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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1:28:30

파라오/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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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미라가 안치되었던 겹겹의 사당과 황금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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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의 미라에 대해 설명해놓은 문서.


이 아래로는 붕대를 풀어놓은 미라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오므로 열람 시 주의.

2. 상세

파라오들의 무덤은 이미 고대에 죄다 털려나갔고 투탕카멘의 무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을 제외하면 멀쩡히 남아있는게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의외로 가장 중요한 파라오들의 미라는 상당수가 보존되어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도굴꾼들이 무덤에서 돈이 될만한 보물과 부장품들만 빼가고 미라는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이다.[1]

신관들은 도굴당한 무덤에서 파라오들의 미라만 간신히 수습해서 아직 도굴당하지 않은 묘지에 한꺼번에 재안장했다. 신관들은 파라오들의 미라들을 크게 2개의 무덤에 나눠서 숨겼는데, 첫 번째가 데이르 엘 바하리의 TT320 무덤,[2] 두 번째가 아멘호테프 2세의 KV35 무덤이다.
파일:TT320_tomb.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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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320 무덤 KV35 무덤
TT320 무덤은 이집트 제3중간기 시절인 이집트 제21왕조 시기의 아문 대신관인 피네젬 2세와 그의 가족을 위해 조성된 무덤이었다. 피네젬 2세는 생전에 당대 파라오인 시아문의 명을 받아 왕가의 계곡을 돌며 도굴당한 파라오들의 무덤에서 미라를 수습한뒤 재염습하는 일을 수행했는데, 자신의 무덤이 통로가 수직이라 출입이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재염습한 파라오들의 미라를 안치하는 용도로 썼다. 피네젬 2세는 기원전 969년경게 사망하여 무덤 가장 안쪽에 안치되었고, 제22왕조 시기까지 미라 안치소로 쓰이다가 출입통로가 차단되면서 도굴꾼들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60년쯤에 근처에 살던 압드 알-라술(Abd Al-Rassul) 가족이 우연히 발견했다. 기르던 염소 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져서 찾던 도중에 무덤에 들어갔는데, 일부 관들에 코브라 장식이 달려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무덤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고, 몰래 몇몇 유물과 미라를 빼돌려 팔았다. [3] 그러나 지역 관리들이 룩소르의 골동품 시장에서 이 무덤에서 나온 카노푸스 단지, 파피루스 문서들이 흘러나왔다는 걸 확인하자(현재 대영 박물관에 전시중인 캠벨 파피루스가 TT320의 원주인인 피네젬 2세를 위한 사자의 서인데, 1876년에 400파운드에 팔렸다.), 유물의 출처를 추적하여 압드 알-라술 가족을 찾아냈고 이들 중 한 명에게서 무덤의 위치를 받아내 1881년에 공식으로 재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때 무덤 내부에 있던 유물들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바로 옮긴데다가, 급하게 작업을 하면서 반출이나 운송 과정에서 관들이 손상되어서 후대 연구자들이 골치를 썩게 만들었다. 이후 1938년에 재조사를 거쳤고 1998년에는 무덤 내부를 막고 있던 돌이나 잔해들을 치워내고, 무덤을 보존하기 위해 연구팀이 투입되었다. 이들이 무덤 내부를 정리하면서 그 동안 가려졌던 벽화 일부가 발견되었고, 여러 관조각과 작은 유물들을 통해 본래 제21왕조 시기의 가족묘로 조성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TT320 무덤에서는 세케넨레 타오, 아흐모세 1세, 아멘호테프 1세,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2세, 투트모세 3세,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 람세스 3세, 람세스 9세 등 총 11명의 파라오 미라가 발견됐다. 파라오의 미라 뿐만 아니라 50여 구에 달하는 왕비, 왕자와 공주 등 다른 왕족들의 미라들도 함께 발견됐다.

아멘호테프 2세의 KV35 무덤도 이미 고대 이집트 당대에 도굴당했다. 하지만 이미 도굴꾼들이 털어갔다는 점 때문에 다시 도굴을 당할 가능성이 낮아 미라를 수습해 집단 매장할 무덤으로 선정되었고, 재안장할 때는 무덤에 부장품을 묻지 않았기에 도굴꾼들의 관심을 피할 수 있었다. 이 곳에서는 아멘호테프 2세, 투트모세 4세, 아멘호테프 3세, 메르넵타, 세티 2세, 십타, 람세스 4세, 람세스 5세, 람세스 6세 등 총 9명의 파라오 미라가 발견됐다. 사실 제20왕조의 초대 파라오 세트나크테의 미라도 여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건 1901년 약탈로 훼손당해서 지금은 없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KV35에 파라오들의 미라를 재안치한 시기는 제21왕조 때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 피네젬 1세였던 때인데 그는 앞서 언급된 피네젬 2세의 할아버지다.

파라오들의 무덤은 죄다 도굴당했지만 의외로 가장 중요한 미라는 살아남은 것들이 꽤 많다. 특히 고대 이집트 최전성기인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의 경우, 33명의 파라오 중 21명의 미라가 살아남았다.[4] 아케나톤, 세트나크테처럼 신원이 확실하진 않지만 거의 본인의 것일거라고 확실시되는 미라들까지 합치면 3분의 2 이상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5] 이는 신관들이 흩어져있던 파라오들의 미라들을 모아 한꺼번에 재안치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 미라를 재안장할 때는 쓸데없이 화려한 부장품들을 함께 묻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아래의 표는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 중 미라가 보존된 파라오들을 표시해놓은 것이다.
왕조 파라오 미라의 보존 여부 상세
제18왕조
아흐모세 1세 O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 TT320에서 발견
아멘호테프 1세 O 발견 일자 미상[6]
투트모세 1세 O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 TT320에서 발견
투트모세 2세 O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 TT320에서 발견
하트셉수트 O 1903년 왕가의 계곡 KV60에서 발견[7]
투트모세 3세 O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 TT320에서 발견
아멘호테프 2세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8]
투트모세 4세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아멘호테프 3세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아케나톤 1907년 왕가의 계곡 KV55에서 발견. 아케나톤의 것인지 스멘크카레의 것인지는 불명.
스멘크카레
네페르티티 1898년 KV35에서 발견. 확실하지는 않음[9]
투탕카멘 O 1922년 KV62에서 발견
아이 X
호렘헤브 X
제19왕조
람세스 1세 O 1817년 데이르 엘 바하리 TT320에서 발견
세티 1세 O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 TT320에서 발견
람세스 2세 O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 TT320에서 발견
메르넵타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아멘메세스 X
세티 2세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십타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투스레트 X
제20왕조
세트나크테 X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약탈로 파괴
람세스 3세 O 1886년 골동품 수집가가 발견[10]
람세스 4세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람세스 5세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람세스 6세 O 1898년 왕가의 계곡 KV35에서 발견
람세스 7세 X
람세스 8세 X
람세스 9세 O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 TT320에서 발견
람세스 10세 X
람세스 11세 X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현재 살아남은 파라오들의 미라는 절대다수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다. 허나 이집트 제2중간기 이집트 제3중간기 시대의 파라오 미라도 몇 개 보존된 것들이 있다. 제17왕조 세케넨레 타오, 제21왕조 프수센네스 1세, 아메네모페, 제22왕조의 셰숑크 2세, 이렇게 총 4구의 파라오 미라들이 남아있다. 다만 프수센네스 1세와 아메네모페의 미라는 감고 있던 살과 붕대가 다 썩어버린 탓에 미라라기보다는 유골에 더 가깝고, 셰숑크 2세 역시 은관만 남아있지 그냥 뼈다귀에 더 가깝다.

