주 탁월해야 감당할 수 있는 자리다. 당연히 말동무 친구에게 하나 내줄 법한 자리도 아닌데다 그런 말을 해서도 안 되는 자리다. [17] 예상보다는 소박한 음식이다. 물론 주 음식들이 소박했을 뿐이지 인삼, 전복, 장어, 송이버섯 등의 진귀한 자연산 재료로 만든 찬들을 같이 올렸기 때문에 싸구려 음식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8] 당시 리갈을 닮은 술병이라고 하면 진로위스키의 길벗 로얄밖에 없다. [19] 출처: MBC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년 5월 29일 (일) / 제 96회, 10.26 궁정동 사람들. [20] 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몰아내고 정운갑을 총재 대행으로 올리려 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 [21] 당시 신민당은 김영삼의 국회 제명에 항의하는 목적으로 민주통일당과 더불어 의원 전원(신민당 61명, 통일당 3명)이 국회에 의원직 사표를 낸 상태였고, 중앙정보부에서는 신민당 당직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당직에서 사퇴하게 한 후 총재 직무가 정지된 김영삼의 당권을 빼앗아 정운갑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에게 넘기려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 공작의 일환으로 신민당 의원들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겠다는 설을 퍼뜨리며 으름장을 놓던 중에 공화당이 사표를 전부 반환하겠다고 선언해 버리는 바람에 중앙정보부에 협조적이던 일부 신민당 의원들까지 강경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중앙정보부는 헛물만 켜야 했다. 그래서 중정 2차장보 김정섭은 공화당 의장서리 박준규에게 전화를 걸어 "기껏 공작해 놨더니 공화당에서 인심 쓴답시고 일을 그르치깁니까? (김재규) 부장님이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알아서 하세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22] 이에 김재규는 "술 한 잔에 물 두 잔을 섞으면 됩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답했고, 박정희에게 물을 섞지 않은 위스키 잔을 그대로 주기도 했다. 이미 김재규는 그때부터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3] 이날 식사는 한식이었고, 정승화는 여러 반찬과 함께 밥 한 공기와 된장국 두 그릇을 먹었다고 한다. [24] 박흥주는 김재규가 6사단장 시절에 전속부관으로 차출되어 연을 맺었고, 박선호는 대륜중학교 재학 시절 군복무를 잠시 쉬고 체육교사로 근무하던 김재규와 알게 된 사이였다. [25] 실제로 이날 경호원들은 경호실장 차지철을 필두로 정인형, 안재송, 박상범, 김용섭에 경호실 운전기사 김용태까지 포함해 총 6명으로서 7명에 거의 근접한 값이다. 다만 실질적으로 무장한 경호원은 차지철, 김용태를 제외한 4명이었다. 차지철은 이날 총을 안 갖고 있었다. [26] 공교롭게도 똑같은 이유로 단종 복위 시도가 실패하고 관련자는 처형되었다. 김재규가 조상인 김문기를 무리하게 사육신에 포함시키려 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의미심장하다. [27] 1973년 해병대 해체로 인하여 박선호와 마찬가지로 예비역 해군 하사 신분이었다. [28]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가에 배치되었으며, 그 해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29] 그는 이날 비번으로 집에서 쉬고 있었지만, 대행사 때문에 긴급 출근했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30] 나동 식당 앞에 차량을 세워두자 나동 관리책임자인 남효주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느냐?" 라고 물었는데 유성옥이 "박선호 과장님이 차를 세우라고 했다"며 답했고 남효주는 아무 말 없이 물러섰다고 한다. 그만큼 박선호 의전과장이 안가에서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를 시사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박상범 등 청와대 경호원들은 안가 식당차량 운전사 김용남과 식당 밖에서 잡담을 나누던 중 의전과장 차량이 나동 식당 앞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고 한다. [31] 평소 청와대 관용차량은 박정희의 육군포병학교 교장 시절 운전병으로 복무한 인연으로 채용된 이타관이 몰았지만 대, 소행사 때는 비공식 행사용 차량인 크라운 슈퍼 살롱을 운행했기 때문에 이날은 김용태가 슈퍼 살롱 운전을 맡았다. [32] 김용섭은 이날 안가 식당 운전사 김용남이 능곡 양조장에서 사온 막걸리 말통을 안가 식당 차량 보닛에 올려놓고 김용남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33] 안재송은 평소 매운 음식을 싫어해서 안가 주방장이 안재송에게 맵지 않은 국을 따로 끓여서 줬다고 한다. [34] 대한민국의 컬러 방송 송출은 1980년 12월에 시작되었고 이전까지 컬러 TV를 소유한 사람들은 주한미군을 위한 이 방송을 꽤 많이 시청했다. [35] 사건 발생 전인 7시 무렵은 코미디 및 시트콤 편성 시간이었다. 