3. 목록

3.1. 제18왕조

3.1.1. 아흐모세 1세

파일:Ahmose-mummy-head.png
파일:Ahmose_I_mummy.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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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앞으로도 발견된 파라오 미라중 제일 오래된 미라다.[11]

이집트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18왕조의 초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의 미라다. 이집트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고대 이집트의 전성기인 신왕국을 연 업적을 남긴 파라오다.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의 합장묘에서 발견됐다. 이미 예전에 도굴당한 탓에 머리는 부서져서 목과 분리되어 있었으며 코는 부러져 눌러진 상태였다. 독특하게도 팔이 가슴 위로 교차되어 접혀있지 않았고, 두 손은 허벅지 안쪽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뻗었다. 미라를 검사한 결과 머리 속 를 제거할 때 콧구멍이 아니라 대공공[12]을 이용해 제거했다고 한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생전에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고.

3.1.2. 아멘호테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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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의 2번째 파라오이자 아흐모세 1세의 직계 후계자다. 남쪽의 쿠시 왕국을 정벌하고 서부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정복하는 등 이집트의 영향력을 국외로 확대한 파라오였다.

아멘호테프 1세의 미라는 단 한번도 개봉된 적이 없다. 이유는 아멘호테프 1세의 미라를 감싸고 있는 붕대가 워낙에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붕대를 풀다가 자칫하면 미라의 붕대를 훼손하거나 귀중한 사료를 잃어버릴까 우려해서 아직 미라를 풀지 않은 상태다. 대신에 1967년 엑스레이와 CT 장비를 동원해 관 내부의 모습을 추정했는데, 안에는 구슬로 된 목걸이와 부적 따위가 들어있다고 한다. 오른쪽 팔 아래에는 골절 흔적이 있고[13] 팔은 전통적인 미라의 안치 자세인 교차로 팔짱 낀 모습이다.

3.1.3. 투트모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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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의 3번째 파라오다. 아버지 아멘호테프 1세의 뒤를 이어 활발하게 정복 활동을 펼친 군주였으며, 누비아로 대군을 파견해 남쪽으로도 국경을 확장했다. 심지어 저멀리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까지 친히 군대를 몰고 진격하기까지 했다. 죽은 이후 처음으로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나 무덤이 고대에 도굴당했고 데이르 엘 바하리의 합동묘에 묻혀있다가 1881년에 발견되었다.

미라를 분석한 결과 죽을 당시 이미 50세가 넘은, 당시로서는 고령의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딱딱한 빵을 먹고 살다보니 앞니는 이미 부식되어 마모된 상태였다. 몸집 자체는 꽤 작은 편에 속하지만 근육량이 웬만한 장정보다도 많았다고. 이 미라를 처음으로 분석한 이집트학자 가스통 마스페로는 투트모세 1세 대머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투트모세 1세의 미라는 세련된 분위기에, 입이 기민하고 얄썅해 보였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3.1.4. 투트모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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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의 4번째 파라오인 투트모세 2세의 미라다. 13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어머니가 정실이 아닌 후궁 출신이었던데다가 아내인 하트셉수트가 대신 통치했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로 딱히 남긴 업적은 없다. 그나마 시리아 시나이 반도에 몇 여차례 군사 원정을 벌였다는 것 정도가 업적이다.

가스통 마스페로가 1886년 7월 1일에 투트모세 2세 미라의 붕대를 풀었고, 부검 과정에서 투트모세 2세가 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와 상당히 닮았던 것을 밝혀냈다. 투트모세 2세의 미라는 도굴군들에 의해 심각하게 파손된 상태였는데, 왼쪽 팔이 어깨에서 완전히 빠져 탈골된 상태였고 오른쪽 팔은 팔꿈치 아래로 아예 잘려버렸다. 흉곽과 갈비뼈 역시 도굴꾼들이 도끼 등으로 내려쳐서 아예 내려앉았으며 오른쪽 다리 역시 심각하게 파손됐다.

투트모세 2세 미라의 피부는 완전히 생전에 생긴 흉터와 얼룩덜룩한 상처들에 뒤덮여 있었다. 사제들이 장례 과정에서 최대한 흉터들을 없애려 했지만 워낙 피부 상태가 안좋아서 가리는 게 불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학자들은 투트모세 2세가 생전에 심각한 피부병이나 전염병에 걸려있었다고 추정한다. 게다가 투트모세 2세가 생전 입은 수많은 상처와 수축된 근육[14]으로 미루암아 31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파라오가 생전에도 딱히 건강한 삶을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1.5. 투트모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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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의 6번째 파라오이자 이집트 역사상 가장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친 위대한 정복군주들 중 하나다. 2살에 왕위에 올라 56세에 죽을 때까지 무려 54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다. 다만 재위 22년째까지는 부왕 투트모세 2세의 아내였던 하트셉수트와 함께 공동통치하느라 제 기를 펴지 못했고, 하트셉수트가 죽은 이후에야 독자적인 통치를 펼칠 수 있었다. 최소 17차례에 달하는 대원정을 펼치며 이집트의 영토를 역대 최대로 넓혔으며 시리아, 누비아, 리비아 등 웬만한 땅들은 모두 정벌했다.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데이르 엘 바하리의 합장묘에서 발견됐다. 발견된 미라는 1880년대에 미라 해체 작업을 통해 감싸고 있던 붕대가 모조리 풀려나갔고, 1886년에 다시 붕대를 감아 원상태로 되돌려놓았다. 당시 미라의 붕대를 풀었던 가스통 마스페로의 말에 의하면 이미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이미 도굴꾼들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도굴꾼들은 붕대 사이사이에 숨겨진 부적이나 보물들을 찾기 위해 미라에 흠집이 나는 것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고 마구 미라를 헤집거나 내동댕이쳐댔다.
게다가 불과 몇 년 전쯤에 데이르 엘 바하리의 무덤을 발견한 아마추어들이 호기심에 미라의 붕대를 마음대로 찢고 풀어버린 탓에 미라 자체에도 심각한 흠집이 가있었다. 그나마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파라오를 위해 제작된 목재 관에 들어있었고,[15] 얼굴 부분은 그나마 봐줄만한 상태였다. 현재 그의 미라는 카이로의 이집트 대박물관에 있다. 참고로 그의 키는 대략 161.5cm 정도였다고 한다.[16]

3.1.6. 하트셉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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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의 5번째 파라오이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가장 유명한 여성 파라오인 하트셉수트의 미라다. 원래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2세의 왕비였는데, 타고난 야심과 탁월한 능력으로 투트모세 2세를 막후에서 조종하며 권력을 거머쥔 여장부였다. 누비아, 레반트, 푼트 지방에 원정을 보내며 이집트 왕국의 전성기를 이어나갔고 내치나 경제 역시 나름대로 잘 통제했다. 데이르 엘 바하리에서 가장 유명한 장제전도 바로 이 하트셉수트의 것이다.

하트셉수트의 미라는 하워드 카터가 처음 발견했다.[17] 1903년에 하워드 카터가 왕가의 계곡 KV60 무덤에서 2구의 미라를 발견했는데, 하나는 하트셉수트의 유모로 밝혀졌으나 나머지 하나의 신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 2007년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적혀있는 항아리에서 발견된 치아와 미라의 없어진 치아 부분이 정확히 일치함에 따라 그 미라가 하트셉수트임을 알게 되었다. 미라는 꽤 보존 상태가 좋은 채로 남아있어서 165cm의 키에 살짝 살집이 있는 체형의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연구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50대에 즈음 암의 일종인 골종양이 전신으로 퍼졌기 때문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 관절염, 치주염을 비롯한 충치가 발견되었다.

미라 중에서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축에 속한다. 특히 미라의 머리카락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다른 파라오의 미라들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3.1.7. 아멘호테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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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의 7번째 파라오이자 투트모세 3세의 후계자. 아버지 투트모세 3세가 지극히 호전적인 파라오였다면 아멘호테프 2세는 상대적으로 외교적인 방법을 선호했다. 덕분에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적대국 미탄니와 나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적대적 공존 상태에 머물렀다.

그의 미라는 1903년에 가스통 마스페로가 하워드 카터,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비싱, 피에르 라카우와 함께 처음으로 분석했다. 190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연구팀이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를 따로 연구하기도 했다. 연구 결과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는 키가 167cm였고, 아들인 투트모세 4세와 굉장히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멘호테프 2세는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팔은 가슴 위에 겹쳐져서 얹혀져 있었고, 오른손은 꽉지고 있었던 반면 왼손은 상대적으로 더 풀어진 상태였다. 그의 몸 전체의 피부에 검은 결절들이 돋아 있었는데 생전의 병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미라 처리 과정에서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미라에 생긴 자국을 통해 한때 목걸이와 반지 등이 미라에 끼워져 있었던 것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도굴꾼들의 약탈로 모두 사라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그가 대략 4-50대에 죽었다고 한다.

3.1.8. 투트모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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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의 8대 파라오.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못한 파라오지만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모래 속에서 파낸 일화로 유명하다. 투트모세 4세가 왕자 시절 모래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 속에 스핑크스가 나와 자신을 꺼내주면 파라오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왕자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스핑크스를 모래에서 파냈고 결과적으로 파라오에 등극했다는 이야기다.[18]

투트모세 4세의 미라는 왕가의 계곡 KV43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이후 도굴꾼들에게 무덤이 파헤쳐진 것을 확인한 신관들이 미라를 다시 염한 뒤 그나마 상태가 괜찮았던 아멘호테프 2세의 KV35 무덤에 재안장했다. 이후 KV35 무덤이 1898년에 빅토르 로렛에 의해 발굴되면서 투트모세 4세의 미라도 함께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미라를 분석해본 결과, 미라의 키는 대략 164.6cm였지만, 미라가 도굴꾼들 때문에 발이 부서져 버린 것을 고려하면 아마 생전에는 이보다는 훨씬 컸을 것이라 한다. 팔들은 오른팔이 위쪽에 오도록 가슴 위에 X자로 겹쳐서 올려져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약 16cm 정도의 길이였으며 어두운 붉은 기가 도는 갈색머리였다. 생전에 귀를 뚫어 귀걸이를 하고 다녔으며, 그가 죽을 때쯤 약 25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2012년에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연구팀에서 투트모세 4세, 투탕카멘 등을 포함한 제18왕조 파라오들의 사인을 분석한 결과, 측두엽에 뇌전증이 와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간질이라고도 하는데, 뇌신경 세포가 불규칙하게 흥분하여 가끔씩 이유없는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학자들은 투트모세 4세가 꿈속에서 스핑크스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도 간질의 영향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는 중이다.

3.1.9. 아멘호테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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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의 9번째 파라오이자 신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위대한 파라오들 중 하나다. 팽창에 집중하던 선대 파라오들과는 달리 경제 발전과 문화 성장에 전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이집트는 39년에 달하는 그의 재위기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지킬 것은 지키고 내줄 것은 내줄 줄 알았다. 또한 혼자서 사자 10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일신의 무력도 굉장했기에 여러모로 위대했던 파라오.

제18왕조 시대에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더 생생하게 보이기 위해 안에 내장재를 과할 정도로 꽉꽉 채워넣곤 했다. 아멘호테프 3세의 미라 역시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보존 상태는 썩 좋지 않다. 다른 미라들은 피부도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과는 달리 아멘호테프 3세의 미라는 거의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삭아버렸다.

고고학자들이 미라를 조사한 결과 아멘호테프 3세는 말년에 상당한 비만이었다고 한다. 말년의 그를 묘사한 벽화들도 그를 늙고 병든 인물로 묘사하는 것들이 있다. 파라오를 웬만하면 건장하게 묘사하는 게 일반적이던 이집트 벽화에서조차 그정도였다면 정말 죽기 직전에는 산 송장에 가까울 정도로 건강이 나빴다는 얘기다. 아멘호테프 3세는 심각한 관절염이 있었을 뿐더러 게다가 이빨이 크게 마모된 것, 그리고 엄청난 양의 충치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노년기에 상당한 고통을 달고 살았을 걸로 추정된다.

3.1.10. 아케나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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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나톤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골.

유일신 아톤 신앙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한 파라오. 투탕카멘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며 죽은 직후부터 아예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이집트의 역사에서 철저히 지워진 비운의 파라오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일신 신앙을 신봉했다는 점에서 종교사적, 고고학적 의미가 부각되며 오히려 현대 들어서는 가장 유명한 파라오들 중 하나로 꼽힌다.

아케나톤의 무덤은 이미 오래 전에 고의적으로 훼손당했다. 아문 신관들이 일부러 아케나톤을 깎아내리기 위해 기를 쓰고 아케나톤의 무덤을 도굴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아케나톤의 미라는 확실하게 발견된 바가 없으며, 위의 해골은 실제 아케나톤의 것으로 판명난 것이 아니라 1907년에 그의 무덤 KV55에서 발견된 유골일 뿐이다.

하지만 2010년 자히 하와스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미라와 이 KV55의 유골과 유전자를 비교해본 결과 실제 아케나톤의 해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아케나톤 본인이 아닌 아케나톤의 형제일 가능성도 있다고는 하는데, 학계에서는 그냥 아케나톤의 것이라고 보는 중. 만약 만에 하나 아케나톤의 것이 아니라면 스멘크카레의 해골일 것이다.

아케나톤의 미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저 해골은 오른쪽 안와 부분이 아예 깨져나갔고 붙어있어야 할 살점들도 모두 삭아사라져버린 상태로 보존도가 매우 좋지 않다. 그래도 아케나톤이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을 정도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철저히 갈려버렸다는 걸 생각하면 그나마 해골이라도 3천년 동안 보존되었다는 것이나마 기적이라 생각해야 될 지경이다.

3.1.11. 투탕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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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무덤 자체는 1922년에 이미 발견되었으나 발굴 과정이 워낙 오래 걸려서 미라는 3년이 흐른 1925년에야 꺼낼 수 있었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감싸던 붕대를 풀 때 상당히 골치를 썩였는데, 고대 신관이 미라 위에 축복의 의미로 부은 향유가 시간이 흐르며 시꺼멓게 굳어서 미라를 관에다가 착 붙여버렸던 탓이 컸다. 게다가 향유와 연고를 지나치게 많이 부어서 미라의 붕대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기에 함부로 풀다가는 미라고 뭐고 부서져버릴 위험도 있었다. 때문에 미라의 붕대를 푸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워드 카터는 미라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발굴 도중 장신구를 떼내기 위해서 미라를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 향유가 검은색으로 굳은 데다가 수 천년의 세월로 인해 장신구들이 완전히 미라에 딱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신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미라의 팔다리를 모두 절단했고, 특히 황금 마스크를 떼낼 때는 마스크가 아예 얼굴 피부까지 달라붙어있던 터라 아예 머리를 잘라냈다. 얼굴피부와 마스크 사이로 뜨겁게 달군 칼을 집어넣어 겨우겨우 마스크를 떼어냈다고 한다. 장신구들을 모두 제거한 후에는 실로 다시 봉합했다.

미라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향유와 습기 때문에 피부 자체가 탄화되어 푸석푸석해져버렸고, 피부는 검은색으로 변질되어 수많은 잔금들이 가있었다. 독특한 모습의 두개골은 넒고 낮은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면도해서 머리카락을 싹 민 상태였고 긴 속눈썹을 가진 눈은 반쯤 뜨여있었다. 한때 뚜렷했을 콧날은 미라에 붕대를 감는 과정에서 납작하게 눌려버렸다. 콧대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콧구멍에 향유를 적신 리넨 천을 넣어두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던 모양. 윗입술은 약간 뒤로 당겨져 앞니가 그대로 드러났고 얼굴에 난 수염도 모두 깨끗하게 깎였다. 왼쪽 뺨에는 딱지처럼 내려앉은 오목한 부분이 파였고 작은 귀에는 귀걸이용 구멍이 뚫려있었다. 배꼽에서 왼쪽 엉덩이까지를 칼로 갈라 내부의 장기들을 모조리 빼낸 걸로 보이며, 장기들을 빼낸 빈 공간에는 향유를 적셔 단단하게 굳힌 리넨천을 넣어 모양을 잡았다.