이날 경호원들이 보고 있던 프로그램은 Carol Burnett Show(당시 제목은 Carol Burnett and Friends)였으며 김재규의 첫 저격이 이루어진 7시 40분에는 Welcome Back, Kotter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다만 미국 유학 경험이 있었던 안재송 정도를 제외하면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컬러 TV 방송이 신기해서 방송을 틀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저녁 6~7시 사이에 편성된 공중파 방송은 동요 프로그램이나 '호돌이와 토순이' 등 어린이 프로그램 위주였으므로 딱히 볼 채널이 없었고 마침 대기실에 컬러 TV 수상기도 있고 하니 유일하게 나오던 컬러 방송이던 AFKN에 채널을 고정시켜 놨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 컬러 방송을 일부러 막아 놓은 주체가 박정희였음을 생각해보면 묘한 아이러니이다. [36] 1995년 방영된 MBC 정치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삽교천 행사 후 청와대 경호실 내부 회의 중 경호실 수행계장 박상범( 송금식 분)이 "청와대 경호원들의 영향이 안가에서는 무력화된다. 조치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올렸고 경호처 부처장 안재송( 신성호 분)도 "외곽 경비를 중정 애들이 모두 맡고 있으니, 우리는 (안가) 내부도 정확히 파악을 못하고 있다"며 맞장구를 쳤지만, 차지철( 이대근 분)은 "김재규 부장 정도야 내 파워로 꽉 누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는 장면이 있었다. [37] 류혁인은 10월 중순 경 헤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이 연례 한미 국방장관 회담 차 방문할 예정이므로 김영삼을 구속할 경우 한미 간 문제가 커질 수 있다며 박정희를 설득했고, 박정희는 류혁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영삼의 구속기소는 보류된 상태였다. [38] 흔히 알려져 있는 김재규가 김영삼의 구속 이야기를 하면서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발언은 김재규가 처형되기 직전의 재판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여러모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입장이었으므로 저 발언이 빠졌어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39] 이 때문에 이 노래는 후대에 10.26 사건을 상징하는 노래로 회자되며, 훗날 10.26 사건을 소재로 한 한석규, 백윤식 주연의 영화 제목( 그때 그 사람들)으로도 쓰였다. [40] 심수봉은 원래 김재규를 지명하려 했지만 기분이 아주 안 좋아 보여서 차지철을 찍었다고 한다. [41] 이 노래는 당시 20~30대의 젊은 층들에게 유행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나이대에서는 세대 차이 때문에 모를 수도 있지만 1972년 8월 말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남북 대표가 손을 맞잡고 그 노래를 불러 이에 놀란 박정희가 라나에로스포를 청와대에 초청하기도 했고, 당시 박정희의 자녀들이 이 노래를 가끔 불렀기 때문 이 곡을 알고 있었다. [42] 노래 1절의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까지 부르고 박자를 틀렸다고 한다. 신재순은 틀린 부분 때문에 크게 긴장했지만 박정희는 젊은 여자들이 실수한 부분이 귀여워 보였는지 허허 웃고 넘겼다고 한다. [43] 정중앙에서 약간 왼쪽을 맞았다. 주요 혈관을 관통하지 않는 바람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던 상태였다. [44] 10.26 사건을 다루는 영상 매체에서는 대통령에게 반말을 해서 그런지 묘사가 잘 안 되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아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로 묘사되곤 했으나,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반말 그대로 묘사됐다. [45] 발터 PPK 자체가 단순한 구조로 신뢰성이 높은 권총이었지만 이 권총을 이성가 장군에게 선물받은 시점부터가 1960년이고, 그걸 17년 넘게 다른 곳에 보관하다가 사건 2년 전에 다시 가지고 온 것이기에 못해도 40년은 넘었을 것이기에 당연히 격발 불량을 일으킬 확률이 높아진다. [46] 그때 차지철이 입었던 손목 관통상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대통령 경호원들도 있던 현장이었던 만큼 만약 차지철이 도망치지 않고 김재규를 저지했다면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현대사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특히 당시 간경변으로 인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김재규는 태권도, 합기도, 검도 도합 13단의 무인 차지철에게 쉽게 제압 당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총상을 입은 상태로 저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며, 거의 동시에 바깥에 대기 중이던 경호관들이 모두 제압 됐기에 큰 의미는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47] 이때 김계원이 사건이 진전되는 것을 감시하는 공범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과 단순히 김재규가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었든 박정희가 살해 당할 당시 어떠한 제지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서실장의 직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비판을 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 [48] 안가 요원들의 사격은 거구의 김용섭에게 집중됐고, 김용섭은 다섯 발 중 네 발을 가슴에 피격 당해 쓰러진 채 한동안 신음하다 사망했다. [49] 남아있는 증거 사진을 보면 확실히 이 총이다. 이 S&W M36과 김재규의 발터 PP는 총기번호까지 기록이 남아있지만 현재는 행방이 알려져 있지 않다. 