미라는 1926년 무덤에서 꺼내져 부검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미라의 흉곽이 완전히 부서져 있고 머리뼈 조각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며 암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허나 1968년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본 결과 흉곽 손상과 머리뼈 손상은 투탕카멘 사후 미라화 과정에서 생겨난 손상이며,[19][20] 투탕카멘이 둔기로 머리를 맞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결론이 최종적으로 나오면서 암살설은 폐기되었다. 현재는 투탕카멘이 다리 골절, 무혈성 괴사, 말라리아 등 복합적 원인에 시달리다가 1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21]

발견 당시 투탕카멘의 성기 수직으로 직립한 모습으로 미라화되어있었다. 오시리스의 모습을 본떠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의적으로 이런 모습으로 묻었다는 주장이다. 발굴 당시 투탕카멘의 성기는 십자붕대에 따로 싸서 직립한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음모는 다 빠져서 찾아보기 어려웠고, 고환은 허벅지에 눌려서 평평해진 상태였다. 또한 1968년에 다시 CT를 찍을 때 1928년 발굴 당시에만 해도 멀쩡히 투탕카멘의 미라에 붙어있던 그의 성기가 사라져서 크게 소동이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미라를 다시 재안치하는 과정 중 성기 조각이 몸에서 떨어졌던 걸로 밝혀지며 해프닝으로 끝났다. 투탕카멘의 성기 조각은 미라를 올려놓던 모래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투탕카멘의 미라는 1926년에 DNA 검사와 기본적인 부검 절차를 끝낸 후에 가장 바깥쪽 황금관에 되돌려놓은 뒤 붉은 규암 석관에 넣어서 무덤에 다시 안치했다.[22] 대신 관광객들이 미라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석관 위에 유리 뚜껑을 씌웠다. 2007년 11월에는 무덤을 찾는 관광객들이 내뿜는 습기 때문에 미라에 곰팡이가 피는 등 파손의 위험이 높아지자 온도 조절이 가능한 유리 커버를 씌우기도 했다. 그 이래로 미라는 아직까지도 무덤 내부에 고이 잠들어있다.

3.2. 제19왕조

3.2.1. 람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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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렘헤브의 제18왕조를 끝내고 이집트 신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제19왕조의 개창자. 하지만 그의 후임 파라오인 세티 1세 람세스 2세가 워낙 유명한 편이라서 묻힌 감이 있다. 심지어 재위 기간조차도 고작 1년 정도에 불과해서 존재감이 별로 없다.

그의 미라는 상당히 수난을 겪었다. 람세스 1세의 무덤은 진작에 도굴당했고, 무덤이 털린 것을 본 아문 신관들은 붕대를 감은 다음 미라를 다시 염하고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와 함께 데이르 엘 바하리의 TT320 무덤에 재안장했다.

그러나 1860년 경 오스만 제국의 총독 대리가 그의 미라를 무덤에서 꺼내 미국인 '제임스 더글라스'에게 팔아넘겼다. 더글라스는 람세스 1세의 미라를 캐나다로 가져가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 위치한 캐나다 온타리오의 한 개인 박물관에 기증했다. 당시 아무도 그 미라가 람세스 1세의 미라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미라는 무려 130여 년 가까이 박물관에 처박혀 있었다고.

이후 박물관 내 유물들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이 미라가 람세스 1세라는 것이 밝혀졌고, 1999년에 에모리 대학교에 미화 200만 달러에 팔려나갔다. 이후 람세스 1세의 미라는 곳곳을 떠돌다가 결국 2003년 10월 24일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다. 이집트 정부에서는 국가원수에 준하는 의전으로 람세스 1세를 맞았다고 한다.

3.2.2. 세티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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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아버지, 람세스 1세가 짧은 통치 끝에 죽어버리자 흔들릴 뻔한 고대 이집트를 다잡고 안정시킨 명군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제19왕조의 진정한 의미의 개국군주라고도 할 수 있는 셈. 15년 동안 이집트를 다스렸고, 시리아로 원정을 떠나 히타이트를 견제하고 아무루 지방을 다시 이집트의 봉신국으로 삼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제18왕조 이래로 불안정했던 왕권을 다시 단단히 하면서 람세스 2세가 제 역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는, 이집트의 태종 같은 존재.

세티 1세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 내에서 가장 길고,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무덤이다. 그 보존 상태도 가장 뛰어난 편으로 모든 방과 기둥들에 다채로운 장식이 되어있는 등 볼거리도 많다. 하지만 양호한 보존상태와는 별개로 이미 오래 전에 도굴을 당해버려서, 그의 미라는 본 무덤이 아닌 데이르 엘 바하리의 DB320 무덤에서 1881년 발견됐다. 그의 미라는 이후 카이로 카이로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이집트 대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의 미라 자체는 보존 상태가 엄청 좋았다. 사망했을 당시 나이는 대략 40세 정도로 일찍 죽은 편이라고. 세티 1세의 미라는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됐는데, 원래 그랬던 건 전혀 아니고 도굴꾼들이 미라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목이 분리된 걸로 추정된다. 이후 아문 신관이 리넨 천으로 목을 다시 조심스럽게 붙여놨다. 특히 그의 심장이 가슴 오른편에서 발견된 것이 눈길을 끌었는데, 당시 관행은 가슴 왼편에 심장을 놓아두는 것이었기 때문.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세티 1세가 심장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한다. 그의 키는 약 170cm였다.

3.2.3. 람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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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최고의 파라오이자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 투탕카멘과 함께 파라오하면 인지도 쌍벽을 이루는 파라오다. 생전 아부심벨 신전, 라메세움, 피람세스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축조했고 카데시 전투 등을 통해 이집트의 강역을 역대 최대 규모로 넓혔다. 특히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고 90세가 넘도록 엄청나게 장수하며 안정된 통치 아래 이집트의 전무후무한 황금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람세스 2세의 무덤은 진작에 털려나갔지만 가장 중요한 미라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람세스 2세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무덤이었다. 허나 그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도굴꾼들의 눈에 잘 띄는 바람에 지어진지 몇십여년도 되지 않아 바로 털려나갔다. 경악한 사제들은 그의 미라를 다시 염해 대신관 피네젬 2세의 무덤에 재안치했고, 그의 미라는 이후 3,000년 동안 그 곳에서 안식을 취하다가 1881년 TT320 무덤에서 발견됐다. 이걸 알 수 있는 이유는 람세스 2세를 감싸던 아마포 붕대에 이 모든 내용이 더 쓰여있었기 때문. 현재는 이집트 대박물관에 고이 전시되어 있다.

늙은 파라오는 굳센 턱과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었으며 키는 약 170cm 정도였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처음 풀었던 가스통 마스페로는 "관자놀이에는 약간의 성긴 머리카락이 있지만, 머리카락은 상당히 두꺼워 길이가 약 5센티미터 정도 되는 매끄럽고 곧은 가닥을 형성하고 있다. 노화로 인해서 하얘진 머리는 젊은 시절 적갈색이었을 것 같은데, 방부 처리에 사용되는 향료(헤나)로 인해 연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콧수염과 턱수염은 가늘고... 색은 머리카락과 눈썹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피부는 흙빛 갈색이고 검은 검버섯이 있다... 미라의 얼굴을 보면 살아 있는 왕의 얼굴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라고 적었다.

람세스 2세의 미라는 카이로 박물관에서 전시되었으나, 좋지 않은 보존 환경 때문에 곰팡이가 피는 등 점차 훼손되어갔다. 1975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람세스 2세의 미라가 심각하게 훼손된 것을 발견하고 이집트 당국을 설득해 프랑스에서 보존, 복구 처리를 받도록 했다. 파라오의 미라는 국가원수에 걸맞은 의전을 받으면서 프랑스 파리로 옮겨졌다. 법의학자들은 미라를 보존하는 과정에서 파라오가 밝은 피부와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23] 미라는 1977년 5월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다.