총기 행방에 관한 기사 게다가 운명의 장난인지 육영수 문세광에게 같은 모델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50] 이 일화는 총을 먼저 겨눈다는 것이 얼마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안재송은 해병 장교 출신으로 권총 부문 사격 국가대표로 선발된 적도 있으며, 특히 속사가 주특기인 명사수였다. 가슴에 찬 권총을 뽑아 0.7초 내에 25m 앞의 박카스 병을 명중시켰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출처 게다가 안재송은 해병 대위 시절에 미국 해병학교에 유학을 갔다왔는데 당시 어떤 미 해병대 장교도 안재송의 45구경 권총 속사 사격 기록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출처: 이근식(예비역 해병대령), 노해병의 어제와 오늘) [51] 출처: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 [52] 안재송과 정인형이 순순히 움직이지 않았다면 둘이 여전히 건재한 상황이라 박선호는 자신의 총을 총이 불발된 김재규에게 넘겨주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박정희는 허파, 차지철은 팔만 다친 채로 암살이 실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전히 김재규 측이 박흥주 등 3명이 더 있는 등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53] 營繕, 건축물을 신축하거나 수선함. 쉽게 설명하자면 건물 관리라고 보면 된다. [54] 전기가 갑자기 합선되면 펑 하는 폭발음이 난다. [55] 합수부에서 김재규는 "차지철을 거꾸러뜨리고 앞을 보니 대통령은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어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대통령에게 다가가자 여자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권총을 각하의 머리에서 50cm 거리에 대고 쏘았습니다."라고 진술했다. # [56] 국군서울지구병원 원장 김병수 대한민국 공군 군의 준장은 박정희의 머리에서 멈춘 이 총탄을 수술로 제거해 고인을 깨끗이 모시자고 건의했으나 박근혜가 시신에 다시 칼질을 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시신과 함께 국립묘지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57] 사망 직전에 김재규에 저항하기 위해 들고 있던 문갑이 놓여져있는 것이 보인다. [58]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첫 총탄. [59] 1989년까지 육군본부는 용산구 삼각지, 현 전쟁기념관 자리에 있었다. [60] 후술한 대로 이 결정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꿔놓는다. [61] 물론 10.26 사건 당시 병원 당직 군의관이 그에게 "총상 환자가 들어왔는데 김계원 실장이 모시고 왔다"고 말한 것도 있기도 하다. [62] 의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누구인지 알아야 사망 진단서를 끊을 수 있기 때문. [63] 이미 박정희는 1.21 사태 저격 미수를 겪은 적이 있다. [64] 사실 이게 김재규에게 가장 유리한 가상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상술한 간첩 침투로 인한 대통령 암살은 살아남은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에게 후속조치, 더 나아가 대통령 암살로 인한 계엄, 그리고 이후 정치안정기 시기에도 간첩을 못 막았다는 책임론 때문에 정치적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김재규가 김계원 한 명만 입단속시키면 아무도 모르게 덮을 수 있었겠지만, 단 한 치의 걸림돌이라도 없게 사건을 은폐하자면 차지철의 박정희 암살이 김재규 입장에서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시나리오이다. [65] "차지철이 대통령을 암살하여 중앙정보부장인 내(김재규)가 반역자(차지철)를 맞받아 쏴버리고 후속조치를 위해 안가를 나왔다"라고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무력과 권력을 모두 휘두를 수 있는 중앙정보부장이 말했다면 누가 그를 말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당시 박정희 밑의 권력 지도는 국무총리도, 국회의장도 아닌 중앙정보부 VS 대통령경호실 구도였다.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암살한 상황이라면 수장이 본분을 안 지킨 건 둘째치고, '반역'을 해버린 상황에 경호실의 권력 실추는 당연한 결과이기에 그렇게 되면 중앙정보부 유일 체제라는 결과가 도출되기 매우 용이하다. 현실에서도 중앙정보부는 수장이 대통령 암살이라는 헌정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반역을 저지른 것으로 돼, 그 권력과 신뢰가 땅밑까지 추락하자 후에 권력을 잡게 된 전두환은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 약칭 안기부로 재편성한다. 현실에서도 10.26 사건으로 중정이 안기부로 개편된 것을 보면, 만약 김재규가 차지철의 소행으로 사건을 덮었으면 경호실의 권력 추락은 당연했을 것이고, 중앙정보부의 권력 독점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66] 실제 역사에선 전두환 보안사령관 및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권력을 차지했지만 이는 대통령과 대통령경호실장이 죽고 중앙정보부장은 반역자가 된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저 셋 중 한 명이라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제 아무리 보안사령관에 합동수사본부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설치고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두환은 그저 국내 최고 권력기관 셋이 한 번에 없어져 권력이 공중분해되자 그걸 쓸어담은 아주 운 좋은 경우였던 것이다. 물론 전두환이 권력 야욕이 넘치며 치밀하게 하나회라는 뒷배로 후속조치를 잘했기에 그 운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67] 이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 세력은 정승화에게 혐의를 씌우면서 이 명령은 정승화가 김재규와 함께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68] 책에서는 곤색이라고 나오는데 감색이 옳다. [69] 有故. 어떤 문제 등으로 인해 사람이 정상 업무를 볼 수 없는 경우이긴 하지만 현직 국가원수 같은 극히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암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70] 김계원이 사고에 관련되지 않았다면 김계원은 누구보다도 흥분하며 진상을 밝히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계원은 사고의 공론화를 막고 있었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동시에 암살됐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고 각료들이라면 김계원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이를 채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차기 권력이 어찌 될 지에만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이다. [71] 원래는 우국일의 의도로 영어가 섞여 있었다. 참조 [72] 옆에서 권총으로 위협하던 안가 경비원을 의식하여 일부러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73] 영화 그때 그사람들 때문에 브레즈네프의 사망을 보안유지했다고 잘못 알려진 재현 오류의 원래 내용. 브레즈네프는 김재규가 사형에 처해지고도 뒤인 1982년에 사망했다. [74] 신현확 김재규의 동향 선배(신현확은 경북 칠곡, 김재규는 선산 태생)였고, 평소 찬바람이 몰아치는 박정희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75] 전두환 회고록에 묘사된 당시 상황이다. [76] 훗날 이 지시는 상당히 논란이 되었는데 전두환은 이 지시에 대해 김재규 정승화가 사실상의 공모관계였다는 근거라고 주장하나 정승화는 1990년대 무죄 판결 당시에 이 지시를 김재규가 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다며 반박했다. [77] 264일의 쿠데타 1 1권 193쪽 [78] 여담으로 10.26 사건으로 압송된 김재규가 수사를 당한 보안서 서빙고 분실은 다름 아닌 김재규 자신이 보안사령관 시절 만든 곳이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79] 권위주의 정부 당시 중앙정보부(안기부), 보안사령부가 위세를 떨쳤지만 그들의 순수한 전투력은 수도경비사령부보다 열세였다. 12.12 당시 전두환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80] 보안사 정동 분실과 중정 정동 분실은 나란히 위치하고 있었다. [81] 현 세종대로 21길 TV조선 별관 건물 [82] 정승화 총장의 1979년 11월 1일자 참고인 진술서. 김계원은 이틀 뒤인 29일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83] 안가 경비원으로 이날 살아 있을지도 모를 피해자들에게 의도적으로 M16 소총으로 재차 사격하여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80도306 [84] 공교롭게도 김재규의 생일이다. [85] 박흥주는 다른 이들과 달리 육군 대령으로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사법원의 단심제가 적용되어 가장 빨리 사형됐다. 주범인 김재규의 재판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종범이 사형되어 비판이 크게 일었으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86] 1982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 [87] 당시 한국 인구가 3,753만 명이었다, 무려 그 당시의 국민의 47%나 된다. [88] 공식명칭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 [89] 사실 이건 마냥 부정적 영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당시 대한민국의 고고학적 경험이나 기술력이 아직 부족한 상황에서, 무려 대통령의 관심이란 부담 때문에 무모할 정도로 발굴을 진행한 사례가 있는 만큼 이러한 기조가 지속되었다면 이후에 들어 땅을 치고 후회하는 발굴 사례들이 더 나왔을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무령왕릉 발굴 당시 차라리 조사를 안 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각종 기상천외한 뻘짓들이 일어났으며 석굴암 역시 마냥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발굴상의 실패는 아니지만 천마총 역시 박정희의 압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굴하게 된 것에 가깝다. 그리고 유신정권 때가 경제규모에 비해 지원이 과할 정도로 컸던 것에 가깝기도 하다. 이후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은 21세기 들어 다시금 진도를 내고 있지만 인력도 넉넉치 않기도 하고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어서 속도는 느린 편. [90] 동아일보 황종건 기자가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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