1980년에 또다시 조사를 해본 결과, 람세스 2세는 말년에 상당한 지병을 주렁주렁 달고 살았다고 한다. 전투에서 입은 상처, 골절, 관절염, 혈액 순환 장애를 갖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하도 건강이 안좋아서 아예 허리를 굽히고 꼽추처럼 살아야했다고. 2004년에는 파라오의 하악골에서 심각한 크기의 구멍을 발견했다. 아마 충치 때문에 감염되어 생겨난 구멍으로 여겨지는데, 그 정도의 구멍 크기라면 고통이 엄청났을 것이라고. 워낙 하악골 농양의 예후가 심각해서 람세스 2세의 사망 원인들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람세스 2세 미라의 콧구멍에 후추 알갱이들이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람세스 2세의 콧날을 보존하고 시체가 썩지 않도록 방부 처리를 하기 위해서였을거라고.

3.2.4. 메르넵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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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후계자. 아버지 람세스 2세가 지나치게 장수한 바람에 그가 왕위에 오를 때에 이미 나이가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꿋꿋하게 장수하며 이집트를 다스렸고, 람세스 2세 사후 흔들리는 이집트를 다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만 바다 민족들이 발흥해 지중해 연안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기에 람세스 2세 시절만큼 평화로운 시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 민족의 사주를 받은 리비아 부족들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나름의 업적은 남겼던 파라오였다.

메르넵타는 관절염과 죽상동맥경화증을 앓다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원래 왕가의 계곡에 있는 KV8 무덤에 묻혔으나, 고대에 이미 도굴당하면서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KV35에 재안장됐다. 1898년 빅토르 로렛이 다른 18구의 미라들과 함께 발견했다. 당시 그의 미라를 부검한 학자 엘리엇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의 몸은 완연한 노인의 몸으로, 키는 약 171.4cm다. 메르넵타는 거의 완전한 대머리였으며 흰 머리카락이 관자놀이와 뒷머리 가장자리에만(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음) 드문드문 나있었다. 2밀리 정도의 짧고 듬성듬성한 검은 털들이 윗입술 바로 위에 약간 나있었으며 볼과 턱에 짧게 잘린 털들이 있었다. 얼굴과 전체적인 모습은 부친 람세스 2세를 연상시키나 두개골과 얼굴의 크기는 그의 할아버지 세티 1세 대왕을 더 닮았다...

3.2.5. 세티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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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그 위대한 세티 1세와 똑같은 '세티'지만 그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6년 정도 밖에 안되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이복형제 아멘메세스의 반란에 시달렸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얼마 못가서 죽었다. 심지어 그의 재위 동안 파라오의 무덤들을 포함해 수많은 무덤들이 도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 여러모로 람세스 2세 사후 점차 쇠락해가던 고대 이집트의 전형적인 파라오.

그의 무덤은 이미 오래 전에 도굴꾼들에게 털렸고, 세티 2세의 미라는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 함께 묻혔다. 부장품을 함께 묻지 않은 덕분에 안전하게 보존되다가 1898년 발견됐다. 현재는 이집트 대박물관에서 고이 전시 중이다.

3.2.6. 십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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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세티 2세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존재감없는 파라오. 딱히 알려진 것도 없고 남긴 업적도 없다.

십타의 미라는 왕가의 계곡 KV47 무덤에 안치되었으나, 역시 도굴꾼들에게 도굴당하는 바람에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KV35에 재안장됐고 1898년 발견됐다. 2021년 4월에 십타의 미라를 다른 신왕국 파라오들의 미라와 함께 이집트 대박물관으로 옮겼다. 얼굴 한 부분이 아예 바스러지는 등 미라의 보존 상태는 상당히 안좋은 편.

3.3. 제20왕조

3.3.1. 세트나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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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왕조를 끝내고 제20왕조를 개창한 파라오. 람세스 3세의 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약 3년 정도로 짧은 시기 동안 재위했지만 후임 람세스 3세가 잘 통치할 수 있도록 기반을 탄탄하게 쌓아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티 2세 십타, 투스레트 등 혼란기의 파라오들을 거치며 영락하던 이집트를 다잡은 업적을 남겼다. 이집트를 수시로 약탈하던 군벌 이르수를 토벌했고, 아문의 카르나크 신전을 복원하는 한편 도굴당한 제19왕조 파라오들의 무덤을 재봉인하는 등 민심을 다잡는 정책들을 펼쳤기에 나름 평이 좋은 명군이다.

기원전 1186년에 사망한 세트나크테는 전임 파라오 투스레트가 쓰기 위해 마련됐던 KV14 무덤에 안장됐다. 일종의 도둑 매장이었던 셈인데, 불행하게도 얼마 못가 도굴당했다. 그나마 미라는 살아남은 다른 파라오들과는 달리 세트나크테의 미라는 어디 갔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나마 KV35 무덤에서 발견된 배 속의 미라가 세트나크테의 미라가 아니냐는 추정이 있었다. 다른 파라오들도 상당수가 이 무덤에서 발견되었기에 아예 신빙성이 없는 주장은 아니었으나, 1901년 벌어진 약탈 사건으로 이 미라가 아예 파괴되어버리면서 진실은 저 너머로 사라졌다. 워낙 심하게 파괴되어서 이젠 그 미라가 세트나크테의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 저 위의 사진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지는 당시 해당 미라를 찍은 사진이다.

3.3.2. 람세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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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 일반적으로 이집트 전역, 그리고 외부 세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투사했던 마지막 파라오로 평가받는다. 30년 넘게 이집트를 다스리며 바다 민족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카르나크 신전을 포함해 수많은 신전들을 신축하고 재건했다. 외견상으로는 람세스 2세 시절의 전성기를 회복한 듯 보였을 정도. 허나 아이슬란드의 헤클라 화산 분화로 인한 기근, 비어가는 국고, 국제질서 재편 등 악재가 겹치며 이집트는 서서히 쇠락해가는 실상이었다. 역사상 기록된 세계 최초의 파업이 일어났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람세스 3세의 미라는 1886년 한 골동품 수집가가 발견했다. 원래 다른 파라오들과 함께 TT320 무덤에 합장되어 있었는데 비공식적인 루트로 밀반출된 것이다. 이후 그의 미라에 대한 부검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목 부근에 숨겨져있던 치명상이 드러났다. 신관들이 일부러 목에 붕대를 꽁꽁 싸매놨기에 발견하기 못했던 것. 카이로 대학 연구팀이 조사해본 결과 심지어 척추까지 닿을 정도로 깊숙한 상처가 있었는데, 기관, 식도 및 혈관이 싸그리 절단당해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수준의 치명상이었다고 한다. 즉 파라오가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미라 왼쪽 발가락에는 도끼 등 무거운 둔기로 잘린 상처가 있었는데, 뼈가 자가치유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죽기 직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파라오가 암살당하는 과정에서 함께 생겨난 상처일 가능성이 크다. 방부 처리자들은 잘린 발가락을 다시 붙이는 대신에 리넨으로 만든 보철물을 붙여놨다.

실제로 람세스 3세는 자기 왕비였던 티예 왕비에게 살해당했다. 티예 왕비가 제 아들 펜타웨레트 왕자를 다음 파라오로 올리기 위해 람세스 3세를 죽여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티예 왕비는 실제로 람세스 3세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지만, 한 왕족이 도망쳐 상황을 외부로 전달하는데 성공하면서 결국 그녀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간다. 티예 왕비와 펜타웨레트 왕자는 비참하게 죽었고 람세스 3세가 지정했던 정당한 후계자 람세스 4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현재 그의 미라는 이집트 대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3.3.3. 람세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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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3세의 암살 직후 왕위에 오른 파라오. 람세스 3세의 암살 과정에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다잡고 파라오에 즉위했지만 정작 즉위 후에는 딱히 남긴 업적이 없다. 람세스 3세가 죽고 난 이후부터 고대 이집트는 빠른 속도로 쇠퇴했다. 람세스 4세 시절까지만 해도 그래도 대규모 건축물들을 축조할 능력은 갖추고 있었지만, 그가 죽고 난 이후에는 그마저도 불가능해서 기존의 건물들을 개축하는 데에 그쳤다. 오래 살고 싶다는 내용의 비문들을 곳곳에 새기는 등 장수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지만 재위 6년만에 죽었다.

람세스 4세의 미라는 왕가의 계곡 KV2 무덤에 묻혔다. 허나 그의 무덤이 얼마가지 않아 도굴당하면서 신관들이 왕의 미라를 다른 곳으로 재이장했다. 람세스 4세의 미라는 1898년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인 KV35에서 발견됐다. 2021년 4월에 람세스 4세의 미라를 17구의 다른 파라오 미라들과 함께 이집트 대박물관으로 옮겨 안치했다.

3.3.4. 람세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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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4세 사후 왕위에 오른 파라오. 알려진 것도 없고 남긴 업적도 없는 흔하디흔한 혼란기의 파라오들 중 하나다. 4년 정도 이집트를 다스렸는데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아문 신관들의 권력은 지나치게 강해졌고 왕권은 빠르게 몰락했다.

이렇게 별 볼일없는 파라오지만 의외로 그의 미라는 꽤나 유명하다. 바로 역사에 기록된 세계 최초의 천연두 사망자이기 때문. 미라의 얼굴 피부에서 발견된 병변을 보면 천연두로 인한 자국들이 군데군데 찍혀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천연두로 죽은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천연두로 죽은 것이 확실시되는 사람은 람세스 5세가 세계 최초다. 업적보다 죽은 원인 때문에 더 유명해진 비운의 파라오.

그의 미라는 KV5에 묻혔으나 역시 얼마가지 않아 도굴당했기에 1898년 KV35에서 발견됐다. 현재는 이집트 대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3.3.5. 람세스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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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2개월 동안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 자기 이름을 새긴 조각상과 건축물들을 짓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정작 내치와 외치 모두에 실패한 암군이었다. 람세스 6세 시대의 이집트는 가나안 일대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아시아 쪽의 동맹국들과 봉신관계마저 청산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식민지와 동맹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오던 교역품과 조공품들이 사라지니 안그래도 휘청거리던 이집트 경제는 폭삭 무너져내렸다. 한편 피람세스의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상이집트 일대는 점차 독립적인 모습을 보였다. 람세스 6세는 제 딸인 이세트를 아문의 여사제로 보내 이들을 감시토록 했으나 아문의 대사제인 람세스낙트가 테베를 중심으로 제 세력을 확장하는 건 막지 못했다.

세티 1세의 미라가 보존이 가장 잘 된 미라로 유명하다면, 람세스 6세의 미라는 반대로 보존상태가 가장 안좋은 미라로 유명하다. 도굴꾼들은 람세스 6세의 미라를 아예 뜯어버렸고, 그의 미라는 입 부분이 아예 뜯겨져나간 참혹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도굴꾼들은 도끼로 그의 몸을 토막냈고 람세스 6세의 미라는 모든 파라오들 중에서도 최악 수준으로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이후 람세스 11세가 굴러다니는 조각들을 다시 염해 KV35로 옮겼고, 1898년에 재발견됐다. 부검결과 죽을 당시 상당한 지병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집트 대박물관에 있다.

의외로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도록 만들어준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을 짓던 인부들은 본의 아니게 투탕카멘의 무덤 바로 위에 거주지를 짓고 살았는데, 이 덕분에 도굴꾼들이 차마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해내지 못했던 것. 대신 정작 자기 무덤은 정말 화끈하게 털려서 매장된지 20년도 안 돼서 싹다 비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석관은 250조각나서 산산히 부서졌고 부장품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다만 무덤 벽화의 보존 상태는 훌륭한 편이라 왕가의 계곡을 찾는 관광객들이 한 번쯤 들르는 명소다.

3.3.6. 람세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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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이집트를 다스린 신왕국의 파라오. 하지만 그 재위기간에 걸맞지 않게 내치 능력은 부족했고 이집트는 꾸준하게 쇠퇴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가장 특기할 점이 왕릉 도굴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미 무너져가는 이집트의 당대 상황이 짐작 가능하다. 재위 16년차 쯤에 왕가의 계곡에 조성된 왕릉들을 모두 전수조사했는데, 이때 이미 대부분의 무덤들이 처참하게 도굴된 상태라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경악한 람세스 9세는 무덤들을 재봉인하고 총독들에게 잘 관리하라고 당부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람세스 9세의 미라는 KV9 무덤에 묻혔다. 람세스 2세의 무덤 바로 맞은편에 묻힌 걸로 보아 위대한 파라오를 본받고자 했던 람세스 9세의 의중이 반영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무덤은 얼마가지 않아 도굴당했고 람세스 9세의 미라는 TT320 무덤으로 옮겨져 재안장됐다. 람세스 9세의 미라는 1881년 발견됐을 때도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1912년까지만 해도 학자들조차 이 미라가 람세스 9세의 미라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이후 고고학자들은 이 미라의 붕대를 풀어보는 과정에서 미라의 신원을 람세스 9세로 특정해냈다. 시아문 왕 시절에 다시 염한 붕대에 '라 카엠와세트'라는 단어가 쓰여져 있었기 때문. 이 이름을 쓴 파라오는 람세스 9세 혹은 람세스 11세였는데, 람세스 11세는 테베가 아닌 하이집트 지방에 묻혔을 가능성이 커서 해당 미라는 자연스레 람세스 9세의 미라인 것으로 결론났다.

람세스 9세는 죽었을 당시 약 50세였다. 또한 미라는 도굴꾼들이 헤집고 간 바람에 팔다리와 목이 아예 부러져버린 상태였으며, 코는 아예 사라졌다. 2021년에는 다른 파라오의 미라들과 함께 이집트 대박물관으로 재안치했다.

3.4. 신왕국 시대 이외의 파라오

3.4.1. 세케넨레 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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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2중간기 시대의 파라오. 이집트를 침공해 점령한 힉소스인들을 몰아내려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그의 염원은 후계자인 아흐모세 1세가 대신 이뤄줬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으니, 역대급으로 흉측하게 생긴 그의 미라 때문이다.

미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끔찍하게 죽었다. 사망 당시의 나이는 약 40세로 추정되며, 두세명의 사람들이 그를 포위하고 둔기로 죽였다고 한다. 일단 도끼로 왼쪽 뺨 일부가 먼저 잘려나가고, 이빨이 드러났으며 턱이 부러져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번의 타격으로 두개골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며, 단검 혹은 투창이 오른쪽 눈 윗부분의 이마를 베었을 것이다. 그의 시신은 그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부패가 되고 있던 상태였다. 결국 신하들은 급하게 방부 처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게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방부 처리가 되어 현재까지 미라가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혐오스럽긴 해도 이미 부패된 상태에 심각하게 훼손된 시체를 가지고 미라를 만들었다는 점 에서 당대 이집트의 미라제작 기술이 얼마나 수준 높았는지 짐작케 만드는 미라이다. 다만 방부처리를 제대로 하진 못한 탓에 전시당시 시취가 심하게 났다고.

고통과 원한 속에서 죽어간 파라오답게 압도적으로 무섭게 생긴 미라로 꼽힌다. 그래서 공포영화 미이라 시리즈의 주인공 이모텝의 외형을 창조할 때 일부러 세케넨레 타오 미라의 외형을 참고했다고 한다.

3.4.2. 프수센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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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수센네스 1세 이집트 제3중간기의 파라오로, 무려 46년 동안이나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다. 하지만 남긴 업적도 없고 한 것도 없는 무색무취의 파라오다. 그가 유명한 까닭은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 투탕카멘조차 약간 무덤이 도굴당했는데 이 프수센네스 1세는 무덤이 한 번도 털린 적이 없다. 하지만 투탕카멘이 최전성기인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인데 반해 프수센네스 1세는 쇠퇴기의 파라오고, 그마저도 물에 젖어서 다 썩어버린 탓에 남아있는 유물이 많지 않다. 특히 그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가 1939년 언저리라서 조용히 묻혔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잘 침수되는 곳에 지어진 탓에 보존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 건조함이 생명인 미라가 물에 흠뻑 젖어버리는 걸 수없이 반복하면서 싹 다 썩어버렸다. 살점과 붕대는 이미 사라졌고 남은 것은 뼈다귀와 유골 뿐이다.

은의 파라오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프수센네스 1세의 시신은 순은으로 만든 관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은이 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었기에 비싼 은으로 관을 만들었다는 건 프수센네스 1세의 왕권이 다른 파라오들에 비해서는 그래도 괜찮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래봤자 투탕카멘의 황금 관에 비해서는 세공도나 가치가 확연히 떨어진다. 프수센네스 1세의 황금 데스마스크만 봐도 투탕카멘의 가면과 격차가 심각한 수준.

3.4.3. 아메네모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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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수센네스 1세의 후계자. 10년 정도 왕좌를 지키다가 세상을 뜬 파라오로 딱히 이룬 업적은 없다.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으면 고고학자들의 기록 속에서나 존재했을 수많은 파라오들 중 하나.

아메네모페는 기원전 990년 경에 사망해 당시 수도였던 타니스 왕실묘지-4(NRT-4)에 묻혔다. 무덤이라곤 해도 방이 하나밖에 없었던 매우 초라한 무덤이었는데 위치마저도 최악이어서 걸핏하면 물이 들어찼다가 빠지는 걸 반복하자, 이걸 보다 못한 후대 파라오인 시아문이 사제들을 시켜 관을 수습해 상태가 그나마 나았던 아버지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재매장했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으면서 합장되어있던 아메네모페의 유골 역시 그대로 발견됐다.

화강암 석관 안에는 황금 잎사귀로 장식된 금박 목제 관이 2겹으로 들어있었으며 그 안에 마침내 아메네모페의 미라가... 있어야 했지만 무덤이 잦은 침수를 겪은 탓에 미라는 다 썩어버리고 뼈와 부장품만 남아있었다.

아메네모페는 2개의 황금 마스크, 2개의 목걸이, 칠보 칼라, 팔찌, 반지 등 다양한 금제 장신구들과 함께 발견됐다. 하지만 이 장신구들마저 본인을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아버지 프수센네스 1세의 유물들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아메네모페가 얼마나 초라한 파라오였는지 짐작 가능하다. 그나마 신왕국의 존재감 없던 파라오 투탕카멘과 비교해도 지나칠 정도로 초라할 정도다. 그나마 아버지 프수센네스 1세는 통째로 순은을 녹여만든 관에 묻혔지만 아메네모페는 파라오의 격에 한참 떨어지는 금박을 입힌 목재 관에 묻혔다. 게다가 그의 마스크도 나무에다가 금박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

3.4.4. 셰숑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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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22왕조의 수많은 이름없는 파라오들 중 하나. 2~3년 정도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였는데 워낙 기록이 없어서 이 자의 출신이 불분명하다. 전대 파라오인 오소르콘 1세의 아들이라는 설, 제22왕조의 시조인 셰숑크 1세의 아들이라는 설, 아예 왕가와 관련없는 가문 출신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사후에 매장된 무덤에 물이 끊임없이 들이찼다가 빠져서 훼손이 심하자 후대에 신관들이 근처에 있던 다른 무덤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았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의 대기실에 대충 재매장했고, 현대에 재발견되었다.

연구팀이 셰숑크 2세의 미라를 분석해본 결과 머리 부상으로 인한 대규모 패혈증 감염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셰숑크 2세의 은관 아래에서는 식물이 자라던 흔적이 있었는데, 이는 곧 식물이 자랄만큼 습하고 물이 차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셰숑크 2세의 무덤에 물이 차고 침수되는 바람에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으로 옮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은관 내에 있는 왕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관에는 잔금이 잔뜩 가 있어서 재매장한 신관들이 대충 관을 옮겼던 걸로 보인다.

그의 미라 역시 물에 수없이 침수되고 빠지기를 반복해서 살은 다 썩었고 유골 뼈다귀 밖에 안 남았다.

4. 기타 왕족들의 미라

4.1. 영거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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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어머니. 또한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와 티예 왕비 사이에서 낳은 딸이기도 하다. 발견 초기에는 네페르티티 왕비가 아닐까 추정되기도 했으나 DNA 대조조사 결과 투탕카멘의 어머니이자 아멘호테프 3세와 티예 왕비 사이의 딸임이 확실해졌기에, 영거 레이디가 네페르티티라는 가설은 반쯤 폐기된 상태다.

영거 레이디 미라는 1898년 KV35 무덤에서 두 개의 다른 여성 미라들과 함께 발견됐다. 당시 그녀의 미라를 발견한 빅토르 로렛은 영거 레이디가 여성이 아닌 남성 미라라고 생각했다. 여성 미라에게서는 으레 보이는 긴 머리카락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후일 추가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여성의 골격임이 확실하고, 남성기가 발견되지 않음에 따라 이 미라가 생전 여자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미라의 키는 158cm, 사망 당시 25세~35세 사이였다.

영거 레이디 미라는 왼쪽 뺨과 입에 큰 구멍이 뚫렸다. 누가봐도 도굴꾼이 한 짓이라고 여겨졌지만, 연구 결과 생전에 입은 부상으로 입은 상처라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전차 충돌, 말의 발길질, 도끼로 인한 타격 등 원인으로 추정되는 건 많다. 확실한 건 이 상처로 인해서 영거 레이디가 사망했다는 점이다. 치유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안면 뼈와 치아 상당수가 사라질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이었기에 이런 상처를 입고 살아남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뺨과 입에 뚫린 구멍은 살아있을 때 생긴 상처지만 흉곽에 뚫린 거대한 구멍은 도굴꾼의 소행이다. 다만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흉곽 속에 남아있었고 횡격막 역시 제거되지 않았다. 방부처리업자들은 그녀의 왼쪽 사타구니를 절개해 그 곳으로 내장을 빼냈다. 골반 횡격막이 넓게 열려있고 수지로 얼룩져있는 것이 그 증거. 오른 엉덩이 뒤쪽에는 피하 충전재가 있었고, 골반에는 작은 골절이 있었으며 다리도 약간 손상된 상태였다. 도굴꾼들 때문에 두 발의 앞쪽 절반은 아예 사라진 상태다.

미라의 오른팔은 아예 사라졌다. 도굴꾼들이 미라를 뒤적거리면서 떼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KV35 무덤 내부에서 영거 레이디의 팔로 추정되는 팔 하나가 발견되었다. 영거 레이디의 오른팔은 곧게 쭉 편 상태였다고.

영거 레이디의 정체는 추측만 무성했다. 누구는 네페르티티의 미라라고도 했고 아케나톤의 둘째 부인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DNA 조사 결과, 영거 레이디는 투탕카멘의 어머니이자 아멘호테프 3세 - 티예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딸임이 확실해졌다. 이로써 네페르티티일 가능성은 팍 줄어들었는데, 네페르티티가 '왕의 딸'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 현대 학계에서는 아멘호테프 3세의 딸들 중 하나인 네베타나 베케타텐,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을 높게 치며 아케나톤의 친누이이자 아내가 아니었을까 예상하고 있다. 당대 근친혼이 성행했던 고대 이집트에서 누나동생끼리 결혼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케나톤과 결혼한 영거 레이디가 투탕카멘을 낳았던 것이다.

4.2. 티예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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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호테프 3세의 아내이자 이집트의 왕비. 아케나톤의 어머니이자 투탕카멘의 할머니. 위에 언급한 영거 레이디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KV35 무덤에서 영거 레이디 미라와 함께 발견됐고 이후 영거 레이디 미라의 어머니임이 밝혀졌다. 40년 넘게 이집트 왕비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행사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티예 왕비의 조언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그 아들 아케나톤 역시 티예 왕비의 조언을 받아 국정을 운영했다. 미탄니로 보내는 외교문서에까지 언급된걸 보면 국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죽은 이후에는 아마르나의 무덤에 묻혔으나 도굴당해 KV35 무덤으로 이장됐다.

이 미라는 영거 레이디와 함께 발견되어 '엘더 레이디'라고 불렀다. 남자로 오해받은 영거 레이디와는 달리 풍성한 갈색 머릿결 덕분에 누가봐도 여자 미라라는게 보인다. 고대 이집트의 가장 대표적인 여자 미라로 꼽히기도 한다. 2010년 연구를 통해서 그녀의 생전 키가 145cm, 사망 당시 40~50세 정도였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후 카이로 박물관에서 전시되다가 현재는 이집트 대박물관에서 조용히 안식을 취하고 있다.

티예 왕비가 투탕카멘의 할머니이기 때문에,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티예 왕비의 머리카락이 발견된 적이 있다.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조그마한 관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됐는데, 그 안에는 갈색 머리카락 한터럭이 들어있었다. 아마 사랑하는 할머니의 유품이었을 것이다. 이 투탕카멘 무덤에서 나온 머리카락과 엘더 레이디 미라의 머리카락의 DNA를 비교하는 식으로 엘더 레이디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4.3. 펜타웨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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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비명지르는 미라. 마치 위를 쳐다보며 절규하는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어 유명하다.

사실 이 미라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 미라의 정체는 바로 람세스 3세의 아들 '펜타웨레트' 왕자다. 펜타웨레트 왕자는 왕위 계승서열에 불만을 품고 제 어머니와 함께 람세스 3세 암살을 시도했는데, 왕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중간에 계획이 틀어지며 왕위를 물려받는데는 실패했다. 왕을 죽이려하는 최악의 중죄를 지었으니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한건 당연지사. 그나마 왕족 출신이라는 걸 감안해서 자살로 형을 낮춰줬다고 한다.

이름인 팬타웨레트도 본명이 아니라 해당 사건의 재판 기록에서 사용된 멸칭만이 남아서 전해진 것으로, '위대한 어머니에게 속한 자'라는 뜻이다. 즉 어머니와 공모해 난을 일으켰으니 '마마보이' 내지는 '애미 한번 기똥차게 둔 놈' 수준의 모욕인 것.

그의 시신은 나 기본적인 장기조차 제대로 적출이 되지 않은 채 대단히 부적절한 과정을 거쳐 미라가 됐다. 애초에 반역자 따위에게 제대로 된 미라화 과정을 치러 줄 이유가 없으니 아무렇게나 막 미라를 만든 것이다. 미라조차도 관이 아닌 불결한 양이나 염소 가죽으로 싸인 채 대충 묻혀있었고 왕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충 매장되어 있었다.

DNA 조사 기법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 미라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람세스 3세 미라와 DNA 대조가 가능해지면서 이 미라가 람세스 3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펜타웨레트 왕자의 미라라는 것이 확정났다.

그나마 펜타웨레트 왕자 정도면 음모에 가담한 다른 공모자들에 비해서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이다. 다른 공모자들은 아예 내세에서 부활할 수 없도록 시체를 불에 태워버리거나 거리에 내놓고 썩혔다. 시신이 없으면 내세에서 부활할 수 없다고 굳게 믿던 고대 이집트인들이었는데, 펜타웨레트 왕자는 왕족이라는 점을 참작해서 미라를 조잡하게나마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목이 졸리거나 목매달아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죽을 당시 나이가 18~20세 정도였다.


[1] 다만 미라가 멀쩡히 남아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의 미라를 싸고 있는 붕대 사이사이에도 보물들을 끼워넣었는데, 이를 잘 알고 있던 도굴꾼들은 미라의 붕대를 마구 풀어헤쳤고 이 과정에서 미라가 상당히 훼손됐다. [2] DB320 무덤이라고도 한다. 다만 TT320 무덤이 공식적으로는 맞는 표현이다. [3] 람세스 1세의 미라가 이 시기에 밀반출되었다가 2003년에서야 그 정체가 확인되어 이집트로 돌아왔다. [4] TT320 무덤에서 10구( 세케넨레 타오는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가 아니다), KV35 무덤에서 9구, KV60에서 발견된 하트셉수트의 미라 1구, 투탕카멘의 미라 1구 이렇게 합쳐서 21구다. [5] 다만 세트나크테 미라의 경우 1901년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약탈로 인해서 파괴당했다. 몇 천년을 겨우 보존되어 살아남은 파라오 미라의 최후치고는 지나치게 비참하게 끝나버린 셈. [6] TT320 무덤에 함께 안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 얼굴 마스크 보호를 위해 일부러 붕대를 풀지 않았다. [7] 투탕카멘 무덤 발굴로 유명한 하워드 카터가 발견했다. [8] 원래 KV35는 아멘호테프 2세의 묘였는데, 훗날 후임 파라오들의 묘가 다 도굴당하면서 여기에 한꺼번에 재안장했다. 그래서 아래를 보면 투트모세 4세, 아멘호테프 3세, 람세스 4세 등등 여기서 발견된 파라오들의 미라가 매우 많다. [9] 이걸 '영거 레이디' 미라라고 부른다. 영거 레이디가 투탕카멘의 어머니이자 아케나톤의 아내라는 점은 확실하게 밝혀졌는데 이게 네페르티티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실 추가조사 결과 네페르티티일 가능성은 꽤나 줄어든 상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거 레이디' 문단 참조. [10] 원래 TT320 무덤에 합장되어 있었는데 비공식적인 루트로 밀반출. [11] 이거 이전의 것은 이미 다 고대에 털리고도 남았다. [12] 대공공(foramen magnum)은 두개골 의 후두골에 있는 크고 타원형의 구멍. [13] 제21왕조 시대에 도굴된 무덤에서 다시 미라를 붕대로 감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14] 아마 생전 편하게 걷거나 운동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5] 다른 파라오의 미라들은 바닥에 나뒹구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처참했다. 고고학자들이 붕대를 풀다가 미라가 부서질까봐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할 정도였다. [16] 다만 미라화 과정에서 키가 쪼그라든 것을 감안하면 161cm보다는 훨씬 컸을 것이다. [17]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그 하워드 카터가 맞다. [18] 고고학자들은 이게 투트모세 4세의 부족했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일화라고 생각한다. [19]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투탕카멘의 미라를 만든 사제들이 미숙한 초보들이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한다. 파라오의 미라를 만드는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보통 흔치 않기 때문이다. [20] 만약 머리뼈 조각이 투탕카멘이 살아있을 당시에 부서져 떨어져나온 조각이라면 이 뼛조각은 미라 제작 과정에서 부어진 향유에 묻혀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뼛조각은 따로 떨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고고학자들은 아마 미라 붕대를 푸는 과정에서 실수로 떨어진 조각이라고 결론내렸다. [21] 투탕카멘은 열성 적혈구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말라리아에 상대적으로 더 취약했을 것이라고 한다. [22] 투탕카멘의 미라가 무덤 밖으로 나와있던 시간은 1922년 이래로 지금까지도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다른 부장품들은 모두 무덤 밖으로 꺼냈어도 미라만큼은 무덤에 고이 보관하는 중이다. [23] 프랑스 학자들은 손에 들어온 위대한 파라오의 미라를 보고 욕구를 참지 못하고 미라의 머리카락이나 신체 조직을 몰래 일부 떼내가버렸다. 그래서 2006년에는 람세스 2세의 머리카락을 매매하려던 프랑스 남성이 체포된 적도 있다. 알고보니 당시 보존 작업에 참여했던 남자의 부친이 몰래 람세스 2세의 머리카락을 슬쩍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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